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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레프 톨스토이/문학동네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3. 11. 25.

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시리즈 73

#책을 읽고 난 후에 느리게 도착하는 어수선하고 기꺼이 미완성인 편지들

 

 

 

 

군산대 독서 모임 필담의 2학기 마지막 토론 모임이 다가온다. 이번 책은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비교적 짧은 단편이다. 이 책을 읽는 중 철학가나 철학 주제를 가지고 A4 3매 내외의 리포트 과제가 주어져 다음과 같은 글이 완성되었다.

 

 

나의 주제: 나는 무엇으로 살아갈 것인가?

 

이 과제를 받았을 때 나는 마침 레프 톨스토이(1828~1910)의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고 있었다. 40여 년도 더 전에 의미도 모른 채 읽었던 정음사 판 톨스토이의 작품들인 부활,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를 읽으며 희열감에 젖어 쉽게 책을 내려놓지 못했던 어떤 간절함도 생각났고 톨스토이가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주제로 택한 인류애적인 사랑을 이 글에서는 또 어떻게 펼칠까, 호기심이 동했다.

소설 속 가난한 구두장이 세묜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집에 천사 미하일을 숨겨주는데 미하일은 하늘에서 쫓겨나 지상에 내려와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세 가지를 배울 기회를 얻는다. 그 세 가지는 바로 첫째, 사람들 안에 무엇이 있는가? (165), 둘째,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165), 셋째, 사람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166) 라는 질문을 던지며 아래와 같은 명확한 답을 찾는다.

첫 번째 질문에 저는 사람들 안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165),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자기 몸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힘을 기르는 것의 중요성이었으며 (166), 세 번째 질문에 답으로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167)이라는 답을 제시한다.

톨스토이는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인간관계에서 혹은 우리의 삶에서 사랑, 연민, 이해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싶다.

지금까지 나는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셨고, 그들이 살아가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번에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사는 것을 원하신게 아니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신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제각각 보여주지 않으셨고 사람들이 평화롭게 더불어 사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을 위해,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보여주셨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걱정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보일 뿐이고 사실은 사랑으로만 살아가는 것임을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 안에 사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살고 있고 그 사람 안에 하느님이 살고 있는 것이다.” (168)

라는 마지막 진술을 끝내고 천사 미하일은 하늘로 올라간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에서 등장인물인 구두 수선공 세묜이 천사 미하일의 정체를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낯선 사람(미하일)에게 친절하고 관대하게 대하는 행동, 당장 다가올 죽음을 알지 못했던 지주의 에피소드와 여자아이 둘을 데리고 나타난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심 없는 봉사가 한 개인의 삶에서 어떤 변화를 초래하는지에 대한 예시를 보여주며 인간의 삶의 목적과 성취는 사랑과 연민을 통해 찾을 수 있다는, 삶의 의미를 다시 한번 우리에게 성찰케 한다.

이처럼 톨스토이는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직접적인 주제로 우리에게 인간 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사유하게 하는데 나는 그동안 유럽 문화와 사상동양사상의 수업 통해 접했던 동서양의 철학가들이 언급했던 삶의 목적과 태도 등을 잠시 살펴보며 더 나아가 나는 무엇으로 살았고, 현재 살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내 사유를 확장해 보려 한다.

먼저 동양 철학의 주축인 유가에서의 모든 인간은 도덕적 행동을 통해 가족, 사회, 국가와 조화롭게 상호 작용하며 자기를 계발하는 것을 삶의 태도로 보고 이를 통해 인간은 더 높은 도덕적 수준과 사회적 안정을 찾아야 한다고 권유한다. 또한 도가에서는 인간은 인간다운 본성과 조화를 찾아가며, 불필요한 노력과 강요를 배제하고 단순하고 순수한 형태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인간은 자연의 원리인 도()에 순응하면서 변화를 수용하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삶의 태도라고 여기고, 불가에서는 모든 존재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가르치며 이를 통해 윤회의 고리에서 탈출하고 개인적인 해방을 이루는 것이 삶의 태도라고 설파한다.

한편 서양 철학자들은 인간 삶의 목적과 태도를 어떻게 펼쳤을까를 짧게 살펴보면 우선 swan song, “너 자신을 잘 돌보라.”라는 말로 우리 각자의 영혼을 잘 돌보는, 성찰하는 삶을 강조 했던 소크라테스(기원전 470~기원전 399)를 필두로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는 인간이 목적 지향적 존재임을 밝히며 인간의 삶의 가장 좋은 것이자 최고의 목적은 행복이며 이 행복의 조건으로 완전성과 자족성을 드는데 행복은 주관적 만족감이 아닌 객관적 만족감(객관적 성공, 성취, 달성)이라고 말하며 내가 가진 덕목들로 공동체 내에서 좋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권고하는 한편 순수한 이성적(지성적) 행위를 통한 행복 또한 무시하지 않는다.

헬레니즘 사상을 대표하는 학자 에피쿠로스(기원전 341~기원전 271)는 삶의 목적은 쾌락의 축구이며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행복하기 위해서는 쾌락을 추구하는 것보다 고통을 제거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라는 소극적 쾌락주의를 주장하며 진정한 행복은 내가 이룰 수 없는 욕망, 충족해도 고통만을 일으키는 욕망을 제거해 감정적, 정신적 동요나 혼란이 없는 평정심으로 살아가는 아타락시아상태의 삶을 권유한다.

또한 프랑스의 사회 계약론자이자 계몽주의 철학자인 루소(1712~ 1778)는 인간의 삶의 목적은 자유롭게 살고 본능을 따르며, 평등한 상태에서 다른 인간과 조화롭게 공존하며 인간이 사회적인 구조에 의해 훼손되는 것을 비판하고, 자연의 상태에서의 순수한 형태의 삶을 찾는 것을 강조한다. 근대 계몽주의를 정점에 올려놓았고 독일 관념 철학의 기반을 확립한 칸트(1724~1804)는 인간은 자유의지와 도덕적 의무를 통해 도덕적으로 행동하고, 다른 인간과 상호 작용하여 도덕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 인간의 삶을 대하는 태도라고 했고, 서구의 전통을 깨고 새로운 가치를 세우고자 했던 까닭에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을 지닌 니체(1844~1900)는 인간의 삶의 목적은 단지 '생존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될 수 없고 그 목적이나 가치에 대한 개념을 상대적이고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했는데 삶의 목적을 개인적으로 찾아가는 주체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국지적인 도덕이나 가치를 넘어서는 자신만의 도덕을 찾아서 자유롭게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태도로 살아가라고 주장한다. 현대에 들어, 고대 그리스, 로마 철학, 정치 철학, 페미니즘, 동물권을 포함한 윤리학 분야의 연구로 알려진 마사 누스바움(영어: Martha Nussbaum, 1947~ )은 감정, 도덕성, 정의, 인간관계에 대한 관점을 통해 풍요로운 감정적 경험과 도덕적 삶을 추구하며 타인과의 공정하고 동등한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는 가치의 중요성을 말한다.

이렇게 간략하게 동서양 철학에서 인간 삶의 목적이나 태도를 어떻게 주장했는지 살펴보았는데 위 주장들의 많은 부분들은 이미 내가 거쳐왔던 나의 삶 부분, 부분에서 한 번쯤 고민하며 어렴풋하게나마 더듬었던 사유였고 그 가치 아래 살아왔음에 무릎을 치며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더불어 얼마 전 독서 모임에서 읽었던 로랑스 드빌레르의 책 모든 삶은 흐른다라는 책에서 인생은 바다의 밀물과 썰물이 있듯, 올라갈 때가 있고 내려갈 때가 있으므로 불안하고 고난과 역경을 피할 수 없는 삶 앞에 고난과 역경에 지치지 말고 너울거리는 물결에 몸을 맡기면 삶의 영원함의 리듬감에 젖을 수 있어 계속 나답게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데 나는 이 나답게산다는 의미에 좀 더 집중하게 된다. 내가 해석한 나답게 산다는 의미는 결국 나의 자유의지를 배경으로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내가 정립한 도덕성을 찾아 나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는 과정 중에 나 한 개인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 속의 나를 인식할 수 시간이 똑똑 내 심장을 두드리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좀 더 부연 설명하자면 20대까지의 나는 기독교 문화에 심취해 있었기에 인류애적 사랑이라는 거대한 담론에 기초하는 삶을 살아보고자 했으나 결국 84년 대학을 졸업한 후 내 최대 관심사는 자아 완성을 위해 세상의 많은 경험을 쌓아 진짜 나의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까닭으로 불타는 모험심으로 천방지축 날뛰는 삶을 살았다. 40대 이후 나의 삶은 비록 종교를 떠나왔으나, 인간의 창조주인 하느님이 나를 세상에 등장시킨 것은 그래, 너도 좀 재밌게 살아보아라, 인생 뭐 별거 있니? 날마다 축제처럼 말이야.”라는 임무를 주었다고 생각했고 그것에 맞추는 삶을 살기 위해 분주했다. 그러다 내 선택에 의해 거듭된 고난은 , 이거 아니었나. 내가 너무 방자했나?” 드디어 자기 성찰의 단계에 이르니 방만했던 삶을 정리하지 않을 수 없었고 비록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이지만 리셋을 해야 한다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을 맞이하며 오늘의 나에 이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나는 어떤 생각을 품고 살고 있을까? 오늘의 나는 여전히 종교와 멀어져 있고 더 이상 종교의 그늘에 있고 싶지 않지만 어린 시절 종교 안에서 싹텄던 나의 달란트란 개념을 어린 시절 이후 줄곧 생각해왔는데 어쩌면 지난 나의 모든 삶은 바로 나의 달란트가 무엇인지를 찾기 위한 여정이었음을 깨달았으니 웃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몸도 마음도 가난한 내가, 과연 달란트란 것이 있기나 할까? 그것을 찾기 위해 지난 10년은 몹시도 고단했으나 몸과 마음 주머니가 보잘것없이 소소한 내가 무엇인가를 써야 한다는, 세상을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기에 보잘것없는 솜씨라도 꾸준하게 써 내려가 내 몫의 세상을 향한 작은 등불이 된다면 내가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아가야 할 미래가 아닐까, 라는 지점에 이르게 되었다.

조금도 특별하지 않으나 특별한 말, 인생, 그 인생이란 길은 길로 이어지는 것이어서 한번 놓친 길은 다시 걸을 수 없는 것이라 아무리 후회한들 다시 돌이킬 수 없고 오직 나아가야 할 미래만이 놓여있는 이 시점에서 나는 내 몸을 돌보며 내 마음을 모아 이제 무엇인가 열매를 맺어야 할 시간이 도래했고 그 열매는 쓰든, 달든, 시큼하든, 내 몫의 작은 열매가 목이 말라 아프고 고통스런 누군가에게 아스피린 같은 것이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더 욕심을 부린다면 보잘것없는 나의 글이 누군가의 미래의 시간을 비출 작은 등꽃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일념만이 이제 내 미래에 놓여있다는 것을 통감하는 시간, 늦게 피는 꽃은 있어도 아니 피는 꽃이 없다는 누군가의 말에 위로를 받으며 이런 나의 사유를 산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모든 분들, 특히 교수님, “고맙습니다.”라는 마음의 인사를 하며 이 글을 맺는다. ()

 

 

                                                                            레프 톨스토이(1828년~19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