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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월명서가 소개글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6. 6. 3.

 

 

 

이제 7월 말이면 《재즈, 사유의 즉흥연주 — 군산을 걷다》 1, 2권이 출간될 예정이다. 총 35장, 한 곡의 재즈, 한 명의 철학자, 한 권의 문학, 한 편의 영화, 군산의 한 장소를 다섯 겹의 렌즈로 하나의 주제를 즉흥 연주한다. 재즈 에세이이자 군산 산책기이자 철학 입문서로써 35개의 장은 재즈 클럽의 다섯 세트로 구성되며, 시간과 기억에서 출발해 경계와 융합으로 나아간다. 모든 장소는 군산이다. 재즈, 철학, 문학, 영화, 군산의 장소. 34장에 월명서가가 있다. 아래 그 글의 일부이다.

 

월명서가 | 침묵의 지평이다.

 

군산 어느 골목 안, 계단이 하나 있다. 낡은 건물의 낡은 계단. 그 계단을 오르면 소리가 달라진다. 첫 번째 계단에서는 아직 골목의 소음이 들린다. 다섯 번째 계단쯤에서 그 소음이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마지막 계단에 발을 올려놓는 순간, 문틈 사이로 피아노 소리가 새어 나올 것이다. 단음 하나. 그 음이 공기 속에서 천천히 사라진다. 다음 음이 오기까지 침묵이 이어진다. 폴 블레이다. 그 침묵 속에 잠시 서 있게 될 것이다. 문을 열기 전에, 이미 다른 곳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문을 열면 냄새가 먼저 온다. 오래된 종이 냄새, 커피 냄새, 그리고 그 두 가지가 섞인 뒤 이름 붙이기 어려운 어떤 냄새. 헌책방 특유의 그 냄새는 시간의 냄새다. 누군가 이 책을 읽던 오후의 냄새, 누군가 이 페이지에서 밑줄을 긋던 순간의 냄새, 누군가 여백에 두 줄을 남기고 책을 덮던 저녁의 냄새. 그 시간들이 냄새가 되어 공간 안에 쌓여 있을 것이다. 빛은 창에서 들어올 것이다. 군산의 오후 빛은 서쪽에서 온다. 그 빛이 서가의 책등을 비추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그 시간에 월명서가에 있으면, 책들이 저마다 다른 색으로 숨을 쉬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서가의 책들은 새 책이 아닐 것이다. 누군가의 손을 거쳐 온 책들, 밑줄이 그어진 책들, 여백에 메모가 남겨진 책들이다. 본문은 말해진 것이고, 여백의 메모는 말해지지 않은 것이며, 책과 책 사이의 서가 공간은 침묵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고 했을 때, 그 침묵이 담고 있는 것들이 이 서가 어딘가에 꽂혀 있을 것이다. 책뿐만이 아니다. 영화 DVD들이 가득 쌓여 있고, 재즈와 클래식, 월드뮤직을 넘나드는 CD들이 서가 곳곳에 꽂혀 있을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누구에게나 열려 있을 것이다. 꺼내 읽어도 좋고, 들어도 좋다. 책도, CD도, DVD도 빌려갈 수 있다. 모두 무료로.

 

서가의 한쪽에는 군산에서 나고 자란 작가들의 책들이 모여 있다. 이 도시의 골목과 갯벌과 사람들을 직접 살아낸 목소리들이다. 그 곁에는 이 서재의 주인장이 쓴 일곱 권의 책도 나란히 꽂혀 있다. 오랜 시간 군산의 골목을 걸으며 써온 것들이다. 세계의 언어와 군산의 언어와 이 공간에서 태어난 언어가 같은 침묵 속에 나란히 서 있다.

 

재즈는 그 침묵들 사이를 조용히 흐를 것이다. 블레이의 피아노가 흐르는 날도 있을 것이고, 빌 에반스의 서정이 흐르는 날도 있을 것이며, 마일스 데이비스의 뮤트 트럼펫이 공간을 채우는 날도 있을 것이다. 재즈는 배경음악이 아닐 것이다. 이 공간의 호흡이 될 것이다. 노출 콘크리트 천장이 그대로 드러난 공간, 마감하지 않은 천장 아래 둥글고 하얀 조명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조용히 빛을 떨어뜨릴 것이다. 화려하지 않은 빛이다. 그러나 오래 있고 싶어지는 빛이다.

 

가구들은 서로 다른 시간에서 올 것이다. 조각이 정교한 원목 흔들의자, 분홍 플라스틱 의자, 파란 아카풀코 체어, 가죽 소파 위의 소가죽 러그.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데, 이상하게도 충돌하지 않을 것이다. 돌멩이가 깔린 긴 테이블 위로 식물들이 자라고, 도예 조각품과 화분들이 책과 나란히 놓여 있을 것이다. 생활과 예술이 같은 선반 위에 살 것이다. 니체의 얼굴이 벽에 걸려 있고, 그 맞은편에서 재즈가 흐를 것이다. 이 공간은 꾸며진 것이 아니라 쌓여온 것이다. 누군가의 취향이 오랜 시간에 걸쳐 켜켜이 내려앉은 곳이다.

 

공간 한편에는 커피 머신과 차, 음료들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셀프 서비스다. 가격은 당신이 정한다. 마음이 이끄는 만큼, 형편이 닿는 만큼. 그것으로 충분하다. 구석에 작은 방이 하나 있을 것이다. 빛을 차단한 커튼, 파란 쿠션, 붉은 조명, 꽃그림 액자. 평소에는 작가의 휴식 공간이지만, 하룻밤 색다른 경험을 원한다면 언제든 빌릴 수 있다. 책과 재즈와 조용한 골목이 있는 밤을 보내고 싶은 사람에게.

 

월명서가는 서점이면서 북카페이고, 독립출판사의 사무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이곳은 공유의 공간이다. 서가의 주인장은 자신이 오랜 시간 모아온 것들, 책과 음반과 영화와 그 사이에 쌓인 사유들을 혼자 간직하는 대신 누군가와 함께 나누는 것에서 기쁨을 찾는다. 월명서가라는 이름은 달빛이 흐르는 길처럼, 책과 이야기가 이어지는 길을 뜻한다. 거창하지 않고 온화한 곳. 화려하지 않고 화기로운 곳.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다. 글이 막히면 블레이의 피아노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 화성이 해결되지 않은 채 공중에 떠 있는 그 순간, 막혔던 문장이 뚫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커피 한 잔이 식어가는 동안 두 시간이 지나도 모를 것이다. 그것이 이 공간이 허락할 시간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 시간이, 실은 가장 깊은 곳에 닿는 시간일 것이다.

 

이면지가 있을 것이다. 누구라도 자신이 읽은 책에 무언가를 남길 수 있다. 소감이어도 좋고, 필사여도 좋고, 다음 독자를 위한 편지여도 좋고, 그림이어도 좋다. 읽은 책에 꽂아 서가에 돌려놓으면 된다. 다음 독자는 그것을 발견할 수도 있고, 지나칠 수도 있다. 에스테르가 요한에게 외국어 단어들을 남겼듯이. 뜻이 전달되지 않아도 누군가 여기서 이 책을 읽고 무언가를 남기려 했다는 사실은 전달될 것이다. 블레이의 피아노가 멈춘 뒤에도 공기 속에 무언가 남듯이.

 

보르헤스는 천국이 도서관의 형태일 것이라고 썼다. 월명서가를 여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천국이 있다면 그것은 오래된 종이 냄새와 커피 냄새가 섞인 곳, 재즈가 흐르고, 창에서 오후 빛이 들어오며, 서가의 책들이 조용히 다음 손을 기다리는 곳일 것이라고. 혼자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곳, 글이 써지지 않아도 책이 잘 읽히지 않아도 그냥 재즈와 함께 앉아 있어도 되는 곳, 작지만 침묵이 쌓이기 때문에 무한한 곳.

 

이 책을 여기까지 읽은 당신에게. 군산에 오게 되는 날이 있다면, 월명서가를 찾아오면 된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소음이 사라질 것이다. 마지막 계단에서 재즈가 들릴 것이다. 문을 열면 오래된 종이 냄새가 먼저 올 것이다. 블레이의 피아노가 흐를 것이다. 음표 하나가 공기 속으로 녹아드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 침묵 속에 잠시 서 있으면 된다. 월명서가는 거기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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