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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헬레니즘 회의주의 —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와 문헌 [웹소설] 짜라투스트라 교수님의 철학 수업: F학점은 사양한다. 49화. 헬레니즘 회의주의 —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와 문헌 짜교수가 들어서자마자 아무 말 없이 칠판에 숫자 하나를 적었다. [ 2세기 ] 분필을 내려놓고 학생들을 천천히 훑었다. 뭔가를 기다리는 표정이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오늘 만날 인물은 피론보다 500년 뒤의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피론의 철학을 훨씬 희미하게 알았을 것이다. 철학의 역사는 위대한 사상 자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을 보존하고 전달하고, 때로는 논쟁하면서 살려낸 사람들에 의해서도 형성된다. 오늘은 그런 인물을 만난다."  오늘의 퀘스트부터였다. 확신했던 것이 없어도 살 수 있는지.  RM이 노트를 펼쳤다. RM: "제가 옳다고 확신했던 .. 2026. 4. 27.
김기덕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기덕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아이가 물고기에게 돌을 매단다. 천진하고 잔혹하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 그날 밤 노스님이 아이의 등에 돌을 매단다. 이것이 영화의 전부다. 나머지는 그 돌의 무게가 한 생애를 통과하는 이야기다. 김기덕(1960~2020)은 경상북도 봉화에서 태어났다. 정규 영화 교육을 받지 않았고,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 해병대에서 복무했으며, 1993년 프랑스로 건너가 그림을 배웠다. 귀국 후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해 1996년 첫 영화 《악어》를 발표했고, 이후 거의 매년 한 편씩 영화를 만들었다. 그의 영화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주목받았는데, 베를린, 베네치아, 칸의 심사위원들이 그의 영화를 선택했다. 비평가들은 그의 영화에서 폭력과 침묵이 공존하는 .. 2026. 4. 27.
정지용 《바다》 정지용 《바다》 바다는 뿔뿔이 달아나려고 한다. 대지(大地)라는 잔을 박차고 싶은 호기(豪氣) 있는 물결이여. — 정지용, 〈바다 1〉 정지용(1902~1950)은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났다. 휘문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일본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유학 시절 영미 모더니즘 시를 집중적으로 읽었다. T.S. 엘리엇과 이미지즘 시인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쓴 것은 영어가 아니라 조선어였다. 모더니즘의 방법론을 조선어의 결에 이식했다. 1935년 첫 시집 《정지용 시집》을 발표했다. 김기림은 이 시집을 두고 조선 현대시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과장이 아니었다. 정지용 이전과 이후의 조선어 시는 달랐다. 그는 조선어가 포착할 수 있는 감각의 범위를 넓혔고, 그 감각이 가장 집.. 2026. 4. 26.
원효: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 원효: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 어둠 속에서 마신 물이 달고 시원했다. 다음 날 아침, 그것이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구역질이 났다. 물이 변한 것이 아니었다. 마음이 변한 것이었다. 원효는 그 자리에서 유학을 포기했다. 당나라에서 배울 것이 이미 없었다. 원효(617~686)는 신라 압량군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지역이다. 어린 시절 이름은 서당(誓幢)이었다. 출가 후 원효라는 법명을 받았다. 원효는 새벽빛이라는 뜻이다. 661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향하던 길이었다. 두 번째 시도였다. 첫 번째는 10여 년 전 요동에서 고구려군에 잡혀 돌아온 것이었다. 이번에는 뱃길을 택했다. 당항성 근처에서 비를 만나 어둠 속에 손 닿는 것을 마시고 잠들었다. 그리고 아침이 왔다.. 2026. 4. 26.
케틸 비외른스타드 「The Sea」: 수평선이 된 피아노 케틸 비외른스타드 「The Sea」: 수평선이 된 피아노 항해자가 사라진 뒤의 바다가 있다. 무채색이고 방향이 없으며 누구를 기다리지도 않는다. 케틸 비외른스타드의 《The Sea》는 그 바다다. 비외른스타드는 1952년 오슬로에서 태어났다. 피아니스트이자 소설가다. 열여섯 살에 오슬로 필하모닉과 바르토크 3번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하며 데뷔했다. 당시 오슬로 음악계에서 이 소년의 등장은 조용한 충격이었다. 바르토크의 협주곡은 기교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곡이다. 감각의 밀도가 받쳐주지 않으면 음표가 공중에서 흩어진다. 열여섯 살의 비외른스타드는 그 밀도를 이미 갖고 있었다. 아말리에 크리스티와 로베르트 리플링에게 사사했고, 런던과 파리에서도 수학했다. 그러나 그는 클래식 무대에 머물지 않았다. 19.. 2026. 4. 26.
48화. 헬레니즘 회의주의 — 판단 중지(에포케)와 아타락시아 [웹소설] 짜라투스트라 교수님의 철학 수업: F학점은 사양한다. 48화. 헬레니즘 회의주의 — 판단 중지(에포케)와 아타락시아 짜교수가 들어서기 전이었다. 학생들은 이미 자리에 앉아 노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판단을 유보해 본 순간을 기록해 오는 퀘스트였다. 교실 안은 조용했지만 그 조용함이 긴장을 품고 있었다. 자신이 적어온 것이 맞는지 틀리는지, 판단을 유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확신하지 못한 채로 앉아 있는 얼굴들이었다. 짜교수가 들어서며 자리에 앉지 않고 교탁 앞에 섰다. “퀘스트. 판단을 유보한 순간. 정국부터.” 정국이 노트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정국: “연습 중에 누군가 제 방식이 틀렸다고 했어요. 보통은 바로 반응했을 텐데, 어제는 잠깐 멈췄어요. 판단을 유보해 보려고요... 2026. 4.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