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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4.The Köln Concert Keith Jarrett, 은파호수공원, 군산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6. 2. 22.

 

 

 

 

재즈, 사유의 즉흥 연주 – 군산을 걷다

한 곡의 재즈, 한 명의 철학자, 한 권의 문학, 한 편의 영화, 군산의 한 장소를 다섯 겹의 렌즈로 하나의 주제를 즉흥 연주한다. 재즈 에세이이자 군산 산책기이자 철학 입문서로써 35개의 장은 재즈 클럽의 다섯 세트(Set)로 구성되며, 시간과 기억에서 출발해 경계와 융합으로 나아간다. 모든 장소는 군산이다.


4.
The Köln Concert
Keith Jarrett
The Köln Concert (ECM, 1975)

은파호수공원, 군산

1. 부서진 피아노 앞에 선 남자
쾰른 콘서트의 첫 음을 들으면, 피아노가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떨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A 단조 위에서 왼손이 낮은 음역을 두드리기 시작할 때, 그 소리는 풍성하지 않다. 얇고, 마른, 약간 금속적인 울림이다. 그런데 그 얇은 소리 위로 오른손의 선율이 올라타는 순간, 무언가 기이한 일이 일어난다. 완벽하지 않은 소리가 완벽한 소리보다 더 깊이 스며드는 것이다. 피아노의 결함이 음악의 결이 된다. 이 앨범을 처음 듣는 사람은 대부분 Part I의 첫 5분 안에 멈출 수 없게 된다. 무엇이 이 소리를 만들었는지 알기 전에, 소리 자체가 먼저 몸 안에 들어온다.

 
 
 
 
 

이 음악이 태어난 도시 쾰른에는 대성당이 있다. 1248년에 짓기 시작해서 1880년에 완공된 고딕 양식의 성당. 632년이 걸렸다. 그런데 실제로 공사가 진행된 기간은 350년이고, 나머지 282년은 공사가 중단된 채 방치된 시간이다. 1560년에 공사가 멈춘 뒤, 탑 꼭대기에 세워져 있던 중세의 거중기가 그대로 남았다. 그 크레인은 300년 넘게 쾰른의 하늘에 서 있었다. 미완성 상태의 성당과 녹슨 크레인이 도시의 풍경이 되었고, 시민들은 그것을 일상으로 받아들였다. 성당이 완성되면 세상이 멸망한다는 속설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2차 대전 때 쾰른은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지만, 성당은 직격탄 14발을 맞고도 무너지지 않았다. 잿더미 위에 홀로 서 있는 성당의 사진이 엽서가 되어 팔렸다. 부서진 도시 위의 부서지지 않은 건축물. 혹은, 영원히 미완성인 채로 완성된 건축물이라니!





1975년 1월 24일, 그 성당에서 멀지 않은 쾰른 오페라 하우스에서, 또 하나의 미완성이 완성으로 뒤집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스물아홉 살의 키스 재럿은 오페라 하우스 무대 위에서 피아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피아노는 그가 요청한 악기가 아니었다. 재럿은 뵈젠도르퍼 290 임페리얼 콘서트 그랜드를 지정했다. 무대 위에 놓인 것은 리허설 용 베이비 그랜드였다. 높은 음역은 얇고 날카로웠고, 낮은 음역은 울림이 없었으며, 서스테인 페달은 고장 나 있었다. 피아노의 반쪽이 죽어 있었다. 재럿은 공연을 거부했다.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를 설득한 것은 열여덟 살의 콘서트 프로모터 베라 브란데스였다. 천사백 명의 관객이 이미 좌석을 채우고 있었다. 브란데스는 비를 맞으며 주차장까지 걸어가는 재럿을 쫓아갔다. 재럿은 취리히에서 쾰른까지 500킬로미터를 운전해 왔고, 며칠째 등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잠을 자지 못했다. 모든 조건이 불가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브란데스의 간청 앞에서 재럿은 말했다. “잊지 마세요. 오직 당신만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는 무대로 돌아갔다.

그가 첫 음을 치는 순간, 브란데스는 무대 뒤에서 숨을 멈췄다.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첫 음만으로 알 수 있었다.” 재럿은 67분 동안 완전한 즉흥연주를 했다. 악보는 없었다. 리허설도 없었다. 부서진 피아노 위에서 그는 높은 음역과 낮은 음역을 피하고 중간 음역에 집중했다. 왼손으로 반복적인 오스티나토(음악에서 어떤 일정한 패턴인 리듬, 선율, 화성 등이 같은 성부에서 전체 혹은 일부분에 걸쳐 계속해서 반복되는 기법) 패턴을 깔아 울림 없는 저음을 보강했다. 제한이 창조를 낳았다. ECM의 프로듀서 만프레트 아이허는 이렇게 회상했다. “좋은 피아노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소리를 사랑할 수 없었고,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이 녹음은 그해 더블 앨범으로 발매되었고, 400만 장이 팔렸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솔로 재즈 앨범이자 피아노 앨범이 되었다.

2. 던져진 존재, 혹은 피투성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의 조건을 한 단어로 압축했다. 피투성(被投性, Geworfenheit). 던져짐이다. 우리는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부모를 선택하지 않았고, 시대를 고르지 않았으며, 몸과 언어를 주문하지 않았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 세계 속으로 내던져진 존재다. 돌이 언덕에서 굴러가듯, 씨앗이 바람에 날려가듯, 우리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채로 여기에 있다. 하이데거에게 실존은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던져짐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청탁 없이 이 세계로 내던져진, 유한한,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어두운 극 사이에 처박혀진, 해명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진 존재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던져진 존재는 자신이 던져졌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돌은 자신이 굴러간다는 사실을 모른다. 씨앗은 자신이 날려간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선택 없이 이곳에 놓여졌다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이데거는 이 자각에서 불안이 태어난다고 했다. 특정한 대상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불안이다. 그리고 바로 그 불안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새롭게 기투(企投)한다. 던져진 자리에서 스스로 뛰어오르는 것이다. 피투에서 기투로,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한 본래적 실존이다.



1975년 1월 24일의 키스 재럿은 정확히 이 구조 위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피투성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어디에서 던져져 나왔는지를 알아야 한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 재즈의 황제 마일스 데이비스의 밴드를 거친 세 명의 피아니스트가 있었다. 허비 행콕, 칙 코리아, 그리고 키스 재럿. 셋 다 마일스에게서 일렉트릭 피아노와 로즈 피아노를 배웠고, 셋 다 마일스의 전기적 혁명, 《Bitches Brew》의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했다. 그런데 마일스를 떠난 뒤, 셋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던져졌다. 행콕은 전자악기를 껴안았다. 신시사이저와 펑크 리듬을 결합한 《Head Hunters》(1973)를 발표했고, 슬라이 스톤의 그루브를 재즈 안으로 끌어들였다. 당시까지 가장 많이 팔린 재즈 앨범이 되었다. 코리아는 라틴 퓨전으로 나아갔다. 일렉트릭 밴드 리턴 투 포에버를 결성하고 “Spain”을 작곡했다. 화려한 기교와 락적 에너지, 전자 건반의 가능성을 한껏 펼쳤다.

재럿은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전자악기를 거부했다. “장난감”이라고 불렀다. 마일스 밴드에서 일렉트릭 피아노를 연주하던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나의 뇌는 계속 ‘괜찮아’라고 말하고 있었다. 괜찮지 않았는데.” 그는 마일스에 대한 존경 때문에 견뎠을 뿐이었다. 독립한 뒤 재럿은 어쿠스틱 피아노만으로 완전한 즉흥 솔로 콘서트라는, 당시로서는 전례 없는 형식을 개척했다. 악보 없이, 밴드 없이, 전자 장비 없이, 피아니스트 한 명과 피아노 한 대만으로 한두 시간을 채우는 공연이다. 행콕과 코리아가 전자적 확장을 통해 새로운 청중을 만났다면, 재럿은 축소를 통해 새로운 깊이를 찾았다. 하이데거의 언어로 말하면, 행콕과 코리아는 시대의 흐름 안에서 자신을 기투했고, 재럿은 시대의 흐름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을 기투했다. 어느 쪽이 옳은 것이 아니다. 다만 재럿의 선택이 그를 1975년 1월 24일의 그 무대 위로 데려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어쿠스틱 피아노 하나에 모든 것을 건 사람에게, 그 피아노가 부서져 있었다는 것, 이것이 재럿의 피투성이 다른 누구의 것보다 극적인 이유다.

그는 부서진 피아노 앞에 던져졌다. 자신이 선택한 상황이 아니었다. 요청한 악기도 아니었고, 원한 컨디션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거부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재럿은 그 던져진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부서진 피아노의 한계를 자각하고, 그 한계 안에서 연주 가능한 것을 찾아냈다. 중간 음역의 따뜻함에 집중하고, 왼손의 반복적인 리듬으로 부족한 저음을 벌충했다. 그것은 예정된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던져진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기투한 아름다움이었다. 쾰른 콘서트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사람들을 울리는 이유는 그 연주가 완벽해서가 아니다. 불완전한 조건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의 최대치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철학 전체가 67분의 피아노 속에 응축되어 있다.

3. 데미안, 껍질을 깨는 자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던져진 존재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열 살의 에밀 싱클레어는 밝은 세계의 아이였다. 기도하는 부모, 깨끗한 식탁보, 예배 후의 고요한 일요일의 배경 속 아이였다. 그런데 동네 소년 프란츠 크로머가 그 세계에 균열을 낸다. 크로머는 싱클레어에게 사과를 훔쳤다는 거짓 고백을 유도하고, 그 약점을 쥔 채 끈질기게 협박한다. 심부름을 시키고, 돈을 뜯고, 창문 아래에서 휘파람을 불어 공포를 심는다. 싱클레어는 밤마다 구역질을 하며 잠을 설친다. 밝은 세계의 안전은 이미 부서졌고, 그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어두운 세계 속에 던져져 있었다. 피투성의 가장 유년적인 형태이다.

 



이 함정에서 싱클레어를 꺼내는 것이 막스 데미안이다. 데미안은 크로머를 한 번의 눈빛으로 물러서게 한 뒤, 싱클레어에게 세계를 뒤집어 읽는 법을 가르친다. 성경의 카인은 저주받은 자가 아니라 두려움 없이 자기 길을 간 자이며, 그의 표식은 낙인이 아니라 각성의 표지라고. 그리고 소설의 가장 유명한 문장이 온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하이데거의 언어로 번역하면 정확히 피투에서 기투로의 전환이다. 알 속에 있는 것은 피투,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 좁은 세계 안에 놓여 있는 상태이고,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은 기투,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향해 스스로 도약하는 행위이다.

소설의 후반에서 싱클레어는 아브락사스를 만난다. 선과 악, 빛과 어둠을 동시에 품은 신. 그러나 그 만남 이전에 싱클레어가 거치는 중요한 경유지가 하나 있다. 교회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다. 피스토리우스는 교회의 어둠 속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며 싱클레어에게 아브락사스의 존재를 처음 알려준다. 흥미로운 것은 피스토리우스가 음악을 통해 가르친다는 점이다. 말이 아니라 소리로. 교회의 높은 천장 아래서 울리는 오르간의 진동이 싱클레어의 몸을 통과할 때,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의 경계는 물리적으로 녹아내린다. 재럿의 즉흥연주가 관객의 의식을 바꾸는 방식과 닮았다. 둘 다 언어가 아니라 소리의 진동으로 세계의 경계를 허문다.
싱클레어는 결국 에바 부인을 만난다. 데미안의 어머니이자 아브락사스의 현신과도 같은 여인이다. 에바 부인의 얼굴에서 싱클레어는 남성과 여성, 어머니와 연인, 성스러움과 관능이 분리되지 않은 채 공존하는 것을 본다.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가르던 마지막 벽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헤세가 그리는 성장은 어둠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알의 안쪽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껍질이 깨지고 나서야 비로소 시야에 들어온다.

재럿이 쾰른에서 한 일도 같은 구조다. 그에게 익숙한 ‘알“은 완벽한 뵈젠도르퍼 임페리얼이었다. 기교를 펼칠 수 있는 넓은 음역, 풍성한 저음, 반응하는 페달인 그 알이 깨졌다. 부서진 피아노는 재럿에게 낯선 세계였고, 그는 그 안에서 이전에는 시도하지 않았던 연주 방식을 발견해야 했다. 중간 음역의 멜로디에 집중하는 것, 왼손의 오스티나토로 리듬적 기반을 만드는 것, 소리의 크기 대신 소리의 밀도로 공간을 채우는 것, 이 모든 것은 껍질이 깨지지 않았다면 태어나지 못했을 음악이다. 재럿 자신도 나중에 인정했다. “그 피아노 때문에 나는 당시로서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연주할 수밖에 없었다.” 피스토리우스의 오르간이 싱클레어에게 아브락사스를 열어주었듯, 부서진 피아노가 재럿에게 새로운 음악을 열어주었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가르친 것, 부서진 세계 안에서만 발견되는 더 넓은 자기 자신을!

4. 봄날은 간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다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에서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는 소리를 채집하는 사람이다. 바람 소리, 물 소리, 풀벌레 소리—사라지는 것들을 녹음기에 담는 것이 그의 직업이다. 강릉 방송국 라디오PD인 은수와 자연의 소리를 녹음하러 다니면서 사랑에 빠지지만, 이 사랑은 처음부터 봄처럼 지나갈 운명을 품고 있다. 겨울에 만나고, 봄을 함께 보내고, 여름이 오면서 어긋나기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잔인한 순간은 격렬한 싸움이 아니라 고요한 문장 하나다. 상우가 묻는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은수는 단호하게 답한다. “헤어져.” 같은 계절을 함께 보냈지만 두 사람의 시간은 같은 속도로 흐르지 않았다. 상우는 미련과 집착 사이를 오가며 서울과 강릉을 반복해서 왕복한다. 그리고 마지막 벚꽃길. 은수와 상우는 악수를 한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악수,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다른 무게를 가진 악수. 은수가 돌아서서 걸어간다. 허진호 감독은 상우가 돌아보지 않기를 원했다. 성장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그러나 유지태는 반대했다. “상우는 돌아볼 수밖에 없다. 스물여섯 살의 남자에게 첫사랑은 돌아볼 수밖에 없는 존재다.” 결국 상우는 돌아본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상우는 홀로 갈대밭에서 녹음기를 들고 서 있다. 바람이 갈대를 흔들고, 그 소리가 녹음기에 담긴다. 은수 없이, 다시 소리를 채집하는 남자. 봄은 갔지만 소리를 듣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이 영화가 하이데거적인 것은 상우가 소리를 다루는 방식 때문이다. 상우는 소리를 녹음하지만 소리를 소유하지 못한다. 바람을 녹음해도 바람은 이미 지나갔고, 물소리를 담아도 물은 이미 흘러갔다. 녹음기에 남은 것은 소리의 흔적이지 소리 자체가 아니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 근본적 유한성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머무르지 않는 것 안에 던져져 있다. 봄은 오지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이 봄의 본질이다.

재럿의 쾰른 콘서트가 이 영화와 공명하는 지점은 바로 이 비가역성이다. 67분의 즉흥연주는 두 번 다시 반복될 수 없었다. 그 음악은 1975년 1월 24일 밤이라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만 가능했던 일회적 사건이었다. 부서진 피아노, 등 통증, 수면 부족, 열여덟 살 프로모터의 간청이 모든 우연적 조건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단 한 번의 음악. 그것이 지나갔다. 녹음이 남아 있지만, 그 밤의 공기는 이미 사라졌다. 상우의 녹음기처럼, 음반은 흔적을 담고 있을 뿐 그 밤 자체를 담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상우가 갈대밭에서 다시 녹음기를 드는 것처럼, 재럿도 쾰른 이후 수십 년간 솔로 콘서트를 계속했다. 같은 밤은 돌아오지 않지만, 소리를 듣는 일은 멈출 수 없다.

5. 은파호수공원, 낮의 풍경
군산의 은파호수공원은 원래 농업용 저수지였다. 정확히 말하면 일제강점기에 간척사업과 농업 관개를 위해 만들어진 인공 호수다. 해방 이후에도 농업용 저수지로 쓰이다가 1985년에 국민관광지로 지정되면서 공원이 되었다. 둘레 약 4.4킬로미터의 산책로가 물가를 따라 놓여 있고, 물 위에는 음악분수가 설치되어 있다. (현재는 걷어낸 상태이지만)



낮에 가면 평범한 도심 공원이다. 군산 시민들이 조깅하고,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오리배가 느릿하게 떠다닌다. 호수를 한 바퀴 도는 데 걸어서 한 시간 남짓. 경사가 거의 없어서 노인들도 무리 없이 걸을 수 있고, 호수 중간에 놓인 다리 위에서 물을 내려다보면 잉어가 천천히 유영하는 것이 보인다. 봄에는 호수 둘레에 벚꽃이 핀다. 바람이 불면 꽃잎이 수면 위에 떨어져 분홍색 점들이 물 위를 느릿하게 흘러간다. 여름에는 버드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를 깐 가족들이 수박을 먹고, 가을에는 호수 건너편 산이 붉게 물들어 수면 위에 두 개의 단풍이 겹친다. 겨울에는 바람이 호수 위를 가로지르며 산책로의 사람들을 줄여놓는다. 군산의 원도심이 일제강점기와 근대의 흔적으로 가득한 곳이라면, 은파호수 일대는1980~90년대 이후의 군산이다. 아파트 단지와 상업시설이 호수를 둘러싸고 있고, 월명산이나 해망동의 묵직한 시간의 무게와는 다른, 일상적이고 평범한 공기가 흐른다. 이 평범함이 중요하다. 쾰른 콘서트의 기적이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특별한 밤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잘못된 평범한 밤,부서진 피아노, 피곤한 연주자, 추운 겨울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은파호수의 낮도 마찬가지다. 이곳은 특별하지 않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이 장소를 특별하게 만든다.

은파호수공원이 이 장의 장소인 이유는 이곳이 ‘던져진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 호수는 관광을 위해 설계된 곳이 아니었다. 농업용 저수지로 파졌고, 시대가 바뀌면서 용도가 바뀌었다. 설계되지 않은 아름다움. 의도하지 않은 풍경. 재럿이 부서진 피아노 위에서 의도하지 않은 걸작을 만들어낸 것처럼, 이 호수도 원래의 목적과 무관하게 아름다운 장소가 되었다. 하이데거의 언어로 말하면, 이 호수도 던져졌고, 그 던져진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기투한 것이다.

6. 67분의 지도, 그리고 세 개의 다른 밤
쾰른 콘서트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Part I은 약 26분이다. 재럿은 쾰른 오페라 하우스의 공연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의 멜로디를 인용하며 시작한다. 관객석에서 가벼운 웃음이 새어 나온다. 이 유머가 중요했다. 재럿은 불가능한 상황 안에서 관객과 먼저 공기를 나눈 것이다. 이후A 단조 위에서 약 12분간 펼쳐지는 명상적 즉흥은 이 앨범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부분이다. 왼손의 반복적인 베이스라인 위로 오른손이 펼치는 선율은 클래식과 재즈와 가스펠의 경계를 넘나든다.


https://youtu.be/Pd_Kti6jvy8?list=OLAK5uy_lapldioAF_TED2mynorLZzhTXmhfdcZfI




Part II는 약 34분으로, 원래 LP의 양면에 걸쳐 수록되었다. Part I보다 더 격렬하고, 더 어둡고, 더 육체적이다. 재럿은 일어서서 피아노를 치기도 하고, 신음 소리를 내기도 한다. 그 신음은 연기가 아니라 고통의 표현이었다. 등 통증을 견디며 피아노를 누르는 육체의 소리가 녹음에 남아 있다. 부서진 악기 위에서 부서진 몸이 음악을 만들어내는 장면. 그것이 Part II의 본질이다. 베라 브란데스는 무대 뒤에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객석의 문을 하나씩 열어보며 홀 전체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어느 문을 열어도 같은 마법이었다.” 천사백 명의 관객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https://youtu.be/c77djHcrmVE?list=OLAK5uy_lapldioAF_TED2mynorLZzhTXmhfdcZfI



앙코르인 Part IIc는 약 7분. 재럿이 이전에 작곡해 둔 “Memories of Tomorrow”를 재해석한 것이다. 67분간의 완전한 즉흥 끝에 놓인 이 짧은 곡은, 미래의 기억이라는 역설적인 제목을 달고 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기억한다는 것. 하이데거가 말한 ‘죽음을 향한 존재’의 선구적 각오가 여기에 겹친다. 우리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종착점을 의식하면서 지금을 산다. 재럿의 앙코르는 그 의식의 소리다. 모든 즉흥이 끝난 뒤, 미래를 향한 마지막 떨림이다.


https://youtu.be/6_2cbCrTrIM?list=OLAK5uy_lapldioAF_TED2mynorLZzhTXmhfdcZfI



그런데 쾰른만 들어서는 재럿의 솔로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2년 전인 1973년, 재럿은 브레멘과 로잔에서 솔로 콘서트를 녹음했다. ECM에서 트리플 앨범으로 발매된 《Solo Concerts: Bremen/Lausanne》가 그것이다.


https://youtu.be/3pB6Ahl5H6U?list=RD3pB6Ahl5H6U



이 앨범에서 재럿은 가스펠 그루브에서 인상주의적 무조 음악까지, 포크에서 바흐까지를 거침없이 넘나든다. 완벽한 피아노 위에서 자신의 기교를 마음껏 펼치는 화려한 연주. 쾰른의 억제된 따뜻함과는 정반대의 세계다. 브레멘의 재럿은 모든 음역을 자유롭게 사용했고, 피아노 내부의 현을 뜯거나 프레임을 두드리는 퍼커시브한 실험까지 시도했다. 음악적 야심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제약 없는 즉흥의 축제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쾰른이 특별하다. 브레멘에서 재럿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쾰른에서 재럿은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연주했다. 높은 음역은 날카로워서 쓸 수 없었고, 낮은 음역은 울리지 않았고, 페달은 고장 나 있었다. 그 제한이 브레멘에서는 불가능했던 종류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 중간 음역에 머무르면서 탄생한 따뜻한 선율, 왼손 오스티나토의 최면적 반복, 소리의 크기 대신 밀도로 빚어낸 공간. 브레멘이 기교의 자유라면 쾰른은 제한의 자유다. 하이데거의 피투성이 비관이 아니라 가능성의 조건이듯, 부서진 피아노는 제약이 아니라 아직 발견되지 않은 음악으로 가는 통로였다.

그런데 부서진 피아노는 시작에 불과했다. 재럿의 삶 자체가 반복되는 피투의 연쇄였다. 그는 완벽주의자였다. 솔로 콘서트에서 관객이 기침을 하면 연주를 멈추고 마이크 앞에 서서 말했다. “자, 다 같이 기침합시다.” 청중이 어색하게 웃으며 기침을 하면, 재럿은 다시 피아노로 돌아갔다. 추운 계절에는 공연장 입구에서 관객에게 기침약을 나눠주기도 했다. 사진을 찍는 관객이 있으면 무대 조명을 전부 끄고 어둠 속에서 연주했다. 전자악기를 혐오했다.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에서 일렉트릭 피아노를 연주해야 했을 때, 재럿의 뇌는 계속해서 ‘괜찮아’라고 자기 자신을 설득해야 했다. 괜찮지 않았지만, 마일스와 함께 연주한다는 사실 하나가 그를 견디게 했다. 순수함에 대한 집착, 소리의 완전성에 대한 강박. 그것이 재럿을 위대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그를 가장 까다로운 연주자로 만들었다.

1990년대 후반, 재럿은 만성피로증후군 진단을 받았다.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날들이 수년간 이어졌다. 그는 이 병을 “영원히 죽은 증후군”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 번아웃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기괴한 병을 발명이라고 해도 이것보다 나을 수 없다고 말했다. 콘서트홀은 사라졌고, 관객은 사라졌고, 피아노 앞에 앉을 체력조차 없었다. 그 시기에 집에서 홀로 녹음한 앨범이 《The Melody at Night, with You》(1999)다. 양손으로 간신히 연주한, 속삭이듯 조용한 스탠더드 곡들. 쾰른 콘서트의 폭발적인 에너지와는 정반대의 음악이지만, 부서진 조건 속에서 가능한 것을 찾아낸다는 구조는 동일했다. 부서진 피아노 대신 부서진 몸의 제한 속에서 피어난 또 하나의 아름다움이다.


https://youtu.be/Uhq8FModc8Q?list=RDUhq8FModc8Q



그리고 2018년, 재럿에게 두 차례의 뇌졸중이 찾아왔다. 왼쪽 신체가 마비되었다. 요양시설에서 2년을 보냈다. 지팡이로 겨우 걸을 수 있게 되기까지 1년이 넘게 걸렸다. 2020년, 그는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지금 나는 피아니스트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게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왼손으로 컵을 잡을 수 있게 되는 것이 회복의 최대 목표이고 두 손으로 연주되는 피아노 음악을 들으면 육체적인 좌절감이 밀려온다고 말했다. 쾰른에서 부서진 것은 피아노였다. 이제 부서진 것은 피아니스트 자신이다. 1975년의 재럿은 부서진 피아노 위에서 67분을 연주했다. 2018년 이후의 재럿은 부서진 몸 안에서 피아노 없는 시간을 살고 있다. 던져짐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이데거가 말하지 않은 것, 피투성은 그에게서 반복된다.

7. 은파호수의 밤, 물과 불빛 사이에서
은파호수공원에 가려면 군산역에서 택시로 20분이면 된다. 그러나 나는 내항까지 온 다음에 월명동을 지나 군산대학교 방향을 향해 걸어가기를 권한다. 걷다 보면 도시의 결이 서서히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일제강점기의 건물들이 사라지고 1980년대의 아파트가 나타나고, 다시 2000년대의 상업시설이 보이기 시작한다. 시간의 지층을 걸어서 통과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호수가 나타난다.



해질 무렵에 도착하면 좋다. 낮에 보았던 평범한 도심 공원이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기 때문이다. 빛이 줄고, 물빛이 어두워지고, 도시의 네온이 하나둘 켜지면서 호수 위에 떨리는 색점들이 생겨난다. 음악분수가 가동되는 시간에는 물줄기가 조명을 받으며 하늘로 솟구쳤다가 쏟아진다. 물이 올라갈 때의 긴장과 떨어질 때의 해방. 재럿의 왼손이 오스티나토를 반복할 때의 긴장감과, 오른손이 갑자기 상승 프레이즈를 던질 때의 해방감이 정확히 이 물줄기의 리듬과 겹친다.

이때 이어폰을 끼고 쾰른 콘서트를 재생하면,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Part I의 첫 음이 울리는 순간, 호수 위의 불빛들이 건반 위의 음표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바람이 수면을 건드리면 빛이 흔들리고, 바람이 멈추면 빛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재럿의 피아노가 수면 위를 걷는 것 같다. 벤치에 앉아서 Part I이 끝나고 Part II로 넘어가는 지점을 듣고 있으면, 음악의 질감이 바뀌는 것과 함께 호수의 어둠도 한 층 더 깊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Part II의 격렬함 속에서 재럿이 신음하는 소리가 들릴 때, 호수 건너편에서 아파트의 불빛이 윤슬 위에 아른거린다. 소리와 빛이 같은 리듬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같은 어둠 안에 있다. 1975년 쾰른의 밤과 2026년 군산의 저녁이, 부서진 피아노의 떨림과 호수 위 불빛의 떨림이, 같은 주파수로 진동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실존을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라고 불렀다. 인간은 세계와 분리된 관찰자가 아니라 세계 안에 이미 던져져 있는 존재다. 은파호수 앞에 앉아 있을 때, 우리는 호수를 바라보는 주체가 아니라 호수와 함께 그 저녁 안에 던져져 있는 존재다. 물이 떨리고, 빛이 떨리고, 재럿의 피아노가 떨리고, 그것을 듣고 있는 나의 안쪽 어딘가도 떨린다. 그 떨림이 하나의 시간 속에서 만날 때, 우리는 잠시 하이데거가 말한 ‘본래적 실존’에 가까워진다. 자신이 던져진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면서도, 그 자리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 재럿이 부서진 피아노 위에서 한 것처럼!

8. 부서진 것들의 숭고함
쾰른 콘서트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간단하다. 완벽한 조건은 오지 않는다. 그리고 완벽한 조건이 오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 재럿에게 뵈젠도르퍼 임페리얼이 주어졌다면 브레멘처럼 그는 훌륭한 연주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400만 장이 팔리는 앨범은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부서진 피아노가 그를 낯선 곳으로 던졌고, 그 낯선 곳에서 그는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하이데거의 피투성은 비관의 철학이 아니다. 던져졌다는 것은 선택하지 않았다는 뜻이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데미안의 싱클레어는 크로머의 어둠 속에 던져졌지만 아브락사스의 양면성까지 나아갔다. 상우는 떠나는 봄 앞에 던져졌지만 갈대밭에서 다시 녹음기를 들었다. 은파호수는 농업용 저수지로 던져졌지만 군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경이 되었다. 그리고 재럿은 부서진 피아노 앞에 던져졌지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솔로 피아노 앨범을 만들었다.

키르케고르의 반복은 불가능했고, 영혜의 줄자는 부러졌고, 서래의 사랑은 모래 속에 묻혔다. 베이커는 부러진 날개로 날았다. 그리고 재럿은 부서진 피아노 위에서 날아올랐다. 던져진 존재는 떨린다. 떨림은 불안이다. 그러나 그 떨림이 건반 위를 지날 때, 불안은 음악이 된다. 쾰른의 67분은 그 증거다.

은파호수의 수면 위에서, 빛이 떨리고 있다. 부서진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떨림이, 음악이다.



♫ 듣기— Keith Jarrett, The Köln Concert (ECM, 1975). Part I: 26분. Part II: 34분. 앙 코르: 7분.
                Keith Jarrett, Solo Concerts: Bremen/Lausanne (ECM, 1973). 트리플 LP.
               쾰른 이전의 자유.
                Keith Jarrett, Solo 앨범: The Melody at Night, with You(1999)
⌖ 걷기— 은파호수공원| 전북 군산시 나운동| 해 질 무렵을 권한다.
▷ 읽기—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 헤르만 헤세, «데미안»
□ 보기— 허진호, «봄날은 간다» (2001) | 이도 플룩, «Köln 7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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