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결백 ―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봄이라고 하기엔 아직 이른 날이었다. 은파 호수 공원을 걷다가 마른 물풀 위에 올라앉은 거북이들을 보았다. 크고 작은 것들이 뒤섞여 햇빛 아래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겨울 내내 어디에 있었을까. 얼어붙은 땅 어딘가에 몸을 묻고, 아무것도 되지 않은 채 버텼을 것이다. 그것들은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설명하지 않았다. 자랑하지도 않았다. 다만 거기 있었다. 등껍질의 갈라진 무늬 위로 햇살이 내려앉고,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8월에 출간될 나의 책 『재즈, 군산의 골목을 걷다』를 편집하던 중, 카뮈의 『이방인』 섹션을 깊게 들여다보았다.
뫼르소는 살인자다. 이 사실을 먼저 직시해야 한다. 그는 아랍인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고, 쓰러진 몸 위에 네 발을 더 쏘았다. 독자들은 종종 이 장면을 서둘러 지나친다. 뫼르소의 실존적 고독에 공감하느라, 혹은 부조리 철학의 화신으로 그를 읽느라, 죽은 아랍인을 잊는다. 그러나 카뮈가 진짜로 묻는 것은 어쩌면 바로 그 망각 안에 있다. 우리는 왜 살인자를 결백하다고 느끼는가.
법정의 논리는 단순하다. 뫼르소가 유죄인 것은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이상한 경험을 한다. 그를 무죄라고 느끼는 것이다. 이 감각은 어디서 오는가. 그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가 냉혹해서도 아니다. 독자가 뫼르소에게 느끼는 결백함의 근거는, 그가 자신이 한 일의 의미를 끝까지 부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는 자신을 서사화하지 않는다. 피해자를 악마로 만들지 않고, 자신을 희생자로 만들지 않으며, 살인에 어떤 이유도 소급하여 붙이지 않는다. “태양이 눈부셨기 때문”이라는 진술은 무책임한 것이 아니라, 의미 부여를 거부하는 가장 정직한 언어다.
여기서 카뮈의 부조리 철학이 날카롭게 작동한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이렇게 쓴다. 부조리는 인간에게 있지도 않고 세계에 있지도 않다. 그것은 둘 사이의 대면에서 태어난다. 의미를 원하는 인간과 의미를 침묵으로 돌려보내는 세계 사이의 균열. 뫼르소는 그 균열을 메우려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하듯, 신앙이나 이데올로기나 감정의 서사로 균열을 봉합하지 않는다. 그는 균열 위에 그대로 선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살아간다.
이것이 카뮈가 말하는 반항이다. 자살도 아니고 도피도 아닌, 부조리를 직시하면서도 살아가는 것.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불편한 질문이 남는다. 반항이 허용하는 것은 무엇인가. 세계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이 살인을 면죄하는가. 물론 카뮈의 대답은 아니오다. 그러나 소설은 그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린다. 뫼르소는 살인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랑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 행위를 서사의 밖에 둔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독자는 그를 결백하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이 역설이 소설의 진짜 핵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카뮈는 뫼르소를 통해 무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유죄와 무죄를 판단하는 기준, 즉 감정의 악보와 서사의 논리가 얼마나 자의적인가를 드러낸다. 법정은 뫼르소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울지 않았다는 사실로 그를 단죄한다. 이 단죄는 정당한가. 감정을 수행하지 않은 것이 죄가 되는 사회에서, 감정을 수행하는 자들은 과연 정직한가.
그러나 내가 오래 붙잡혀 있던 것은 뫼르소의 마지막 밤이었다. 처형을 하루 앞두고 신부가 찾아와 회개를 권한다. 뫼르소는 거부한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감방에서 창문 너머 별들을 올려다본다. 세계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 그 무관심은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다는 것을 그는 받아들인다. 카뮈는 이것을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이라 불렀다. 뫼르소는 그 무관심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다. 더 이상 증명할 것이 없고, 기대에 부응해야 할 의무가 없는 자리에서, 그는 처음으로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된다.
이 평온을 허무라고 읽는 것은 쉽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일종의 완성이라고 생각한다. 카뮈가 말하는 자유는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조건이 박탈되었을 때,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을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뫼르소는 감방 안에서, 처형 전날 밤, 생애 처음으로 아무것도 수행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선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는 자유롭다. 역설이지만 이것이 카뮈의 논리다. 자유는 가능성의 확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성의 완전한 수용에서 온다.
은파 호수의 거북이들이 다시 떠올랐다. 그것들은 겨울을 해명하지 않았다. 살아남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햇살 아래 있었다. 뫼르소도 마지막 밤 그랬을 것이다. 별빛 아래, 설명 없이, 증명 없이, 그저 거기 있었다.
『이방인』에 관해 나는 오래 생각했다. 우리는 매일 감정의 악보를 따라 살아간다. 슬퍼야 할 자리에서 슬픈 척, 기뻐야 할 자리에서 기쁜 척. 그 수행이 쌓여 사회가 되고, 그 사회가 뫼르소를 단죄한다. 그러나 단죄하는 자들 중 끝까지 자신의 감각에 정직한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감정을 배운다. 아니, 정확히는 감정을 수행하는 법을 배운다. 그 학습은 너무 일찍 시작되어 너무 깊이 새겨지는 탓에,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수행과 감각을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 악보가 내면의 목소리처럼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뫼르소는 그 혼동이 끝내 일어나지 않은 자다. 그는 악보를 읽을 줄 알지만 연주하지 않는다. 느끼지 않는 것은 표현할 수 없다는, 너무나 단순하고 너무나 위험한 원칙을 그는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 그 원칙이 그를 죽인다. 그러나 그 원칙이 또한 그를 자유롭게 한다.
뫼르소의 죄는 살인이 아니라 연기를 거부한 것이었다. 이것이 불편한 이유는, 우리 대부분이 연기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법정의 배심원들은 뫼르소를 단죄하면서 자신들의 연기가 얼마나 정교한지를 증명한다. 그들은 감정의 악보를 완벽하게 소화한 자들이다. 그리고 그 완벽함이 그들에게 타인을 심판할 권위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 권위는 어디서 오는가. 느끼지 않는 것을 느끼는 척하는 능력, 즉 사회화된 위선으로부터 온다. 뫼르소가 단죄받는 것은 그가 나쁜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이 위선의 게임에 참여하기를 끝까지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거부 끝에서 그는, 별빛이 쏟아지는 밤,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을 손에 넣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카뮈는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 뫼르소 자신도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감방의 창문이 열려 있고, 밤공기가 들어오고, 별들이 있다. 세계는 그가 죽든 살든 관심이 없다. 그 무관심이 잔인한 것처럼 보이지만, 뫼르소는 거기서 해방을 느낀다. 세계가 나에게 무관심하다는 것은, 세계가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증명하지 않아도 되고, 수행하지 않아도 되고, 납득시키지 않아도 된다.
카뮈는 이것을 반항이라 불렀지만, 나는 그것이 귀환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훈련받기 이전의 감각으로, 악보를 배우기 이전의 몸으로 돌아가는 것. 뫼르소가 마지막 밤 도달한 자리는 허무가 아니라 원점이다. 아무것도 덧씌워지지 않은 존재의 자리. 우리도 가끔 그것을 본다. 감정의 악보를 잠시 내려놓은 순간, 슬퍼야 하는지 기뻐야 하는지 모르는 채로 그냥 서 있는 순간. 거북이들이 햇살 아래 엎드려 있듯, 설명 없이 그저 거기 있는 순간. 그 순간이 짧고 드물어서 우리는 잊고 살지만, 그것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뫼르소가 끝까지 붙들었던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는 별빛 아래서,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은 채, 자유롭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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