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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창작들29

(14화) 오후 네 시 지원은 요즘 경제적인 압박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남아 있는 현금은 한 학기 등록금과 서너 달 간신히 버틸 생활비가 전부였다.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휴학까지 고민해야 할지도 몰랐다. 등록금은 장학금에 의지할 수 있지만, 그것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그녀가 받은 장학금은 겨우 1년짜리였고, 이후는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현실과 꿈 사이의 간격. 지원은 그 간격을 좁히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쳤다. 하지만 현실을 마음대로 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다. 꿈은 상황에 따라 변하기도 했고, 조절할 수도 있었다. 그녀는 불가능해 보이는 꿈들을 마음 깊은 곳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언젠가 때가 되면 할머니가 한낮의 햇살 아래 풀을 먹여 말리던 광목천처럼, 향긋하고 빳빳하게 세상을.. 2025. 3. 8.
(12화) 오후 네 시 (12화)  오후 네 시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티티카카는 한산했다. 지원은 호수를 바라볼 수 있는 창가 자리로 가 앉았다. 창밖에는 가로등 불빛 아래로 막 가을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벚나무들이 잎을 떨구며 거인처럼 서 있었다. "와인 한 잔 할 건가?" 이 교수의 말투는 마치 자신이 마시고 싶다는 뜻을 돌려 말하는 듯했다. "저, 오늘은 사양할게요. 핫초코를 마시려고요." 얼결에 이곳까지 오게 된 지원은 다소 당황스러웠다. "아직 애기군." 이 교수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윙크했다. 장난기 어린 표정에 지원은 피식 웃고 말았다. 덕분에 경직되었던 마음이 한결 풀렸다. 핫초코 한 잔과 와인 한 병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지원은 혹시라도 아는 사람과 마주칠까 싶어 실내를 대충 훑어보았다. 다행히 낯익은 얼굴은 .. 2025. 3. 5.
(11화) 오후 네 시 (11화) 오후 네 시   “왜요, 교수님. 분명 기억하고 계시겠죠. 그날 교수님과 스치듯 마주쳤던 눈빛을 제가 어떻게 잊겠어요? 지금도 생생해요. 교수님의 머리칼 색, 어쩐지 달콤하게 느껴지던 담배 냄새, 그리고 스웨터와 아쿠아 블루빛 스카프까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지원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슴이 떨려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 자네를 만나고 난 후, 나는 집에 돌아와 폴 고갱의 화첩을 펼쳤다네. 그리고 고갱의 연인, 테후라를 보았지. 문득 생각이 들었네. 자네가 테후라였어.” 이교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날 밤, 나는 테후라를 만난 기념으로 고갱의 화첩 겉표지에 짧은 글을 남겼다네. 가끔씩 그 화첩을 들춰보다 보니, 어느새 외워버렸어. 내가 실없는 사람처럼 보이나.. 2025. 3. 5.
(10화) 오후 네 시 (10화) 오후 네 시   낯선 대학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원에게, 이 교수와의 인연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그저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서 어쩌다 눈도장을 찍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반경 안으로 들어서게 된 것일까. 아니면 어차피 스쳐 지나갈 운명이었기에,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을까. 그러나 실상은 거꾸로였는지도 모른다. 지원이 이교수의 영향 아래 놓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교수가 지원의 마음속을 어슬렁거리며 거닐고 있었는지도."어이, 서지원. 자네는 뭘 하나? 이럴 때 함께 마셔주는 것이 예의 아닌가. 설마 내숭을 떠는 것은 아니겠지?"이미 혀끝에 취기가 오른 이교수가 주전자를 번쩍 들어 올리며 지원을 향해 웃었다. 어서 잔을 받아들고, 그 잔을 자신을 위해 채워주라는 은근한 압력이.. 2025. 3. 4.
(9화) 오후 네 시 (9화) 오후 네 시 #아무짝에도쓸모없는그러나세상구경을하고싶은  지원은 단순명료한 이 교수의 화법이 마음에 들었다. 젊음이란 모든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순간을 마음껏 살아야 한다는 그의 직설적인 말들은 지원의 가슴을 뛰게 했다. 그의 말은 마치 한낮의 태양처럼 강렬했고, 그런 그의 태도는 지원에게 일종의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그날 밤, 축제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가난한 국립대 학생들에게 주어진 모처럼의 기회였다. 주머니 사정을 걱정하지 않고 마음껏 마시고 떠들며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는 순간. 그러나 지원은 늘 그랬듯 억지로 따라야 하는 술잔을 조심스럽게 받아만 들었을 뿐 쉽게 입을 대지는 못했다. 일 학년이라는 조심성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이 교수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술에 .. 2025. 3. 3.
(8화) 오후 네 시 (8화) 오후 네 시약속된 장소에 도착하자 실내는 아직 적막에 잠겨있었다. 이른 시간이었는지, 익숙한 얼굴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충 맞춰진 긴 테이블 끝에 앉자마자, 문이 열리며 일 학년 동기 셋이 왁자지껄한 기운을 몰고 들어왔다. 곧이어 선배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고,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자리를 채우자, 조교를 대동한 이 교수가 천천히 등장했다.그는 분홍빛 셔츠에 진초록 계열의 바지를 걸치고, 그 위에 같은 톤의 농구화를 신었다. 언제나처럼,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 화려한 차림새였다. ‘패션계의 왕자’라는 별명이 허울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는 듯했다. 젊음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학생들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가진 생기와 기백에 가까웠다. 흐뭇함과 선망이 한꺼번에 밀려와 지원을 압도했다. 그리고.. 2025. 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