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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꽃비를 맞으며 어제는 비바람이 불었다. 은파호수공원에 만개한 벚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졌고, 꽃마중을 나온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모처럼의 봄나들이였을 텐데, 바람은 사정없이 불었고, 꽃은 그렇게 망설임도 없이 흩어졌다. 우산을 쓰고 떨어지는 벚꽃잎 아래를 혼자 걸었다. 떨어진 여린 꽃잎들을 밟으려니 자꾸 머뭇거려졌다. 미안하다, 마음으로 말하며 벚꽃 가지를 한참이나 올려다 보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만남은, 만나자마자 이별을 준비하는구나. 어떤 애틋함이랄까. 사진을 찍는 사람들 틈에서, 벚꽃보다 바닥에 먼저 떨어진 꽃잎들에 눈이 갔다. 누군가 밟고 간 자국 위에도, 고요하게 겹겹이 깔린 꽃잎들. 바람이 이렇게 부니, 떨어진 꽃잎들은 곧 어딘가로 쓸려 사라지겠지. 비바람이 얄궂기도 하고.. 2025. 4. 14.
윤대녕 『은어낚시통신』을 읽고: 은어처럼 잊혀진 것들을 향해 은어처럼 잊혀진 것들을 향해 — 윤대녕 『은어낚시통신』을 읽고 누군가를 잃었다는 감각은, 내 안의 어떤 문장이 중간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잘 쓰이다가 도중에 지워진 한 줄의 글, 혹은 보내지 못한 편지와 같다.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은 그런 배경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응답하지 않는 타자를 향해, 계속해서 던져지는 질문들로 구성된 고요한 독백. 나는 그 책을 읽으며, 내 안에도 답장 없는 편지가 한 통쯤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오래 했다. 이 작품은 오래전에 읽은 단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난 뒤 다시 펼쳤을 때는 전혀 다른 울림으로 다가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은어낚시통신』은 1995년 3월 28일자 1판 1쇄 인쇄본이다. 2010년 같은 출판사에서 다시 출간되었다.. 2025. 4. 14.
2025년 1학기 문학연구방법론 요약하기 말해지지 않은 것의 자리에 말을 놓기 위하여― 문학비평, AI 시대, 그리고 나의 감각오늘은 2025년 4월 4일, 대한민국 역사에 또 하나의 격렬한 문장이 쓰인 날이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인용되었고, 나는 그 순간 책상 앞에서 숨을 죽인 채 역사의 진실이 마침내 말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 침묵과 분노, 좌절과 희망이 교차하는 나날 속에서, 나는 오직 하나의 진실이 외면당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마침내, 탄핵 인용이라는 짧고도 단단한 선언이 화면 너머로 들려왔을 때, 나는 가슴이 터질 듯한 흥분과 감격 속에서 기쁨을 어쩌지 못했다. 손끝이 떨렸고, 마음 한복판이 환하게 무너졌다. 이것은 단지 정치적 사건이 아니었다. 이것은 말해지지 않던 것들이 마침내 말해지기 시작한 .. 2025. 4. 4.
현대 시론 과제 『시론』 제1장 정리 복수전공인 국문과의 수강과목 ‘현대시론’의 첫 번째 과제로 삼지원(三知院)에서 출판된 김준오님의 『시론』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시론』 제1장을 정리하면서 나는 시라는 장르를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마음이 되었다. 시는 단순히 감정을 토로하는 형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었고, 언어를 다루는 고유한 철학이었으며, 무엇보다 존재를 드러내는 섬세한 예술이었다. 시를 모방, 표현, 효용, 구조의 관점으로 나누어 사유하는 일은 마치 하나의 풍경을 여러 빛깔의 렌즈로 번갈아 바라보는 일이기도 했다. 각기 다른 각도에서 그려진 시의 얼굴은 상반되면서도 서로를 보완했다. 그리고 그 복잡한 구조 속에서 나는 시의 매혹적인 본질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특히 마음에 남았던 것은 ‘동일화의 원.. 2025. 4. 3.
조경란의 『그들』의 불안과 침묵, 타자성의 윤리 조경란의 단편소설 『그들』은 2023년에 발표되어, 2024년 김승옥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문학동네에서 펴낸 『2024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되어 있으며, 나는 이 작품을 현대소설강독 수업 시간에 처음 접했다. 말해지지 않는 감정들과 인물들 사이를 흐르는 침묵의 결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고, 그 여운을 따라가며 다음과 같은 내 나름의 분석을 시도해 보았다.     조경란의 『그들』의 불안과 침묵, 타자성의 윤리 Ⅰ. 서론: 말해지지 않은 관계, 불안의 정서1.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정조 소개조경란의 『그들』은 말해지지 않은 감정들로 채워진 관계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인물들은 서로를 응시하면서도 말하지 않고, 감정을 자주 유예하거나 감춘 채 살아간다. 이 소설은 극단적인 사건이나 격렬한 대립.. 2025. 4. 2.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의 사유: 이승우 『사해』에 나타난 결핍과 실존적 침묵」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의 사유: 이승우 『사해』에 나타난 결핍과 실존적 침묵」  Ⅰ. 서론1. 연구 목적 및 문제 제기이승우의 단편소설 『사해』는 외형적으로는 특별한 사건 없이 고요하게 전개되지만, 그 내면에는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자리한다. 말하지 못하는 자, 관계를 맺지 못하는 자, 유서를 끝내 쓰지 못하는 자—『사해』의 주인공은 사회적 소외, 내면적 고립, 실존적 침묵을 체현하는 인물이다. 그는 타자와 감정을 교환하지 못한 채 살아가며, 죽음을 앞둔 순간조차 말하지 못하고, 아무런 감정의 기미도 드러내지 못한다. 그러나 이 침묵과 무반응은 무감각이 아니라, 말하지 않음으로써 존재를 감당하는 하나의 윤리적 형식으로 읽힌다.이 작품은 특히 “유서 쓰기”라는 과제를 중심으로, 주인공이 어떻.. 2025. 4.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