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시리즈 69
유럽의 문화와 사상
주제별로 공부하기 – 가치론 편
행복론의 시작은 길가메시 서사시로부터 기원전 5, 6 세기(축의 시대)에 행복에 대해 관심을 가진 공자, 붓다, 조로아스터, 노자, 소크라테스 등장하였고 이들의 주된 관심은 ‘잘 사는 것’, 즉 행복이었다. 이후 기원후 1세기경에는 행복에 대해 구원이라는 종교적 개념이 등장(기독교의 구원, 에피쿠로스의 쾌락인 ataraxia, 스토아의 금욕 apatheia 등등)했다.
이러한 행복의 관점을 철학적으로 고찰한 3가지 측면으로 벤담, 밀, 에피쿠로스 등이 주장한 주관적 행복론 즉 욕망과 충족이 곧 행복이며 욕망 충족과 쾌락은 주관적인 느낌이고, 행복은 주관적 판단에 좌우되는데 행복한지 아닌지는 나만 알 수 있다, (개인적인 꿈을 찾고 만족시키면 행복하다.)는 쾌락주의,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세속적 행복은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다. 그것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어떤 것이 행복이 이라는 종교적 차원의 탈세속주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맥킨 타이어, 찰스 테일러 등이 주장하는 덕, 탁월한 행동이 곧 행복하다는 객관적 행복론이 있다.
이 장에서 다루고 싶은 행복론은 우선 쾌락주의 행복론인데 행복의 절대적인 기준은 ‘쾌락의 극대화/고통의 최소화’ 뿐이며 쾌락, 고통은 주관적인 느낌이어서 행복하냐 아니냐는 나만 알 수 있으며 통상 개인이 진정으로 달성하고 싶은 욕망이나 꿈을 발견하고, 그 수단을 가지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원하는 욕망이 많이 충족될수록 행복이고 원하는 욕망이 좌절되면 불행하다고 주장된다.
이를 바탕으로 쾌락주의 인간관은 인간은 쾌락의 충족에서 만족하는 동물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감각적 쾌락’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하는데 2원론을 거부한 유물론자로 인간은 물질로만 이뤄진 기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18세기 극단적 쾌락주의자이며 프랑스 계몽주의자인 줄리엥 라 메트리는 “음란함과 추잡함은 너의 영광스러운 운명이니라. 그 안에서 돼지처럼 뒹글어라. 그러면 돼지처럼 행복하리라.”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기기도 했다.
이러한 쾌락주의적 행복론을 주장한 인물로 기원전 3세기경, 알렉산더 대왕의 헬레니즘 시대에 활동한 에피쿠루스 학파를 들 수 있는데 Carpe diem(이 순간을 즐겨라, 호라티우스)이 지배적이던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여 이들은 삶의 목적은 쾌락이며 욕망의 만족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 대표적인 인물인 에피쿠로스(그리스 사모스 섬/기원전 341년경 -기원전 271년경)는 행복하기 위해서는? 쾌락의 추구보다 ‘고통의 제거’ (감정곡선 0에서 행복)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은 고통이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발생하는데 이러한 지진이나 해일과 같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학문을 통해 과학적으로 이해되고 예측될 수 있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으며, 죽으면 고통스러울 것이라 생각하고 두려워 하는데 죽음이 닥칠 때 감각 능력은 이미 없어 고통을 느낄 수 없으므로 죽음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는 유물론 즉 인간은 육체만 있다는 생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했다.
고통을 제거하는 두 번째 방법으로 고통은 욕망이 좌절될 때 생기므로 따라서 과도한 욕망을 버리면 고통은 생기지 않으며 진정한 행복은 과도해서 이룰 수 없는 욕망, 불필요한 욕망을 제거하는 데서 오는 즉 내가 이룰 수 없는 것은 바라지 않는 것, 바라는 데서 고통이 오니까,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의 상태가 제거된 마음의 Ataraxia(평정 상태)를 꿈꾼다.
그 문제점 즉 아타락시아는 ‘고통의 제거’라는 소극적 행복 상태인데 이런 것을 행복이라고 할 수 있는가, 외부의 문제는 건드리지 않은 채, 상황을 바라보는 내부의 인식만 바꾸는 것은 아닌가, 라는 의문점을 낳는다.
또한 리처드 이스털린( 미국 경제학 교수/1926 ~) 같은 이는 돈과 행복은 일치할까, 라는 문제를 거론하며 소득과 행복 그래프를 보면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게 되면, 행복 지수가 오히려 줄어든다며 이것은 이스털린의 역설로 상식적 경제 논리에 위배 된다고 주장한다.
폴 새뮤엘슨(미국의 경제학자/1915 – 2009) 같은 사상가는 행복 = 소유/욕망: 소유에 비례하고 욕망에 반비례하므로 소유를 늘릴 수 있다면 늘어나는 만큼 난 행복할 수 있는데 (단 욕망이 그만큼 더 늘어 난다면 행복은 커지지 않는다.)욕망을 고정하거나 줄이는 한에서 소유가 많아질수록 행복하고 현실적으로 소유를 늘릴 수 없다면 소유를 통해서 행복을 늘릴 수 없으므로(단 욕망을 줄인다면 행복을 늘릴 수 있다.) 욕망을 줄이는 한에서 소유가 고정되어도 행복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쾌락주의의 문제점으로는 반복될수록 만족도가 떨어지므로 더 큰 자극이 필요하며 지속성이 없는 일시적일 뿐이어서 또 다른 반복된 자극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또한 쾌락은 감정 곡선에서 평상시를 0으로 놓았을 때 이보다 높은 수치에서 생기므로 감정의 고조 상태에서 쾌락을 경험한 사람은 감정의 동요 없는 평상시 0의 상태에서 고통의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에피쿠로스 같은 학자는 행복을 감정 곡선 0의 상태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쾌락의 과도한 추구는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쾌락의 추구 – 후회감과 고통) 쾌락의 역설이 발생하며 만족감이 자신의 무지나 환상으로부터 나타날 수 있는 진짜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라캉(프랑스 파리/1901년 4월 13일 -1981년 9월 9일) 같은 인물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충족된 욕망은 ‘나’의 욕망이 충족된 것이 아니고 내가 원하는 욕망은 사실 타인과 사회적 기대의 주입이다, 라고 주장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행복이 아닌 ‘나’의 행복을 추구하려면 ‘나’의 욕망,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사유해야 함이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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