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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에세이

고독의 궤도, 그 곁에 머무는 일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6. 1. 18.

 

 

고독의 궤도, 그 곁에 머무는 일

 

나는 오래전에 아래와 같은 글을 쓴 적이 있었다. 한 소설의 도입부인데, 쓰다가 너무 슬퍼져 계속 쓰지 못했고, 아마 죽을 때까지 쓰지 못할 것 같기도 하다.

 

“여자는 혼자 앉아 있었다. 여자 앞, 작은 찻상 위엔 마치 일부러 장식이라도 한 듯 식은 찻잔이 무렴하게 놓여있었다. 여자의 초점을 잃은 시선은 무엇을 보고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무엇인가 생각이란 것을 쫓는 것일까? 무거운 정적이 그녀를 세상과 단절시키고 있었다. 분명 여자는 마룻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내 눈에는 여자가 공중 부양이라도 한 듯 바닥으로부터 족히는 1미터 상공에 떠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뭐랄까? 여자의 초진공 상태는 물체를 지구의 중심 방향으로 끌어당기는 힘조차 무화시킨 것일까? 무엇이 여자로부터 지상에 발을 붙이고 살아야 할 당위성을 배제 시켰을까?

“그저 관성으로, 단지 살아있기 때문에 사는 걸까?”

“왜 죽지 않고 여태껏 살아 있을까?”

나는 여자를 대신해 묻고 또 물었다.

“태어났기 때문에, 그저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하마터면 여자를 대신해 그렇게 대답할 뻔했다.

“비가 올 것 같아. 이불을 걷어야 하지 않니?”

말짱한 하늘을 두고 나는 여자에게 말을 붙였다. 그래도 여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처음 나는 여자에게 호기심이 당겼고, 부러웠고, 아프다 말했을 땐, 뭔가 도와주고 싶었고, 늘 휘청거리는 그녀가 답답해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근래 내가 깨달은 한 가지 사실은 그냥 옆에 있어 주는 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고, 여자 또한 그것 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일까? 많은 재즈곡 중에 〈Solitude〉라는 곡을 좋아한다.

 

 

 

 

듀크 엘링턴이 1934년에 작곡한 이 곡은 단순한 즉흥에서 태어났지만, 이후 재즈 역사에서 가장 깊은 울림을 남긴 발라드로 자리 잡았다. 제목 그대로 ‘고독’을 주제로 하며, 느린 템포와 단순한 화성, 여백이 많은 선율은 청자가 스스로 감정을 채워 넣게 한다. 빌리 할러데이는 이 곡을 체념의 목소리로 불렀고,

 

 

 

 

 

 

존 콜트레인은 색소폰을 통해 고독을 영적 탐구와 초월의 길로 확장했다.

 

 





오늘날 사마라 조이는 이를 따뜻한 위로로 불러낸다.

https://youtu.be/nPv8yq88X24?list=RDnPv8yq88X24



이들의 음악이 그러하듯, 내가 목격한 여자의 고독 또한 단순한 슬픔을 넘어 인간 존재의 여러 층위를 관통한다.

먼저 알베르 카뮈의 시선으로 본다면, 여자가 처한 정적은 ‘세계의 침묵’을 인식한 상태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묻지만 세계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 부조리한 침묵 속에서 지상에 발을 붙일 당위성을 상실할 때, 고독은 비로소 태어난다. 여자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이유는, 응답 없는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해낸 카뮈적 소외의 물리적 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단절의 공간 안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고독을 단순한 고립이 아닌, 생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길어 올리는 ‘창조의 조건’으로 재정의한다. 그녀에게 고독은 자아가 외부의 소음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는 ‘자기만의 방’이며, 그 안에서만 비로소 영혼의 가장 미세한 울림인 ‘내면의 파동’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가 응시하던 허공은 결코 텅 비어 있는 무(無)의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울프가 묘사했던 것처럼, 일상의 파편들이 가라앉고 오직 존재의 핵심만이 떠오르는 밀도 높은 사유의 장이다.

영화 《The Hours》는 이 지점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니콜 키드먼이 분한 버지니아 울프가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 속에서 소설 《델러웨이 부인》의 첫 문장을 찾아내듯, 여자의 초점 잃은 시선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의 가장 섬세한 진동을 뒤쫓고 있는 중이다. 영화 속 1950년대의 주부 로라(줄리언 무어)와 현대의 클라리사(메릴 스트립) 역시 각자의 고독 속에서 삶을 길어 올리려 분투한다. 여자의 미동 없는 정적은 삶을 포기한 자의 무기력함이 아니라, 울프가 글을 쓰기 위해 스스로를 격리시켰던 것처럼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현실의 중력을 거부하는 치열한 ‘창조적 응축’의 과정이다. 그녀가 지상에서 1미터 높이에 떠 있었다면, 그것은 현실의 비속함에 매몰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진실에 가닿기 위해 밀어 올린 고독의 높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면의 웅성거림이 차마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할 때, 우리는 파울 첼란이 마주했던 ‘말해지지 않는 것들’의 무게를 느낀다. 첼란은 비극적인 고독 앞에서 언어를 극도로 절제하며 침묵에 가까운 시를 썼다. 식은 찻잔을 앞에 둔 여자의 미동 없는 자세는, 세상의 언어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거대한 고독의 밀도를 증명한다. 〈Solitude〉의 음표 사이 여백이 가장 깊은 울림을 주듯, 그녀의 침묵은 그 어떤 말보다도 육중한 실존의 메시지를 던진다.

결국 이 고독한 존재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말한 ‘곁에 있음’의 윤리뿐이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고독을 함부로 규정하거나 구원하려 들지 않고, 그저 그 고독의 무게에 응답하며 곁을 지키는 것이 인간의 숭고한 책임이라 보았다. 나는 그녀의 초점 잃은 시선 끝에서 문득 나의 깊은 그림자를 발견하고, 그 정적의 무게 속에서 내가 차마 내뱉지 못했던 말들을 읽어낸다. 말짱한 하늘에 이불을 걷으라고 건네는 나의 무렴한 말 한마디는, 그녀의 초진공 상태를 깨뜨리려는 시도가 아니라 그 부조리한 고독의 궤도 안에 나라는 존재를 나란히 놓는 연대의 행위이다. 그것은 타자인 여자에게서 나를 보고, 나라는 존재를 통해 여자를 읽어내는 침묵의 대화이다. 내가 그녀의 곁을 지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의 고독을 돌보는 일이며,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고독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이 세계의 침묵을 함께 견뎌낸다.

〈Solitude〉는 결국 나의 사유와 겹친다. 고독은 그림자이자 힘이며, 동시에 창조와 위로의 가능성이다. 세계가 대답하지 않아도, 우리는 살아내야 한다. 태어났기 때문에, 그저 태어났기 때문에.

나른한 휴일 오후, 나는 오랜만에 빌리 할러데이의 낮은 떨림과 존 콜트레인의 치열한 숨결, 그리고 사마라 조이의 다정한 목소리를 차례로 듣는다.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그들의 고독이 내 작업실의 공기를 채울 때, 뺨을 타고 흐르는 몇 줄기 눈물로 비로소 나의 의식을 가다듬으며 다시금 깨닫는다. 내가 여자의 곁에 머물기로 한 것처럼, 음악을 듣고 글을 쓰는 이 행위는 타자의 고독을 내 안으로 정중히 모셔 오는 일이고 비록 세계가 침묵할지라도, 글을 쓰는 손끝에서 나와 여자, 그리고 세계가 비로소 연결됨을 느낀다.
우리는 이토록 아름다운 고독의 선율을 함께 나누어 가짐으로써, 나 자신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모든 이가 오늘을 기꺼이 살아내기를 바라며……


#고독 #Solitude #재즈 #에세이 #버지니아울프 #알베르카뮈 #에마뉘엘레비나스 #파울첼란 #TheHours #존콜트레인 #빌리할러데이 #사마라조이 #침묵 #연대 #창조적응축 #lettersfromatrave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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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마라 조이는 이를 따뜻한 위로로 불러낸다. 이들의 음악이 그러하듯, 내가 목격한 여자의 고독 또한 단순한 슬픔을 넘어 인간 존재의 여러 층위를 관통한다.

 

먼저 알베르 카뮈의 시선으로 본다면, 여자가 처한 정적은 ‘세계의 침묵’을 인식한 상태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묻지만 세계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 부조리한 침묵 속에서 지상에 발을 붙일 당위성을 상실할 때, 고독은 비로소 태어난다. 여자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이유는, 응답 없는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해낸 카뮈적 소외의 물리적 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단절의 공간 안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고독을 단순한 고립이 아닌, 생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길어 올리는 ‘창조의 조건’으로 재정의한다. 그녀에게 고독은 자아가 외부의 소음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는 ‘자기만의 방’이며, 그 안에서만 비로소 영혼의 가장 미세한 울림인 ‘내면의 파동’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가 응시하던 허공은 결코 텅 비어 있는 무(無)의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울프가 묘사했던 것처럼, 일상의 파편들이 가라앉고 오직 존재의 핵심만이 떠오르는 밀도 높은 사유의 장이다.

 

영화 《The Hours》는 이 지점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니콜 키드먼이 분한 버지니아 울프가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 속에서 소설 《델러웨이 부인》의 첫 문장을 찾아내듯, 여자의 초점 잃은 시선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의 가장 섬세한 진동을 뒤쫓고 있는 중이다. 영화 속 1950년대의 주부 로라(줄리언 무어)와 현대의 클라리사(메릴 스트립) 역시 각자의 고독 속에서 삶을 길어 올리려 분투한다. 여자의 미동 없는 정적은 삶을 포기한 자의 무기력함이 아니라, 울프가 글을 쓰기 위해 스스로를 격리시켰던 것처럼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현실의 중력을 거부하는 치열한 ‘창조적 응축’의 과정이다. 그녀가 지상에서 1미터 높이에 떠 있었다면, 그것은 현실의 비속함에 매몰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진실에 가닿기 위해 밀어 올린 고독의 높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면의 웅성거림이 차마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할 때, 우리는 파울 첼란이 마주했던 ‘말해지지 않는 것들’의 무게를 느낀다. 첼란은 비극적인 고독 앞에서 언어를 극도로 절제하며 침묵에 가까운 시를 썼다. 식은 찻잔을 앞에 둔 여자의 미동 없는 자세는, 세상의 언어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거대한 고독의 밀도를 증명한다. 〈Solitude〉의 음표 사이 여백이 가장 깊은 울림을 주듯, 그녀의 침묵은 그 어떤 말보다도 육중한 실존의 메시지를 던진다.

 

결국 이 고독한 존재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말한 ‘곁에 있음’의 윤리뿐이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고독을 함부로 규정하거나 구원하려 들지 않고, 그저 그 고독의 무게에 응답하며 곁을 지키는 것이 인간의 숭고한 책임이라 보았다. 나는 그녀의 초점 잃은 시선 끝에서 문득 나의 깊은 그림자를 발견하고, 그 정적의 무게 속에서 내가 차마 내뱉지 못했던 말들을 읽어낸다. 말짱한 하늘에 이불을 걷으라고 건네는 나의 무렴한 말 한마디는, 그녀의 초진공 상태를 깨뜨리려는 시도가 아니라 그 부조리한 고독의 궤도 안에 나라는 존재를 나란히 놓는 연대의 행위이다. 그것은 타자인 여자에게서 나를 보고, 나라는 존재를 통해 여자를 읽어내는 침묵의 대화이다. 내가 그녀의 곁을 지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의 고독을 돌보는 일이며,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고독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이 세계의 침묵을 함께 견뎌낸다.

 

〈Solitude〉는 결국 나의 사유와 겹친다. 고독은 그림자이자 힘이며, 동시에 창조와 위로의 가능성이다. 세계가 대답하지 않아도, 우리는 살아내야 한다. 태어났기 때문에, 그저 태어났기 때문에.

 

나른한 휴일 오후, 나는 오랜만에 빌리 할러데이의 낮은 떨림과 존 콜트레인의 치열한 숨결, 그리고 사마라 조이의 다정한 목소리를 차례로 듣는다.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그들의 고독이 내 작업실의 공기를 채울 때, 뺨을 타고 흐르는 몇 줄기 눈물로 비로소 나의 의식을 가다듬으며 다시금 깨닫는다. 내가 여자의 곁에 머물기로 한 것처럼, 음악을 듣고 글을 쓰는 이 행위는 타자의 고독을 내 안으로 정중히 모셔 오는 일이고 비록 세계가 침묵할지라도, 글을 쓰는 손끝에서 나와 여자, 그리고 세계가 비로소 연결됨을 느낀다.

우리는 이토록 아름다운 고독의 선율을 함께 나누어 가짐으로써, 나 자신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모든 이가 오늘을 기꺼이 살아내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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