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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에세이

창작자의 지독한 사랑법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6. 1. 14.

 

 

 

 

<창작자의 지독한 사랑법>

 

요즘 나의 일과는 지독할 정도로 단조롭다. 1월의 한복판, 계절은 가장 깊은 침묵 속에 잠겨 있다. 골목의 그림자는 날카롭게 길어지고, 차가운 공기는 창문 틈을 파고들어 작업실의 온도를 낮춘다.

 

축제 같은 연말의 소란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 나는 오직 글을 쓰고 문장을 매만지는 일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서너 평 남짓한 작업실 안에서 모니터의 푸른 광선에 의지해 자판을 두드리고 있으면, 가끔은 내가 이 세상의 시간 바깥으로 밀려난 유령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고립된 생활이 길어질수록, 내 안의 감각들은 도리어 날카롭게 깨어나 낯선 문장들을 길어 올리곤 한다.

 

창밖의 풍경이 무채색으로 변해가는 이 고요한 계절에,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읽은 한 구절이 유독 마음을 건드렸다. “글 쓰는 사람은 ‘나는 짜장면이 좋아’라고 말하기보다 ‘짜장면의 3대 요소는 단무지와 오이채와 바로 너지. 너랑 먹는 짜장면이 최고의 짜장면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이 글을 읽으며 나는 텅 빈 작업실 안에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창작자의 본질을 이토록 유쾌하면서도 서늘하게 꿰뚫는 통찰이 또 있을까.

 

글 쓰는 이에게 대상은 단순히 소비되거나 즐거움을 주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내 문장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자, 멈춰있던 펜 끝을 밀어 올리는 동력이다. 대상을 향한 찬사는 결국 나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려는 처절한 시도이기도 한 셈이다. 그 웃음의 여운이 가시기 전, 나는 누군가에게 짧은 문장 하나를 보냈다. 그 문장은 페이스북의 짜장면 농담보다 훨씬 위태롭고 처절했으며, 어쩌면 나 자신을 가장 날것으로 드러낸 고백이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소녀 같은 감성으로. 내 심장, 혹은 신장을 떼어내 줄 수 있다면 기꺼이. 웃기죠? 이건 이성적인 고백이라고 치부하지 마시길. 전 이런 제 마음 때문에 제가 도취되어 내 문장들이 술술 나온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에요. 웃고 넘겨주세요.”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난 뒤, 나는 한참 동안 멍하니 액정을 바라보았다. 혹시 이 마음이 사랑 고백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것은 흔히 말하는 연애의 감정이었을까, 아니면 한낱 창작자의 지독한 자기만족이었을까.

 

보통의 연인들이 ‘사랑해’라는 닳고 닳은 단어로 마음의 크기를 잴 때, 글 쓰는 사람은 자신의 가장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일부를 도려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심장’과 ‘신장’이라는 명칭들은 낭만적인 환상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생존의 무게를 가져다 놓는다. 내 생명을 지탱하는 근원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다는 선언은, 사실상 “당신이 내 삶의 주권을 가졌다”는 절대적인 항복 선언과 다름없다.

 

비록 그렇게 쏟아낸 글들이 대단한 문학적 성취에는 한참을 미달할지라도 상관없다. 내게 중요한 것은 문장이 매끄러운 예술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라는 존재를 통과하며 비로소 내 몸 밖으로 흘러나온 생생한 혈흔이라는 사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고백의 진정한 백미는 그다음 구절에 숨어 있다. 상대에게 내 장기를 떼어줄 수 있다는 결연한 의지 뒤에, 나는 “그 마음 때문에 내 문장들이 술술 나온다”는 고백을 덧붙였다.

 

창작자에게 ‘글이 써지는 상태’, 즉 문장이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순간은 신이 허락한 가장 황홀한 축복이다. 누군가를 향한 연심이 나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쓰게 만들고, 나를 도취시킨다는 사실. 그것은 상대를 단순히 연애의 대상이 아닌, 내 삶의 ‘뮤즈(Muse)’로 공식 석상에 초대하는 일이다.

 

“웃고 넘겨달라”는 당부는 어쩌면 그 거대한 고백의 무게에 상대가 뒷걸음질 치지 않기를 바라는 우아한 방어기제였을지 모른다. 혹은 내 마음이 거절당하더라도, 당신으로 인해 태어난 내 문장들만은 오롯이 내 곁에 남아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창작자만의 슬픈 위안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 문장은 지독한 사랑 고백이었다. 다만 그 사랑의 방식이 상대를 내 곁에 두려는 ‘소유’가 아니라, 상대를 통해 나를 꽃피우려는 ‘발현’이었을 뿐이다. “나는 당신이 필요해요”라는 말 대신 “당신 덕분에 나는 비로소 쓸 수 있는 존재가 되었어요”라고 말하는 것.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을 텍스트로 치환하여 바치는 행위야말로, 글 쓰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이고도 진실한 사랑의 형태다.

 

오늘도 나는 1월의 한기가 서린 작업실의 창을 닫고 다시 자판 앞에 앉는다. 내 문장을 술술 나오게 만드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향해 내 장기를 떼어주는 고통보다 문장이 멈추는 적막을 더 두려워하면서. 이 도취된 마음이야말로 내가 세상을 향해 내어놓을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나’의 조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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