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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창작들29

(7화) 오후 네 시 할머니의 병실을 나서며 지원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침대 맞은편에 걸린 고흐의 ‘낮잠’ 복사본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왜 고흐는 밀레의 ‘오후 네 시’를 모작했을까. 그리고 왜 할머니는 평생 꿈꾸었던 그 그림 같은 삶을 끝내 현실로 그려내지 못했을까. 생각할수록 가슴 한편이 저릿이 시려왔다. 약속된 장소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지원이 꿈꾸는 미래라는 그림 또한 자신의 손끝에서 그려질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가슴을 채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할머니의 부재였다. 만약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난다면, 지원은 끈 떨어진 연처럼 끝없이 부유하는 운명에 놓일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우주의 어둠 속에서 먼지처럼 떠도는 삶, 그 고독과 공허가 다시금 지원을 짓눌렀다. 지원은 태어나 채 사.. 2025. 3. 1.
(6화) 오후 네 시 (6화) 오후 네 시  “근데, 영숙씨. 이제 나도 어른이 된 것 같아. 어릴 때 아이들이 놀리던 내 크고 까만 눈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겠어. 어쩌면 섹시하기까지 할지도 몰라. 그래서 가끔 과 선배나 같은 과 남학생들이 슬쩍 쳐다볼 때 나도 모르게 턱이 바짝 올라가.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말하지. ‘요, 칠뜨기들아. 아무리 나한테 눈독을 들여 봐라. 내가 어디 눈 하나 깜짝하나? 이래뵈어도 난 너희 같은 촌뜨기들이 탐낼 아가씨가 아니거든.’ 어때, 나 잘했지?” 지원의 목소리는 어느새 달콤한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들고 있었다. “그래, 우리 채송화 씨는 뜨거운 열대의 나라 공주님이지.” “그래, 그 생각이 나. 언젠가 영숙씨가 그랬잖아. 아이들이 나를 ‘양공주’라고 놀려서 울며 집으로 돌아왔을 때, 네게 .. 2025. 2. 28.
(5화) 오후 네 시 (5화) 오후 네 시  “영숙씨, 오늘은 몇 살 걸로?” 천명관 것도, 강은교 것도 낭독한 후에 이제 할머니의 원고를 낭독할 차례였다. “오늘은 일곱 살 걸로” “알, 지금 부터는 영숙씨는 다시 일곱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럼 내가 더 언니가 되었으니 일곱살 영숙씨에게 뽀뽀 한 번 하고 읽기 시작한당.” 지원은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볼에 자신의 입술을 살짝 데였다가 뗀다. 오랜 습관 같은 것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수없이 입술 도장을 찍었던 할머니의 볼은 점점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지원이 낭독 모드를 취하자, 할머니 또한 듣기 모드를 취하며 지원 쪽을 향해 몸을 모로 누웠다. "아저씨는 소쿠리 팔러 가셨어요? 언제 다시 돌아와요?“ 할머니는 빙긋 웃으며 시작을 알린다. “소쿠리 사세요. 소쿠리 사세요.” .. 2025. 2. 27.
(4화) 오후 네 시 (4화) 오후 네 시  지원은 할아버지가 건너뛴 문장들 사이에서 그날의 공기를 더듬었다. 미처 말하지 못한 숨결과 잊힌 단어들을 따라가며, 그 시간이 품고 있던 온기를 떠올려 보았다. "영숙, 당신에게. 영숙, 오늘도 당신을 생각하오. 창가에 기대어 바다를 바라보면, 당신의 눈동자가 자꾸만 겹쳐 보이오. 어린 시절에도, 그리고 지금도 변함없이, 나는 당신을 처음 마주한 순간을 기억하오. 그때 나는 내 안에 이런 감정이 존재한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소. 당신과 헤어지고 서울로 올라가던 날, 나는 어리석게도 사랑이란 것이 예측 가능한 줄로만 알았지요. 출세하면, 당신이 준 볼펜으로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된다면, 반드시 다시 만나겠다고 다짐했소. 하지만 떠나는 날, 도서관 창가에 서있던 당신을 학교 담벼락 뒤.. 2025. 2. 26.
(3화) 오후 네 시 할머니의 보물 상자 속에는 오랜 세월이 묻어 있는 것들이 고이 간직되어 있었다. 할머니가 직접 쓴 자전소설 두 편과 일기장 두 권, 할아버지 서용수씨의 유품인 필사본 노트 한 권, 그리고 몽블랑 만년필과 아주 오래된 모나미 볼펜 한 자루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손때가 묻어 누렇게 변색된 『걸리버 여행기』와 할머니의 애장품이었던 『갈매기의 꿈』이 눈에 띄었다. 어린 시절, 지원이 기억하는 한 『갈매기의 꿈』은 언제나 할머니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지원을 위해 책을 소리 내어 읽어주는 것을 좋아했고, 지원이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 목소리가 집 안 곳곳을 따뜻하게 채웠다. 하지만 이제는 반대로 지원이 할머니를 위해 책과 원고를 낭독하는 것이 익숙해졌다. 아니, 사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까.. 2025. 2. 25.
(2화) 오후 네시 “영숙씨, 오늘은 어디쯤?” “어디였더라?” 지원이 요즈음 영숙을 위해 낭독하고 있는 소설 ‘고래’를 펴들고 뒤적거렸다. “금복이 냄새, 꿀벌이 배회하는 아카시아꽃 냄새, 무성한 풀냄새, 열기가 올라오는 땅 위의 흙과 함께 발효되는 푹신한 솔잎 냄새, 갓 피기 시작하는 장미와 밤에 더 짙어지는 밤꽃 냄새.” 페이지를 펴기도 전에 영숙은 벌써 그 부분을 외워댔다. “와, 우리 영숙씨, 아직도 기억력이 총총. 이러다 천 년, 만 년 사시는 것 아녀?” 지원은 일부러 호들갑을 떨었다. 요즈음 부쩍 까막거리는 할머니의 기억력이 안타깝기만 했다. 참 이상하게도 어떤 것에 대한 기억력은 이렇듯 놀라울 정도였지만 또 어떤 기억은 몽땅 잊어 가는 것이다. 이미 수년 전에 돌아가신 서용수, 지원의 외할아버지에 대한 것을.. 2025. 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