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6215

당신의 일상은 반복인가, 변주인가? 당신의 일상은 반복인가, 변주인가? 어제는 오랜만에 쉬엄쉬엄 월명산을 산책했다. 산책로에 핀 꽃무릇 무리를 보며 가을이 왔음을 실감했다. 같은 꽃이 무리 지어 피어 있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저마다 조금씩 다른 각도로 고개를 젖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좀처럼 며칠간 읽은 책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빵충 사육 준수 사항』을 읽으면서 문득 자괴감이 들었다. 내가 쓴 책들과 자꾸 비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 책들은 대체로 천천히 읽어야 하는 책이다. 인물의 마음이나 관계, 분위기를 따라가며 오래 머물러야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초반과 달리 후반부로 갈수록 속도가 엄청나게 붙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하면서 계속 책장을 넘기게 되었다. 그걸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불.. 2026. 9. 21.
『빵충 사육 준수 사항』을 읽고 『빵충 사육 준수 사항』을 읽고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어떤 모임에서 선정된 책이라 읽기 시작했다. 처음 이 책을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제목이었다. 『빵충 사육 준수 사항』. 무슨 이야기인지 쉽게 짐작하기 어려운 제목이었고, 처음부터 흥미가 생겼던 것은 아니었다. 초반에는 오히려 조금 지루했다. 주인공 김정한이 자신의 삶에서 무엇인가를 해보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다시 다른 것을 선택하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트럼펫을 연주하던 정한은 음악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려워지자 농사를 선택하고, 그것도 실패하자 새로운 기회로 '빵충'을 만난다. 처음에는 새로운 돌파구처럼 보였던 이 사업은 곧 통제할 수 없는 문제를 만들어낸다. 생산이 늘어나고 상황이 꼬이면서 빵충은 단순한 사육 대상을 넘어 사람들의.. 2026. 9. 20.
우주와 바퀴벌레 사이 우주와 바퀴벌레 사이 나는 핵심교양으로 '생명과학의 이해'라는 강의를 수강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수업은 나에게 꽤 힘겹다. 원자, 엔트로피, 세포호흡, ATP 같은 낯선 용어들이 매주 쏟아지고, 문과적 사고에 오래 길들여진 나에게, 그것도 철학과에 다니는 나에게는 어떤 강의 제목만 봐도 무슨 내용인지 감이 잘 오지 않을 때가 많았다. 지금까지 배운 내용은 과학적 방법론의 기초, 물과 생체 분자, 세포의 구조와 물질 수송, 그리고 효소와 물질대사에 이르렀는데, 솔직히 개념 하나하나를 온전히 이해했다기보다는 겨우 따라가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런데 지난 강의 시간에 교수님께서 "우리의 몸은 우주다"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나도 모르게 귀가 번쩍 뜨였다. 낯설고 딱딱하게만 느껴졌던 용어들.. 2026. 9. 17.
차별은 감정이 아니라 절차였다 차별은 감정이 아니라 절차였다 3주차 뉴욕 베스트셀러 읽기 강의 수업을 받았다. 이번 주에는 《태어난 게 범죄》 2장을 다뤘는데, 지금까지 막연히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인종 차별 정책이 있었다는 것만을 알고 있었던 나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설계된' 제도였는지 알게 된 시간이었다. 아프리카너 정부가 공식 위원단을 꾸려 호주, 네덜란드, 미국 등 다른 식민지 정책을 가진 나라들의 인종차별 사례를 조사하고, 그중 무엇이 효과적이었는지를 연구한 뒤 이를 집대성해 만들었다는 대목에서는 소름이 돋았다. 차별이란 늘 무지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즉흥적인 감정의 결과라고 막연히 생각해왔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원주민 강제 이주, 노예제, 인종 분리 정책 등 각 나라가 개별적으로 저질러온 억압의 역사를.. 2026. 9. 17.
헤테로토피아, 낭독회에서 만나다 헤테로토피아, 낭독회에서 만나다 어제 오랜만에 월명동 마리서사에서 세미콜론의 『낮술, 낭독』 북콘서트가 열렸다. 이 책은 민음사 편집자 세 사람이 8년간 이어온 사내 모임 '낮술낭독회'의 기록을 담은 것으로, 저자 중 한 명인 민음사 편집자 이한솔이 직접 푸코의 헤테로토피아에 관한 부분을 읽어주었다. 그 낭독을 듣는 순간, 오래전에 어렴풋이 알고 있던 개념 하나가 갑자기 또렷하게 되살아나면서, 뜻밖에도 내 삶의 어떤 장면들이 새롭게 읽히기 시작했다. 미셸 푸코는 1967년에 한 건축가 모임에서 강연을 했는데, 이때 이야기한 내용이 나중에 "다른 공간들"이라는 글로 정리되어 나온다. 여기서 나온 개념이 헤테로토피아다. 좀 낯선 말이지만 차근차근 풀어보면 사실 우리가 일상에서 종종 마주치는 감각을 가리키는 .. 2026. 9. 13.
전라도와 호남 나는 이번 학기 '호남지역의 문화와 사상'이라는 과목을 수강하고 있다. 이번 주에는 내가 사는 지역이 '전라도' 또는 '호남'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수업이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조상현(전남대학교 인문역량강화사업단 학술연구교수)의 논문 「전라도 별칭 '호남(湖南)'의 연원(淵源)」을 읽고 정리해보았다. '전라도(全羅道)'와 '호남(湖南)'은 사전적으로는 완전히 같은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그 성격은 다르다. 전라도가 국가에서 정한 공식 행정 지명으로서 전주(全)와 나주(羅)라는 계수관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와 조합한 것이라면, 호남은 언중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별칭으로서 '호수의 남쪽'이라는 자연 지형을 기준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두 명명 방식에는 서로 다른 힘의 방향이 담겨 있다. '전라도.. 2026. 9.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