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창작들

(2화) 오후 네시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5. 2. 23.

 

 

 

영숙씨, 오늘은 어디쯤?”

어디였더라?”

지원이 요즈음 영숙을 위해 낭독하고 있는 소설 고래를 펴들고 뒤적거렸다.

금복이 냄새, 꿀벌이 배회하는 아카시아꽃 냄새, 무성한 풀냄새, 열기가 올라오는 땅 위의 흙과 함께 발효되는 푹신한 솔잎 냄새, 갓 피기 시작하는 장미와 밤에 더 짙어지는 밤꽃 냄새.”

페이지를 펴기도 전에 영숙은 벌써 그 부분을 외워댔다.

, 우리 영숙씨, 아직도 기억력이 총총. 이러다 천 년, 만 년 사시는 것 아녀?”

지원은 일부러 호들갑을 떨었다. 요즈음 부쩍 까막거리는 할머니의 기억력이 안타깝기만 했다. 참 이상하게도 어떤 것에 대한 기억력은 이렇듯 놀라울 정도였지만 또 어떤 기억은 몽땅 잊어 가는 것이다.

이미 수년 전에 돌아가신 서용수, 지원의 외할아버지에 대한 것을 물어 올라치면 지원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제는 이 세상을 뜨셨다고 할머니 말대로 소풍 끝나고 먼저 돌아가셨다고 아무리 말하고 또 말해도 할머니는 아직도 서용수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틀림없이 서용수 할아버지에 대해 물을 것인데 어찌 대답해야 할까 지원은 올 때부터 마음이 아렸다.

지원이 할머니를 만나면 규칙적으로 낭독하는 순서가 있었다. 먼저 베스트셀러 소설 한 권을 선택해 10 페이지 정도를 낭독하고, 다음으로 할머니의 서가에 꽂혀 있었던 시집 한 권을 가져와 다섯 편쯤 되는 시를 낭송한다. 마지막으로 할머니 본인이 그동안 써 내려왔던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일기인지, 자서전인지, 어쩌면 소설일지도 모를 몇 페이지쯤을 낭독하는 일이 지원이 거쳐야 할 순서였다.

마지막 순서인 할머니 자신이 쓴 글을 낭독할 때면 영숙은 곧 잘 눈물을 흘렸다. 카타르시스라나, 어쩐 다나 핑계를 대고 있었지만 지원은 알았다. 자신이 읽어 내려가는 할머니의 소설은 소설이라기보다는 할머니 인생에 대한 이야기였다는 것을. 할머니는 지원이 자신이 쓴 이야기를 읽을 때면 지나온 자신의 인생을 되새김질하며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생을 정리하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원은 영숙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던 까닭에 지원도 영숙의 글을 읽을 때는 좀 더 숙연하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정성스럽게 읽어 내려갔다. 때론 할머니와 함께 빙긋이 웃기도 하며 때론 할머니와 함께 눈물을 적셨다. 이제 이런 의식을 삼 년이 넘게 해 왔으니, 할머니가 씀직한 이야기들을 모두 읽었을 듯싶지만 그렇지 않았다.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는 할머니의 가장 큰 보물 상자 속엔 할머니의 손때뿐만 아니라 지원이의 손때도 묻어 있는 보물이 있었다. 또 한 사람, 70이 넘어가는 할머니의 한 평생 중에 겨우 5년도 함께 살지 못하고 할머니와 지원의 곁을 홀연히 떠난 외할아버지 서용수씨의 손때도 함께 묻어 있는 보물 말이다.

 

#오후네시 #장편소설 #아무짝에도쓸모없는그러나세상구경을하고싶은 #나의사랑스런아이#창작소설 #초짜철학도 #국립군산대학교 #군산대철학과 #lettersfromatrave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