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보물 상자 속에는 오랜 세월이 묻어 있는 것들이 고이 간직되어 있었다. 할머니가 직접 쓴 자전소설 두 편과 일기장 두 권, 할아버지 서용수씨의 유품인 필사본 노트 한 권, 그리고 몽블랑 만년필과 아주 오래된 모나미 볼펜 한 자루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손때가 묻어 누렇게 변색된 『걸리버 여행기』와 할머니의 애장품이었던 『갈매기의 꿈』이 눈에 띄었다. 어린 시절, 지원이 기억하는 한 『갈매기의 꿈』은 언제나 할머니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지원을 위해 책을 소리 내어 읽어주는 것을 좋아했고, 지원이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 목소리가 집 안 곳곳을 따뜻하게 채웠다.
하지만 이제는 반대로 지원이 할머니를 위해 책과 원고를 낭독하는 것이 익숙해졌다. 아니, 사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까지는 낭독의 역할이 할아버지의 몫이었다. 할머니, 영숙씨의 원고는 늘 할아버지의 입을 통해 소리로 전해졌고, 그 목소리는 마치 바다의 파도를 다스리듯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간질간질하게, 또 어떤 날은 거칠게 흘러나왔다. 심지어 노래하듯 읽어 내려갈 때도 있었고, 때로는 감정에 북받쳐 목이 멜 때도 있었다. 지원은 그런 할아버지의 낭독을 옆에서 조용히 들으며 어느새 독자가 되었다.
특히나 할머니가 평생 할아버지에게 쓴 연애편지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밤을 지나면서 닳고 닳도록 여러 번 낭독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래전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썼던 연애편지들이 마침내 할머니의 손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 편지들은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목소리로 읽히게 되었다. 편지를 보낸 지 40여 년이 지나서야, 그 글들은 마침내 수신인의 손에 제대로 닿은 것이었다.
낭독하는 동안, 가끔 낯선 구절이 나오면 할아버지는 안경 너머로 슬쩍 지원의 눈치를 살폈다. 지원은 모르는 척했지만, 차마 읽지 못하고 건너뛴 문구들이 있었음을 짐작했다. 그러나 지원은 그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지원을 곁에 두고 낭독을 망설이는 모습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졌고, 할아버지가 조심스레 몇 줄을 생략하고 넘어갈 때면 할머니는 슬며시 미소 지으며 할아버지와 눈을 맞추었다. 지원은 그 순간이 마치 연인들의 은밀한 대화처럼 느껴져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할머니의 상상 속에서, 생략된 문장들 사이에서, 두 사람은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고, 지원은 그 분위기를 조용히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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