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디는 법을 가르쳐준 것들에게
재즈는 나에게 음악이기 이전에 생존의 도구였다. 살아가는 일이 유독 힘겨웠던 시절들이 있었다. 그 시절의 나에게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 용기도, 술잔 너머로 속내를 꺼낼 여유도 없었다. 대신 재즈가 있었다. 새벽 두 시, 불 꺼진 실내에서 빌 에반스의 피아노가 흘러나오면 세상의 소음이 한 겹씩 벗겨져 나갔다. 콜트레인의 색소폰이 길고 긴 포효를 내지르면 내 안에 웅크리고 있던 말 못 한 분노가 대신 토해지는 것 같았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트럼펫이 음과 음 사이에 남겨놓은 침묵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허락처럼 들렸다. 재즈는 나를 위로하지 않았다. 다만 내 옆에 앉아 함께 침묵해 주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 나는 다음 날을 견딜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다 보니 어느 날 문득 내 블로그를 돌아보게 되었다. 재즈에 관한 글이 1700 꼭지를 넘어 있었다. 내가 다룬 재즈 뮤지션만 1200명이 넘었다. 언제 이렇게 쌓였는지 나조차 몰랐다. 마치 매일 한 줌씩 모래를 옮기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거대한 언덕이 생겨 있는 것 같았다. 그 언덕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언젠가 이것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야겠다고. 재즈라는 음악이 나를 살게 해준 것에 대한 헌사로.
그런데 살다 보니 나를 버티게 해준 것이 어디 재즈뿐이었던가. 소설이 있었다. 현실이 견딜 수 없을 때 나는 타인의 서사 속으로 도망쳤고, 그 도망이 때로는 현실보다 더 깊은 진실을 만지게 해주었다. 영화가 있었다. 두 시간 동안 어둠 속에 앉아 스크린 위의 빛을 바라보는 행위가 일종의 명상이었고, 그 명상의 끝에서 나는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 극장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인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철학 공부를 시작했다. 플라톤의 동굴을 기어올랐고, 베르그송의 시간 속에서 헤엄쳤으며, 불교의 십우도를 따라 소를 찾아 떠나기도 했다. 물론 아직도 영글기에는 멀고 먼 길이다. 하지만 그 여정 자체가 나를 지탱해 주었다.
이 책은 그 모든 것들을 함께 엮어보려는 시도다. 재즈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철학과 문학과 영화를 포개고, 다시 그 위에 내가 살고 있는 도시 군산의 풍경을 덮는다. 한 곡의 재즈가 하나의 철학적 사유와 만나고, 하나의 소설 혹은 영화와 공명하며, 군산의 어느 한 장소에 닻을 내린다. 서른다섯 곡의 재즈, 서른다섯 곳의 풍경. 듣고 걷는 사유의 지도를 완성해 보려 한다.
책의 제목을 《재즈, 사유의 즉흥연주》라고 붙였다. 재즈의 본질이 즉흥이듯, 사유도 즉흥이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미리 정해진 결론을 향해 직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선율이 예기치 못한 화성과 만나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가듯 생각이 생각을 타고 나아가는 것이다. 빌 에반스가 “Blue in Green”에서 두 개의 코드 사이를 자유롭게 떠다녔듯, 이 책의 글들도 재즈와 철학과 문학과 영화 사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때로는 길을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재즈를 듣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길을 잃는 것이 때로는 가장 아름다운 도착이라는 것을.
이 책은 6개월간의 프로젝트로 기획되었다. 전문 학술서가 아니다. 재즈 이론서도, 철학 입문서도, 군산 관광 안내서도 아니다. 다만 한 사람이 음악과 책과 영화와 사색의 힘으로 자기 삶을 견뎌낸 기록이며, 그 견딤의 풍경을 독자와 함께 걸어보고 싶다는 초대장이다. 이어폰을 끼고, 책을 펼치고, 군산의 어느 골목을 걸으면서.
그럼 시작하자. 첫 곡은 빌 에반스다.
1.
Blue in Green
Bill Evans & Miles Davis
Kind of Blue (1959)
—
초원사진관, 군산
1. 빛 속에 빠진 초침
빌 에반스의 피아노가 첫 음을 놓는 순간, 세상의 모든 물리적인 법칙은 잠시 가동을 멈춘다. 정확히 말하면 시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밀도가 액체처럼 변한다. 톱니바퀴의 맞물림처럼 날카롭게 딱딱거리던 기계적 시간이 흐물거리며 제 형태를 잃기 시작한다. 마치 정교한 시계의 초침이 걸쭉한 꿀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혹은 한여름의 아스팔트 위로 뜨거운 지열이 피어올라 멀리 있는 풍경을 일그러뜨리는 것처럼. “Blue in Green”이 시작되면 우리는 그런 비현실적인 시간의 틈새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이 곡의 공식적인 길이는 5분 27초다. 하지만 이 곡을 끝까지 경청하고 난 청자에게 방금 몇 분이 흘렀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은 “글쎄요, 한 20분쯤 지난 것 같은데요”라고 답할 것이다. 이것은 감상자의 착각이 아니라 예술이 부리는 고도의 마술이다. 이 곡의 공간 안에서 시간은 탄성을 가진 고무줄처럼 무한히 늘어난다. 에반스의 왼손이 바닥에 나른하게 깔아놓은 모호한 화성적 쿠션 위로 오른손의 선율이 마치 수면 위를 떠다니는 가을 낙엽처럼 부유한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트럼펫은 음 하나를 고통스럽게 뱉어내고 나서 다음 음을 내기까지 비정상적으로 긴 침묵을 견뎌낸다. 그 팽팽하고도 고요한 기다림의 여백 속에서 우리의 의식은 물리적 한계를 넘어 팽창한다. 소리와 소리 사이의 빈 공간이 소리 그 자체보다 더 밀도 높은 진실을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2. 박제된 수표와 지워진 이름들
이 곡에는 재즈 역사상 가장 서늘하면서도 아름다운 뒷이야기가 박제되어 있다. 1959년 뉴욕의 어느 스튜디오, 마일스 데이비스는 빌 에반스에게 작은 종이 한 장을 건넸다. 그 위에는 단 두 개의 코드만이 외롭게 적혀 있었다. 마일스는 특유의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이걸로 뭐든 해봐”라고 던지듯 말했다. 에반스는 그 막막하고 단순한 두 점을 잇기 위해 자신의 고독을 투사하여 밤새 슬픔의 지도를 그려나갔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Blue in Green”이다.

Bill Evans & Miles Davis, “Blue in Green”, Kind of Blue (Columbia, 1959).
https://youtu.be/w1Ipwm-Uy5s?list=RDw1Ipwm-Uy5s
비극은 곡이 세상에 공개된 뒤에 고개를 들었다. 앨범 《Kind of Blue》의 재킷 뒷면에 적힌 작곡 크레딧에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이름만이 선명한 주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자신의 영혼을 갈아 넣은 곡을 빼앗긴 셈이었지만, 에반스는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한참 뒤의 인터뷰에서 “그건 사실 내 곡이었죠”라고 담담하게 소유권을 읊조렸을 뿐이다. 마일스는 그 항변에 대한 답으로 25달러짜리 수표 한 장을 보냈다고 한다. ‘저작권료’라는 명목의 그 종이를 받아 든 에반스는 그것을 현금으로 바꾸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 수표를 액자에 넣어 자신의 방 벽에 걸어두었다. 그것은 거장의 탐욕에 대한 조롱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가장 순수한 슬픔을 박제하여 영원히 기억하려는 의지였을까.
이 이야기가 유독 흥미롭게 다가오는 이유는 곡의 본질이 그 사연의 구조와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음악은 누구의 영토인가. 마일스가 던진 씨앗이 없었다면 에반스의 꽃은 피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에반스라는 비옥한 토양과 빛이 없었다면 마일스의 씨앗은 영원히 발아하지 못한 채 죽었을 것이다. 두 예술가의 기여 사이에 칼로 자르듯 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마치 곡의 제목처럼. 파란색이 어느 지점에서 채도를 잃고 초록색의 생기를 입기 시작하는지 누가 감히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이 곡은 바로 그 경계선이 완전히 녹아내려 서로의 존재를 침범하는 자리에서 태어났다.
3. 세 번의 죽음, 하나의 잔향
“Blue in Green”의 피아노를 듣고 있으면 그 아름다움 뒤에 무언가 균열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마치 완벽하게 잔잔한 호수의 수면 아래로 거대한 어둠이 가라앉아 있는 것처럼. 그 어둠의 정체를 이해하려면 빌 에반스라는 인간이 감당해야 했던 상실의 무게를 알아야 한다.
1961년7월6일, 에반스의 베이시스트 스캇 라파로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스물다섯 살이었다. 라파로는 단순한 동료가 아니었다. 에반스 트리오에서 베이스는 처음으로 피아노와 대등하게 대화하는 목소리가 되었고, 그 혁명의 중심에 라파로가 있었다. 라파로의 베이스는 피아노의 그림자가 아니라 피아노의 거울이었다. 그가 죽은 뒤, 에반스는 몇 달 동안 피아노 앞에 앉지 못했다. 다시 연주를 시작했을 때 그의 피아노에는 이전에 없던 것이 들어 있었다. 대화의 상대를 잃은 사람이 홀로 두 사람 분의 대화를 이어가는 듯한 고독. 부재하는 베이스의 자리를 피아노의 왼손이 더듬듯 채우려는 몸짓.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973년, 에반스는 12년을 함께한 연인 엘레인 슐츠에게 이별을 고했다. 새로운 사랑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엘레인은 그 소식을 들은 뒤 지하철에 몸을 던졌다. 에반스에게 처음 피아노를 가르쳐주고, 평생 가장 깊은 이해자였던 형 해리 에반스는 음악 교육자로 루이지애나에서 살고 있었다. 1979년, 해리가 조현병 끝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에반스는 이미 오래전부터 헤로인에 의지하고 있었지만, 라파로, 엘레인, 형까지 세 사람의 상실이 겹쳐갈수록 그의 자기 파괴는 걷잡을 수 없이 가속했다. 이듬해인 1980년, 에반스는 쉰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간경변, 기관지폐렴, 그리고 치료되지 않은 궤양이었지만 실질적인 원인은 삶을 향한 의지의 소진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시간의 순서를 바로잡아야 한다. 이 세 번의 죽음은 모두 “Blue in Green”이 녹음된 1959년 이후에 일어났다. 에반스가 뉴욕 30번가 스튜디오에서 이 곡을 처음 연주했을 때, 라파로는 살아 있었고, 엘레인은 이제 막 그의 삶에 들어오려 하고 있었고, 형 해리는 루이지애나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있었다. 서른 살의 에반스는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일들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이 곡에는 이미 앞으로 올 슬픔을 예감하는 듯한 무언가가 있다. 아직 아무도 떠나지 않았는데 이미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듯한 선율.
에반스는 이 곡을 평생 놓지 않았다. 그 흔적은 녹음으로 남아 있다. 1959년 말, 라파로, 모션과 함께 녹음한 트리오 버전 《Portrait in Jazz》에서는 라파로의 베이스가 피아노와 속삭이듯 대화하며 곡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이것이 라파로가 살아 있을 때의 “Blue in Green”이다.
Bill Evans Trio, “Blue in Green”, Portrait in Jazz (Riverside, 1960).
https://youtu.be/HxEbT_opgQM?list=RDHxEbT_opgQM

Bill Evans Trio, Blue in Green: The Concert in Canada (Milestone, 1974 녹음).
https://youtu.be/DjpcX724J0g
1974년 캐나다 라이브에서 고메즈, 모렐과 함께 연주한 버전을 들으면 같은 곡인데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라파로가 죽고 13년 후, 엘레인이 떠나고 1년이 지난 시점이다. 음과 음 사이의 침묵이 더 길어졌고, 그 침묵이 품고 있는 것의 무게가 다르다.
Bill Evans & Toots Thielemans, “Blue and Green”, Affinity (Warner Bros., 1978).
https://youtu.be/u042XIyb7Mk?list=RDu042XIyb7Mk
1978년 투츠 틸레만스의 하모니카와 함께한 듀오 버전은 또 다른 결이다. 형 해리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에반스의 피아노는 누군가에게 기대어 울고 싶은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같은 악보, 같은 코드, 같은 멜로디. 그러나 같은 곡일 수 없었다. 상실이 한 겹씩 쌓일 때마다 음과 음 사이의 침묵이 품는 의미가 달라졌다. 1959년의 “Blue in Green”에서 그 침묵은 아름다운 여백이었지만, 1978년의 침묵에는 세 사람의 빈자리가 배어 있었다.
4. 베르그송이 발견한 두 개의 시계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 하나를 던지게 된다. 시간은 정말로 우리가 믿고 있는 시계의 눈금대로만 정직하게 흐르는 것일까.
우리는 모두 일상 속에서 시간의 배신을 경험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나누는 오후의 대화는 찰나처럼 지나간다. 시계는 분명 세 시간이 흘렀음을 가리키지만, 우리의 심장은 고작 삼십 분이 지났을 뿐이라고 우긴다. 반대로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순간의1분은 영겁의 세월처럼 우리를 짓누른다. 시계 바늘은 일정한 속도로 원형 궤적을 그리지만, 인간이 경험하는 시간은 매 순간 부풀어 오르거나 쪼그라든다. 어째서일까.
약 130년 전,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바로 이 괴리에 천착했다. 그는 인간이 대면하는 시간에 두 종류가 있다고 갈파했다. 하나는 우리가 손목 위에 차고 있는 ‘시계의 시간’이다. 이 시간은 균질하고, 반복적이며, 만인에게 평등하다. 1분은 60초이고, 1시간은 60분이다. 토요일이든 월요일이든, 사랑에 빠져 있든 실연의 한복판에 있든 시계는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 그것은 과학과 수학이 지배하는 냉정한 시간이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내는’ 또 다른 시간이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의식이 직접 경험하고 느끼는 내면의 흐름이다. 그는 이것을 “지속”이라고 불렀다. 프랑스어로 “뒤레(Durée)”라고 하는데, 쉽게 말하면 ‘내가 실제로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시간의 흐름’이다.
이 “지속”의 시간 안에서는 기묘한 일들이 벌어진다. 행복한 시간은 짧아지고, 고통스러운 시간은 늘어나는 것은 그중 가장 일상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더 흥미로운 것은 지속의 시간 안에서 과거와 현재가 섞인다는 점이다. 오래된 노래를 들었을 때 갑자기 중학교 교실의 나무 바닥 냄새가 스치는 경험. 어떤 골목을 지나다가 까맣게 잊고 있던 할머니 집의 대문이 떠오르는 경험. 이런 순간, 시간은 시계가 말하는 것처럼 앞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과거가 현재 속으로 걸러지지 않은 채 밀려 들어온다.
베르그송은 이렇게 설명했다. 시계의 시간은 공간처럼 잘게 쪼갤 수 있다. 자를 대고 선분을 나누듯 1초 1초를 분리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로 살아가는 시간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강물과 같아서, 한순간을 떼어내려 하면 이미 다음 순간과 뒤섞여 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깔끔하게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시간의 흐름 자체가 하나의 연속된 덩어리라고.
이 말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냥 “Blue in Green”을 한 번 틀어보면 된다. 에반스의 피아노를 듣는 5분 27초 동안 당신의 의식에서 벌어지는 일이 곧 베르그송이 평생 설명하려 했던 “지속”이다. 이 곡은 시계의 규칙을 무시한다. 박자는 있지만 맥박처럼 불규칙하게 느껴지고, 멜로디는 있지만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방향이 없다. 듣는 사람은 이 곡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도 불안하지 않다. 오히려 어디로도 도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편안하다. 시계가 멈춘 것은 아닌데, 시계가 더 이상 필요 없어지는 시간. 그것이 에반스가 5분 27초 안에 박제해 낸 영원성이다.
베르그송은 음악을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는 최고의 도구로 꼽았다. 우리가 “도-레-미”라는 세 음을 들을 때, 마지막 “미”를 듣는 순간 우리의 의식 속에는 이미 사라진 “도”와 “레”가 유령처럼 머물러 있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음 속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이전의 음이 없으면 지금의 음은 멜로디가 아니라 고립된 소리일 뿐이다. “Blue in Green”에서 에반스가 타건하는 모든 음에는 직전에 쳤던 음의 잔향이 짙게 배어 있다. 그래서 이 곡은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동시에 뒤쪽을 향해 애틋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이것이야말로 베르그송이 말한 지속의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증명이다. 같은 곡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른 의미를 축적해 간다는 것. 과거의 상실이 현재의 음표 속에 스며들어 함께 울린다는 것. 에반스의 피아노는 그렇게 해가 갈수록 더 많은 유령을 품게 되었고, 그래서 해가 갈수록 더 아름다워졌다.
5. 황석영의 정원, 부재하는 것들의 현존
황석영의 소설 《오래된 정원》은 이 ‘지속’의 미학을 가장 처절하게 증명하는 문학적 보고다. 18년간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세상 밖으로 나온 주인공 오현우에게 지난 세월은 그저 텅 빈 공백이 아니었다. 감옥 벽에 그어진 무수한 눈금들은 시계의 시간이었을지 모르나, 그의 내면을 지탱한 것은 윤희와 함께 보냈던 갈매 마을의 사계절이었다. 그 짧았던 몇 개월의 기억은 18년이라는 거대한 물리적 시간을 압도하며 현우의 의식 속에서 박동하고 있었다.
현우에게 정원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의 고통을 무화시키는 거대한 ‘지속’의 영토였다. 그는 윤희가 남긴 편지와 그림들을 통해 그녀의 시간을 현재로 불러낸다. 소설의 마지막, 현우가 다시 찾아간 텅 빈 정원에서 윤희의 환영을 만나는 장면은 시간이 단순히 앞을 향해 달려가는 화살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둥글게 몸을 섞는 원형의 장소임을 말해준다. 18년이라는 격리는 시계의 시간으로는 거대한 단절이지만, 베르그송의 지속 안에서는 단 한 순간도 끊어지지 않은 연속된 사랑의 과정이었던 셈이다.
에반스와 오현우 사이에는 이상할 정도의 구조적 유사성이 있다. 에반스는 같은 곡을 연주하면서 상실을 하나씩 그 안에 축적해 갔다. 라파로가 떠난 뒤의 “Blue in Green”, 엘레인이 떠난 뒤의 “Blue in Green”, 형이 떠난 뒤의 “Blue in Green”은 각각 다른 부재를 품은 다른 곡이었다. 오현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감옥이라는 정지된 시간 속에서 윤희의 편지를 반복해서 읽었다. 같은 편지, 같은 문장. 그러나 읽을 때마다 그 문장이 품는 의미는 달라졌을 것이다. 1년째 읽는 편지와 18년째 읽는 편지가 같을 수 없듯이. 둘 다 부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사라진 것을 되돌리려 하지 않는다. 다만 같은 것을 반복하면서 그 안에 시간을 쌓아갈 뿐이다. 그리고 그 축적된 시간이 음악을, 문장을, 점점 더 깊게 만든다.
6. 정원과 사진관, 시간을 정지시키는 마술
이 시간의 미학을 스크린 위에 구현한 이가 허진호 감독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주인공 정원은 동네 사진관을 운영하며 자신의 죽음을 조용히 준비하는 서른다섯 살의 남자다. 그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지만, 신파적인 통곡이나 운명에 대한 저항을 보여주지 않는다. 사진을 찍고, 현상하고, 밥을 먹고, 아버지와 저녁을 함께 보내고, 주차 단속원인 다림이라는 여자를 조용히 좋아한다. 그게 전부다.
영화 속 시간은 기묘할 정도로 느리고 묵직하다. 정원이 사진관 앞 벤치에 앉아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는 찰나의 침묵은 시계로 재면 몇 초에 불과하지만, 관객의 가슴에는 수십 분의 무게로 내려앉는다. 이것이 바로 베르그송의 지속이다. 죽음을 앞둔 이에게 시간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가 된다. 정원의 하루하루는 시계의 눈금과는 전혀 다른 무게를 지닌다.
정원이 시간을 다루는 방식은 에반스가 “Blue in Green”에서 시간을 다루는 방식과 겹쳐진다. 이 곡도 어딘가로 서두르지 않는다. 도착해야 할 곳이 없다. 정원도 에반스도 시간과 싸우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게 내버려 두되, 그 흐름 속에서 매 순간을 더 깊이 살 뿐이다. 그리고 둘 다 부재하는 것들과 함께 살아간다. 정원은 곧 사라질 자기 자신의 부재를 미리 연습하듯 하루를 보내고, 에반스는 이미 사라진 사람들의 자리를 음표 사이의 침묵으로 보존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가. 정원은 사진관을 깨끗이 정리한 뒤, 간판의 불을 끈다. ‘초원사진관’이라는 네 글자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 순간, 스크린 위에서 일어나는 일은“Blue in Green”의 마지막 음이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것과 정확히 같다. 꺼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되는 것. 끝나는 것이 아니라 들리지 않게 되는 것. 정원은 사라지지만, 그가 사진관 안에 남긴 시간들, 사진으로 박제된 동네 사람들의 웃음, 다림의 여권 사진, 아버지와 함께 찍은 마지막 가족사진은 그 어둠 속에서도 소멸하지 않는다.
7. 군산, 평탄한 길목 위에 겹쳐진 시간
그런 밀도 높은 시간이 물리적 공간으로 치환되어 머무는 곳이 전북 군산의 원도심 한복판에 있다.
그러나 초원사진관을 말하기 전에 먼저 군산이라는 도시에 대해 말해야 한다. 군산은 시간이 선형으로 흐르지 않는 도시다. 1930년대에 지어진 일본식 은행 건물 바로 옆에 2020년대의 카페가 들어서 있고, 일제강점기의 세관 건물과 해방 후의 사찰과 1990년대의 사진관이 가까운 거리 안에 공존한다. 이 도시에서는 백 년의 시간이 지층처럼 쌓여 있되, 어느 하나도 완전히 묻히지 않았다. 걷다 보면 시간의 지층을 오르내리는 감각이 온다. 발밑의 도로는 2026년의 아스팔트인데, 눈앞의 건물은 1920년대의 석조이고, 귀에 들리는 빵집의 이름은1945년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군산은 도시 전체가 베르그송의 ‘지속’을 물리적으로 구현한 공간이다. 과거가 과거로 가라앉지 않고 현재의 표면 위에 함께 떠 있는 곳이다.
이 책이 군산이라는 도시와 함께 시작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재즈가 즉흥이고 대화이고 시간의 예술이듯, 군산은 시간들이 즉흥적으로 겹쳐지고 대화하는 도시다. 앞으로 이어질 서른다섯 곡의 풍경은 모두 이 도시 어딘가에 닻을 내리게 될 것이다.
초원사진관은 월명공원으로 향하는 가파른 언덕이 시작되기 전, 대부분의 관광객이 찾는 ‘한일옥’의 바로 맞은편에 있다. 구영2길이라 불리는 이 평탄한 길목 위에 사진관은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다. 낡은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면, 한석규의 젊은 시절 미소가 벽면 가득 걸려 있고, 오래된 카메라가 삼각대 위에 서 있으며, 먼지들이 오후의 비스듬한 햇살 속에서 느릿하게 유영한다.
사진관이라는 공간은 본질적으로 시간을 정지시키는 장치다. 셔터가 끊기는 그 짧은 찰나, 사방으로 흩어지던 시간은 인화지라는 좁은 감옥 속에 갇혀 영생을 얻는다. 초원사진관 벽에 걸린 스틸컷들은 모두 1997년의 어느 여름날에 멈춰 있다. 한석규가 심은하를 바라보는 눈. 여름 햇살이 유리창에 부서지는 순간. 빈 의자 위에 놓인 사진 한 장. 그 여름은 이 사진관 안에서만큼은 영원히 지속된다.
나는 이곳에 갈 때마다 이어폰을 끼고 에반스를 소환한다. “Blue in Green” 이 흐르는 순간, 문밖의 현실적인 소음들은 소거되고 이상한 합류가 일어난다. 에반스가 이 곡을 녹음한1959년 뉴욕의 30번가 스튜디오. 라파로가 아직 살아 있던 시절의 빌리지 뱅가드. 허진호가 이 사진관을 찍던 1997년 군산의 여름. 황석영의 오현우가 윤희의 편지를 읽던 80년대 소설 속 감옥의 시간. 그리고 지금 이 안에 서 있는 나. 시간들이 하나의 공기 속에 용해되어 함께 숨을 쉰다. 과거가 과거라는 무덤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현재라는 혈관 속을 함께 흐르며 살아 있는 것. 그것이 군산의 평탄한 길목 위에서 우리가 만나는 ‘지속’이다.
8. 보이지 않는 뒷모습, 영원한 잔향
“Blue in Green”의 마지막 음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방식은 언제 들어도 경이롭다. 에반스의 타건이 점점 희미해지다가 마침내 들리지 않게 되는 그 순간, 음악은 끝난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의 청력을 벗어나 저 먼 곳으로 걸어 들어간 것 같다. 사랑하는 이의 뒷모습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도 그 존재를 의심하지 않듯이, 이 곡의 잔향은 음악이 멈춘 뒤에도 오랫동안 귓가를 맴돈다.
초원사진관의 유리문을 밀고 밖으로 나올 때도 비슷한 상실감과 충만함이 동시에 찾아온다. 한일옥 앞의 북적이는 인파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갈 때, 방금까지 내가 머물렀던 그 깊은'지속'의 시간은 이미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스며든 것이다.
마일스가 에반스에게 건넨 두 개의 코드. 그 사이의 경계는 이미 녹아 없어진 지 오래다. Blue와 Green 사이의 경계도, 1959년과 오늘 사이의 장벽도, 에반스가 평생에 걸쳐 곡 속에 쌓아 넣은 부재들과 지금 이 순간 울리는 음표 사이의 거리도, 소설 속 가상의 정원과 현실의 사진관 사이의 간격도, 모두 한 곡의 재즈 선율 속에서 희미하게 번져간다.
거의 푸른, 그러나 완전히 푸르지는 않은 그 눈부시게 모호한 색채 속에서.
초원사진관의 유리문에는 오후의 빛이 비스듬히 기대어 있다. 그 빛은 문을 열어도, 닫아도, 같은 각도로 가만히 기대어 있다.
♫ 듣기—
Bill Evans & Miles Davis, “Blue in Green”, Kind of Blue (Columbia, 1959).
Bill Evans Trio, “Blue in Green”, Portrait in Jazz (Riverside, 1960).
Bill Evans Trio, Blue in Green: The Concert in Canada (Milestone, 1974 녹음).
Bill Evans & Toots Thielemans, “Blue and Green”, Affinity (Warner Bros., 1978).
⌖ 걷기— 초원사진관| 전북 군산시 구영2길12-1 | 월명공원 방면| 평일 오후를 권한다.
▷ 읽기— 베르그송,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 황석영, «오래된 정원»
□ 보기— 허진호, «8월의 크리스마스»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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