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시리즈 70
행복론의 두 번째 탈세속주의는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세속적 행복은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다. 그것을 뛰어 넘는 초월적인 어떤 것에 행복이 있다는 설로 훌륭한 삶의 영위(객관적 행복)나, 쾌락의 추구(주관적 행복) 등의 세속적인 행복 추구는 무의미하며 불가능하다는 논조를 가진다. 그러므로 객관적 행복을 통해서도 주관적 행복을 통해서도 우리는 세상에서 행복해질 수 없는 세속의 부조리함이 강조되는 허무주의를 낳는다.
이것의 단적인 예로 고대 로마의 철학자, 연설가, 정치인, 희곡 작가이며 대표적인 후기 스토아 학파 철학자로서, 로마 제국의 폭군 네로의 스승으로도 유명했던 세네카(기원전 4년경 - 기원후 65년)는 네로 당대 최고 정치인, 부와 권력을 지녔지만 그의 말년은 모함으로 불행해황제 네로로부터 ‘자살하라.’는 명을 받고 친척들마저 죽임을 당했던 죽고, 스토아 철학자로서 본인은 ‘행복했다.’고 했지만 이건 누가 봐도 불행한 삶이었다던 행복과 불행은 인간 권한 밖의 문제가 아닐까, 곰곰이 생각하게 한다.
세네카(기원전 4년경 - 기원후 65년)
성 아우구스티누스(신부, 혹은 교부/기원후 354년 11월 13일 - 430년 8월 28일)는 현세의 덧없는 것들은 진정한 행복과 전혀 무관하다. 진정한 행복은 신만이 줄 수 있다. 신을 따르는 삶만이 지복(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라며 신에 대한 믿음/구원에의 소망/신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지복에 이를 수 있고 그마저도 세속적으로는 불가능하고 신의 도움으로만 가능하다는 현실로부터 도피적인 주장을 편다.
동양의 석가모니(기원전 560년 무렵 - 기원전 544년) 또한 현세의 삶은 고통(악)의 연쇄이며 고통의 연쇄를 끊어야 한다. 즉 속세의 삶을 초월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 사상을 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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