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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창작들

(6화) 오후 네 시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5. 2. 28.

 

 

 

 

 

(6화) 오후 네 시

 

“근데, 영숙씨. 이제 나도 어른이 된 것 같아. 어릴 때 아이들이 놀리던 내 크고 까만 눈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겠어. 어쩌면 섹시하기까지 할지도 몰라. 그래서 가끔 과 선배나 같은 과 남학생들이 슬쩍 쳐다볼 때 나도 모르게 턱이 바짝 올라가.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말하지. ‘요, 칠뜨기들아. 아무리 나한테 눈독을 들여 봐라. 내가 어디 눈 하나 깜짝하나? 이래뵈어도 난 너희 같은 촌뜨기들이 탐낼 아가씨가 아니거든.’ 어때, 나 잘했지?”

지원의 목소리는 어느새 달콤한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들고 있었다.

“그래, 우리 채송화 씨는 뜨거운 열대의 나라 공주님이지.”

“그래, 그 생각이 나. 언젠가 영숙씨가 그랬잖아. 아이들이 나를 ‘양공주’라고 놀려서 울며 집으로 돌아왔을 때, 네게 고갱의 화집을 보여주면서 말했어. ‘우리 채송화 씨는 이 그림 속의 아가씨가 될 거야. 저 아이들은 꿈도 꾸지 못할 신비한 나라의 공주님인데, 그걸 모를 뿐이야. 이 애 좀 봐. 네 모습과 너무 닮았지? 이 아이가 커서 이 아가씨가 되는 거야. 이 아가씨 이름은 테후라. 넌 나중에 크면 꼭 테후라처럼 유황빛 눈빛을 가진 아가씨가 될 거야.’ 그렇게 말했었지.”

지원은 잠시 숨을 고르고 이어 말했다.

“있지, 영숙씨. 며칠 전 문득 그 생각이 나서 도서관에 가서 고갱의 화집을 뒤적였어. 그러다 이런 글을 발견했어. ‘테후라는 침대에 배를 깔고 나체로 누워 움직이지 않았다. 공포에 질려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지, 아니면 내가 누구인지 몰라서였는지 알 수 없었다. 한동안 나는 불안했다. 그녀의 공포가 나에게도 전해졌다. 그녀의 눈은 유황빛을 내쏟듯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그녀를 나는 처음 보았다. 어둠 속에서 위험한 유령과 불타는 욕망에 휩싸인 소녀가 혹시나 두려워할까 봐 나는 움직이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마도 곤혹스러운 얼굴을 보아하니 나를 귀신이나 그녀의 동족을 잠 못 들게 괴롭히는 투파파오의 해골쯤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지원은 잠시 말을 멈추고 영숙을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눈을 두어 번 깜박였을 뿐이었다. 그렇다는 것인지, 아니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원은 서둘러 말머리를 돌렸다.

“영숙씨, 지금은 누구 듣고 있어?”

“응, 김영하.”

요즘 할머니는 팟캐스트에 빠져 있다. 이동진의 ‘빨간 책방’과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을 즐겨 듣는다. 이것 또한 지원이 책을 좋아하는 할머니를 위해 고심해서 고른 프로그램이었다. 할머니의 취향에 딱 맞는 선택이었고, 지원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지원은 할머니를 위해 김영하의 팟캐스트를 틀어놓고 서둘러 병실을 나왔다. 중요한 약속이 있었다. 저녁 일곱 시, 학교 근처 막걸리 집에서 교내 신문 편집부 회식. 1학년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하라는 편집장의 지시가 있었다. 지원은 마음이 급해 헐레벌떡 뛰어 가까스로 한 시간에 한 대밖에 없는 시내버스를 잡아탔다. 할머니에 대한 미안함이 목에 걸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오늘 만날 사람, 아니, 만나게 될 남자가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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