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오후 네 시
“영숙씨, 오늘은 몇 살 걸로?”
천명관 것도, 강은교 것도 낭독한 후에 이제 할머니의 원고를 낭독할 차례였다.
“오늘은 일곱 살 걸로”
“알, 지금 부터는 영숙씨는 다시 일곱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럼 내가 더 언니가 되었으니 일곱살 영숙씨에게 뽀뽀 한 번 하고 읽기 시작한당.”
지원은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볼에 자신의 입술을 살짝 데였다가 뗀다. 오랜 습관 같은 것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수없이 입술 도장을 찍었던 할머니의 볼은 점점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지원이 낭독 모드를 취하자, 할머니 또한 듣기 모드를 취하며 지원 쪽을 향해 몸을 모로 누웠다.
"아저씨는 소쿠리 팔러 가셨어요? 언제 다시 돌아와요?“
할머니는 빙긋 웃으며 시작을 알린다.
“소쿠리 사세요. 소쿠리 사세요.”
지원이 일부러 어느 드라마에선가 장미희가 외쳤던 ‘떡 사시오. 떡 사시오’ 버전으로 ‘소쿠리 사세요’를 흉내 낸다. 할머니는 그런 지원의 흉내가 우스워 죽겠다는 듯 몸을 들썩이며 또 일주일 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소쿠리 아저씨네’라는 할머니의 단편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였다. 낭독을 마친 지원은 할머니를 지긋이 쳐다본다.
“이상 끝. 영숙씨, 되얐지?”
“그려. 수고혔어. 고맙다.”
“근디, 영숙씨. 진짜 소쿠리 아줌마가 내숭이었지?”
“뭔 내숭?”
“모르는 척은? 소쿠리아줌마가 바람났잖아.”
“그런 것이 아녀?”
“뭐가 아니여? 남편이 소쿠리 팔러 갔을 때 뒷집 홀아비로 바람났고만.”
“실은 말이여, 소쿠리아저씨가 고자였데, 고자가 뭔지 알지야?”
“에이, 지도 알지. 벌써 대학생인 걸.”
지원은 일부러 할머니에게 말을 시켰다. 할머니는 점점 단어들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려서 소쿠리 아저씨가 애를 만들지 못혔디야. 하여서 그랬는지 나만 보면 물고 빨고 했던 것이었어. 소쿠리 아줌마가 가끔씩 눈에 뵈여. 우짠 일인지 요즘 들어 자꾸만.”
할머니는 깊은 한 숨을 쉬었다.
“그렸어, 영숙씨. 왜 영숙씨가 애 하나 만들지 못혀서?”
할머니가 지원을 빤히 쳐다봤다. 지원은 아차 싶어 얼른 말을 바꿨다.
“영숙씨, 한 번도 그런 생각 안 해봤어? 어쩜 영숙씨 소쿠리 아저씨네 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나는 말이야, 영숙씨. 미안하지만 말이야.”
지원이 자꾸 말을 늘여 빼자 할머니는 지원의 얼굴을 눈이 빠져라 바라보았다.
“세상에서 제일 부러웠던 애가 누구였는지 알아? 그래. 영숙씨도 그 아이 알지? 옆집 엽집,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었던 집 아이, 아람이, 생각나, 영숙씨?”
지원은 할머니의 기억을 되돌리려 애를 썼다.
“응, 그 통통하고 짤막해서 늘 내가 ‘호박 고구마’라고 놀리던 아이?”
할머니는 기억할 수 있어 기쁜 눈빛이었다.
“그래, 영숙씨는 아무도 모르게 그 아이를 ‘호박 고구마’라고 불렀어, 그래 그에 반해 나는 누구?”
지원은 바짝 할머니 입 쪽으로 귀를 가져다댔다.
“채송화.”
할머니의 ‘채송화’라는 소리를 듣고 지원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지원은 할머니의 입가에 흐르는 끈적이는 침을 수건으로 닦아냈다.
“그래. 그 호박 고구마가 세상에서 제일 부러웠어. 아니 어쩔 때는 밉기까지 했지. 그 이유는 그 아이에게 엄마, 아빠가 있었다는 사실이었어. 그리고 그 아이가 정말 호박과 고구마를 섞어 놓은 것처럼 토속적이었잖아. 영숙씨는 나를 ‘채송화’라고 불렀지만 사실 나는 늘 내가 아주 먼 상상할 수 없는 아주 먼, 어쩜 뜨거운 태양의 나라에서 온 신기한 잡초처럼 생각되었거든. 애들이 나더러 ‘양공주’라고 놀렸을 때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어. 나는 ‘양공주’가 아니라 뜨거운 태양의 나라에서 온 진짜 공주라고. 나를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를 썼지.”
할머니는 지원이의 손등을 가져가 자신의 두 손으로 쥐었다. 위로라도 하겠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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