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은 요즘 경제적인 압박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남아 있는 현금은 한 학기 등록금과 서너 달 간신히 버틸 생활비가 전부였다.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휴학까지 고민해야 할지도 몰랐다. 등록금은 장학금에 의지할 수 있지만, 그것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그녀가 받은 장학금은 겨우 1년짜리였고, 이후는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현실과 꿈 사이의 간격. 지원은 그 간격을 좁히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쳤다. 하지만 현실을 마음대로 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다. 꿈은 상황에 따라 변하기도 했고, 조절할 수도 있었다. 그녀는 불가능해 보이는 꿈들을 마음 깊은 곳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언젠가 때가 되면 할머니가 한낮의 햇살 아래 풀을 먹여 말리던 광목천처럼, 향긋하고 빳빳하게 세상을 향해 펼쳐질 날이 올 것이라 믿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 교수에 대한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 그러나 지원은 자신 안에서 꿈틀대는 욕망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나이, 학벌, 재산, 지위 같은 것들을 떠나, 그녀를 끌어당긴 것은 막연한 동질감이었다. 처음 그와 부딪혔을 때, 그의 눈빛에서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감춰진 불꽃을 본 듯한 느낌.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지원은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몇 년이 흐른 뒤, 다시 만난 그는 여전히 그녀를 강렬하게 압도했다. 그리고 지금, 이 밤이 현실이라는 사실조차 믿기 어려웠다. 서울로 가겠다는 꿈을 뒤로하고 이 교수의 대학을 선택했던 것도, 학내 신문 편집부에서 일하게 된 것도 결국은 그녀의 무의식이 이끈 결과였다. 비록 한 달에 한두 번 정도의 만남이 전부였지만, 그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고 싶었다. 그 감정이 단순한 존경인지, 그 이상의 감정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설렘과 불안이 공존하는 감정이었다. 오늘 밤처럼 예상치 못한 작은 일탈이 그녀를 두렵게 하는 이유도 아마 그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두려움은 그녀의 출생과 관련이 있을지도 몰랐다. 지원은 한 번도 평범한 가정에서 부모의 따뜻한 손길을 받고 자라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행방불명되었다. 태어나자마자 할머니 손에 맡겨졌고, 그 이후로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할머니는 백방으로 어머니의 행방을 찾으려 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지원도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지만, 가슴 한편엔 여전히 어딘가에서 살아 있을지 모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우리 공주님, 이 꽃 좀 봐. 분꽃이래. 이 까만 씨앗이 우리 공주님 닮지 않았니?”
할머니는 작은 마당 한 켠, 꽃밭에서 활짝 핀 꽃을 가리키며 종종 그렇게 말했다. 지원은 때론 채송화가 되고, 봉숭아가 되고, 분꽃이 되었다가, 수국이 되고, 장미가 되기도 했다. 할머니는 꽃이 필 때마다 지원에게 꽃들의 이름을 알려주며, 늘 그녀를 꽃에 빗댔다.
“우리 지원이 닮았네.”
그 억지가 우습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런 할머니의 사랑이 싫지 않았다.
“지원아, 꽃들은 말이야.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스스로 계절을 알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단다. 그리고 때가 되면 열매를 맺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지. 우리 지원이도 그래.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냥 스스로 피어나고 열매를 맺으면 되는 거야.”
할머니의 말이 새삼 가슴에 와닿던 시기였다. 교정을 걸을 때마다 자신을 힐끗거리는 남학생들, 선배들의 끈적한 시선을 느낄 때마다 묘한 흥분과 함께 지원은 어깨를 곧추세우곤 했다. 그녀는 결심했다. 누군가의 시선이나 평가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피어나고 지겠다고. 지원은 다짐했다.
“나는 누구의 햇빛을 기다리지 않겠어. 스스로 피어나고, 스스로 지며, 나만의 계절을 살아갈거야.”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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