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웹소설] 짜라투스트라 교수님의 철학 수업: F학점은 사양한다
14화. 두 갈래 길의 서버: 진리와 의견 사이에서
강의실에 들어서자, 학생들은 기묘한 광경을 목격했다. 칠판이 정확히 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왼쪽 절반은 새하얀 백색, 오른쪽 절반은 온갖 색깔의 낙서와 그림들로 뒤덮여 있었다. 그 경계선 위에는 굵은 검은 선이 그어져 있었고, 그 위에 물음표(?)가 적혀 있었다.
짜교수는 이번엔 특이한 의상을 입고 등장했다. 왼쪽 절반은 흰색 정장, 오른쪽 절반은 알록달록한 티셔츠와 청바지. 마치 두 사람이 반씩 합쳐진 것 같았다. 손에는 두 개의 태블릿을 들고 있었는데, 하나는 빈 화면, 하나는 SNS 피드로 가득했다.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교수님, 오늘 컨셉 뭐예요? 투페이스?”
“아니면 철학적 인격분열?”
짜교수는 두 개의 태블릿을 교탁 위에 나란히 놓으며 말했다.
“오늘은 엘레아학파의 마지막 시간이다. 파르메니데스, 제논, 멜리소스. 세 사람이 우리에게 보여준 건 ‘존재의 길’, 즉 진리의 길이었다. 그런데 파르메니데스의 《자연에 대하여》에는 또 다른 부분이 있다. 바로 ‘의견 편(Doxa)’. 오늘은 이 두 길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는 왜 두 길 사이를 헤매는지를 다룬다.”
칠판의 흰 쪽에 적혔다.
Truth Server (진리의 길)
- 접근 방법: 이성(Logos)
- 내용: 존재(Being)
- 특징: 불변, 영원, 하나
칠판의 색깔 쪽에 적혔다.
Opinion Server (의견의 길)
- 접근 방법: 감각(Aisthesis)
- 내용: 현상(Appearance)
- 특징: 변화, 일시적, 여럿
RM이 손을 들었다.
“교수님, 그럼, 파르메니데스는 두 서버를 다 인정한 겁니까? 지난 시간들에는 진리의 길만 옳다고 한 것 같은데요.”
짜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질문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서사시에서 여신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에게 두 가지를 다 말해주겠다. 첫째, 진리의 길을. 둘째, 가사자(mortal, 죽을 운명인 인간)들의 의견도. 의견에는 참된 확신이 없지만, 너는 그것도 배워야 한다.’ 이게 핵심이다. 여신은 의견의 길을 폐기하지 않는다. 다만 ‘참된 확신이 없다’고 경고할 뿐이다.”
슈가가 끼어들었다.
“그럼 의견의 길도 필요하다는 건가요? 왜요? 거짓인데?”
짜교수는 색깔 쪽 칠판을 가리켰다.
“거짓이 아니라 ‘불완전’하다. 차이가 있다. 의견의 길은 틀린 게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 거다. 예를 들어볼까. 너희가 아침에 해가 뜬다고 말하는 건 틀렸나? 아니다. 경험적으로는 맞다. 그런데 ‘해가 움직인다’는 건 진리인가? 아니다. 실제로는 지구가 도는 거니까. 의견은 현상을 서술한다. 진리는 본질을 서술한다.”
뷔가 거들었다.
“그럼,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모든 말은 의견의 길이네요? ‘배고프다’, ‘춥다’, ‘예쁘다’ 이런 거 다요?”
짜교수가 손가락을 들었다.
“정확하다. 일상 언어는 전부 의견의 세계다. 왜냐하면 감각에 기반하니까.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만약 의견의 길이 전부 폐기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살 수 없다. 진리의 길에서는 배고픔도 없고, 추위도 없고, 아름다움도 없다. 왜냐하면 그런 건 전부 변화하고, 주관적이고, 감각적이니까. 존재의 길에서는 오직 '존재한다'라는 명제만 있다.”
지민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그럼, 진리를 알면 행복할 수 없는 건가요? 진리는 차갑고, 행복은 따뜻한데. 따뜻함은 감각이니까 의견이잖아요.”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짜교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민, 방금 엘레아학파의 가장 큰 딜레마를 짚었다. 진리와 삶의 충돌. 파르메니데스는 이걸 알았다. 그래서 의견 편을 썼다. 여신은 말한다. ‘의견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너는 가사자(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진리의 세계에만 살 수 없다. 우리는 먹고, 자고, 사랑하고, 슬퍼한다. 이 모든 게 의견의 세계다.”
정국이 말했다.
“그럼, 교수님, 우리는 두 서버를 동시에 접속해야 하는 건가요? 진리 서버로 생각하고, 의견 서버로 살고?”
짜교수는 두 개의 태블릿을 들어 올렸다.
“바로 그거다. 정국, 너 지금 2500년 된 문제를 정확히 포착했다. 인간은 두 서버 사이를 오가는 존재다. 순수한 진리의 세계에만 있으면 삶이 불가능하고, 순수한 의견의 세계에만 있으면 진리를 놓친다. 파르메니데스가 두 편을 다 쓴 이유가 이거다.”
RM이 태블릿에 정리하며 물었다.
“그럼, 파르메니데스의 메시지는 이겁니까? ‘진리를 알되, 의견 속에서 살아라. 그러나 의견을 진리로 착각하지는 마라’?”
짜교수는 손뼉을 쳤다.
“완벽하다! RM, 너 지금 파르메니데스 서사시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압축했다. 이게 바로 ‘두 갈래 길’의 의미다. 진리를 아는 것과 삶을 사는 것은 다르다. 그런데 둘 다 필요하다.”
슈가가 노트북을 보며 말했다.
“교수님, 그럼 엘레아학파 전체를 정리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파르메니데스, 제논, 멜리소스가 각각 뭘 한 건지 헷갈려요.”
짜교수는 칠판 중앙에 크게 적었다.
엘레아학파 3인방
파르메니데스: 존재를 선언했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변화는 환영이다.
진리의 길 vs 의견의 길
제논: 운동을 공격했다.
귀류법(카운터 펀치)
아킬레우스와 거북이, 날아가는 화살
“너희가 믿는 운동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멜리소스: 무한을 방패로 삼았다
존재는 무한하다 (유한하면 경계 너머에 비존재)
존재는 물체가 아니다 (두께 없음)
파르메니데스를 확장했다
“이 세 사람이 한 일은 간단하다. 논리만으로 세상을 설명하려 했다. 감각은 거짓말한다. 이성만 믿어라. 존재는 하나고, 불변하고, 영원하다. 이게 엘레아학파의 신념이다.”
뷔가 물었다.
“그럼, 교수님, 이 사람들은 성공한 건가요? 실패한 건가요?”
짜교수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둘 다다. 논리적으로는 완벽했다. 반박하기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 삶과는 충돌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움직이고, 변하고, 사랑했다. 엘레아학파는 ‘논리적으로 옳지만 살 수 없는’ 철학을 만들어냈다. 이게 성공인가, 실패인가? 철학사는 이렇게 판단한다. ‘엘레아학파는 틀렸다. 그러나 그들이 던진 질문들, 존재란 무엇인가, 변화란 무엇인가, 하나와 여럿은 어떻게 양립하는가는 전부 맞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엘레아 이후 모든 철학자들은 이 질문에 답하려 했다.”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학생들은 칠판의 경계선을 바라보았다. 흰색과 색깔 사이. 진리와 의견 사이. 이성과 감각 사이.
짜교수는 칠판의 물음표를 가리켰다.
“오늘의 퀘스트다. 너희 인생에서 ‘진리의 길’과 ‘의견의 길’이 충돌했던 순간을 하나 골라라. 예를 들어, 머리로는 이별해야 한다는 걸 아는데(진리), 마음은 붙잡고 싶은 거(의견). 또는 논리적으로는 이 선택이 맞는데(진리), 감정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거(의견). 그 순간 너는 어느 서버를 선택했는가? 아니면 둘 사이를 헤맸는가? 한쪽만 선택하면 F다. 진짜 답은 ‘둘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았는가’에 있다. 피스!”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지민이 조용히 말했다.
“저는 음악을 할 때요. 머리로는 ‘완벽하게 불러야 한다’는 걸 아는데, 마음은 ‘그냥 느끼고 싶다’고 해요. 진리는 정확성을 요구하고, 의견은 감정을 요구하고. 저는 보통 둘 다 하려다가 둘 다 놓쳐요.”
짜교수가 지민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민, 그게 정상이다. 인간은 원래 둘 사이에서 헤맨다. 완벽한 균형은 없다. 다만 헤매는 방식이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진리만 붙잡다가 삶을 놓치고, 어떤 사람은 의견에만 빠져서 진리를 놓친다. 파르메니데스가 우리에게 준 선물은 ‘둘 다 보라’는 거다.”
뷔가 말했다.
“저는 사진이요. 머리로는 ‘이 구도가 맞다’는 걸 아는데, 마음은 ‘그냥 막 찍고 싶다’고 해요. 기술적 완벽함과 감정적 솔직함. 전 요즘 둘을 섞어요. 완벽한 구도로 찍되, 마지막 순간에 각도를 살짝 틀어버려요. 그러면 뭔가 살아있어요.”
짜교수가 웃었다.
“뷔, 방금 네가 한 게 바로 ‘두 갈래 길을 동시에 걷기’다. 진리를 알되(완벽한 구도), 의견을 살리기(각도 틀기). 이게 바로 인간의 기술이다.”
정국이 말했다.
“형들, 전 운동할 때요. 머리로는 ‘과학적 루틴을 따라야 한다’는 걸 아는데, 몸은 ‘그냥 들고 싶은 거 들고 싶다’고 해요. 전 보통 루틴 70%, 즉흥 30%로 해요. 그러면 다치지도 않고, 재미도 있어요.”
학생들이 웃었다. 슈가가 말했다.
“정국이 근육 = 진리와 의견의 합작품ㅋㅋ”
강의실 불빛이 깜빡였다. 짜교수는 두 개의 태블릿을 들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 앞에서 멈춰 서서, 학생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말했다.
“엘레아학파가 끝난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는 하나다’라고 선언했다. 제논은 ‘운동은 불가능하다’라고 증명했다. 멜리소스는 ‘존재는 무한하다’라고 확장했다. 이들은 논리의 끝까지 갔다. 그런데 세상은 납득하지 않았다.”
칠판에 새로운 문장이 적혔다. 하나로는 세상을 설명할 수 없다
“파르메니데스 이후, 철학자들은 고민했다. ‘존재가 하나라면, 왜 세상에는 여럿이 보이는가? 변화가 불가능하다면, 왜 만물은 생성하고 소멸하는가?’ 엘레아학파의 논리는 완벽했지만, 현실과 괴리됐다. 그래서 등장한 게 ‘다원론자들’이다.”
짜교수는 칠판에 빠르게 적었다.
다원론의 반격
엠페도클레스: 4원소 (불, 물, 공기, 흙) + 사랑과 미움
아낙사고라스: 무한한 종자들 + 누스(정신)
데모크리토스: 원자와 허공
“이들은 말했다. ‘파르메니데스 형님, 존재가 하나라는 건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가 여럿으로 나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존재는 여럿이고, 그 여럿이 결합하고 분리되면서 변화가 생긴다. 이렇게 하면 논리도 지키고, 현실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게 다원론의 전략이다.”
학생들이 집중했다. 짜교수는 계속했다.
“엠페도클레스는 말했다. ‘만물은 네 가지 뿌리(불, 물, 공기, 흙)로 이루어져 있다. 이 네 가지는 생성되지도 소멸되지도 않는다(파르메니데스 인정). 다만 사랑에 의해 결합하고, 미움에 의해 분리될 뿐이다. 변화는 이 결합과 분리다.’ 이건 천재적 타협이다. 존재론은 파르메니데스를 따르되(원소는 불멸), 변화는 설명한다(결합과 분리).”
RM이 정리했다.
“그러니까 다원론자들은 ‘존재는 변하지 않는다’는 건 인정하는데, ‘존재가 하나다’는 건 거부한 거네요? ‘존재는 여럿이다. 그 여럿이 섞이고 흩어지는 게 변화다’라고?”
짜교수가 손가락을 들었다.
“정확하다! RM, 너 지금 다원론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엘레아 vs 다원론의 구도는 이렇다.
엘레아: 존재는 하나 + 변화 불가능
다원론: 존재는 여럿 + 변화 가능 (결합/분리)
다원론자들은 파르메니데스의 절반을 받아들이고, 절반을 뒤집었다.”
슈가가 물었다.
“그럼, 다음 시간에는 이 다원론자들 얘기를 하는 거예요?”
짜교수는 문을 열며 웃었다.
“맞다. 다음 시간은 ‘다원론 서버’다. 엠페도클레스의 사랑과 미움, 아낙사고라스의 무한한 씨앗,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와 텅 빈 공간. 이들은 모두 파르메니데스에게 도전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그래야 세상이 설명된다.’ 준비해라. 다음 시간엔 존재가 쪼개진다.”
칠판에 마지막 문장이 적혔다.
존재 = 1 → 존재 = Many
다원론 서버 부팅 중…
“참고로 데모크리토스는 ‘허공(void, 빈 공간)’의 존재를 주장한다. 이건 파르메니데스에게 정면 선전포고다. 왜냐하면 파르메니데스는 ‘비존재는 없다’라고 했는데, 허공은 바로 그 비존재니까. 데모크리토스는 말한다. ‘아니, 빈 공간은 있다. 그래야 원자가 움직일 수 있다.’ 이게 얼마나 과격한지, 다음 시간에 보자. 피스!”
문이 닫혔다. 칠판의 경계선은 여전히 그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경계선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RM이 중얼거렸다.
“하나에서 여럿으로… 엘레아가 끝나고, 다원론이 시작되는구나.”
슈가가 답했다.
“근데 누가 맞는 거지? 존재는 하나? 여럿?”
지민이 창밖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어쩌면… 둘 다?”
단톡방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다음 회: 다원론의 반격 - 엠페도클레스, 존재를 네 개로 쪼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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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해설: 진리와 의견, 그리고 다원론의 등장
의견 편(Doxa)의 의미
파르메니데스의 《자연에 대하여》가 두 부분으로 나뉜 이유는 오랫동안 논쟁거리였다. 진리 편에서 “존재는 하나, 불변, 영원”이라고 선언한 후, 왜 의견 편에서 감각 세계(빛과 어둠, 뜨거움과 차가움 등)를 다루는가? 일부 학자들은 의견 편을 “틀린 견해의 목록”으로 해석했지만, 여신의 말(“의견도 배워야 한다”)은 이것이 단순한 폐기 대상이 아님을 시사한다. 현대 해석은 이렇게 본다: 의견 편은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는가”에 대한 현상학적 서술이다.
엘레아학파의 역사적 딜레마
엘레아학파의 논리는 거의 반박 불가능했다. 비존재의 불가능성에서 출발해 변화의 불가능성을 연역하는 과정은 논리적으로 완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살 수 없는 철학”이었다. 일상 언어, 감각 경험, 실천적 행위 전부가 의견의 세계에 속했고, 진리의 세계는 순수 이성의 영역이었다. 이 괴리는 철학사에서 반복되는 패턴이다: 논리적 완결성과 실존적 적합성 사이의 긴장.
다원론의 전략적 타협
엘레아 이후 등장한 다원론자들(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데모크리토스)은 파르메니데스의 방법은 받아들이되 결론은 수정했다. 핵심 전략은 이것이다: “존재는 생성되지도 소멸되지도 않는다(파르메니데스 인정). 그러나 존재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이 여럿이 결합하고 분리되는 것이 변화다.” 이것은 천재적 절충안이었다. 존재론적 안정성(불멸의 요소들)과 현상학적 설명력(변화의 메커니즘)을 동시에 확보한 것이다.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와 이원적 동력
엠페도클레스는 만물이 네 가지 뿌리(불, 물, 공기, 흙)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영원불변하다고 주장했다. 변화는 이 네 요소의 혼합비 변화일 뿐이다. 여기에 그는 동력 원리를 추가한다: 사랑(Philotes)은 결합시키고, 미움(Neikos)은 분리시킨다. 이것은 질료(4원소)와 동력(사랑/미움)을 구분한 최초의 시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질료인과 동력인의 구분”의 선구로 평가했다.
데모크리토스의 과격한 도전: 허공의 존재
원자론자 데모크리토스는 다원론 중에서도 가장 과격했다. 그는 “원자(atomos,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와 “허공(kenon, void)”의 존재를 주장했다. 원자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불변, 불멸)를 따르지만, 허공은 정면 도전이다. 파르메니데스가 “비존재는 없다”라고 했는데, 데모크리토스는 “빈 공간은 있다. 그래야 원자가 움직일 수 있다”라고 반박한 것이다. 이것은 “비존재도 일종의 존재다”라는 역설적 주장이며, 공간 개념의 혁명이었다.
15화 예고의 함의
다원론은 엘레아의 논리를 전복이 아니라 확장으로 극복하려 했다. “존재는 하나 vs 여럿” 논쟁은 단순한 수의 문제가 아니라,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엘레아는 변화를 부정함으로써 논리를 지켰고, 다원론은 존재를 쪼갬으로써 변화를 설명했다. 이 대결은 서양 형이상학의 근본 구도인 일자(the One)와 다자(the Many), 영원과 생성, 본질과 현상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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