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오후 네 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신아와 새아는 피곤했는지 깊이 잠들었다. 지원은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며 문득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엄마,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키워 준 할머니를 생각하면 묻는 것이 예의가 아닌 듯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지만 신아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이고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30분이 지나도록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궁금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걱정됐다. 아빠와 통화하던 신아가 지원에게 전화를 건넸다.
“아, 네. 저는 신아 엄마와 여섯 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아직 오시지 않아서요.”
지원은 당황했다. 마치 신아 엄마가 오지 않은 것이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았다.
“아, 그래요. 아이들 엄마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요?”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네. 30분이나 기다렸는데요. 아이들도 배가 고플 것 같아요.”
“그렇군요. 제가 지금 좀 먼 곳에 있어서 한 시간쯤 함께 있어 줄 수 있을까요? 그 안에 도착하겠습니다.”
신아 아빠의 정중한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지원은 아이들과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신아 아빠는 지난주에 갔던 식당에서 만나자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아이들과 식사를 하며 신아 아빠를 기다렸다. 신아와 새아는 엄마가 오지 않았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빠가 온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갑자기 요란한 굉음이 들렸다. 신아와 새아는 반사적으로 창밖을 보더니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깜짝 놀란 지원도 황급히 그들을 따라갔다. 아이들은 헬멧과 고글을 쓴 남자에게로 달려갔다. 그는 막 오토바이에서 내리고 있었다. 지원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헬멧을 벗는 순간, 그의 얼굴이 또렷이 보였다. 이교수였다.
지원은 당혹스러웠다. 신아와 새아의 아빠가 이교수였단 말인가? 그는 무릎을 굽혀 아이들을 안았다. 애정 어린 손길로 볼을 비비고 입을 맞췄다. 아이들은 아빠 품에 파고들며 좋아했다. 그제야 이교수도 지원을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원은 얼떨결에 고개를 숙였다.
“그럼, 아까 통화한 분이 지원 군이었나요?”
“네, 교수님. 신아 아빠셨군요.”
“그렇지요. 두 공주님의 주인입니다.”
이교수는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지원에게 다가왔다. 신아와 새아는 뮤지컬 이야기를 쉴 새 없이 쏟아냈다. 지원은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식사는 했나요? 저는 아직 못 했는데, 제가 밥을 먹는 동안 함께 있어 줄 수 있겠어요?”
이교수가 붙들 듯 물었다. 지원은 망설였다. 가야 할 것 같으면서도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언니, 우리 아빠 밥 먹을 때까지만 같이 있어 줘요.”
아이들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교수가 아이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는 동안 지원은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된 일일까? 신아 아빠가 이교수라니. 그럼 신아 엄마와 이교수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 못한 걸까? 학교에서 친구들이 수군대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사실 귀가 솔깃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남의 가정사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거북해서 모른 척했을 뿐, 들을 건 다 들었던 것이다.
지원은 조용히 아이들과 이교수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알 듯하면서도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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