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창작들31

(23화) 오후 네 시 (23화) 오후 네 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신아와 새아는 피곤했는지 깊이 잠들었다. 지원은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며 문득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엄마,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키워 준 할머니를 생각하면 묻는 것이 예의가 아닌 듯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지만 신아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이고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30분이 지나도록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궁금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걱정됐다. 아빠와 통화하던 신아가 지원에게 전화를 건넸다. “아, 네. 저는 신아 엄마와 여섯 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아직 오시지 않아서요.” 지원은 당황했다. 마치 신아 엄마가 오지 않은.. 2025. 3. 17.
(21화) 오후 네 시 #아무짝에도쓸모없는그러나세상구경을하고싶은    (21화) 오후 네 시  갑자기 할머니가 지원의 손을 잡아당겼다. 엄지손가락을 접어 숫자 4를 만들었다. 40대의 이야기를 읽으라는 뜻이었다. 지원은 할머니의 의중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알았어. 40살 이야기?” 할머니는 서병수가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했던 시절을 이야기했다. 조안나라는 아이를 데리고 시작한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할머니, 엄마가 나보다 예뻤어?” 지원은 엄마, 조안나가 궁금했다. 할머니도 엄마 이야기를 거의 해주지 않았다. 지원은 엄마를 그리워했지만, 그 감정을 말로 꺼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아야 할 때라고 느꼈다. 할머니는 뇌졸중 이후 예전처럼 말하지 못했다. 만약을 대비해 미리 엄마 이야기를 들어둘 걸, 지원은 후.. 2025. 3. 15.
(20화) 오후 네 시 (20화) 오후 네 시  “그럼, 1998년 3월 20일 편지 읽는다.” 지원은 무작정 편지 노트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그때, 지원은 아마 다섯 살쯤 되었을 것이다. 편지를 읽고 난 후, 지원은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자신이 예쁘다고 자랑하던 부분에 또 한 번 감동했다. “영숙씨, 내가 그렇게 예뻤어?” 지원은 할머니가 늘 ‘우리 공주님, 우리 공주님, 흑진주 공주님’이라 부르던 시절이 엊그제 같았다. 연약해진 할머니를 보니, 인생의 무상함이 실감났다. 할머니는 지원이 읽은 연애편지에 감회에 젖었는지, 눈곱 낀 눈가로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 지원은 자신이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 들킬까봐 모른 척하며 다음 편지를 읽었다. 1998년 3월 23일. 이 편지에는 대부분 지원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유치.. 2025. 3. 14.
(19화) 오후 네 시 (19화) 오후 네 시  “영숙씨, 나 왔어요.” 지원은 할머니를 놀래 줄 생각으로 밝게 소리쳤다. 하지만 할머니의 침대는 비어 있었다. 순간 두려운 생각이 몰려왔다. 다급히 사무실을 향해 뛰어갔다. “저희 할머니 어디 계세요?” 문을 열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 깜짝 놀란 사무실 직원이 지원을 올려다보았다. “아, 햇살이 좋아서 산책을 가셨습니다. 다른 직원이 뒤뜰로 모시고 나간 것 같아요.” 머쓱해진 지원은 서둘러 요양원 뒤뜰로 향했다. 할머니는 지원이 올 시간이면 늘 기다리곤 했는데, 오늘은 먼저 나가 계셨다.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아래, 할머니는 혼자서 코스모스를 바라보며 햇빛을 받고 있었다. “영숙씨, 놀랐잖아요.” 지원이 성큼 걸어가며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할.. 2025. 3. 13.
(18화) 오후 네 시 (18화) 오후 네 시 “엄마가 그런 말엔 대답하지 말랬는데……” 지원은 신아의 대답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신아 엄마가 괜히 캐묻지 말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이제 뭐 할까?" 지원이 분위기를 바꾸려 하자, 새아가 신이 나서 말했다. "언니, 우리 월명공원에 잉어 보러 가요!" "월명공원에 잉어가 있어?" 지원은 산에 무슨 잉어가 있을까 싶어 의아해했다. "언니, 월명공원 호수, 거기 나무다리가 있고, 나무랑 연꽃이 많아요. 빨간 잉어들도 살고 있어요. 아빠가 그곳이 잉어네 마을이래요. 잉어들도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고모, 이모랑 대가족으로 산대요." 새아가 열심히 설명했다. "에이, 바보. 아빠 말을 그대로 믿어? 잉어는 엄마 아빠랑만 살아. 그렇죠, 언니?" 신아가 확인하듯 지원을 .. 2025. 3. 12.
(17화) 오후 네 시 (17화)  오후 네 시 지원은 택시를 타고 은파 호숫가의 스파케티 집에 도착했다. 늘 한번쯤 와보고 싶었던 곳이다. 친구들이 가족들과 함께 다녀왔다며 자랑을 할 때마다 언젠가 자신도 누군가와 함께 꼭 다녀오겠다고, 마치 버킷리스트처럼 여기던 곳이었으나, 만만치 않은 음식값 때문에 마음뿐이었던 곳, 오늘은 신아 엄마의 카드가 있어 든든했다. “어? 우리 엄마랑 아빠 단골 가게네! 언니, 여기 맞아요. 스파게티랑 피자가 진짜 맛있어요.” 신아는 자신이 자주 오던 곳이라는 사실이 기쁜지 먼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새아는 지원의 손을 잡아끌며 신아를 따라갔다. “어, 꼬마 공주님들 왔네? 오늘은 엄마랑 같이 안 왔니?” 지배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아이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니요, 오늘은 언니랑 왔어요.. 2025. 3.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