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욕망의 지형도: 결핍의 언어에서 존재의 발화로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밤들
살아온 만큼 살았다. 더는 인생에 뚜렷하게 원하는 것도 많지 않다. 그런 내가 최근 서재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다시 꺼내 들었다. 아주 오래전, 대학 시절 처음 읽었던 그 책. 당시엔 그저 ‘어둡고 난해한 소설’쯤으로 치부하고 덮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지금, 긴 세월을 살아낸 뒤 다시 마주한 지하 생활자의 독백은 전혀 다른 무게로 나를 짓눌렀다.
“나는 타인의 시선을 증오하면서도 그 시선을 갈구한다.”
책장을 넘기다 이 문장 앞에서 나는 멈칫했다. 이것은 19세기 러시아 어느 지하실 남자의 고백이 아니었다. 그것은 평생을 살아오며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믿었던 내 자신의 민낯이었다. 나는 내가 자유롭고 주체적인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 역시 타인이 설정한 ‘괜찮은 삶’이라는 기표의 연쇄를 따라 달려왔을 뿐 아닐까.
대학을 나왔고, 직장을 다니며 그 과정에서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뭐지?”라는 질문 앞에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멈춰 선 적이 있었던가. 이제 와서 되돌아보니, 내가 욕망했다고 믿었던 것들인 안정, 인정, 성취는 정말 나의 것이었을까, 아니면 사회가, 가족이, 시대가 요구한 것을 그저 내면화했을 뿐일까.
이제야 나는 욕망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욕망의 정체를 비로소 직시하게 된 것이다. 더 이상 뭔가를 갈구하지 않게 되었다는 건, 어쩌면 내가 평생 진짜 내 욕망을 한 번도 욕망해 본 적이 없다는 뜻일지도 모른다는 서글픈 자각. 그 자각 앞에서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쓰기는 젊은 시절에도 간헐적으로 해왔지만, 이번엔 다르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도,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이 막막함을 어디에든 토해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절박함, 생의 얼마 남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나 자신의 언어로 존재하고 싶다는 간절함이랄까? 그러나 문장은 여전히 서툴고, 생각은 정돈되지 않지만, 키보드를 두드리는 이 시간만큼은 내가 누군가의 기대가 아닌 나 자신으로 숨 쉬는 것 같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질문은 ‘나는 왜 이렇게 쓰고 싶어 하는가?’이다. 이 나이에 이 질문과 마주하는 것은 묘하다. 젊었을 때라면 ‘성공하고 싶어서’, ‘인정받고 싶어서’라고 쉽게 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성공도, 인정도 더 이상 절박하지 않다. 그런데도 나는 쓴다. 아니,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늦은 시기의 글쓰기는 무언가를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평생 채워지지 않았던 그 빈자리를 마침내 정직하게 응시하려는 행위다.
자크 라캉은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고 말했다. 젊은 시절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그저 난해한 이론쯤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원한다고 믿었던 것들, 안정적인 직장, 남부럽지 않은 가정, 타인의 인정은 정말 나의 욕망이었을까. 아니면 사회라는 거대한 타자가 설정한 기표를 따라 움직인 결과였을까.
욕망에 대한 물음은 나를 철학의 긴 역사 속으로 인도했다. 플라톤은 욕망을 결핍에서 출발하는 상승의 동력으로 보았고, 쇼펜하우어는 그것을 끝없는 고통의 근원으로 규정했다. 반대로 스피노자는 욕망을 존재의 본질 그 자체로, 니체는 삶을 긍정하는 창조적 에너지로 재해석했다. 그리고 라캉은 욕망을 언어적 결핍의 구조로 정교하게 체계화했다.
하지만 나는 이론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추상적인 개념들은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구체적인 감정들인 후회, 허망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간절함을 설명하기에 너무 차갑고 먼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문학으로, 영화로 돌아갔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이 겪는 심리적 지옥, 한강의 영혜가 선택한 침묵의 언어, 박찬욱이 스크린에 펼쳐놓은 욕망의 시각적 폭력들. 이 모든 재현들은 욕망이 단지 머리로 이해할 대상이 아니라, 온몸으로 겪어내야 할 실존의 문제임을 증언했다.
이 글이 가려는 곳은 욕망에 대한 학술 논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문학 비평도 아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사적 분석’이다. 라캉이라는 타자의 사유를 빌려, 도스토옙스키와 한강이라는 타자의 문장을 거울 삼아, 나 자신의 욕망 혹은 욕망의 부재를 들여다보려는 시도이다.
먼저 나는 욕망을 둘러싼 철학적 지형도를 그릴 것이다. 하지만 개념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개념들이 내 삶의 어떤 순간과 공명하는지 함께 기록할 것이다. 이어서 문학과 영화 속 인물들의 욕망을 분석하되, 그들의 선택과 파국이 지금의 내게 무엇을 일깨웠는지를 정직하게 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논의를 나의 글쓰기 경험으로 수렴시키려 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여전히 욕망한다. 더 정직한 문장을, 더 투명한 언어를. 하지만 이제 그 욕망은 젊은 시절처럼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남은 시간 동안 단 한 번이라도 진짜 나로 존재해 보고 싶다는, 늦었지만 간절한 몸부림이다. 욕망은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신기루를 향해 걷는 이 떨림과 흔들림이야말로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가장 명징한 증거이다.
이제 그 끝없는 미끄러짐의 궤적을 따라 항해를 시작하고자 한다.
제1부: 욕망의 철학적 지형도
1. 결핍의 기원: 플라톤과 쇼펜하우어
어젯밤 나는 또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모니터 화면에는 겨우 세 문장이 떠 있었다. 쓰고, 지우고, 다시 쓰기를 두 시간째 반복했다. 손가락은 키보드 위를 맴돌았지만 다음 문장이 나오지 않았다. 무엇을 쓰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 답답함. 아니, 정확히 말하면 쓰고 싶은 게 뭔지도 사실은 모르겠다는 막막함이었다.
창밖을 보니 1월의 찬 밤공기가 커튼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화면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내가 원하는 건 ‘완벽한 문장’이 아니라는 것을. 완벽한 문장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정말 원하는 건 이 허전함이 메워지는 느낌, 뭔가 채워졌다는 안도감이다. 하지만 그런 느낌은 오지 않았다. 예전에도 그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순간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에로스 신화가 떠올랐다. 에로스는 풍요의 신 포로스와 빈곤의 여신 페니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지혜는 있지만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신. 그래서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결여된 것을 찾아 방황한다. 플라톤은 이 신화를 통해 욕망의 본질을 설명했다. 인간이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곧 자신이 온전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서글픈 자기고백이었다.
젊은 시절 이 신화를 읽었을 때는 그저 아름다운 은유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지금, 빈 화면 앞에서 무언가를 갈구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허우적대는 내 모습을 보니 이해가 됐다. 나는 글을 쓰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을 쓰고 싶은지 모른다. 쓰고 나면 만족할 거라고 믿지만, 막상 문장을 완성하면 또 다른 허전함이 밀려온다.
지난주에도 그랬다. 이틀 밤을 새워 단편 하나를 완성했다. 마침표를 찍는 순간 후련함이 왔다. 하지만 그 후련함은 채 한 시간도 가지 않았다. 파일을 저장하고 나니 곧바로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아니었다. 그래서 또 고쳤다. 고치고 나니 또 뭔가 부족했다. 이 순환은 끝이 없었다.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라고 불렀다.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때는 결핍으로 고통스럽고, 막상 충족되면 견딜 수 없는 권태가 찾아온다는 것. 그는 세계의 본질을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로 파악했다. 욕망은 근거도 없고 목적도 없는 거대한 파도 같아서 인간을 쉬지 않고 몰아세우는 고통의 근원이 된다고 했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소름이 돋았다. 내가 평생 글을 써온 이유가 어쩌면 이 시계추를 멈추지 못해서가 아닐까. 쓰지 못하면 괴롭고, 써도 만족스럽지 않으니 또 쓴다. 완성된 원고를 보면서 느끼는 공허함은 마치 사막에서 신기루를 쫓아 달려간 사람이 그 자리에 도착해서 발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과 같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다. 플라톤은 욕망을 이데아를 향한 ‘상승의 동력’으로 봤다. 우리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더 완전한 것을 추구하게 되고, 그 추구를 통해 진리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반면 쇼펜하우어는 욕망을 ‘주체를 파괴하는 끝없는 갈증’으로 봤다. 똑같이 결핍에서 출발했지만, 하나는 상승이고 하나는 파멸이다.
나는 어디쯤에 있을까. 내가 밤마다 문장을 고치는 행위는 플라톤이 말한 진리를 향한 상승일까, 아니면 쇼펜하우어가 말한 소진을 향한 추락일까. 솔직히 모르겠다. 어떤 날은 글을 쓰면서 뭔가 더 나은 나에게 가까워지는 것 같다. 하지만 어떤 날은 그저 헛수고를 반복하며 시간만 낭비하는 것 같다.
두 철학자 모두 욕망의 근저에 ‘부재’가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무언가가 없기 때문에 원하게 된다는 이 단순하고도 잔인한 논리, 내가 글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을 때 느끼는 그 막연한 허전함, 채워지지 않는 문장에 대한 갈증은 바로 이 원초적 결핍의 변주일 것이다.
하지만 의문은 남는다. 이 결핍은 정말 메워질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잘못된 것을 욕망하고 있는 걸까? 플라톤과 쇼펜하우어는 욕망을 결핍으로만 설명하지만, 내가 글을 쓰는 행위 속에는 분명 고통만이 아닌 다른 무언가도 있다. 문장이 술술 풀릴 때의 그 희열, 생각이 언어로 구체화되는 순간의 환희, 이것을 단지 ‘고통의 일시적 중단’이나 ‘신기루를 향한 헛된 추격’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욕망에는 결핍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지도 모른다. 나를 소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 같은 것. 그 가능성을 찾아 나는 다른 철학자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2. 주체의 본질로서의 욕망: 스피노자와 니체
결핍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었다.
작년 가을, 나는 한 달 넘게 손도 대지 못했던 원고를 다시 펼쳤다. 막혀 있던 장면이었다. 주인공이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 폐허가 된 생가 앞에 서 있는 장면. 한 달 동안 이 장면을 수십 번 고쳐 썼지만 뭔가 살아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아침, 산책을 하다가 문득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급하게 집으로 돌아와 키보드를 두드렸다. 한 시간 만에 다섯 페이지가 쏟아져 나왔다.
그 순간 내가 느낀 건 ‘허전함이 메워졌다’는 안도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뭔가 내 안에서 터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막혀 있던 에너지가 한꺼번에 흘러나오면서 나는 더 많은 것을 쓰고 싶어졌다. 다음 장면이 보였고, 그다음 장면도 보였다. 결핍이 채워진 게 아니라, 욕망이 더 커진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논리대로라면 이건 말이 안 됐다. 욕망이 충족되면 권태가 와야 하는데, 나는 오히려 더 강렬하게 쓰고 싶어졌다. 이 경험은 욕망이 단순히 결핍을 메우려는 시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때 만난 철학자가 스피노자였다. 그는 『에티카』에서 인간의 본질을 ‘코나투스(Conatus)’로 정의했다. 코나투스는 자기 존재를 보존하고 확장하려는 노력이다. 스피노자에게 욕망은 우리가 무언가 부족해서 생기는 결핍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력이 외부 세계와 부딪히며 더 큰 기쁨을 향해 나아가려는 능동적인 본질 그 자체였다.
“우리는 선하기 때문에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하다고 부른다.”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무릎을 쳤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내면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글을 쓰는 것 자체가 나라는 존재가 세계와 접속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결핍되어서 쓰는 게 아니라, 쓰는 것이 곧 나의 존재 방식이었다.
그 가을날 아침, 다섯 페이지를 쏟아낼 때 내가 느낀 것은 ‘채워짐’이 아니라 ‘확장’이었다. 문장을 통해 내 안의 에너지가 밖으로 뻗어 나가면서 나는 더 많은 것과 연결되고 싶었다.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살고 싶었다. 욕망은 나를 소진시키는 게 아니라 나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었다.
하지만 스피노자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욕망을 긍정했지만, 그 욕망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단지 자기 존재를 보존하고 기쁨을 추구하라고만 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향해 이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가? 그저 쓰고 싶은 대로 쓰기만 하면 되는가?
이 질문 앞에서 니체를 만났다. 니체는 스피노자의 긍정을 한 단계 더 밀고 나갔다. 그에게 욕망은 단순히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조하려는 ‘권력에의 의지(Wille zur Macht)’였다.
니체는 욕망을 억압하고 부정하는 전통적 도덕을 ‘노예 도덕’이라 비판했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당당히 긍정하고 예술적 창조로 승화시키는 ‘초인(Übermensch)’의 삶을 제시했다. 삶이란 욕망이라는 파도를 타고 끝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항해라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통조차 창조를 위한 필연적인 산고라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읽고 내가 왜 매번 완성된 원고에 만족하지 못하는지 이해했다. 만족해버리면 거기서 멈춰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건 정지가 아니라 운동이었다. 어제의 나를 넘어서는 것, 어제 쓴 문장보다 더 나은 문장을 오늘 쓰는 것, 지난주 완성한 단편보다 더 깊이 있는 단편을 이번 주에 쓰는 것이었다.
몇 년 전 일이다. 나는 한 문예지에 단편을 투고했다. 떨어졌다. 심사평에는 “기술적으로는 완성도가 있으나 새로운 것이 없다”고 적혀 있었다. 그 말이 한동안 나를 괴롭혔다. 나는 분명 열심히 썼는데, 기존의 문법을 충실히 따랐는데, 왜 새롭지 않다는 건가.
그때 니체의 말이 떠올랐다.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며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조하려는 의지.”
나는 기존의 문법을 따르는 것에만 급급했지, 그것을 넘어서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안전한 범위 내에서만 움직였다. 그건 욕망이 아니라 순응이었다.
그 뒤로 나는 달라졌다. 쓸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건 어제의 나도 쓸 수 있는 문장인가?”
만약 그렇다면 지웠다. 조금 더 위험하게, 조금 더 낯설게 밀고 나갔다. 실패도 많았다. 망가진 문장들, 산으로 간 이야기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조금씩 변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것을 ‘욕망하는 기계’라고 불렀다. 욕망은 어떤 대상을 소유하기 위해 움직이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것들과 연결되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과정이라는 것, 내가 글을 쓰는 행위는 단순히 내면의 공허를 메우려는 보상 기제가 아니라, 내 안의 에너지가 문장이라는 매개를 통해 외부 세계와 접속하고 새로운 의미의 영토를 개척하려는 코나투스의 발현이었다.
작년 가을 그날 아침, 나는 결핍을 메운 게 아니었다. 나는 확장했다. 그리고 그 확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욕망은 나를 소진시키는 불꽃이 아니라, 나를 어제와 다른 존재로 탈바꿈시키는 창조의 불꽃이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이 생긴다. 이 욕망은 정말 나만의 것일까? 내가 새로운 문장을 쓰고 싶다는 이 갈망, 더 나은 작가가 되고 싶다는 이 열망은 순수하게 내 안에서 나온 것일까? 아니면 ‘좋은 작가’라는 사회적 기준, ‘인정받는 글’이라는 타자의 시선이 만들어낸 것일까?
이 의심은 나를 또 다른 철학자들에게로 이끌었다.
3. 타자와의 관계: 헤겔과 르네 지라르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몇 달 전, 나는 한 작가의 신간 소설을 읽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작가였다. 책을 덮는 순간 가슴 한편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질투였다. 그 작가는 내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를 이미 써버렸다. 그것도 나보다 훨씬 더 잘.
그날 밤 나는 책상 앞에 앉았다. 쓰던 원고를 열었지만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자꾸 그 작가의 문장이 떠올랐다. 내 문장은 그에 비해 너무 투박했고, 진부했고, 생명력이 없어 보였다. 나는 무엇을 쓰고 있는가. 누구를 위해 쓰고 있는가. 아니, 애초에 나는 왜 쓰는가.
이상한 일이었다. 그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내 원고에 꽤 만족하고 있었다. 진도도 잘 나가고 있었고, 쓰는 재미도 있었다. 그런데 단 한 권의 책이 그 모든 확신을 무너뜨렸다. 내 욕망은 그렇게 취약한 것이었나. 타인의 성취를 보는 순간 산산조각 나는 것이었나.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인정 투쟁’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인간은 단순히 사물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넘어 타자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다는 것, 자아는 타자가 나를 독립적인 주체로 승인할 때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뜨끔했다. 그렇다면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말 나 자신의 내적 필요 때문인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작가’로 인정받고 싶어서인가. 만약 아무도 내 글을 읽지 않는다면, 아무도 평가하지 않는다면, 나는 여전히 이렇게 열심히 쓸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실제로 나는 원고를 쓸 때 상상 속의 독자를 떠올린다. 이 문장을 읽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 장면에서 감동받을까. 이 비유를 이해할까. 나는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타자의 시선을 의식한다. 그 시선이 없다면 나는 글을 쓸 수 있을까.
몇 년 전, 나는 블로그에 단편을 하나 올렸다. 반응이 없었다. 조회수도 거의 없었다. 그 글은 사실 꽤 공들여 쓴 작품이었는데, 아무도 읽지 않자 갑자기 그 글이 형편없어 보였다. 같은 글인데 타인의 반응 유무에 따라 내 평가가 달라진 것이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 욕망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닌가.
르네 지라르는 이것을 ‘모방 욕망’이라고 불렀다. 인간이 무언가를 욕망할 때, 주체와 대상 사이에 ‘중개자(모델)’가 반드시 개입한다는 것. 우리가 특정 물건이나 지위를 갈망하는 이유는 그것이 본질적으로 가치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선망하는 타자가 그것을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작가의 책을 읽고 질투를 느꼈을 때, 나는 정확히 이 구조에 빠져 있었다. 나는 그 작가가 쓴 ‘그런 종류의 글’을 욕망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 나는 내 방식대로 쓰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의 방식이 더 좋아 보였다. 그의 문체가, 그의 주제가, 그의 서사 구조가 더 훌륭해 보였다.
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의 글을 욕망한 게 아니었다. 나는 그가 받을 찬사를 욕망했다. 그가 얻을 인정을 욕망했다. 그가 서 있는 자리를 욕망했다. 지라르의 말대로 욕망은 주체의 자율적 선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을 흉내 내는 삼각형의 구조였다.
이 깨달음은 씁쓸했다. 그렇다면 나는 단 한 번도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욕망해 본 적이 없는 건가. 평생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따라 욕망했을 뿐인가.
작년 여름, 나는 한 문학상 공모에 원고를 냈다. 예심도 통과하지 못했다. 결과를 확인한 날 밤, 나는 원고 파일을 열어보지도 못했다. 그 원고가 갑자기 너무 부끄러워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공모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 원고가 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탈락하자마자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심사위원이라는 타자가 내 원고를 승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내 원고의 가치를 완전히 바꿔버린 것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작품의 가치는 고정된 것 아닌가. 그런데 타자의 시선 하나가 그 가치를 완전히 뒤집어버렸다.
헤겔과 지라르의 사유는 잔인한 진실을 폭로한다. 욕망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지 않고 ‘타자’에게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라캉이 선언한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는 명제의 철학적 토대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순수하게 나만의 욕망을 욕망할 수 있는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 이미 타자의 세계로 진입한다. 내가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는 기준도 사회가 만들어놓은 것이다. 작가라는 정체성 자체가 타자의 승인을 전제로 한다. 나는 혼자서는 작가가 될 수 없다. 누군가 나를 작가로 불러줘야 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타자의 시선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지만, 그 시선과의 관계를 바꿀 수는 있지 않을까. 타자에게 인정받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대화를 위해 쓰는 것. 타자의 욕망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과 내 욕망 사이의 간극을 탐구하는 것이다.
며칠 전, 나는 그 작가에게 메일을 썼다. 당신의 책이 좋았다고, 질투가 났다고, 하지만 그 질투 덕분에 내가 정말 쓰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답장은 오지 않았지만, 편지를 쓰는 과정에서 나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타자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는 것. 나의 욕망 속에 타자가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인정하는 것. 그 인정으로부터 대화가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 생각을 더 밀고 나가려면, 욕망이 언어와 맺는 관계를 더 정확히 이해해야 했다. 왜 우리는 언어로 말하는 순간 타자의 영역으로 들어가는가. 욕망과 언어, 그리고 타자는 어떻게 얽혀 있는가.
이 질문은 나를 자크 라캉에게로 이끌었다.
4. 정신분석학의 정점: 자크 라캉
언어는 나를 배신한다.
지난달, 나는 오랜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내가 쓴 단편을 읽고 이렇게 말했다.
“네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원고를 쓸 때는 분명히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물어보니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 인물의 고독을 쓰고 싶었어.”
“그래서 그 고독이 뭔데?”
“음…… 설명하기 어렵네.”
친구는 웃었다.
“그럼, 왜 썼어?”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쓰고 싶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언어로 옮기는 순간 그것은 다른 것이 되어버렸다. 내가 느낀 것과 내가 쓴 것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라캉은 바로 이 간극을 욕망의 본질로 봤다. 그는 인간의 정신 구조를 상상계(Imaginary), 상징계(Symbolic), 실재계(Real)라는 세 층위로 구분했다. 우리가 욕망이라 부르는 현상은 언어적 질서인 상징계 속에서 구성된다. 하지만 언어는 결코 실재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라캉은 욕망을 이해하기 위해 욕구(besoin), 요구(demande), 욕망(désir)을 구분했다. 욕구는 배고픔이나 수면 같은 생물학적 필요다. 이것은 충족되면 사라진다. 하지만 우리가 이것을 언어로 표출하는 순간, 그것은 ‘요구’가 된다.
아기가 운다. 배가 고파서다. 하지만 엄마가 젖을 주면서 안아주고 달래줄 때, 아기는 단순히 배고픔이 아니라 사랑을 경험한다. 그 순간부터 ‘배고픔’이라는 생물학적 욕구는 ‘사랑해달라’는 요구로 변한다. 하지만 언어는 이 요구를 완벽히 전달할 수 없다. 그리고 타자(엄마) 역시 이 요구를 완벽히 채워줄 수 없다.
이처럼 요구가 욕구를 초과하고 남겨진 결여의 자리, 그 메워지지 않는 틈새에서 비로소 욕망이 탄생한다.
나는 이 설명을 읽고 소름이 돋았다. 내가 글을 쓸 때 느끼는 그 답답함이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분명 무언가를 말하고 싶다. 어떤 느낌, 어떤 순간, 어떤 진실. 하지만 그것을 문장으로 옮기는 순간, 그것은 이미 다른 것이 된다. 언어는 내가 느낀 것을 온전히 담지 못한다.
작년 봄, 나는 첫사랑에 대해 쓰려고 했다. 오십여 년 전 일이다. 열 다섯살이었던 나는 한 달 넘게 준비한 편지를 그에게 건넸다. 내 마음을 다 담았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편지를 다 읽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고마워. 근데 네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때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오십 년이 지나 그 순간을 쓰려 했지만, 여전히 대답할 수 없었다. 그때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다시 그 순간을 쓰고 싶었다. 아무리 문장을 고쳐도 그 순간은 포착되지 않았다. ‘슬픔’, ‘욕망’ ‘사랑’…… 이런 단어들은 너무 진부했고, 내가 느낀 것과는 달랐다. 나는 한 달 넘게 그 장면을 붙들고 씨름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라캉은 이것을 ‘실재(Real)’라고 불렀다.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것. 상징화될 수 없는 것. 하지만 바로 그것이 우리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것. 욕망은 바로 이 실재의 자리를 언어로 메우려는 불가능한 시도다.
그렇다면 욕망은 영원히 좌절될 수밖에 없는가. 우리는 평생 닿을 수 없는 것을 향해 헛수고를 반복하는 것인가. 라캉은 그렇다고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렇게 덧붙인다. 바로 그 실패의 반복 속에 주체의 진실이 있다고.
여기서 라캉의 가장 유명한 명제가 나온다.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주체는 대타자(Grand Autre)라는 사회적 언어 질서 속에서만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계와 소통하고, 언어를 통해 우리 자신을 정의한다. 하지만 언어는 이미 타자의 것이다.
내가 작가라고 스스로를 부를 때, 나는 사회가 만들어놓은 작가라는 기표를 사용한다. 내가 좋은 글을 쓰고 싶다고 할 때, 그 좋음의 기준은 이미 대타자가 설정해 놓은 것이다. 나는 내 언어로 말하는 것 같지만, 실은 타자의 언어를 빌려 말하고 있다.
며칠 전,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세상에 단 한 명의 인간만 존재한다면, 나는 글을 쓸까? 아무도 읽지 않을 글을. 아무도 평가하지 않을 글을.
솔직히 모르겠다. 어쩌면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글쓰기 자체가 이미 타자를 전제로 한 행위니까. 나는 누군가에게 들리기를 바라며 쓴다. 설령 실제로 아무도 읽지 않더라도, 나는 상상 속의 독자를 떠올리며 쓴다. 그 독자가 없다면 나는 쓸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가. 내 욕망이 진정으로 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나를 좌절시키는가. 예전에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타자의 언어를 빌려 말하는 것이 나의 진실을 지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틈새에서 나의 진실이 새어 나온다. 내가 첫사랑에 대해 쓸 수 없었던 그 실패 자체가, 역설적으로 그 순간의 진실을 증언한다. 언어로 포착할 수 없었다는 것이 바로 그 순간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준다.
라캉은 말한다. 욕망은 도달할 수 없기에 우리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한다고. 그 미끄러짐의 궤적이야말로 인간을 기계적 존재로부터 구원하는 유일한 실존적 증거라고.
나는 오늘도 문장을 고친다. 어제 쓴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고치고 나면 또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내일도 고칠 것이다. 이 반복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이 끝나지 않는 미끄러짐이 바로 욕망의 본질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미끄러짐을 멈추는 순간, 나는 욕망하기를 멈추고, 욕망하기를 멈추는 순간, 나는 쓰기를 멈출 것이라는 것을.
욕망은 나를 지치게 한다. 하지만 동시에 살아 있게 한다. 나는 오늘도 닿을 수 없는 것을 향해 문장을 던진다. 그 문장들은 빗나가겠지만, 그 빗나감의 흔적이 곧 나라는 존재의 증거다.
이제 나는 이 철학적 탐구를 넘어, 구체적인 이야기들 속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욕망이 실제 인간의 삶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문학과 영화는 이것을 어떻게 재현해 왔는지. 그 이야기들을 통해 나는 다시 한번 내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볼 것이다.
제2부: 욕망의 재현과 변주
1. 도스토옙스키: 욕망의 심연과 타자의 얼굴
대학 시절, 나는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처음 읽고 책을 덮지 못했다. 정확히는 덮기가 두려웠다. 그 책을 덮는 순간 나는 다시 '정상적인 대학생'으로 돌아가야 했다. 수업 듣고, 과제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하지만 지하 생활자의 독백은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렸고, 나는 그것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나는 악의적인 인간이다. 나는 매력 없는 인간이다. 나는 간이 나쁜 것 같다.”
첫 문장부터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건 소설의 시작이 아니었다. 이건 고백이었다. 자기혐오와 자기애가 뒤엉킨, 비틀리고 뒤틀린 한 인간의 날것 그대로의 목소리였다.
당시 나는 스물두 살이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다. 학점도 괜찮았고, 동아리 활동도 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늘 불안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내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는 않을까. 지금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그 시선을 증오했다. 왜 나는 혼자 있을 때조차 누군가 나를 보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가.
지하 생활자는 바로 이 모순을 극단까지 밀고 나간 인간이었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면서도 끊임없이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들의 인정을 갈구한다. 그는 자신이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라고 소리 높여 외치지만, 그의 모든 행동은 사실 타자의 반응에 따라 결정되는 ‘반작용’에 불과하다.
리자라는 창녀를 만나는 장면이 특히 충격적이었다. 지하 생활자는 리자에게 설교한다.
“당신은 이렇게 살면 안 돼.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
하지만 리자가 정말로 그를 믿고 찾아왔을 때, 그는 그녀를 모욕한다. 왜? 그녀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봐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구원자로 보이고 싶었는데, 리자는 그가 실은 비참한 존재임을 알아차렸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나는 울었다. 스물두 살의 내가 도서관 구석에서 소리 없이 울었다. 왜냐하면 나도 그랬으니까. 나도 타인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면서, 정작 누군가 진짜 나를 알아봐 주려 하면 도망쳤으니까. 진짜 나는 보여줄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라캉이 말한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가 바로 이것이었다. 지하 생활자는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는 오직 타자가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만 자신을 정의할 수 있다. 타자가 그를 무시하면 분노하고, 타자가 그를 알아봐주면 두려워한다. 그는 타자의 시선이라는 감옥 안에 갇혀 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나는 『죄와 벌』을 읽었다. 이번엔 다른 종류의 충격이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지하 생활자와 반대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스스로를 ‘비범한 인간’으로 규정하고, 법과 도덕을 넘어설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나폴레옹처럼. 그래서 전당포 노파를 죽인다.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하지만 그 뒤에 일어나는 일이 진짜 이야기였다. 살인 후 라스콜리니코프는 붕괴한다. 그는 타자의 시선을 무시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실제로는 견딜 수 없었다. 친구 라주미힌의 눈빛, 형사 포르피리의 말투,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 모든 것이 그를 고발하는 것 같았다.
결국 그는 소냐 앞에서 무너진다. 소냐는 창녀다.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 하지만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녀 앞에서만 자신의 죄를 고백할 수 있었다. 왜일까.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에 대해 말했다. 얼굴은 나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윤리적 관계는 이 얼굴과의 마주침에서 시작된다. 소냐의 얼굴은 라스콜리니코프에게 그가 회피하려 했던 윤리적 책임을 상기시켰다. 그녀는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겠다고 했다.
나는 이 장면을 읽고 또 울었다. 그때 나는 한창 ‘나는 특별하다’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나는 남들과 다르게 살 거야. 남들이 가는 길은 가지 않을 거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냥 겁이 났다. 평범하게 사는 것도 두렵고, 그렇다고 다르게 살 용기도 없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고백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너는 특별하지 않아. 그리고 그게 괜찮아. 타자의 얼굴 앞에서 네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진짜 용기야.”
그리고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이 소설은 몇 번을 읽었지만 최근에야 비로소 이해할 것 같았다.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타락한 욕망의 화신이다. 그는 권위도 없고, 존경받을 만한 점도 없다. 오직 자신의 육체적 탐닉에만 몰두한다. 라캉이 말한 ‘아버지의 이름(Le Nom-du-Père)’이 완전히 붕괴한 상태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단순히 생물학적 부모가 아니라, 상징적 질서를 대표하는 위치다. 법, 언어, 사회적 규범. 이것들을 아이에게 전달하는 역할. 하지만 표도르는 이 역할을 완전히 포기했다. 그래서 세 아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욕망의 길을 잃는다.
드미트리는 관능적 욕망에 매몰된다. 아버지와 같은 여자를 두고 경쟁하면서, 그는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아버지를 닮아간다. 이반은 지적 욕망으로 신의 질서에 도전한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그의 선언은 허무주의의 정점이다. 그리고 스메르쟈코프는 이반의 사상을 기형적으로 모방하여 실제로 아버지를 살해한다.
지라르의 ‘모방 욕망’ 이론이 이보다 더 정확하게 구현된 소설이 있을까. 스메르쟈코프는 이반을 모델로 삼았다. 이반이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말한 것을 자신의 욕망으로 내면화했다. 하지만 이반은 실제로 살인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사유 실험을 한 것이었다. 스메르쟈코프는 그 사유를 행동으로 옮겼고, 이반은 그 결과 앞에서 붕괴한다.
최근 이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알료샤에게 주목하게 됐다. 젊었을 때는 알료샤가 지루했다. 너무 선하고, 너무 온유하고, 너무 수동적으로 보였다. 나는 이반의 지적 도전에 더 매혹됐다.
하지만 지금은 알료샤야말로 진짜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 드미트리의 광기도, 이반의 회의도, 아버지의 타락도 판단하지 않고 그저 함께한다.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이다.
나는 최근 몇 년간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내가 젊었을 때 동경했던 욕망들, 특별해지고 싶다는 욕망,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는 욕망이 실은 얼마나 공허했는지.
진짜 욕망은 어쩌면 알료샤가 보여준 것일지도 모른다. 타자의 고통 앞에서 함께 머무는 것. 해결책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곁에 있는 것. 도스토옙스키는 이것을 ‘능동적 사랑’이라고 불렀다.
지하 생활자는 타자의 시선에 갇혔고, 라스콜리니코프는 타자를 넘어서려다 파멸했고, 카라마조프 형제들은 아버지 없는 세계에서 길을 잃었다. 하지만 알료샤는 타자와 함께 걷는 법을 보여줬다.
나는 아직도 글을 쓰면서 타자의 시선을 의식한다. 이 문장이 어떻게 읽힐까, 이 장면이 유치하게 보이지는 않을까.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시선을 지울 수는 없다는 것을. 다만 그 시선과의 관계를 바꿀 수는 있다는 것을.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내게 이렇게 말한다. 욕망은 너를 지옥으로 데려갈 수도 있지만,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너는 그 지옥에서 빠져나올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2. 한국 문학 속 욕망의 궤적: 침묵에서 발화로
도스토옙스키가 보여준 욕망의 지옥은 멀리 있지 않았다. 그것은 한국 문학 속에서도 다른 모습으로, 하지만 똑같은 절박함으로 되풀이되고 있었다.
안개 속을 헤매다: 김승옥의 『무진기행』
언젠지 까마득하지만, 나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읽고 며칠간 멍하니 지냈다. 주인공 윤희중이 무진이라는 안개 낀 소도시를 찾아가 옛 애인 하인숙을 만나고, 결국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서울로 돌아오는 이야기.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소설이었지만, 그 안개가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또 무진에서 빠져나갈 궁리부터 했다.”
윤희중은 무진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했다. 잃어버린 순수함, 진정한 사랑, 아니면 자기 자신. 하지만 그가 실제로 한 일은 하인숙을 다시 상처 입히고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그는 무엇을 원했던 걸까. 아니,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나 했을까.
당시 나도 그랬다. 직장 생활에 지쳐 있었고, 뭔가 다른 삶을 살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 다른 삶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몰랐다. 그저 지금 이 삶이 아닌 것. 어디든 여기가 아닌 곳. 누구든 지금의 내가 아닌 사람.
라캉이 말한 ‘기표의 미끄러짐’이 바로 이것이었다. 윤희중이 갈구하는 것은 이름 붙일 수 없다. ‘무진’이라는 기표는 그가 진짜 원하는 것을 담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무진에 도착해서도 여전히 공허하고, 결국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 하지만 서울에 돌아가도 그 공허함은 메워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소설을 덮고 나서 한동안 내 삶을 돌아봤다.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찾는다 해도, 정말 만족할 수 있을까. 아니면 나도 윤희중처럼 안개 속을 헤매다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까.
권력의 그늘에서: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마흔 즈음, 나는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다시 읽었다. 학창 시절에도 읽었지만, 그때는 그저 ‘독재 비판 소설’쯤으로만 이해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다시 읽으니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전학생 한병태가 엄석대라는 절대 권력자에게 굴복하는 과정. 처음엔 저항하지만, 결국 그도 엄석대의 시스템에 편입된다. 더 끔찍한 건, 편입된 뒤에는 그 시스템을 내면화하고 심지어 옹호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엄석대를 증오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되고 싶었다.”
지라르의 모방 욕망이 이보다 선명하게 드러난 장면이 있을까. 한병태는 엄석대를 혐오하면서도 그가 차지한 권력의 자리를 욕망한다. 그는 엄석대 자신이 아니라, 엄석대가 누리는 인정과 복종을 욕망한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부끄러워졌다. 나도 그랬으니까. 직장에서, 사회에서, 나는 종종 내가 경멸하는 사람들의 위치를 욕망했다. 그들의 권력을, 그들의 영향력을, 그들이 받는 대우를. 나는 그들과 다르다고 믿고 싶었지만, 실은 그들이 서 있는 자리를 탐했다.
욕망은 이렇게 작동한다. 우리는 대상 자체가 아니라 타자가 점유한 위치를 욕망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경멸하던 것을 닮아간다.
거부라는 언어: 한강의 『채식주의자』
얼마 전, 나는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영혜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처음엔 단순한 채식주의인 줄 알았지만, 점점 분명해진다. 이건 채식이 아니라 ‘거부’다. 남편의 요구를 거부하고, 가족의 폭력을 거부하고, 사회가 여성에게 부과하는 모든 역할을 거부한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며 ‘식물 되기’를 욕망한다.
“꽃이 피었으면 좋겠어요. 나한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숨이 막혔다. 영혜는 더 이상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몸으로 말한다. 굶주림으로, 침묵으로, 나무처럼 서 있는 것으로. 라캉이 말한 ‘실재(Real)’로의 퇴행. 상징계의 언어를 거부하고 침묵 속으로 침잠하는 것.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 인생의 어떤 순간들을 떠올렸다. 말할 수 없어서, 아니 말해봤자 소용없어서 침묵했던 순간들. 그 침묵은 포기가 아니라 저항이었다. 타자의 언어로는 내 진실을 말할 수 없을 때, 침묵은 유일한 발화가 된다.
하지만 영혜의 결말은 비극적이다. 그녀는 정신병동에 갇힌다. 사회는 그녀의 침묵을 '광기'로 규정한다. 거부는 저항일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발화라는 용기: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
그리고 최근, 나는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을 읽었다. 이 소설은 앞선 작품들과 완전히 다른 지점에 서 있었다. 주인공 영은 게이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는다. 대도시 서울 한복판에서, 타자의 시선이 가득한 곳에서, 그는 자신을 드러낸다. 물론 상처받는다. 차별받고, 오해받고, 때로는 폭력을 당한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는다.
“나는 나인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김승옥의 윤희중은 안개 속을 헤매다 도망쳤고, 한강의 영혜는 침묵 속으로 침잠했다. 하지만 영은 말한다. 소리 내어, 분명하게, 자신의 언어로.
이것은 들뢰즈가 말한 ‘생성’이다. 욕망은 결핍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운동이다. 영은 재희와 사랑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또 상처받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계속 변한다. 어제의 영과 오늘의 영은 다르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부러웠다. 그가 가진 용기가. 아니, 용기라는 말도 적절하지 않다. 그에게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필연이다. 자신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문학은 이렇게 욕망의 변화를 기록해 왔다. 1960년대의 안개 속 방황에서 시작해, 1980년대의 권력에 대한 모방을 거쳐, 2000년대의 침묵하는 저항을 지나, 마침내 2010년대 이후 목소리를 내는 주체들에게 이르렀다.
나는 어디쯤에 있을까. 살아온 만큼 살았고, 더 이상 원하는 것도 많지 않다고 말했지만, 그건 절반만 진실이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더 이상 ‘타자가 설정한 것’을 욕망하지 않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욕망한다. 다만 그 욕망의 방향이 바뀌었을 뿐이다.
젊은 시절, 나는 윤희중처럼 안개 속을 헤맸다. 뭔가를 찾고 있었지만 그게 뭔지 몰랐다. 중년에는 한병태처럼 타자의 자리를 욕망했다. 인정받고 싶었고, 성공하고 싶었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위치에 서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영혜처럼 침묵하고 싶지도, 그렇다고 영처럼 당당하게 외칠 힘도 없다. 다만 글을 쓴다. 이 글쓰기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타자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도 아니고, 순수하게 나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어쩌면 글쓰기는 침묵과 발화 사이 어딘가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시도.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것을 언어로 붙잡으려는 헛된 노력. 하지만 바로 그 헛됨 속에서,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고 느낀다.
한국 문학 속 인물들은 내게 이렇게 말한다. 욕망은 변한다고. 안개 속을 헤매는 것에서 시작해, 권력을 모방하고, 침묵으로 저항하고, 마침내 자기 목소리를 찾아가는 긴 여정이라고.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여정의 어딘가에 서 있다.
제3부: 한국 영화 속의 욕망 - 응시와 공간의 심연
영화는 문학과 다르다. 문학이 언어로 욕망을 재현한다면, 영화는 이미지로 욕망을 폭로한다. 나는 스크린 위에서 인물들이 욕망하는 모습을 보면서, 종종 내 자신을 목격하곤 했다. 어둠 속 극장에서, 나는 안전하게 타자의 욕망을 훔쳐보는 동시에 나 자신의 욕망과 마주했다.
1. 『올드보이』(2003): 타자의 서사에 박제된 욕망
언젠지 구체적으로 생각나지 않지만 나는 박찬욱의 『올드보이』를 극장에서 봤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옆자리 사람들이 다 나간 뒤에도 나는 앉아 있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나는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 정리할 수가 없었다.
오대수는 15년 동안 감금당한다. 이유도 모른 채. 풀려난 뒤 그는 복수를 시작한다. 자신을 가둔 자를 찾아내고, 왜 그랬는지 밝혀내고, 응징하겠다고. 그는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믿는다.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써 내려간다고 믿는다. 하지만 진실은 잔인했다. 오대수는 단 한 순간도 자신의 이야기를 쓴 적이 없었다. 그는 이우진이라는 타자가 쓴 각본을 따라 움직이는 배우에 불과했다. 15년의 감금도, 석방도, 미도와의 사랑도, 모든 것이 이우진의 설계였다.
가장 끔찍한 건 미도였다. 오대수가 사랑한 여자. 그녀는 실은 그의 딸이었다. 오대수는 자신이 욕망을 선택했다고 믿었지만, 그 욕망조차 타자가 심어놓은 것이었다.
라캉이 말한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가 이보다 더 잔인하게 구현된 이야기가 있을까. 오대수는 주체적이라고 믿었지만,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타자의 대상(object)이었다. 그의 모든 선택은 이미 예정된 반응이었다.
영화관을 나서면서 나는 생각했다. 나는 어떤가. 내 욕망은 정말 나의 것인가. 아니면 나 역시 누군가의 각본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자유롭게 선택했다고 믿는 것들이 실은 사회가, 문화가, 시대가 나에게 심어놓은 것은 아닐까.
오대수가 마지막에 혀를 자르는 장면. 그것은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언어를 포기하는 것. 왜냐하면 언어는 이미 타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혀를 자른다고 진실이 사라지는가. 최면을 건다고 기억이 지워지는가.
영화는 거기서 끝나지만, 우리는 안다. 오대수는 평생 그 진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을.
2. 『밀양』(2007): 대타자의 배신과 결핍의 실존적 수긍
나는 이창동의 『밀양』을 보고 며칠간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신애는 아들을 잃는다. 납치되어 살해당한다. 그녀는 미쳐버릴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신을 만난다. 교회 사람들이 권하는 대로 예배에 나가고, 기도하고, 찬송을 부른다. 그리고 믿는다. 신이 이 고통을 이해해줄 거라고. 신의 뜻에 따라 살면 평화가 올 거라고.
신애는 살인자를 용서하겠다고 결심한다. 그것이 신의 뜻이니까. 그것이 자신을 치유하는 길이니까. 그녀는 면회를 신청하고 교도소로 간다. 하지만 그 살인자는 이미 평온했다. “저는 이미 신에게 용서받았어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 순간 신애의 세계가 무너진다. 그녀가 믿었던 대타자(신)는 그녀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신은 피해자인 그녀가 아니라 가해자인 살인자를 먼저 용서했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먼저 용서를 하냐고!”
신애의 절규를 보면서 나는 울었다. 그녀의 분노는 단순히 종교적 배신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론적 배신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고통이 ‘특별하기’를 바랐다. 아들을 잃은 엄마의 고통은 다른 어떤 고통보다 크고, 신성하고, 인정받아 마땅한 것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대타자는 그녀를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녀의 고통도, 살인자의 참회도, 모두 똑같이 취급했다. 신이라는 대타자는 주체의 구체적인 고통에 응답하지 않는다. 신은 자기만의 논리로 작동하는 거대한 기계일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신애는 헤어숍에서 스스로 머리를 자른다. 가위질은 서툴고, 머리는 엉망이 된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는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햇빛이 비친다.
그 햇빛은 하늘(신)에서 오는 게 아니라 창문(현실)을 통해 들어온다. 구원은 저 위에 있지 않다. 그것은 여기, 이 누추하고 비참한 현실 속에 있다. 신애는 비로소 깨닫는다. 대타자에게 구원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나는 영화관을 나오며 생각했다. 나 역시 평생 누군가에게 인정받기를 바랐다. 내 고통이 특별하다고, 내 노력이 가치 있다고 말해주기를. 하지만 세상은, 신은, 대타자는 내게 그런 특별함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신애처럼, 서툴게라도 스스로 머리를 자르며 살아가는 수밖에.
3. 『기생충』(2019): 수직적 공간에 새겨진 계급의 욕망
나는 봉준호의 『기생충』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 영화는 내가 평생 외면하려 했던 진실을 정면으로 들이댔다. 기택 가족이 박 사장 가족의 저택을 향해 보여주는 욕망. 그것은 단순히 돈에 대한 욕망이 아니다. 지라르가 말한 ‘모방 욕망’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박 사장 가족이 누리는 ‘상류층이라는 기표’다. 그 매너, 그 교양, 그 분위기.
기택 가족은 위조된 서류와 정교한 연기로 박 집안에 침투한다. 그들은 잠시나마 자신들이 그 공간의 주인인 양 착각한다. 반지하를 벗어나 언덕 위 저택에서 사는 기분을 맛본다.
하지만 이 환상은 ‘냄새’라는 실재에 의해 무너진다.
“선을 넘으면 안 되는데, 냄새가 선을 넘어요.”
박 사장이 기택의 냄새에 코를 막는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 냄새는 언어로 가릴 수 없다. 그것은 계급을 폭로하는 신체적 표식이다. 아무리 고급 옷을 입고, 고급 말투를 흉내 내도, 냄새는 진실을 말한다.
기택이 칼로 박 사장을 찌르는 그 순간, 나는 숨이 멎었다. 이것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다. 이것은 모방하던 대상을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뒤틀린 욕망의 폭발이다. 그리고 기택은 지하실로 숨어든다. 박 집 지하, 더 깊은 결핍의 구멍 속으로. 그는 영원히 거기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나는 영화관을 나오며 내 인생을 돌아봤다. 나도 기택처럼 살지 않았던가. 평생 누군가를 모방하며.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고, 저 위치에 올라가고 싶다고. 하지만 결국 ‘냄새’는 나를 배신했다. 나는 아무리 애써도 그들이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했나. 아니, 지금이라도 어떻게 살아야 하나.
4. 『헤어질 결심』(2022): 미결로 남으려는 욕망의 숭고함
최근, 나는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을 보고 며칠간 멍하니 지냈다. 이 영화는 앞선 영화들과 완전히 다른 욕망을 보여줬다.
해준은 불면증에 시달리는 형사다. 그의 삶은 붕괴 직전이다. 그때 서래를 만난다. 그녀는 남편 살해 용의자지만, 해준은 그녀에게 매혹된다. 해준의 욕망은 이중적이다. 서래를 단죄해야 하는 공적 의무와 그녀를 사랑하는 사적 감정. 그는 이 둘 사이에서 방황한다. 서래를 소유하고 싶지만, 소유하는 순간 그녀는 신비를 잃을 것이다.
서래는 이것을 안다. 그래서 그녀는 선택한다. 스스로 ‘미결 사건’이 되기로.
“나는 당신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어요.”
서래가 바다에 자신을 묻는 장면. 이것은 자살이 아니다. 이것은 욕망의 ‘영원한 유예’를 위한 기획이다. 주체가 대상을 완전히 소유하지 못할 때,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지속된다. 서래는 해준의 무의식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구멍으로 남는다.
이 영화를 보며 나는 깨달았다. 욕망은 충족을 거부할 때 가장 순수하다는 것을. 도달하지 않기로 선택할 때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 나는 많은 것을 얻었다. 하지만 얻는 순간, 그것들은 더 이상 욕망의 대상이 아니게 됐다. 오히려 끝내 얻지 못한 것들, 미완으로 남은 것들이 나를 살아 있게 한다.
서래의 선택은 어쩌면 가장 주체적인 욕망의 실천일지도 모른다.
5. 『어쩔 수가 없다』(2025): 시스템의 폭력과 생존 욕망의 괴물화
나는 박찬욱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를 극장에서 봤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옆자리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가고, 극장에 나 혼자 남았을 때도 나는 그냥 앉아 있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실직한 중년 남자 이야기다. 그는 재취업을 위해 면접을 본다. 하지만 번번이 떨어진다. 나이 때문에, 경력 공백 때문에, 이유는 많다. 이력서를 수백 통 넣어도 답이 없다. 가족은 점점 그를 무능력자 취급한다. 그 자신도 자신을 혐오하기 시작한다. 그때 그는 생각한다. 경쟁자를 없애면 되지 않을까.
처음엔 우연처럼 보인다. 충동적인 사고. 하지만 그는 그 자리를 얻는다. 가족이 기뻐한다. 아내가 웃는다. 오랜만에 집안 분위기가 밝아진다.
두 번째는 더 쉽다. 이번엔 계획적이다. 세 번째쯤 되면 거의 기계적이다. 그는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생각한다. ‘나는 할 수 있는 사람이야. 나는 살아남을 자격이 있어.’
“어쩔 수가 없잖아.”
주인공이 되뇌는 이 말. 처음엔 변명처럼 들렸다. 자기합리화. 비겁함을 감추기 위한 핑계.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점점 불편해졌다. 왜냐하면 이해가 됐으니까.
나도 그 시스템 속에서 살았다. 정년까지 버텨야 했고, 승진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누군가의 실패가 나의 기회가 되는 세계에서 살았다. 물론 나는 누군가를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그것뿐일까.
동료가 실수했을 때 나는 도와주지 않고 그 실수를 상사에게 보고하지 않았나. 경쟁자가 프로젝트에서 실패했을 때 나는 속으로 안도하지 않았나. 누군가의 자리가 비었을 때 나는 재빨리 그 자리를 노리지 않았나.
영화 속 주인공과 나 사이의 거리가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그는 물리적으로 제거했을 뿐이고, 나는 다른 방식으로 했을 뿐이다. 본질은 같다. 타인을 밟고 올라서는 것.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가장 끔찍했다. 주인공은 결국 들키지 않는다. 그는 원하던 자리를 얻고, 가족과 행복하게 저녁을 먹는다. 딸이 아빠한테 안긴다. 아내가 웃으며 말한다.
“당신이 최고야.”
아무도 모른다. 그가 무엇을 했는지. 그는 성공한 가장이 되었다. 이게 해피엔딩인가. 나는 멍하니 스크린을 바라봤다.
극장 문을 나서는데 거리가 달라 보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함께 엘리베이터를 탄 사람들이, 모두 각자의 ‘어쩔 수 없음’을 안고 사는 것처럼 보였다. 누가 괴물이고 누가 피해자인가. 아니, 우리는 모두 조금씩 괴물이면서 동시에 피해자가 아닐까.
집에 돌아와서도 며칠간 우울했다. 이 영화가 보여준 세계가 너무 낯익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을 비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를 이해한다면, 모든 폭력을 ‘어쩔 수가 없다’는 말로 정당화할 수 있게 되는 거 아닌가.
라캉이 말한 대타자, 이 경우엔 신자유주의 시스템은 우리에게 명령한다.
“살아남아라. 어떻게든.”
그 명령 앞에서 윤리는, 양심은, 인간성은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
나는 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이것만은 확실했다. 욕망이 윤리적 제동 장치를 잃었을 때, 우리는 너무 쉽게 괴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더 끔찍한 건, 그 괴물이 평범한 얼굴로 우리 옆에서 살아간다는 것. 아니, 어쩌면 그 괴물이 바로 나일 수도 있다는 것.
제4부: 욕망의 연금술 - 소멸에서 생성으로
작년 가을, 나는 십 년 넘게 손대지 못한 원고 파일을 열었다. 파일명은 “무제_최종_진짜최종_2015.docx”였다. 열어보니 겨우 삼십 페이지였다. 십 년 동안 삼십 페이지.
첫 문장을 읽었다.
“그는 비 오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나는 웃었다. 이게 뭐야. 이런 문장을 쓰려고 십 년을 붙들고 있었나. 하지만 계속 읽어 내려가니 이상했다. 문장들이 나쁘지 않았다. 어떤 부분은 지금의 내가 써도 이보다 낫게 쓸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왜 나는 이 원고를 완성하지 못했을까.
스크롤을 내리다 메모 하나를 발견했다. 2017년 3월에 내가 남긴 것이었다.
“이 장면 너무 진부함. 다시 써야 함.”
그 아래 2018년 메모.
“여전히 마음에 안 듦. 전체적으로 재구성 필요.”
2019년.
“이건 아닌 것 같다.”
나는 한참을 그 메모들을 들여다봤다. 십 년 동안 나는 이 원고를 고치지 않았다. 고칠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완벽하게 고치지 못할 바엔 차라리 안 건드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이 이야기가 완벽하기를 바랐다. 누구도 흠잡을 데 없는, 모든 문학상 심사위원이 감탄할, 그런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한 문장을 쓰면 열 번을 고쳤고, 고치고 나면 또 마음에 안 들어서 지웠다. 십 년 동안 나는 이 원고를 포기하지도, 완성하지도 못했다. 그냥 파일 속에 묻어두고 가끔씩 열어보며 한숨만 쉬었다. 하지만 작년 봄에는 달랐다.
그날 아침 나는 산책을 나갔다. 1월의 찬 공기가 얼굴을 스쳤고, 겨울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를 하늘로 뻗고 있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그저 평범한 아침이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문득 그 풍경을 쓰고 싶었다.
블로그를 열었다. 제목도 없이 그냥 떠오르는 대로 썼다. 찬 공기, 앙상한 나무, 하늘의 색깔. 한 시간 만에 끝냈고, 고치지도 않고 바로 올렸다. 조회수는 거의 없었다. 댓글도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만족스러웠다.
그 글은 완벽하지 않았다. 문장도 투박했고, 구성도 엉성했다. 하지만 나는 그 글을 쓰는 동안 즐거웠다. 십 년 동안 삼십 페이지 쓰며 느꼈던 고통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 블로그 글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살아 있었다. 그 글 속에는 그날 아침 내가 느낀 것, 생각한 것, 숨 쉰 것이 들어 있었다.
반면 십 년 동안 붙들고 있던 원고는 완벽을 향해 가다가 죽어버렸다.
그날 밤 나는 평생 결핍을 메우려고 글을 썼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내 안의 공허함을, 인정받지 못한 서러움을, 성취하지 못한 자존감을. 그 결핍을 완벽한 문장으로 채울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결핍은 채워지지 않았다. 아무리 문장을 고쳐도, 아무리 구성을 다듬어도, 쓰고 나면 또 허전했다.
결핍으로 시작한 욕망은 끝이 없다. 나는 그 끝없는 갈증에 지쳐갔다. 하지만 그 블로그 글을 쓸 때는 달랐다. 나는 뭔가를 메우려 한 게 아니었다. 그냥 내 안에 있던 것을 밖으로 꺼낸 것뿐이었다. 아침 공기의 차가움, 앙상한 나무의 고독함, 그것을 느끼는 나 자신. 그것들이 문장이 되어 흘러나왔다.
욕망에는 두 종류가 있다. 없는 것을 채우려는 욕망과, 있는 것을 펼치려는 욕망. 나는 지금까지 전자만 알았다. 하지만 후자가 있다는 것을, 그것이 훨씬 더 나를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실험을 시작했다. 한 달 동안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삼십 분 동안 글을 썼다. 무엇을 쓸지 미리 정하지 않았다. 그냥 그날 아침 떠오르는 것을 썼다. 어제 본 꿈, 창밖 풍경, 문득 떠오른 옛 기억.
중요한 건 규칙이었다. 쓰고 나서 고치지 않는다. 저장하지 않는다. 읽지도 않는다. 쓰고 나면 바로 파일을 닫고 지운다.
처음엔 이상했다. 지우는 게 아까웠다. 어떤 날은 꽤 괜찮은 문장이 나왔는데, 그걸 그냥 지운다는 게 아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웠다.
일주일쯤 지나니 이상한 자유가 찾아왔다. 누가 볼까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나는 평소라면 절대 쓰지 않았을 문장들을 썼다. 유치한 표현도 쓰고, 진부한 비유도 쓰고, 논리적이지 않은 문장도 썼다.
“오늘 아침 공기는 사과 같았다.”
이런 황당한 문장도 스스럼없이 썼다.
이주일쯤 지나니 뭔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글을 쓸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목소리들이 줄어들었다. ‘이 표현은 너무 유치해’, ‘이건 누가 봐도 이상해’, ‘이런 걸 누가 읽겠어’. 그런 목소리들이 점점 작아졌다.
한 달이 지나 실험을 끝냈을 때, 나는 달라져 있었다. 무엇이 달라졌는지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는 더 이상 완벽한 문장을 쓰고 싶지 않았다. 살아 있는 문장을 쓰고 싶었다.
그 ‘유치하고 진부하고 논리적이지 않은’ 문장들 속에 진짜 내 목소리가 있었다. 타자의 기준으로 걸러내기 전의, 날것의 나. 물론 그 날것의 목소리가 모두 좋은 것은 아니었다. 어떤 문장은 정말 형편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은 나였다. 누군가의 기준을 흉내 낸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다시 그 십 년 묵은 원고를 열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완벽을 포기하기로 했다. 엉성해도 좋다. 투박해도 좋다. 일단 끝을 내자.
첫날 나는 오 페이지를 썼다. 막혀 있던 부분을 그냥 건너뛰었다. 완벽하게 쓸 수 없으면 일단 대충이라도 써놓고 넘어갔다. 이틀째는 칠 페이지. 사흘째는 삼 페이지. 일주일 동안 나는 이십 페이지를 더 썼다. 십 년 동안 못 쓴 것을 일주일 만에 쓴 것이다. 그리고 이주일 뒤, 나는 마침표를 찍었다. 원고가 완성됐다.
파일을 닫고 나서 나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십 년 만이었다. 십 년 만에 무언가를 끝냈다. 완성된 원고는 형편없었다. 앞뒤가 안 맞는 부분도 많고, 설명이 부족한 부분도 많다. 어떤 장면은 여전히 진부하고, 어떤 문장은 투박하다. 하지만 적어도 끝이 있다.
그 끝을 본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그 원고가 마음에 안 들었다. 여전히 고치고 싶은 부분이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다음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다. 이 원고를 완벽하게 고치는 것보다,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더 하고 싶었다.
이건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하나를 완벽하게 끝내지 못하면 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 원고는 이 정도로 됐다.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고 싶다.
욕망이 바뀐 것이다. 완벽한 하나를 만들려는 욕망에서, 불완전하지만 살아 있는 것들을 계속 만들어내려는 욕망으로.
지난달 나는 그 원고를 한 공모전에 보냈다. 파일을 첨부하기 전에 한참을 망설였다. 이 원고는 완벽하지 않다. 고칠 부분이 너무 많다. 조금만 더 다듬으면 더 나아질 텐데. 하지만 나는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아마 떨어질 확률이 높다. 예심도 통과 못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이미 이 원고를 보내는 것 자체로 내가 원하던 것을 얻었으니까. 끝을 내는 법을. 그리고 세상에 내보내는 용기를.
예전 같았으면 결과 발표일을 손꼽아 기다렸을 것이다. 매일 메일함을 확인하고, 밤에 잠을 설치고, 떨어지면 원고를 다시 열어보며 자책했을 것이다. ‘역시 안 됐어. 좀 더 고칠 걸. 너무 급하게 보냈어.’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물론 당선되면 기쁠 것이다. 하지만 떨어져도 괜찮다. 왜냐하면 그 원고를 보내고 나서 나는 이미 다음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으니까.
결과를 기다리며 멈춰 있는 대신, 나는 계속 쓴다. 그것이 내가 배운 것이다. 욕망은 성취에 있지 않고 운동에 있다는 것. 멈추는 순간, 욕망은 죽는다.
어제 밤, 나는 새 원고를 시작했다. 제목도 정하지 않았고, 어떤 이야기인지도 아직 모른다. 그냥 첫 문장이 떠올라서 썼다.
“그녀는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오늘 아침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마음에 안 든다. 진부하다. 하지만 지우지 않았다. 일단 계속 써보기로 했다. 나중에 고치면 된다. 아니, 고치지 않아도 된다. 중요한 건 멈추지 않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나는 글을 쓸 때 누군가를 의식한다. 이 문장을 누가 읽으면 어떻게 생각할까. 이 표현은 너무 유치하지 않을까. 내 머릿속에는 보이지 않는 독자들이 여전히 가득하다. 문학평론가, 소설가, 편집자, 심사위원.
하지만 이제 그들의 목소리가 예전만큼 크지 않다. 나는 그들의 승인을 구하는 대신, 그들과 대화하려 한다. 그들의 욕망을 모방하는 대신, 내 욕망과 그들의 욕망 사이의 간극을 탐구하려 한다.
타자의 목소리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이미 언어라는 타자의 도구로 말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그 목소리들과의 거리를 조절할 수는 있다.
가장 어려운 것은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나는 평생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어 했다. 내가 느낀 것을 정확하게, 생각한 것을 정확하게.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내가 느낀 것과 내가 쓴 것 사이에는 항상 간극이 있다.
지난주 나는 옛 친구를 만났다. 오랜만이었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지난 이야기를 했다. 친구가 물었다.
“요즘 뭐 해?”
나는 대답했다.
“글 쓰고 있어.”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아직도? 넌 평생 글 쓴다고 했잖아. 그런데 책은 언제 나와?”
예전 같았으면 부끄러웠을 것이다. 평생 쓴다고 하면서 정작 세상에 내놓은 건 없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담담하게 대답했다.
“곧 나와. 그리고 또 쓸 거야.”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좋으면 됐지.”
집에 돌아와 그 대화를 떠올렸다. ‘네가 좋으면 됐지.’ 간단한 말이지만, 나는 평생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늘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해 썼다. 내가 좋아서 쓴 적이 있었나. 어쩌면 지금이 처음인지도 모른다.
요즘 나는 매일 아침 책상 앞에 앉는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는다. 마감도 없고, 기대하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도 나는 쓴다. 왜일까.
글쓰기는 무언가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방식이다. 문장을 쓰는 순간, 나는 내가 아직 느끼고, 생각하고, 욕망하는 존재임을 확인한다. 어제와 다른 문장을 쓸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어제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욕망은 나를 지치게 한다. 하지만 동시에 살아 있게 한다. 만약 욕망이 사라진다면, 나는 쓰기를 멈출 것이고, 쓰기를 멈추는 순간 나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어제 밤 나는 새 원고를 다섯 페이지 썼다. 오늘 아침 다시 읽어보니 마음에 안 든다. 고치고 싶다. 하지만 일단 계속 쓰기로 했다. 완벽하게 고치려다 십 년을 허비하느니, 불완전하지만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욕망은 끝나지 않는다. 하나가 끝나면 다른 것이 시작된다. 이 끝없는 연쇄가 나를 지치게도 하지만,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나는 이제 욕망은 도달할 곳이 아니라 가는 길 자체라는 것을 안다. 완벽한 문장은 없다. 완성된 나도 없다. 있는 것은 오직 이 흔들림과 떨림뿐이다. 그리고 이 흔들림이야말로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가장 명징한 증거다.
오늘 아침, 나는 책상 앞에 앉았다. 어제 쓴 원고를 열었다. 여섯 페이지째를 시작했다. 주인공은 지금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다. 어디로 가는지 나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쓰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창밖으로 2월의 아침 햇살이 들어온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 올린다. 그리고 쓴다. 나는 오늘도 닿을 수 없는 것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 손은 빗나가겠지만, 빗나가는 그 궤적이 곧 나다. 욕망은 나를 구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를 멈추지 않게 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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