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짝에도쓸모없는그러나세상구경을하고싶은
(21화) 오후 네 시
갑자기 할머니가 지원의 손을 잡아당겼다. 엄지손가락을 접어 숫자 4를 만들었다. 40대의 이야기를 읽으라는 뜻이었다. 지원은 할머니의 의중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알았어. 40살 이야기?”
할머니는 서병수가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했던 시절을 이야기했다. 조안나라는 아이를 데리고 시작한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할머니, 엄마가 나보다 예뻤어?”
지원은 엄마, 조안나가 궁금했다. 할머니도 엄마 이야기를 거의 해주지 않았다. 지원은 엄마를 그리워했지만, 그 감정을 말로 꺼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아야 할 때라고 느꼈다.
할머니는 뇌졸중 이후 예전처럼 말하지 못했다. 만약을 대비해 미리 엄마 이야기를 들어둘 걸, 지원은 후회했다.
“난, 나보다 엄마가 더 예뻤을 것 같아.”
지원은 엄마의 나라를 검색해 본 적이 있었다. 엄마는 네 살 때부터 할머니와 살았다. 할아버지가 갑자기 혼혈아인 아이를 데려와 맡아달라고 했다고 했다. 엄마는 낯선 남태평양 섬나라에서 온 아이였다. 할머니는 엄마를 ‘키리바시에서 떨어진 유성’ 같다고 말했었다.
“영숙씨, 왜 영숙씨 글을 읽으면 눈물이 날까?”
지원은 괜히 투정을 부렸다. 할머니는 이미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슬픔의 눈물은 아니었다.
“오늘은 그만할까?”
지원이 물었다. 할머니는 손을 쫙 폈다가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한쪽 검지를 폈다.
“열한 살?”
할머니는 가만히 눈을 두세 번 깜빡였다.
지원은 피곤했다. 긴 이야기를 읽었고 감정도 소모됐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더 들려주려 했다.
‘왜 이렇게 마음이 급해졌을까?’
지원은 가슴이 철렁했다. 할머니는 자신의 남은 시간을 셈하고 있는 걸까?
“그러면 열한 살 이야기 읽을게.”
지원은 할머니의 첫사랑 이야기가 담긴 ‘두부 파는 소년’을 읽었다. 할머니의 얼굴에 추억의 그림자가 어렸다.
“이상 끝. 이제 만족하셔요?”
지원은 피곤했지만, 할머니를 위해 무언가 했다는 사실이 기뻤다. 할머니는 지원을 지긋이 바라봤다.
“그래서, 아직도 서병수 씨가 준 『갈매기의 꿈』을 간직하고 있는 거야?”
할머니는 대답 대신 웃었다.
“두 분 참 지독한 연인이야. 할아버지가 쓰던 모나미 볼펜도 그대로고.”
그 볼펜은 이제 작동되지 않았다. 심을 갈아 끼우다 결국 뒷부분에 구멍을 내고 끈을 달아 목에 걸고 다녔을 것이다. 마치 부적처럼.
지원은 놀라웠다. 할아버지는 기억을 잃었는데도, 열두 살 할머니에게 받았던 볼펜을 끝까지 간직했다. 마치 소설 같은 이야기였다. 지원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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