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창조성, 혹은 봄이 오는 방식
📖 줄리아 캐머런, 《아티스트 웨이》를 읽고
"내 안의 창조성을 깨우는 12주간의 여행."
“내 안의 창조성을 깨우는 12주간의 여행”이라는 부제를 달고 시작한 이 책은 단순한 자기계발서가 아니다. 줄리아 캐머런은 창조성이 인간의 본질적 유전자이자 잠재력임을 전제로, 우리 안에 억눌려 있는 힘을 회복시키는 과정을 하나의 의례처럼 제시한다. 모닝 페이지와 아티스트 데이트라는 실천적 장치들은 단순한 과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자 세계와의 새로운 접속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다. 예술은 지성이 아니라 영혼의 활동이며, 우리는 자기 자신보다 훨씬 더 큰 힘과 에너지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창조성이란 단순히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를 새롭게 맺는 방식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가다머가 말한 ‘지평의 융합’처럼, 나의 내면과 타인의 목소리,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순간이 서로 교차하며 새로운 이해를 낳는다. 창조성은 그 융합의 사건 속에서 깨어난다. 그것은 나의 사유를 확장시키고, 나를 넘어선 세계와의 대화로 이어진다.
1. 저항
첫째 주, 나는 노트를 펼쳐놓고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줄리아 캐머런은 말한다. 매일 아침, 의식이 완전히 깨어나기 전에, 손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고. 모닝 페이지. 무엇을 쓰든 상관없다. 잘 쓰려 하지 말고, 그냥 써야 한다고. A4 세 장. 내용이 아니라 흐름이 중요하다고. 나는 그 지시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해 보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노트 앞에 앉아 펜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다시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25년을 써온 사람이 빈 노트 앞에서 굳어버렸다. 그 사실이 쓰지 못하는 것보다 더 당혹스러웠다.
캐머런은 이것을 내 안의 검열자라고 부른다. 게으름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쓸 만한 것을 써야 한다는 감시자. 나는 그 감시자를 오랫동안 편집자라고 불러왔다. 좋은 문장과 나쁜 문장을 가려내는 능력,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을 분별하는 감각. 25년 동안 그것을 갈고닦아왔다. 그런데 캐머런은 말한다. 바로 그 능력이 창조성을 질식시키는 것이라고. 감시자를 잠시 내려놓아야 한다. 손이 먼저 가게 두어야 한다. 나는 그 말 앞에서 한동안 멈추었다. 25년의 훈련이 오히려 나를 막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셋째 날 아침, 나는 결국 썼다. 오늘 날씨가 흐리다. 커피가 식었다. 원고 마감이 두렵다. 쓸 말이 없다. 쓸 말이 없다는 것을 쓰고 있다. 문장들은 형편없었다. 그러나 손은 움직였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캐머런은 말했을 것이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그 말을 믿었다. 형편없는 문장을 쓰는 것과,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 사이에는, 생각보다 훨씬 큰 차이가 있었다.
둘째 주와 셋째 주, 캐머머런은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한다. 쓰라. 판단하지 말고 쓰라. 나는 그 반복이 처음에는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모닝 페이지를 펼치면서 나는 깨달았다. 저항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노트 앞에 앉는 것이 조금씩 자연스러워지고 있다는 것을. 봄이 한 번에 오지 않듯, 저항도 한 번에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매일 아침 조금씩, 감시자의 목소리가 작아지고 있었다.
2. 균열
넷째 주에 캐머런은 신화를 벗기라고 말한다. 예술가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신화. 창조성은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진다는 믿음. 나는 그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25년을 써왔으니까. 그러나 모닝 페이지를 들여다보다가, 나는 다른 신화를 발견했다. 나는 이미 충분히 써왔으므로, 이제는 잘 써야 한다는 믿음. 습작의 시간은 끝났고, 매 문장이 완성이어야 한다는 압박. 그것이 나의 신화였다. 나는 예술가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신화는 벗겼지만, 경력이 쌓인 작가는 항상 좋은 문장을 써야 한다는 신화를 새로 만들어 입고 있었다.
가다머는 선입견이 이해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조건은 인식될 때만 조건으로 작동한다. 인식되지 않은 선입견은 조건이 아니라 감옥이 된다. 나의 신화도 그랬다. 내가 그것을 선입견으로 인식하는 순간, 비로소 그것과 거리를 둘 수 있었다. 벗기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 균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다섯째 주, 캐머런은 상처와 화해하라고 말한다. 실패와 거절의 기억들. 나는 그 목록을 읽으며 오래된 서랍을 열었다. 출판사에서 돌아온 원고들, 게재되지 못한 글들, 누군가의 혹평. 나는 그것들을 이미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캐머런은 극복을 말하지 않는다. 화해를 말한다. 극복은 상처를 없애는 것이고, 화해는 상처와 함께 사는 것이다. 나는 상처를 없앴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다만 보지 않으려 했을 뿐이었다. 서랍은 닫혀 있었지만, 비어 있지는 않았다.
여섯째 주, 아티스트 데이트. 캐머런은 일주일에 한 번, 혼자서, 내면의 아이를 데리고 나가라고 말한다. 목적 없이. 나는 오래된 레코드 가게에 갔다. 한 시간 동안 재킷을 들여다보고, 음악을 듣고, 아무것도 사지 않고 나왔다. 그런데 그날 저녁, 오랫동안 막혀 있던 단락이 풀렸다.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무언가가 느슨해졌다는 감각이 있었다. 캐머런은 그것을 창조성의 우물을 채우는 일이라고 부른다. 쓰기 위해서는 먼저 채워야 한다. 나는 오랫동안 채우지 않고 퍼내기만 했다는 것을, 그날 처음으로 느꼈다.
3. 접속
일곱째 주부터 캐머런은 자기파괴적 습관을 이야기한다. 비교, 자기 비난, 미루기. 나는 그 목록을 읽으며 이십대의 일기장을 떠올렸다. 매일 다른 작가들과 자신을 비교했던 시절. 그 시절의 일기는 대부분 자기 비난으로 가득했다. 나는 그것을 오래전에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닝 페이지를 들여다보면, 형태만 바뀌었을 뿐 목소리는 남아 있었다. 이십대에는 다른 작가와 비교했고, 지금은 어제의 나와 비교하고 있었다. 비교의 대상이 타인에서 자신으로 옮겨갔을 뿐, 비교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여덟째 주, 캐머런은 기쁨의 목록을 만들라고 말한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 단순하고 구체적인 것들. 나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썼다. 새벽 네 시의 고요함. 오래된 재즈 음반의 표면 잡음. 잘 갈린 연필의 냄새. 필름 카메라의 셔터 소리. 군산의 골목이 비에 젖는 냄새. 그것들을 쓰면서, 나는 내가 오랫동안 기쁨을 사치로 여겨왔다는 것을 알았다. 완성하지 못한 원고들이 쌓여 있는데, 기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캐머런은 그것을 뒤집는다. 기쁨이 창조성의 원천이지, 창조성이 기쁨의 조건이 아니다. 나는 순서를 거꾸로 알고 있었다.
아홉째 주, 캐머런은 목소리의 확장을 이야기한다. 글 이외의 것들.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듣거나, 몸을 움직이거나. 나는 오랫동안 글쓰기만을 창조의 행위로 여겨왔다. 그러나 그날 저녁 필름 카메라를 들고 골목을 걸으면서, 나는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 끝에서 글쓰기와 같은 감각을 느꼈다. 무언가를 포착하려는 의지. 사라지기 전에 붙잡으려는 충동. 창조성은 특정한 형식에 묶여 있지 않았다. 그것은 세계와 접속하는 방식 자체였다.
4. 지평
열째 주, 캐머런은 장애를 이야기한다. 없애는 것이 아니라 넘어가는 것. 나는 이 구분 앞에서 오래 멈추었다. 없앤다는 것은 장애가 사라진 이후에 걷겠다는 뜻이다. 넘어간다는 것은 장애와 함께 걷겠다는 뜻이다. 나는 오랫동안 전자를 기다렸다. 조건이 갖춰지면 쓰겠다고. 시간이 생기면, 마음이 정리되면, 어떤 관계가 회복되면. 그러나 그 조건들은 끝내 완전히 갖춰지지 않았고, 나는 그 사이에도 어떻게든 써왔다. 어쩌면 나는 이미 넘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넘어가는 것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뿐.
열한째 주, 캐머런은 공동체를 이야기한다. 창조적 집단 속에서 서로가 거울이 되어 함께 걷는 길. 나는 그 제안에 처음에는 회의적이었다. 글쓰기는 본질적으로 고독한 행위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캐머런은 고독과 고립을 구분한다. 고독은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고, 고립은 타인으로부터 차단된 것이다. 창조성은 고독 속에서 자라지만, 고립 속에서는 시든다. 나는 때로 고독을 고립으로 만들어왔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닫힌 문 뒤에서 혼자 쓰는 것이 진지함의 증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때로는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것을.
열두째 주, 가다머가 다시 떠오른다. 이해는 완결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지평은 언제나 다시 열린다. 해석학적 순환처럼, 부분은 전체를 향해 열려 있고 전체는 부분 속에서만 구체화된다. 창조성도 그렇다. 완성된 원고는 다음 원고의 부분이 되고, 다음 원고는 이전 원고를 다시 읽게 한다. 나는 12주 동안 창조성을 회복한 것이 아니다. 창조성이 무엇인지를 조금 다르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 차이는 작지 않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창조성이란 단순히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개인적 성취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세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사건임을 느낀다. 그것은 하이데거가 말한 ‘세계-내-존재’의 본질적 구조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세계 속에 던져져 있으며, 그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데, 창조성은 바로 그 드러남의 방식이다. 창조성은 나의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작은 열정으로 시작되지만, 그것은 곧 나를 초월하는 힘과 맞닿으며, 나를 세계와 연결하는 다리로 변한다.
이 힘은 단순히 개인적 욕망이 아니라, 니체가 말한 생의 의지처럼, 베르그송이 말한 생명 충동처럼, 인간 존재가 본래적으로 지닌 근원적 에너지다. 프로이트가 리비도로 설명한 심리적 에너지가 무의식의 층위에서 인간을 움직이듯, 창조성은 의식과 무의식, 개인과 세계를 관통하는 에너지로서 나를 앞으로 밀어낸다. 오랫동안 내 안에 가라앉아 있던 ‘알 수 없는 힘-열정’은 이제 다시 떠오른다. 그것은 억눌린 욕망의 단순한 분출이 아니라, 존재가 본래적으로 지닌 자기실현의 충동이 세계와의 접속 속에서 구체화되는 사건이다.
새벽에 살펴본 가다머가 말한 ‘지평의 융합’을 이 과정을 설명하는 데도 적절하겠구나 생각했다. 나의 경험과 타인의 목소리,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새로운 의미를 낳는 순간, 창조성은 깨어난다. 그것은 단순한 이해가 아니라, 나의 존재가 변형되는 사건이다. 창조성은 세계와의 대화 속에서 나의 지평을 확장시키고, 나를 넘어선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이해를 낳는다.
그러나 창조성은 개인적 사건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공동체적 사건이다.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처럼,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창조적 집단은 그 관계를 예술적 방식으로 구현하는 장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이 되어, 함께 장애를 헤쳐나가며 공통의 목표로 결합하는 순간, 창조성은 윤리적 사건으로 확장된다. 그것은 단순히 나의 성취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존재가 서로를 통해 드러나는 사건이다.
그리고 지금, 이 계절의 문턱에서 나는 창조성을 봄의 은유로 느낀다. 아직 찬 기운이 남아 있지만, 바람 속에는 미묘한 따뜻함이 섞여 있다. 마른 가지 끝에서 작은 싹이 돋아나듯, 내 안의 열정도 조용히 고개를 든다. 창조성은 폭발처럼 한순간에 오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스며드는 빛처럼 다가온다. 새벽의 공기 속에서 나는 아직 보이지 않는 꽃향기를 맡는다. 그것은 미래의 약속이자 현재의 감각이다. 봄은 한 번에 오지 않듯, 창조성도 한 번에 깨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계절의 전환을 피부로 느끼며, 나는 이미 새로운 지평 위에 서 있다.
이제 나는 창조성을 강물의 흐름으로도 느낀다. 겨울 동안 얼어붙어 있던 물길이 서서히 풀리며 작은 물방울이 모여 흐름을 만든다. 그 물결은 처음에는 미약하지만, 곧 강을 이루어 대지를 적신다. 내 안의 열정도 그렇게 작은 움직임에서 시작해 점차 힘을 얻는다. 또 창조성은 새벽 하늘의 빛처럼 다가온다. 아직 어둠이 남아 있지만, 지평선 위로 번지는 옅은 빛은 곧 태양을 예고한다. 그 빛은 확신이 아니라 약속이며,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품은 은유다. 나는 지금, 계절의 전환을 하늘과 강물, 바람과 흙의 감각 속에서 느끼며, 창조성이 나를 세계와 이어주는 새로운 길이 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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