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사유의 즉흥 연주 – 군산을 걷다
한 곡의 재즈, 한 명의 철학자, 한 권의 문학, 한 편의 영화, 군산의 한 장소를 다섯 겹의 렌즈로 하나의 주제를 즉흥 연주한다. 재즈 에세이이자 군산 산책기이자 철학 입문서로써 35개의 장은 재즈 클럽의 다섯 세트(Set)로 구성되며, 시간과 기억에서 출발해 경계와 융합으로 나아간다. 모든 장소는 군산이다.
5.
Waltz for Debby (Bill Evans)
바슐라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영화 <타짜>
*
히로쓰 가옥 | 서늘한 기억의 집이다.
1. 세 살짜리 소녀를 위한 왈츠
빌 에반스의 “Waltz for Debby”를 처음 들으면, 누군가 아이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다. 3/4박자의 왈츠가 오른손에서 시작되는데, 그 첫 프레이즈가 아이의 걸음걸이처럼 가볍다. 한 발, 두 발, 세 발, 약간 비틀거리지만 넘어지지 않는다. 이 곡의 데비(Debby)는 에반스의 형 해럴드 에반스의 딸, 1953년경에 태어난 조카였다. 에반스는 뉴저지 플레인필드의 가족을 찾아갈 때마다 어린 데비를 해변에 데려갔다. 아이가 파도를 향해 뛰어가다 멈칫하고, 모래 위에 주저앉았다 다시 일어나고, 조개껍데기를 집어 올려 빛에 비추어보는 그 모든 동작이 이 왈츠의 리듬 안에 들어 있다. 기타리스트 먼델 로우의 증언에 따르면 이 곡에는 두 명의 데비가 있다.
에반스가 1950년대 초 로우의 트리오에서 연주할 때 로우의 세 살짜리 딸도 데비였고, 에반스는 그 아이를 좋아했다. 대학 시절부터 다듬어온 멜로디에 두 아이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아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시선이 느껴진다. 왈츠는 아이의 것이지만, 그 왈츠를 바라보는 눈은 이미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의 것이다.

F 장조의 밝은 조성 안에서 화성이 부드럽게 미끄러진다. 에반스(1929~1980)는 사우스이스턴 루이지애나 대학과 매니스 음악대학에서 클래식을 공부했고, 라벨과 드뷔시의 인상주의 화성이 그의 재즈 어법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Waltz for Debby”의 화성 진행에서 장 7화음과 단 7화음이 교차할 때, 빛이 물 위에서 굴절하듯 색이 바뀐다. 비평가 필립 라킨은 에반스의 음악을 “달빛 속의 피에로”에 비유했다. 그 비유의 핵심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연약함이다. 에반스의 터치는 건반을 때리지 않고 건반 위에 손가락을 놓는다. 그 가벼움이 이 왈츠에 무중력의 느낌을 준다. 마치 아이가 아직 중력의 법칙을 완전히 배우지 못한 것처럼.
에반스는 이 곡을 1956년 데뷔 앨범 《New Jazz Conceptions》에 솔로 피아노로 처음 녹음했다. 짧고 단정한 연주이다. 앨범은 첫해에 800장밖에 팔리지 않았지만, 그 안에 “Waltz for Debby”의 원석이 있었다. 5년 뒤인 1961년 6월 25일, 뉴욕 빌리지 뱅가드에서 이 곡은 전혀 다른 생명을 얻었다. 베이시스트 스콧 라파로, 드러머 폴 모션과 함께한 트리오 라이브. 이 날의 녹음은 두 장의 앨범인 《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와 《Waltz for Debby》으로 나뉘어 발매되었고, 재즈 피아노 트리오의 역사를 영원히 바꾸어놓았다. 에반스는 서른한 살, 라파로는 스물다섯, 모션은 서른이었다. 그리고 그 녹음이 이루어진 열하루 뒤, 스콧 라파로는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스물다섯 살이었다.
https://youtu.be/PQmZctWwsCE?list=RDPQmZctWwsCE
2. 빌리지 뱅가드의 마지막 일요일
1961년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다. 빌리지 뱅가드는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지하에 있는 작은 클럽이다. 계단을 내려가면 삼각형 모양의 좁은 공간이 나온다. 천장이 낮고, 기둥이 많고, 무대와 객석 사이의 거리가 거의 없다. 연주자의 호흡 소리가 들릴 만큼 가깝다. 이 날 에반스 트리오는 오후와 저녁에 걸쳐 다섯 세트를 연주했다. 녹음 테이프는 돌아가고 있었지만, 이것이 마지막 녹음이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몰랐다.
앨범을 들으면 접시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기침하고, 잔이 탁자에 놓이는 소리가 섞여 있다. 프로듀서 오린 킵뉴스는 이 소음들을 제거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 앨범은 연주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연주가 일어나고 있던 공간과 시간을 통째로 담고 있다. “My Foolish Heart”이 시작될 때 누군가 컵을 내려놓는 소리. 그 작은 충돌음이 에반스의 화음 사이에 끼어들 때, 우리는 1961년 6월 25일의 빌리지 뱅가드 안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것은 녹음이 아니라 기억이다.
여기에 감각적 층위를 더하면, 잔 부딪히는 소리 사이로 담배 연기가 천장을 스며올랐고, 그 공기의 냄새까지 녹음에 남았다. 빌리지 뱅가드의 공기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음악의 일부였다. 소리와 냄새, 연기와 빛이 모두 합쳐져 하나의 기억을 만든다. 작은 지하 클럽의 건조한 울림은 에반스가 선호하던 음향이었고, 그 울림 속에서 세 사람의 호흡은 더욱 가까워졌다.
에반스 트리오가 혁명적이었던 이유는 세 악기의 관계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재즈 피아노 트리오에서 베이스와 드럼은 반주였다. 피아니스트가 말하고, 베이시스트와 드러머는 맞장구를 쳤다. 에반스는 이 위계를 해체했다. 에반스 자신이 말했다. “동시적 즉흥연주의 방향으로 성장하고 싶었다. 한 사람이 독주하고 다음 사람이 독주하는 것이 아니라.” 라파로의 베이스는 걸어 다니는 저음이 아니라 노래하는 목소리였다. 에반스의 왼손이 화음을 놓으면 라파로의 베이스가 대답하고, 모션의 브러시가 그 대화에 리듬을 더했다. 셋이 동시에 듣고 동시에 반응하는 텔레파시 같은 교감. 빌리지 뱅가드의 녹음이 반세기가 넘도록 살아남은 이유가 이것이다. 이것은 피아노 독주가 아니라 세 사람의 대화이고, 대화는 참여자가 바뀌면 다시는 같은 대화가 되지 않는다.
열하루 뒤 라파로가 죽었을 때, 에반스는 완전히 무너졌다. 폴 모션의 공연 일지에 몇 달간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았다. “빌은 유령 같았다.” 에반스는 나중에 말했다. “스콧이 죽은 것은 단순히 친구를 잃은 것이 아니었다. 나의 평생의 꿈이었던 특정한 종류의 트리오를 실현하는 것이 완전히 끊어져버렸다.” 다시 트리오를 구성했을 때 베이시스트를 척 이즈레일스로 교체했지만, 라파로와의 교감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에반스는 이후 에디 고메즈, 마크 존슨 등 뛰어난 베이시스트들과 작업했고, 만년의 존슨 트리오에 대해서는 스스로 “라파로와 모션 이래 최고의 트리오”라고 평했다. 그러나 1961년 6월 25일의 빌리지 뱅가드는 반복 불가능한 시간이었다. 세 사람의 호흡이 하나로 합쳐지는 그 순간, 접시 소리와 기침 소리까지 포함한 그 순간은, 녹음 테이프 위에만 존재한다.
3. 바슐라르, 집이라는 우주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는 《공간의 시학》에서 집을 우주의 한 모퉁이라고 불렀다. 인간은 세계 전체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았던 집의 방들인 다락방의 어둠, 지하실의 습기,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빛같은 구체적인 공간을 통해 세계를 기억한다. 바슐라르에게 집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기억이 축적되는 기관이다. 우리가 과거를 떠올릴 때, 사건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 사건이 일어났던 공간의 질감이다. 벽의 색, 마루의 삐걱거림, 부엌에서 나던 냄새. 바슐라르는 이 책에서 ‘최초의 집’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유년기에 살았던 집이 모든 이후의 집들의 원형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집에 들어설 때 느끼는 친밀함이나 낯섦은, 사실 최초의 집과의 거리를 재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감각적 층위를 더하면, 기억은 단순히 시각적 이미지가 아니라 청각과 후각까지 포함한다. 다락방의 어둠은 시각적 경험이지만, 그 안의 먼지 냄새와 삐걱거리는 소리는 기억을 더 깊게 각인시킨다. 에반스가 “Waltz for Debby”를 쓸 때, 세 살짜리 데비가 뛰어놀던 해변은 단순한 모래사장이 아니라, 파도의 소리와 조개껍데기의 촉감, 햇빛의 반짝임까지 포함한 ‘친밀한 광대함’의 공간이었다.
바슐라르의 핵심 개념 중 하나가 ‘친밀한 광대함(immensité intime)’이다. 작은 공간이 상상력에 의해 무한히 확장되는 현상이다. 조개껍데기 안에 바다가 있고, 서랍 안에 세계가 있다. 어린 시절의 방은 실제로는 작았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 속에서 그 방은 하나의 세계가 된다. 에반스의 왈츠는 바로 이런 구조를 가진다. 작은 멜로디가 무한히 확장되어, 한 아이의 걸음이 세계 전체의 리듬으로 변한다.
바슐라르의 또 다른 핵심 개념이 몽상(rêverie)이다. 몽상은 꿈과 다르다. 꿈은 의식이 꺼진 상태에서 일어나지만, 몽상은 깨어 있는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자발적인 상상이다. 에반스의 즉흥연주가 정확히 몽상이다. 그는 잠들지 않는다. 완전히 깨어 있다. 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의식이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곳으로 나아간다. 에반스는 피아노 앞에 고개를 숙이고 연주했다. 관객을 보지 않았다. 마치 혼잣말을 하듯, 피아노에게 속삭이듯 연주했다.
4. 프루스트, 무의지적 기억의 시간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7권으로 이루어진 대하소설이다. 첫 권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권 《되찾은 시간》까지, 프루스트가 추구한 것은 과거의 복원이 아니라 감각을 통한 시간의 재경험이었다. 가장 유명한 장면은 마들렌 과자를 홍차에 적셔 입에 넣는 순간이다. 그 순간 잊고 있던 유년의 콩브레 마을이 통째로 되살아난다. 교회의 종소리, 정원의 산사나무 꽃, 이모의 방 냄새. 프루스트는 이것을 ‘무의지적 기억(mémoire involontaire)’이라 불렀다. 의지적 기억, 우리가 노력해서 떠올리는 기억은 정보를 되돌려줄 뿐이다. 무의지적 기억만이 과거의 감각, 과거의 공기, 과거의 온도를 통째로 되살린다.
“Waltz for Debby”의 빌리지 뱅가드 녹음에서 접시 부딪히는 소리가 바로 이 마들렌이다. 의도하지 않았고, 계획하지 않았고, 음악의 일부가 아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소음이 이 앨범을 단순한 연주 기록이 아니라 하나의 시간 기록으로 만든다. 에반스의 화음이 프루스트의 문장이라면, 접시 소리는 마들렌의 맛이다. 음악을 들으며 우리는 연주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1961년 6월 25일이라는 시간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프루스트가 말한 되찾은 시간의 음악적 등가물이다.
프루스트의 문장은 길다. 하나의 문장이 시작되면 여러 개의 절로 분기하고, 삽입구가 삽입구를 낳으며, 본래의 주어가 어디에 있었는지 잊어버릴 무렵에야 비로소 마침표가 온다. 그 긴 호흡 속에서 과거와 현재와 감각과 사유가 하나의 흐름으로 얽힌다. 에반스의 즉흥연주가 정확히 이 구조를 가지고 있다. 에반스의 오른손은 하나의 프레이즈를 시작하면 곧장 끝맺지 않는다. 선율이 가지를 치고, 예상치 못한 화성으로 우회하고, 다른 색깔의 코드를 거쳐 돌아온다. 그 우회의 과정에서 원래의 선율이 기억의 퇴적물을 입고 돌아오는 것이다. 프루스트가 한 문장 안에 콩브레의 종소리와 마들렌의 맛과 할머니의 키스를 모두 담으려 했듯, 에반스는 하나의 코러스 안에 밝음과 슬픔과 망설임과 확신을 모두 담으려 했다. 둘 다 정리하지 않는다. 정리하면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기 위해 일부러 문장을, 프레이즈를, 길게 늘인다.
프루스트에게 기억은 선형적이지 않다. 과거는 현재 속에 접혀 있고, 감각의 촉발에 의해 불현듯 펼쳐진다. 에반스의 연주도 선형적이지 않다. “Waltz for Debby”의 멜로디는 3/4박자의 왈츠이지만, 에반스의 화성은 시간을 접고 펼친다. 한 화음 안에 여러 시간대가 겹쳐 있다. 장조와 단조의 경계에서 미끄러지는 에반스의 보이싱은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존재하는 기억의 질감과 닮았다. 아이의 왈츠를 듣고 있는데, 그 안에서 상실이 들린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라파로의 죽음이 이미 음악 안에 스며들어 있는 것처럼. 프루스트는 마지막 권 《되찾은 시간》에서 결론을 내린다. 시간은 되찾아지지 않는다. 되찾아지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시간을 감싸고 있던 감각의 질감이다. 에반스의 왈츠가 들려주는 것도 선율이 아니라, 선율이 존재했던 공간과 시간의 질감이다.
5. 《타짜》, 매혹적이고 서늘한 집
최동훈 감독의 《타짜》(2006)에서 히로쓰 가옥은 평경장의 집으로 등장한다. 백윤식이 연기한 평경장은 도박판의 절대 권력자다. 히로쓰 가옥의 어두운 다다미방에서 화투패가 돌아갈 때, 그 공간의 고즈넉함이 도박의 잔혹함과 기묘하게 결합한다. 일본식 정원의 석등 사이로 빛이 스며들고, 나무 복도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긴장을 높인다. 평경장의 집은 아름답지만 서늘하다. 환대하는 척하면서 빼앗는 집. 기억의 집이 반드시 따뜻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영화에서 고니(조승우)가 처음 이 집에 들어서는 장면을 떠올려 보라. 현관의 높은 문턱을 넘으면 넓은 마루가 펼쳐지고, 그 너머로 정원이 보인다. 고니의 눈에 비친 이 공간은 매혹적이다. 그러나 관객은 안다. 이 집이 고니를 삼킬 것이라는 것을. 바슐라르가 집을 피난처라 불렀다면, 평경장의 집은 피난처를 가장한 함정이다. 기억의 공간이 가진 양면성이 여기 있다. 집은 보호하기도 하고, 가두기도 한다.
여기에 감각적 층위를 더하면, 다다미방의 공기는 단순한 정적이 아니라 긴장으로 가득 차 있다. 화투패가 탁자 위에서 부딪히는 소리, 술잔이 미묘하게 흔들리는 소리, 그리고 나무 복도의 삐걱거림이 모두 합쳐져 공간을 압박한다. 이 집의 아름다움은 시각적 장식에만 있지 않고, 청각적 긴장과 촉각적 불안까지 포함한다.
에반스의 음악에도 이 양면성이 있다. “Waltz for Debby”의 부드러운 터치는 청자를 안심시키지만, 그 안심 속으로 빠져든 순간 상실의 깊이가 열린다. 에반스를 “칵테일 뮤직”이라 폄하한 사람들은 이 부드러움을 약함으로 읽은 것이다. 그러나 《타짜》의 화투판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아니라 미소 짓는 사람이듯, 에반스의 부드러움은 치명적인 깊이를 감추고 있다.
히로쓰 가옥의 원래 주인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오류가 전해졌다. 후지이 가즈코(藤井和子) 교수가 2012년에 발표한 연구서 《식민지 도시 군산의 사회사》에서 히로쓰의 손자 히로쓰 쇼헤이의 증언을 토대로 사실을 바로잡았다. 이 집을 지은 사람은 히로쓰 게이사브로가 아니라 히로쓰 기치사브로(廣津吉三朗, 1878~1949)였다. 군산에서 포목점을 운영하며 임피 인근에 소규모 농장을 경영했고, 군산부협의회 의원을 역임한 인물이다. 대지주가 많았던 군산에서 드물게 상업으로 부를 일군 일본인이었다.
여기에 역사적 층위를 더하면, 기치사브로가 1930년대에 지은 이 야시키 양식의 대규모 목조 주택은 단순한 생활 공간이 아니라 권력의 상징이었다. 건축 당시 전기와 상하수도가 갖추어져 있었고, ‘ㄱ’자 모양으로 붙은 두 채의 건물 사이에 2층짜리 금고동이 연결되어 있었다. 금고동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지주의 불안과 욕망이 응축된 상징이었다. 일본식 정원에는 연못과 석탑과 석등이 놓여 있었고, 1층에는 온돌방과 부엌, 식당, 다다미 응접실이, 2층에는 도코노마와 오시이레가 딸린 다다미방이 있었다. 복도는 길고 좁으며 중간에 두 갈래로 갈라졌다. 무사 집안 출신의 기치사브로가 자객의 침입에 대비해 미로처럼 설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름다운 집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의 이면에는 조선인 농민의 수탈이 있다. 기치사브로의 농장에서 생산된 쌀은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실려 나갔다. 집의 아름다움과 착취의 역사가 하나의 공간에 겹쳐 있는 것이다. 이 겹침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공간의 공기 속에 남아 있다.
6. 적산가옥, 기억이 겹치는 집
히로쓰 가옥은 1945년 해방과 함께 적산가옥이 되었다. 적의 재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집. 기치사브로는 1949년에 세상을 떠났고, 집은 호남제분의 이용구 사장에게 넘어갔다. 일본인이 조선인의 쌀로 지은 집을, 해방 후 한국인이 물려받은 것이다. 이후 한국제분의 소유가 되었고, 2005년 국가등록문화재 제183호로 지정되면서 군산시가 관리를 시작했다. 2015년부터는 문화재 보호를 위해 실내 관람이 제한되어, 현재는 정원과 건축물의 외부만 관람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 오히려 들어갈 수 없는 내부가 상상력을 자극한다. 바슐라르가 닫힌 서랍과 잠긴 상자에 매혹되었듯, 열리지 않는 문 너머의 다다미방이 기억의 깊이를 더한다.
그 뒤 이 집에서 《장군의 아들》(1990)이 찍혔고, 《타짜》(2006)가 찍혔고, 《범죄와의 전쟁》(2012)이 찍혔다. 영화가 찍힐 때마다 집은 새로운 기억의 층을 입었다. 기치사브로의 기억 위에 평경장의 기억이 겹치고, 그 위에 관광객의 기억이 겹친다. 히로쓰 가옥을 방문하는 사람의 상당수는 이 집이 역사적 건축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에서 본 공간이기 때문에 찾아온다. 허구의 기억이 실제의 기억 위에 덧입혀지는 것이다. 프루스트라면 이것을 비자발적 기억의 변주라 부를 것이다. 다다미방 앞에 서는 순간, 《타짜》의 장면이 먼저 떠오르고, 그 다음에 일제강점기의 역사가 떠오르고, 그 모든 층위가 한꺼번에 겹쳐 진다.
에반스의 “Waltz for Debby”도 같은 지층 구조를 가지고 있다. 1956년의 솔로 피아노 버전은 1층이다. 아이를 위한 단정한 왈츠이다. 1961년 빌리지 뱅가드 라이브는 2층이다. 트리오의 교감이 더해지고, 접시 소리가 스며들고, 열하루 뒤의 죽음이 예고 없이 기다리고 있는 버전이다. 1964년 스웨덴의 모니카 제터룬드가 스웨덴어 가사를 붙여 부른 버전은 3층이다.
https://youtu.be/8-HB6Uh9PvM?list=RD8-HB6Uh9PvM
“Monicas vals”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이 왈츠에서, 아이의 해변은 스칸디나비아의 겨울 바다로 바뀌었다. 에반스는 스웨덴 투어 중 이 녹음을 듣고 감동받아 직접 반주를 제안했다. 1975년 토니 베넷이 에반스의 반주로 진 리스의 영어 가사를 부른 버전은 4층이다.
https://youtu.be/Jy6-8OwB0PI?list=RDJy6-8OwB0PI
그리고1980년 9월7일, 샌프란시스코 키스톤 코너의 라이브가 5층이다. 에반스가 죽기 8일 전의 녹음. 사후에 《The Last Waltz》라는 제목으로 발매된 이 앨범에서 에반스의 터치는 더 느리고, 더 조심스럽고, 음과 음 사이의 침묵이 더 길다. 같은 멜로디 위에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시간이 쌓여 있다. 프루스트가 마들렌 하나에서 콩브레 전체를 꺼내듯, 이 왈츠 하나에서 다섯 개의 세계가 펼쳐진다.
https://youtu.be/89azFhwXzUo?list=PLbnJYtsl3xpgCojGWjHmtfjUWaDfaAmbb
히로쓰 가옥에 서서 이 앨범을 들으면, 여섯 번째 지층이 생긴다. 군산의 오후, 일본식 정원의 석등, 나무 복도를 밟는 발소리, 그리고 에반스의 왈츠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시간이다. 1930년대에 기치사브로가 이 정원을 거닐었고, 2006년에 조승우가 이 복도를 걸었고, 2026년에 당신이 이 마루에 앉아 있다.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시간이 겹친다. 바슐라르는 이것을 알고 있었다. 집은 시간을 저장한다.
7. 히로쓰 가옥, 오후의 빛 속에서
히로쓰 가옥을 방문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오후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다. 이 시간에 햇빛이 서쪽으로 기울면서 정원의 석등과 나무 사이로 긴 그림자가 드리운다. 1층 마루에 앉으면 열린 문 너머로 정원이 보인다. 정원 한가운데 놓인 석등은 밤에도 불이 들어오지 않지만, 오후의 빛이 석등의 돌 표면에 부딪혀 만드는 그림자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2층으로 올라가면 다다미방이 있다. 신발을 벗고 다다미 위에 앉으면 방의 크기가 달라진다. 서서 볼 때는 작아 보이던 방이, 앉는 순간 넓어진다. 시선이 낮아지면서 천장이 높아지고, 창밖의 하늘이 더 많이 보인다. 바슐라르의 친밀한 광대함이 바로 이 순간에 작동한다. 작은 다다미방이 하나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도코노마의 빈 공간, 위에 걸린 족자 한 점, 그 아래 놓인 꽃 한 송이. 일본 건축이 비움을 통해 공간을 확장하는 방식은, 에반스가 음표 사이의 침묵으로 음악을 확장하는 방식과 같다.
이 집에는 이상한 적막이 있다. 관광객이 많은 시간에도 집 안으로 들어서면 소리가 줄어든다. 나무 벽이 소리를 흡수하기 때문이다. 빌리지 뱅가드도 작은 지하 클럽이었고, 히로쓰 가옥도 주택가 안쪽의 조용한 집이다. 둘 다 바깥 세계로부터 차단된 내밀한 공간이다. 에반스는 이런 공간에서만 자기 음악을 펼칠 수 있었다. 그는 음향에 관해 유별나게 까다로운 사람이었고, 콘서트홀의 잔향보다 작은 클럽의 건조한 울림을 선호했다. 히로쓰 가옥의 나무 벽과 다다미 바닥이 만들어내는 음향은 빌리지 뱅가드와 닮았다. 소리가 넓게 퍼지지 않고 가까이에서 머무는 공간. 에반스의 피아노가 울리기에 적합한 집이다.
이 책의 첫 번째 장소가 초원사진관이었고, 두 번째가 경암동 철길이었고, 세 번째가 해망굴이었고, 네 번째가 은파호수공원이었다면, 다섯 번째는 이 집이다. 초원사진관이 시간을 정지시켰고, 경암동 철길이 방향을 해방시켰고, 해망굴이 어둠을 통과시켰고, 은파호수가 떨림을 비추었다면, 히로쓰 가옥은 기억을 거주하게 한다. 사진관은 한 장의 이미지였고, 철길은 하나의 선이었고, 터널은 하나의 통로였고, 호수는 하나의 표면이었다면, 집은 삼차원의 공간이다. 벽이 있고, 천장이 있고, 마루가 있고, 정원이 있다. 기억이 방 안에 머무른다. 빠져나가지 못한다. 에반스의 왈츠가 이 집의 나무 벽 안으로 스며들듯.
8. 기억의 집에 머무는 시간
빌 에반스는1980년 9월 15일에 사망했다. 쉰한 살. 코카인과 헤로인 남용으로 무너진 몸이 간경변으로 끝났다. 죽기 직전까지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말년의 녹음에서도 “Waltz for Debby”를 연주했다. 스물여섯 해 전에 세 살짜리 조카를 위해 쓴 왈츠를 쉰한 살의 파괴된 몸으로 다시 연주하는 것. 프루스트의 시간이 여기서 음악이 된다. 같은 왈츠이지만, 손가락에 실리는 삶의 무게가 완전히 다르다.
에반스의 삶 자체가 바슐라르적 의미에서 기억의 집이 무너지는 과정이었다. 라파로의 죽음 이후 마약 중독이 심화되었다. 12년을 함께한 연인 일레인 슐츠도 중독자였다. 에반스는 친구들에게 매일 돈을 빌려야 했고, 전기와 전화가 끊긴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는 마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매일 아침 죽음 같은 고통 속에서 깨어나고, 나가서 약을 구하면 그것이 변용이다. 하루하루가 삶의 축소판이 된다.” 1973년, 에반스가 새 여자를 만나 일레인을 떠나자 일레인은 지하철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1979년에는 형 해럴드가 정신 질환으로 자살했다. 데비의 아버지, “Waltz for Debby”의 데비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바로 그 형이었다. 에반스의 곡 “We Will Meet Again”은 형을 위한 헌정곡이다. “B Minor Waltz”는 일레인을 위한 왈츠다. 에반스의 오리지널 곡 목록은 헌정의 목록이자 상실의 목록이다.
에반스가 남긴 것은 결국 집이다. 음악이라는 집. “Waltz for Debby”라는 방. “My Foolish Heart”이라는 복도. “Blue in Green”이라는 창문. 우리는 이 집을 방문할 때마다 자기 자신의 기억을 가지고 들어간다. 바슐라르가 말했듯, 집은 사는 사람에 의해 재구성된다. 에반스의 음악을 듣는 모든 사람은 같은 음을 듣지만, 각자 다른 방에 앉아 있다.
히로쓰 가옥도 그런 집이다. 히로쓰의 집이기도 하고, 평경장의 집이기도 하고, 군산시의 등록문화재이기도 하고, 당신이 오후에 잠시 앉아 쉬었던 집이기도 하다. 집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집은 그 안에 머물렀던 모든 시간의 것이다. 적산가옥이라는 이름 속에는 적의 재산이라는 분노가 있지만, 동시에 그 분노를 통과한 뒤에 남은 아름다움도 있다. 부서지지 않고 남아 있는 나무 기둥, 여전히 빛을 받는 석등, 다다미 위에 앉으면 여전히 확장되는 공간. 에반스의 왈츠가 라파로의 죽음을 통과하고도 아름다운 것처럼, 이 집도 수탈의 역사를 통과하고도 아름답다. 기억의 집은 그런 곳이다. 상처를 품고 있으면서도, 그 상처 때문에 오히려 더 깊은 공간이 되는 곳.
•
히로쓰 가옥의 마루에 앉아 있으면, 정원 너머에서 바람이 분다. 바람은 나뭇잎을 스치며 작은 파문을 만들고, 석등의 그림자는 돌 표면 위에서 천천히 흔들린다. 그 미세한 떨림이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될 때, 마치 보이지 않는 지휘자가 3/4박자를 세고 있는 듯하다. 바람의 리듬은 에반스의 손끝처럼 가볍고, 그림자의 흔들림은 라파로의 베이스처럼 깊다. 이 집의 오후는 하나의 왈츠가 된다. 세 살짜리 소녀를 위해 쓰였지만, 이미 모든 것을 잃어버린 어른의 왈츠가 이 공간의 공기 속에서 다시 울린다. 그리고 그 울림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기억의 집이 품은 상처와 아름다움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
♫ 듣기— Bill Evans Trio, Waltz for Debby (Riverside, 1962). 빌리지 뱅가드 라이브.
Bill Evans, New Jazz Conceptions (Riverside, 1956). 솔로 피아노 오리지널.
Monica Zetterlund & Bill Evans, Waltz for Debby (Philips, 1964). 스웨덴어 버 전.
Tony Bennett & Bill Evans, The Tony Bennett/Bill Evans Album (Fantasy, 1975). 보컬 버전.
Bill Evans, The Last Waltz (Milestone, 2000). 1980년 키스톤 코너. 죽기 8일 전.
⌖ 걷기— 히로쓰 가옥| 전북 군산시 신흥동| 오후 세 시에서 다섯 시를 권한다.
▷ 읽기—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보기— 최동훈, «타짜» (2006) | 임권택, «장군의 아들» (1990)
#BillEvans #WaltzForDebby #JazzVibes #VillageVanguard #군산 #히로쓰가옥 #바슐라르 #공간의시학 #프루스트 #잃어버린시간 #기억의집 #재즈피아노 #적산가옥 #타짜 #영화와공간 #음악과기억 #JazzLovers #InstaJazz #lettersfromatraveler
'재즈' 카테고리의 다른 글
| 4.The Köln Concert Keith Jarrett, 은파호수공원, 군산 (0) | 2026.02.22 |
|---|---|
| B급의 변주곡, 나를 완성하는 재즈라는 배경 (0) | 2026.02.21 |
| You’re Exaggerating! (2025) (0) | 2026.02.20 |
| 2. So What Miles Davis (0) | 2026.02.16 |
| 1. Blue in Green (0) | 2026.02.1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