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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창작들

거의 사랑, 새벽 부엌에서 끓이는 죽에 대하여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6. 2. 14.

거의 사랑, 새벽 부엌에서 끓이는 죽에 대하여

적막한 시간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실존적 서사시를 읽고 쓰며 나는 오늘 이 문구를 만났다.

“인간은 원래 둘 사이에서 헤맨다. 완벽한 균형은 없다. 다만 헤매는 방식이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진리만 붙잡다가 삶을 놓치고, 어떤 사람은 의견에만 빠져서 진리를 놓친다. 파르메니데스가 우리에게 준 선물은 둘 다 보라는 거다.”

 

이 문장을 곱씹으며 나는 오늘도 새벽의 정적 속에서 누군가에게 건넬 죽을 끓인다. 냄비 속에서 쌀알이 뭉개지며 형체를 잃어가는 모습은, 내 삶과 사랑 속에서 본질을 잃고 비대해진 감정의 덩어리들과 묘하게 닮아 있다.

싱크대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벽시계의 초침보다 느리게 박자를 센다. 쌀을 씻는 손끝에 차가운 물이 스미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뿌연 쌀뜨물은 내가 오랫동안 붙들고 있던 감정의 침전물과 다르지 않다. 불을 올리기 전, 불린 쌀알은 투명한 껍질 아래 하얀 속살을 겨우 감추고 있다. 아직은 단단하고, 아직은 형태가 분명하다. 그러나 곧 이 알갱이들은 끓는 물속에 자신을 내어주며 느리게 허물어질 것이다. 나는 그 해체의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왜 이리 다정하고 또 왜 이리 쓰라린지, 국자를 쥔 채 생각한다.


https://youtu.be/z4PKzz81m5c


불을 올리기 전, 쳇 베이커의 “Almost Blue”를 배경으로 선택한다. 이 곡을 새벽 부엌에 틀면 공기의 질감이 달라진다. 쳇 베이커의 목소리는 노래라기보다 고백에 가깝다. 음정을 정확히 짚으려는 의지조차 포기한 듯 흔들리는 그 가성은, 아름답다기보다 위태롭다. 마치 손끝에 걸린 물방울이 떨어지기 직전의 떨림 같다. 그는 사랑에 대해 노래하지만, 그 노래가 사랑을 설명하거나 설득하거나 호소하지 않는다. 그저 사랑의 근처에, 거의 사랑인 자리에, 닿을 듯 닿지 못하는 그 아슬한 경계에 목소리를 놓아둘 뿐이다. ‘Almost’ 거의.

 
 
 

그 단어가 이 곡의 전부이자 나의 새벽의 전부이기도 하다. 거의 충분한 정성, 거의 담백한 마음, 거의 도달했을지도 모를 사랑, 완성되지 못한 것들만이 가질 수 있는 떨림이 부엌의 수증기와 함께 허공에 맴돈다. 쳇 베이커는 마약과 폭력과 자기 파괴로 점철된 생을 살았지만, 이 곡을 부를 때만큼은 그 모든 과잉이 증발하고 오직 나약한 진심만 남는다. 나는 그 나약함이 부럽다. 자신의 부서짐을 숨기지 않는 목소리, 기교로 포장하지 않는 떨림, 그것이야말로 내가 이 죽 한 그릇에 담고 싶은 종류의 정직함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하며 불변하는 존재의 진리인 ‘알레테이아’를 설파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내가 서 있는 현실의 주방에서 쌀알은 끓는 물속에 몸을 맡기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해체된다.

나의 고질적인 문제는 늘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 한다는 사실이다. 글을 쓸 때면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서너 개의 형용사를 동원하고, 나의 지식이 얕아 보일까 두려워 사방에서 인용구를 끌어모아 덧칠한다.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다. 나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상대의 모든 시간을 소유하려는 욕심은 관계를 금세 피로하게 만든다. 모든 좋은 재료를 쏟아부으면 최고의 성찬이 될 것이라 믿었지만, 결과물은 늘 정체 모를 죽처럼 변해 진짜 목적을 흐리게 만들었다.

냄비 안을 들여다보면, 쌀알이 서서히 가장자리부터 흐물거리기 시작한다. 부엌 창에 김이 서린다. 바깥은 아직 어둡고, 유리에 맺힌 수증기 너머로 가로등 불빛이 번져 흐릿한 후광처럼 떠 있다. 나는 그 몽롱한 풍경을 바라보며 문득 나 자신에게 묻는다. 지금 내가 끓이고 있는 것은 쌀이 아니라 나 자신은 아닐까? 과잉된 정성, 과잉된 해석, 과잉된 기대를 끓는 물에 집어넣고, 그것이 형체를 잃도록 놓아두는 연습이 아닐까? 쌀알이 자기 윤곽을 포기할 때 비로소 죽이 되듯, 나의 욕망이 제 형태를 잃어야 비로소 사랑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스불 앞에 서서 국자를 젓는 내내, 나는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그 치열한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한다.
“이만큼의 정성이면 충분할까, 아니면 이마저도 상대에게는 넘치는 짐이 될까.”
어느 정도의 배려가 상대에게 어울릴지, 나의 이 뜨거운 진심이 상대를 즐겁게 할 미식인지 아니면 그저 나의 불안이 빚어낸 무거운 과욕인지 가늠할 길이 없다. 사유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이 같다는 그 오래된 명제를 따르자면, 내가 상대를 진정으로 사유한다면 그의 존재 자체를 긍정해야 한다. 그러나 나의 과욕은 화려한 수식어와 과도한 배려라는 ‘비존재’의 그림자를 자꾸만 덧칠한다. 상대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신뢰하지 못하기에 무언가 끊임없이 덧붙여야만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이다.

국자가 냄비 바닥을 긁을 때마다 음악적 배경이 있음에도 달그락 소리가 난다. 그 소리는 새벽 부엌에서 유독 크게 울린다. 쌀알은 이제 거의 원형을 잃어 전체가 걸쭉한 흰빛 액체로 변해간다. 나는 불을 줄이고, 참기름 한 방울을 떨어뜨린다. 기름이 죽의 표면에 닿는 순간 동그란 무지개빛 막이 퍼진다. 작은 한 방울이 만들어내는 고요한 파문, 나의 사랑도 이 정도의 밀도와 부피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한 냄비 가득 참기름을 쏟으면 죽은 죽이 아니라 기름진 폐수가 된다. 나의 관계들이 종종 그런 폐수가 되었던 것은, 참기름이 나빠서가 아니라 양을 몰랐기 때문이다. 스피커에서 쳇 베이커의 목소리가 다시 첫 소절로 돌아간다. 반복 재생을 걸어놓았기 때문이다. 같은 곡이 같은 부엌에서 반복되는데, 들을 때마다 조금씩 다른 곳이 아프다.




내가 지향하고 싶은 사랑의 형태는 영화 ‘시베리아의 이발사’의 그 서늘한 마지막 장면 속에 박제되어 있다. 십여 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유배지 시베리아까지 안드레이를 찾아온 제인, 하지만 그녀는 이미 다른 가정을 꾸리고 평온한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는 그를 발견한다. 그때 제인은 문을 두드리는 대신, 자작나무 숲 뒤로 조용히 발길을 돌린다. 자신의 오랜 그리움과 욕망이라는 ‘의견’을 덜어내고, 안드레이가 현재 누리고 있는 삶이라는 ‘진리’를 지켜주기로 결단한 것이다.

제인의 발자국은 시베리아의 눈 위에 찍혔다가 곧 바람에 지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발자국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다. 있었던 것은 있었고, 없앨 수 없다. 그것이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존재의 속성이 아닌가. 제인이 남기고 간 것은 말도, 편지도, 선물도 아니었다. 오직 눈밭에 잠시 새겨졌다 사라진 발자국과, 마차가 지나간 뒤 천천히 가라앉는 먼지뿐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자욱한 먼지 너머로 그녀가 다녀갔음을 직감하며 허망하게 달려 나가는 안드레이의 눈빛은, 붙잡지 못했기에 오히려 영원히 존재하게 된 사랑의 역설을 보여준다. 안드레이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받지 못했기에 그가 받은 것은 무한하다. 언어와 선물과 약속으로 규정된 사랑은 그 규정의 테두리 안에 갇히지만, 아무런 형태도 갖지 못한 채 먼지 속으로 사라진 사랑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를 소유하거나 구구절절한 언어를 덧칠하지 않는다. 오로지 상대가 존재하는 그 방식 그대로를 존중하며, 덜어내고 덜어내어 마지막에 남은 지독한 본질만을 공유한다. 그것이 바로 사유와 존재의 일치이며, 내가 도달하고 싶은 사랑의 정점이다. 사랑이라는 문장에서 나의 욕망을 한 국자 덜어내야 비로소 상대라는 존재가 온전히 빛나기 시작한다. 영화 속 제인의 뒷모습처럼, 나 역시 내가 끓인 이 죽 한 그릇에 나의 집착을 투영하기보다 상대의 허기를 메울 담백한 온기만을 남기려 애쓴다.

그런데 나는 종종 의심한다. 덜어냄이라는 미덕이 실은 또 다른 형태의 과잉은 아닌지. “나는 욕심을 버렸다”고 선언하는 순간, 그 선언 자체가 하나의 수식어가 되고, 나의 덜어냄을 알아달라는 은밀한 요구가 된다. 제인이 자작나무 숲 뒤로 발길을 돌린 것은 숭고한 선택이었지만, 만약 그녀가 "나는 당신을 위해 돌아섰다"는 편지를 남겼다면 그 순간 숭고함은 사라진다. 진정한 덜어냄은 덜어냈다는 사실마저 덜어내는 것이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막막해진다. 지금 이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나의 감정을 과시하는 또 하나의 덧칠이 아닌지, 죽을 끓이며 사유한다는 이 서사 자체가 '담백함'이라는 이름의 화려한 장식이 아닌지.

그러나 모순을 견디는 것이 인간의 몫이라면, 나는 이 모순을 안고 가기로 한다. 파르메니데스가 진리의 길과 의견의 길을 모두 기록한 것처럼, 나의 과잉과 나의 절제 사이를 헤매는 방식 자체가 내가 사랑을 배우는 경로일 것이다. 완벽한 덜어냄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덜어내려는 의지의 방향이 상대를 향해 있는지, 아니면 나 자신의 서사를 향해 있는지를 끊임없이 점검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성실함이다.

결국 삶과 사랑, 그리고 창작의 핵심은 명징한 단순함에 있다. 진리라는 단단한 나침반을 가슴에 품되, 의견이라는 변화무쌍한 지도를 읽으며 걷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화려한 장식으로 본질을 가리는 과오를 범하지 않고, 가장 담백한 진실만을 남기는 연습을 하려 한다. 비워내고 덜어내야 비로소 존재와 존재 사이의 온기가 흐를 수 있다는 자명한 이치를, 나는 오늘도 새벽녘 끓어오르는 냄비 앞에서 쓰라리게 배운다.

비록 우리는 완벽한 평온에 도달할 수 없기에 끊임없이 흔들리겠지만, 그 흔들림이 진리와 삶을 동시에 긍정하려는 숭고한 방황이라면 그 여정은 충분히 아름답다. 이제 나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사랑한다’는 담백한 동사 하나와 ‘존재한다’는 명확한 문장 하나로 내 삶을 다시 써 내려간다.

죽이 다 끓었다. 불을 끈다. 냄비에서 마지막 기포가 한 번 부풀었다 꺼지고, 부엌은 다시 고요해진다. 스피커에서 쳇 베이커의 마지막 음절이 허공으로 풀려나간다. 노래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그 떨림의 잔상이 부엌에 남아 있다. 뚜껑을 덮기 전, 하얗게 김이 오르는 죽의 표면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거기에는 아무 장식도 없다. 참기름 한 방울이 만든 작은 무지개만이 천천히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나는 이 그릇에 더 이상 아무것도 얹지 않기로 한다. 소금도, 말도, 설명도 덧붙이지 않는다. 수저를 하나 놓고, 창밖이 희미하게 밝아오는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자리를 뜬다. 냄비 위로 마지막 김이 피어오른다. 그것은 곧 식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온기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남을 것이다. 시베리아의 눈 위에 잠시 찍혔다 사라진 제인의 발자국처럼.


P.S. — “Almost Blue”에 대하여
이 곡은 원래 엘비스 코스텔로가 1982년 앨범 Imperial Bedroom에 수록한 노래다. 코스텔로는 쳇 베이커의 1954년 음반 Chet Baker Sings에서 “The Thrill Is Gone”을 듣고 그 유령 같은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이 곡을 썼다. 쳇 베이커를 위한 노래를, 쳇 베이커의 목소리를 상상하며 쓴 것이다.

1983년, 코스텔로는 자신의 앨범 Punch the Clock에 실린 “Shipbuilding” 녹음에 쳇 베이커를 트럼펫 연주자로 초청했다. 세션이 끝난 뒤 코스텔로는 쳇에게 “Almost Blue”가 담긴 음반을 건넸다. 그러나 쳇은 그 음반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코스텔로는 자서전에서 그가 듣기도 전에 어딘가에 잃어버렸을 거라고 짐작하기 쉬웠다고 적었다. 이후 두 사람은 런던에서 쳇이 공연할 때마다 만나 술을 마시고 몇 마디 말을 나눴지만, 그 노래에 대한 이야기는 끝내 오가지 않았다.

1988년 5월 13일 새벽, 쳇 베이커는 암스테르담 프린스 헨드릭 호텔 2층 창문 아래 길바닥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쉰아홉 해의 생이었다. 그리고 몇 달 뒤, 코스텔로에게 한 편의 테이프가 전해졌다. 브루스 웨버의 다큐멘터리 Let's Get Lost 촬영 중 쳇이 “Almost Blue”를 부른 녹음이었다. 술에 취한 관객들 앞에서, 무너질 듯한 목소리로 그는 자신을 위해 쓰인 줄 알았는지도 모를 그 노래를 불렀다. 코스텔로가 건넨 음반을 쳇이 정말로 잃어버렸는지, 아니면 말없이 품고 있다가 카메라 앞에서 처음 꺼내 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코스텔로는 이렇게 적었다—그에게 이 노래를 불러줘서 고맙다는 말을 끝내 전할 수 없었다고.

자신을 위해 쓰인 노래를 건네받고도 침묵했던 사람. 그 침묵 너머로 결국 노래를 불렀지만, 작곡자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창밖으로 떠난 사람. 그리고 사후에야 그 떨리는 녹음을 전해 받고 감사를 전할 길이 영영 사라져버린 사람. 이 곡의 진짜 서사는 가사 바깥에 있다. 닿을 듯 닿지 못한 두 사람의 대화, 건네졌으나 확인되지 않은 마음, 도착했으나 수신이 확인되지 않은 편지—그것이 ‘Almost’의 의미다.

누군가에게 건네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그것이 도착할지 알 수 없을 때, 쳇 베이커의 떨리는 목소리는 나에게 위로가 아니라 동행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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