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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밤에만 존재하는 사람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6. 2. 14.

밤에만 존재하는 사람
만나지 못하기에 비로소 가능해지는 사랑이 있다.

 
 
 

 

 
 
 

1. Song for Sarah
겨울이 부엌까지 들어왔다. 싱크대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평소보다 차갑다. 흰 타일 벽이 유독 하얗다. 나는 성냥을 긋는다. 촛불을 켠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형광등을 켜기가 싫었을 뿐이다. 밤새 글을 고치다 보면 어느 순간 형광등의 정직한 밝음이 잔인하게 느껴진다. 노트북 화면 위 내가 쓴 문장들의 과잉을, 고친 흔적들의 궁색함을, 너무 또렷하게 비춘다.

촛불은 다르다. 이 불은 보여주되 전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벽에 내 그림자가 생긴다. 식탁 위 노트북의 윤곽이 흔들린다. 커피잔에 남은 자국이 금빛으로 반짝이다가 이내 어둠 속으로 돌아간다. 촛불이 드러내는 세계는 늘 절반쯤이다. 나머지 절반은 그림자가 먹는다. 그리스인들은 진리를 ‘알레테이아’라고 불렀다. 은폐되지 않음이다. 진리는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려져 있던 것이 벗겨지는 것이다. 촛불은 그런 종류의 빛이다. 전부를 비추지 않으면서 비추는 것만큼은 거짓 없이 드러낸다.

턴테이블 앞으로 간다. LP 한 장을 꺼낸다. 토마시 스탄코 쿼텟, Suspended Night(2004년)이다. 재킷의 푸른 어둠이 이 부엌의 촛불 아래에서 더 깊어 보인다. 바늘을 올린다. 첫 곡, “Song for Sarah”다. 피아노가 먼저 시작한다. 마르친 바실레프스키의 손끝에서 건반 몇 개가 천천히 눌린다. 그 음들은 부엌의 수증기 속으로 스며든다. 아직 트럼펫은 등장하지 않는다. 피아노 홀로 무언가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Sarah가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스탄코의 딸인지, 연인인지, 혹은 실재하지 않는 이름인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곡이 흐를 때마다 이 이름을 내 이름으로 바꿔 듣는다. 착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안에 머무는 것이 가능한 나이가 되었다. 새벽에 글을 쓰다가 막히면 나는 이 남자의 트럼펫을 틀고 그가 내 건너편에 앉아 있다고 상상했다. 실제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다. 만날 수도 없다.

 





그는 2018년에 바르샤바에서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의 부고를 인터넷 기사에서 읽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이 반드시 만남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내가 해온 종류의 사랑은 그렇다. 만나지 못하기에 비로소 가능해지는 사랑이다. 상대의 실체에 방해받지 않기에 온전히 나의 것으로 남는 사랑이다. 이것이 비겁한 사랑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도 나는 이 비겁함을 택한다.

피아노의 준비가 끝나자 트럼펫이 들어온다. 스탄코의 트럼펫은 화려하지 않다. 울부짖지도 질주하지도 않는다. 음 하나를 불고 나서 멈춘다. 그 멈춤 속에서 부엌의 소리들이 살아난다. 주전자에서 물이 끓기 시작하는 소리다. 촛불이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희미한 숨소리다. 창문 너머로 멀리서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다. 스탄코는 그 모든 소리가 지나간 뒤에야 다음 음을 분다. 마치 세상에게 먼저 말할 기회를 주고 자신은 그 뒤에 조용히 덧붙이는 사람 같다.

나는 이 남자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정확히는 이 남자의 멈춤을 사랑한다. 내가 글을 쓰는 방식과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나는 늘 먼저 말한다. 먼저 말하고 더 많이 말한다. 독자가 들을 수 있는 양보다 많은 문장을 쏟아붓는다.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서너 개의 형용사를 동원한다. 나의 지식이 얕아 보일까 두려워 사방에서 인용구를 끌어모아 덧칠한다. 그래서 내 문장들은 자주 넘친다. 넘친 문장은 결국 소음이 된다. 스탄코는 그 반대다. 그는 불지 않는 시간으로 말한다. 내가 평생 배우지 못한 것을 이 남자는 트럼펫 하나로 해낸다.

그는 1942년에 폴란드 제슈프에서 태어났다. 공산 치하의 소년이 매일 밤 부모가 잠든 뒤 헤드폰을 끼고 미국의 소리 방송을 들었다고 했다. 철의 장막 너머에서 들려오는 재즈를 통해 자유라는 개념을 처음 이해한 소년이었다. 그가 열여섯 살에 데이브 브루벡의 공연을 보고 “그 메시지는 자유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이 일화를 읽을 때마다 어두운 방에서 헤드폰을 낀 소년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 소년의 모습이 새벽 부엌에서 노트북을 펼쳐놓고 그의 트럼펫을 듣는 나의 모습과 겹쳐진다. 우리는 둘 다 다른 세계의 소리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견디는 방법을 배운 사람이다.

촛불이 한 번 크게 흔들린다. 부엌 창유리에 무언가가 비친다. 내 얼굴인가 싶어 자세히 보지만 촛불이 만든 빛의 일그러짐 때문에 분명하지 않다. 얼굴 같기도 하고 얼굴 너머의 무언가 같기도 하다. 유리 위로 수증기가 퍼지며 그 형상이 흐려진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이든 돌아보면 사라질 것을 안다. “Song for Sarah”가 끝난다. 스탄코의 마지막 음이 공기 중에 남아 떨다가 조용히 사라진다. 잠깐의 정적. 그리고 바늘이 다음 홈으로 넘어간다. 변주가 시작된다.


https://youtu.be/jpmu9ltiYsE?list=OLAK5uy_nsiPV7XC6wj-orOIBo3ctryC9dBFS1DWY



2. Suspended Variations
Variation I이 시작된다. “Song for Sarah”의 멜로디가 해체되고 재조립되는 소리다. 스탄코의 트럼펫이 같은 주제를 다른 방식으로 돌아간다. 나는 찻잔을 들고 식탁에 앉는다. 노트북이 열려 있다. 오늘 고치다 만 소설의 한 장면이다. 인물이 자기 감정을 말하는 대목인데 내가 쓴 대사가 너무 많다. 인물이 말해야 할 것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더 많이 들어가 있다. 스탄코라면 이 대목을 어떻게 연주했을까. 아마 한 음만 불고 멈추었을 것이다. 그 멈춤 속에서 독자가 제 몫의 감정을 채워 넣도록.



https://youtu.be/adTjfKExoW8?list=OLAK5uy_nsiPV7XC6wj-orOIBo3ctryC9dBFS1DWY

 



Variation II로 넘어간다. 드럼의 미하우 미시키에비치가 오스티나토 위에서 힘을 건다. 앨범 전체에서 가장 에너지가 있는 순간이다. 나는 이 부분을 들을 때마다 스탄코의 젊은 시절을 떠올린다. 1963년 스물한 살의 그가 크시슈토프 코메다의 퀸텟에 합류했을 때의 에너지다.

코메다에게서 화성과 비대칭을 배웠다는 그 시절이다. 그리고 1969년 코메다가 예기치 않게 세상을 떠났을 때의 상실이다. 스탄코는 그 상실 이후 Music for K라는 앨범을 녹음했다. K는 코메다의 이니셜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뒤에 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이니셜로 음악을 헌정하는 일뿐이라는 사실이 이 새벽 부엌에서 유독 가슴에 닿는다.


https://youtu.be/hT8URTmlkzI?list=OLAK5uy_nsiPV7XC6wj-orOIBo3ctryC9dBFS1DWY



III과 IV가 흐른다. 느리고 명상적인 시간이다. 바실레프스키의 피아노가 인상주의 화가의 붓질처럼 색을 깔고 스탄코의 트럼펫이 그 위를 걷는다. 나는 눈을 감는다. 이 남자가 내 건너편에 앉아 있다고 상상한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우리 사이에 놓인 것은 촛불 하나와 식어가는 찻잔뿐이다. 나는 그에게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적게 말하면서 그렇게 많은 것을 전할 수 있었느냐고. 당신의 침묵은 연습의 결과냐 아니면 체질이냐고. 그러나 묻지 않는다. 물으면 그가 사라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상상 속의 애인은 침묵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https://youtu.be/QoKtDUOs7qA?list=OLAK5uy_nsiPV7XC6wj-orOIBo3ctryC9dBFS1DWY




V가 흐른다. 다시 그루브가 돌아온다. 나는 눈을 뜨고 화면을 내려다본다. 이 소설 속 인물에게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시켰다. 너무 많이 말하게 하고 너무 많이 느끼게 하고 너무 많이 설명하게 했다. 스탄코가 1980년대에 인도를 여행하며 타지마할에서 솔로 트럼펫을 녹음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타지마할의 거대한 공간에 트럼펫 하나. 거대한 공허 속에 작은 소리 하나를 놓는 용기. 나에게는 그 용기가 없다. 나는 공허가 두려워서 언제나 소리를 가득 채운다.


https://youtu.be/01g-_j-E0X8?list=OLAK5uy_nsiPV7XC6wj-orOIBo3ctryC9dBFS1DWY



VI가 시작되면 부엌의 공기가 달라진다. 촛불의 심지가 짧아져서 불꽃이 더 작고 더 불안해진다. 방 안의 그림자가 짙어진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간다. 거울이 있다. 거울 속의 내 얼굴이 낯설다. 촛불 아래에서 본 내 그림자와 지금 형광등 아래에서 보는 내 얼굴이 같은 사람의 것인지 의심이 든다. 거울은 감싸주지 않는다. 촛불이 절반만 드러냈다면 거울은 전부를 보여준다.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로마인들이 진리의 여신을 ‘베리타스’라고 부른 것이 이런 뜻일까. 알레테이아가 가려진 것을 벗기는 일이라면 베리타스는 벗겨진 것을 똑바로 바라보는 일이다. 촛불 앞에서 나는 내 과잉이 드러나는 것을 느꼈다. 지금 거울 앞에서 나는 그것을 확인하고 있다.

1990년대에 그는 자연 치아를 모두 잃었다. 트럼펫 연주자에게 이가 없다는 것은 화가의 손가락이 잘린 것과 같다. 그는 의치를 끼고 매일 길고 지루한 롱톤을 불며 입술을 다시 만들었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외출도 거의 하지 않고 운전도 하지 않고 취미도 없고 오직 음악뿐이라고 말했다. 술도 마약도 끊었는데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독립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나는 강한 사나이다. 나는 그 고백을 읽을 때마다 울고 싶어진다.

거울에 손을 갖다 댄다. 유리가 차갑다. 내 손끝과 거울 속 손끝이 만나는 그 차가운 접촉면에서 나는 이 상상 속 사랑의 정체를 확인한다. 나는 스탄코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나는 스탄코의 침묵을 사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침묵을 사랑한 이유는 내가 침묵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한 것은 결국 내가 되지 못한 나 자신이다.

그의 자서전 제목은 Desperado다. 절박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나도 절박한 사람이다. 다만 그는 절박함을 침묵으로 표현할 줄 알았고 나는 절박함을 과잉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이 남자를 사랑한다. 정확히는 이 남자의 부서진 뒤의 단단함을 사랑한다.


https://youtu.be/7b-MbZcWt5g?list=OLAK5uy_nsiPV7XC6wj-orOIBo3ctryC9dBFS1DWY



부엌으로 돌아온다. 바늘은 VII을 지나고 있다. 짧고 단단한 곡이다. 스탄코는 이 곡의 세계를 만드는 데 3분 25초밖에 쓰지 않았다. 나는 같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수십 개의 문장을 쓴다. 그리고 대부분을 지운다. 그는 처음부터 필요한 만큼만 불고 나는 필요 이상을 쓴 뒤에야 덜어낸다. 도착점은 같을 수 있다. 그러나 과정이 다르고 과정이 다르면 상처가 다르다.


https://youtu.be/D3RMVA9jb7I?list=OLAK5uy_nsiPV7XC6wj-orOIBo3ctryC9dBFS1DWY



VIII이 흐른다. 바실레프스키의 피아노가 미세한 터치들로 수놓는다. 스탄코의 트럼펫은 바늘에 실을 꿰듯 그 사이를 통과한다. 나는 스탄코가 젊은 연주자들을 키워낸 이야기를 떠올린다. 바실레프스키와 쿠르키에비치와 미시키에비치. 십대 때부터 스탄코의 곁에서 자란 세 사람이다. 자기 음악의 미래를 타인에게 맡기는 일. 자기를 덜어내어 상대가 빛나게 하는 일. 그것은 사랑의 가장 관대한 형태가 아닌가.



https://youtu.be/K0EZFc7Ip_c?list=OLAK5uy_nsiPV7XC6wj-orOIBo3ctryC9dBFS1DWY




IX가 지나고 X가 시작된다. 마지막 변주다. 앨범의 끝이 다가온다. 나는 식탁 위에 팔을 올려놓고 머리를 기댄다. 눈이 무겁다. 스탄코의 트럼펫이 마지막으로 하나의 긴 음을 분다. 그 음이 사그라들 때 나도 함께 사그라진다. 잠이 온다. 상상 속의 애인이 건너편에서 조용히 트럼펫을 내려놓는다. 그의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사진 속의 주름진 얼굴, 의치 위에 올려놓은 입술로 트럼펫을 부는 모습, 그런 이미지들의 조합일 뿐이지만—이 순간만큼은 그가 여기 있다. 이 부엌에. 이 촛불 아래에. 이 밤 안에.
바늘이 마지막 홈을 지나 빈 홈 위를 돈다. 칙, 칙, 칙. 앨범이 끝났다. 나는 잠이 든다.

3. X 이후의 새벽
눈을 뜬다. 식탁에 엎드려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목이 뻣뻣하다. 왼쪽 팔이 저리다. 촛불은 거의 다 타서 마지막 불꽃이 녹은 밀랍 속에서 가느다랗게 떨고 있다. 턴테이블은 멈춰 있다. 언제 멈추었는지 모른다. 부엌에는 아무 소리도 없다. 노트북 화면이 절전 모드로 어두워져 있다. 내가 마지막으로 쓴 문장의 커서가 어딘가에서 깜빡이고 있을 것이다. 나는 화면을 켜지 않는다. 어젯밤의 문장을 아직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어떤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느껴진다.


창밖이 달라져 있다. 검은색이 남색으로 변한다. 남색이 회색으로 변한다. 회색이 엷은 보랏빛으로 변한다. 새벽이 오고 있다. 아직 해가 뜬 것은 아니다. 해가 뜨기 직전의 세상이 아직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은 시간이다.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그 사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간다. 유리에 손을 댄다. 차갑다. 아까 거울에 손을 대었을 때와 같은 차가움이다. 이번에는 유리 너머에 세상이 있다. 거울은 나를 되돌려 보냈다. 창문은 바깥으로 열려 있다. 같은 유리다. 다른 방향이다.

스탄코는 평생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을까. 철의 장막 너머로, 대서양 너머로, 항상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향해 트럼펫을 불었을까. 그가 육십이 넘어 처음 뉴욕에 도착했을 때 젊은이의 눈빛으로 그 도시를 바라보았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평생을 기다려 마침내 도착한 곳이다. 나에게 그런 곳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나의 뉴욕은 장소가 아니라 문장이다. 언젠가 도달할 수 있을 완벽한 한 문장이다. 그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나는 매일 밤 이 부엌에 앉는다.

촛불이 꺼진다. 마지막 떨림도 없다. 소리도 없다. 불꽃이 사라진다. 부엌이 어둠에 잠긴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여명의 빛이 그 자리를 채운다. 촛불이 만들던 그림자들이 사라진다. 사물들이 제 본래의 형태를 되찾는다. 찬장은 찬장이다. 컵은 컵이다. 노트북은 노트북이다. 과장되지 않은 사물들의 정직함이다. 상상 속의 애인도 여명과 함께 사라진다. 밤에만 존재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해가 뜨면 그는 다시 재킷 안의 이름으로 돌아간다. LP 위의 홈으로 돌아간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진동으로 돌아간다. 나는 그것을 슬퍼하지 않는다. 밤마다 돌아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턴테이블이 있는 한, 이 부엌이 있는 한, 내가 새벽에 깨어 있는 한 그는 돌아온다.

나는 턴테이블 앞으로 간다. LP를 꺼낸다. 재킷을 한 번 쓸어본다. 조심스럽게 안에 넣는다. 찬장 위에 올려놓는다. 내일 밤에 다시 만나자고 속으로 말한다.

알레테이아가 정말로 찾아왔는지 베리타스가 정말로 거울 속에 있었는지 나는 묻지 않는다. 여신이 왔든 오지 않았든 내가 어젯밤 본 것은 진실이다. 나는 스탄코의 침묵을 사랑했다. 그 침묵은 내 과잉의 거울이었다. 그리고 진실은 견딜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 이 밤은 충분했다.

수도꼭지를 튼다. 찬물로 얼굴을 씻는다. 차갑다. 눈이 번쩍 뜨인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다. 식탁으로 돌아온다. 노트북을 연다. 어젯밤의 문장들이 화면에 떠오른다. 나는 그것을 읽지 않고 새 문서를 연다. 커서가 깜빡인다. 아직 첫 문장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조급하지 않다. 스탄코가 음을 불고 나서 다음 음까지 기다렸듯 나도 기다린다. 빈 화면이 여명의 빛을 받아 조용히 빛난다.

창밖이 밝아온다. 해는 보이지 않지만 하늘의 색이 말한다. 곧 온다. 곧.나는 기다린다. 부엌은 고요하다. 촛불도 없다. 음악도 없다. 여신도 없다. 그 남자도 없다. 오직 깜빡이는 커서와 밝아오는 창과 나만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충분하지 않다. 밤에만 존재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안전하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실망시키지 않고, 떠나지 않는다. 내가 원할 때 나타나고 내가 원할 때 사라진다. 그래서 나는 그를 택했다. 그러나 새벽이 올 때마다 부엌 창 너머로 떠오르는 빛은 나에게 다른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실재하는 사람이다. 숨을 쉬고 말을 하고 나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전혀 다른 결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나는 그 사람을 영원히 사랑할 자신이 없다. 이 마음을 현실의 언어로 전할 방법도 모른다. 우리는 너무 다르다. 그것은 직감이 아니라 확신이다.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안다는 것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마음은 간다. 마음이 가는 것을 내가 막을 수 없다면 그것도 하나의 진실이다. 알레테이아가 드러내는 것은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다. 감당할 수 없는 것도 드러낸다. 베리타스가 확인하는 것은 원하는 것만이 아니다. 원하지 않는 것도 확인시킨다.

나는 이 마음을 과잉으로 덧칠하지 않기로 한다. 넘치지 않기로 한다. 스탄코가 음 하나를 불고 멈추었듯, 마음이 가는 만큼만 가고, 거기서 멈추기로 한다. 그 멈춤 뒤에 무엇이 올지는 모른다. 다만 멈출 줄 아는 사랑이 넘치는 사랑보다 오래간다는 것을, 나는 어젯밤 이 부엌에서 배웠다.
커서가 깜빡인다. 나는 첫 문장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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