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戀書시리즈 - 독후감

조경란의 『그들』의 불안과 침묵, 타자성의 윤리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5. 4. 2.

 

 

 

조경란의 단편소설 그들2023년에 발표되어, 2024년 김승옥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문학동네에서 펴낸 2024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되어 있으며, 나는 이 작품을 현대소설강독 수업 시간에 처음 접했다. 말해지지 않는 감정들과 인물들 사이를 흐르는 침묵의 결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고, 그 여운을 따라가며 다음과 같은 내 나름의 분석을 시도해 보았다.

 

 

 

 

조경란의 그들의 불안과 침묵, 타자성의 윤리

 

. 서론: 말해지지 않은 관계, 불안의 정서

1.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정조 소개

조경란의 그들은 말해지지 않은 감정들로 채워진 관계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인물들은 서로를 응시하면서도 말하지 않고, 감정을 자주 유예하거나 감춘 채 살아간다. 이 소설은 극단적인 사건이나 격렬한 대립보다는, 말과 감정이 비껴가는 장면들을 통해 긴장과 거리감의 미세한 결을 드러낸다. 인물들이 맺는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지도, 완전히 연결되지도 않은 채, 일종의 경계 위에 머문다. 이러한 정서적 구성은 작품 전반에 흐르는 묵직한 불안과 정서적 응시를 가능하게 하며, 독자 또한 이들의 침묵 속에 잠긴 고통과 응어리를 따라가게 만든다.

 

2. 침묵, 관계, 불안, 감정의 유예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그들을 읽는 비평적 관점 제시

이 글은 그들에 나타나는 인물 간의 관계를 말해지지 않음의 층위에서 재조명하고자 한다. 특히 침묵과 불안, 감정의 유예라는 정동적 조건들이 인물 간의 거리와 타자성을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분석의 중심에 둔다. 종소, 영주, 최 교수, 상현 등 주요 인물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감정을 억누르거나 지연시키며, 관계 속에서 자신을 투명화하거나 타인을 타자화한다. 이 글은 장-뤽 낸시의 공동존재’, 조르조 아감벤의 비작동(dis-activation)’ 윤리, 미하일 바흐친의 대화 부재개념을 이론적 틀로 삼아, 이들이 구성하는 감정의 윤리학과 타자성의 지형을 추적한다. 그들은 이처럼 말하지 않는 자들, 감정을 유예하는 자들, 책임을 회피하는 자들로 구성된 불안한 공동체의 모습을 통해, ‘함께 있음의 윤리적 조건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 인물과 서사 개관: 그들의 감정 지도와 이야기의 결

1. 종소: 고립된 책임감 속에 침잠하는 존재

1) 현재 상황

종소는 시간강사로 일하며, 우울증을 앓는 노년의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는 점차 삶의 기능을 잃어가고 있고, 종소는 그런 어머니를 돌보며 방향 잃은 삶을 불안과 무기력 속에서 버티고 있다.

어머니는 지금 방에 계신다. 자꾸 뒤를 돌아봐야 한다.”

죽음에 집착하는 종소에게는 학생 중 누군가 나를 창문 아래로 밀어뜨리려고 하면……라는 상상을 하곤한다.

2) 내면 성격

겉보기에는 조용하고 무던하지만, 종소의 내면에는 존재론적 불안과 감정의 암류가 깊숙이 자리한다. 죽음에 대한 강박, 타인에게 두려움을 유발하고 싶은 비틀린 자아 욕망, 그리고 설명되지 않는 감정의 분출 충동이 이 인물을 휘감고 있다.

나는 누군가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종소는 그 말을 확인하듯 읊조렸고 그런 자신을 타이르지도 않았다.”

감정은 뜻밖의 방향으로 튀었고 종소는 그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3) 관계적 특징

종소는 자신을 전임직에서 배제시킨 인물이 최 교수임을 알고 있고, 이후 그의 아내인 영주가 운영하는 카페에 무심히 들른다. 그러나 그는 영주에게 감정적 접근을 시도하지 않으며, 카페에 앉아 있는 그저 존재하는손님일 뿐이다.

오늘의 목적은 크게 아니었고 종소는 가능하면 이 카페에 자주 와서 앉을 작정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는 카페에 어떤 목적을 갖고 왔다는 사실. 남편은 못 오게 해야겠지.’라고 말했고, 종소는 침묵한 채 계속 앉아 있었다.”

2. 영주: 불안과 억압 사이를 걷는 조용한 균열자

1) 현재 상황

영주는 카페를 운영하며, 감정적으로 단절된 남편과, 문제 행동을 보이는 아들 상현과 함께 살아간다. 한때 안정된 일상처럼 보였던 삶은 이제 불안정한 균열 위에 놓여 있고, 그녀는 그 균열을 무시하거나 억누르며 버텨낸다.

2) 내면 성격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순간에도 영주는 말없이 스스로를 억제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내면에는 언젠가 터져버릴 것 같은 압축된 불안과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감정이 맴돈다.

그런 마음을 너무 눌러놓으면 언젠가 크게, 너무 크게 터져버려 수습할 수 없어질 거라는 지금껏 지켜온 생활이 모두 무너져버릴 거란 불안이 들었다.”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지금은 밥통이 너무 무거워져서 영주는 그걸 가슴 앞으로, 자신의 두 손으로 떠받치듯 들고 걸었다.”

거긴 혼자 있는 시간이 가장 좋았고 가장 불안했다.”

3) 존재 의식과 자각

영주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명확히 직면해 본 적이 없는 인물이다. 상담사의 말을 통해서야 처음으로 자신의 내면과 삶의 어긋남을 감지한다.

반평생을 살아왔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제대로 들여다본 적 없다는 사실을, 영주는 상담사의 말을 통해 처음으로 감지한다.

4) 종소와의 관계

종소는 영주의 카페에 묵묵히 찾아와 앉아 있는 손님이다. 영주는 그를 낯선 이로 인식하면서도 묘한 동요를 느끼고, 그의 헤진 재킷을 바느질해 주는 장면을 통해 일시적인 접촉이 발생한다. 종소는 그 자리에서 어머니의 울음과 가정폭력을 무심히 털어놓고, 영주는 그 고백을 말없이 받아낸다. 이 만남은 유대가 아닌, 스쳐가는 침묵과 고백의 형태다.

계속 아무 말도 없이 들어만 준 낯선 남자. 남편이 출입을 금지하고 싶어하는 새 단골손님에게 영주는 도로 뒤집은 재킷을 내밀었다.”

어머니가 자주 우십니다. 소리내서요. 제 어머니는 지금도 자주 맞아요. 팔순 넘은 아버지에게.”

3. 최 교수: 책임의 외피를 두른 회피적 실용주의자

1) 현재 상황

최 교수는 전임 교수로서 안정된 지위를 누리며, 가족 내에서도 가장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듯 보인다. 겉으로는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성격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책임 있는 자리에 있기를 원치 않으며, 늘 감정적 거리를 둔다.

2) 내면 성격

그는 중심을 피해 말하고, 정면 돌파보다는 우회하는 방식으로 상황을 처리하는 데 익숙하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모든 상황을 신중함이라는 이름 아래 정리하려 한다.

남편은 말할 때면 중심을 피해 가려는 버릇이 있었다.”

신중하고 자기 외에는 쉽게 믿지 않고 끈질긴 데가 있는 사람이니까.”

학교에 영주가 가면 좋겠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 전하는 남편.”

3) 가족 내 역할

상현이 압사 놀이 사건을 저질렀을 때, 최 교수는 피해자 부모를 직접 찾아가 사과하고 해결하려 한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정서적 공감이나 감정적 책임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외부적 질서를 유지하려는 실용주의적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런 남편은 그런 아빠였고, 부자가 그런 관계라는 점은 영주에게 한 걸음 물러나 바라볼 수 있게 했다.”

4. 상현: 공동체 윤리 붕괴의 징후

1) 현재 상황

상현은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압사 놀이를 하다 또래 아이를 기절하게 만든 청소년이다. 그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며, “영상에서 본 걸 따라 했을 뿐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2) 내면 성격

상현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각이 둔감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의 폭력성은 악의보다는 공감 능력의 결여와 현실 인식의 미숙함에서 비롯된다. 그에게는 자신이 가한 행위가 타인에게 어떤 결과를 남길 수 있는지에 대한 윤리적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다.

장난으로 비명을 지르고 119에 전화하는 흉내도 냈다고 했다. 마지막엔 입에 거품을 물고 혼절해 있었다.”

여기서 입에 거품을 물고 혼절해 있었던것은 상현이 아니라, 상현 일행이 벌인 놀이에 의해 피해를 입은 학생이다.

3) 관계

상현은 부모와의 관계에서도 균열을 일으킨다. 영주는 아들의 폭력성과 무감각에 충격을 받고, “그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감정을 품는다. 이는 모성의 붕괴와 자책, 공포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반면 최 교수는 상현을 비호하며 그에게 책임을 묻기보다 이해하려 한다. 이처럼 상현은 가족 간의 틈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균열의 매개자로 기능한다.

5. 서사 흐름 요약:

그들의 서사는 명확한 갈등 구조나 사건 중심의 전개가 아니라, 인물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과 침묵의 리듬을 따라 구성된다. 중심에는 네 인물인 종소, 영주, 최 교수, 상현이 있으며, 이들 모두는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서로를 견디고 응시하거나, 피하고 침잠한다.

종소는 자신을 전임직에서 밀어낸 최 교수에 대한 감정을 명확히 표현하지 않은 채, 그의 아내 영주가 운영하는 카페에 무심히 출입한다. 그는 카페에 앉아 있을 뿐, 영주와의 대화나 상호작용을 거의 시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주는 종소의 존재에 미세한 동요를 느끼고, 그의 찢어진 자켓을 기워주거나, 그의 고백을 말없이 듣는 방식으로 일시적인 접촉을 나눈다. 이들은 유대를 맺지도, 완전히 외면하지도 않은 채, 불투명한 거리를 유지한다.

한편, 상현은 학교에서 압사 놀이 사건을 일으켜 친구를 기절하게 만든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뚜렷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부모인 최 교수와 영주는 이 사건을 정서적으로 감당하지 못한 채 각자의 방식으로 회피하거나 억제한다. 최 교수는 피해자 부모에게 사과하고 사태를 정리하려 하지만, 이는 실질적인 공감이 아니라 질서를 유지하려는 언어적 처치에 가깝다. 반면 영주는 상현에게서 느끼는 낯섦과 공포, 모성의 균열을 언어화하지 못하고 내면에 눌러둔 채 견딘다.

종소는 그 모든 장면들의 주변을 맴도는 침묵의 인물이다.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도,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도 않지만, 그저 앉아 있는 방식으로 관계 속에 머문다. 그 누구도 명확히 타자에게 다가가지 않으며, 모두가 서로를 향해 조용한 불안을 떠안은 채 감정의 윤곽을 흐린다. 이처럼 그들은 관계와 고백, 침묵과 거리의 애매한 지점을 따라 흐르며, 결국 단절도 연결도 아닌 관계 아닌 관계의 상태를 그려낸다.

 

. 말하지 않는 이들로 이루어진 풍경: 침묵과 공존의 윤리

<-뤽 낸시의 공동존재개념을 중심으로>

조경란의 그들에는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없다. 인물들은 서로에게 명확히 다가가지 않으며, 감정의 진실을 발화하기보다 침묵과 회피, 정지된 동작 속에 머무른다. 그러나 그들은 철저히 고립되거나 해체되지 않는다. 말해지지 않음 속에서도 서로를 감지하고, 침묵을 공유하며, 같은 공간에 함께존재한다. 이러한 관계의 양상은 장-뤽 낸시가 말한 공동존재(être-avec)’의 사유와 겹쳐진다.

낸시에 따르면 존재는 단독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항상 다른 존재들과 함께 있으며, ‘함께 있음은 본질적으로 분리와 접촉, 경계와 마주침의 구조 속에 놓인다. 그는 공동체를 어떤 동일성의 총합이나 단일한 주체로 환원하지 않으며, 오히려 관계들의 분절, 타자의 등장, 해체적인 공존을 공동체의 조건으로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동존재는 서로가 서로에게 완전히 닿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함께 있는 존재들의 윤리적 구조를 드러낸다.

그들속 인물들은 이 공동존재의 경계 위에 놓여 있다. 종소는 영주의 카페에 찾아와 침묵 속에 앉아 있는 인물이다. 그는 말을 걸지 않고, 눈에 띄는 감정도 드러내지 않지만, 그 자리에 반복적으로 머무르며 존재를 각인시킨다. 영주는 그를 내쫓지 않고, 오히려 그의 찢어진 자켓을 기워주며 응답한다. 말이 오가지 않는 이 만남은 낸시가 말한 나란한 존재들의 구조, 즉 말없이 서로의 존재를 감지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침묵은 거리를 만들지만, 동시에 그 거리에서 공존을 가능케 하는 윤리적 조건으로 작동한다.

최 교수와 영주의 관계 역시 말해지지 않는 정서로 가득 차 있다. 상현의 폭력 사건 이후, 부부는 이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 각자의 해석과 침묵 속에 물러서 있다. 그러나 그들은 물리적으로 함께 있고, 일상을 유지하며, 서로를 정서적으로 회피하면서도 분리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침묵의 지속은 완전한 단절이나 무관심이 아니라, 불완전한 이해와 불확실한 감정 속에서 함께 있기를 계속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말이 없는 관계가 곧 실패한 관계나 해체된 공동체를 의미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말해지지 않은 채 지속되는 침묵 속에서, 인물들은 저마다의 고통과 불안을 안고 타자의 존재를 수용한다. 이때 침묵은 이해의 실패가 아니라, 말을 통해 쉽게 합의하지 않는 윤리적 거리, 또는 서로의 존재를 감내하기 위한 미세한 간격이다.

낸시의 공동존재 개념은 그들속 인물들이 맺고 있는 관계의 성격을 윤리적 차원에서 조명하게 해준다. 이들은 타자에게 도달하려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철저히 회피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말없이 존재를 공유하며, 타자의 침묵을 감당하고, 감정의 접속 없이도 함께 있음을 지속한다. 그들은 이처럼 침묵으로 연결된 공존의 풍경을 통해, 오늘날의 관계 윤리를 사유하게 한다.

 

. 침묵의 윤리, 감정의 유예: 영주의 내면과 압축된 정서

<조르조 아감벤의 비작동윤리로 읽기>

영주는 그들속에서 가장 조용한 인물이지만, 동시에 가장 많은 감정을 억제하고 있는 존재다. 그는 폭력적이지 않고, 직접적으로 항의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자신의 감정조차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 채 일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바로 그 억제의 과정에서, 그는 말해지지 않은 감정의 덩어리를 자기 내면에 압축시켜 나간다. 이때의 억제는 무기력한 침묵이 아니라, 윤리적 감정을 유예하는 방식이자, 고통을 말로 환원하지 않는 긴장의 상태다. 이러한 감정의 유예와 침묵은 조르조 아감벤의 비작동(dis-activation)’ 윤리 개념과 깊이 맞닿는다.

아감벤은 남겨진 시간(Il tempo che resta, 2000) 등에서 작동 중지(dis-activation)’라는 윤리를 제시한다. 이는 기존 질서나 체계, 기능에 저항하거나 그것을 멈추게 하는 방식으로서, 적극적인 행동이 아닌 작동하지 않음을 통해 도래할 가능성을 여는 윤리적 태도다. 단순한 무위나 포기와는 다르며, 하나의 실천적 태도이자 탈기능화된 상태에서 새로운 윤리를 모색하는 방식이다. 그는 이 비작동을 통해 우리가 규정된 역할이나 기능에서 벗어나, 존재의 가능성 자체로 머무는 방식의 윤리를 구상한다.

영주는 이와 같은 비작동의 상태에 있다. 그는 가족 내의 모순인 상현의 폭력, 남편의 감정적 회피을 직면하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폭로하거나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말없이, 고통스럽게 그 상황을 견디며 자신의 내면으로 감정을 밀어 넣는다.

그런 마음을 너무 눌러놓으면 언젠가 크게, 너무 크게 터져버려 수습할 수 없어질 거라는 지금껏 지켜온 생활이 모두 무너져버릴 거란 불안이 들었다.”

그녀의 침묵은 공허한 것이 아니라, 감정을 즉각적으로 말하거나 해소하지 않음으로써 상황 전체를 감각적으로 감내하는 방식이다. 이는 언어화의 윤리를 유예하고, 정서의 도식화를 거부하는 태도이며, 아감벤이 말한 말하지 않음의 실천에 가깝다.

또한 영주의 상태는 어쩌면 모성을 구성하는 감정적 작동에서 벗어난, 즉 어머니로서의 규범적 작동을 일시적으로 중지한 상태로 볼 수도 있다.

그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고백은 윤리의 실패가 아니라, 감정적 진실의 가장 내밀한 윤곽선에서 이루어지는 유예의 증언이다. 그는 상현을 감싸지도, 저버리지도 않으며, 일정한 거리에서 타자의 낯섦을 견디고 있다. 이처럼 영주는 감정의 윤리에서 말하지 않음을 선택함으로써, 가족이라는 공동체 질서의 작동을 중지한 자리에서 윤리적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영주의 침묵은 감정의 유예이며, 동시에 현실의 작동 방식에 적극적으로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가능한 비작동의 윤리. 그것은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포기한 상태가 아니라, 변화되지 않는 현실을 직시하고 감내함으로써 유지되는 고요한 윤리적 긴장이다. 아감벤의 이론은 영주의 무언의 저항, 고통의 응시, 그리고 정서적 침묵을 해석할 수 있는 철학적 도구를 제공한다.

 

. 유예된 책임의 언어: 최 교수와 회피의 질서

<감정의 지연과 타자성 회피에 대한 낸시적 분석>

최 교수는 그들속에서 명확한 언어를 사용하는 인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의 말은 중심을 비껴가고, 책임의 윤리를 유예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는 전임 교수로서, 가족의 가장으로서 사회적으로 말할 위치에 있는 인물이지만, 정작 그가 하는 말은 늘 타자와의 거리를 유지하며, 진실한 감정의 접촉을 회피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남편은 말할 때면 중심을 피해 가려는 버릇이 있었다.”

학교에 영주가 가면 좋겠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 전하는 남편.”

이와 같은 언어적 회피는 단순한 말버릇이나 성격적 특징이 아니라, 낸시가 말하는 타자성의 부정과 연결된다. 낸시에 따르면 타자는 근본적으로 나에게 닿을 수 없는, 완전히 동일화될 수 없는 존재이며, 우리는 이 타자성과의 접촉에서 윤리적 책임을 마주하게 된다. 타자를 같은 존재로 환원하려 하지 않고, 낯선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이 윤리의 시작점이다. 그러나 최 교수는 타자를 끝까지 낯선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말의 질서 속에 타인을 배치하고, 그를 이해하고 다루어야 할 대상으로 전유하려 든다.

상현의 압사 놀이 사건 이후, 최 교수는 피해자 부모를 직접 찾아가 사과하고 사건을 수습하는 역할을 자처한다. 그러나 그 행동은 감정적 공감이나 윤리적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실용주의적 처치에 가깝다. 그는 감정의 균열을 말로 덮고, 책임을 제도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말의 방식은, 아내인 영주와의 관계에서도 반복된다. 그는 영주의 감정에 접근하지 않으며, 상현의 폭력에 대한 정서적 대응도 피한다. 그는 가장으로서 말하지만, 그 말은 타자의 감정을 향하지 않고, 스스로를 방어하는 언어의 순환 속에 갇혀 있다. 그의 말은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유예되고 우회된다.

낸시는 진정한 공동존재가 가능하려면, 타자의 낯섦을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 나 자신이 변화될 수 있는 관계에 열려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최 교수는 자신을 변화시키는 타자의 침입을 용납하지 않으며, 모든 관계를 말의 구조로 통제하려 한다. 그의 언어는 윤리적 책임을 회피하고, 감정의 도래를 지연시키는 질서로 작동한다.

이처럼 최 교수는 말함으로써 타인을 이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말함으로써 타인을 제거한다. 그는 감정을 질서로 바꾸고, 타자를 구조화하여 책임의 윤리를 유예한다. 그들속에서 그의 말은 발화되는 동시에, 타자성을 밀어내는 도구가 되며, 침묵보다 더 단단한 회피의 벽을 구성한다.

 

. 감정 없는 폭력의 징후: 상현과 공동체 윤리의 붕괴

<미하일 바흐친의 대화 부재개념과 연결하여>

상현은 그들속 인물 중 가장 명확한 방식으로 공동체 윤리의 붕괴를 드러낸다. 그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압사 놀이를 벌여 또래 학생을 기절하게 만든다. 문제는 폭력 그 자체보다, 그 행위 이후에 드러나는 상현의 감정 상태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의 결과에 대해 실질적인 죄책감이나 공포를 느끼지 않으며,

그냥 영상에서 본 걸 따라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무감각한 태도는 단순한 사춘기적 비행이나 미성숙한 판단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타인의 감정을 상상하지 못하고, 자신의 행위가 타자에게 어떤 결과를 야기하는지에 대한 윤리적 상상력의 부재를 드러낸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 결여의 구조는 미하일 바흐친이 말한 대화의 부재개념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바흐친에게 있어 대화란 단순한 말의 교환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 타자의 응답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나의 말과 행위가 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를 감각하는 윤리적 관계다. 그는 모든 진정한 언어는 타자의 응답을 전제하는 말이어야 하며, 인간은 본질적으로 응답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그러나 상현의 세계에는 이 응답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행위는 타인을 향하지 않고, 대상을 도구화하며, 그 어떤 감정적 상호작용도 요청하지 않는다.

상현의 폭력은 상호성 없는 행위, 즉 타자와의 대화 없이 작동하는 말 없는 시스템처럼 작동한다. 그는 타인을 대상화하고, 그의 고통을 모방된 장면 속 연출처럼 다룬다. 이처럼 바흐친적 의미에서 대화의 제거는 타자의 고통에 무감각한 존재를 낳고, 공동체의 윤리를 침식시킨다. 응답 없는 세계, 타자의 목소리가 지워진 공간에서 폭력은 더 이상 윤리적 검토를 받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일어난 일로 치부되며, 상현은 그러한 세계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조차 실감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대화 부재는 가정 내에서도 반복된다. 상현의 행동은 부모인 영주와 최 교수 사이의 감정 균열을 가시화시키지만, 그들 역시 상현과 진정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말은 오가지만 감정의 상호 교환은 이루어지지 않고, 서로는 서로를 이해하려는 윤리적 접촉을 시도하지 않는다. 바흐친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가정은 응답성이 제거된 관계들의 집합이며, 그 안에서 상현의 폭력은 하나의 징후로 작동한다.

이처럼 상현은 타자를 응답 가능성 없는 대상으로 대하는 세계의 산물이며, 그들은 그가 보여주는 감정 없는 폭력을 통해 공동체 내부에서 윤리가 어떻게 실종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바흐친이 말한 대화적 관계의 해체는 타자성과 감정의 윤리를 무너뜨리며, 우리가 타인을 어떻게 감각하고 응답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남긴다.

 

. 무위한 증언자: 종소의 자리에 관하여

<조르조 아감벤의 작동 중지된 주체로서의 존재 방식>

종소는 그들속에서 어떤 명확한 역할도 수행하지 않는다. 그는 영주의 카페에 앉아 있지만 말을 걸지 않으며, 어머니를 돌보지만 돌봄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자신이 전임직에서 밀려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문제 삼거나 항의하지 않으며, 감정을 외부로 분출하기보다는 내면에 웅크린 채 침묵한다. 종소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존재',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 존재로 머무른다. 그는 '무위(無爲)' 속에 있으면서도 그 무위 자체로 상황을 증언하고, 현실을 응시한다.

이러한 종소의 존재 방식은 아감벤이 남겨진 시간호모 사케르등에서 제시한 작동 중지된 주체(dis-activated subject)’ 개념과 맞닿아 있다. 아감벤에게 작동 중지(dis-activation)’란 어떤 기능이나 제도, 규범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됨으로써, 그 본래의 작용을 벗어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단순한 정지나 포기가 아니라, 기존 시스템의 강제적 작동을 중단함으로써 생겨나는 윤리적 여백이자 도래할 가능성의 장소다. 종소는 사회적으로 규정된 역할인 시간강사, 아들, 피해자, 어느 것도 명확히 수행하지 않는다. 그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정짓지 않는다. 그러나 그 비정함 속에서 그는 존재한다.

오늘의 목적은 크게 아니었고 종소는 가능하면 이 카페에 자주 와서 앉을 작정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이 침묵은 방관이 아니라, 외부의 의미 부여와 역할 강제에서 벗어난 비작동의 상태다. 그는 침묵으로 응시하며, 관계의 언저리에 머물며, 말 없는 방식으로 이 공동체의 불안과 균열을 증언하는 자가 된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에서 현대인의 삶을 기능의 삶으로 진단하며, 작동하지 않음 자체가 하나의 윤리적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종소는 바로 그 비작동의 윤리를 실천하는 인물이다. 그는 사회적 규범에 복귀하거나, 관계를 재구성하려는 욕망 없이, 자기 자신조차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거기 있음을 지속한다. 이 무위의 지속은 오히려 존재의 근원적 불안과 고통, 그리고 타자의 침묵을 감당하는 자리로 기능한다.

또한 종소는 그들속 어떤 인물보다 말의 윤리에 민감한 존재다. 그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언어에 대한 회의를 실천적으로 드러낸다. “죽음에 집착하는 종소에게는 그 줄의 쓰임새가 달랐다고 언급되는 장면은, 그의 존재가 말의 질서 바깥, 삶과 죽음의 경계에 걸쳐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는 어떤 환상적 영웅주의도 아닌, 존재의 파국 앞에 멈춰 선 비극적 증언자의 자리다.

종소는 결과적으로 그들이라는 관계망 안에서 어떤 중심도 구성하지 않으면서, 그 비중심성 자체로 공동체의 침묵과 윤리적 질문을 떠안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작동하지 않는 말, 발화되지 않은 감정, 유예된 책임들의 경계에 서 있는 존재로서,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존재는 반드시 작동해야만 윤리적인가?

 

. ‘그들이라는 경계: 타자의 정치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낸시의 타자성과 경계 개념을 따라>

조경란의 그들이라는 제목은 단순한 제3자 지칭이 아니라, 이야기 전체에 내재된 윤리적 시선의 구조를 암시한다. '그들'은 나와 분리된 존재, 나 아닌 타자, 나의 바깥에 있는 이들이며, 동시에 내가 쉽게 이해하거나 동일시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이 호칭은 특정 인물을 지칭하지 않으면서도, 작품 속 인물들이 서로에게 부여하고 있는 감정적 거리와 인식의 경계를 드러낸다.

-뤽 낸시는 타자를 외부의 존재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부를 구성하는 낯선 친밀함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타자는 언제나 나의 에 있는 존재이며, 우리는 타자와의 접촉을 통해서만 나 자신에게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접촉은 완전한 이해나 동일화로 수렴되지 않으며, 타자는 언제나 닿을 수 없는 거리 속에 머문다. 이 거리를 감당하는 것, 그것이 곧 윤리이며 정치다.

그들의 인물들은 모두 서로를 '그들'로 부른다. 종소는 영주와 최 교수를, 영주는 종소를, 최 교수는 상현을, 상현은 그 누구도 자기 내부에 들이지 않는다. 이들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타자를 밀어내면서 동시에 그 곁에 머문다. 이 낯선 공존, 닿지 않으면서도 함께 있음의 상태는 낸시가 말한 공동존재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 관계는 언제나 긴장과 경계 위에 놓여 있다. 그 경계는 고정된 선이 아니라, 늘 흔들리고 재구성되며, 때로는 감정적으로 무너지고 윤리적으로 재구축된다.

이 경계 위에서 가장 뚜렷하게 떠오르는 문제는 바로 정치적 윤리로서의 타자 인식이다. ‘그들이라는 말은 익명성과 거리, 그리고 불분명한 책임을 동반한다. 타자를 그들로 지칭함으로써, 우리는 응답할 필요 없는 존재로 타인을 밀어낼 수 있다. 이 지칭은 공동체 안에서 타자를 배제하거나, 이해 대신 거리를 생산하는 언어적 장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은 그 거리의 존재들이 단순히 배제되거나 이해 불가능한 대상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들은 말하지 않지만 존재하며, 응답하지 않지만 응시하며, 단절되지 않은 채 공존한다.

낸시의 철학에서 공동체는 동일성의 공유가 아니라 차이의 감내로 이루어진다. 타자와의 관계는 융합이 아니라, 분리와 접촉의 리듬 속에서 구성된다. 그들은 바로 그 분리된 접촉의 구조를 따라 움직이며, 각 인물의 내면과 외부, 언어와 침묵, 감정과 무감각 사이의 경계를 반복적으로 가로지른다.

그들이라는 제목은 단순한 외부 지시가 아니라, 우리가 관계 속에서 얼마나 자주 타자를 거기 있는 타자, 말하지 않는 존재로 설정하는지를 되묻게 한다. 그리고 그 침묵의 경계, 감정의 여백, 말해지지 않은 존재들의 풍경 속에서 타자의 정치는 조용하지만 깊게 작동한다.

 

. 결론: 관계는 언제 불안해지는가

<침묵, 감정, 타자성의 윤리적 지형에서의 물음>

그들은 끝내 어느 누구도 명확하게 말하지 않고, 누구와도 완전히 연결되지 않은 채 이야기를 마친다. 그들은 관계 속에 있으면서도 관계의 핵심에 도달하지 못하며, 감정을 나누기보다는 억제하고, 서로를 응시하면서도 말 걸지 않는다. 이 불완전한 관계의 풍경은 한 가지 물음을 남긴다관계는 언제, 왜 불안해지는가.

이 글은 침묵, 감정, 타자성이라는 세 개의 축을 따라 그들의 인물들을 분석해 왔다. 침묵은 단절이 아니라, 때로는 감정을 감내하고 타자를 응시하는 하나의 윤리적 방식이었다. 영주는 감정의 폭발을 유예함으로써 삶의 파국을 막고 있었고, 종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언어적 질서의 바깥에서 존재의 방식 자체를 증언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침묵이 윤리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감정의 응시와 타자의 도래 가능성을 전제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침묵은 책임을 유예하지 않고, 오히려 감정의 장소로 작동할 수 있다.

관계는 타자를 동일한 존재로 이해하려 할 때가 아니라, 낯선 존재로 감당하려 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들속 인물들은 종종 타자를 자신의 세계 안에 안전하게 배치하려 하고, 그럴 수 없을 때 거리와 침묵을 선택한다. 이때 침묵은 감정의 유예이자, 타자에 대한 회피이기도 하다. 바로 그 지점에서 관계는 흔들리고, 불안해진다. 이해되지 않는 타자의 출현은 언제나 관계의 윤리적 긴장을 수반하며, 그들은 이 긴장을 끝까지 유지함으로써, 말해지지 않은 윤리의 지형을 끝내 드러낸다.

관계는 완전해질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실패하고, 유예되고, 중단되며, 때로는 침묵 속에 머무른다. 그러나 그들은 그 침묵 속에서도 여전히 감정이 흐르고, 타자가 도래하며, 공동체가 해체되지 않고 지속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낸시의 공동존재, 아감벤의 비작동, 바흐친의 대화 윤리는 모두 이러한 불완전한 관계의 지속 가능성을 열어주는 사유다.

그들이 보여주는 것은 어떤 친밀함도 완전하지 않고, 어떤 타자도 끝내 해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지 않는 자들 사이에서 관계는 성립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관계의 불안정한 자리에서, 말해지지 않은 윤리를 감당해야만 한다.

 

. 나의 소감

그들은 말하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한 이야기다. 누구도 감정을 명확히 말하지 않고, 누구도 타자에게 완전히 다가서지 않는다. 그러나 그 침묵은 단지 공백이 아니라, 저마다의 고통과 윤리를 가득 품은 풍경이었다. 나는 이 소설을 따라가며, 말해지지 않는 감정들이 어떻게 관계를 구성하고, 또 어떻게 그 관계를 불안하게 만드는지를 비로소 더듬어보게 되었다.

침묵은 이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태도였고, 동시에 각 인물들이 감정과 타자 앞에 취한 윤리의 방식이었다. 침묵은 종소의 무위한 존재를 감싸고 있었고, 영주의 내면에 눌려 있는 불안의 압력을 조용히 형상화하고 있었으며, 최 교수의 말들 사이에 조용한 회피로 스며들어 있었다. 그 침묵들 속에서 나는 말보다 더 명료한 감정의 떨림을 읽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깊은 인상을 남긴 장면은 종소가 자신의 호접란 화분을 영주의 카페에 가져다두는 대목이었다. 호접란(胡蝶蘭, Phalaenopsis)은 그 이름부터가 상징적이다. '호접'은 장자의 꿈에서 유래한 호접몽(胡蝶夢)’나는 꿈속에서 나비였고, 깨어보니 나였지만, 과연 내가 나인지 나비인지 알 수 없다을 떠올리게 한다. 이 식물은 존재의 경계성과 유예, 삶과 죽음, 꿈과 현실, 말함과 침묵 사이의 흐릿한 선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종소는 말이 거의 없는 인물이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영주에게 다가서지도 않지만, 그의 유일한 소유물처럼 보이는 그 화분을 조용히 카페에 남긴다.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일부를 침묵 속에 조용히 내어주는 무위한 선물이다. 그는 말 대신 식물을 남기고, 감정의 고백 대신 생명의 기척을 놓고 간다. 자기 집이라는 고립된 장소에서 그것을 공동체의 공간인 카페로 옮겨 놓는 행위는, 비작동의 윤리를 실천하는 방식으로 읽힌다. 그것은 관계에 대한 조심스러운 제스처이자, "나 여기 있었다"는 무언의 증언처럼 다가온다.

카페에 남겨진 호접란은 종소의 부재를 증언하게 된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자리를 대신할 어떤 존재로 남기고, 스스로는 말없이 물러선다. 이 장면은 낸시가 말한 공동존재의 풍경을 환기시킨다. 함께 있으면서도 닿지 않는 관계, 침묵 속에서도 감지되는 감정의 무늬, 타자를 밀어내지 않으면서도 끝내 말하지 않는 방식. 종소의 호접란은 완전한 접근이 아닌, 적당한 거리에서의 동행이며, 그들이라는 작품 전반에 흐르는 관계의 형식을 상징적으로 재현한다. 그것은 누군가를 이해하거나 소유하려는 방식이 아니라, 다만 존재 자체를 가만히 곁에 두는 태도다.

이 장면은 나에게 관계의 윤리란 무엇인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남겼다. 우리는 왜 타자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왜 침묵 속에 머물며, 그 거리를 감당하려 하는가. 종소의 호접란은 그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대답이자, 말없이 관계를 시작하거나 지속할 수 있는 방식이 존재함을 조용히 보여준다.

그들은 감정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깊이 말하고, 타자에게 다가서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그 존재를 더 선명히 감각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관계란 결코 완결되는 형식이 아니며, 늘 유예되고 흔들리며, 말과 침묵 사이의 긴장 속에서 조용히 유지되는 것임을 배웠다. 그리고 그 불안정함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조건이라는 생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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