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시리즈 72
주제: 나에게 행복이란?
어젯밤은 악몽에 시달렸다. 목적지를 가야 하는데 자꾸만 목적지에서 멀어지고 있는 나, 그렇게 헤매다가 이른 아침 눈을 떴는데 맞다, 오늘 첫 교시, 중간고사 과목 중 “컴퓨팅적 사고와 기초 코딩”을 치러야 한다. 이 과목 시험에 대한 불안감이 내 무의식을 뚫고 악몽으로 나타났구나, 한숨으로 시작한 아침, 아니나 다를까 시험을 치고 나니 나름 최선을 다했다 생각했지만 머리 속이 더 복잡해졌다.
하여 오늘은 내 행복해야만 할 학교생활, 현재의 울고 싶은 마음을 “나에게 행복이란 무엇일까?”라는 주제를 사유하고 정리해 글을 씀으로써 달래려 한다.
우선 1학기 때 배웠던 “동양 사상입문”과 지금 배우고 있는 “유럽문화와 사상”이라는 과목에서 배웠던 동서양의 “행복론”에 대해 정리하는 일로부터 시작해보겠다.
동양 상고시대의 행복론은 공자가 중국 고대 제왕의 언행 및 정사를 기록한 문서를 집대성해 편집했다고 전해지고 있는 『서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오복과 육극의 기원이 언급되어 있다. 五福을 누리고 六極을 피하는 것이 그 시대의 행복이었다는데, 오복(五福)인 수(壽)는 오래 살고, 부(富)는 재산이 많고, 강녕(康寧)은 무병으로 건강하고, 유호덕(攸好德)은 미덕을 좋아하는 성품을 가지고, 노년까지 살아 천명을 완수하며 종말을 맞이하는 노종명(老終命)을 말하며 피해야 할 육극(六極)은 흉사를 만나 단명하는 것(凶短折), 질병에 고통받는 것(病), 악덕으로 지탄받는 것(惡), 의지의 빈약함(弱)을 들 수 있는데 이처럼 오복을 누리고 육극을 피하는 것이 고대 중국인들의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이었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후대의 유교에서는 행복의 문제를 ‘자기로부터 구하는’ 수양론에 귀결 짓는다. 제일 먼저 공동체의 조화와 평화를 위해서 갖춰야 할 덕목으로 인(仁)을 들고 이는 인간성 또는 자비를 이르는 말이며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사랑과 배려를 통해 긍정적인 인간관계를 추구하라는 말이며, 올바른 행동과 도덕적인 선택을 하여 다른 사람에게 공평하게 대하라는 의(義), 사회적 규칙과 예절을 따르라고 강조하는 예(禮), 지적으로 성취하고 배움을 추구하라는 지(智), 다른 사람에게 믿음과 신뢰를 보이라고 강조하는 신(信) 등을 갖춰 행동함으로 타인과의 상호작용에서 조화를 이뤄 결국 사회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개인적인 삶과 사회적인 삶의 조화를 이루는 것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또한 도가에서는 흐르는 시대의 변화를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는, 인위적인 것을 거부하고 자연의 흐름 자체가 도(道)이므로 무위자연(無爲自然)적인 삶을 살았을 때 지복(志福)에 이를 수 있다고 하며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한 불교에서는 욕심(貪), 성냄(瞋), 어리석음(痴), 아만(慢), 의심(疑)이 야기하는 번뇌가 부처의 마음을 회복하지 못하고 보살의 마음이 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므로 이 번뇌장(煩惱障)에서 벗어나야만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서양의 행복론에서는 어떤 주장을 펼칠까?
서양에서의 행복론의 시작은 길가메시 서사시로부터 기원전 5, 6 세기(축의 시대)에 행복에 대해 관심을 가졌는데 ‘잘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믿었고 이후 기원후 1세기경에는 행복에 대해 구원이라는 종교적 개념이 등장(기독교의 구원, 에피쿠로스의 쾌락인 ataraxia, 스토아의 금욕 apatheia 등등)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서양인들의 행복의 관점을 철학적으로 고찰한 3가지 측면으로 벤담, 밀, 에피쿠로스 등이 주장한 주관적 행복론 즉 욕망과 충족이 곧 행복이며 욕망 충족과 쾌락은 주관적인 느낌이고, 행복은 주관적 판단에 좌우되는데 행복한지 아닌지는 나만 알 수 있다, (개인적인 꿈을 찾고 만족시키면 행복하다.)는 쾌락주의와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세속적 행복은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며 그것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어떤 것이 행복이라는 종교적 차원의 탈세속주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맥킨 타이어, 찰스 테일러 등이 주장하는 덕, 탁월한 행동이 곧 행복하다는 객관적 행복론이 있다.
쾌락주의 행복론은 행복의 절대적인 기준은 ‘쾌락의 극대화/고통의 최소화’ 뿐이며 쾌락, 고통은 주관적인 느낌이어서 행복하냐 아니냐는 나만 알 수 있으며 통상 개인이 진정으로 달성하고 싶은 욕망이나 꿈을 발견하고, 그 수단을 가지면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원하는 욕망이 많이 충족될수록 행복이고 원하는 욕망이 좌절되면 불행하다고 주장된다.
이러한 쾌락주의적 행복론을 주장한 인물로 기원전 3세기경, 알렉산더 대왕의 헬레니즘 시대에 활동한 에피쿠로스 학파를 들 수 있는데 Carpe diem(이 순간을 즐겨라.)이 지배적이던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여 이들은 삶의 목적은 쾌락이며 욕망의 만족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 대표적인 인물인 에피쿠로스는 행복하기 위해서는 쾌락의 추구보다 ‘고통의 제거’ (감정 곡선 0에서 행복)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에피쿠로스는 고통은 욕망이 좌절될 때 생기므로 따라서 과도한 욕망을 버리면 고통은 생기지 않으며 진정한 행복은 과도해서 이룰 수 없는 욕망, 불필요한 욕망을 제거하는 데서 오는 즉 내가 이룰 수 없는 것은 바라지 않는 것, 바라는 데서 고통이 오니까,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의 상태가 제거된 마음의 Ataraxi(평정상태)를 꿈꾸며 금욕생활을 했다고 한다.
현대의 리처드 이스털린(1926 ~)같은 사상가는 돈과 행복은 일치할까, 라는 문제를 거론하며 소득과 행복 그래프를 보면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게 되면, 행복 지수가 오히려 줄어든다며 이것은 이스털린의 역설로 상식적 경제 논리에 위배 된다고 주장하고 폴 새뮤엘슨(1915 – 2009) 같은 사상가는 행복 = 소유/욕망: 소유에 비례하고 욕망에 반비례하므로 소유를 늘릴 수 있다면 늘어나는 만큼 난 행복할 수 있는데 (단 욕망이 그만큼 더 늘어 난다면 행복은 커지지 않는다.) 욕망을 고정하거나 줄이는 한에서 소유가 많아질수록 행복하고 현실적으로 소유를 늘릴 수 없다면 소유를 통해서 행복을 늘릴 수 없으므로(단 욕망을 줄인다면 행복을 늘릴 수 있다.) 욕망을 줄이는 한에서 소유가 고정되어도 행복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라캉 같은 인물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충족된 욕망은 ‘나’의 욕망이 충족된 것이 아니고 내가 원하는 욕망은 사실 타인과 사회적 기대의 주입이다, 라고 주장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행복이 아닌 ‘나’의 행복을 추구하려면 ‘나’의 욕망,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사유해야 함이 필수적이지 않을까?
물론 서양의 행복론 중 하나로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세속적 행복은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므로 그것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어떤 것에 행복이 있다는 설로, 훌륭한 삶의 영위(객관적 행복)나 쾌락의 추구(주관적 행복) 등의 세속적인 행복 추구는 무의미하며 불가능하다는 논조를 가지며 객관적 행복을 통해서도 주관적 행복을 통해서도 우리는 세상에서 행복해질 수 없는 세속의 부조리함이 강조되는 허무주의를 낳기도 했던 탈세속주의를 거론할 수 있는데, 현세의 덧없는 것들은 진정한 행복과 전혀 무관하며 진정한 행복은 신만이 줄 수 있으니 신을 따르는 삶만이 지복(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라며 신에 대한 믿음/구원에의 소망/신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지복(志福)에 이를 수 있고 그마저도 세속적으로는 불가능하고 신의 도움으로만 가능하다는 현실로부터 도피적인 주장을 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신부, 혹은 교부/기원후 354년 11월 13일 - 430년 8월 28일)가 있다.
마지막으로 살펴보는 객관적 쾌락주의는 쾌락의 감정은 무엇인가를 했을 때 따라 오는 ‘무언가’가 문제이지, 쾌락의 감정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라는 것을 주장했던 부분적인 쾌락주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탁월한 행동 (=덕)이 곧 행복이라고 말하며 현대적 의미의 ‘주관의 만족감’으로서의 행복은 객관적 행복의 부수적 효과라고 할 수 있고 인간의 실천 이성의 기능을 잘 발휘해 감정이나 욕망을 잘 통제하는 중용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때 덕을 수행할 수 있어 인간은 비로소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상으로 간략하나마 동, 서양철학에서 언급되는 행복론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그렇다면 나의 행복은 무엇일까? 위에서 언급되는 행복론 모두가 나의 행복에 이르는 한 조각이 되겠지만 특히 나는 인간의 생각의 기능에서 출발된 실천 이성, 즉 ‘인간인 한’에서 ‘인간으로서’ 나의 욕망은 무엇이며 이 욕망이 과연 나를 행복으로 이끌어 줄 수 있을까, 라는 의문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이제까지의 내 삶은 욕망을 조절함으로써 소유의 부족에서 오는 낭패감을 조절하며 그야말로 소확행(小確幸)적인 삶을 살아왔고 그것이 나에게 얼마간의 행복감을 느끼게 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이제 이승에서의 소풍을 마감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이 분명한 이 시점에서는 “나의 달란트는 무엇일까?” “나에게 주어진 달란트가 있다면 이 달란트를 수행하는 것”이, 즉 내가 인간으로서 마지막 해야 할 기능을 완수해가는 것이 나의 진정한 행복을 찾아가는 마지막 지름길이 아닐까, 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단연코 “배우고 사유하며 쓰는 행위”일 것이며 이 쓰는 행위를 통해 누군가의 삶에 작은 빛이 되고 싶다는 유일한 내 마지막일지도 모를 욕망을 위해 하루하루 건강하고 진지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아침과 저녁을 맞이하는 일이 나의 행복일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고, 어느 순간 이러한 생각들이 오늘 아침의 우울했던 내 마음에 따스한 빛으로 스며들고 습했던 마음에 부드러운 바람이 되어 나를 미소 짓게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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