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영화가 그리운 계절이 있다. 세상이 너무 빠르게 돌아간다고 느껴지는 날, 혹은 반대로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것 같은 날, 나는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정확히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한다. 요즈음 갑자기 이성적인 사랑이란 것에 대한 정의를 내려보고 싶은 욕구가 인다. 정의라기보다는 한 번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싶다는 쪽에 가깝다. 뭔가 써보려 해도 자꾸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오드리 니페네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시간여행자의 아내〉는 그 잡히지 않는 질문을 정면으로 건드린다. 주인공 헨리는 어릴 적 교통사고 이후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시간을 이동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그의 시간여행은 달콤한 능력이 아니다. 언제 어디로 사라질지 스스로도 알 수 없고, 도착한 시간 속에 알몸으로 떨어져 추위에 떨거나 옷을 훔쳐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38살의 헨리가 초원에서 처음 만난 클레어는 고작 여섯 살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선형적인 시간을 거스르며 이어진다. 32살의 헨리가 18살의 클레어와 첫 키스를 나누고, 28살의 헨리가 20살의 클레어와 재회하며,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에 이른다. 그러나 헨리의 사라짐은 결혼 후에도 멈추지 않는다. 클레어는 그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채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결국 헨리는 클레어 아버지의 사냥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시간여행자인 그는 죽은 뒤에도 다른 시간대의 클레어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다시, 기다림은 시작된다.
사랑에는 두 개의 얼굴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는 에로스다. 타오르는 욕망, 상대를 향한 강렬한 끌림, 소유하고 싶다는 충동이다. 그것은 솔직하고 뜨겁고 때로는 위험하다. 또 하나는 아가페다. 욕망이 잦아든 자리에서도 남아 있는 것, 상대의 존재 자체를 긍정하는 조용한 힘이다. 어떤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갖고 싶은 욕망을 달성한 후조차도 그녀가 예뻐 보이고 아껴지며 책임지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다면 그것이 사랑이라고. 혹은 불같은 욕망이 해소된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상대에 대한 측은지심이라고. 나는 그 말들을 오래 곱씹었다.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들은 에로스가 끝난 자리에서 아가페가 시작된다는 식의 순서를 전제하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그 순서를 믿지 않는다. 두 얼굴은 처음부터 함께 있었고, 서로를 먹이며 자란다고 생각한다.
내 경험 안에서 사랑은 조금 다른 언어로 기억된다. 몸을 나누고 난 후의 해방감, 상대와의 두꺼운 벽이 허물어진 느낌, 그래서 그가 나 같고 내가 그 같은 감각이다. 어느 시간 어느 공간에 있어도 내가 그이고 그가 나인 상태. 그것이 내가 아는 사랑의 가장 조용하고 깊은 형태였다. 그런데 그 상태는 상대가 곁에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일까. 상대가 없는 시간에도 그 감각이 지속된다면, 그것은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기다림은 수동적인 감정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다린다는 것은 상대가 돌아올 자리를 매일 비워두는 일이다. 내 삶의 한 자리를 그 사람을 위해 끝없이 보존하는 일이다. 그것은 어떤 욕망보다 더 능동적인 선택이다. 클레어의 시간은 헨리가 없는 동안에도 헨리를 향해 조직된다. 그녀의 하루는 그가 돌아올 가능성을 전제로 흐른다. 그렇다면 기다림은 사랑의 결핍이 아니라 사랑의 한 형식이다. 부재를 통해 존재를 확인하는 방식이다. 헨리가 사라질 때마다 클레어의 사랑은 오히려 윤곽이 선명해진다.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없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처럼.
시간이라는 문제도 여기서 다르게 보인다. 우리는 보통 사랑을 시간 속에서 쌓이는 것으로 이해한다. 함께 보낸 시간이 많을수록 사랑이 깊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헨리와 클레어의 사랑은 그 공식을 비껴간다. 그들의 시간은 선형적이지 않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섞인 그 사랑 안에서 시간의 축적은 의미를 잃는다. 그렇다면 사랑은 시간이 쌓여서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순간들이 반복적으로 확인되면서 깊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매번 새롭게 선택되는 것. 그것이 사랑의 본질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헨리가 죽은 뒤에도 클레어는 기다린다. 그 기다림은 이제 이루어질 수 없는 기다림이다. 그러나 클레어는 멈추지 않는다. 죽음조차 사랑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이 영화는 감상적인 언어 대신 시간이라는 구조로 증명한다. 어쩌면 나도 지금 이 순간 어느 우주의 먼 나라에서 시간을 표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단지 시간과 공간의 인식점이 다를 뿐인 시간여행자로서. 사랑에 대한 정의는 여전히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이 영화는 한 가지를 조용히 말해준다. 사랑은 욕망이 끝난 자리에서 시작되는 무언가가 아니라, 상대가 없는 시간을 어떻게 견디는가에 관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 견딤이 매일 새롭게 선택될 때, 그것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제 나는 미래에 남은 시간보다 지나온 시간을 더 많이 살아온 사람이 되었다. 그 사실이 때로는 쓸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욕망이 인다. 기다려도 좋은 사랑, 매일 아침 새롭게 선택해도 좋은 사랑을 아직 한 번 더 살아보고 싶다는. 그것이 에로스인지 아가페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클레어처럼, 상대가 없는 시간도 그 사람을 향해 열려 있을 수 있는 사랑이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타인을 사랑하는 일인 동시에, 나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