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오후 네 시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티티카카는 한산했다. 지원은 호수를 바라볼 수 있는 창가 자리로 가 앉았다. 창밖에는 가로등 불빛 아래로 막 가을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벚나무들이 잎을 떨구며 거인처럼 서 있었다.
"와인 한 잔 할 건가?"
이 교수의 말투는 마치 자신이 마시고 싶다는 뜻을 돌려 말하는 듯했다.
"저, 오늘은 사양할게요. 핫초코를 마시려고요."
얼결에 이곳까지 오게 된 지원은 다소 당황스러웠다.
"아직 애기군."
이 교수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윙크했다. 장난기 어린 표정에 지원은 피식 웃고 말았다. 덕분에 경직되었던 마음이 한결 풀렸다.
핫초코 한 잔과 와인 한 병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지원은 혹시라도 아는 사람과 마주칠까 싶어 실내를 대충 훑어보았다. 다행히 낯익은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주말 밤, 학생과 교수가 단둘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곤란할 터였다. 학생인 자신은 괜찮을지 몰라도, 이 교수에게 누를 끼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지원은 순간 멈칫했다.
"걱정되나? 걱정할 것 없네. 설사 학생이나 교수들이 본다 해도, 그냥 선생과 제자가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만났겠거니 할 거야."
이 교수의 말투에는 변명 같은 기색이 묻어 있었다. 지원은 모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교수와 제자. 만약 누군가 이 장면을 목격한다 해도, 설마 학부생과 20년 연상의 교수가 무슨 특별한 관계일까 생각해 주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이 교수는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엄연한 사모님과 알토란 같은 두 딸이 있는 가장이었다.
뜨거운 핫초코의 달콤한 향이 싸늘했던 마음을 녹여 주었다. 할머니를 뵙고 온 후로 어딘가 허전했던 마음 한구석이 조금씩 풀리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은근한 설렘이 스며드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이 교수는 유난히 많은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추구하는 사진의 세계, 앞으로 찍고 싶은 작품과 계획 등 열정 어린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지원은 그가 하는 말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세계에 빠져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교수의 전공은 신소재 공학이었다. 하지만 그는 전공보다도 사진에 더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사진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어쩔 수 없이 공학을 택했다고 했다. 그러나 결국 사진을 향한 열정을 버리지 못하고 전공과 취미를 병행해 왔다. 그는 자신의 현실에 대해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면서도, 오히려 지원 앞에서는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았다.
지원은 그가 자신의 세계를 이해해 주길 바라는 듯한 열망을 느끼며, 웃음을 참으려 애썼다.
"자네는 왜 자꾸 웃나?"
이 교수는 살짝 투정을 부리듯 물었다.
"그냥요. 교수님이 오늘 밤만큼은 엄마 말 안 듣고 떼쓰는 유치원 아이 같아서요. 죄송합니다."
부드러워진 분위기에 그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내뱉고 말았다.
"허허, 서지원 군, 교수님한테 유치원 꼬마라니?"
이 교수는 일부러 호통을 치듯 말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다정함과 부드러움, 그리고 묘한 흥분이 스며 있었다. 지원 또한 자꾸만 학생과 교수라는 경계, 20년이 넘는 나이 차이와 신분의 차이를 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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