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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창작들29

(20화) 오후 네 시 (20화) 오후 네 시  “그럼, 1998년 3월 20일 편지 읽는다.” 지원은 무작정 편지 노트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그때, 지원은 아마 다섯 살쯤 되었을 것이다. 편지를 읽고 난 후, 지원은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자신이 예쁘다고 자랑하던 부분에 또 한 번 감동했다. “영숙씨, 내가 그렇게 예뻤어?” 지원은 할머니가 늘 ‘우리 공주님, 우리 공주님, 흑진주 공주님’이라 부르던 시절이 엊그제 같았다. 연약해진 할머니를 보니, 인생의 무상함이 실감났다. 할머니는 지원이 읽은 연애편지에 감회에 젖었는지, 눈곱 낀 눈가로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 지원은 자신이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 들킬까봐 모른 척하며 다음 편지를 읽었다. 1998년 3월 23일. 이 편지에는 대부분 지원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유치.. 2025. 3. 14.
(19화) 오후 네 시 (19화) 오후 네 시  “영숙씨, 나 왔어요.” 지원은 할머니를 놀래 줄 생각으로 밝게 소리쳤다. 하지만 할머니의 침대는 비어 있었다. 순간 두려운 생각이 몰려왔다. 다급히 사무실을 향해 뛰어갔다. “저희 할머니 어디 계세요?” 문을 열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 깜짝 놀란 사무실 직원이 지원을 올려다보았다. “아, 햇살이 좋아서 산책을 가셨습니다. 다른 직원이 뒤뜰로 모시고 나간 것 같아요.” 머쓱해진 지원은 서둘러 요양원 뒤뜰로 향했다. 할머니는 지원이 올 시간이면 늘 기다리곤 했는데, 오늘은 먼저 나가 계셨다.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아래, 할머니는 혼자서 코스모스를 바라보며 햇빛을 받고 있었다. “영숙씨, 놀랐잖아요.” 지원이 성큼 걸어가며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할.. 2025. 3. 13.
(18화) 오후 네 시 (18화) 오후 네 시 “엄마가 그런 말엔 대답하지 말랬는데……” 지원은 신아의 대답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신아 엄마가 괜히 캐묻지 말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이제 뭐 할까?" 지원이 분위기를 바꾸려 하자, 새아가 신이 나서 말했다. "언니, 우리 월명공원에 잉어 보러 가요!" "월명공원에 잉어가 있어?" 지원은 산에 무슨 잉어가 있을까 싶어 의아해했다. "언니, 월명공원 호수, 거기 나무다리가 있고, 나무랑 연꽃이 많아요. 빨간 잉어들도 살고 있어요. 아빠가 그곳이 잉어네 마을이래요. 잉어들도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고모, 이모랑 대가족으로 산대요." 새아가 열심히 설명했다. "에이, 바보. 아빠 말을 그대로 믿어? 잉어는 엄마 아빠랑만 살아. 그렇죠, 언니?" 신아가 확인하듯 지원을 .. 2025. 3. 12.
(17화) 오후 네 시 (17화)  오후 네 시 지원은 택시를 타고 은파 호숫가의 스파케티 집에 도착했다. 늘 한번쯤 와보고 싶었던 곳이다. 친구들이 가족들과 함께 다녀왔다며 자랑을 할 때마다 언젠가 자신도 누군가와 함께 꼭 다녀오겠다고, 마치 버킷리스트처럼 여기던 곳이었으나, 만만치 않은 음식값 때문에 마음뿐이었던 곳, 오늘은 신아 엄마의 카드가 있어 든든했다. “어? 우리 엄마랑 아빠 단골 가게네! 언니, 여기 맞아요. 스파게티랑 피자가 진짜 맛있어요.” 신아는 자신이 자주 오던 곳이라는 사실이 기쁜지 먼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새아는 지원의 손을 잡아끌며 신아를 따라갔다. “어, 꼬마 공주님들 왔네? 오늘은 엄마랑 같이 안 왔니?” 지배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아이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니요, 오늘은 언니랑 왔어요.. 2025. 3. 11.
(16화) 오후 네 시 “아이고, 우리 공주님들, 벌써 언니가 맘에 들었나 보네. 지원씨 임무 인계! 즐겁게 놀아요. 시간이 없어서 나는 그만. 지원씨 몫으로 커피와 햄버거 미리 주문해 놓았으니 찾아서 즐거운 시간 보내요.” 대답할 틈도 없이, 아이들의 엄마는 두 아이의 이마에 뽀뽀를 하고, 지원에게 가벼운 손짓을 하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지원도 아이들에 의해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그들의 엄마는 텔레비전에서 본 적 있는 연두색 오픈카를 타고 떠나고 있었다. 덮개를 모두 열어놓고, 샹송인지, 뭔지 모를 노래가 흘러나왔다. 지원은 그 모습을 보며 잠시,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엄마, 맞아?” 지원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아이들을 향해 웃으며 물었다. “네, 우리 ‘하니’에요.” 이건 또 .. 2025. 3. 10.
(15화) 오후 네 시 (15화) 오후 네 시   아이들을 좋아해서 시작한 돌봄 활동은 의외로 적성에 잘 맞았다. 가끔 부모님들이나 친구의 소개로 새로운 아이들을 맡게 되기도 했다. 이번 주 일요일에는 초등학교 1학년과 3학년 자매를 처음 돌보게 되었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정기적인 일이 아니라 보수가 더 후했다. 아이들과 즐겁게 놀아주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엄마와 아빠가 약속이 있는 동안 대학생 언니가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에 지원은 선뜻 수락했지만, 첫 대면은 언제나 설렘과 긴장이 공존했다. “서지원 씨?”약속된 장소인 롯데리아에 들어서자, 밝은 목소리가 지원을 불렀다. 아이들의 엄마는 예상과 달리, 삼십 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젊고 세련된 여성이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두 아이도 덩달아.. 2025. 3.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