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戀書시리즈 - 독후감

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 하얀 가면》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6. 4. 10.

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 하얀 가면》

 

파농을 처음 만난 것은 시를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시인 강형철 선생님께 시를 배우던 때였다. 선생님은 좋은 시를 쓰려면 인문학적 토양이 깊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파농의 이름을 꺼내셨다. 《검은 피부, 하얀 가면》. 낯선 이름이었다.

 

파농은 카리브해의 식민지 출신 정신과 의사였다. 나는 군산에 살았다. 금강 하구의 작은 도시였다. 일제강점기 수탈의 흔적이 골목마다 남아 있는 곳이었다. 파농의 책을 펼치면서 어딘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배자의 언어로 자신을 설명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도시의 오래된 돌담과 겹쳐 보였다.

 

그는 1925년 프랑스 식민지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났다. 카리브해의 작은 섬이었다. 그곳 사람들은 프랑스어를 썼다. 프랑스 역사를 배웠다. 몰리에르와 라신을 암송했다. 섬 아이들은 자신이 프랑스인이라고 믿으며 자랐다. 식민지 교육은 그것을 목표로 삼았다. 피식민지인이 스스로를 지우고 지배자의 언어와 몸짓과 욕망으로 자신을 다시 채우는 것이었다. 그것이 식민지 지배의 진짜 메커니즘이었다. 총보다 오래 지속되는 것이었다.

 

군산의 구도심을 걸으면 그 메커니즘의 잔해를 밟는 느낌이 든다. 적산가옥의 낮은 처마가 있다. 히로쓰 가옥의 정원이 있다. 부두 쪽으로 기울어진 오래된 창고들이 있다. 수탈을 위해 설계된 도시의 구조가 아직도 골격으로 남아 있다. 그 위에서 우리는 살았다. 그 위에서 글을 썼다. 파농을 읽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그것을 의식했다. 지배는 건물로만 남지 않는다. 언어로, 감각으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방식으로도 남는다.

 

파농은 총명한 아이였다. 마르티니크에서 교육을 마치고 프랑스 본토로 건너갔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자원입대했다. 프랑스를 위해 싸웠다. 파시즘에 맞서는 전쟁이었다. 파농은 프랑스인으로서 그것이 자신의 전쟁이기도 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그는 프랑스 본토에서 흑인이었다. 군복을 벗으면 다시 피부색이 드러났다. 거리에서, 기차에서, 식당에서, 병원에서 사람들의 눈길이 파농의 몸에 박혔다. 말하지 않아도 말해지는 것이 있었다. 너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파농은 그 눈길을 연구했다. 리옹 대학에서 정신과 의학을 공부하면서 식민지 지배가 인간의 심리에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분석했다. 왜 흑인은 백인 앞에서 다르게 말하는가. 왜 피식민지인은 지배자의 언어로 꿈을 꾸는가. 왜 억압받은 자는 자신을 억압자의 눈으로 바라보는가. 1952년, 스물일곱 살에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썼다. 흑인이 백인의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할수록 자신의 것을 잃는다는 것이었다. 지배자의 문화를 내면화할수록 자기 안에서 자신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파농은 그것을 심리적 식민화라고 불렀다.

 

시를 공부하면서 나는 자꾸 어떤 언어가 좋은 시의 언어인지를 물었다. 표준어로 쓴 시가 더 문학적으로 보이던 시대가 있었다. 군산의 감각으로, 전라도의 리듬으로 쓴 문장이 어딘가 덜 세련된 것처럼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그것이 심리적 식민화가 아니면 무엇이었을까. 강형철 선생님이 파농을 권하신 것은 아마 그 이유였을 것이다. 시인이 자기 언어를 찾으려면 먼저 자기 안에 무엇이 심어져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파농은 알제리로 떠났다. 블리다 병원에서 정신과 의사로 일했다. 환자들은 다양했다. 독립운동을 하다 고문받은 알제리인들이 있었다. 그들을 고문한 프랑스 군인들도 있었다. 파농은 양쪽을 치료했다. 지배는 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고문은 피지배인의 몸만이 아니라 마음을 부수는 것이었다. 고문하는 자의 마음도 부서졌다. 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훼손했다.

 

파농은 결국 의사이자 혁명가로서 알제리민족해방전선에 합류했다. 프랑스를 위해 싸웠던 자가 이제 프랑스에 맞서 싸웠다. 그 전환은 단순한 이념의 변화가 아니었다. 자신이 내면화했던 것을 해체하는 과정이었다. 프랑스인이라고 믿었던 자신을 버리는 것이었다. 식민지 교육이 심어준 것들을 하나씩 뽑아내는 것이었다. 파농은 그것을 탈식민화라고 불렀다. 탈식민화는 결코 조용한 과정이 아니라고 했다.

 

글을 쓴다는 것도 그런 과정을 닮았다. 누군가가 좋다고 말한 문장의 형식을 버리는 것이다. 배운 것들을 하나씩 다시 의심하는 것이다.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 정말 내 감각인지, 아니면 주입된 미학인지를 묻는 것이다. 쉽지 않다. 조용하지도 않다. 파농이 말한 탈식민화가 그랬던 것처럼.

 

서른여섯 살에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죽어가면서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을 썼다. 구술로 불러주고 받아 적게 했다. 10주 만에 완성했다. 탈식민화와 폭력, 새로운 인간의 탄생에 관한 책이었다. 사르트르가 서문을 썼다. 파농은 책이 출판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1961년, 서른여섯의 나이로 죽었다. 알제리가 독립하기 한 해 전이었다.

 

파농이 말한 것의 핵심은 여기에 있었다. 억압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억압받은 자가 자기 안에 억압자를 품는 것이다. 식민지 교육이 가르친 언어로 분노하고, 지배자의 미학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지배자가 만든 질서 안에서 자유를 상상한다. 파농은 그것을 식민화된 정신이라고 했다. 해방은 총을 드는 것 이전에 그 정신을 먼저 해체해야 가능했다. 피식민지인이 지배자의 언어로 저항을 말하는 한, 저항은 이미 절반을 빼앗긴 것이었다.

 

그래서 파농에게 폭력은 단순한 수단이 아니었다. 억압받은 자가 억압자에게 폭력으로 맞설 때, 그것은 단순히 지배를 뒤집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 안에 내면화된 복종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부과된 정체성을 찢는 것이었다. 파농의 이 주장은 오랫동안 논쟁을 일으켰다. 폭력을 낭만화한다는 비판도 받았다. 그러나 파농이 말한 것은 폭력의 찬미가 아니었다. 식민지 심리학의 해부였다. 억압의 구조가 얼마나 깊이 인간의 내면까지 침투하는지에 대한 진술이었다. 파농은 그 진술을 서른여섯 해의 삶으로 썼다. 그리고 죽었다.

 

파농의 책을 덮고 나서 나는 한동안 군산의 골목을 다르게 걸었다. 일제가 설계한 거리 위를 걷는 내 발이 그 질서를 아직 발바닥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글을 쓸 때마다 나는 그 질문을 다시 꺼낸다. 지금 내가 쓰는 이 문장은, 정말 내 것인가.

 

 

글을 쓴다는 것

 

벗겨내려는 손끝이 떨린다

 

내 안에 누군가의 얼굴이 있다

언제 심어진 것인지 모른다

 

아름답다고 느낀 것들이

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파농은 서른여섯에 알았다

 

나는 골목을 걷는다

 

처마가 낮다

그늘이 오래됐다

발바닥이 무언가를 기억한다

내가 기억하기 전부터 있던 것들이다

 

문장을 쓴다

지운다

다시 쓴다

 

이것이 내 말인지

묻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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