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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창작들

(19화) 오후 네 시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5. 3. 13.

 

 

 

(19) 오후 네 시

 

영숙씨, 나 왔어요.”

지원은 할머니를 놀래 줄 생각으로 밝게 소리쳤다. 하지만 할머니의 침대는 비어 있었다. 순간 두려운 생각이 몰려왔다. 다급히 사무실을 향해 뛰어갔다.

저희 할머니 어디 계세요?”

문을 열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 깜짝 놀란 사무실 직원이 지원을 올려다보았다.

, 햇살이 좋아서 산책을 가셨습니다. 다른 직원이 뒤뜰로 모시고 나간 것 같아요.”

머쓱해진 지원은 서둘러 요양원 뒤뜰로 향했다. 할머니는 지원이 올 시간이면 늘 기다리곤 했는데, 오늘은 먼저 나가 계셨다.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아래, 할머니는 혼자서 코스모스를 바라보며 햇빛을 받고 있었다.

영숙씨, 놀랐잖아요.”

지원이 성큼 걸어가며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의 손에는 코스모스 몇 송이가 들려 있었다. 할머니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지원에게 꽃을 내밀었다.

영숙씨, 나 주려고? 안 되죠. 이번만 봐줄게요.”

지원의 애교 섞인 말에 할머니의 미소가 빛났다. 바로 이 모습, 지원이 보고 싶던 할머니의 얼굴이었다.

우리 공주님을 위해.”

어눌하지만 다정한 할머니의 한마디에 지원의 가슴이 뻐근해졌다.

병수씨는?”

할머니의 물음에 지원은 순간 멈칫했다.

아이고, 이거 병수씨에게 주려고 꺾은 것 아녀?”

병수씨를 찾는 할머니의 모습에 지원은 또 한 번 가슴이 저렸다. 할머니는 조용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 나 주려고 그랬다고? 그래, 용서해주지.”

지원은 할머니에게 건네받은 코스모스의 향을 맡았다.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가을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지원은 미리 준비해 둔 자작시 한 구절을 낭송했다. 할머니는 어설픈 시 한 구절에도 감동한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원은 할머니의 마른 손을 조심스레 움켜잡았다. 할아버지는 살아생전 늘 할머니의 손을 놓지 않으려 했다. 텔레비전을 볼 때도, 산책을 할 때도, 심지어 밥을 먹을 때도 두 사람은 종종 손을 맞잡고 있었다. 마치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두 손이 맞닿아 있는 모습은 언제나 따뜻하게 보였다. 지원은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지원은 할머니의 휠체어를 밀며 병실로 돌아왔다. 평소처럼 책을 읽어드리려 천명관의 고래를 집어 들었지만,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 지루해?”

할머니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럼, 시 낭송해줘? 오늘은 고정희의 사랑시?”

할머니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할머니의 이야기?”

그제야 할머니는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이야기? 몇 살 때 이야기? 아니면 연애편지?”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V를 그렸다. 지원은 그게 두 번째’, 즉 연애편지를 의미하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할머니의 연애편지는 실로 방대했다. 평생 2,000통이 넘는 편지를 써온 듯했다. 어떤 편지는 십 년이 넘게 지난 후 다시 쓰인 것이었고, 어떤 것은 A4용지 몇 장을 가득 채운 긴 편지였다. 때로는 단 한 줄로 끝나는 짧은 편지도 있었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는 연애편지를 읽어주는 것이 그의 몫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떠난 후부터는 지원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노트 속 빼곡한 편지들은 사소하고도 개인적인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부터 읽을까?”

할머니는 또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내가 마음 가는 대로 읽는다?”

할머니는 그런 방식을 좋아했다. 하머니의 인생도 늘 뒤죽박죽이었다고, 자신의 입으로 말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순서 없는 이야기를 더 좋아했다. 할머니는 종종 이야기를 하면서 처음과 끝을 혼동해서 서로 웃기도 했다.

지원은 빙그레 웃으며 편지 노트를 펼쳤다.

그럼, 1998320일 편지를 읽을게요.”

지원이 다섯 살이었을 무렵이었다. 편지를 읽으며 지원은 할머니가 편지 속에서 자신을 예쁘다고 자랑했던 부분을 발견하고는 또 한 번 감동했다.

영숙씨, 내가 그렇게 예뻤어?”

할머니가 늘 우리 공주님, 우리 흑진주 공주님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엊그제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연약해진 할머니를 바라보며, 지원은 인생의 무상함을 실감했다.

할머니는 연애편지의 내용에 감격한 듯, 눈가에 맺힌 눈물을 흘려보냈다. 지원은 자신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이 들킬까 봐 모른 척하고 다음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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