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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2025년 1학기 문학연구방법론 요약하기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5. 4. 4.

 

 

말해지지 않은 것의 자리에 말을 놓기 위하여

문학비평, AI 시대, 그리고 나의 감각

오늘은 202544, 대한민국 역사에 또 하나의 격렬한 문장이 쓰인 날이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인용되었고, 나는 그 순간 책상 앞에서 숨을 죽인 채 역사의 진실이 마침내 말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 침묵과 분노, 좌절과 희망이 교차하는 나날 속에서, 나는 오직 하나의 진실이 외면당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마침내, 탄핵 인용이라는 짧고도 단단한 선언이 화면 너머로 들려왔을 때, 나는 가슴이 터질 듯한 흥분과 감격 속에서 기쁨을 어쩌지 못했다. 손끝이 떨렸고, 마음 한복판이 환하게 무너졌다. 이것은 단지 정치적 사건이 아니었다. 이것은 말해지지 않던 것들이 마침내 말해지기 시작한 순간, 침묵의 껍질이 깨지는 첫 장면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 글을 쓴다. 문학 비평에 대한 에세이를 쓰는 오늘, 나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그리고 언어의 정치에 민감한 사람으로서, 문학이야말로 이 세계의 말해지지 않던 진실에 가장 가까이 가닿는 감각의 예술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느낀다.

문학은 말하는 예술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말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한 기록이며, 침묵의 가장자리에서 서성이는 언어의 흔적이다. 20251학기 문학연구방법론 수업을 따라가며 우리가 만난 수많은 이론가들인 루카치, 바르트, 푸코, 아도르노, 벤야민, 크리스테바, 스피박은 문학을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언어의 외곽을 더듬으며, 그 언저리에 누락되고 억압된 목소리를 감각하려 했다.

루카치는 문학을 총체성이 붕괴된 시대의 반영으로 보았고,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을 선언함으로써 텍스트 내부에서 의미가 생성된다고 주장했다. 푸코는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는 말로, 주체의 해체와 권력-지식의 얽힘 속에서 의미가 구성된다는 구조적 조건을 드러냈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예술이 가져야 할 윤리를 묻고, 벤야민은 진보라는 이름으로 삭제된 역사의 패배자들을 소환하는 메시아적 시간의 문학비평을 제안했다. 스피박과 크리스테바, 그리고 페미니즘 이론가들은 말할 수 없었던 존재들이 왜 말해질 수 없었는지를 비판적으로 추적했다.

이 모든 사유의 흐름은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문학비평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향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 그리고 이 질문은 이제 AI 시대라는 새로운 조건 위에서 다시 물어져야 한다.

AI을 만들 수 있게 된 시대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문학을 읽고 쓰고, 창작할 것인가? AI는 구조를 학습하고, 문법을 재조합하며, 인간의 말투를 흉내낸다. 문장을 생성하고, 이야기를 전개하며, 감정을 시뮬레이션한다. 그러나 AI는 말해지지 않은 것을 감각하지 못한다. AI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이 기억하는 것은 언제나 기록된 것들이며, 그 기록이 배제하고 누락한 자리, 바로 문학이 감각해온 그 어둠의 입구AI는 도달할 수 없다.

문학비평은 언제나 말해지지 않은 것의 구조를 읽는 기술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기술을 훈련받는 사람으로서, AI가 쓸 수 없는 글, 멈칫함과 흔들림, 주저함과 윤리적 망설임이 담긴 글을 쓰고자 한다. 그와 동시에, 나는 소설을 창작한다. 이야기를 짓는다는 것은 하나의 인물을 만들고, 그 인물이 살아 숨 쉬는 세계를 상상하며, 말해지지 않은 감정과 기억, 그늘진 목소리를 서사의 감각 안으로 불러들이는 일이다.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말보다 먼저 다가오는 감정, 언어로 옮겨지지 못한 얼굴들, 그리고 기록되지 못한 상실을 허구라는 형식 속에서 다시 살아나게 하기 위해서다. 나에게 문학 창작은 진실을 말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진실이 감지되었으나 도달되지 못한 지점에 머무는 행위다.

AI는 전개하고, 요약하며, 정리할 수 있지만, 기억의 불확실함, 타자의 고통 앞에서의 침묵, 애매하고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떨림을 글로 옮기지는 못한다. 그건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감각하고, 의심하고, 고통을 가만히 응시할 수 있는 존재. 나는 문학비평가로서, 그리고 창작자로서 그 능력을 끝까지 잃지 않겠다는 결심을 품는다.

이 시대의 문학비평은 의미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어떤 말들이 사라졌는지, 어떤 말이 허락되지 않았는지를 복기하는 윤리적 행위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균열을 따라가고, 상처의 언어를 포착하며, 침묵 속에서 진동하는 목소리를 듣기 위한 감각 훈련이다.

AI는 나보다 정확하게 문장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나만의 느림과 주저함으로 쓸 것이다. 의심하고 되묻고, 타인의 고통 앞에서 함부로 결론짓지 않는 글을 쓸 것이다. 그것이 내가 문학을 읽고 쓰며, AI 시대를 살아가는 비평가이자 소설가로서의 나의 자리다.

필요한 것은 새로운 분석 도구가 아니라, 사라진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느린 감각이다. 그 감각이야말로, 기술이 도달할 수 없는 문학의 마지막 윤리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창밖엔 봄이 오고 있다. 가지 끝마다 맺힌 벚꽃의 꽃망울이 햇빛 속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고, 바람은 아직 차가운 듯하지만 그 속엔 곧 터질 기색을 감춘 따스함이 섞여 있다. 마치 팝콘처럼, 어느 순간 문득 피어날 그 작은 폭발을 기다리며 나무들은 침묵 속에 서 있다. 모든 계절이 한 번도 같은 방식으로 오지 않듯, 문학도 언제나 처음인 것처럼 다시 다가온다. 그 기다림의 감각, 그 미세한 진동을 받아들이는 마음, 바로 그것이 내가 문학을 읽고 쓰는 이유이며, 그것은 언제나 계절처럼 말보다 먼저 마음에 스며든다.

 

 

 

1 : 문학 연구방법론/문학이론/문학비평이란 무엇인가

문학 연구방법론(Literary Research Methodology)

1) 개념

문학 연구방법론은 문학을 연구할 때 사용하는 체계적이고 학문적인 접근 방식을 말한다. 이는 문학 작품을 분석하고 해석하기 위한 방법론적 도구와 절차를 제공하며, 문학이론과 비평을 포함한 광의의 실천 틀로 볼 수 있다.

2) 특징

연구 주제 설정, 자료 수집, 이론적 틀 적용, 해석의 단계 등을 포함함. 역사주의, 비교문학, 장르 연구, 서사학, 정신분석, 문화연구 등 다양한 방법론이 존재. 논문, 학술적 글쓰기, 분석적 읽기 등 연구의 형식과 구조에도 깊게 관련됨

3) 목적

문학 텍스트를 객관화된 방법으로 다루되, 해석의 다층성과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틀 제공

2. 문학이론(Literary Theory)

1) 개념

문학이론은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은 어떤 구조와 기능을 갖는가, 문학을 통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해 철학적·사유적으로 접근하는 해석의 틀이다. 이는 문학 텍스트를 바라보는 인식론적 전제이자,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개념적 언어를 제공한다.

2) 주요 이론 유형별 설명

형식주의(Formalism) / 구조주의(Structuralism)

이 이론들은 문학 텍스트 내부의 언어적 구조와 장치에 주목하며, 의미는 작가나 독자의 외부 요소가 아니라 텍스트 자체의 형식과 구조적 관계 안에서 생성된다고 본다.

형식주의(러시아):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 반복, 서사구조 등 문학성의 조건 분석

구조주의(서구): 언어학(소쉬르), 인류학(레비스트로스) 등 인접 학문의 구조 개념을 차용하여,

문학 텍스트를 하나의 언어 체계로 분석

문학은 내용보다 형식의 작동 방식이 중요하며, 의미는 텍스트 내부의 관계망에서 도출됨.

탈구조주의(Deconstruction)

탈구조주의는 구조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해, 모든 의미와 중심은 결국 불확정성과 모순 위에 놓여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중심 개념: 차연(différance), 이중성, 텍스트의 무한한 미끄러짐(slippage)

대표 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텍스트는 하나의 의미로 환원될 수 없으며,

모든 해석은 다른 해석에 의해 무한히 흔들릴 수 있는 불안정한 구조임을 보여준다. 해체의 목표는 의미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절대화된 중심의 권위를 해체하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여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Marxist Literary Theory)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은 문학을 사회적 생산물로 보며, 계급투쟁, 이데올로기, 물질적 조건 등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문학을 분석한다. 문학은 자본주의 질서의 반영 혹은 그에 대한 저항의 산물로 작가와 독자는 특정한 사회적 위치에 있으며, 문학작품은 그 사회 구조를 드러내거나 재생산함 문학을 통해 계급 구조와 이데올로기의 작동 방식을 비판적으로 조명함.

페미니즘 문학이론(Feminist Literary Theory)

페미니즘 문학이론은 문학 텍스트 속에서 성별 권력 관계, 젠더의 재현 방식, 여성의 위치를 분석한다. 여성은 어떻게 서사 속에서 주체/타자, 말하는 자/침묵하는 자로 배치되는가? 여성 작가들의 글쓰기와 경험은 어떻게 기존의 문학 규범을 교란하거나 전복하는가? 문학을 통해 가부장적 사회 구조를 비판하고, 여성의 목소리와 시선을 복원하는 작업에 주목한다.

대표 이론가: 줄리아 크리스테바, 엘레인 쇼월터, 가야트리 스피박 등

포스트식민주의(Postcolonial Theory)

포스트식민주의는 식민주의의 유산과 권력 구조가 문학 속에서 어떻게 재현되고 재생산되는지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중심 주제: 타자화, 제국 담론, 중심/주변의 이데올로기, 문화적 혼종(hybridity) 문학은 지배적 제국 담론을 해체하거나 재서술하는 장으로 기능함 식민지 경험을 가진 작가들의 텍스트를 통해, 언어, 주체성, 역사서술의 권력 구조를 드러낸다.

대표 이론가: 에드워드 사이드, 호미 바바, 가야트리 스피박 등

정신분석 비평(Psychoanalytic Criticism)

프로이트, 라캉 등의 정신분석 이론을 바탕으로, 문학 텍스트를 무의식의 표현, 욕망의 구조, 억압의 흔적으로 읽는다. 인물의 행위와 갈등, 상징은 종종 무의식적 충동과 억압의 산물로 해석됨. 작가의 무의식뿐 아니라, 독자의 욕망 구조 역시 텍스트 해석의 주요 단서가 됨 문학은 자기 자신도 모르는 진실을 언어로 돌출시키는 공간이다.

현상학적 문학이론 / 미학 이론

문학작품을 경험과 인식의 장으로 보고, 독자의 의식 속에서 텍스트가 어떻게 실현되는가를 중심으로 해석한다. 작품은 완결된 실체가 아니라, 독자의 수용 행위에서 의미가 완성됨. “읽힌 텍스트보다 읽히는 과정에 주목 문학은 인간 경험의 총체로서, 지각, 감정, 의식의 구조를 탐구하는 영역으로 확장됨.

대표 이론가: 로만 잉가르덴, 볼프강 이저, 한스 로버트 야우스

3) 요약

이론 유형 중심 개념 주요 관심사

형식주의/구조주의 텍스트 내부 구조 분석 서사 구조, 문학성, 텍스트 자율성

탈구조주의 의미의 해체와 불확정성 차연, 중심 없음, 해석의 다층성

마르크스주의 계급, 생산양식, 이데올로기/문학의 사회적 조건, 이데올로기 비판

페미니즘 젠더 권력, 여성 주체성 가부장제 해체, 여성적 글쓰기

포스트식민주의 제국주의 담론 비판, 혼종성/중심-주변의 권력 관계, 언어의 저항

정신분석이론 무의식, 억압, 욕망 상징 해석, 억압의 흔적, 정체성 갈등

현상학/미학 독자의 수용과 체험 독서 행위, 지각과 감정, 의미 발생 과정

3. 문학비평(Literary Criticism)이란 무엇인가?

1) 개념

정의: 작품과 사유가 만나는 해석의 실천. 문학비평은 특정한 문학작품을 읽고, 해석하고, 평가하는 실천 행위를 말한다. 이는 단순히 독후감을 쓰거나 줄거리를 정리하는 것을 넘어, 작품 속 언어, 형식, 주제, 사유, 감각의 층위들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그 의미를 확장, 조명, 혹은 전복하는 행위로 간주된다. 문학비평은 이론을 실제 작품에 적용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때때로 이론을 변형하거나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창조적 작업이기도 하다.

2) 문학비평의 특징

(1) 해석과 평가의 복합성

비평은 작품을 단지 설명하거나 요약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다층성과 잠재성에 접근하여 새로운 의미의 지평을 열어주는 작업이다. 이 과정에서 비평가는 작품의 내적 논리뿐 아니라, 윤리적·정치적 맥락, 그리고 독자 자신의 감각적 반응까지 모두 고려할 수 있다.

(2) 창작과 이론 사이의 경계에 위치

문학비평은 순수한 학술논문도, 순수한 창작도 아니다. 그 중간지대에서 이론의 언어와 문학적 감성, 분석과 상상력을 동시에 작동시키며, 때로는 그것이 하나의 문학적 텍스트로 독립하기도 한다.

(3) 비평가의 목소리가 드러나는 글쓰기

문학비평은 단순한 객관적 보고서가 아니라, 비평가의 미학, 세계관, 윤리의식, 언어감각이 담긴 텍스트이다. 좋은 비평은 특정 작품을 말하는 동시에, 그 비평가만의 문학과 인간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3) 문학비평의 형태

문학비평은 다양한 형식으로 존재하며, 그 스펙트럼은 다음과 같다:

(1) 서평(Review)

신문, 잡지, 웹매체 등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비평의 일상적 형식 줄거리 요약 + 간단한 평가로 구성되며, 독자에게 작품 선택의 실마리 제공. 최근에는 비평적 리뷰 형태로 보다 깊은 해석과 시대적 맥락을 함께 다루는 경우 증가

(2) 정통 문학비평 / 평론

문학잡지, 학술지 등에 발표되는 심화된 분석과 해석 중심의 비평. 이론과 작품을 접목하고, 작가론·장르론·현대문학사의 흐름 안에서 위치를 탐색함. 대표적 비평가의 평론은 하나의 미학적 선언이자 시대의 감수성을 반영하는 담론으로 읽힌다

(3) 비평적 에세이 (Critical Essay)

보다 자유로운 형식의 글쓰기. 이론과 일상의 감각, 정서, 시적 문장이 혼합된 비평 장르. 특히 문학의 언어로 문학을 읽는 방식, 즉 문학으로서의 비평을 시도함. 감성적이며 철학적인 비평의 양식으로, 창작자-비평자의 경계를 넘나듦. 최근 여성주의 비평, 생태비평, 젠더에세이 등 다양한 확장적 형태로 주목받음

4) 서사비평 / 문화비평

문학 작품을 문학 외부의 현실과 연결지어 해석. 특정 시대의 감각, 사회적 이슈, 문화적 담론과 텍스트가 어떤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지를 분석함. 문학을 문화현상의 일부로 간주하여, 보다 넓은 담론장 속에서 해석하는 경향

5) 문학비평의 기능과 의의

기능 설명

해석적 기능 텍스트의 다층적 의미 구조를 분석하여 새롭게 조명함

평가적 기능 문학적 가치, 윤리적 태도, 미학적 완성도에 대한 비판과 판단 제시

중개자적 기능 작가와 독자, 텍스트와 현실 사이를 연결하며, 작품의 사회적 맥락을 설명함

창조적 기능 기존의 이론을 변형하고, 새로운 독해 방식을 창출함

윤리적·정치적 기능/문학이 제기하는 윤리적 질문, 사회적 침묵에 대한 응답을 실천함

6) 좋은 문학비평이란?

좋은 문학비평은 비평가 자신의 해석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작품의 잠재된 의미를 섬세하게 포착하고, 감각과 이론, 시대와 언어, 텍스트와 삶을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문학을 다시 말하는 작업인 동시에, 말해지지 않은 것의 자리에 말을 놓는 행위, 즉 하나의 책임 있는 해석 행위이자 윤리적 실천이다.

 

문학연구방법론/문학이론의 두 시원

문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즉 문학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하고 연구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문학 연구의 오랜 과제였다. 이 질문에 대한 사유는 시대적, 이론적 맥락에 따라 서로 다른 경로로 전개되었으며, 그 결과 문학연구방법론과 문학이론은 대체로 두 개의 시원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하나는 텍스트의 내부로 침잠하여 문학의 자율성과 형식성을 탐구하는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텍스트의 외부, 즉 역사와 사회, 이데올로기와 권력의 장으로 시선을 돌려 문학의 현실적 맥락을 분석하려는 경향이다.

전자는 20세기 초 러시아 형식주의를 기점으로 본격화되었다. 이들은 문학을 일상 언어와 구별되는 독자적 언어 체계로 간주하며, 문학성(literariness)의 근거를 언어의 형식적 장치에서 찾고자 했다. 문학 텍스트는 하나의 자율적 구조이며, 그 안에는 반복, 리듬, 시점, 구성과 같은 형식적 규칙이 작동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작가의 의도나 독자의 감정이 아니라, 텍스트 내부에 내재한 규칙성과 낯설게 하기(ostranenie) 같은 문학적 장치의 작동 방식이다. 이후 프랑스 구조주의는 이러한 형식주의의 계보를 잇고 확장시켜, 문학을 언어학적 구조 속에서 해석 가능한 기호 체계로 분석하였다.

반면, 후자의 경향은 문학을 언어 자체의 운동으로 보지 않고, 그것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역사적·사회적 조건을 강조한다. 마르크스주의 비평은 문학을 특정한 계급 구조와 이데올로기의 산물로 이해하고, 계급투쟁과 생산양식, 권력의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문학을 분석한다. 또한 신역사주의, 페미니즘, 포스트식민주의, 퀴어이론 등은 텍스트를 권력과 담론의 장으로 보며, 문학이 어떻게 타자를 재현하고 주변화하는지를 비판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관점은 문학을 더 이상 자율적인 예술로 보지 않고, 사회적 담론과 권력구조의 일부로 파악하며, 문학비평을 곧 현실비평의 일환으로 확장한다.

이처럼 문학연구의 두 시원은 각각 텍스트 내부로의 침잠텍스트 외부로의 개방이라는 상반된 방향성을 지녔으나, 양자는 대립하기보다 서로 보완적이라 할 수 있다. 문학의 언어적 형식은 그 자체로 미학적 질서를 드러내면서도, 그 질서가 어떤 이데올로기적 기원과 감각을 전제하고 있는지를 묻는 비평은 문학을 보다 총체적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실제로 최근의 문학 연구는 이러한 이분법을 넘어서려는 경향을 보인다. 담론분석, 감각의 정치학, 감정의 윤리학, 매체 간 전이와 상호텍스트성 등의 개념은 텍스트 내부의 작동 방식과 외부의 맥락을 동시에 사유할 수 있는 통합적 읽기를 지향한다.

따라서 문학연구방법론과 문학이론은 두 시원형식의 자율성과 역사적 맥락성을 긴장 속에서 마주하게 하며, 현대 문학연구는 이 둘의 조율을 통해 텍스트와 세계의 관계를 다층적으로 재구성해가고 있다.

2. 신의 시대와 작가의 죽음

텍스트 권위의 변천: 작가 독자

문학과 언어에 대한 인식은 시대에 따라 그 중심 주체를 달리해왔다. 고전 시대와 중세의 문학관에서 텍스트는 인간의 창조물이기 이전에 신의 계시, 진리의 반영, 도덕적 교훈의 수단이었다. 이른바 신의 시대에서 문학은 신성한 질서의 일부였으며, 텍스트는 초월적 의미의 파생물로 간주되었다. 작가는 신의 의지를 받아 적는 필사자(scribe) 혹은 진리를 서술하는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했을 뿐, 고유한 개성이나 내면의 표현자와 같은 자리는 부여받지 않았다.

그러나 근대로 접어들면서 계몽주의와 인문주의의 영향 아래 자율적 개인, **작가(author)**의 등장이 본격화된다. 텍스트는 이제 작가의 내면, 정신, 의식, 천재성의 표현으로 간주되며, 문학은 자기표현의 예술로 정의되기 시작한다. 특히 낭만주의는 작가를 고유한 상상력과 창조성을 지닌 천재적 존재로 신격화했고, 이러한 작가 중심주의는 19세기 실증주의적 문학비평, 심리주의 비평 등에서 정당화되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사유의 등장은 이러한 작가 중심적 패러다임을 전복한다. 가장 결정적인 전환은 롤랑 바르트의 선언적 글쓰기, 저자의 죽음(La mort de l’auteur)(1967)에 나타난다. 바르트는 문학 텍스트가 더 이상 작가의 의도나 정체성을 해석하는 대상이 아니라,

수많은 기호와 담론, 문화 코드가 교차하는 다성적 장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저자는 더 이상 의미의 기원이 아니며, 진정한 텍스트는 독자의 참여를 통해 생산되는 것이다. 이때 바르트는 작가(author)의 자리를 **‘필사자(scriptor)’**로 대체하자고 제안한다. 필사자는 창조자가 아니라, 언어와 문화 속에서 떠도는 말들을 조직하는 존재이며, 그 행위는 창조가 아닌 배열이다. 이러한 전환은 작가의 죽음이 독자의 탄생을 가능케 하며, 텍스트를 더 이상 권위적 진리의 전달체가 아니라 해석의 유희, 의미의 개방성, 윤리적 상호작용의 공간으로 재규정한다.

이와 같은 흐름은 문학이 더 이상 중심적 자아에 의해 완결되는 세계가 아니라,

텍스트 내부의 다성성과 외부 세계의 무한한 맥락성 속에서 움직이는 유동적 언어의 현장임을 드러낸다.

신의 시대에서 작가의 시대를 거쳐 저자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문학 텍스트의 권위는 고정된 절대에서 해체 가능한 실천으로 이동해왔다.

오늘날 문학은 하나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의 경계에서 말해지는 것,

그리고 말해질 수 없는 것과 끊임없이 마주하는 언어의 실험장이 되었다.

3. 주체/작가의 발견과 문학 이론의 시발점으로서의 역사전기비평

인간의 이야기로서의 문학, 그리고 자율적 작가의 탄생

문학을 하나의 해석 가능한 기호 체계 혹은 사회적 담론으로 보기 이전, 문학연구는 먼저 작가라는 주체, 곧 작품을 쓴 개인적, 정신적 존재로서의 창조자를 발견하는 데서 출발했다. 이러한 관점은 19세기 전후로 확산된 역사전기비평(historical-biographical criticism)’이라는 이름 아래 정초된다.

역사전기비평은 문학작품을 작가의 삶, 시대적 배경, 정신적 성장과 변화의 반영으로 읽는 방식이다. 이 비평은 작품을 알기 위해서는 작가를 알아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며, 작가의 생애, 연애, 고통, 사회적 위치, 정신적 갈등 등 모든 외적 요소가 작품의 의미 구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이는 문학이 더 이상 신의 계시나 교훈적 도구가 아니라, 개인의 경험과 사유, 정체성의 발현이라는 근대적 자아 개념 위에서 기능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작가는 하나의 표현 주체, 즉 자신의 내면을 언어로 드러내는 고유한 인격적 주체로 자리매김되었고, 문학작품은 그 주체의 정신적 거울, 혹은 자아의 흔적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전기비평은 문학 이론의 가장 초기 형태이자, 문학이 철학·역사·심리학과 만나는 통합적 해석의 서사적 출발점이었다. 특히 19세기 후반 프랑스, 영국, 독일 등지에서 발달한 실증주의 문학사나 전기적 비평, 작가 연구 중심의 비평사는 이 비평 전통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곧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20세기 들어 형식주의와 구조주의는 이 관점을 비판하며, 작가의 의도와 전기를 텍스트 해석에서 불필요하거나 방해되는 외적 요소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특히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개념은 작가에 대한 관심이 의미의 독점과 통제를 유발한다고 지적하며, 문학적 주체를 텍스트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다성적 구조 속에서 다시 사유할 것을 요청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전기비평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의미하다. 최근의 비판적 전기쓰기, 감정사와 정동 연구, 자기서사적 읽기 등은 오히려 작가의 삶을 단순히 재현하거나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삶과 시대, 주체성의 관계를 비판적이고 다층적으로 재구성한다. 결국, 역사전기비평은 문학이론의 한계였던 동시에 시작점이자 실천의 뿌리였다.

문학을 단지 언어적 구조로 축소시키지 않고, 인간 삶의 총체적 흔적, 시간과 정체성의 언어적 표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그 시도는 오늘날 문학이론이 다시 감각, 존재, 기억으로 회귀하는 흐름과도 맞닿는다.

4. 역사전기비평의 극복과 문학이론의 분화 작가 중심주의의 해체와 비평 패러다임의 전환

역사전기비평은 작가의 삶과 시대적 맥락을 중심으로 문학작품의 의미를 해석하려 했다는 점에서 문학이론의 시발점이자 중요한 서사적 접근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방식은 곧 두 가지 핵심적인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첫째, 문학작품을 단지 작가의 전기적 경험의 반영으로 환원시킴으로써 텍스트 내부의 언어적 복합성과 문학성의 자율적 논리를 충분히 조명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둘째, 작가의 의도와 감정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방식은 텍스트 해석의 다양성, 수용의 가능성, 독자적 의미 생산을 억제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은 20세기 초 러시아 형식주의와 영미권의 뉴크리티시즘(New Criticism)을 통해 본격화되었다. 이들은 문학 텍스트의 의미는 작가의 전기나 사회적 맥락이 아니라, 텍스트 자체의 구조와 언어적 구성 방식 안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텍스트의 자율성과 폐쇄성, 그리고 내부의 조화와 긴장 구조를 분석하는 것이 비평의 핵심 과제로 대두되었다. 여기서 의도적 오류(intentional fallacy)’와 같은 개념은 작가의 의도를 해석의 근거로 삼는 전통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후 이러한 내재적 접근은 프랑스 구조주의로 이어졌으며, 문학은 더 이상 누가 썼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쓰였는가를 중심으로 분석되는 자기완결적 언어 체계로 간주되었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 인류학, 소쉬르 언어학의 영향 아래, 문학 텍스트는 기호, 규칙, 상징 체계의 구성물로 분석되었고, 작가는 의미의 창조자가 아니라 기호의 조직자에 불과한 존재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전환은 문학비평과 이론의 본격적인 분화를 촉발했다.

1970년대 이후 등장한 탈구조주의, 정신분석 비평, 페미니즘 이론, 포스트식민주의 비평, 퀴어이론, 생태비평, 문화연구 등은 각기 다른 철학적 기반과 비판적 목적을 지닌 독립적인 이론 체계로 발전했으며, 문학은 점차 단일한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다양한 시선과 목소리들이 교차하는 다성적 장()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특히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은 이러한 분화의 상징적인 선언이었다. 작가를 의미의 중심에서 제거함으로써, 그는 텍스트를 해석의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무한한 기호의 장으로 재구성했고, 독자는 더 이상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 의미를 생산하는 주체로 격상되었다. 결국 문학이론은 역사전기비평의 극복 이후, 텍스트의 자율성, 의미의 다층성, 주체의 불확정성, 담론의 정치성을 중심으로 서로 다른 이론적 계열로 분화되었으며, 문학연구는 하나의 단일한 틀로는 포괄할 수 없는 복수적 해석과 방법론의 전장이 되었다. 이러한 이론적 분화는 문학 자체를 변형시켰고, 비평 역시 하나의 결론을 말하는 글쓰기에서, 세계와 언어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윤리적 실천으로 변화해 갔다.

 

 

2 : 최근 문학 연구 방법론의 경향들

1. 고빼 풀린 현대성과 문학비평의 자리해체 이후의 세계에서 문학비평이 사유해야 할 것들

오늘날 문학연구는 20세기 후반부터 이어져 온 이론적 분화와 해체의 흐름 위에 놓여 있다. 이는 단지 하나의 학문 분야에 국한된 변화가 아니라, 근대 이후의 역사적 연속성과 사유의 중심들이 붕괴된 문화적·철학적 조건, '고빼 풀린 현대성'(the unhinged modernity)의 한 장면이다. 더 이상 단일한 진리, 보편적 주체, 중심의 권위가 유지되지 않는 이 시대에, 문학은 물론 문학비평 역시 자신의 자리를 재정립해야 할 과제를 마주하게 된다.

20세기 후반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를 거치며, 문학이 더 이상 작가의 의도나 서사적 내용만으로 파악되지 않게 되었고, 비평 역시 더 이상 의미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안정된 위치를 점유할 수 없게 되었다. 기표는 기의로부터 이탈했고, 주체는 분열되었으며, 진리는 다성적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환은 문학비평을 중심 없는 텍스트를 마주하는 불확정성의 사유 실천으로 변화시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문학비평은 다음과 같은 문제들과 마주한다.

첫째, 문학의 사회적 영향력이 약화된 현실에서, 비평은 문학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둘째, 과잉의 정보와 이미지, 정치적 피로와 무감각, 감정의 비약성과 분열이 특징인 이 시대에, 문학이 다루는 감정과 서사는 여전히 의미 있는 윤리적 형식이 될 수 있는가.

셋째, 비평은 과연 독자를 전제할 수 있는가, 혹은 독자 없는 시대에도 계속해서 말을 생산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단지 비평의 형식이나 대상의 문제를 넘어서, 비평이라는 행위 자체의 존재 이유를 다시 묻게 만든다. 한때 비평은 문학과 독자, 시대를 매개하는 중재자의 위치에 있었지만, 오늘날 그 위치는 해체되고 있다. 작품은 스스로 비평을 포함하거나, 독자의 해석 속에서 재구성되며, 플랫폼과 알고리즘이 비평의 기능 일부를 대체하는 현실 속에서, 비평의 언어는 점점 더 정당화되지 않은 말하기로 변모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평은 여전히 문학의 에 머물며, 말해지지 않은 것들, 사유되지 않은 감정, 덧없어 보이는 흔적들에 대해 묻고, 되새기고, 언어를 다시 시작하는 느린 실천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문학비평은 더 이상 절대적 진리를 제시하지 않지만, 그 빈자리에서 가능성으로서의 의미, 열린 질문과 불완전한 응답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윤리적 실천으로 남는다. 결국 고빼 풀린 현대성 속에서 문학비평의 자리는 견고한 사유의 구심이 아니라, 흩어진 조각들을 연결하고 균열의 틈을 지켜보는 경계인의 자리에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비평은 다시 묻기 시작한다. 우리는 지금 어떤 방식으로 문학을 읽고, 무엇을 함께 감각하고, 어떤 말로 이 시대를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

2. 담론의 질서 혹은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1) 작가의 죽음 혹은 도서관적 주체

20세기 후반 문학이론의 커다란 전환점은, ‘주체의 해체를 전제로 한 언어 중심주의의 대두에서 비롯되었다. 이전까지 문학은 대개 누가 말하고 있는가’, ‘그가 무엇을 의도했는가를 중심으로 읽혔지만, 이제 텍스트는 하나의 자율적 기호체계로 전환되었고, 그 안에서 말하는 자는 존재하되 실질적으로는 말소된 자리, 즉 무언가가 말해지는 순간 사라지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롤랑 바르트는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상징하는 선언문에서 저자의 죽음을 주장했다.

그는 문학 텍스트가 더 이상 작가의 정체성이나 삶의 반영이 아니라, 다수의 문화적 기호, 언어, 담론이 교차하며 형성되는 언어적 장이라고 본다. 이때 저자는 더 이상 권위의 원천이 아니라, 말이 도래하는 그 순간에 퇴장해야 하는 자이며, 이제 문학은 작가의 말이 아니라, “말들의 조직이 된다. 바르트는 이때의 저자를 작가(author)’가 아니라 필사자(scriptor)’라 부르며, 새로운 언어의 배열자이자 조직자, 즉 창조가 아닌 배치의 존재로 재규정했다. 이러한 바르트의 사유는 푸코의 문제의식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미셸 푸코는 저자는 무엇인가(Qu’est-ce qu’un auteur?)라는 강연에서 저자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담론적 기능을 수행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는 나는 생각하는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언을 통해, 주체는 생각하고 말하기 이전에 이미 담론의 구조 안에 포섭되어 있으며, 언어는 항상 나보다 먼저 존재하고 말하기를 규율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푸코에게 저자란 실존하는 인물의 이름이 아니라, 담론을 통제하고 분류하며, 법적·제도적 규율을 작동시키는 장치, 즉 권력 장치로서의 이름이다. ‘도서관적 주체란 이러한 맥락에서 도출된다. 우리는 텍스트의 바깥에 존재하는 실존적 개인으로서의 작가를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수많은 텍스트들의 조직 속에 편입된 존재로서의 저자, 즉 다른 책들의 경로를 따라 복제되고 반복되는 주체를 상상해야 한다. 따라서 문학비평에서 작가의 죽음은 단순한 창작자의 소멸이 아니라, 의미의 원천을 독점하는 권력으로서의 중심을 해체하려는 실천이다.

비평가는 더 이상 작가의 말과 삶을 복원하는 데 집중하지 않고, 그 말이 어디서 왔고, 어떤 담론들을 통해 재조직되며, 어떤 억압과 가능성을 발생시키는지를 추적한다. , 비평은 더 이상 삶의 해석이 아니라, 언어 구조와 권력 효과의 추적 행위로 변모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 이후의 시점에 서 있다. 문학비평은 여전히 말하고 있지만, 그 말하기는 생산자가 누구인가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질서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해졌는지를 묻는 방식으로 이행했다. 이때 비평가는 말의 주인이 아니라, 말의 배치와 충돌을 목격하고 기술하는 존재로 존재하게 된다.

2) 푸코의 위대함: 인간의 독창성 아닌 인간 의식의 규칙성의 발견 혹은 발명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문학이론과 인문학 전체에 끼친 영향은 단지 새로운 철학 개념을 제시했다는 데 있지 않다. 그의 위대함은 인간을 둘러싼 사유의 구조 자체를 전복한 데 있으며, 무엇보다도 인간의 독창성이라는 신화를 해체하고, 그 자리에 의식의 규칙성’, ‘지식의 조건’, ‘담론의 형성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데 있다. 푸코는 말과 사물(1966)에서 인간은 최근에 발명된 개념이며, 곧 사라질 얼굴이다라고 선언한다. 이 말은 단순한 수사적 과장이 아니라, 근대 인문학이 전제해 온 자율적 주체’, ‘자기 인식의 기원’, ‘작가의 독창성이라는 신념이 사실은 역사적·담론적 발명품에 불과하다는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 우리는 인간을 자명한 실체로 여겨왔지만, 푸코에게 인간은 특정한 시대와 권력, 지식, 제도, 담론의 배열 속에서만 가능한 이름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주체라기보다는, 그가 무엇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는지의 조건, 어떻게 생각하게 되었는가를 말하는 규칙들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는 이 조건을 에피스테메(episteme)’라고 부른다. 에피스테메란 한 시대의 지식과 사고방식, 언어와 규율이 작동하는 무의식적 구조이자 담론의 지평이며, 각 시대의 인간이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무엇을 상상하고, 무엇을 질문할 수 있었는지를 결정하는 배후의 무대다. 이때 중요한 것은, 푸코가 의식의 내용이나 주체의 내면이 아니라, 그 의식이 어떤 규칙 속에서 구성되었는가, 어떤 말이 가능한 것이 되었고, 어떤 말은 억압되었는가를 탐색했다는 점이다. , 인간은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는 선언처럼, 말이 주어진 규칙 속에서 형성될 때 비로소 나타나는 효과로서의 존재일 뿐이다.

문학과 비평에서 이 사유는 중요한 전환을 불러온다. 문학은 더 이상 인간의 감정과 사상의 표현이 아니라, 특정한 시대와 담론 속에서만 가능했던 언어의 배열이며, 비평은 그 텍스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보다, 그 말이 어떻게 가능해졌는가, 그 가능성은 어떤 억압과 배제를 수반했는가를 추적하는 작업이 된다.

푸코는 이를 단지 철학적 질문으로만 머무르지 않고, 광기의 역사, 성의 역사, 지식의 고고학등에서 광기, , , 의학, 규범, 고백 등 인간을 정의해왔던 사유 체계들을 해체하면서, 인간이 자신을 이해해왔던 언어의 틀을 뒤집는 실천을 지속했다. 이처럼 푸코의 위대함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기보다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해체하는 데 있다. 그는 인간을 중심에 둔 해석에서 벗어나, 그 중심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그 구조는 어떤 권력과 지식의 관계 안에서 작동했는지를 추적했다.

문학비평은 이 전환을 수용하면서, 의미를 부여하고 판단하는 중심적 주체의 위치를 내려놓고, 대신 의미가 가능해진 조건들, 즉 말의 질서, 담론의 형식, 감각과 사유의 분포 방식에 주목하는 방식으로 이동하게 된다.

3) 무의식과 그것을 승화(시키는 의식) 말해지지 않는 것의 자리, 문학이라는 증상의 형식

문학은 종종 인간의 내면, 욕망, 감정, 상처, 혹은 기억을 표현하는 장르로 여겨진다. 하지만 정신분석 이론이 등장한 이후, 문학은 더 이상 표현의 장르에 머물지 않게 된다. 정신분석은 인간 주체의 가장 핵심적인 차원을 무의식(unconscious)에서 발견하며, 그 무의식이야말로 언어의 틈과 증상 속에서 드러나는 말해지지 않는 것의 자리임을 밝혀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무의식은 억압된 욕망과 금지된 기억이 잠재되어 있는 심층의 공간이다. 이 무의식은 직접 말해지지 않고, , 농담, 실수, 예술적 상징 등 간접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문학은 이와 같은 무의식의 우회적 표현이 가장 정교하게 작동하는 공간이며, 욕망의 흔적, 결핍의 응시, 억압된 말들이 은유와 상징, 환유의 형태로 드러난다.

문학이론에서 이 무의식을 해석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라캉의 이론이다. 그는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하며, 무의식을 단지 억압된 본능의 영역이 아니라, 언어 안에서, 언어의 구조와 동일하게 작동하는 담론적 체계로 재규정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문학은 무의식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이 말해질 수 없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떠도는 말의 흐름을 기록하는 형식이 된다. 다시 말해, 문학은 주체가 자신의 욕망을 말할 수 없는 자리에서, 그 말해지지 않음을 승화(sublimation)’라는 예술적 형식으로 바꾸는 실천이다. 승화란 본래 충동이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을 때, 그 충동의 에너지를 예술·지식·윤리 등의 형식으로 전환하는 무의식적 작업이다. 문학은 바로 이 승화의 언어이며, 욕망이 직접적으로 말해질 수 없을 때, 그 말해지지 않음이 시로, 서사로, 인물의 침묵과 반복으로 드러나는 장이 된다.

여기서 의식이란, 단순한 이성적 판단의 자리가 아니라, 무의식을 감당하기 위해 언어적 형식을 조직하는 주체의 자리로 이해된다. 따라서 문학 속 의식은 무의식을 억압하거나 숨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형하고 배치하며, 예술의 방식으로 표면화시키는 윤리적 행위이기도 하다.

정신분석적 문학비평은 이런 맥락에서 문학을 단지 텍스트가 아닌, 하나의 증상, 혹은 한 시대 무의식의 집단적 발화로 읽는다. 개별 작가의 내면을 분석하는 것을 넘어, 그 시대 전체가 무엇을 말하지 못했는가, 혹은 무엇을 반복적으로 되풀이하며 지우고 있었는가를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다. , 문학은 말하고 있지만 동시에 침묵하고 있는 형식이다. 정신분석은 바로 그 침묵의 자리, 결핍의 징후, 형식으로 돌출된 억압의 흔적을 통해 주체의 분열을 감각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읽기와 응답의 윤리를 발견하는 작업이다.

4)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탈주체적 담론과 언어 구조 속 존재의 재정의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이 문장은 근대 인문주의의 핵심 명제였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가장 근본적인 층위에서 해체하는 선언이다. 푸코는 이 문장을 통해, 자기 인식과 사고를 중심으로 형성된 근대적 주체 개념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음을 선포한다. 근대 이후 인간은 자신을 생각하는 존재, 주체적 존재, 자율적인 인식의 중심이라 믿어왔지만, 푸코에게 있어 인간은 말해지기 전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담론, 언어, 제도, 권력의 질서 속에서만 존재 가능해진다. , 인간은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말할 수 있고, 어떤 규칙 속에서 말할 수 있게 되었는가에 의해 구성된 존재다. 이때 말해지지 않는 것, 생각되지 않는 것, 혹은 사고가 미치지 않는 무의식의 공간, 그리고 제도적 침묵의 질서, 그 모든 곳에서 인간은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그 존재는 결코 의식적으로 소유될 수 없다. 문학비평은 이러한 선언 이후 자기 정체성이나 의식의 표현으로서 문학을 읽는 방식에서 벗어나, 무의식적 구조, 담론의 틈, 말해지지 않는 것들의 흔적을 따라 읽기 시작한다.

문학 속 주체는 말하는 자가 아니라, 말해지게 된 자이며, 그 말은 창조라기보다는 배치, 전유, 되풀이된 흔적이다. 문학은 이때 단지 텍스트가 아니라,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흘러나온 존재의 징후이며, 이 징후들은 곧 욕망의 비틀림, 억압의 증상, 침묵의 폭로로 구성된다.

이 지점에서 문학은 무의식의 언어, 또는 역사적 망각 속에서 밀려난 목소리들의 복귀가 된다. 푸코가 말하는 담론의 질서란, 무엇이 말해질 수 있으며, 무엇이 금지되고, 무엇이 침묵되어야 했는가에 대한 체계적인 권력의 조직이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는 말은 단지 철학적 자각이 아니라, 말의 권력을 넘어선 존재의 윤리를 요청하는 말이다.

문학은 바로 그 말해지지 않는 자리에서 존재의 흔적을 감지하는 기이한 언어의 형식이며, 비평은 그 침묵의 이면을 응시하고, 다시 말로 옮기는 느린 응답이 된다.

3. 하위 주체(subaltern)

1) 농민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말

말하지 못한 자의 이름으로서의 서발턴

하위 주체라는 개념은 원래 맑시즘의 계급 분석에서 유래되었다. 초기에는 정치적 권력 구조의 주변부에 위치한 집단, 특히 농민 계층이나 산업노동자 계급(프롤레타리아)을 지칭하기 위한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이들은 지배계급에 대한 저항의 주체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언어와 위치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침묵의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 용어는 이후 이탈리아의 공산주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에 의해 더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함의를 갖게 되었다. 그람시는 서발턴(subaltern)’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국가 권력이나 지배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완전히 대표되지 못한 계급, 즉 말할 수 없고, 스스로를 설명할 언어를 가지지 못한 계층을 지칭했다.

그에게 서발턴은 단순한 사회적 약자를 넘어서, 역사적 재현에서 배제된 존재, 다시 말해, 자기 목소리로 말할 수 없는 집단을 의미했다. 이러한 개념은 1980년대 이후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으로 전환되면서 보다 급진적이고 다층적인 비판의 언어로 확장되었다. 특히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의 대표적 논문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Can the Subaltern Speak?)는 이 개념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한 전환점이었다.

스피박에 따르면, 서발턴은 단지 정치적 발언권을 박탈당한 자가 아니라, 말이 억압된 구조적 조건 안에 놓인 자, 즉 어떠한 말도, 설령 존재하더라도 그것이 인정되지 않는 자를 의미한다.

그녀는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하위 주체의 말이 구조적으로 재현 불가능한 위치에 놓여 있음을 고발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위 주체는 농민이나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전통적 계급 개념을 넘어서, 식민지 피지배자, 여성, 토착민, 난민, 장애인, 성소수자, 비문자화된 공동체 등 제도적 언어와 재현의 장에서 배제된 모든 타자들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문학에서 이들은 종종 침묵하는 인물,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자, 혹은 죽음 이후에야 존재가 인식되는 유령적 존재로 등장하며, 이러한 존재들을 읽는 비평은 누락과 억압, 재현의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윤리적·정치적 독해의 실천이 된다.

2) 하위주체가 말할 수 있는가?

침묵이 아닌, 말해지지 않음의 구조 속에서 하위주체가 말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억압받은 자가 말했는가 아닌가를 묻는 것이 아니다.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Gayatri Spivak)이 던진 이 질문은, 그들이 말할 수 없는 구조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라는 요청이자, 말하기의 조건 자체를 해부하려는 급진적인 문제제기다.

스피박은 1988년 발표한 비평적 선언문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에서, 하위주체, 식민지 여성, 토착민, 비서구적 말주체는 결코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지배담론의 틀 내에서 말하거나, 그에 의해 침묵당한다고 진단한다. , 하위주체는 단지 발언이 억압당한 자가 아니라, 발화 그 자체가 재현될 수 없는 위치에 놓인 존재라는 것이다.

스피박은 인도 식민지 시기의 사티(Sati, 순장)’ 관습을 예시로 든다. 사티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함께 화장되는 의례인데, 이 관습을 둘러싼 서구 담론은 언제나 두 가지 목소리만 존재시켰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금지시켜야 한다”(식민 권력),

이것은 우리의 문화다”(토착 권력).

하지만 정작 그 사이에 있는 여성의 목소리는 말해지지 않았으며, 심지어 말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이처럼 하위주체는 언제나 말해지는 자 혹은 침묵으로 환원되는 자로만 존재하며, 그녀가 말할 수 있다하더라도 그 말은 체계적으로 청취되지 않고, 인식되지 않으며, 의미화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스피박은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단지 발언의 부재가 아니라, 재현 불가능성의 조건을 드러내는 철학적 진단이다. 그렇다면 하위주체는 영원히 말할 수 없는가? 스피박의 대답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다. 그녀는 오히려 우리가 그녀가 말했다고 선언하는 방식 자체가, 또다시 타자화와 재식민화를 반복하지 않는가를 물으며, 재현의 윤리적 책임을 묻는다. 이 지점에서 비평의 과제는 다음과 같이 전환된다:

하위주체의 목소리를 대신 번역하거나 대변하려는 욕망을 경계하며, 그녀의 말이 어떻게 침묵당해 왔는지, 그 침묵이 어떤 권력 구조 안에서 작동했는지, 그리고 그 구조를 드러내고 균열내는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떻게 마련되는가를 탐색하는 일. 문학 속 하위주체는 말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말은 종종 사이 구조에 위치하거나, 희미하게 들리거나, 형식의 이면에서만 감지된다. 따라서 하위주체의 말하기는 직접적 선언이 아니라, 침묵의 흔적, 실패한 말, 되풀이된 제스처, 언어의 파열과 결여 속에서 나타나는 형식이다.

비평은 이때 무엇을 대신 말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듣고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그리고 어떤 자리를 비워둠으로써, 말해지지 않았던 말을 기다릴 것인가를 자문하는 윤리적 실천이 된다.

4. 페미니즘 혹은 역사 다시 쓰기

1) 인간의 성장 단계를 구순기, 항문기, 남근기로 설명

유아 성기기 구조 단계에서는 남성만 존재하고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페미니즘 문학이론과 철학은 오랫동안 여성이 말할 수 없는 구조, 혹은 말해지지 않은 존재로 전락해왔던 지점을 비판하고, 그 부재의 역사를 새롭게 쓰는 시도를 지속해 왔다. 이러한 문제는 단지 문학과 사회의 담론 속에서만이 아니라, 인간 심리의 구조를 설명해온 정신분석학의 이론적 기반에서도 발견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의 성 정체성 발달을 구순기(oral stage) 항문기(anal stage) 남근기(phallic stage)라는 단계로 설명했다. 여기서 '남근기'는 성기 인식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작동하는 시기로, 자아의 형성과 사회적 동일시의 핵심적 시기로 간주된다. 문제는 이 발달 단계 자체가 남성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프로이트 이론에서 여성은 남근이 없다는 결핍의 존재로 정의되며, 남근기의 주체로 등장하지 않는다. 여성은 심리적·상징적 구조 속에서 완전한 주체가 되지 못하고, ‘부재결여의 상징으로 위치 지워지며, 결국 유아 성기기 구조 단계에서는 남성만 존재하고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구조는 자아의 형성과 사회화 과정이 처음부터 남성 주체 중심의 언어, , 상징체계 안에서 작동하도록 설정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자크 라캉은 이 구조를 언어학적으로 재구성하면서, ‘상징계(the symbolic)’의 진입은 남근(Phallus)’이라는 기표를 통해 가능하며, 이 상징계를 통해서만 아이는 말하는 주체로 탄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도 문제는 동일하다. 남근은 단순한 신체가 아니라, 사회적 기표이며 권위의 상징이다. 그리고 여성은 그것을 소유하지 않기에, 언어적·상징적 질서의 바깥에 위치하게 된다. 결국 라캉 이론 역시 여성은 부재의 자리, 혹은 타자의 자리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근본적 비가시성의 구조를 반복한다. 이와 같은 정신분석적 주체 형성 모델은 여성 주체의 탄생 자체를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설정하며, 여성을 남성의 거울, 혹은 결핍된 존재로만 의미화해왔다.

페미니즘 이론은 이 지점을 강하게 문제 삼는다. 특히 뤽 이리가레이(Luce Irigaray)여성은 철학과 언어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며, 여성이 언어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상징계 자체를 전복하거나 새로운 상징을 발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남성 중심적 언어 체계에 저항하면서, 여성의 말하기, 몸의 감각성, 다성적이고 유동적인 주체성을 제안한다. , 페미니즘은 존재하지 않는 여성의 위치를 다시 쓰는 것, 그리고 그 침묵의 구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해부하고 해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문학 속 여성 인물들의 침묵, 상징되지 않는 몸, 타자의 위치는 이러한 구조적 배제의 흔적이며, 페미니즘 비평은 그 말해지지 않음의 층위에 말걸기를 시도하는 윤리적·정치적 실천이다.

2) 소설이란 성숙한 남성의 형식루카치의 소설론, 주체의 형식, 그리고 여성의 부재

게오르그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에서 소설을 근대의 서사적 형식이라 규정하며, 그 형식이 총체성을 상실한 세계 안에서 고립된 주체의 여정을 그리는 구조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서사시가 조화롭고 폐쇄된 세계를 전제한 고전적 장르였다면, 소설은 삶의 전체성과 가치의 중심이 해체된 시대, 즉 근대의 비극적 조건 속에서 등장한 장르다.

소설 속 주인공은 더 이상 세계와 조화롭게 사는 존재가 아니라, 내면에 이상을 품고 있으나 외부 현실과의 불화를 겪는 고독한 인간형, 즉 비극적 주체로 설정된다. 이 주체는 자신의 이상과 세계의 분열 사이에서 실패하거나 타협하거나 환멸 속에서 성장하는 여정을 경험하며,

그 과정은 바로 소설이라는 장르의 중심 축을 이룬다. 문제는 루카치의 이론이 전제하는 주체의 보편성이 실제로는 중산층 남성, 그것도 철학적 사유가 가능한 교양 남성이라는 특권적 주체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루카치의 이상형적 주인공은 윤리적 자기 성찰과 형이상학적 고뇌를 겪으며, 그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주체로 정립해 간다. 그러나 이 모든 여정은 남성적 사유와 남성적 시간 감각을 바탕으로 구성되며, 여성은 이 구조 속에서 주체로서의 권리를 획득하지 못한다. 페미니즘 문학이론은 이러한 소설 형식의 전제가 사실상 여성의 경험, 언어, 욕망, 감각을 수용하지 못하는 서사적 틀임을 비판해 왔다.

낸시 암스트롱은 18세기와 19세기 영국 소설이 비록 여성 작가와 여성 독자층에 의해 확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남성 중심적 도덕과 규율, 가부장적 사유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음을 지적했다.

엘레인 쇼월터 역시 성숙한 남성의 소설이라는 개념을 통해,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가 근대적 이성과 주체 형성을 중심으로 구축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여성은 자아를 구성할 언어와 시간을 허락받지 못한 채 죽거나 미치거나 침묵하는 인물로 반복되어 왔음을 강조한다.

결국 루카치가 말한 총체성의 상실고독한 주체의 여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남성적 은유, 즉 가부장적 상징계 속에서 문학적 인간이란 누구인가를 재규정하는 작업이었고, 여성은 그 정의 안에 포함되지 않은 타자, 혹은 주체 형성의 거울로만 위치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버지니아 울프, 뤽 이리가레이, 크리스테바 등에 의해 더욱 급진화된다. 그들은 기존 소설의 선형적 구조, 원인-결과의 인과성, 결말의 도달이라는 남성적 시간성 자체를 해체하거나 우회하며, 몸의 시간, 감각의 언어, 분열된 주체성을 통해 여성의 글쓰기를 시도하거나 새로운 서사 양식을 창안하려 한다.

이처럼 "소설이란 성숙한 남성의 형식"이라는 말은, 루카치의 소설론이 지닌 형식적 통찰을 인정하면서도, 그 이론이 여성의 시간과 존재가 배제된 문학적 질서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다시 읽혀져야 할 이론적 고전임을 뜻한다.

3) 페미니즘의 세 경향

젠더 수행, 기호적 언어, 재현 불가능성의 비평학

주디스 버틀러 Judith Butler

젠더는 수행이다: 고정된 성정체성의 해체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1990)을 통해 페미니즘 이론에 결정적 전환을 가져온 인물이다. 그녀는 성별(섹스)과 젠더의 이분법을 해체하고, 젠더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반복적 행위(performance), 즉 문화적·언어적 규범의 결과라는 급진적인 이론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여성이란 존재는 그러한 행위들이 반복되어 일관된 정체성처럼 보일 뿐이며,

실제로는 끊임없이 재현되고 구성되는 담론적 효과다. 젠더는 존재가 아니라 반복 속에서 발생하는 현상, 우리는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되어간다’”는 것이다.

버틀러의 이론은 문학비평에 있어서도 중요하다. 문학 속 젠더 정체성은 내면의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언어와 규범, 제도, 욕망이 교차하는 장소로 이해되며, 문학 텍스트는 이러한 젠더의 불안정성, 분열, 저항 가능성을 드러내는 공간이 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Julia Kristeva

기호적 언어, 여성의 시간, 모성적 주체성

크리스테바는 라캉의 정신분석과 구조주의 언어학을 바탕으로 여성의 언어,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고유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녀는 언어를 기표의 질서로 구성된 상징계(the Symbolic)’와 비이성적이고 비문법적인 기호계(the Semiotic)’로 구분한다.

상징계는 법과 규범, 부계적 언어, 즉 억제된 언어 질서를 의미하며, 기호계는 리듬, 억양, 감정, 육체성, 즉 모성적이고 전의식적인 차원의 언어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여성은 상징계에 완전히 진입하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바깥에서 기호계의 감각적 언어로 존재를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이때 여성적 글쓰기는 단순히 여성 작가의 글이 아니라, 기존의 문법과 논리를 교란하며 감각적이고 분열된 언어를 통해 타자성과 무의식을 말하는 서사적 실천이다. 그녀는 문학이 상징계를 교란시키는 기호적 힘을 품고 있다고 보며, 여기서 여성은 남성의 타자가 아닌, 고유한 윤리와 시간, 감정의 존재로 출현할 수 있다.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 Gayatri C. Spivak

말할 수 없는 자, 재현의 윤리,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스피박은 포스트식민주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을 결합한 가장 급진적이고 복합적인 사유를 보여주는 사상가다. 그녀는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하위주체(subaltern)인 식민지 여성, 비서구 타자, 무문자적 존재가 자신의 목소리로 말할 수 없는 구조적 침묵 속에 놓여 있음을 고발했다. 그녀는 단지 타자의 목소리를 대신 말하려는 시도 자체를 경계하면서, 재현(representation)의 윤리를 강조한다. , 비평은 하위 주체를 대신 말하거나 해석하기보다, 그들이 말할 수 없게 되는 조건과 권력 구조를 추적하고, 그 침묵을 읽어내고 책임지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피박의 사유는 문학비평을 대변의 장이 아니라, 응답과 책임의 장소로 전환시킨다. 텍스트 속 말하지 않는 인물이나 이야기 바깥의 타자는 무시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재현 불가능성 자체가 윤리적 질문으로 전환되는 주체의 자리다.

세 이론의 비교적 특징 정리

사상가 중심 개념 주요 관점 문학과의 관계

주디스 버틀러/젠더 수행성/정체성은 실체가 아니라 반복 행위/젠더의 유동성, 텍스트의 젠더 불안 해석

줄리아 크리스테바/기호계/상징계 언어의 감각성, 모성적 글쓰기/상징계의 균열로서 문학, 감각과 육체의 언어화

가야트리 스피박 서발턴 /재현의 윤리/말할 수 없음의 구조 비판, 윤리적 독해 침묵과 부재를 읽는 비평, 재현의 구조 해체

5. 광기, 버려진 것들, 분열증 그리고 그 안의 진실

1) 아우슈비츠 이래로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말해질 수 없는 고통 앞에서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이 선언은 예술과 문학, 나아가 언어의 윤리성 전체를 겨누는 명제로 읽혀왔다. 이 문장은 문자 그대로 서정시를 금지하자는 주장이 아니라, 절멸 수용소라는 극한 폭력 이후에도 문학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문학 존재론의 급진적 회의를 담은 물음이다.

아도르노는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은 순간, 즉 아우슈비츠라는 문명적 파국 앞에서, 아름다움, 감정, 정화, 구원의 언어로 문학이 계속해서 쓰일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야만적일 수 있다고 본다. 이는 예술을 통한 치유나 의미 부여가 때로는 폭력의 은폐이자 망각의 전략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동시에 역설적인 긴장을 품고 있다. 아도르노 자신도 이후 고통을 표현하지 않는 예술은 더 야만적이라고 썼으며,

이 말은 문학이 이후에도 계속 존재해야 하며, 달라진 방식으로, 달라진 언어로, 고통의 흔적을 윤리적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요청이기도 했다. , 아우슈비츠 이후의 문학은 더 이상 서정적 정화나 미적 위로의 언어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오히려 파편화된 언어, 결여된 시간, 분열된 주체, 말의 실패를 그 자체로 끌어안는 형식이어야 한다.

이때 광기, 버려진 것들, 분열증이라는 키워드는 그 자체로 표현 불가능한 현실과의 접촉 지점을 형성한다. 정신병적 언어, 절단된 문장, 반복되는 말실수, 의미 없는 듯한 말들, 이 모든 것은 의미의 붕괴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삶과 고통의 흔적이다.

문학은 그 자리에서 감정적 재현을 멈추고, 감각의 틈, 윤리적 침묵, 침묵 속의 흔들림을 감각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했다. 이는 단순히 침묵하거나 고통을 직접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음의 구조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응답 가능한 언어를 다시 상상할 것인가에 대한 과제다.

문학비평 역시 이런 문학을 읽는 방식이 달라진다. 문학은 더 이상 서사를 따라가는 텍스트가 아니라, 언어가 실패하고, 주체가 분열되고, 감정이 어그러진 순간에도 존재를 밀고 나가는 흔적으로 읽힌다.

광기, 침묵, 비언어적 진실. 이제 문학은 그것들을 회피하지 않고 가만히 응시하는 일, 혹은 그 응시조차 실패한다는 것을 말하는 일이 된다.

2) 푸코

미셸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광기(madness)’가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역사적 배제의 장치에 의해 형성된 개념이라고 말한다. 그는 광기를 진실의 바깥으로 밀어낸 서구 근대의 구조적 폭력을 지적한다. 이때 광기는 단지 병리적 상태가 아니라, 근대적 이성의 거울처럼 기능한다. , 이성은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비이성을 구축하고, 그것을 감금하고 침묵시키며 자기 정체성을 확립한다. 이러한 광기의 배제는, 광기의 내부에 도리어 진실이 있을 수 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푸코에게 있어 진실은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밀려난 것들의 침묵 속에 잠들어 있다. 버려진 것들, 잊힌 말들, 분열된 사유들은 오히려 중심의 견고한 지배를 교란시킨다. 푸코는 스스로를 지식의 고고학자라고 불렀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재구성하려는 역사학자의 태도와는 다르다. 그에게 고고학은, 지금 우리가 진실이라 여기는 것들이 어떠한 권력 관계 속에서, 어떤 배제와 침묵의 구조를 통해 성립되었는지를 발굴하는 작업이다. 그는 진실의 핵심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층위마다 억압되고 누락된 말들의 지층을 파고들며, 우리가 이라 부르는 것의 형성 조건 자체를 해체하려 한다. 광기 또한 그 고고학적 작업 속에서 중심의 언어로부터 추방된 가장 바깥의 목소리이며, 말해지지 않기에 오히려 가장 강력한 진실을 담고 있는 장소가 된다.그는 말과 사물에서 사물들의 질서를 해체하고, 기존의 분류와 인식 체계를 해체함으로써, 우리가 현실이라 믿는 것이 얼마나 자의적이고 폭력적인지 폭로한다. 그리하여 푸코는 광기의 언어를, 침묵당한 목소리를, 감금된 공간을 통해 우리가 말하지 못한 진실에 이르려 한다.

분열증은 여기서 단지 임상적 증상이 아니라, 말과 현실, 표상과 실재 사이의 단절 그 자체를 의미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분열증적 생산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의 무의식적 구조를 해체하려 했듯, 푸코 역시 분열증적 존재가 보여주는 단절과 혼란을 통해 기존의 정상성이란 개념을 반성하게 만든다. 그 결과, 진실은 중심의 말이 아니라, 가장 끝자락의 말중단된 말, 금지된 말, 광기의 말 속에 깃든다.

결국 푸코에게 있어 진실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권력과 지식이 구성해 낸 질서 속에서 끊임없이 경합하는 것들 가운데 말해지지 않은 것으로 존재한다. 이때 버려진 것들은 파편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의 또 다른 얼굴이며, 그 균열의 틈에서 우리는 잠시 진실을 엿볼 수 있다. 침묵당한 광기의 몸짓, 말 대신 외침, 논리 대신 균열은 이성의 문법으로는 결코 포착할 수 없는,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진실의 한 조각이다.

 

3) 줄리아 크리스테바

근대의 담론 체계에 의해 버려진 것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근대적 주체를 언어의 생산물로 보며, 이성 중심의 언어 체계가 구성하는 담론 안에서 배제된 것들을 주목한다. 혐오의 권력에서 그녀는 아브젝시옹(abjection, 혐오 혹은 탈주체화)’의 개념을 통해, 주체가 자신을 구성하기 위해 반드시 외부로 추방해야 했던 잔여물인 부패, 죽음, 오물, , 여성의 몸을 사유한다. 이 버려진 것들은 단순히 더럽거나 병적인 것이 아니라, 근대적 자아가 성립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배제해야 했던 것들이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주체 바깥에 있으나, 사실은 그 주체를 지속적으로 위협하고 잠식하며 되돌아오는 잔재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이성의 말로는 도저히 포착되지 않는 언어 이전의 감각’, 즉 반()언어적인 정동의 흐름은 우리의 내면에 깊숙이 침잠해 있으며, 문학과 예술 속에서 끊임없이 귀환한다. 이때 혐오란 단지 감정이 아니라 존재론적 경계가 붕괴될 때의 불쾌한 진동이다. 토사물, , 시체와 같은 것들은 죽음과 삶의 경계를 지우며,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지탱해온 세계의 구조를 위협한다. 이처럼 근대의 담론은 이러한 것들을 비정상적이거나 병리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버리지만, 크리스테바는 바로 그 버려진 것들이야말로 주체의 경계를 구성하는 진실의 잔여라고 본다.

특히 여성은 이 구조에서 이중으로 배제된다. 생물학적 으로서의 여성성과 언어적 주체로서의 남성성은 크리스테바의 이론에서 긴장 관계에 놓이며, 여성은 아브젝트의 지평에서 다시 사유된다. 그녀는 이성적, 상징적 언어가 지배하는 질서에 균열을 내는 감각의 언어, 즉 세미오틱(semiotic)의 리듬을 통해 진정한 예술적·정치적 전복이 가능하다고 본다. 따라서 크리스테바는 문학을 하나의 정치적 실천으로 자리매김하며, 그 안에서 버려진 말, 금지된 정동, 주체 바깥의 흔들리는 경계를 복권시킨다.

결국 크리스테바의 사유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버렸다고 믿는 것들은 정말로 사라진 것인가? 혹은 그 버려짐자체가 하나의 체계 속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고통과 진실의 징후는 아닐까?

4) 근대적 이성 자체를 자본주의적 편집증이라 진단

들뢰즈와 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정신분석의 핵심 개념이었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해체하고, 그 자리에 사회 전체를 하나의 무의식 기계로 상정한다. 이들은 무의식을 단지 개인 내부의 심리 기제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구조가 끊임없이 욕망을 조직하고 분절해가는 장으로 본다. 이때 자본주의는 자기 모순적 체계 속에서 끊임없이 욕망을 생산하고 동시에 억압하며, 그 모순을 덮기 위해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는 일련의 편집증적 전략을 수행한다. 여기서 편집증(paranoia)’은 단순한 병리학적 용어가 아니라, 근대 이성의 구조 자체를 가리키는 은유가 된다.

자본주의는 분열된 욕망을 하나의 체계’, ‘하나의 진리로 봉합하고자 하며, 모든 것을 동일화하고 기호화함으로써 통제 가능한 영역 안에 두려 한다. 이는 곧 세계를 단일한 코드로 환원시키는 편집증적 사유의 양상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를 편집증적 기계(paranoiac machine)’라 부르며, 근대적 이성이 만든 자기 동일성과 중심성, 목적론적 사유가 얼마나 위계적이고 폭력적인지를 폭로한다. 욕망은 원래 탈중심적이고 다중적인 흐름인데, 자본주의는 그것을 끊임없이 재구조화하며, “너는 이것을 원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근대 이성은 진리를 향한 이성적 탐구가 아니라, 오히려 불안에 기반한 통제 장치이며, 모든 타자성과 분열을 억제하려는 과도한 동일화의 욕망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에 맞서 분열증(schizophrenia)’을 하나의 대안적 존재 양식으로 제시한다. 물론 임상적 의미에서의 질병이 아니라, 기존 체계의 코드화에 저항하는 탈주선, 끊임없이 생성하고 도망치는 존재 방식으로서의 분열증이다. 그것은 중심을 해체하고, 욕망의 자유로운 흐름을 회복하며, 언어와 존재의 다른 질서를 꿈꾼다.

결국 들뢰즈와 가타리는 근대 이성, 그리고 그것이 전제한 인간 중심의 주체, 목적 지향적 이성, 진리와 합리성의 신화를 자본주의적 편집증이라는 개념 아래 과감하게 전복한다. 그들의 사유는 물음을 던진다. 우리가 이성이라 부르는 것은 실제로 얼마나 이성적인가? 그리고 그것은 누구를 위해 작동하며, 누구를 버리고 있는가?

5) 자본주의라는 파시스트적 편집증의 역사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혁명적 정신분열증 제시

들뢰즈와 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편집증적 기계로 규정하고, 그로부터의 탈출 경로로 혁명적 정신분열증을 제안한다. 이때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은 임상적 질병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질서가 만들어낸 동일성, 목적성, 정상성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와해시키는 존재의 방식이다. 그들은 말한다. "정신분열증은 자본주의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장 안쪽에서 터지는 혁명적 잠재성이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기호화하고 구조화하며, 욕망마저도 생산의 수단으로 포섭한다. 이 욕망의 사유까지도 통제하려는 파시즘은 사회적 구조뿐 아니라 인간의 무의식 깊숙이 침투해, 우리 내부에 작은 파시스트를 심어둔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지점에서 정신분열증을 하나의 정치적 저항으로 재개념화한다. 분열증적 주체는 동일성의 강박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변이하고, 연결하고, 탈주하며, 다중적 욕망의 흐름을 따라간다. 그것은 중심을 요구하지 않고, 시작과 끝, 목적과 완성을 거부하며, 정체성을 해체한다.

이들은 특히 편집증의 파시즘에 맞선 분열증의 혁명을 다음과 같이 대비시킨다. 편집증은 닫힌 체계, 동일성, 질서, , 가족주의로 향한다. 반면 정신분열증은 개방된 흐름, 이질성, 무법적 생성, 탈영토화, 그리고 새로운 의미의 공동체로 나아간다. 즉 분열증은 기성 권력의 중심으로부터 벗어나는 운동이자, 근대적 주체가 구축해온 신화와 경계를 무너뜨리는 일종의 사유의 내란이다.

그들의 분열증 이론은 단순한 정신의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미학적 실천, 언어적 전략, 삶의 방식이며, 동시에 혁명의 형식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를 기계적 연결을 따라 흐르는 욕망의 지도 제작이라 표현하며, 고정된 체계를 떠나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망을 생성하는 분열적 존재 양식을 주장한다.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라는 파시스트적 편집증의 역사에 균열을 내는 하나의 방식이다.

6. 앙티 오이디푸스

1) 프로이트: 억압된 욕망, 가족주의적 무의식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욕망의 억압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보았다. 특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무의식이 형성되는 핵심 구조로 간주된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그 근원적 금기는 문화와 문명의 기반으로 간주되었으며, 이 억압은 곧 주체의 윤리적 탄생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모델은 무의식을 지나치게 가족주의적 구도로 환원하고, 욕망을 결핍의 논리 속에 가두며, 사회 전체를 가정이라는 축소판으로 읽어내려는 경향을 갖는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여기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2) 마르쿠제: 억압의 문명 비판과 해방된 에로스

마르쿠제는 에로스와 문명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을 바탕으로 자본주의 문명의 억압 구조를 비판한다. 그는 문명이 성문화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욕망을 억압한다고 보았고, 진정한 해방은 억압된 에로스의 해방을 통해 가능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마르쿠제 역시 욕망을 결핍과 억압의 구조 안에서 사유했다는 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생산하는 욕망개념과는 다르다. 그들에게 욕망은 억압되지 않는 흐름이며, 억압 자체가 자본주의 기계의 일부다.

3) 들뢰즈: 무의식은 욕망하는 기계, 분열증의 정치적 잠재성

들뢰즈와 가타리는 앙티 오이디푸스에서 무의식을 욕망하는 기계로 다시 개념화한다. 무의식은 결코 억압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욕망을 생산하고, 현실과 직접 연결된 흐름을 만들어낸다. 이때 오이디푸스적 가족 구조는 사회 전체를 분석하는 데 적절한 모델이 아니며, 오히려 그 자체가 자본주의적 통제 장치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들뢰즈는 분열증을 병리로 보지 않고, 자본주의 기계 속에서 탈코드화된 존재의 방식, 혁명적 잠재성을 지닌 상태로 사유한다. 오이디푸스를 넘어서기 위해선 욕망의 혁명이 필요하다.

4) 줄리아 크리스테바: 아브젝시옹과 언어 이전의 욕망

크리스테바는 프로이트의 구조를 부분적으로 계승하면서도, 보다 근본적으로 그 언어적 토대를 문제 삼는다. 그녀는 무의식을 상징적 언어로 환원할 수 없는 비언어적 정동, ‘세미오틱의 흐름으로 다시 규정하고, 아브젝시옹의 개념을 통해 주체의 경계가 어떻게 형성되고 붕괴되는지를 분석한다. 그녀의 이론은 들뢰즈가 말한 욕망의 흐름과 유사한 측면이 있지만, 크리스테바는 그 흐름이 언제나 주체의 분열과 혐오, 불쾌함, 육체적 경계에 의해 매개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결국 크리스테바는 오이디푸스를 넘어서기보다는, 오이디푸스를 끊임없이 흔드는 내적 경계의 진동에 주목한다.

5) 라캉: 상징계로의 진입과 이름--아버지

라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을 언어학적 구조로 재해석하면서, 주체 형성의 핵심을 상징계의 진입으로 본다. ‘이름--아버지는 법과 금기를 매개하는 상징적 질서이며, 주체는 이를 통해 욕망을 언어화하고 사회적 위치를 획득한다. 하지만 이 과정은 본질적으로 결핍을 전제로 하며, 주체는 끊임없는 욕망의 대상(a)을 추구하게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라캉적 구조 역시 욕망을 결핍의 논리로 포획한다고 비판하며, 무의식을 상징계 바깥에서 작동하는 기계로 재구성한다. 그들의 욕망은 언어 이전의, 그리고 사회적 기호 이전의 실재와 직접 접촉하는 힘이다.

7. 차연, 해체론의 뿌리

자크 데리다는 차연(différance)’이라는 개념을 통해 서구 형이상학의 가장 깊은 뿌리를 흔든다. 차연은 단어이자 개념이며 동시에 철학적 실천의 방식이다. 프랑스어에서 차이하다(différer)’는 단어는 다르다지연되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데리다는 이 어휘의 중의성을 철학적 개입의 출발점으로 삼으며, 모든 의미는 어떤 중심이나 본질에 도달하지 않고 항상 미뤄지고, 동시에 다른 의미와의 차이에 의해 구성된다고 말한다.

우리가 의미를 이해한다고 느낄 때조차, 그것은 이미 다른 의미들과의 관계 안에서만 잠정적으로 작동할 뿐이다. 이 지연과 흔들림, 그리고 끝내 도달할 수 없는 중심의 부재가 바로 차연의 핵심이다. 데리다는 이를 통해 서구 철학이 신, 본질, 로고스, 이성 등의 이름으로 설정해온 중심현전(presence)’의 신화를 해체한다. 중심이란 실제로는 구조적 효과이며, 의미는 언제나 차이와 지연의 반복 속에서만 나타난다.

해체란 이처럼 현존의 환상을 비틀고, 텍스트 내부의 모순과 불일치, 흔들리는 경계들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데리다는 텍스트 바깥은 없다(Il n’y a pas de hors-texte)”고 말하며, 의미는 결코 그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으며, 해석과 반복, 재기입의 과정 속에서만 생성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해체는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의미가 어떻게 구성되고 작동하며 또 어떻게 스스로를 붕괴시키는지를 정밀하게 추적하는 비판적 독해 방식이다.

차연은 말해질 수 없는 것, 그러나 말의 틈 속에서 끊임없이 작동하는 것,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서 진동하는 차이의 시간이다. 이 시간은 단순한 지연이 아니라, 의미를 영원히 유예시키는 운동성 자체이며, 모든 본질의 자리를 흔드는 생성의 움직임이다. 그런 의미에서 차연은 해체론의 뿌리일 뿐 아니라, 언어, 주체, 존재, 진리라는 형이상학의 심층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철학적 급진성 그 자체이다.

8.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서구가 동양을 재현하는 방식이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권력의 실천이자 지식의 정치라고 주장한다. 동양은 스스로 말하지 못하고, 언제나 서구 담론 속에서 타자로 위치 지어진다. 이 타자는 이국적이고 신비롭거나, 때로는 야만적이고 후진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사이드는 이러한 재현 방식이 단순한 편견을 넘어서 식민주의적 지배와 이성 중심주의, 인종적 우월감의 담론적 기획임을 드러낸다.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의 자아를 구성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문명야만’, ‘합리감성’, ‘진보정체라는 이분법 속에서 서구는 자기 자신을 보편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동양을 특수로 설정한다. 이때 동양은 존재가 아니라 서구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허구적 구성물이며, 그 안에서 타자성은 일관되게 배제되고 왜곡된다. 사이드는 이러한 재현의 권력을 비판하며, 담론의 권력 관계를 해체하는 작업이야말로 탈식민적 사유의 핵심이라고 본다.

그러나 동시에, 이 비판은 역으로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이라는 또 다른 반사적 타자화를 낳는다. 이는 서구에 의해 타자로 설정된 비서구가, 다시 서구를 악마화하거나 하나의 동질적이고 억압적인 기호로 환원해버리는 현상이다. 일부 근본주의적 반서구 담론은, 서구를 탐욕적이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일반화하며, 탈서구화 혹은 반서구화를 정치적 무기로 삼는다. 이 또한 타자화의 또 다른 얼굴이며, 문화 간의 실질적인 대화를 차단하고 우리 대 그들의 이항논리를 고착화시킨다.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은 서로를 반영하며, 상호 구성적인 폭력의 구조를 이루기도 한다. 진정한 해체는 어느 한 편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분법 자체의 인식 구조자기와 타자의 구분, 중심과 주변의 위계, 문명과 야만의 서사를 의심하고 해체하는 데서 시작된다. 담론이 권력이고, 권력이 곧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이라면, 탈식민적 사유는 그 권력의 언어를 벗기고, 새로운 언어를 상상하는 정치적 상상력을 요청한다

9.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단순히 현실을 왜곡하거나 거짓된 의식을 심는 장치가 아니다. 슬라보예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정치이론에 적용하며, 이데올로기를 거짓이 아니라 진실을 조직하는 방식으로 사유한다. 이데올로기는 주체가 세계를 이해하고, 자신을 위치 짓고, 욕망의 방향을 정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환상의 구조다. 그리고 이 환상 속에는 언제나 하나의 숭고한 대상이 자리한다.

라캉의 개념에서 숭고한 대상(objet petit a)’은 주체의 욕망을 일으키고 지속시키는 근본적 결여의 흔적이며,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 그러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무엇이다. 지젝은 이 개념을 빌려,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을 설명한다. 우리는 국가, 민족, 인종, 자유, 정의, 혹은 진정한 나와 같은 이름으로 숭고한 대상을 구축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살아간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라, 결핍을 가리기 위해 상상된 중심이며, 모든 정치적 열망과 신념을 몰아가는 욕망의 추동점이다.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 도달할 수 없는 숭고한 것을 통해 주체를 붙잡는다. 사람들은 이 대상이 없으면 자신이 붕괴될 것이라 느끼며, 그것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 폭력을 감내한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대상인 진정한 민족성’, ‘타락 이전의 공동체’, ‘원초적 순수성이 하나의 환상으로 자리 잡고, 그것을 욕망하는 구조가 반복된다. 그리고 그 환상은 외부의 적, 부정된 타자, 파괴된 과거와 함께 작동하면서 하나의 완전한 이데올로기적 무대를 구축한다.

지젝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환상 구조가 현대 정치의 가장 본질적인 기제로 작동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우리가 비판적 이성으로 이데올로기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여전히 그 환상을 따른다는 점,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를 통해 이데올로기가 주체와 얼마나 깊이 결합되어 있는지를 드러낸다.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세뇌나 외부의 강요가 아니라, 주체를 욕망하게 만드는 구조 그 자체다.

결국 이데올기라는 숭고한 대상은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는지를 결정짓는 보이지 않는 질서이자, 욕망을 통해 권력에 복종하게 만드는 섬세한 기제다. 그것은 허구인 동시에, 존재를 떠받드는 실재의 핵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해체는 단순한 폭로나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욕망의 재구성, 곧 삶의 양식 그 자체를 바꾸는 문제로 이어진다.

10. 세계체제론과 준주변부의 문화적 가능성

1) 중심부, 준주변부, 주변부

1) 중심부, 준주변부, 주변부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은 자본주의 세계경제를 하나의 총체적 시스템으로 보며, 이를 중심부(core), 준주변부(semi-periphery), 주변부(periphery)로 구분한다. 중심부는 고도 산업화와 금융자본 중심의 구조로 이윤을 독점하고, 주변부는 원자재 공급과 노동력 착취의 장소로 기능한다. 이 사이에 위치한 준주변부는 불안정하고 모순적인 중간지대다. 중심부를 모방하면서도 그에 도달할 수 없고, 주변부를 지배하려 하지만 여전히 주변부로부터 착취당하는 복합적 위상을 지닌다.

문화적으로도 이 위계는 그대로 재현된다. 중심부는 보편적이고 고급한 문화의 생산지로, 주변부는 민속적이거나 전통적인 것으로 분류되고, 준주변부는 그 둘 사이에서 모방, 변형, 위장, 이중 코드의 양상을 띤다. 그러나 바로 이 이중성과 불안정성 속에서 준주변부는 독특한 전복의 문화적 공간을 형성할 수 있다. 준주변부의 문화는 중심부의 보편주의적 권위에 저항하면서도, 주변부의 민중성과 연대하려는 이중적 운동을 통해 새로운 문화적 가능성을 실험한다.

2) 일본 근대문학의 특성의 하나로 전도라는 개념을 주목

일본 근대문학의 형성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 중 하나는 **‘전도(顚倒)’**의 개념이다. 이는 단순히 위계를 뒤바꾸는 반전이 아니라, 외형상 중심을 모방하면서도 구조적 위계를 되오려는 기묘한 내면화와 대체의 전략을 의미한다. 이 개념은 가라타니 고진이 자신의 일본 근대문학론 전반에서 일관되게 분석해온 핵심이며, 번역과 수용, 동일화와 전복이 복합적으로 얽힌 준주변부 문화 특유의 사유 구조를 가장 날카롭게 드러내는 장치다.

가라타니는 일본의 근대문학이 서구문학의 번역을 통해 탄생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출발부터 타자의 언어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구성한 형식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이러한 번역은 단순한 언어의 치환이 아니라, 서구적 문학 형식을 자국의 전통으로 가장하고 재구성하는 전도적 작업이었다. 그는 이를 "전도된 보편성의 욕망"이라고 부른다. , 일본은 서구의 문법을 따르며 보편성을 획득하고자 했지만,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주변으로부터 끌어올려 중심으로 가장하려는 전도적 전략을 수행한 것이다.

이러한 전도는 번역의 실천뿐 아니라 문학 내부의 언어 구조, 서사의 구성 방식, 인물의 주체화 양식 등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일본의 근대소설은 표면적으로는 서구의 리얼리즘 서사를 따르지만, 그 안에는 식민적 상황에서 형성된 권력 감각과 열등감, 중심 모방의 긴장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가라타니는 바로 이 가짜 보편성에 대한 집착이 일본 문학의 독특한 윤리와 감수성을 형성했다고 보았다.

전도는 따라서 일본 문학을 서구 근대문학의 열등한 모방으로 평가하는 기존의 위계적 시각을 넘어서, 준주변부 문학만이 보여줄 수 있는 혼종성과 균열의 장소로 재조명하게 만든다. 이 개념은 동시에, 번역의 정치성, 문화적 자기 식민화, 그리고 문학이라는 제도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 이어진다. 결국 전도는 근대문학이 어떻게 타자의 언어를 빌려 자기 언어를 구축하며, 그 안에서 세계체제의 위계와 내면적 균열을 고스란히 반영하게 되는지를 드러내는 결정적인 사유 틀이라 할 수 있다.

3) 준주변부 사회의 가능성과 소설의 진화

이러한 준주변부의 모순과 분열은, 단지 한 시대의 특성이 아니라 지금 이곳, 우리 문학의 조건이기도 하다. 한국은 세계체제론적으로 보았을 때 전형적인 준주변부의 위치에 있으며, 글로벌 문화 자본과의 불균형 속에서 동시에 수출하고 모방하며, 비판하고 향유하는 이중의 문화 생산자로 살아간다. 이 위치는 불안정하고 모순적이지만, 바로 그 경계성 속에서 새로운 문학적 가능성이 발생한다.

특히 소설이라는 장르는 이중적 위상과 언어의 겹침을 가장 정교하게 실현할 수 있는 형식이다. 준주변부 사회의 작가들은 중심부의 서사 규범을 참조하면서도, 주변부의 목소리를 끌어들여 서사의 층위와 언어의 리듬을 교란시킨다. 이러한 소설은 구조상으로는 보편적인 플롯을 따르지만, 그 내부에서 민중적 기억, 지역적 감각, 탈역사적 시간 등을 흘러넣음으로써 균열을 발생시킨다.

가라타니가 말한 내면의 식민지, 중심의 규범이 외부에서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이미 내면화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오늘날 소설은 바로 이 내면화된 구조에 대한 감각적, 서사적 저항을 통해 진화한다. , 준주변부 소설은 자신을 지배하는 형식을 스스로 흉내 내고, 동시에 교란함으로써, 새로운 서사의 윤리를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준주변부는 중심이 될 수 없음의 불안을 반추하는 공간이자, 미래의 다성적 문학과 윤리를 발명하는 실험실이 될 수 있다. 중심부의 거대한 담론이 이미 낡은 언어로 전락한 이 시대에, 주변과의 접촉과 불균형, 전도와 탈코드화의 흔들림을 껴안는 소설만이 새로운 존재 방식을 탐색할 수 있다. 세계문학의 시대, 그 모호한 국경선 위에서 소설은 여전히 가장 유연하고 불온한 실천의 장이다.

 

4 주 차

. 러시아 형식주의

기원

1) 러시아식 맑스주의 비평에 대한 반발

러시아 형식주의는 20세기 초 러시아 비평계에서 주류를 이루던 맑스주의적 문학관에 대한 비판적 대응으로 등장하였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문학을 계급투쟁이나 사회 구조의 반영으로 이해하려는 이념 중심의 비평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접근은 문학 작품을 사회적 조건의 산물로 환원하며, 그 고유한 언어와 구조, 형식의 문제를 간과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했다.

형식주의자들은 이 같은 환원주의적 태도에 문제의식을 품고, 문학을 정치적 메시지나 사회적 이념의 도구로 보는 관점을 벗어나고자 했다. 그들은 문학을 다른 담론들과 구별짓는 고유한 속성을 문학 내부에서 찾고자 했으며, 특히 문학을 구성하는 언어, 서사 장치, 형식적 기법에 주목했다.

이러한 비판적 태도는 당시 유행하던 이데올로기 중심 비평의 경직성과 단일한 해석 방식에 저항하는 의미도 담고 있었다. 형식주의자들은 문학 작품이 하나의 자율적인 예술 형식으로 기능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문학을 연구하는 학문 역시 과학적이고 엄밀한 방법론을 갖추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러시아 형식주의의 출발은 단지 문학을 새롭게 분석하려는 시도에 그치지 않고, 기존의 사회학적·심리학적 비평 전통에 대한 이론적 전환을 선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맑스주의 비평에 대한 반발은 형식주의가 문학성이라는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며 본격적인 문학 이론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2) 문학을 문학답게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문학적 형식에서 찾기 시작

러시아 형식주의는 "문학을 문학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한다. 이들은 문학이 단순한 사상이나 감정의 전달 수단이 아니라, 고유한 언어적 구조와 형식적 장치를 통해 작동하는 자율적인 예술 형식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인식은 기존의 심리주의적 비평이나 사회학적 접근이 간과해온 문학 내부의 형식적 특질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형식주의자들은 특히 문학 언어의 낯설게 하기(остранение) 기능에 주목했다. 빅토르 시클롭스키는 일상 언어와 문학 언어의 차이를 강조하며, 문학이란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드는 언어적 장치를 통해 독자의 감각을 각성시키는 예술이라고 보았다. 이는 문학의 본질을 그 내용이 아니라 어떻게 말하는가’, 즉 표현 방식과 구조의 독창성에서 찾는 태도였다.

또한 이들은 문학의 발전사를 단순한 시대별 주제나 사상의 흐름으로 파악하지 않고, 형식 간의 상호작용과 진화로 이해했다. 예컨대 유리 티냐노프는 문학사의 변화를 형식의 변화로 분석하면서, 문학을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체계로 보았다. 이러한 시각은 문학을 해석의 대상이 아닌 구조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이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게 문학의 본질은 그것이 담고 있는 주제나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언어와 형식 그 자체가 만들어내는 예술적 효과에 있었다. 문학성을 형식에서 찾고자 했던 이들의 시도는 문학 이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이후 구조주의 문학이론의 출현에도 중요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게 된다.

2. 주요 용어

1) 낯설게 하기

낯설게 하기는 러시아 형식주의의 중심 이론 중 하나로, 빅토르 시클롭스키(Viktor Shklovsky)1917년 발표한 논문 예술의 기법으로서의 낯설게 하기(Искусство как приём)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시클롭스키는 문학의 본질을 대상을 낯설게 만들고, 형식을 어렵게 하여 지각의 과정을 연장하는 데 있다고 규정한다. 이 말은 곧, 문학은 독자가 익숙하다고 생각한 대상을 전혀 새로운 감각으로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형식적 장치를 통해 작동한다는 의미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인식은 일상 속 반복과 습관화로 인해 점차 자동화된다. 사물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느끼기보다 기계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문학은 이 자동화된 지각을 깨뜨리기 위해 의도적인 언어의 비틀기, 구조의 변형, 표현 방식의 파격 등을 사용함으로써, 독자의 감각을 각성시키고 사물의 본질을 새롭게 경험하게 만든다. 이때 문학의 기능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을 재구성하는 감각의 예술로 규정된다.

시클롭스키는 이러한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레프 톨스토이의 글쓰기 방식을 자주 예로 든다. 톨스토이는 일상적인 상황이나 개념을 마치 처음 본 것처럼 묘사하며, 낯익은 세계를 이질적인 시선으로 전환시킨다. 그는 이를 순진한 시선이라 부르며, 사물을 바라보는 아동이나 외부인의 시각을 문학적으로 도입하여 자동화된 인식을 깨뜨린다. 또한 톨스토이는 의인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사물이나 동물에게 인간의 감각과 정서를 부여함으로써 현실을 새롭게 구성한다. 이는 곧 문학 언어의 낯설게 하기 전략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시도는 이후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소격효과(Verfremdungseffekt) 개념과도 밀접하게 이어진다. 브레히트는 관객이 극에 몰입하지 않고, 그것을 거리감 있게 지각하며 비판적으로 성찰하도록 유도하고자 했다. 이는 감정의 동일화보다는 이성의 각성을 유도하기 위한 장치로, 시클롭스키의 낯설게 하기처럼 일상적 현실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미학적 전략이다. 다만 브레히트는 정치적 효과를 의도한 반면, 시클롭스키는 문학 자체의 자율성과 미학적 구조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그 목적과 이념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요약하자면, ‘낯설게 하기는 문학이 현실을 새로운 감각으로 인식하게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형식적 기법이며, 톨스토이의 묘사 방식과 브레히트의 소격효과 모두 이러한 전략의 확장된 예시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러시아 형식주의가 문학을 내용이 아니라 형식의 효과로 파악하고자 했던 이론적 핵심을 잘 보여준다.

2) ‘낮은 장르에서 높은 장르로’, ‘삼촌에서 조카로

러시아 형식주의는 문학사를 단순히 시대별로 나누는 연대기적 서술이나, 작가의 사상 변화에 초점을 맞춘 서사적 흐름으로 보지 않았다. 그 대신 문학의 역사를 형식(form)의 변화와 진화의 역사로 이해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등장한 핵심적인 비유가 바로 낮은 장르에서 높은 장르로’, ‘삼촌에서 조카로라는 표현이다.

먼저, ‘낮은 장르에서 높은 장르로라는 표현은 문학 형식의 발전이 사회적 위계에 따라 고정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찮거나 주변부에 위치한 형식이 기존의 중심적인 장르를 대체하며 문학의 주도권을 쥐게 되는 방식을 뜻한다. 예컨대 초기에는 우화나 민담처럼 구술성과 대중성을 지닌 장르가 낮은 장르로 여겨졌으나, 이러한 장르들이 기존의 서사시나 비극과 같은 고전적 형식을 침투하거나 전복하면서 문학사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형식의 혁신은 종종 비주류에서 비롯된다는 통찰을 담고 있으며, 문학 형식 간의 전쟁과 교체 과정을 설명하는 데 매우 유용한 개념이다.

이와 연결되는 표현이 바로 삼촌에서 조카로이다. 이 말은 유리 티냐노프(Yury Tynyanov)가 문학사에서 형식의 세대 교체를 설명하며 사용한 비유적 표현으로, 기존 문학 형식을 삼촌에 비유하고, 새로운 문학 형식을 조카에 비유하여, 문학 형식이 점진적이거나 혈통적인 방식이 아니라, 세대 간 갈등과 긴장을 통해 단절적이고 역동적으로 발전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새로운 형식은 기존의 문학 체계에 순응하거나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식을 낡은 것으로 만들고 문학의 문학성을 갱신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관점은 문학을 고정된 규범의 틀로 보지 않고, 형식 간의 충돌과 대체, 주변 장르의 중심화, 예술 장치의 실험과 진화를 통해 지속적으로 재구성되는 동적인 체계로 이해하게 만든다. 이는 러시아 형식주의가 문학을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파악하고, 그 역사마저 형식 중심으로 해석하려 했던 철저한 형식 중심주의의 일면을 보여준다.

요컨대, ‘낮은 장르에서 높은 장르로’, ‘삼촌에서 조카로는 문학 형식의 진화가 중심에서 주변으로, 주변에서 다시 중심으로 이동하는 순환적이며 비선형적인 과정을 설명하는 메타포로, 형식주의 문학사 이론의 핵심을 간결하게 상징한다.

 

. 체코의 프라하 학파 야콥슨

러시아 형식주의의 이론적 유산은 1920년대 이후 정치적 억압과 학문적 해산 속에서 직접적으로 계승되기 어려웠지만, 로만 야콥슨(Roman Jakobson)을 중심으로 체코 프라하 학파(Prague Linguistic Circle)에서 그 핵심 개념들이 구조주의로 전이되며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다. 프라하 학파는 1926년 프라하에서 결성된 언어학 중심의 연구 모임으로, 야콥슨, 니콜라이 트루베츠코이(Nikolai Trubetzkoy), 얀 무카르조프스키(Jan Mukařovský) 등이 중심 인물이다.

야콥슨은 러시아 형식주의 시절부터 문학을 언어의 예술로 인식하고, 문학의 문학성(literariness)’을 구성하는 요소를 형식적 장치에서 찾는 데 몰두해 왔다. 프라하 학파에 와서도 그는 이 같은 관점을 더욱 체계화하고, 문학과 언어의 관계를 보다 정밀한 구조 속에서 분석하려 했다. 특히 그는 언어학의 영역에서 언어의 기능적 분화를 통해 문학 언어의 독자성을 설명하고자 했다.

야콥슨은 언어의 여섯 가지 기능(지시적, 정서적, 명령적, 접촉적, 메타언어적, 시적 기능) 가운데 문학 언어가 주로 수행하는 기능으로 시적 기능(poetic function)’을 강조했다. 이는 언어가 의미를 전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언어 그 자체의 형식적 배열과 반복, 음성적 구성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문학 언어는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어떻게 말하는가에 집중하게 만든다.

또한 야콥슨은 통사 구조(syntagmatic axis)와 연합 구조(paradigmatic axis)의 개념을 도입하여, 문학 작품이 언어 요소들을 어떻게 선택하고 배열하는지를 분석하는 틀을 제공했다. 이 이론은 이후 구조주의 문학비평과 기호학적 분석의 기초가 되었다.

프라하 학파의 또 다른 중심 인물인 얀 무카르조프스키는 문학 언어의 자율성과 더불어, 문학의 미적 기능과 사회적 기능 간의 긴장을 탐구하면서, 형식주의의 고립적·자율적 경향을 확장된 문화 맥락 속에서 재해석하려 했다. 이로써 프라하 학파는 러시아 형식주의의 분석적 엄밀성을 계승하면서도, 구조주의 언어학, 기호학, 문화이론 등으로 이론의 지평을 확장하는 전환점을 마련했다.

요컨대 프라하 학파는 러시아 형식주의가 이룩한 형식 중심의 문학 분석을 계승하면서도, 언어학적 방법을 구조화하고 문학의 기능적 측면을 보다 세밀하게 분석함으로써, 현대 문예이론과 구조주의 미학의 기반을 정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야콥슨은 그 이론적 가교이자 확장자로서 문학의 형식성과 언어적 구조를 설명하는 정교한 도구들을 제공했다.

자기 초점적 언어

자기 초점적 언어는 로만 야콥슨(Roman Jakobson)이 문학 언어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으로, 언어가 외부의 대상을 지시하거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언어 자체를 대상으로 삼아 그 형식과 구조에 주의를 집중시키는 언어 사용 방식을 말한다. 이 개념은 야콥슨의 언어 기능 이론 가운데 특히 시적 기능(poetic function)’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야콥슨은 언어의 여섯 가지 기능(지시적, 정서적, 명령적, 접촉적, 메타언어적, 시적 기능) 중에서 문학, 특히 시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기능이 시적 기능이라고 보았다. 이 기능은 화자와 청자, 혹은 현실 세계 사이의 관계보다는, 언어의 표현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자기 지시적(self-referential) 성격을 띤다. , 문학 언어는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어떻게 말하느냐를 중요하게 여기며, 언어적 배열, 리듬, 반복, 음운적 대칭성 등과 같은 형식적 요소를 드러내는 데 주력한다.

예를 들어, 시 속에서 라임, 음의 반복, 병렬구조, 대구법 등이 사용될 때, 독자의 주의는 자연스럽게 의미의 전달이 아닌 언어의 구성 방식 그 자체로 향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자기 초점적 언어의 작용이다. 이러한 언어는 독자에게 익숙한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경험하게 만들며, 이는 러시아 형식주의의 낯설게 하기와도 통하는 지점이다.

야콥슨은 문학 텍스트가 지닌 자기 초점성을 통해, 언어가 단순한 도구를 넘어 하나의 자율적 예술 형식으로 기능한다고 보았다. 이는 문학 언어의 독자성을 옹호하고, 문학을 단순한 커뮤니케이션이나 현실 반영의 수단으로 환원시키는 관점을 비판하는 이론적 토대가 된다.

결론적으로 자기 초점적 언어란, 문학 언어의 시적 기능을 구현하는 중심 개념으로서, 언어 자체를 향한 감각과 인식을 열어주는 형식적 장치이며, 야콥슨이 형식주의에서 구조주의로 이행하며 정립한 문학 이론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이다.

2. 실어증의 두 유형

로만 야콥슨은 언어학과 시학뿐만 아니라 언어병리학(특히 실어증 연구)에도 깊은 관심을 두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문학 언어의 구조적 이해를 확장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는 실어증(aphasia), 즉 뇌손상으로 인한 언어 능력의 장애를 연구하면서, 인간의 언어 사용이 근본적으로 두 가지 축(axis)에 의해 구성된다는 통찰을 제시했다. 바로 통합의 축(syntagmatic axis)과 선택의 축(paradigmatic axis)이다.

야콥슨은 실어증을 이 두 축의 손상 유형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누었다:

(1) 선택의 축 손상 명칭적 실어증 (Nominal aphasia, 유사형 실어증)

이 유형은 선택(paradigmatic)’의 축, 즉 언어 단어군 내에서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는 능력이 손상된 경우다. 환자는 말하고자 하는 단어나 표현을 떠올리지 못해 유사어를 반복하거나 회피적인 방식으로 말하는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어, 사과를 보고도 그 빨간 거’, ‘먹는 거등으로 표현하며 정확한 단어를 말하지 못한다.

야콥슨은 이러한 현상이 은유적 언어 사용(metaphor)의 손상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문학 언어에서 은유는 비슷한 속성을 공유하는 대상들을 선택하여 대체하는 방식인데, 이 기능이 손상되면 시적 언어의 핵심적인 표현 수단 중 하나가 무력화된다.

(2) 통합의 축 손상 구문적 실어증 (Syntactic aphasia, 문법형 실어증)

이 유형은 통합(syntagmatic)’의 축, 즉 문장 내에서 단어들을 문법적으로 결합하고 배열하는 능력이 손상된 경우다. 환자는 단어 하나하나는 인식하고 사용할 수 있지만, 그것들을 문법적으로 연결하여 올바른 문장을 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말이 단절되거나 단어가 비문법적으로 나열되며, 문장의 조직적 흐름이 붕괴된다.

야콥슨은 이를 환유적 언어 사용(metonymy)의 붕괴로 보았다. 환유는 인접한 관계에 있는 단어들을 연결하는 방식인데, 통합 축의 손상은 이러한 연결의 능력, 즉 이야기의 논리적 흐름이나 시간적 배열을 약화시킨다.

이 두 유형의 실어증 분석은 단순한 병리적 진단이 아니라, 야콥슨이 문학 언어를 해석하는 하나의 방법론으로도 전환된다. 그는 모든 언어적 표현, 특히 문학 텍스트는 은유(선택의 축)와 환유(통합의 축)의 상호작용 위에 구성된다고 보았고, 이는 나중에 기호학, 정신분석학(특히 라캉), 그리고 문학비평에서 은유적·환유적 구조를 분석하는 주요 토대로 확장되었다.

요약하자면, 야콥슨의 실어증 이론은 문학 언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구조적 모델이며, 문학을 병리학의 언어적 지식과 연결시켜 사고하려는 학제적 통찰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 영미의 신비평

의도의 오류, 감정의 오류

영미 신비평(New Criticism)20세기 초반에서 중반 사이 미국과 영국 문학 비평계에서 주도적으로 자리잡은 문학이론 운동으로, 문학 텍스트를 자율적이고 독립된 구조로 간주하며 작품 그 자체에 내재된 언어, 구조, 의미의 복잡성에 주목한다. 신비평은 특히 작가의 의도나 독자의 반응에 의존하지 않고, 텍스트 내부의 긴밀한 분석(close reading)을 통해 의미를 밝혀내는 방법론을 정립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대표적인 개념이 바로 의도의 오류(Intentional Fallacy)와 감정의 오류(Affective Fallacy)이다.

(1) 의도의 오류 (Intentional Fallacy)

의도의 오류란, 문학 작품의 의미를 해석할 때 작가의 의도에 근거하는 것이 잘못된 방법이라는 주장이다. 이 개념은 신비평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윌리엄 윔삣(William K. Wimsatt)과 몬로 비어즈(Monroe C. Beardsley)1946년 발표한 논문 의도의 오류에서 제시되었다.

이들은 "작가의 의도는 추측일 뿐이며, 그것이 작품의 진정한 의미를 보장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문학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자율적인 언어 구조물이 되며, 작품 해석은 텍스트 내부의 구조와 언어, 모티프, 상징, 형식적 요소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의도의 오류는 작가의 전기, 사회적 배경, 초고 등을 과도하게 참조하여 작품 해석을 제한하는 오류를 경계한다.

(2) 감정의 오류 (Affective Fallacy)

감정의 오류는 작품의 의미나 가치를 독자가 느끼는 감정 반응을 통해 판단하는 것의 오류를 지적한다. 이 개념 또한 윔삣과 비어즈가 제시했으며, 1949년 발표된 논문 감정의 오류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진다.

이들은 독자의 감정 반응은 개인적이며 주관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작품의 의미로 삼는 것은 문학 비평의 객관성을 해치는 일이라고 보았다. 예컨대 어떤 시를 읽고 슬픔을 느꼈다고 해서, 그 시의 의미를 슬픔을 느끼게 하는 시로 환원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작품은 감정의 전달체가 아니라, 언어로 구성된 예술적 구조물로서 그 자체의 형식과 의미 작용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두 오류 개념은 신비평의 형식주의적, 텍스트 중심적 접근 방식을 강하게 드러내며, 문학 해석에서 외부적 요소(작가나 독자)를 배제하고 작품 내부의 언어적, 구조적 분석에 집중하라는 원칙을 뒷받침한다. 결과적으로 신비평은 문학을 일종의 유기적 전체(organic whole)’로 간주하며, 그 내부의 긴장, 역설, 아이러니 등을 분석하여 텍스트가 생성하는 의미의 복잡성을 드러내려 했다.

2. 객관적 상관물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은 영국의 시인·비평가 T. S. 엘리엇(T. S. Eliot)이 문학 비평에서 제시한 핵심 개념으로, 감정의 표현을 주관적인 설명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이미지나 사건, 장면을 통해 간접적으로 구현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 개념은 특히 그의 1919년 비평문 햄릿과 그의 문제(Hamlet and His Problems)에서 명확하게 제시된다.

엘리엇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실패한 작품이라고 평가하며, 그 이유를 "햄릿의 내면적 고뇌를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객관적 상관물이 부족하다"고 분석했다. 다시 말해, 등장인물의 감정이 충분히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장면이나 상징, 사물 등을 통해 외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독자 또한 그 감정을 납득하거나 공유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엘리엇에 따르면, 강한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려면 그 감정에 대응하는 일련의 구체적인 사건, 이미지, 상황이 필요하며, 이들이 감정의 객관적 대응물이 되어야 한다. 감정은 직접 진술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그 형상화를 통해 스스로 느끼도록 구조화된 표현을 통해 유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슬픔을 나는 너무 슬프다고 말하는 대신, 흐린 창밖의 비, 꺼진 촛불, 묵직한 침묵 같은 이미지들로 구성하면, 독자에게 더 강력하고 정제된 감정이 전달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감정은 서술이 아니라 형식과 이미지의 배열로 구현되어야 하며, 그것이 문학 언어의 본질적 기능이라는 점에서 이론은 신비평의 형식 중심주의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객관적 상관물개념은 이후 감정의 오류(Affective Fallacy)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독자의 주관적인 감정 반응에 기대지 않고, 텍스트 자체가 감정의 구조를 어떻게 형식적으로 조형하는가를 분석하는 데 초점을 맞춘 신비평의 방법론에 깊이를 더했다.

요약하자면, 객관적 상관물은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형식적 장치로서, 문학이 감정을 직접 진술하지 않고 객관화된 이미지와 사건의 배열로 감정을 보이게한다는 원칙이며, 이는 신비평의 자율적이고 내재적인 문학 해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3. 외연과 내포 사이의 긴장 => 존 크로우랜섬

존 크로우 랜섬(John Crowe Ransom)은 신비평(New Criticism)의 대표적인 이론가 중 한 명으로, 문학 텍스트, 특히 시(poetry)의 언어가 지닌 외연(denotation)’내포(connotation)’ 사이의 긴장에 주목했다. 그는 시의 본질이 단순한 의미 전달이 아니라, 언어가 지닌 복수성과 긴장을 예술적으로 조직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1) 외연과 내포의 개념

외연(denotation)은 언어가 지시하는 사전적이고 일차적인 의미를 뜻한다. , ‘사과라는 단어가 실제 과일을 가리키는 것처럼, 객관적이고 명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언어 기능이다.

반면, 내포(connotation)는 특정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상징적, 문화적 의미들을 포함한다. ‘사과가 유혹, , 자연, 순수성 같은 의미를 함축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내포다.

(2) 긴장(tension)의 미학

랜섬은 시 언어가 이 두 층위외연적 의미와 내포적 의미사이에서 끊임없이 긴장(tension)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이 긴장은 시적 언어의 생명력과 복잡성의 원천이며, 시를 단순한 설명이나 전달이 아닌 예술로 만들어주는 핵심 요소다.

그는 시가 과학적 언어와 달리 모순된 이미지, 아이러니, 패러독스, 은유 등을 통해 다층적인 의미를 창출한다고 보았다. 이로써 시는 독자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주기보다는, 언어적 구조 안에서 끊임없는 의미의 충돌과 조율을 경험하게 만든다.

(3) 신비평적 시 해석의 기준

랜섬의 이론은 신비평의 대표적 방법인 긴밀한 독해(close reading)’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다. 그는 시를 해석할 때 작품의 외적인 맥락이나 작가의 의도를 따지기보다, 언어 내부의 구조와 긴장 관계를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의도의 오류’, ‘감정의 오류와 연결되며, 텍스트 자체에 내재된 복잡성과 조화를 해석의 중심에 두려는 신비평의 태도와 정확히 맞물린다.

랜섬은 이러한 긴장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유지될 때, 시는 독창성과 미학적 밀도를 갖추게 되며, 의미가 열린 채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예술적 장치로 기능한다고 보았다.

요약하자면, 존 크로우 랜섬은 시 언어가 외연과 내포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을 예술적으로 조직하는 방식에 주목함으로써, 문학의 본질을 언어의 복수성과 긴장에서 찾았다. 그의 이론은 신비평이 문학을 단순한 전달 수단이 아닌 자율적 언어 구조물로 이해하고, 그 내재적 복잡성을 면밀히 분석하려 했다는 점을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4. 애매성과 다의성 윌리엄 엠프슨

애매성(ambiguity)과 다의성(plurality)은 신비평의 언어관을 이해하는 핵심 개념으로, 문학 작품, 특히 시의 언어가 단일한 의미로 환원되지 않고 여러 층위의 의미가 공존하는 특성을 가리킨다. 이 개념은 신비평 이론가 가운데 윌리엄 엠프슨(William Empson)이 가장 집중적으로 탐구한 주제이다.

(1) 일곱 가지 애매성(Seven Types of Ambiguity)

엠프슨은 1930년에 출간한 저서 일곱 가지 애매성(Seven Types of Ambiguity)에서, 시적 언어는 필연적으로 애매하고 다의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며, 그러한 애매성 자체가 문학의 깊이와 미학적 가치를 구성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문학 텍스트가 언어적 모호함을 통해 독자에게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제공하며, 바로 그 다층성 속에 문학적 긴장과 생명력이 깃들어 있다고 본다.

그가 제시한 일곱 가지 애매성은 단순한 말장난이나 수사적 기교가 아니라, 언어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 복합적인 의미작용의 유형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한 것이다. 예를 들어, 단어의 중의적 의미, 문장의 문법적 구조의 이중성, 대립된 의미의 공존, 논리적 모순의 유지 등을 통해 시어는 독해를 하나의 결론으로 이끌기보다 열린 의미의 장을 구성한다.

(2) 신비평의 언어관과 연결

엠프슨의 애매성과 다의성 이론은 신비평이 강조한 텍스트 내재적 의미 분석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그는 작가의 의도나 독자의 감정 반응에 의존하지 않고, 언어 자체가 만들어내는 의미의 복잡성을 해석의 중심에 두었으며, 그 의미는 단일하지 않고, 오히려 모순과 긴장의 유지 속에서 더욱 예술적인 힘을 획득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접근은 존 크로우 랜섬의 외연과 내포 사이의 긴장’, 클린스 브룩스의 아이러니와 패러독스’, 그리고 야콥슨의 시적 기능개념과도 일맥상통하며, 시의 언어가 복잡하고 자율적인 구조체로 작동한다는 신비평적 전제를 더욱 정교하게 뒷받침한다.

요약하자면, 애매성과 다의성은 문학 언어가 단순히 하나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거나 겹쳐지는 의미들을 함께 품고 독자에게 열린 해석의 공간을 제공한다는 원리이며, 이는 신비평이 문학 작품을 닫힌 메시지가 아니라 열린 구조로 읽어야 한다는 해석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5. 플롯과 스토리 (Plot and Story)

플롯(plot)’스토리(story)’의 구분은 원래 러시아 형식주의, 특히 보리스 토마셰프스키(Boris Tomashevsky)와 빅토르 시클롭스키(Viktor Shklovsky) 등의 서사 이론에서 정교하게 다듬어진 개념이지만, 이후 신비평에서도 텍스트 내의 구조적 긴밀성과 효과의 조직 방식을 분석하는 데 중요한 틀로 활용되었다.

(1) 스토리 (Story, fabula)

스토리는 사건이 발생한 사실적·논리적·시간적 순서를 따라 배열된 이야기의 내용적 구성을 말한다. ,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시간의 흐름대로 기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스토리는 소설이나 극의 배경 줄거리로 요약될 수 있으며, 재현된 세계의 객관적 구조로 간주된다.

: "A가 죽고, 그 후 B가 복수했다"는 사건의 순차적 나열.

(2) 플롯 (Plot, syuzhet)

플롯은 이러한 스토리를 어떻게 배열하고 조직할 것인가에 대한 형식적 선택의 결과로, 작가가 의도적으로 시간의 순서를 뒤틀거나, 반복하거나, 생략하거나, 전환시키는 방식을 포함한다. , 텍스트 속에 실제로 드러나는 이야기의 표현된순서와 구조이다.

: 이야기의 시작을 B의 복수로 시작하고, 이후에 A의 죽음을 회상 장면으로 삽입하는 구성.

(3) 신비평과의 접점

신비평은 전통적으로 서사보다는 시적 언어와 그 구조적 긴밀성에 초점을 맞췄지만, 서사시나 극, 소설 등도 분석 대상으로 삼으면서 작품 내부의 구조와 전개 방식을 주목했다. 이때 플롯과 스토리의 분리 개념은 신비평적 형식 중심의 접근법과 잘 맞아떨어진다. 플롯은 단순한 이야기 전달이 아니라, 언어적 배치와 구조의 예술적 선택을 보여주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신비평은 이처럼 단순한 이야기 요약(storytelling)을 배제하고, 문학 텍스트 내부의 조직 원리로서의 플롯, 그리고 그 안에서 작동하는 아이러니, 긴장, 패러독스, 상징의 구조를 읽어내는 데 관심을 집중했다.

요약하자면, 스토리는 이야기의 내용이고, 플롯은 그 이야기를 어떻게 형식적으로 조직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신비평은 형식주의의 이 개념을 받아들여, 서사를 하나의 예술적 구조물로 분석하는 방식으로 확장했고, 이는 문학작품을 단순한 전달 수단이 아니라, 언어와 구조의 미학적 배열로 보는 문학 이론의 전환점이 되었다.

6. 보여주기와 말하기 (Showing vs. Telling)

보여주기(showing)’말하기(telling)’는 문학 이론과 서사 기법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분석 기준이 되어온 개념으로, 텍스트가 인물, 사건, 감정을 어떻게 재현하고 구성하는가에 대한 기술 방식의 차이를 가리킨다. 이 구분은 헨리 제임스(Henry James) 이후 비평가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개념화되었고, 이후 신비평(New Criticism)의 형식주의적 텍스트 분석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1) 말하기 (Telling)

말하기는 서술자(narrator)가 독자에게 인물의 성격이나 감정, 사건의 경과를 직접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이야기의 전개나 정보를 빠르게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독자의 능동적 해석보다는 수동적 수용을 유도한다.

: "그는 슬펐다. 그는 외로움을 느꼈다."

이처럼 감정이나 상황이 서술자의 목소리로 명시적으로 전달되며, 이는 문학적 긴장이나 상징성의 가능성을 다소 약화시킬 수 있다.

(2) 보여주기 (Showing)

보여주기는 서술자가 개입하지 않고, 대사, 행동, 상황, 심리 묘사 등을 통해 독자가 인물의 성격이나 감정을 직접 추론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이는 문학의 형식적 세공과 감정의 간접적 환기에 초점을 두며, 텍스트 내의 구조와 의미의 복합성을 강조하는 신비평적 관점과도 잘 부합한다.

: "그는 한참 동안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에 쥔 컵을 내려놓았다."

이처럼 직접적인 설명 없이도 독자는 인물의 감정이나 내면 상태를 보게된다. 이 방식은 언어의 상징적 층위, 아이러니, 패러독스 등이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3) 신비평적 의의

신비평은 문학작품을 자율적이고 유기적인 언어 구조로 간주하며, 작품의 형식이 의미의 생성 방식과 긴밀하게 연결된다고 본다. 이 점에서 보여주기방식은 텍스트 내재적 구조의 복잡성과 해석 가능성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기법으로 간주되었다. 반대로 말하기는 작품 외적 요소에 대한 의존성이 높아져, 신비평이 경계한 작가의 의도나 독자의 감정 반응에 쉽게 노출될 수 있다.

요약하자면, ‘보여주기는 문학적 형식의 자율성과 긴밀성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신비평의 내재적 접근 방식과 깊이 연결되며, ‘말하기는 외재적 설명이 개입된, 상대적으로 덜 문학적인 방식으로 간주되었다. 신비평은 이러한 구분을 통해 문학 언어가 어떻게 말 그 자체로 작동하며, 어떻게 감정과 의미를 구성하는가를 분석하는 데 집중했다.

 

. 바흐친

러시아 형식주의와 맑시즘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려는 시도: 사회학적 시학

미하일 바흐친은 러시아 문학이론의 흐름 속에서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한 사상가이며, 특히 러시아 형식주의(Formalism)와 맑시즘(Marxism)이라는 양 극단의 문학이론을 비판적으로 조율하면서, 이를 토대로 사회학적 시학’(sociological poetics)이라는 독자적 문예이론을 제시한다. 그의 이론은 문학의 사회적·대화적 성격을 중심에 놓고, 언어의 다성성, 이질적 담론의 공존, 역사적 시간성을 분석 단위로 삼는 것이 특징이다.

1) 러시아 형식주의에 대한 수용과 비판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문학의 자율성과 형식적 구조에 주목하며, 문학 텍스트 내부의 장치(: 낯설게 하기, 플롯 구조, 리듬)를 분석의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 바흐친은 이러한 형식주의의 공헌, 특히 언어적 장치의 분석과 텍스트의 질서화된 체계성에 대해 긍정하지만, 그들이 언어를 사회적·역사적 맥락에서 단절시키고 의미의 생성을 언어적 조작의 결과로만 한정하는 점을 비판한다.

바흐친에게 있어 언어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모든 말은 사회적 관계의 산물이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획득한다. 따라서 그는 형식주의의 자율적 언어관을 넘어서, 언어를 사회적 실천의 일환이자 역사적 투쟁의 장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2) 맑시즘과의 변증법적 긴장

맑시스트 문예이론은 문학을 계급 이데올로기의 반영으로 이해하며, 작가의 사회적 위치와 생산 양식의 반영 구조에 초점을 맞춘다. 바흐친은 이와 같은 기계적 반영론적 접근 역시 문제 삼는다. 그에 따르면, 문학은 단지 사회 구조의 수동적 반영이 아니라, 사회적 의미가 끊임없이 협상되고 충돌하는 대화적 공간이다.

그는 문학 텍스트 안의 언어가 계급, 사회, 문화, 역사적 목소리들이 교차하며 형성되는 장임을 강조하며, 이것이 바로 다성성(polyphony)”이중언어성(heteroglossia)”의 개념으로 이어진다.

3) 사회학적 시학(Sociological Poetics)의 핵심

바흐친은 위 두 경향의 한계를 넘어, 문학을 언어의 사회적 실천이자, 대화적 상호작용의 장으로 파악하는 사회학적 시학을 주창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언어의 이중성: 모든 언어는 화자의 의도와 청자의 응답 가능성을 동시에 고려하며 사용된 다. 문학 언어 또한 항상 타자성에 열려 있는 언어이다.

다성성: 특히 소설은 다양한 사회적 음성과 담론들이 충돌하고 혼재하는 장르로, 하나의 의미 중심으로 통일되지 않는다.

담론의 역사성: 모든 발화는 이전 담론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며, 과거의 말은 현재에 서 다시 해석되고 변형된다.

작품의 사회적 현존: 문학 작품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독자들과 시대에 따라 의 미가 달라지는 사회적 사건이다.

4) 의의와 영향

바흐친의 사회학적 시학은 문학을 단순한 형식의 구조이데올로기의 반영으로 보지 않고, 언어와 의미의 살아 있는 현장, 사회적 다성성과 갈등의 장으로 이해하게 해준다. 이는 후속 문예이론, 예컨대 문화연구, 탈구축 이론, 페미니즘 비평, 포스트식민 담론 등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문학을 통한 사회 분석의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2. 단성성과 다성성 (Monologism and Polyphony)

바흐친이 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문제들(Problems of Dostoevsky's Poetics, 1929/1963)에서 정립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바로 다성성(polyphony)’이며, 이는 단성성(monologism)과의 대조를 통해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개념은 단지 문학적 스타일이나 구성 방식의 차이를 넘어서, 존재론적, 인식론적 차이를 내포한다. , 세계와 인간, 언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태도의 차이를 드러낸다.

1) 단성성(Monologism): 하나의 진리, 하나의 목소리

단성성은 하나의 중심적 의식,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시선, 하나의 권위적 진리에 기반한 서술방식이다. 단성적인 작품에서는 인물의 말조차 작가의 의식 아래 종속되며, 인물의 말은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세계관을 반영하는 도구로 기능한다. 전통적 서사, 특히 고전적 서정시나 극시, 혹은 일부 이데올로기적 서사에서 이러한 단성성이 두드러진다.

요컨대, 단성성은 작가에 의해 완전히 해석되고 통제된 세계이며, 독자는 그 진리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위치에 머물게 된다.

2) 다성성(Polyphony): 독립된 의식들의 공존

바흐친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서 발견한 특징은 바로 다성적 구조였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은 작가의 목소리에 종속되지 않으며, 각각이 자기만의 고유한 언어, 세계관, 진리 체계를 가지고 서사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이들 인물은 단지 기능적 서사 장치가 아니라, 완전한 의식적 존재로 구성되어 있으며, 작가와 대등하게 대화한다.

다성성은 "여러 목소리가 서로 충돌하고 공존하는 구조"이며, 진리는 그 충돌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한다.

3) 언어적 차원에서의 다성성

바흐친은 언어 자체가 본질적으로 타자성과 대화성을 내포한다고 본다. 모든 언어는 과거의 누군가에 의해 이미 쓰였으며, 따라서 발화자는 늘 타자의 말에 응답하거나 변형하는 방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다성적 텍스트는 이처럼 이질적인 담론들인 사회적 계층, 직업, 이념, 시대, 지역 등 다양한 언어의 층위가 병존하고 충돌하며 살아 움직이는 장이다.

이 개념은 바흐친의 또 다른 핵심 개념인 이중언어성(heteroglossia)과 연결되며, 특히 소설 장르가 이러한 다성성을 실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문학 형식으로 평가된다.

4) 단성성과 다성성의 윤리적, 철학적 의미

단성성은 세계를 폐쇄된 전체성, 즉 하나의 진리에 의해 통제된 구조로 보게 한다. 반면 다성성은 진리는 하나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협상되어야 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는 단지 문학적 구성 방식이 아니라, 존재를 대하는 태도이며, 나아가 윤리적 실천의 문제이기도 하다.

5) 정리: 왜 바흐친에게 다성성이 중요한가?

바흐친에게 다성성은 단순한 다양한 목소리가 아니라, ‘권위적 진리에 맞서는 살아 있는 언어의 운동성, 타자성과 응답 가능성의 문학적 윤리를 보여주는 원리다.

다성적인 서사는 독자에게 하나의 해답을 제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질문 속에 남겨진다.

그것은 독자가 자신의 응답을 통해 작품과 함께 말해지는 존재가 되는 체험을 가능케 한다.

4. 소설의 크로노토프’ “문학 속에 예술적으로 표현된 시간과 공간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관계의 연관성” => 패러다임, 에피스테메 등등

미하일 바흐친이 정립한 크로노토프(chronotope)’는 시간(chronos)과 공간(topos)의 합성어로, 문학 작품 속에서 시간과 공간이 맺는 유기적이고 구조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배경이나 서술 장치로서의 시공간이 아니라, 인물의 움직임과 사건의 전개, 그리고 작중 세계의 윤리적·철학적 구도를 형성하는 서사의 핵심적 틀로 작동한다. 바흐친은 시간은 공간 속에 응결되고, 공간은 시간 속에서 이야기로 펼쳐진다고 말하며, 크로노토프를 하나의 의미 생산 기제로 개념화한다.

크로노토프는 문학 작품 내에서 사건이 발생하고 인물이 이동하며 관계를 맺는 시공간의 패턴을 형성하며, 이는 서사 구조를 넘어 시대적 세계관과 인간관, 인식론적 구조까지 반영한다. 이 점에서 크로노토프는 단순히 서사 분석의 도구를 넘어, 특정한 시대와 문화가 인간과 세계를 어떻게 사유했는지를 보여주는 인식적 구조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러한 바흐친의 크로노토프 개념은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paradigm)’ 개념과 철학적으로 연결된다. 쿤이 과학사에서 패러다임을 한 시대의 인식적 틀, 즉 무엇이 참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규범의 체계로 보았듯, 바흐친 역시 각 시대의 문학은 특정한 크로노토프를 통해 현실을 조직하고 형상화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특정한 시대는 특정한 시간-공간 감각을 공유하며, 그 감각은 문학의 서사 구조에 스며들어 인물의 움직임, 세계의 구성, 감정의 리듬을 규정한다.

또한 바흐친의 크로노토프 개념은 미셸 푸코의 에피스테메(episteme)’와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푸코는 에피스테메를 한 시대의 지식 조건, 즉 무엇이 생각 가능하고 말해질 수 있는지를 결정짓는 무의식적 구조로 보았는데, 크로노토프 역시 한 시대의 문학이 형상화할 수 있는 인간상과 세계상, 시간 의식의 조건을 제시하는 틀로 작용한다. 이처럼 크로노토프는 문학 내부의 내적 구조일 뿐 아니라, 시대적 인식 구조와의 접점을 갖는 외적 사유의 지층을 보여주는 개념이다.

바흐친은 다양한 서사 형식에 따라 고유한 크로노토프가 형성된다고 보았고, 이를 유형화하였다. 예를 들어 도로의 크로노토프는 인물들이 이동하고 우연히 만나는 공간으로, 존재의 변화와 계시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반면, ‘역사적 시간의 크로노토프는 반복과 변화가 교차하는 공간 속에서 개인과 집단의 기억이 충돌하는 구조를 형성한다. 이 외에도 바흐친은 문턱’, ‘계단’, ‘골목’, ‘감옥등의 공간을 경계적 크로노토프로 분석하며, 전이와 변형, 위반의 장소로서 의미화하였다.

크로노토프는 문학에서 시간과 공간이 어떻게 예술적으로 구성되고, 그것이 인간 존재와 세계 인식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하는 강력한 사유 도구다. 그것은 단지 공간이 시간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시간 또한 공간을 통해 구체화되는 상호침투적 관계이며, 이러한 상호 구성 속에서 소설은 인간의 역사적 경험과 감각적 삶을 언어로써 형상화하는 장르로 기능하게 된다. 바흐친의 크로노토프 개념은 결국 문학이 단지 서사의 구성물이 아니라, 시대와 인간, 세계와 존재를 사유하는 철학적 실천이라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1) 고대 희랍 소설: 크로노토프 유형과 역사적 전도와 종말

바흐친은 고대 희랍 소설을 분석하며 소설 속 시공간 형식, 즉 크로노토프가 어떻게 인간의 운명과 세계의 윤리를 구성하는지를 세 가지 유형으로 제시한다. 각각의 소설 유형은 인간과 사건의 관계, 시간의 형태, 그리고 종말과 해피엔딩의 방식에 따라 구분되며, 그 내부에 역사적 전도, 즉 현실의 시간-질서가 어떻게 뒤집히거나 변형되는지를 드러낸다.

시련의 모험 소설(adventure novel of ordeal)

시련의 모험 소설은 주인공들이 고난과 이별, 유배와 납치 등의 연속적 시련을 겪은 후, 기적적 우연에 의해 재회하거나 복귀하는 서사 구조를 갖는다. 바흐친은 이 유형을 사건의 시간으로 특징짓는다. 여기서 시간은 내부적으로 변화하거나 축적되지 않으며, 단지 사건을 연결하는 연속적 매개로 기능할 뿐이다. 이러한 서사에서 공간은 주인공의 정체성과는 무관하게 변전하는 이질적인 시험의 장이며, 인물은 그 속에서 내적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시련이 끝나면 모든 것은 본래 상태로 회복되며, 시간은 마치 흐르지 않은 것처럼 종결된다.

이 유형은 역사적 시간의 전도(顚倒)를 보여준다. 현실에서라면 되돌릴 수 없는 사건(배신, 죽음, 실연 등)이 소설 안에서는 되돌릴 수 있는 것으로 재배치되며, 종말은 곧 복원과 회복으로 이어진다. 결국 이는 비역사적 종말 의식, 즉 인간 경험의 비가역성과 고통을 일종의 서사적 몽상으로 해결하려는 구조를 드러낸다.

일상생활의 모험 소설(adventure novel of everyday life)

이 유형에서는 주인공이 겪는 시련이나 사건보다도, 도시, 가정, 거리 등 일상 공간 내에서 벌어지는 작은 사건들이 중심이 된다. 시간은 여전히 폐쇄적이고 순환적이지만, 이전보다 더 사회적 현실의 이면을 비추는 구조를 가진다. 그러나 바흐친에 따르면, 이 소설 유형에서도 시간은 사건의 연속에 불과하며, 인물의 내적 변화나 세계의 본질적 이동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주인공은 일시적으로 일탈하거나 불명예를 겪지만, 결국 다시 사회적 안정 속으로 돌아간다.

여기서도 우리는 역사적 시간의 일시적 중단과 복귀를 목격한다. 시간은 반복되며, 공간은 폐쇄되어 있다. 종말은 위기를 통해 도래하지만, 세계의 구조 자체는 변화하지 않는다. 이러한 구조는 종말의 형식은 있으나, 역사적 변화의 가능성은 결여된 구조, 종말 없는 종말을 보여준다.

전기적 소설(biographical novel)

전기적 소설은 전형적으로 위대한 인물의 생애, 즉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서사선을 따라가며, 고대 후기 로마 제국기의 기독교적 종말론과 긴밀히 결합된다. 이때 시간은 단지 사건을 잇는 도구가 아니라, 도덕적·영적 성숙의 시간, 내적 성찰의 시간으로 기능한다. 여기서 인물은 세상의 욕망과 물질성을 거부하고, 내면화된 시간의 층위, 즉 신적 시간의 호출에 응답하는 존재로 자리 잡는다. 이때 공간은 더 이상 사건이 흘러가는 중립적 배경이 아니라, 영혼의 순례와 고행이 드러나는 윤리적 무대로 기능한다.

이 유형은 가장 명백하게 역사적 시간의 종말 구조를 내포한다. , 세속적 시간은 사라지고, 종말론적 시간(eschatological time)영원의 시간, 구원의 시간으로 전환된다. 이 구조 안에서 종말은 고통의 끝이자 진리의 개시이며, 영원한 구원의 시작으로 작용한다.

요약: 크로노토프의 유형과 역사적 전도, 종말

고대 희랍 소설의 세 유형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역사적 시간의 구성 원리를 전도시키고 있으며, 현실에서 불가능하거나 일어나기 어려운 회귀, 복원, 성화(聖化)를 통해 종말을 환상적으로 해석한다.

시련의 모험 소설은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는 시간,

일상생활의 모험 소설은 반복되는 폐쇄적 위기의 시간,

전기적 소설은 역사에서 벗어난 구원의 시간을 보여준다.

바흐친은 이러한 시공간 구조를 통해 소설 장르가 단순히 서사를 구성하는 틀이 아니라,

한 시대의 인간이 세계와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드러내는 인식의 구조라고 보았다.

2) 중세기: 고귀한 시간과 저급한 시간의 대조

기사도 로망스 vs. 악한, 광대, 바보가 등장하는 저급 장르

바흐친은 중세 문학의 두 가지 상반된 계열공식적 질서를 담지한 기사도 로맨스와 비공식적 언어와 몸의 담론을 보여주는 민중적 저급 장르를 대조시키며, 이들 각각이 다른 형태의 크로노토프, 다시 말해 다른 역사 감각과 세계 인식을 담고 있다고 본다.

기사도 로맨스: 고귀한 세계의 크로노토프

기사도 로맨스는 봉건 귀족 계급의 이념과 도덕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장르로, 서사는 주로 고귀한 남성 주인공(기사)이 명예, 순결, 신의, 용맹 등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구조로 구성된다. 이 장르의 크로노토프는 이상화된 시공간을 전제로 한다. 공간은 현실의 구체성과는 거리가 먼 신화적·관념적 공간이며, 시간은 목표 지향적이고 직선적이다. , 사건들은 성숙-입증-승리라는 일정한 목적 구조를 따르며, 인물의 변화는 주로 도덕적·명예적 시험의 통과를 통해 이뤄진다. 이때 시간은 역사적 시간이라기보다는, 윤리적 서사 시간, 즉 인간의 고귀함과 이상이 확인되는 정화된 시간이다. 공간 역시 상처받지 않은 세계, 이상이 실현될 수 있는 질서 잡힌 장소로 설정된다.

🡺 이 크로노토프는 위로부터 부여된 진리, 신과 왕의 권위에 순응하는 자아, 고정된 질서 속에서 움직이는 인물이라는 구조를 담고 있으며, 그만큼 세계는 닫혀 있고 진리는 단일하며 몸은 억제된다.

중세의 저급 장르: 악한, 광대, 바보 민중적 우주관의 크로노토프

바흐친이 저급 장르로 분류한 이 계열은 시장, 거리, 카니발 공간에서 발생하는 이야기들로,

공식적 질서에 대한 풍자와 전복, 몸의 해방과 과장, 웃음과 욕설, 혼돈의 감각을 전면에 드러낸다. 이 장르의 대표적 인물들은 악한, 바보, 광대, 배신자, 도둑 등 주변적 존재들이다. 이들은 주류 세계에 속하지 않으며, 때로는 주류 질서를 희화화하거나 뒤흔든다. 서사의 공간은 법과 질서의 중심이 아닌 시장통, 골목, 여인숙, 술집, 감옥 등 가장 낮고 혼탁한 공간이며,

시간은 순환적이고 유동적이며 비속한 감각으로 가득하다. 이 크로노토프는 몸을 중심으로 한 세계, 변화와 전복, 뒤집기의 시간, 죽음과 재생이 동시에 일어나는 민중적 세계관을 담고 있다. 특히 카니발적 웃음은 세계를 조롱하면서도 새롭게 재구성할 수 있는 힘을 지닌다. 진리는 고정되지 않고, 항상 웃음 속에서 부정되고 갱신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 이 세계에서 인물은 고귀하거나 고결한 존재가 아니라, 먹고 자고 싸우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살아 있는 몸 그 자체이며, 그 몸은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일시적으로 해방되는 통로이자, 진리를 다르게 경험하게 만드는 혼돈의 통로이다.

대조와 요약

항목 기사도 로맨스 중세 저급 장르

주된 공간 성, 신전, (이상화된 세계) 거리, 시장, 여인숙, 광장 (현실적·하층적 공간)

시간 형식 선형적·목표 지향적 시간 순환적·혼란스러운 시간

인물 유형 기사, 고귀한 연인 바보, 광대, 악한, 민중

몸에 대한 태도/억제되고 통제됨 해방되고 웃음 속에서 과장됨

진리 형식 고정된 진리, 권위에 종속 유동하는 진리, 웃음과 전복 속에서 생성

세계 인식 질서와 명예 중심의 봉건 이데올로기/혼돈과 반복 속에서 생성되는 다원적감각

 

바흐친은 이 두 계열의 문학을 위계화하거나 대립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오히려 중세 문학 내부에서 공식과 비공식, 권위와 웃음, 정화와 혼돈이 어떻게 다성적 공간 안에서 공존했는지를 보여주며, 이러한 민중적 저급 장르가 근대 소설의 다성성과 이질성의 기원을 형성한다고 본다

3) 근대 소설의 크로노토프

라블레적 크로노토프와 목가 소설의 장소적·사건적 제한성

라블레적 크로노토프: , 여행, 역사적 시간의 유희

프랑수아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은 바흐친이 크로노토프 이론을 구체적으로 실험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시간과 공간은 일정하게 조직된 질서가 아니라, 몸과 욕망, 언어와 사건이 끊임없이 확장되고 변형되는 유동적 장으로 형상화된다. 라블레적 크로노토프의 핵심은 이동성과 변형성이다. 인물들은 고정된 장소에 머무르지 않고, , 술집, 시장, 바다, 나라 바깥의 공간을 끊임없이 이동한다. 이동은 단순한 배경 변화가 아니라, 몸의 경험, 언어의 유희, 역사적 시간에 대한 유쾌한 전복과 함께 이루어진다. 공간은 항상 새로운 사건의 가능성을 품고 있으며, 시간은 종말이나 귀결로 수렴되지 않는 유희의 리듬으로 흘러간다. 라블레적 크로노토프는 또한 민중적 웃음의 시공간이다. 공식 질서, 교회 권력, 국가 이념 같은 고귀한 질서가 이 크로노토프 안에서는 몸의 배설, 폭음, , 풍자, 과장된 육체성에 의해 해체된다. 이것은 바흐친이 카니발적 세계관이라 부른 것으로, 세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전복되고 새로 만들어질 수 있는 유동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라블레적 크로노토프는 근대 이전의 역동적 상상력과 몸의 유희가 최고조로 살아 있는 공간이며, 다성성과 이질성, 역사와 욕망, 언어와 민중적 시간의 실험장이라고 할 수 있다.

목가 소설의 크로노토프: 장소의 통일성과 사건의 제한성

반면 목가 소설(pastoral novel)은 전적으로 다른 세계관을 보여준다. 이 장르에서 공간은 제한적이며 밀폐되어 있고, 사건은 반복되며 주로 삶의 자연적 단계와 리듬에 제한된다. 목가적 크로노토프는 단일한 장소에서 전개된다. 예컨대 시골 마을, 목초지, 작은 농장, 우물가, 공동체 중심의 공간 등이다. 이 공간은 외부 세계로부터 거의 단절되어 있으며, 등장인물들도 대체로 공동체 내부의 질서를 따르는 삶을 살아간다. 시간 역시 이 공간에서는 역사적 시간이나 변화의 시간이 아니라, 자연의 시간, 즉 계절, 성장, 수확, 노화, 죽음, 다시 시작되는 삶의 주기로 구성된다. 따라서 사건도 제한적이다. 주로 사랑, 결혼, 출산, 노동, 음식과 술, 죽음 등이 중심이 되며, 이 모든 사건은 특정한 장소와 반복적인 시간 속에서 되풀이된다.

목가 소설의 크로노토프는 세계를 고정된 공동체적 질서, 자연의 리듬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 갈등이 있어도 결국은 조화로 회복되는 세계로 형상화한다.

두 유형의 대조와 의의

항목 라블레적 크로노토프 목가 소설의 크로노토프

공간의 성격/유동적, 확장 가능, 경계 없음 밀폐적, 제한적, 공동체 내부로 제한

시간의 성격/역사적·유희적·혼란적 시간 반복적·자연적·순환적 시간

사건의 특징/과잉, 과장, 전복, 이동, 만남, 충돌/사랑, 결혼, 출산, 노동, 죽음의 순환적 패턴

인물의 정체성/변화하는 주체, 유동적인 몸 고정된 역할, 공동체적 정체성

진리의 구조다성적, 해체 가능, 유머와 몸 중심 조화, 통일, 도덕적 회복

바흐친은 이 두 크로노토프 유형이 모두 근대적 소설 형식의 전사(前史)에 해당한다고 보았으며, 현대 소설은 이 양쪽의 계보몸과 욕망의 유희와 공동체와 자연의 안정성을 혼합하거나 변형하면서 전개되었다고 본다. , 이동성과 정착성, 혼란과 반복, 역사적 시간과 순환적 시간 사이의 긴장이 소설이라는 장르를 살아 움직이는 형태로 유지시키는 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5. 웃음과 카니발레스크트

질서의 전복, 몸의 해방, 다성성의 정치적 형식

1) 웃음은 언어이자 세계관이다

바흐친에게 웃음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담론 양식이며, 동시에 세계와 권위, 진리, 몸에 대해 사유하는 방식이다. 웃음은 질서를 해체하고 권위를 낮추며, 고귀한 것과 천한 것, 중심과 주변의 위계를 흔든다. 이러한 웃음은 특히 민중 문화와 카니발 공간 속에서 집약되어 나타난다.

2) 카니발의 문화와 세계관

바흐친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의 유럽 민중문화에서 드러나는 카니발(carnival)’이라는 축제를 분석한다. 카니발은 공식적 질서와 위계, 제도와 언어, 권위와 신성을 웃음으로 일시적으로 해체하는 전복의 공간이다.

카니발의 세계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위계의 해체: 왕과 노예, 성자와 광인, 교황과 농부의 역할이 뒤집힌다.

몸의 해방: 먹기, 배설, , 출산 등 억제된 육체성이 과장되며, 몸은 열리고 변형된다.

언어의 유희: 욕설, 패러디, 이중화법이 넘쳐나며, 고정된 진리나 교리는 희화화된다.

시간의 순환: 죽음과 탄생, 쇠락과 재생이 웃음 속에서 반복된다.

이러한 카니발은 단지 일탈의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상상하게 만드는 해체의 장이며,

공식 언어의 일방성, 단성성(monologism)을 무너뜨리는 다성적 서사의 원천으로 작동한다.

3) 카니발레스트: 문학 속 카니발의 형식화

카니발레스트는 카니발적 세계관이 문학 속에서 서사적 형식과 언어적 장치로 구체화된 것을 말한다.

카니발레스트한 작품에서는 다음과 같은 특성이 드러난다:

언어의 이중화: 격식을 차린 말과 욕설, 신성과 속됨이 동시에 존재한다.

인물의 전복성: 권위 있는 인물이 조롱당하거나 바보, 광대, 악한이 중심 인물로 부각된다.

몸의 강조: 머리가 아닌 배, , 생식기, 항문 등이 중심 이미지가 된다.

세계의 유동성: 고정된 경계가 해체되며, 변화와 과도기의 상태가 서사의 중심을 이룬다.

다성성과 비권위성: 의미가 하나로 수렴되지 않으며, 다양한 목소리가 충돌하고 공존한다.

, 카니발레스트는 문학에서 말하지 못한 것, 주류 이데올로기가 억압한 것, 비정상·저속·민중적·몸의 것들을 되살리는 언어적·형식적 전략이다.

4) 라블레와 도스토예프스키: 카니발의 구현자들

바흐친에게 프랑수아 라블레는 카니발의 에너지를 소설 속에 형상화한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왕권과 교회를 조롱하고, 웃음과 몸의 유희로 세계를 뒤집는 서사로 가득하다. 도스토예프스키 또한 각 인물의 세계관과 목소리가 작가로부터 독립되어 대립하며,‘다성적 대화의 카니발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카니발레스트를 실현한다.

5) 카니발레스트의 정치성과 윤리성

카니발레스트는 단순한 해학이나 코믹 요소가 아니라, 진리와 권력의 구조를 재사유하게 만드는 윤리적·정치적 힘을 갖는다. 그것은 억눌렸던 목소리와 신체의 부위들을 복원하고, 의미가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 열린 세계, 대화 가능한 세계, 죽음을 포함하는 생의 세계를 상상하게 만든다. 바흐친에게 웃음은 파괴의 언어가 아니라, 재생의 언어이며, 카니발은 혼란이 아니라, 갱신과 살아 있는 세계의 조건이다.

요약

개념 설명

웃음 권위를 해체하고, 고정된 진리를 유희로 전복하는 민중적 언어

카니발 위계 해체, 몸의 해방, 진리의 다성화를 통해 세계를 갱신하는 축제

카니발레스트 문학에서 카니발 정신이 드러나는 형식과 언어: 전복, 유희, 다성성

정치적 의미 권위적 진리와 단일화된 목소리에 대한 대항적 서사 구조

윤리적 의미 타자의 목소리를 허용하는 세계, 변화와 되살림을 가능케 하는 상상력

6. 도스토예프스키와 카니발다성적 의식과 대화적 진리, 카니발적 세계관의 윤리적 실현

1)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핵심: 다성성과 카니발의 결합

도스토예프스키는 바흐친이 진정한 다성적 작가라고 부르는 인물이다. 그의 소설은 단순히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물이 고유하고 독립된 세계관과 언어, 진리 체계를 가진 인격적 의식으로 작동한다. 여기서 바흐친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세계가 단지 철학적 주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대화적 진리를 실현하는 카니발적 공간이라고 본다. , 진리는 하나의 관점이나 교훈으로 귀결되지 않고, 서사 내부에서 살아 있는 목소리들 사이의 충돌과 대화 속에서 생성된다.

2) 인물의 자율성과 의식의 독립성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속 인물들은 작가의 세계관을 반영하거나 대변하는 도구가 아니다. 이들은 작가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의식하는 존재들, 자기 목소리와 논리를 가지고 세계와 충돌하며, 심지어는 작가의 의도를 거슬러 자기만의 진리를 구성한다. 예를 들어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 악령의 키릴로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이반 등은 작가가 쉽게 규정하거나 심판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그들의 내면은 모순적이고, 그들의 말은 끊임없는 반성, 반대, 질문 속에서 움직이며, 절대적 진리 대신 살아 있는 질문들만을 남긴다.

3) 카니발적 세계의 논리: 위계 해체와 진리의 유동성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세계는 고정된 도덕이나 이념의 위계가 해체된 카니발적 공간이다. 이 세계에서는 악인과 선인, 성자와 광인, 주인과 하인, 범죄자와 구도자가 동일한 무대에서 대화하며, 그 누구도 단일한 윤리로 환원되지 않는다. 바흐친은 이를 카니발적 진리의 공간이라 부른다. 진리는 신성불가침한 교리가 아니라, 끊임없는 논쟁과 충돌, 대화와 전복 속에서 새롭게 갱신되는 열린 가능성이다. , 도스토예프스키는 권위적 내레이터의 통제 아래 질서를 복원하는 작가가 아니라, 세계와 인물을 끝까지 대화 속에 남겨두는 윤리적 작가이다.

4) 카니발의 몸과 죄, 고통의 윤리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서는 몸과 고통, 죄와 구원의 문제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여기서도 바흐친은 카니발적 세계관을 적용한다. 예컨대, 몸은 단순한 욕망의 주체가 아니라, 죄와 고통, 회개와 초월이 실현되는 공간이다. 고통은 순교적 형식이 아니라, 진리의 조건이자 인간성의 실험이다. 광기, 자살, 폭력, 욕설 등의 극단적 상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에서 단지 파괴가 아니라 재구성의 계기가 된다. 이는 중세적 카니발에서 죽음과 부패가 새로운 탄생의 조건이 되는 구조와 맞닿아 있다. 죽음을 통한 재생, 모독을 통한 진리, 해체를 통한 윤리의 형성이 도스토예프스키적 카니발의 본질이다.

5) 바흐친이 본 도스토예프스키의 의의

도스토예프스키는 다성성의 극한을 문학적 형식으로 구현한 작가이며, 그의 소설 세계는 언제나 결말을 유예하고, 모든 판단을 열어두며, 타자의 말에 응답할 준비가 된 세계이다. 바흐친은 이것이야말로 카니발의 윤리, 즉 진리를 권력으로 삼지 않고, 다성적 존재들 사이의 응답 가능성으로 구성하는 방식이라고 본다.

요약

항목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니발적 특징

인물의 특성 작가로부터 독립된 고유한 의식, 자기 목소리의 인격적 존재

서사의 구조 결말 없는 대화, 질문 속의 진리, 다성적 충돌

카니발의 구현 권위 해체, 선악 혼재, 신성/세속의 위계 붕괴

진리의 성격 하나의 중심이 아닌, 충돌과 대화 속에서 생성되는 유동적 구조

윤리적 의의 타자에의 응답, 판단의 보류, 고통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성

 

. 롤랑 바르트

작가의 자유란 저자의 죽음과 텍스트의 해방, 의미 생산의 민주성

1) 저자의 죽음: 작가 중심주의 해체

롤랑 바르트는 1967저자의 죽음(La mort de l’auteur)이라는 짧은 에세이에서 당시의 구조주의적 사고와 텍스트 이론을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선언한다. 그에 따르면, 근대 이전의 문학은 작가를 의미의 기원, 진리의 생산자로 간주해왔으며, 모든 텍스트는 작가의 의도, 세계관, 사유의 흔적을 해독하는 방식으로 읽혔다. 바르트는 이러한 저자 중심주의(authorialism)에 맞서, 저자는 텍스트의 순간에서 죽는 존재이며, 진정한 의미는 독자의 다중적 해석과 텍스트의 구조 안에서 생성되는 것이라 주장한다. “문학이 시작하는 것은 저자가 죽는 그 순간이다.” 이 말은 단지 저자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권위를 해체하고, 의미 생산의 자리를 다성적·개방적 장으로 되돌리자는 선언이다.

2) 작가의 자유란 무엇인가?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의 자유란 단지 표현의 자유(freedom of expression) 이상을 의미한다. 바르트에게 작가의 자유는 진리의 담지자로서의 위치에서 물러나는 것, , 의미를 통제하려는 태도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작가가 텍스트를 소유하거나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작가는 의도하지 않은 의미들, 예상치 못한 해석들, 다른 목소리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작가를 절대자의 위치에서 끌어내리는 동시에, 작가를 텍스트의 한 참여자, 구성자, 기호의 조율자로 변환시킨다. 이로써 작가는 더 이상 말하고자 했던 것을 주장하는 존재가 아니라, “말해지게 되는 것을 열어주는 존재로 변화한다.

3) ‘쓰기의 제로도와 이데올로기적 중립성

바르트는 쓰기의 제로도(Le degré zéro de l'écriture, 1953)에서 문학을 단순한 내용(content)이나 주제(theme)가 아니라, ‘쓰기(écriture)’, 즉 사유와 감각, 역사적 위치가 통과되는 형식의 선택으로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진정한 자유는 순수한 말하기가 가능하다고 믿는 환상으로부터의 자유, 다시 말해 언어와 이데올로기의 중립성을 해체할 수 있는 통찰의 지점에서 나온다. 따라서 작가의 자유란 어떤 의미에서는 언어 자체에 의해 결정되고 제약되는 조건성에 자각적으로 참여하는 능력이다.

3) 텍스트와 자유의 민주성

바르트에게 진정한 문학적 자유는 작가가 의미를 완성하거나 지시하지 않음으로써, 독자에게 해석의 권리를 이양하는 것이다. 그의 후기에 등장하는 개념인 쾌락의 텍스트(texte de jouissance)’는 작가와 독자가 상호 작용하며, 텍스트를 유희하고 해체하고 다시 구성하는 열린 장의 공간이다. “텍스트는 작가의 자리가 아닌, 수많은 문화적 코드와 목소리가 교차하는 장소이다.” 그렇기에 바르트에게 작가의 자유란 말하고 사라질 수 있는 자유’, 의도를 내려놓고 복수의 의미들이 태어나는 과정을 허용하는 자유, 그리고 독자의 참여 속에서만 완성될 수 있는, 텍스트의 민주적 운동성이다.

4) 요약: 작가의 자유란 무엇인가?

개념 설명

저자의 죽음: 작가를 의미의 기원에서 제거하고, 텍스트의 자율성과 독자의 역할 강조

자유란 무엇인가: 의미 통제의 포기, 타자적 해석의 수용, 다성적 구성에 대한 개방성 쓰기의 제로도 언어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자각하며, 표현의 환상에서 벗어나는 실천

텍스트의 민주성: 작가의 지시보다 독자의 해석이 중심이 되는 참여적 의미 생산 구조

이와 같이 바르트에게 작가의 자유는 무제한적 표현이 아니라, 의미의 독점으로부터 스스로 물러나는 행위이며, 그 자리에서 타자의 목소리를 허용하고, 언어의 다성성을 활성화시키는 윤리적 책임의 실천이다.

2. 모든 기호는 자의적이며 따라서 모두 규약들이다.

기호의 사회성, 신화로서의 프로레슬링

1) 기호는 본질이 아니라, 약속이다

바르트는 구조주의적 기호학에 기반해, 언어를 포함한 모든 상징 체계를 자의적인(signifiantsignifié의 임의적 결합) 것이라 본다. , 기호(sign)는 그 자체로 자연적이거나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속, 규약, 코드에 따라 구성된 인위적 체계라는 것이다. 이때 바르트가 말하는 자의성은 단지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임의적이라는 소쉬르의 언어학을 넘어서, 기호가 정치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자연화되는 방식에 대한 비판까지 포함한다. 기호는 자의적이기에, 언제든 누군가에 의해 조작되거나 전유되거나 신화화될 수 있는 것이다.

2) 신화론과 프로레슬링: ‘의미의 연극

신화론에서 바르트는 프로레슬링을 현대 사회의 신화적 기호 체계로 분석한다. 그는 프로레슬링이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사회적 의미를 연출하는 상징적 연극이라고 본다. 프로레슬링의 세계에서는 선한 자(: 정의의 챔피언)와 악한 자(: 사악한 반칙왕)가 극단적으로 대비되며, 각각의 행위, 옷차림, 표정, 움직임은 의미를 전달하는 기호들로 작동한다.

예컨대: 반칙은 을 상징하고, 관중의 야유는 도덕적 판단을 반영하며, 드라마틱한 고통의 연기는 희생승리의 신화를 구성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모든 것이 실제의 진실이나 현실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학습된 의미의 규약들에 기반한 연출된 진실이라는 점이다.

프로레슬링은 고통의 진실을 전달하지 않는다. 그것은 고통의 의미를 연출한다.” 바르트

3) 기호의 신화화: 사회가 기호에 붙이는 제2의 의미

바르트는 모든 문화적 기호가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수준을 넘어서, ‘신화(myth)’를 생산하는 이차 기호 체계라고 본다. 기표기의의 기본 기호(sign)가 다시 하나의 기표가 되어 또 다른 기의(사회적·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낳는다는 것이 바르트가 말한 신화화된 기호’(mythic sign)의 구조다. 프로레슬링에서는 힘센 남자’, ‘공정한 심판’, ‘관객의 환호같은 요소들이

단지 오락이 아니라, 도덕적 코드와 권력 구조에 대한 은연중의 메시지로 작동한다.

그리고 이 신화화된 기호 체계는 사회를 질서 있게 보이게 하는 이데올로기적 도구가 된다.

4) 모든 기호는 규약이다: 정치적 기호학

모든 기호는 자의적이며 따라서 모두 규약들이다라는 명제는 기호는 본질이 아니라, 합의된 규칙에 불과하다는 통찰을 전제하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의미들이 사실상 정치적 해석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이 말은 곧 현실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라, 기호로 구성된 현실임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바르트의 기호학은 단순한 기호 분석이 아니라, 현실의 의미 생산 구조를 해체하고 비판하는 정치적 작업이다.

요약: 기호, 자의성, 프로레슬링

항목 설명

기호의 자의성 기표와 기의의 결합은 본질이 아니라 사회적 약속

프로레슬링의 의미 구조 행위와 인물이 정형화된 기호로 작동하며, 도덕적 이념을 연출

신화화된 기호 문화적 기호는 이차 의미 구조를 통해 이데올로기를 자연화함

규약이란 무엇인가 사회가 합의한 의미 체계이며, 비판 없이 받아들일 경우 정치적 기 능 수행

바르트의 입장 기호는 해체되어야 하며, 모든 신화는 다시 정치적으로 읽혀야 한다

3. 저자의 죽음: 저자에서 필사자로

창조의 권위 해체와 텍스트의 다성적 생산

1) 전통적 저자 개념의 해체

근대 이후의 문학 전통에서는 저자(author)’가 의미의 기원, 작품의 주체, 창조의 중심으로 간주되어 왔다. 저자의 정체성과 의도가 작품 해석의 기준이 되었고, 문학은 저자가 말한 것을 해독하는 과정으로 여겨졌다. 바르트는 이러한 저자 중심주의에 대해 급진적인 전복을 시도한다. 그에 따르면, 저자는 작품이 쓰여지는 바로 그 순간 죽는다. 이는 신화적 창조자로서의 저자가 아니라, 텍스트가 수많은 문화적, 언어적 코드의 얽힘 속에서 생성된 것임을 강조하는 선언이다.

2) 필사자(scriptor)의 개념

저자의 죽음은 곧 필사자(scriptor)’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필사자란 더 이상 창조자가 아니라, 기존의 언어와 담론, 문화적 코드들을 조율하여 새롭게 배열하는 사람이다. 그는 고유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며, ‘자기 목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무수한 언어의 흔적과 관습들 속에서 텍스트를 엮고 옮겨 쓰는 존재에 가깝다.

텍스트는 인용들의 조직이며, 무수한 문화의 교차로이다.” 바르트

바르트에게 필사자는 의미를 생산하는 주체가 아니라, 의미들이 자유롭게 흐르도록 내어주는 행위자이며, 그의 글쓰기란 창조가 아니라 복수적 언어의 재조합이다.

3) 저자의 죽음이 의미하는 자유와 전복

저자의 죽음이라는 선언은 단순히 작가를 부정하거나 무의미화하자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저자라는 이름 아래 은폐되었던 권위, 통제, 해석의 지배구조를 해체하자는 시도다. 텍스트는 단 하나의 중심(저자)으로부터 의미를 받지 않고, 다수의 목소리들, 다층적 의미들, 독자의 참여에 의해 갱신되고 재구성된다. 이렇게 텍스트는 닫힌 구조가 아닌, 살아 있는 생산의 장으로 작동하게 되며, 독자 또한 더 이상 수동적인 해독자가 아니라, 공동 생성자(co-producer)가 된다.

4) 필사자 개념의 철학적·미학적 함의

전통적 저자(author) 바르트의 필사자(scriptor)

창조의 기원, 권위의 중심 의미의 조율자, 문화 코드의 배열자

고유한 의도와 세계관의 전달자 수많은 언어의 흔적을 엮어내는 수동적 행위자

의미의 통제자 의미의 흐름을 허용하는 개방적 존재

작품의 중심 텍스트 내부에 사라지고 흩어지는 사유의 매개자

5) 요약: 저자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

바르트는 저자라는 용어를 거부하고, ‘필사자로의 전환을 주장함으로써 문학을 권위가 아닌 다성적 해석과 유희의 공간으로 전환시킨다. 그에게 있어 텍스트란 창조의 결과가 아니라, 언어와 담론, 문화가 충돌하고 교차하며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운동의 장이다. 이는 곧 텍스트에 대한 권력적 해석 구조를 해체하고, 문학을 개방된 상호작용과 해석의 자유가 펼쳐지는 민주적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선언이다.

4. 작가적 텍스트와 독자적 텍스트

생산하는 독자, 분열된 텍스트, 쾌락과 유희의 문학 공간

1) 텍스트를 쓰는 자와 읽는 자 사이의 경계 붕괴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문학을 더 이상 저자가 쓴 의미를 독자가 해석하는 구조로 보지 않는다. 대신 그는 텍스트의 생산 과정에 독자가 직접 참여하며, 그 결과로 나타나는 두 가지 텍스트 유형을 제시한다: ‘작가적 텍스트’(texte de plaisir)독자적 텍스트’(texte de jouissance).

2) 작가적 텍스트 (texte de plaisir) 익숙한 쾌락, 안정된 독서의 기쁨

작가적 텍스트는 바르트가 말하는 전통적 의미의 문학과 유사하다. 이 텍스트는 읽는 이에게 의미, 구조, 질서, 연속성을 제공하며, 익숙하고 이해 가능한 문법과 서사를 통해 독서의 쾌락(보통의 즐거움)을 준다. 독자는 이 텍스트를 따라가며 만족을 얻지만, 동시에 자신이 의미 생산에 개입하고 있다는 자각은 거의 없다.

🡺 이 텍스트는 독자의 감정이나 사유를 흔들기보다는, 안정감을 제공하고, 독해 가능한 질서 속에 머물게 하는 텍스트이다.

3) 독자적 텍스트 (texte de jouissance) 분열의 쾌락, 해체의 유희, 의미의 넘침

반대로 독자적 텍스트는 독자에게 익숙한 해석 방식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텍스트는 문장 구조의 파열, 문법의 뒤틀림, 서사의 비약, 의미의 다중성 등을 통해 독자의 기대를 깨뜨리고, 독서를 사건처럼 만드는 텍스트다. 여기서 ‘jouissance’(즐거움, 황홀, 쾌감)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의미가 붕괴되고, 주체가 흔들리는, 전복적 쾌락의 경험을 뜻한다. 이 텍스트는 독자를 수동적 수용자가 아닌, 텍스트의 공동 생산자로 변모시킨다. 읽는 이는 더 이상 해석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주체가 된다.

4) 두 텍스트의 비교

항목 작가적 텍스트 (texte de plaisir) 독자적 텍스트 (texte de jouissance)

독자의 위치 의미를 수용하는 해석자 텍스트를 해체하고 구성하는 생산자

텍스트의 구조 안정적, 연속적, 구조화된 의미 파편적, 비선형적, 혼란스럽고 다층적 의미

감정의 유형 익숙함, 만족, 감상 당혹, 충격, 전율, 의식의 진동

주체의 경험 통합된 자아로서의 읽기 분열된 자아로서의 체험, 독해가 아닌 사건으로서 의 읽기

미학적 지향고전적 질서, 규범성, 서사의 완결성/실험적 구조, 탈규범성, 의미의 무한한 개방

5) 쾌락의 정치학

바르트는 단지 독서를 취향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그에게 텍스트의 유형은 어떤 진리와 질서를 욕망하느냐의 문제, 즉 독서의 정치학에 해당한다. ‘작가적 텍스트는 독자에게 안정된 의미를 제공하면서 기존의 언어 질서와 인식 구조를 유지하게 만들고, ‘독자적 텍스트는 독자의 감각과 사고를 뒤흔들어 기존의 문법을 해체하고 새로운 언어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6) 결론: 문학의 자유는 해석의 자유로

바르트에게 텍스트는 더 이상 저자의 메시지를 해독하는 대상이 아니라, 무수한 기호와 언어, 문화적 잔여물들이 충돌하는 살아 있는 언어 공간이다. ‘작가적 텍스트독자적 텍스트의 구분은, 우리가 문학을 소비할 것인가, 혹은 창조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즐거움의 텍스트는 읽는 자를 변형시키지 않는다. 황홀의 텍스트는 독자를 진동하게 하고, 말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바르트

5. 카메라 루시다』 – 불가능한 텍스트 감각과 죽음의 경계에서 보여지는 것을 다시 쓰기

1) 텍스트의 죽음에서 시작된 애도의 사유

카메라 루시다는 바르트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집필한, 사진과 죽음에 대한 사유의 기록이자, 동시에 애도와 존재론의 책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더 이상 기호와 텍스트의 생산 가능성을 중심에 두지 않고, 이미지를 통해 감지되는 비가시적 진실, 즉 말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을 사유하려 한다. 그는 이것을 구조적 텍스트가 아닌, “불가능한 텍스트라고 부른다.

2) 사진: 구조 아닌 상처로서의 기호

바르트에게 사진은 더 이상 기호학적 분석 대상이 아니다. 사진은 그 자체로 죽음을 포함한 현실의 흔적이며, 텍스트가 도달할 수 없는 진실의 조각이다. 바르트는 사진을 분석하면서 두 개념을 제시한다:

스투디움(studium): 사진의 일반적 정보, 사회적 맥락, 문화적 코드

푼크툼(punctum): 보는 이의 마음을 찌르는 사적인 상처, 우연, 파열의 지점

스투디움은 이성적이고 사회적으로 공유 가능한 영역이지만, 푼크툼은 감정적 충격의 순간, 의미가 아니라 감각으로 인식되는 파열의 흔적이다. 푼크툼은 바로 그 지점에서, 바르트가 그토록 말하고자 했던 의미화되지 않는 잉여”, 즉 불가능한 텍스트의 잔여로 등장한다.

3) 어머니의 사진: 기호를 넘어선 존재의 응시

카메라 루시다후반부에서 바르트는 죽은 어머니의 어린 시절 사진겨울정원의 사진을 보고, 그 안에서 그녀의 본질”, 텍스트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존재의 진실을 발견한다. 그는 이 순간을 기호로 구성된 텍스트가 도달하지 못하는 지점, 사랑, 기억, 상실이 언어를 넘는 지점으로 사유하며, 그곳에서 문학의 가장 깊은 윤리적 가능성을 본다. 바르트에게 사진 속의 어머니는 텍스트로는 더 이상 옮겨쓸 수 없는 타자의 얼굴이며, 침묵과 응시의 윤리, 말하지 않음의 말하기로 존재한다.

4) 왜 불가능한 텍스트인가?

카메라 루시다는 분석되지 않고, 읽혀지지 않으며, 구조화되지 않는 텍스트를 지향한다.

그것은 감정, 죽음, 애도, 침묵, 상처와 같은 기호 이전의 감각적 진실을 담아내려는 시도다.

바르트는 이제 기호를 해체하는 분석가가 아니라, 기호 이전의 감각을 붙잡으려는 상실의 필사자로 존재한다. 그의 글쓰기는 텍스트의 생산을 넘어서, 언어로 불가능한 것에 다가가는 비문학적 윤리적 실천이 된다.

요약: 카메라 루시다가 도달한 지점

개념 설명

불가능한 텍스트 의미로 환원되지 않고 감각으로만 다가오는, 언어화 불가능한 감정의 영역

스투디움 사진의 문화적 맥락, 구조적 코드, 정보의 차원

푼크툼 개인적이고 감각적인 파열, 상처, 응시의 지점

어머니의 사진 존재의 본질이 담긴 이미지이자, 언어가 도달하지 못하는 타자의 얼굴

윤리적 글쓰기 해석과 의미를 넘어, 상실과 침묵의 감각을 견디는 문학적 실천

 

5 주차

. 마르크스주의 미학

마르크스주의 미학의 기원

1) 마르크스 철학

반영론: 현실의 반영인가, 변증법적 재구성인가

마르크스주의 미학의 초기 핵심 개념 중 하나는 반영론(reflection theory)’이다. 이는 예술이 사회적 현실을 반영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 반영은 단순한 거울 이미지나 피상적 묘사가 아니다.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자본에서 보여주었듯, 의식은 존재를 반영하지만, 그것은 수동적 복제가 아니라 사회적 실천과 계급적 위치에 따라 구성된 반영, 즉 변증법적 반영이다.

마르크스의 기본 전제는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명제로 요약된다. 예술은 이 사회적 존재, 즉 물질적 삶의 조건과 계급 구조, 역사적 총체성 속에서 생성된다. 따라서 예술은 단지 외부 세계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의 모순과 갈등을 드러내고, 그 내부에 잠재된 진실을 가시화하는 행위로 간주된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적 반영론은 비판적 인식의 형식이자, 현실을 재구성하는 미학적 실천이다.

루카치는 이 반영론을 더욱 체계화하여, 예술을 구체적 총체성에 이르는 인식의 형식으로 정의했다. 그는 리얼리즘 문학이야말로 현실의 심층 구조를 드러낼 수 있는 형식이라 보고, 단편적 인상이나 추상적 관념이 아닌, 인물과 사건의 전개를 통해 사회적 구조를 드러내는 서사를 강조했다. 이로써 반영은 단순히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구조와 모순을 형상화하는 능동적 인식 과정으로 재정의된다.

그러나 이 반영 개념은 이후 브레히트나 벤야민, 아도르노에 의해 비판적으로 재구성된다. 그들은 루카치식의 총체성개념이 지나치게 구조화된 세계 인식을 전제한다고 보았으며, 오히려 현실의 단절, 충격, 파편성을 드러내는 형식들이야말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진실을 더 잘 반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마르크스주의 미학 내에서도 반영의 방식과 범위, 그 윤리와 정치성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게 전개된다.

요컨대 반영론은 마르크스주의 미학의 기원이자 핵심 개념이지만, 그것은 결코 단선적인 거울 이론이 아니다. 반영은 현실의 재현이면서도 그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고 변형하는 실천이며, 예술은 바로 그 비판적 반영을 통해 사회 변혁의 가능성을 품게 된다.

자본주의적 증상의 발견 혹은 증상으로서의 자본주의 분석

마르크스주의 미학은 예술이 사회를 반영한다고만 말하지 않는다. 더 정교하게는 예술이 자본주의 사회 그 자체를 하나의 증상(symptom)’으로서 드러낸다고 본다. 여기서 증상이란 억압된 것이 일그러진 형태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의식되지 않은 모순의 징표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겉보기엔 자유롭고 합리적인 체계를 갖춘 듯 보이지만, 그 표면 아래에는 노동, 인간관계, 감각, 존재의 위계 구조가 파열된 채 잠복해 있다. 예술은 이 증상들을 읽어내는 고유한 해석 공간이 되며, 때로는 자본주의 자체가 예술 안에서 하나의 증상으로 표현된다.

상품, 화폐 경제로서의 자본제적 생산양식

자본1권에서 마르크스는 상품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상품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노동이 물화되어 교환가치로 치환된 사회적 관계이다. 상품은 자신의 유용성(사용가치)을 감추고, 오직 다른 상품과의 교환 가능성(교환가치)을 통해 존재한다. 이때 발생하는 상품 물신성은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 증상이다. 사회적 관계가 사물 간의 관계로 전도되며, 인간의 감각과 욕망이 교환의 논리에 포획된다. 예술도 이 체계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문화상품으로 유통되는 순간, 예술은 자율성과 비판성을 상실한 채 체계 내에 흡수된다.

자본주의와 노동자의 소외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 병리를 노동의 소외(alienation)’ 개념으로 진단했다.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한 것을 자신의 것으로 향유할 수 없으며, 생산 과정에서 점점 더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되고 타자화된다. 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야 할 노동의 순간에 오히려 자신의 본질과 멀어지는 이 구조는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을 어떻게 왜곡하고 소외시키는지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다. 예술은 이 소외의 징후를 미적으로 변형하면서도, 그 내부에 잠재된 갈망과 균열을 드러낼 수 있는 감각의 언어로 기능한다.

자본주의와 노동자 계급이라는 유령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서두에서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고 말한다. 이 유령은 자본주의가 억압하고 배제했으나, 도리어 그것의 심층에서 끊임없이 재현되고 저항하는 주체의 형상이다. 오늘날 노동자 계급은 표면적으로는 해체되고 분산되었지만, 플랫폼 노동, 프리랜서화된 노동, 디지털 기기 속의 착취 구조 속에서 여전히 유령처럼 자본의 심층을 맴돈다. 예술은 이 유령의 흔적을 다시 불러오는 방식으로, 과거의 억압된 가능성을 현재로 소환하며 자본주의의 허구적 전체성을 교란시킨다.

정신적 동물 왕국의 시대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정신의 동물 왕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이성의 외양을 한 체계가 어떻게 인간의 욕망과 감각, 사유를 제도화하고 길들이는지를 비판한 바 있다. 자본주의는 가장 인간적인 것을 가장 비인간적으로 다루는 체계, 즉 이성과 자유, 욕망과 생산을 통제하는 가장 정교한 통치의 형태로 기능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유를 누리는 듯 보이나, 실상은 욕망조차 규율된 구조 안에서만 작동하는 동물 왕국의 구성원으로 살아간다. 이 시점에서 예술은 동물화된 인간, 인간화된 체계에 대한 은유와 해석을 제시하는 비판적 시선으로 작용한다.

토대와 상부구조

마르크스는 서문: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조 개념을 제시한다: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이 구절은 곧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핵심 개념인 토대(경제적 기반)’상부구조(정치, , 종교, 예술, 철학 등)’의 관계를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토대는 생산수단과 생산관계로 구성된 물질적 조건의 총체이며, 상부구조는 그 위에 세워지는 의식적·이념적 장치다. 이 관계는 일반적으로 토대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고 해석되어 왔지만, 이때의 규정은 기계적 인과관계가 아니라 역사적 조건 안에서 발생하는 제한과 가능성의 범위를 뜻한다.

예술과 미학은 바로 이 상부구조의 일부로 간주된다. 예술은 특정 시대의 물질적 삶의 조건계급 구조, 생산 방식, 지배 이데올로기을 반영하면서도, 단순한 복제에 머무르지 않고 당대의 현실을 형상화하고 재구성한다. 예술은 토대에 종속된 결과물이 아니라, 그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도 상대적 자율성을 지닌 문화적 실천의 장이다.

이때 상대적 자율성이라는 개념은 루카치와 알튀세르, 그람시 등에 의해 보다 복잡하게 발전되었다. 루카치는 예술이 당대의 총체적 현실을 재현하지만, 그 과정에서 허구적 인물과 서사, 미적 형식을 통해 현실을 재구성한다고 보았다. 반면 알튀세르는 상부구조를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ISAs)로 분석하며, 예술을 이데올로기의 복제 공간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긴장을 드러내고 균열을 발생시키는 장소로 본다. 그에게 있어 예술은 현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현실의 왜곡을 드러내는 독특한 중층적 형식이다.

또한 그람시는 상부구조 내의 헤게모니개념을 도입하여, 문화와 예술이 지배계급의 통제를 받는 동시에 피지배계급의 저항과 대항담론의 공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토대가 상부구조를 일방적으로 결정한다는 관념을 넘어, 예술이 현실을 형성하고 바꿀 수 있는 능동적인 실천이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결과적으로 토대와 상부구조개념은 마르크스주의 미학에서 예술의 역사적 조건을 분석하는 기본 틀이면서도, 예술의 자율성과 창조적 가능성,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긴장에 대한 비판적 사유의 출발점이 된다. 그것은 단순한 구조적 도식이 아니라, 구체적 시대 속에서 예술이 어떻게 물질적 삶과 이념, 감각의 지층을 연결하고 조율하며, 때로는 전복하는지를 분석하는 철학적 도구다.

원시공산주의, 봉건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유물론은 인류 사회를 경제적 생산양식의 변화를 중심으로 다섯 개의 주요 단계로 구분한다. 이 모델은 단순한 발전 도식이 아니라, 생산수단의 소유 방식, 계급 관계, 이데올로기적 지배 구조를 통해 각 사회의 예술과 미학의 조건을 분석하는 유력한 이론틀로 작용한다.

원시공산주의 예술과 노동이 분리되지 않은 시기

원시공산주의는 생산수단이 공유되고, 계급이 존재하지 않던 시기로, 예술과 노동, 놀이와 의례가 분리되지 않았던 총체적 감각 공동체의 시기였다. 예술은 생존과 공동체적 삶의 리듬 속에 내장된 행위였으며, 노동과 마술, 종교와 미의식이 구분되지 않는 상징적 실천으로 기능했다. 벽화, 토기, 구전 서사는 모두 집단적 감각과 기억을 공유하는 형태였다.

봉건주의 신과 왕, 권위의 재현으로서의 예술

봉건 사회에서 예술은 종교적·봉건적 권위에 복무하는 형식으로 기능했다. 미술과 문학은 귀족 계급과 성직자의 후원을 받으며, 초월적 질서와 사회적 위계를 정당화하는 서사와 형식을 구성했다. 이 시기의 예술은 대체로 도상적이고 상징적이며, 봉건 권력의 세계관을 미학적으로 재현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민중 서사나 전통 이야기 속에는 반권위적 요소와 하위 문화의 정동이 은밀히 살아 있었다.

자본주의 예술의 상품화와 자율화의 이중운동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은 시장경제에 진입하며 상품화되는 동시에, 봉건 권력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주장할 수 있는 독립적 장르로 성장한다. 낭만주의 이후의 예술은 개인의 주체성, 내면성, 미적 탐구를 강조하면서도, 현실로부터의 도피라는 이중적 얼굴을 지닌다. 이 시기에는 특히 소설과 인쇄매체의 부상, 부르주아 미학의 형성,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의 변화가 중요한 미학적 전환점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예술은 여전히 자본의 교환가치 질서 안에 포섭되며, 이는 예술의 자율성과 정치성 사이의 긴장을 낳는다.

사회주의 예술의 사회적 기능 강조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예술이 인민의 계몽과 계급 해방, 혁명적 실천의 도구로 위치 지워진다. 특히 소비에트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공식 미학으로 채택되었으며, 노동자의 삶과 미래에 대한 희망, 혁명의 서사가 예술의 중심이 된다. 이 시기의 예술은 개인의 표현보다 집단적 이상과 역사적 낙관주의를 강조하며, 종종 정치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활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데올로기적 통제 아래에서도 다양한 실험적 미학과 이중의 상징체계가 생성되었다.

공산주의 예술과 삶의 통합, 미학의 일상화

마르크스가 전망한 공산주의 사회는 계급과 사적 소유가 폐지되고, 노동이 소외되지 않으며, 인간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구성하는 사회다. 이때 예술은 다시 원시공산주의와 유사한 방식으로, 삶 그 자체와 긴밀히 통합되는 감각적 실천으로 돌아간다. 이른바 모든 인간이 예술가가 되는 사회라는 이상 속에서, 예술은 제도화된 장르나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공동체적 삶의 일부로 기능하게 된다.

이 역사적 발전 도식은 마르크스주의 미학에서 예술이 단순한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물질적 조건과 사회구조, 계급 관계에 따라 끊임없이 변형되는 사회적 실천임을 보여준다. 또한 각 시기의 예술은 그 자체로 지배 질서에 순응하거나, 혹은 그 질서를 균열시키는 미적 정치의 현장이기도 하다.

모든 고정된 것은 연기처럼 사라진다.

“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 『공산당 선언, 마르크스와 엥겔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자본주의의 본질을 모든 고정된 것들이 연기처럼 사라지는체계로 묘사했다. 이 구절은 자본주의를 단순한 경제 체제로 보지 않고, 끊임없이 기존의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질서를 생산하는 자기 전복적 구조로 규정한 급진적인 진단이다. 자본주의는 전통적인 가족, 종교, 공동체, 감각의 형식을 부수며, 모든 관계를 화폐와 교환, 유동적 가치의 구조로 재편한다. 이로써 과거의 가치, 정체성, 예술형식, 공동체성은 해체되고, 그 자리에 불안정한 현재성과 탈역사적 속도가 자리잡는다.

이러한 진단은 단지 사회 구조에 국한되지 않는다. 예술과 미학, 감성의 구조 역시 자본주의의 유동성과 긴밀히 연동된다. 자본주의는 전통적 예술 형식을 해체하고, 예술을 상품으로 유통시키며, 동시에 형식 실험과 자율성의 확대를 가능케 하는 조건을 만들어낸다. 이중의 운동인 파괴와 생성, 해체와 형식화은 근대 예술의 미학적 기획 그 자체이기도 하다. 낭만주의, 모더니즘, 아방가르드, 포스트모던은 모두 이 유동성의 미학 위에서 생성되고 흩어진 운동들이다.

또한 이 문장은 근대성의 불안정한 기반을 상징한다. 모든 규범, 제도, 정체성은 영구하지 않으며, 역사적 변동 속에서 사라지고 재구성된다. 미학 역시 더 이상 절대적 기준이나 보편적 미의 관념에 근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르크스의 이 구절은, 예술과 미학이 고정된 형식을 벗어나 끊임없이 갱신되어야 할 감각적 정치의 장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하지만 이러한 유동성과 해체의 논리는 동시에 불안과 혼란, 소외와 자기 상실을 불러일으킨다. 고정된 가치가 사라진 자리에는 자본의 논리, 표준화된 욕망, 이미지의 과잉이 들어서며, 예술 역시 소비되는 기호의 일부로 전락할 위험에 놓인다. 따라서 예술은 이 유동성의 구조를 단순히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비판적 감각, 해방적 서사, 역사적 기억의 공간을 다시 복원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모든 고정된 것은 연기처럼 사라진다는 말은 결국, 예술이 무엇을 붙들 것인가, 무엇을 재구성할 것인가, 어떤 감각의 미래를 열어갈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마르크스주의 미학은 이 질문을 역사적 물질성과 감각의 정치학 안에서 사유하고자 하는 시도이며, 바로 그 지점에서 예술은 다시 현실을 새롭게 보는 눈이자, 지속적으로 연기처럼 흩어지는 세계를 붙드는 감각의 행위로 재규정된다.

전 지구의 자본주의화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이미 자본은 그 생존을 위해 전 세계를 시장으로 만들어낸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단순한 예언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본질인 끊임없는 팽창, 탈영토화, 재영토화, 주변부에 대한 수탈과 흡수를 꿰뚫는 진단이었다. 20세기 말 이후, 자본은 디지털 기술, 정보통신망, 금융 시스템의 확장을 통해 공간적 한계를 제거하며 전 지구적 네트워크로 변모해왔다. 이러한 구조는 자본의 보편성을 가장한 지리적, 문화적 불균형의 심화를 동반하며, 문화 역시 이 구조 속에서 깊은 흔들림을 겪고 있다.

예술은 더 이상 지역적 감각이나 고유한 삶의 형식을 전제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감각 구조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통일되어가는 과정, 즉 감각의 획일화, 미적 기준의 글로벌 코드화, 취향의 표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단지 자본주의의 문화 침투가 아니라, 감각 그 자체의 식민화이다. 한때 자율성의 영역이었던 예술은 이제 세계적 유통망 속에서 소비의 객체, 플랫폼 알고리즘에 의해 작동하는 감각의 상품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동시에, 이 전 지구화는 저항의 보편적 조건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이라면, 그 균열 또한 전 지구적으로 발생한다. 주변부 혹은 준주변부 문화권의 예술은 이제 자본주의 미적 코드에 대한 비판, 전도, 전유, 혼종화의 실천을 통해 보편성이라는 허구를 교란하는 방식으로 등장하고 있다. 가야트리 스피박의 표현처럼, 말할 수 없는 자들을 말하게 만드는 구조는 단지 소리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전유의 전략과 연결되어야 하며, 예술은 이 구조 비판의 미학으로 작동할 수 있다.

또한, 전 지구의 자본주의화는 미학 내부에서도 속도, 압축, 정보의 과잉, 감정의 피상화라는 미적 특성을 유포하고 있다. 마크 피셔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말했듯,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 종말 이후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감각 자체가 자본의 현실 구조이다. 이러한 시대에 예술은 느림, 여백, 감정의 심화, 존재의 진동과 같은 감각적 실천을 통해 이 흐름을 거슬러야 한다. , 지구적 자본주의화 속에서 예술은 감각의 속도를 전복하고, 존재의 밀도를 복원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요컨대, 전 지구적 자본주의화란 단지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감각의 질서, 감정의 분배, 삶의 형식 전체를 관통하는 미학적 문제다. 마르크스주의 미학은 이제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예술이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감각하게 만들며, 어떻게 삶의 가능성을 열어가는가를 묻는 자리로 확장되어야 한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마르크스는 자본1권에서 상품을 두 가지 측면으로 설명한다: 사용가치(use value)와 교환가치(exchange value).

사용가치는 상품이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구체적 효용이며, 교환가치는 그 상품이 다른 상품과 교환되는 비율, 즉 사회적 가치 관계다. 이때 사용가치는 질적으로 다르며, 교환가치는 양적으로 비교 가능하다. 이 둘 사이의 분리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드러내는 핵심 지점이며, 예술과 미학의 분석에도 결정적 통찰을 제공한다.

예술작품 역시 이 이중 구조 속에 놓인다.

한편으로 예술은 감각적 경험을 제공하고, 존재의 의미를 사유하게 만드는 사용가치를 지닌다. 그것은 인간의 감정, 기억, 정체성, 역사적 진실과 연결되는 비가시적이고 비환원적인 감각의 세계를 창출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예술은 시장에서 소유되고, 유통되며, 가격이 매겨지는 교환가치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때 작품은 그 안에 담긴 감각적·정신적 진실과는 무관하게, 브랜드, 희소성, 트렌드, 상징 자본에 의해 교환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핵심 문제를 바로 이 지점사용가치보다 교환가치가 우위를 점하는 역전에서 포착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사물의 내적 유용성이 아니라, 시장 내 교환 가능성과 추상적 가치가 지배한다. 예술 역시 이 지배에 쉽게 포섭된다.

예술작품은 점차 감각의 실천이 아닌, 소유와 자산, 투자와 전시의 대상이 되며, 이는 현대 미술시장, NFT, 문화산업 전반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미학은 이 분리의 현실을 단지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술이 어떻게 사용가치를 복원하고 재창조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즉 예술은 지배적인 교환가치 체계를 교란하는 방식으로, 다시 삶의 감각적 필요에 응답하고, 자본주의가 지워버린 인간적 관계를 회복시키는 힘이 될 수 있다.

이는 아도르노가 말한 자율예술의 사회적 비판 기능”, 벤야민의 아우라의 붕괴 이후 정치적 예술의 가능성”, 또는 브레히트의 소외효과를 통한 현실 인식의 재구성등으로 다양하게 전개된다.

요컨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라는 구도는 예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며, 누구에게 봉사하고, 어떤 관계를 지향할 수 있는가를 묻는 윤리적-미학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단순한 경제 논리가 아니라, 예술이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고, 저항하고, 작동할 수 있는가를 사유하게 만드는 철학적 구심점이다.

아시아적 정체성론

마르크스주의는 세계체제의 보편적 분석 틀을 제공하지만, 그 보편성은 언제나 서구적 경험을 중심으로 구성된 이론의 언어였다. 이에 대한 비판적 응답으로, 아시아적 정체성론은 지리적 주변부에서 형성된 문화와 예술의 특수한 궤적을 재구성하려는 이론적 시도다. 이는 단지 민족주의적 정체성의 주장이나 지역주의로 환원되지 않고, 오히려 보편과 특수, 중심과 주변, 번역과 저항의 복잡한 층위를 사유하려는 비판적 실천이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적했듯, ‘오리엔탈리즘은 서구가 아시아를 타자화하는 방식이자, 지식과 권력의 담론 구조였다. 이에 대한 비판은 아시아 내부에서 자신을 구성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즉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서구의 시선을 내면화했고,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를 타자화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아시아적 정체성의 번역된 기원에 주목하게 만든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 근대문학의 형성을 ()’전도(顚倒)’의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서구 보편성의 수용이 곧 자기 부정과 위계 전환의 운동이었음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아시아의 근대는 단순한 이식이 아니라, 타자의 언어로 자기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이중의 윤리적/정치적 행위다. 이러한 사유는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 등 다양한 지역에서 식민 경험, 탈식민의 문화적 억압, 저항적 언어의 형성과 맞닿아 있다.

또한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지속 가능한 근대’, 조정환의 민중적 공통체개념은 서구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도, 한반도라는 특수한 지정학적·문화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미학과 감각의 구조를 분석한다. 이는 분단, 개발독재, 근대화 담론, 글로벌 자본주의의 하청체제화 등 아시아 내부의 위계 속에서 구성되는 정체성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려는 이론적 전개다.

아시아적 정체성론은 결국 다성적인 감각의 지형을 복원하고, 타자의 언어로 사유된 자신을 다시 쓰는 작업이다. 이는 민족주의의 재강화가 아니라, 보편성을 교란하는 비판적 특수성의 정치이며, 예술은 이러한 혼종적 정체성의 실험 공간이 된다. 한국의 근현대문학, 일본의 전후문학, 동남아의 포스트식민 서사 등은 모두 자본주의의 세계적 흐름과 지역적 감각이 충돌하는 접면에서 태어났으며, 미학은 그 틈에서 형성된 기억, 언어, 형식의 분열과 긴장을 기록한다.

역사의 반복

헤겔에게 있어 역사는 단순한 사건의 축적이 아니다. 그는 역사를 정신(Geist)의 자기 전개와 자기 인식의 과정으로 보았으며, 이 과정은 부정과 모순을 통한 자기 극복, 즉 변증법적 반복의 구조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 반복은 같은 자리로 되돌아오는 순환이 아니라, 부정적 과정을 통해 질적으로 전진하는 나선형 운동이다. 헤겔에게 있어 역사는 단지 과거를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자신을 실현해가는 필연의 과정이며, ‘진리는 전체다라는 명제 안에서 모든 파국과 실패조차 궁극적으로 화해로 통합된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 반복 개념을 급진적으로 전복한다. 그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18번째 브뤼메르에서 유명하게 쓴다:

헤겔은 어딘가에서 말했듯,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이 말은 마르크스가 헤겔의 역사 철학에 담긴 목적론적·화해 지향적 시선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역사는 정신의 진보가 아니라, 계급투쟁의 장이며, 그 안에서 반복은 필연의 결과가 아니라 억압된 진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다시 돌아오는 증상적 귀환이다. , 반복은 더 나은 단계로의 이행이 아니라, 결정적인 혁명 또는 실천이 실패했을 때 발생하는 정치적 파국의 재현이다.

이때 예술은 바로 이 반복의 형식을 감각화하는 장이 된다. 되풀이되는 파국, 구조화된 억압의 귀환, 종결되지 않은 과거의 망령이 예술작품의 형식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발터 벤야민 역시 이를 계승하여, 역사를 연속적 진보가 아닌 파편과 비상사태의 연쇄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역사의 천사는 과거의 파편 위로 몰아치는 폭풍을 등지고 있다고 썼다. 예술은 이 파편 속에서 반복되는 구조적 폭력의 흔적을 포착하며, 화해 대신 중단의 윤리, 기억의 정치로 나아간다.

따라서 역사의 반복이라는 문제는 단지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예술이 과거의 억압된 가능성과 마주하는 방식, 그리고 그 반복을 단절하거나 새롭게 조직하는 사유의 양식으로 연결된다. 반복은 희극이거나 비극일 수 있지만, 예술은 그 사이에서 제3의 감각인 중단, 교란, 지연, 사유의 틈을 만들어낸다.

2) 마르크스의 이율배반 혹은 변증법의 기원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결정한다.”

이 문장은 마르크스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역사유물론의 기본 명제로 자리 잡았으며, 이후 수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의식은 물질적 조건의 산물이며, 이데올로기는 계급적 생산양식의 반영이라는 신념을 제공해 왔다. 그러나 이 명제는 과연 그렇게 명확하고 일방향적인 것일까?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말은 자칫 기계적 유물론 또는 경제 결정론으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사유는 헤겔적 변증법의 비판적 계승이라는 점에서, 정적인 인과관계가 아니라, 상호 간섭하고 긴장하는 구조로 이해해야 한다. 존재는 단순히 의식의 원인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재구성하는 실천의 장이며, 의식 또한 존재에 반작용하면서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고 때로는 전복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의 철학은 이율배반적 구조를 품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인간의 사유, 미학, 철학, 종교, 예술 등을 물질적 생산 양식의 반영으로 파악하며, 모든 상부구조적 현상은 토대 위에서만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는 또한 의식의 실천성, 계급 주체의 형성, 혁명의 조건과 윤리를 사유하며, 의식의 개입 없이는 세계는 변화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마르크스는 테제들에서 이렇게 말한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해 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이 말은 단순히 물질 조건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환원주의를 넘어서, 의식적 실천이 역사와 구조를 전복할 수 있는 가능성의 지점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명제는 그 자체로 완결된 결론이 아니라, 마르크스 철학 내에서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변증법적 긴장의 출발점이라 보아야 한다.

예술과 미학의 영역에서 이 명제는 더욱 복잡하게 작동한다. 예술은 물질적 조건(자본, 계급, 노동)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 자체로 감각적 형식의 실험과 이데올로기적 균열의 장소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존재의 산물이면서도, 그 존재를 되돌아보게 만들고, 재구성하게 하며, 감각을 뒤흔들 수 있는 잠재적 전복의 장이다.

결국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문장은 마르크스 철학의 고정된 명제가 아니라, 세계와 예술, 인간과 사유 사이의 끝나지 않은 변증법의 시작이자, 실천과 이론 사이의 간극이 열리는 장소다. 이 이율배반은 곧 마르크스주의 미학이 갖는 가장 생산적인 긴장이기도 하다.

변증법의 세 가지 운동

(정립반정립종합 / 부정의 부정)

헤겔과 마르크스의 철학에서 변증법(dialectics)은 정적인 세계 인식이 아니라, 모순과 부정을 통해 발전하고 전환하는 세계의 운동 방식이다. 고전적 삼단 구조인 정립(thesis) 반정립(antithesis) 종합(synthesis)은 이 운동의 가장 단순한 도식으로, 서로 상충하는 두 항이 충돌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세 번째 항에서 새로운 질적 전환이 이뤄진다.

하지만 마르크스에게 있어 이 변증법은 단지 사유의 형식이 아니라, 역사와 사회의 실제 운동, 즉 계급투쟁의 논리다. 특히 그는 헤겔의 관념적 변증법을 전도시켜, 물질적 조건 속에서 발생하는 구조적 모순, 억압된 계급의 부정적 실천, 자본주의의 자기파괴적 성격을 설명하는 틀로 변증법을 재구성한다.

중요한 것은 부정의 부정개념이다. 이는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부정의 결과마저 다시 부정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이 등장하는 운동이다. 예술 역시 이와 같은 변증법적 운동 안에서 사유될 수 있다. 예술은 기존 질서(정립)를 형식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그 안에서 균열과 이질성(반정립)을 내포하고, 이를 넘어서 새로운 감각적 가능성(종합)을 창출하는 실천이다.

예술의 내적 모순, 형식의 자기 해체, 감각의 전복은 바로 이 변증법의 미학적 형식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그로써 예술은 단지 구조의 반영이 아니라, 구조의 운동성을 드러내는 장소가 된다.

의식과 무의식의 정치

(알튀세르, 라캉, 지젝과의 연결)

마르크스주의는 전통적으로 의식을 구조의 반영으로 간주했지만, 알튀세르 이후, 이 사유는 무의식의 이데올로기적 구성이라는 차원으로 확장된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개인이 사회적 주체로 호명되는 구조로 보았고, 이는 인간이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조 속에서 위치 지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라캉은 이 구조를 언어와 무의식의 층위로 더욱 정교화한다. 주체는 상징계(언어 구조) 안에서 자기 자신을 상상하고, 항상 결핍된 어떤 대상을 욕망하지만, 그것을 절대적으로 획득할 수 없다. 이때 욕망의 대상(a)’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끊임없이 우리 앞에 제시하는 환상의 숭고한 대상이며, 지젝은 이를 통해 현대 이데올로기의 작동 방식을 설명한다.

예술은 이 구조에 포섭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 환상을 폭로하고 무의식의 구조를 교란하는 역할도 한다. 지젝에 따르면 예술은 때때로 환상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환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실천이다. 이는 마르크스주의 미학이 더 이상 단순한 반영론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무의식의 정치학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천의 이중 구조: 구조를 반영하면서도 교란하는 감각의 정치

예술은 언제나 구조 안에서 생산된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생산·유통 구조, 계급적 감각의 위계, 미적 코드의 제도화 속에서 작동한다. 그러나 바로 그 구조 내부에서 예술은 교란을 발생시킬 수 있는 이중의 실천으로 기능한다.

한편으로 예술은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고 재현하며, 기존 질서의 미적 장식을 제공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 예술은 그 질서를 전유하고 비틀며, 새로운 감각의 지형과 타자적 시간을 만들어낸다. 예술은 반영과 전복, 재현과 와해, 제도와 탈주 사이를 오가며, 구조에 포섭되면서도 구조를 열어젖힐 수 있는 실천의 장으로 존재한다.

특히 브레히트의 서사극, 벤야민의 충격 미학, 아도르노의 자율예술 개념은 이 이중 구조를 날카롭게 포착한다. 예술은 사회와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지만, 동시에 사회가 강제하는 감각 구조를 느리게, 다르게, 비틀리게 만드는 정치적 실천으로 작동할 수 있다.

이때 예술은 단지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어떻게 감각하게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실천이며, 감각을 정치화하는 힘, 즉 감각의 정치(politics of perception)를 수행한다.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데 있다.

마르크스의 이 유명한 문장은 철학이 단지 세계를 해석하거나 의미화하는 작업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그 목적은 실천을 통해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급진적 사유의 핵심이다. 이는 단지 철학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 역시 세계에 대해 말하는 방식에서, 세계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요청을 포함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미학은 이 지점에서 예술의 실천성을 다시 묻는다. 예술은 단순히 세계를 아름답게 표현하거나, 고통을 감각화하는 작업이 아니라, 그 감각의 틈으로 기존 질서의 균열을 유입시키고, 새로운 삶의 감각을 조직하는 정치적 실천이 된다. 아도르노는 모든 진정한 예술은 사회를 향한 무언의 비판이라고 했고, 벤야민은 예술의 기술적 재현 가능성이 정치적 미학으로 이행할 수 있는 조건을 탐색했다.

마르크스가 철학의 실천적 전환을 요구했듯, 오늘날 예술 역시 소외된 삶을 가시화하고, 억압된 감각을 호출하며, 가능한 세계의 윤곽을 상상하는 실천적 형식이어야 한다. 이는 단지 선전 예술이나 프로파간다의 형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정한 예술은 현재의 감각을 낯설게 만들고, 익숙한 세계를 질문하게 만들며, 그 틈으로 새로운 관계와 가능성의 감각을 흘려넣는 실천이다.

예술은 세계를 변혁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자주 반복되며, 때로는 냉소적으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 미학은 말한다.

예술은 세계를 직접적으로 바꾸지 않지만,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을 바꿈으로써 그 변혁의 조건을 마련한다.

해석을 넘어서, 삶의 구조, 감정의 배열, 기억의 형태, 언어의 질서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것이 예술의 변혁적 힘이다.

결국 마르크스주의 미학은 이 명제를 되묻는 사유다.

예술은 무엇을 변화시키는가? 예술은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는가? 감각의 형식은 어떻게 삶을 바꾸는가?

이 질문은 끝내 철학자들이 묻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와 독자, 관객과 사회가 함께 감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던져져야 할 질문이다.

3) 마르크스의 미학의 단초들

세익스피어적 경향과 쉴러적 경향: 시대의 메가폰적 인물

마르크스는 일관된 미학 체계를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서신과 청년기 저작, 그리고 자본속에 흩어진 문학적 언급들 속에는 예술에 대한 통찰과 감각의 구조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특히 셰익스피어와 쉴러에 대한 애정은 그의 문학 취향과 동시에 예술에 요구한 정치적·감정적 감수성의 양극을 상징한다.

셰익스피어적 경향은 마르크스에게 있어 현실의 모순과 인간 본성의 어두운 심연을 통과하며, 시대의 폭력성과 역설을 그대로 감각화하는 비판적 형상화를 뜻한다. 셰익스피어의 인물들은 계급, 권력, 욕망, 죄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며, 한 인물 속에 역사와 사회의 모순이 응축된 존재로 드러난다. 마르크스는 이 점에서 셰익스피어를 시대의 감각 기관이자 사회적 진실의 무의식적 발화자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쉴러적 경향은 보다 이상주의적이고 형이상학적 감정의 층위를 대표한다. 쉴러는 아름다움은 자유의 약속이다라는 미학적 명제를 통해 예술이 인간의 내적 윤리와 조화를 이루는 공간이라 보았고, 마르크스는 그의 낭만적 이상주의에 비판적 거리감을 유지하면서도, 정서와 도덕이 결합된 예술의 감화력에는 일정 부분 공감했다. 쉴러적 경향은 예술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인간 해방의 감각적 전조, 곧 정동의 해방으로서의 미학적 실천을 상징한다.

이 두 작가에 대한 마르크스의 시선은 예술가의 두 가지 태도를 암시한다. 하나는 시대의 폭력과 모순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메가폰(셰익스피어)으로서의 예술가, 다른 하나는 이상적 감정과 해방의 윤리를 제시하는 조율자(쉴러)로서의 예술가이다. 마르크스는 이 둘 중 어느 한쪽에 머물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현실의 비극성과 해방의 가능성, 정동의 잔혹성과 윤리적 열망 사이의 긴장을 껴안는 예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셰익스피어와 쉴러는 이처럼 마르크스의 사유에서 예술이 사유의 확장이자 감각의 전투가 되는 장소임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시대의 모순을 말하거나, 시대 너머의 인간 가능성을 상상하는 이들로서, 예술이 단지 해석의 도구가 아니라 정서적·역사적 변증법의 수행자임을 웅변한다.

리얼리즘의 승리(엥겔스)

엥겔스는 문학에 대한 관심이 깊었으며, 마르크스보다 훨씬 더 구체적으로 예술작품의 사회적 기능과 형식에 대해 논의한 바 있다. 그가 발자크, 디킨스, 졸라, 셰익스피어 등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낸 작가들을 높이 평가한 이유는 단순한 묘사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작품이 계급 사회의 모순과 구조적 진실을 형상화했기 때문이었다.

엥겔스가 말한 리얼리즘의 승리란 단순한 자연주의적 사실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리얼리즘을 개별적 특수성 속에서 전체 사회를, 사소한 일상 속에서 역사적 진실을 드러내는 형식이라고 보았다. 즉 리얼리즘은 사회적 총체성을 형상화할 수 있는 예술의 능력이며, 사회 구조 속에 위치한 인물의 모순된 행위와 내적 갈등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의 대표적인 예는 보수 귀족이었던 발자크에 대한 찬사다. 엥겔스는 발자크가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무관하게 부르주아 사회의 잔혹한 내부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그려냈다고 말하며, 이 지점에서 정치적 입장보다 더 근원적인 리얼리즘의 통찰력을 강조했다.

이러한 입장은 루카치에게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루카치는 리얼리즘을 '총체적 현실 인식의 형식'으로 간주하면서, 근대소설이 보여주는 인물과 세계 사이의 중층적 관계, 사회적 힘들이 충돌하는 서사 구조, 주체의 형성 과정에 담긴 계급적 감정을 분석했다. 그는 리얼리즘이야말로 모더니즘의 형식적 실험보다 더 정직하고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미학적 형식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리얼리즘 찬가는 이후 브레히트, 아도르노, 벤야민 등과의 논쟁으로 이어진다. 브레히트는 감정 이입과 사실적 재현에 머무르는 리얼리즘을 비판하며, 비판적 거리두기(Verfremdung)를 통해 현실을 낯설게 만들고, 재사유하게 하는 서사적 실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아도르노 역시 총체성이라는 개념에 내재한 통일성과 화해의 가능성을 비판하며, 리얼리즘이 감추는 균열과 파편성에 주목할 것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엥겔스의 리얼리즘 옹호는 오늘날까지 유효한 질문을 남긴다.

예술은 어떻게 현실을 그릴 수 있는가?

현실의 모순은 어떤 형식을 통해 감각화되는가?

계급 구조는 어떻게 인물의 심리와 행위에 새겨지는가?

이러한 질문은 마르크스주의 미학이 예술을 단지 선동이나 교훈의 도구로 보지 않고, 현실을 사유하고 구성하는 감각의 형식으로 이해했다는 점을 드러낸다.

엥겔스가 말한 리얼리즘의 승리는 결국, 예술이 현실과 충돌하면서도 그 현실을 넘어서는 감각의 형식으로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선언이었다.

디테일의 충실성, 전형적인 상황에서의 전형적인 인물

역사를 뛰어넘는 역사=> 역사를 뛰어넘는 역사

리얼리즘 문학은 흔히 현실의 정확한 묘사로 이해되지만, 마르크스주의 미학에서의 리얼리즘은 단순한 사실주의나 관찰의 충실성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표면을 통해 그 이면에 있는 역사적 진실과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는 형식이다.

게오르그 루카치는 이를 전형적인 상황 속의 전형적인 인물이라는 개념으로 정식화했다. 여기서 전형적이라는 말은 결코 흔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한 인물과 상황이 당대의 계급 구조와 사회적 긴장을 응축하여 대표할 수 있을 때 성립하는 역사적 정밀성의 표현이다. 전형적 인물은 단지 어떤 계급의 대표자가 아니라, 자기 시대의 역사적 모순을 실존적으로 감당하고 드러내는 형상이다.

이 전형은 디테일을 통해 완성된다. 루카치에게 있어 사소한 세부 묘사, 일상의 리듬, 인물의 몸짓과 말투, 배경의 구체성은 단지 사실감의 강화가 아니라, 그 인물이 처한 구조적 조건과 역사적 정황을 보여주는 단서다. 즉 디테일의 충실성은 현실을 구성하는 조건들의 감각적 흔적이며, 그 충실성 안에서 삶의 역사적 밀도가 드러난다.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주의 리얼리즘은 역사를 뛰어넘는 역사라는 역설에 도달한다. 개별 인물이 처한 구체적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그릴 때, 오히려 그 인물은 자신의 시대를 넘는 보편적 진실의 형상이 된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 발자크의 라스티냐크, 고골의 아카키예비치는 모두 당대 사회의 구조적 질병을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전형적 인물이면서, 그 삶이 역사 자체의 비판이자 증거가 된다.

예술은 이처럼 역사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살아내는 감각의 형식을 창출한다.

리얼리즘은 단지 사건의 묘사가 아니라, 역사적 삶의 형상화이며, 이를 통해 예술은 시간을 가로지르는 구조적 인식, 곧 역사를 뛰어넘는 역사를 성취한다. 다시 말해, 리얼리즘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보이지 않는 구조를 어떤 형식으로 볼 것인가를 묻는 실천적 사유의 방식이다.

 

2. 마르크스주의 미학의 형성과 분화

1) 게오르그 루카치(1885~1971)

헤겔철학의 영향과 소설의 이론

게오르그 루카치는 마르크스주의 미학의 기틀을 마련한 대표적 사상가로, 그의 미학은 헤겔의 역사철학과 미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데서 출발한다. 특히 루카치는 예술을 현실의 단순한 재현이 아닌, 인간과 세계 사이의 매개적 형식으로 이해하며, 총체성(Totalität) 개념을 중심으로 예술과 현실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규정하려 했다.

소설의 이론(1916)은 루카치가 마르크스주의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기 이전에 쓴 저작이지만, 그의 미학 사유의 원형이자, 이후 리얼리즘론의 이론적 기초가 된다. 이 책에서 루카치는 소설이라는 장르를 형식으로서의 세계관이라 규정하며, 고전 서사와 근대 서사의 단절, 그리고 소설이 보여주는 인간의 내적 분열과 세계의 소외를 철학적으로 분석한다.

그는 소설의 등장을 세계의 총체성이 더 이상 신과 초월적 질서 속에서 보장되지 않는 시대의 산물로 본다. , 중세적 세계관이 해체되고, 인간이 낯선 세계속에서 자기 삶의 방향을 스스로 찾아야 하는 근대의 조건 속에서 소설이라는 장르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루카치가 헤겔로부터 물려받은 역사적 의식과 형식의 변증법적 구조에서 비롯되었다.

헤겔은 예술을 정신의 자기 인식 과정으로 보았고, 시대의 발전에 따라 예술 형식도 변화한다고 주장했다. 루카치는 이 점을 계승하면서도, 헤겔이 미화한 고전 예술의 통일성 대신, 근대 예술의 불균형과 긴장, 인간과 세계의 단절 속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윤리와 감각을 강조했다. 소설의 이론은 바로 이 단절의 미학, 혹은 총체성을 상실한 시대의 서사적 형식을 본격적으로 이론화한 저작이다.

이 책은 이후 루카치의 리얼리즘론, 특히 전형성 개념, 삶의 구체적 총체성, 인물과 구조의 변증법적 관계 등으로 발전하며, 마르크스주의 미학 내부에서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논쟁, 브레히트와의 갈등, 아도르노와의 대립 등 다양한 분기점의 이론적 기반이 된다.

⑵ 『역사와 계급의식이후

게오르그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1923)은 마르크스주의 철학과 미학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꾼 저작이다. 이 책에서 루카치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구조주의적 경향을 넘어서, 변증법적 총체성, 계급 주체의 형성, 역사적 실천의 가능성이라는 문제를 전면에 부각시켰다. 특히 사물화”, “프롤레타리아의 자기인식”, “당파성개념은 이후 마르크스주의 미학의 중요한 이론적 축으로 자리 잡는다.

사물화 (Verdinglichung)

루카치가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제시한 사물화개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삶, 노동, 관계가 물건처럼 대상화되고 소외되는 구조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이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교환가치의 관점에서 파악하며, 그 결과 인간은 관계의 주체가 아니라 시스템의 부속품, 곧 기능화된 객체로 전락하게 된다. 루카치는 이 구조를 단지 경제적 문제로 보지 않고, 의식의 구조, 감각의 양식, 예술의 형식에까지 침투한 사회적 총체로 분석한다.

예술 역시 이 사물화된 현실 속에서 존재하며, 현실을 비판 없이 재현할 경우, 예술은 오히려 사물화의 연장선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술은 이 사물화의 구조를 드러내고 파열시키는 형식적 실험의 장이 될 수 있으며, 이는 루카치가 이후 리얼리즘의 미학적 당위성을 주장하게 되는 철학적 배경이 된다.

주객 동일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

루카치는 역사적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유일한 실천 주체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상정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철저하게 대상화되고 소외된 존재이지만, 바로 그 구조적 위치 때문에 자기 자신의 소외를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 곧 주체이자 객체의 동일자가 될 수 있다.

이 개념은 루카치의 변증법적 총체성 이론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자신의 계급적 조건을 인식하고, 전체 사회구조를 비판적으로 조망할 때, 비로소 역사적 주체로서의 가능성을 획득한다고 본다. 이 사유는 단순한 계급 옹호가 아니라, 역사의식을 가진 주체가 형성될 수 있는 구조적 조건을 묻는 철학적 탐구다.

예술 역시 이 지점에서 중요해진다. 예술은 이러한 계급의식 형성에 기여할 수 있는 감각적 실천이며, 루카치가 이후 리얼리즘을 옹호하는 이유는 바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자기 인식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돕는 서사의 형식으로서의 가능성 때문이다.

당파성 (Parteilichkeit)

루카치는 예술과 철학이 중립적일 수 없으며, 반드시 당파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당파성이란 단순히 선전이나 정치적 목적의 도구화가 아니다. 오히려 예술이 현실을 어떻게 구성하느냐, 어떤 감각의 질서를 제안하느냐에 따라 이미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특히 루카치는 당파성이야말로 예술의 진정한 현실성과 구체성을 보장하는 조건이라고 본다. 그는 리얼리즘이 특정 계급의 관점을 전면에 내세운다고 해서 그 가치를 훼손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예술이 현실과 맺는 진정한 관계라고 본다. 여기서 예술의 당파성이란 현실을 분석하고 해체하고 감각의 윤리적 입장을 뜻하며, 이는 루카치의 전체 미학 체계의 중심에 놓인다.

이 세 가지 개념인 사물화, 주객의 동일자, 당파성은 루카치의 철학이 단순한 구조 분석을 넘어서, 역사적 실천 가능성, 예술의 역할, 감각의 윤리에 이르는 철학적 미학 체계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역사와 계급의식이후 루카치는 리얼리즘에 천착하게 되며, 미학 내부에서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정치철학적 논쟁을 이끌게 된다.

⑶ 『역사 소설론

게오르그 루카치의 역사 소설론(1947)은 마르크스주의 미학 내부에서 역사와 소설, 개인과 총체성의 문제를 통합적으로 사유한 대표적 저작이다. 그는 이 책에서 발자크, 스탕달, 톨스토이 등의 고전 리얼리즘 작가들을 중심으로, 역사소설이라는 장르가 역사를 단순히 재현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 삶 속에서 구체적 인간 형상들을 통해 역사적 진실을 감각화하는 형식임을 강조한다.

살아있는 전사

루카치가 높이 평가한 리얼리즘 역사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인물이 단지 허구적 개체로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시대를 살아 있는 실존적 전사로 구현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전사(戰士)’는 단순한 영웅적 전사라기보다는, 역사적 조건 속에서 자신의 삶을 감내하고, 그 조건을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반영하며 살아가는 존재를 뜻한다. 이 인물들은 시대의 표면이 아니라, 그 내부의 모순, 갈등, 사회적 힘의 충돌을 응축하고 있는 살아 있는 매개체다.

발자크의 인물들이 자신도 모르게 부르주아 사회의 모순을 노출시키듯, 루카치가 말하는 살아 있는 전사는 단순히 역사의 배경 속에 배치된 것이 아니라, 역사를 살아냄으로써역사의 본질을 드러내는 존재다. 이는 루카치가 전형성개념을 통해 발전시킨 사회적 필연성과 개인적 개연성의 통합이라는 미학 이론의 응용이기도 하다.

역사의 사사화

역사 소설론에서 루카치는 역사를 거대한 담론이나 연대기의 나열이 아니라, 개인의 삶 속에 침투해 있는 구체적 체험의 장으로 이해한다. 이는 역사의 사사화(私事化), 역사적 사건들이 개인의 감정, 선택, 갈등, 삶의 형식 안에서 구체적으로 경험되고 해석되는 과정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대표적인 예다. 루카치는 이 작품에서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대서사가 단지 국가나 장군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일상인물들의 시선과 감정, 판단 속에서 체험되고 해석되는 방식에 주목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전투가 어떻게 벌어졌는가가 아니라, 그 전투가 한 개인의 내면에 어떤 균열을 남겼는가, 혹은 그 전쟁이 삶의 감각을 어떻게 바꾸었는가이다.

이러한 역사의 사사화는 역사의 탈정치화나 사적 감정화와는 다르다. 오히려 루카치는 이를 통해 총체성과 개별성, 구조와 행위, 역사와 감정의 통합을 이끌어내는 리얼리즘의 가능성을 논한다. , 역사는 소설 속에서 큰 이야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작은 삶을 통해 감각되고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역사 소설론은 루카치가 추구한 리얼리즘의 윤리와 형식, 역사적 사유의 미학적 전환을 보여주는 결정적 저작이며, 인물은 역사를 겪는 자이자, 역사를 증언하는 자, 서사는 구조를 드러내는 장치이자, 감정의 기억을 담는 형식이 된다.

전형성, 총체성, 운동의 총체성과 과정의 총체성

게오르그 루카치가 마르크스주의 미학에서 강조한 핵심 개념은 전형성(Typisches)과 총체성(Totalität)이다. 이 두 개념은 단순히 문학적 기법이나 인물의 대표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역사, 인간과 구조 사이의 필연적 관계를 형상화하는 방식에 대한 이론이다.

전형성: 구체 속에 드러나는 구조

루카치에게 전형성은 어떤 계급의 평균적 인간형이 아니라, 특수한 인물 속에 역사적 구조의 본질이 드러나는 형상이다. 다시 말해, 전형적 인물이란 개인적 특수성과 사회적 필연성이 하나로 접합된 존재이며, 그를 둘러싼 세계의 모순과 긴장을 내면화하고 실천 속에서 드러내는 살아 있는 형식이다.

이는 단순한 성격 묘사와 구별된다. 전형은 삶의 구체성과 계급적 조건, 감정의 심층과 구조적 힘이 하나의 인물 안에 정제된 형태로 드러날 때 성립한다. 루카치는 발자크와 톨스토이, 스탕달의 인물들이 바로 그러한 전형성을 구현했다고 보았다. 그들의 인물들은 특정 시대의 사회적 움직임과 모순을 살아 있는 개인의 운명으로 감각화한다.

총체성: 세계를 조망하는 서사의 윤리

총체성은 루카치 미학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총체성이란 단지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조건과 계급 구조, 인간의 행위가 하나의 상호작용 체계로 엮이는 구조적 인식을 의미한다. 이때 총체성은 정적인 전체가 아니라, 움직이고 갈등하며 변형되는 현실의 흐름이다.

루카치는 리얼리즘이 이 총체성을 형상화하는 유일한 문학적 방식이라고 보았다. 리얼리즘은 현실의 표피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작동하는 사회적 힘과 계급적 긴장을 드러내는 서사 구조이며, 인물의 삶과 감정, 선택과 무의식이 구조적 운동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밝혀내는 감각의 체계이다.

운동의 총체성과 과정의 총체성

루카치는 리얼리즘을 단순한 결과의 묘사가 아니라 과정의 인식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그는 두 가지 개념을 구분한다:

운동의 총체성은 역사나 사회 구조의 외적 결과, 즉 표면에 드러나는 힘의 배열과 결말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이는 흔히 역사극이나 교훈적 서사에서 나타나는 전체성이다.

반면, 과정의 총체성은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갈등, 모순, 결정, 실천, 실패와 같은 시간적 전개 속에 드러나는 총체성이다. 이것이야말로 리얼리즘이 지향해야 할 형식이다.

과정의 총체성은 세계가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와 판단, 감정과 선택 속에서 구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루카치는 리얼리즘이 이 과정을 따라가고 구성해낼 수 있어야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적 현실을 형상화하는 문학이 된다고 보았다.

루카치에게 전형성과 총체성은 단지 이론적 개념이 아니라, 문학이 현실과 맺는 윤리적 관계의 척도였다. 전형성은 개인의 삶을 통해 구조를 드러내는 방식, 총체성은 삶의 흐름을 통해 역사를 인식하는 방식이며, 이 둘은 문학이 세계와 맺는 비판적이고 변증법적인 관계를 정당화하는 형식 논리이자 미학적 실천이었다.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비판적 리얼리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20세기 마르크스주의 미학 논쟁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의 질문이 놓여 있었다: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 질문은 곧바로 예술은 어떻게 현실을 형상화해야 하는가”, “현실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예술의 정치적 임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확장된다. 이 논쟁 속에서 리얼리즘은 단일한 양식이나 기법이 아니라, 현실과 형식, 감각과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사유하는 미학적 정치적 전장이 되었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현실 재현의 두 방식

게오르그 루카치는 리얼리즘을 현실의 총체성을 드러내는 유일한 예술 형식으로 간주했다.

그는 모더니즘 문학이 보여주는 형식주의, 주관주의, 파편성, 내면주의는 현실의 구조를 인식하지 못한 채, 인간의 단절된 경험만을 부각시키는 비역사적 감각의 반복이라 비판했다.

루카치에게 모더니즘은 사물화된 세계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지 못한 채, 사물화 자체에 굴복한 자의 미학이었다.

반면, 아도르노와 벤야민은 루카치의 총체성개념을 비판한다.

아도르노는 현실 자체가 이미 파편화되어 있다고 보며, 예술이 그 파편성과 불화의 형식을 드러내지 못하면 오히려 허위의 조화로 현실을 미화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벤야민 역시 전통적 리얼리즘이 지닌 통합적 서사 구조가 파시즘과 권위주의에 이용될 가능성을 경계했다. 이들은 모더니즘의 파괴적 실험과 미적 자율성 속에서 오히려 비판의 가능성과 감각적 저항의 언어를 발견한다.

비판적 리얼리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리얼리즘 내부에서도 두 가지 방향이 분화된다:

비판적 리얼리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다.

비판적 리얼리즘은 부르주아 현실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지만, 혁명적 전망을 전면화하지 않는 리얼리즘이다. 이는 발자크나 디킨스처럼, 자기 시대의 모순을 날카롭게 포착하면서도, 계급 투쟁의 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를 명시적으로 그리지 않는 방식을 말한다. 루카치는 발자크를 이 범주에 포함시키면서도 리얼리즘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고전적 모델로 간주했다.

반면,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1930년대 스탈린 체제 하의 공식적인 예술 원칙으로 정립된 것으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투쟁과 사회주의 혁명의 정당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형식이다.

여기서 예술은 현실을 그리되, 그것을 변혁의 방향에서 보여줄 것이라는 원칙을 따라야 했다. 하지만 이 리얼리즘은 곧 형식의 경직화, 이데올로기의 선전화, 낙관주의의 강요로 이어졌고, 많은 마르크스주의 예술가들이 이 틀에서 이탈하거나 비판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브레히트는 이 양극단 사이에서 변증법적 리얼리즘을 주장했다. 그는 감정 이입과 서사적 몰입이 관객의 비판적 인식을 방해한다고 보며, 소외효과(Verfremdung)를 통해 관객이 현실을 낯설게 보고 사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브레히트의 리얼리즘은 단지 사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문제로 제기하고,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형식이었다.

리얼리즘을 둘러싼 이 모든 논쟁은 결국 하나의 문제로 수렴된다:

예술은 어떤 감각의 질서를 만들어야 하는가?

루카치는 통합과 인식의 질서, 아도르노는 불화와 단절의 감각, 브레히트는 비판과 실천의 거리, 벤야민은 기술과 파편, 충격의 정치학을 통해 각각의 리얼리즘을 재구성했다.

요컨대,

리얼리즘은 더 이상 하나의 형식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예술이 무엇을 드러낼 것인가, 감각은 어떻게 구조화되는가, 정치적 실천은 어떤 감정과 인식을 통해 이루어지는가라는 질문 전체를 포괄하는 미학적-정치적 사유의 장이다.

고전주의 =>낭만주의=>리얼리즘=>자연주의=>초현실주의, 다다이즘, 아방가르드 등

모더니즘=> 비판적 리얼리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예술사에서 형식의 변화는 단지 미적 기법의 진화가 아니라, 현실을 감각하는 방식,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사유하는 구조, 정치적 감정의 변형을 담고 있는 운동의 흔적이다. 마르크스주의 미학의 시선에서 보면, 각 사조는 특정한 시대적 총체성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으며, 계급 구조, 생산 양식, 인간 의식의 지형도를 반영하면서 동시에 그에 저항하고 재구성한다.

고전주의 낭만주의

고전주의는 조화, 균형, 이성, 통일성을 강조하며, 질서정연한 세계관과 인간의 보편적 본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는 봉건적 위계 질서와 계몽적 세계관이 교차하는 시기의 형식으로, 인간을 자연 질서 안에 조화롭게 위치시키는 존재로 형상화한다.

그러나 낭만주의는 이 조화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낭만주의는 개인의 감정, 상상력, 고독, 초월적 열망을 강조하며, 이성과 질서가 포착하지 못하는 세계의 심연을 추구한다. 이는 프랑스 혁명 이후의 불안, 산업화에 따른 소외, 계몽의 실패에 대한 반동적 감정이 미학 속으로 스며든 결과이며, 내면의 분열과 고통, 존재의 불확실성을 통해 새로운 감각의 층위를 형성했다.

리얼리즘 자연주의

리얼리즘은 다시 세계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화가 아니라 모순, 이념이 아니라 조건, 보편이 아니라 구체가 중심이 된다. 리얼리즘은 개인의 삶 속에 구조적 갈등이 어떻게 파고드는가, 사적인 이야기가 어떻게 역사적 진실과 만나는가를 그린다. 이는 자본주의가 일상에 침투하기 시작한 시대, 계급 갈등과 근대적 자아의 탄생을 감각화하는 형식이다.

자연주의는 리얼리즘의 연장선상에 있으나, 더 급진적인 결정론, 유전학, 환경 조건에 초점을 맞춘다. 인간은 의지가 아니라 조건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이며, 이는 다윈주의와 사회과학적 세계관이 예술로 스며든 결과이다. 졸라, 모파상 등이 그 대표이며, 자연주의는 객관적 관찰을 강조했지만, 종종 삶의 비참한 결정성을 재현하는 데 머물렀다는 비판도 받는다.

모더니즘: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아방가르드

1차 세계대전 이후, 기존의 예술 형식은 파괴되었다. 전쟁, 대량학살, 제국주의, 근대적 합리성의 붕괴는 예술로 하여금 이성적 서사, 일관된 인물, 현실의 통일성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만들었다. 다다이즘은 무의미와 해체를 실천했고, 초현실주의는 꿈, 무의식, 자동기술을 통해 이성의 해체와 새로운 감각의 질서를 추구했다. 아방가르드는 예술을 혁명으로 만들고자 했으며, 일상의 감각을 전복하는 실험을 통해 자본주의적 감각의 재조직화에 저항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모더니즘은 루카치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이들이 현실의 총체성을 포기하고, 단절된 내면과 추상적 형식에 갇혀버렸다고 판단했다. 반면 아도르노와 벤야민은 모더니즘의 실험 속에서 감각의 낯설게 하기, 이데올로기적 균열의 가능성, 미학적 비판의 윤리를 발견한다.

비판적 리얼리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모더니즘 이후, 리얼리즘은 다시 정치적 의미를 지닌 미학으로 등장한다. 비판적 리얼리즘은 자본주의의 모순과 구조를 날카롭게 드러내되, 반드시 혁명적 전망을 전면화하지는 않는다. 이는 발자크, 디킨스, 고리키에서 황석영, 귄터 그라스, 오에 겐자부로로 이어지는 계보 속에서 구조적 시선과 감정의 윤리를 통합한 리얼리즘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소련의 공식 예술 노선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해방 서사, 낙관적 전망, 계급 의식을 드러내는 예술을 요구했다. 그러나 형식의 경직화, 선전화, 정치적 도식화로 인해 많은 예술가들의 이탈과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브레히트, 루카치, 벤야민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 리얼리즘을 재구성하려 했고, 리얼리즘은 다시 감각의 정치라는 가장 급진적인 문제로 회귀했다.

요컨대, 예술의 사조는 단지 양식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가 무엇을 감각할 수 있었는가, 예술은 어떤 진실을 말할 수 있었는가, 형식은 어떤 윤리를 담을 수 있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의 계보다. 각 사조는 당대의 계급 구조, 이데올로기, 감정 구조를 반영하면서도, 그 자체로 역사적 현실에 대한 미적 저항이자 응답이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미학에서 예술사란, 형식과 이념의 투쟁의 기록이며, 감각의 정치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지도이다.

파시즘과 이성의 파괴

20세기의 파시즘은 단순한 정치적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근대 문명이 지닌 이성의 구조 자체가 야만을 생산할 수 있음을 드러낸 역사적 사건이었다. 계몽의 이름으로 축적되어 온 과학, 기술, 질서, 합리성은 오히려 인간을 효율적으로 파괴하고 통제하는 수단이 되었고, 예술과 문화마저 그 체계 속에 편입되었다. 마르크스주의 미학은 이 파시즘의 조건을 사회 구조와 이데올로기, 감각의 질서 속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하려 했다.

파시즘은 단지 강제력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것은 정서적 동원, 기호와 이미지의 조직, 일상 언어와 시선의 전환을 통해 대중을 포섭했다. 현실의 모순을 은폐하고, 집단적 열광과 권위주의적 정서를 구축하는 이 과정 속에서 예술은 중립적일 수 없었다. 예술은 그 선택에 따라 진실을 은폐하는 장치가 되거나, 폭력을 드러내고 거리를 만드는 형식이 될 수 있었다.

이 시기 예술가와 사상가들은 하나의 질문에 직면했다.

야만의 시대에 예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이 질문은 단지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감각의 윤리, 현실에 대한 태도, 예술가의 역사적 책임에 대한 문제로 확장되었다. 특히 리얼리즘 논쟁은 이 시기 더욱 첨예해졌다. 파시즘은 현실을 미화했고, 예술은 현실을 다시 묻고 해체할 책임을 지게 되었다. 감정 이입이나 영웅주의적 서사는 오히려 체제의 정당성을 강화할 위험이 있었고, 이에 맞서 일부 예술은 냉정한 거리, 파편화된 감각, 구조의 낯설게 하기를 통해 현실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려 했다.

예술은 이 시기 선택을 강요받았다. 복무하거나 저항하거나. 침묵하거나 질문하거나. 그 갈림길에서 마르크스주의 미학은 다시 묻는다.

예술은 어떻게 이성을 회복할 것인가?”

2) 아도르노

⑴ 『역사와 계급의식의 비판적 계승과 자본주의의 극복 불가능성

아도르노는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을 비판적으로 계승한다. 그는 루카치가 제시한 총체성개념과 계급 주체의 형성에 내재한 낙관적 전망에 회의를 표하며, 현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지배 구조와 주체 형성의 방식이 더 이상 혁명적 실천을 가능케 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 자본주의는 단지 착취의 체계가 아니라, 감정과 욕망, 언어와 감각까지도 포섭한 전면적 재생산 체계로 진화했고, 이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조차도 더 이상 변혁의 보증으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진단을 내린다.

아도르노는 루카치가 사유했던 계급 의식의 가능성자체를 문제화하며, 현대 사회에서는 주체가 스스로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기반이 구조적으로 무력화되었다고 본다. 그 결과, 아도르노 철학의 핵심에는 다음과 같은 역설이 자리 잡는다:

변혁은 더 이상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세계를 그대로 긍정할 수도 없다.”

이 지점에서 아도르노는 변증법의 형태는 계승하되, 그것을 부정의 논리로 전환한다.

강요된 화해

아도르노에게 있어 화해란 필연적으로 부정적이어야 한다.

그는 근대 철학이 오랫동안 추구해온 이성과 세계의 조화, 주체와 객체의 통합, 사유와 존재의 일치라는 개념들을 위장된 화해, 또는 강요된 화해로 간주한다. 이러한 화해는 현실의 모순과 억압, 고통과 비합리를 사유 안에서 미리 해결된 것처럼 처리해버리는 환상이며, 그 자체가 이미 현실의 야만성과의 공모라는 것이 아도르노의 핵심 주장이다.

이러한 강요된 화해는 특히 체계화된 철학 안에서 드러난다. 그가 루카치, 헤겔, 심지어 마르크스의 일부 낙관주의적 전망에까지 비판적으로 거리를 두는 이유는, 이들이 총체적 진리와 조화의 가능성을 사유의 체계 속에서 미리 전제하거나 서사화하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체계를 "조기 화해의 구조"라고 비판하며,

"철학은 고통이 사라진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 고통이 사라지기 전에는 화해도 없다."

예술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움, 통일성, 형식적 조화가 강조되는 고전주의적 미학 역시 고통과 분열의 현실을 미적으로 봉합하는 방식이라면, 그것은 거짓 화해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아도르노는 예술이 조화가 아니라 불화, 해결이 아니라 긴장, 총체가 아니라 파열을 통해 화해를 유보하고, 그 유보 속에서 진실에 다가가는 형식을 옹호한다.

계몽의 변증법고 알레고리로서의 오디세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1947)에서 계몽이 어떻게 자신의 이념을 배반하고 야만으로 귀결되는가를 분석하며, 근대 이성의 구조 자체에 내재한 자기파괴의 논리를 비판한다.

계몽은 자연을 대상화하고, 인간을 중심에 두며, 모든 이질성과 타자성을 제거하여 통제 가능한 동일성으로 환원하려는 힘이다.

이러한 계몽적 충동은 기술, 과학, 자본, 지배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발전하면서, 오히려 자연뿐 아니라 인간 자신마저 지배의 객체로 전락시킨다.

이 구조를 아도르노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통해 문학적으로 분석한다.

오디세이아는 단순한 영웅 서사가 아니라, 근대적 주체가 형성되는 알레고리로 읽힌다. 오디세우스는 끊임없이 변신하고 위기를 계산하며, 자신의 충동과 타자적 유혹을 억제하고 이성적으로 통제하는 인물이다. 그는 마법의 섬과 요정, 유혹의 노래와 원초적 혼돈의 상징들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자신의 감각을 봉쇄하고, 자신을 대상화한다. 그리하여 그는 살아남지만, 그 과정은 타자와의 관계를 파괴하고,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적 감수성을 말살하는 서사가 된다.

아도르노는 이 과정을 계몽의 기원에서부터 내재한 폭력성의 구조로 해석한다.

오디세우스는 살아남지만, 그의 여정은 근대 주체가 타자를 배제하고 세계를 정복하는 이야기이며, 이는 이성 중심주의, 가부장제, 자본주의, 제국주의, 전체주의에 이르는 현대 문명의 뿌리를 형상화한다. 결국 계몽의 변증법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계몽은 모든 것을 동일한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 동일성 속에서 파시즘도, 문명도, 대중문화도 함께 자라난다."

교환의 원리와 등가성의 원리

아도르노는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 작동 원리를 교환의 원리”(Prinzip der Äquivalenz)로 규정한다. 이 원리는 상품이 시장에서 교환되기 위해 모든 사물과 인간, 행위와 감정이 일정한 척도에 따라 등가화되어야 한다는 논리에 기반한다. 이때의 등가성은 단지 경제적 가치만이 아니라, 사유의 방식, 미학의 형식, 감정의 구조에까지 확산된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자신의 유일성을 잃고 교환 가능한 기능 단위로 환원되며, 예술 작품도 고유한 감각의 조직체가 아니라, 기능과 용도에 따라 평가되는 상품으로 전락한다. 그리하여 현실은 다채롭고 이질적인 삶의 형상들을 지우고, 획일화된 동일성, 가치로 환원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할 수 있는 체계로 재편된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현실에서 이성과 감각이 모두 등가의 질서안에 포섭되며,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비등가적인 것이 억압된다고 보았다. , 세상은 점점 더 측정 가능한 것, 비교 가능한 것, 계산 가능한 것만을 인정하며, 그 바깥의 삶, 감정, 고통, 예외는 무가치하거나 불온한 것으로 간주된다.

문화산업: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문화 생산 체계를 문화산업(Kulturindustrie)”이라 명명했다. 이 개념은 단지 대중문화의 비하가 아니라, 문화가 상품으로 조직되고, 감각과 의식이 체계적으로 관리되는 구조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이론적 틀이다.

문화산업은 문화의 산업화를 통한 계몽의 기만적 재현이다. 그것은 예술이 감정의 해방과 진실의 탐색이 아닌, 소비 가능한 오락으로 전락된 상태이며, 대중의 감각을 조작하고, 자율적 사유를 억제하며, 체제 순응적 의식을 재생산한다. 이는 계몽이 지닌 이성의 이상이 오히려 지배와 동조의 장치로 기능하는 현실이다.

문화산업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표준화: 모든 문화 콘텐츠는 일정한 규격과 형식에 따라 제작된다. 장르, 플롯, 캐릭터, 결말이 반복되고 예측 가능하게 구성되어 낯섦과 사유의 기회를 제거한다.

동일화: 다양해 보이는 선택지는 실상 거의 차이가 없으며, 대중은 자유롭게 고르는 듯하지만, 구조적으로 유사한 것만을 고르게 된다. 이는 자유의 환상을 제공하는 기만이다.

감정의 조작: 감동, 충격, 유머 등 모든 감정은 소비를 위한 자극의 형태로 조직된다. 비판적 정서와 실천적 사유는 차단된다.

이러한 문화산업은 대중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쾌락과 익숙함을 통해 동의를 유도하며, 비판 대신 공감, 고통 대신 위로, 사유 대신 몰입을 제공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예술은 현실을 반영하거나 넘어서기보다, 현실의 반복과 정당화를 수행한다.

아도르노는 이처럼 문화산업을 통해 자본주의가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감정과 언어까지 포섭하며 지배를 심화시킨다고 본다. 그리하여 진정한 예술은 이러한 기만 구조에 저항해야 하며,

오히려 소외, 파편성, 불협화음, 난해함, 침묵을 통해 현실의 위장된 조화를 흔들 수 있어야 한다.

아우슈비츠 이래로 모든 서정시는 야만이다.

아도르노가 남긴 가장 유명하면서도 자주 오해받는 문장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다:

아우슈비츠 이후로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Nach Auschwitz ein Gedicht zu schreiben, ist barbarisch.")

이 문장은 종종 예술 창작의 불가능성 선언으로 읽히지만, 그보다 더 복합적이고 철학적인 의미를 지닌다. 아도르노는 이 문장을 통해 현대 문명이 저지른 절멸의 폭력 앞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감정의 언어를 쓰는 것이 윤리적으로 가능하냐는 질문을 제기한다. 여기서 서정시는 단지 시 형식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의 정서, 감정, 아름다움, 고요, 내면성, 조화를 담아내는 예술 일반을 상징한다.

아도르노에게 이러한 형식은 세계의 고통과 분열, 인간의 비인간화된 현실을 외면한 채 감각의 자율성과 조화를 추구하는 위선이 될 수 있다.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은 함의를 담고 있다:

예술은 아우슈비츠 이후, 더 이상 순진할 수 없다. 세계는 근본적으로 파괴되었고, 예술은 그 파괴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예술은 고통의 형식이어야 하며, 현실의 상처를 봉합하지 않아야 한다. 아름다움은 현실과 긴장을 맺을 때에만 진실할 수 있다. 예술은 침묵하거나, 파열되거나, 파편화되어야 한다. 총체성이나 감정 이입, 조화로운 서사로 나아가는 예술은 야만을 미화하는 무의식적 공범이 될 수 있다.

이 문장은 또한 아도르노의 부정미학과 연결된다. 예술은 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말해질 수 없음을 형식으로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아도르노의 후기 입장은 서정시의 가능성을 완전히 폐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서정시를 쓰는 것이 야만일 수밖에 없는 이 시대에도,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윤리적 책임은 더욱 중요해졌다.” 고 말하며, 야만 속에서도 서정의 윤리를 찾으려는 긴장된 사유를 지속한다.

부정 변증법: 모든 전체는 비진리다

“Das Ganze ist das Unwahre.” 테오도어 아도르노, 부정 변증법

아도르노의 철학에서 부정 변증법(Negative Dialektik)’은 헤겔 변증법의 계승이자 철저한 전복이다. 그는 헤겔식 변증법이 대립의 종합과 화해, 자기 동일성과 총체성을 지향한다고 비판하며, 이러한 변증법은 역사의 모순을 체계 속에서 조기 해결하려는 위장된 화해의 형식이 된다고 본다.

아도르노에게 철학은, 고통이 있는 한, 화해를 선언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그는 모든 긍정적 종합을 유보하고, 대립과 모순을 부정적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유의 방식’, 부정의 논리로서의 변증법을 제안한다.

전체는 비진리다

모든 전체는 비진리다라는 선언은, 단지 전체주의에 대한 정치적 선언이 아니다. 이것은 철학, 예술, 사회체계, 이념 등 모든 통일된 사유 체계가 반드시 배제와 억압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배제를 통해서만 유지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다. 총체성은 차이와 이질성, 특수성의 말소를 통해 만들어진 허구의 통일성이다. 모든 체계는 자기 바깥의 것을 억압함으로써만 자기 동일성을 유지한다. 따라서 진리는 전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부터 밀려난 것, 억압된 것, 말해지지 못한 것, 배제된 것 안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이것이 아도르노의 비동일성(non-identity)의 철학이며, 진정한 사유는 대상을 개념에 일치시키려 하지 않고, 개념에 저항하는 잉여를 끊임없이 기억하는 사유여야 한다.

부정은 사유의 윤리이다.

아도르노의 철학은 단지 인식의 방식이 아니라, 윤리적 태도이다. 그는 사유가 현실을 덮지 않도록, 고통을 잊지 않도록, 현실의 불화를 끝까지 끌고 가는 부정의 운동이야말로 철학의 책임이라고 보았다.

예술 역시 그러하다.

예술은 현실의 화해된 모사여서는 안 되며, 고통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불협화음과 파열의 형식으로 현실을 응시해야 한다.

미메시스의 정신

아도르노에게 있어 미메시스(Mimesis)는 단지 모방이나 현실의 재현이 아니다. 그는 고대 예술 이론에서 유래한 이 개념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고, 타자를 감각하고, 고통에 응답하는 근원적인 태도로서 미메시스를 다시 정의한다.

미메시스란 무엇인가?

미메시스는 세계와 닮아가려는 충동, 즉 타자에 대한 감응, 유사성에 대한 개방, 동일성 바깥의 것을 수용하려는 감각적 능력이다. 이는 자본주의적 이성 중심주의 즉, 모든 것을 대상화·분석·지배하려는 인식 방식과는 전혀 다른 존재 방식이다. 아도르노는 이성에 대립되는 감각적 본능이나 원초적 동일화 욕망으로서 미메시스를 단순히 비이성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성의 구조화된 폭력성에 대항할 수 있는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타자 감각으로 미메시스를 재사유한다.

예술은 어떻게 미메시스를 실천하는가?

예술은 개념의 지배를 벗어나, 감각적 형상으로 고통과 침묵, 부조리와 타자를 인지하는 방식으로 세계와 접속한다.

예술은 고통을 설명하지 않는다.

예술은 고통의 모양을 빌려온다.

그것이 아도르노에게 있어 진정한 미메시스의 실천이다. 이러한 미메시스의 정신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구체화된다:

타자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것에 귀 기울이는 태도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세계의 조각들을 침묵 속에서 끌어안는 방식

화해되지 않은 모순을 형식 내부에 그대로 간직한 채 지속하는 감각의 구성

미메시스는 감각의 윤리다

아도르노에게 있어 미메시스는 단지 예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이성이 배제해온 감각적 타자성과 윤리적 감수성의 회복을 의미한다. 자본과 이데올로기가 통합한 세계 속에서, 미메시스는 타자에 대한 마지막 응답이며, 고통에 응답하는 감각의 잔여이자 예술의 마지막 저항력이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말한다:

예술은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예술은 고통의 형식을 갖는다.”

이로써 예술은 계몽의 기만적 화해가 아닌,

고통의 불화와 타자의 잔존을 껴안는 공간이 된다. 미메시스는 그러한 예술적 사유의 원형이자, 사유 너머를 감지하는 감각의 윤리로 아도르노 철학의 마지막 선에 자리한다.

3) 발터 벤야민

역사와 계급의식의 비판적 계승과 유대교적 메시아주의

발터 벤야민은 마르크스주의와 유대교 신비주의를 독창적으로 결합한 사상가다. 그는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에 담긴 계급 주체 개념과 역사적 총체성 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그것을 종말론적·신학적 차원에서 변형했다.

그는 역사의 연속성과 진보 개념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며, 역사를 도약과 정지, 파열과 순간성의 시공간으로 사유한다.

계급의식의 비판적 전환

벤야민에게 있어 마르크스주의는 구조적 분석의 유효한 틀일 수 있으나, 역사를 기계적 진보의 과정으로 보는 역사주의와는 단호히 결별해야 한다.

그는 진보라는 이름으로 패배자들의 기억이 삭제되고, 현재의 승자들이 과거를 자기 정당화의 서사로 사용하는 구조를 비판한다. 이때 계급의식은 단순히 현재의 투쟁의식이 아니라, “억눌린 자들의 기억을 불러내는 각성의 형식으로 재사유된다.

유대교적 메시아주의의 수용

이러한 사유의 토대에는 유대교적 메시아주의가 있다. 벤야민은 역사를 직선적 연속으로 이해하지 않고, “시간 속으로 침입해오는 메시아적 순간(Jetztzeit)” , 과거의 억압된 순간이 현재에 불현듯 출현하는 구조로 본다. 이는 단지 종교적 은유가 아니라, 정치적 실천이란 과거의 진실을 현재 안에 불러들이고, 지금 이 순간에 역사의 방향을 전복하는 결정적 개입이라는 인식이다. 그에게 메시아는 역사를 구원하는 자가 아니라, 역사의 폐허 속에서 구원 가능성을 포착하는 시선이다.

얘기꾼과 소설가

벤야민은 1936년 발표한 에세이 얘기꾼(Der Erzähler): 니콜라이 레스코프에 관하여에서, 근대 이전의 말해지는 이야기와 근대 문학, 특히 소설 사이의 본질적인 단절을 지적한다. 이 글에서 그는 얘기꾼소설가라는 두 문학 형식을 통해, 경험과 공동체, 시간과 기억의 변화를 사유한다.

얘기꾼: 경험의 공동체적 전달자

얘기꾼은 공동체의 삶과 경험을 구술로 전승하는 인물이다.

그는 개인의 체험을 공동의 서사로 변형시키며, 공통된 지혜(Wissen)와 실천적 교훈(Rat)을 전달한다. 얘기는 시간 속에서 반복되며 살아 숨 쉬고, 기억과 몸, 리듬과 감각을 통해 전해지는 살아 있는 말이다. 이러한 얘기에는 결말보다 말해지는 과정이 중요하며,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의 신뢰와 리듬이 핵심이다. 벤야민은 이 얘기 방식이 근대화와 함께 급속히 사라졌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전통 공동체의 해체

노동의 분업화와 일상의 파편화

경험의 비가시화와 내면화

신문, 뉴스, 통계 등 정보 중심의 전달 방식 확산

소설가: 고립된 개인의 내면적 서술자

소설가는 더 이상 공동체의 얘기꾼이 아니다.

그는 고립된 개인으로서 글을 쓰고, 그의 이야기는 독자가 혼자 읽는 인쇄물 속에 존재한다.

소설은 종종 삶의 불확실성, 죽음, 고통, 내면의 분열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벤야민은 이러한 소설 형식이 근대 인간의 단절된 경험 구조를 반영한다고 본다. 그는 소설이 "죽음을 말할 수 없는 시대의 산물"이라고까지 말한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궁극적인 삶의 완성으로, 공동체 속에서 의미를 부여받았던 것인데, 근대사회는 죽음을 일상의 바깥으로 추방하고, 개인의 내면 속에 봉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설은 살아 있는 조언을 담지 못한 채, 오히려 고립된 사유의 방식을 통해 억눌린 경험의 잔해를 수습하는 형식이 된다.

얘기에서 소설로: 감각 구조의 전환

이 글은 단지 문학 형식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벤야민에게 얘기꾼과 소설가는 역사적 감각 구조, 인간 경험의 조직 방식의 변화를 상징한다. , 공동체적 기억에서 개인적 내면으로, 경험의 공유에서 체험의 고립으로의 전환이다. 벤야민은 이 단절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그 단절 속에서 무엇을 다시 발견하고, 어떻게 기억을 회복할 수 있을지를 질문한다.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해서: 산책자, 댄디, 매춘부와 도박, 자본주의적 노동

벤야민은 보들레르에 관한 몇 가지 모티프에 대하여, 3의 보들레르 초안, 아케이드 프로젝트등에서 샤를 보들레르를 자본주의 근대도시의 감각 구조를 탐지한 최초의 시인으로 주목한다. 그는 보들레르의 시 속에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감각적 변형, 파편화된 주체, 도시적 익명성 등이 깊이 새겨져 있다고 본다.

벤야민이 중점적으로 분석하는 보들레르의 모티프는 다음 네 가지다.

산책자(Fâneur)

플라뇌르(Flâneur)’19세기 파리의 아케이드를 천천히 걸으며 도시를 응시하는 산책자다.

그는 자본주의적 소비공간 속에서 상품과 이미지, 군중의 흐름을 관조하면서도 그 속에 동화되지 않는 이중적 존재다. 벤야민에게 산책자는 도시적 자극을 감각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자본주의의 동화 작용에 저항하려는 인물로 읽힌다. 그는 상품의 전시 공간 속에서 관찰자이자 표류자이며, 모더니티의 파편적 감각을 감지하는 예술가적 주체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심화와 함께 산책자는 사라진다. 산책은 공공 공간의 사유화, 속도의 증가, 노동시간의 절대화로 인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감각의 형태가 되기 때문이다.

댄디(Dandy)

댄디는 일상과 상품화된 삶에 저항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예술 작품처럼 만들어가는 존재다.

그는 수동적인 산책자의 태도를 벗어나, 스타일과 태도, 몸짓을 통해 자기 자신을 형식화한다.

이때 댄디즘은 단순한 유미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동질화에 대한 몸의 반항, 자기 연출을 통한 시간의 일시적 탈환이다. 그러나 댄디 역시 자본주의의 기호화 속에서 곧 또 하나의 소비 대상이 된다. 그의 독립성과 예외성은 결국 자본주의의 스타일 시장 속으로 편입되며, 댄디는 스스로의 예술성을 유지하기 위해 더 극단적으로 고립되고 몰락한다.

매춘부와 도박

매춘부는 노동이 상품화된 인간의 가장 극단적인 형상이다. 그녀는 감정과 몸, 시간을 모두 자본의 교환가치로 전환해야 하며, 그 존재 자체가 아우라 없는 반복과 소비의 상징이다. 도박 역시 노동과 시간을 전복하는 행위이지만, 그 또한 자본주의의 속성인 우연, 추상화, 규칙화된 위험을 내면화한 감각 구조로 읽힌다. 도박사는 자기 삶의 조건을 우연에 맡기면서도, 그 우연조차 체계화된 확률과 도식 속에서 통제당하는 인물이다.

자본주의적 노동과 감각의 충격

보들레르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공통적으로 자본주의 도시에서 감각적 충격(Shock)에 노출된 존재들이다. 벤야민은 이 충격이 지속적 체험(Efahrung)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대신 순간적 체험(Erlebnis)만을 양산한다고 말한다. 이때 예술은 감각적 파열을 통해 현실의 자동화를 멈추고, 충격을 감각으로 되돌리는 정치적 공간이 되어야 한다.

요컨대, 보들레르의 시는 단지 개인의 내면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성의 감각구조, 자본의 논리, 도시의 익명성, 몸의 상품화, 시간의 탈역사화에 대한 가장 정교한 형상화다. 벤야민은 이 시를 통해 역사의 진보 개념이 감각 속에서 어떻게 해체되고 재조직되는가를 탐구한다.

⑷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아우라의 상실

벤야민은 1936년에 발표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사진과 영화 등 기술복제매체의 발달이 예술과 감각, 정치에 미치는 전복적 변화를 분석한다. 이 글은 예술론이자 미디어 이론이며 동시에 예술의 정치화 혹은 정치의 예술화라는 근대의 이데올로기적 전선에 대한 비판적 개입이다.

아우라란 무엇인가?

벤야민이 정의한 아우라(Aura)란 다음과 같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단일하게 존재하는 것의 독특한 현존, 그것이 내뿜는 저 멀리 있음의 기운.”

, 아우라는 예술작품이 지닌 고유한 여기지금’, 재현 불가능성과 원본성, 그리고 종교적·전통적 권위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회화, 조각, 성물 등 전통 예술은 이 아우라를 통해 존재적 숭고함과 감정적 몰입을 유도해 왔다.

기술복제와 아우라의 붕괴

사진, 영화 등 기술복제매체의 등장은 이 아우라를 해체한다. 작품은 복제될 수 있게 되고, 장소성과 유일성은 사라지며, 감상자는 더 이상 작품 앞에 예속되지 않는다.

이 변화는 단지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감각 구조(Sinnesstruktur)의 혁명적 재편이다. 벤야민은 이를 통해 예술이 탈신성화되고, 대중이 예술을 능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아우라의 쇠퇴는 인류가 자신을 지배하는 것을 제거할 준비를 마쳤다는 신호다.”

예술의 정치화 vs 정치의 미학화

이 글의 핵심은 아우라의 상실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 예술이 어떤 방향으로 조직되는가에 있다. 벤야민은 파시즘이 정치를 미학화한다는 점을 경고한다. , 전쟁, 권력, 복종, 대중 동원을 아름다움과 감동, 전율의 형식으로 가공함으로써, 현실의 폭력을 은폐하고 감각을 마비시킨다. 이에 맞서 벤야민은 예술의 정치화를 주장한다.

그는 기술복제 예술(특히 영화)이 현실을 낯설게 만들고, 감각적 충격을 통해 일상의 무감각을 깨우고, 관객을 비판적 주체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사진과 영화는 새로운 정치적 감각의 장인가? 이 글에서 벤야민은 기술 예술을 단순히 옹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 이중성을 정확히 분석한다:

그것은 감각의 해방이자 동시에 신체의 조직화, 감정의 조작, 권력의 동원 수단이기도 하다.

결국 관건은 기술이 아니라, 그 기술을 어떻게 조직하고 감각하게 만들 것인가, 예술이 무엇을 숨기고 무엇을 드러낼 것인가에 달려 있다.

요약하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예술의 권위와 원본성의 붕괴, 감각의 평등화, 예술의 정치적 책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예술이 현대성 속에서 어떻게 해방 혹은 기만이 될 수 있는지를 동시에 사유한 전복적 이론이다.

역사의 폐허와 알레고리

벤야민의 미학과 역사철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개념 중 하나는 바로 알레고리(Allegorie)이다. 그는 알레고리를 단지 추상적인 상징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라, 근대 세계의 파편성과 몰락, 그리고 기억의 잔해를 사유하는 철학적 형식으로 새롭게 위치시킨다. 특히 독일 비애극의 원천(Ursprung des deutschen Trauerspiels)에서 벤야민은 고전적 상징(Symbol)과 알레고리를 구분하며,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해체적 방법론으로서의 알레고리를 제시한다.

상징과 알레고리: 충만함 vs 붕괴

고전적 상징은 자연과 정신, 사물과 의미가 하나의 통일 속에서 완성되는 질서를 전제한다.

그에 비해 알레고리는 의미의 해체, 파편적 조각, 죽음과 시간의 흔적, 진실의 부재와 과잉을 동시에 담는 형식이다. 벤야민에게 알레고리는 전체성이 파괴된 세계에서 진실을 사유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폐허 속에서 사유하기

알레고리는 언제나 몰락과 죽음을 배경으로 등장한다.

벤야민은 독일 바로크 비극(비애극, Trauerspiel)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상징들인 해골, 시계, 무너진 기둥, 부서진 왕좌 등을 역사라는 무대 위에 남겨진 폐허의 조각들로 읽는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하나의 통일된 이야기로 수렴되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의 고통과 현재의 균열, 실패와 침묵이 형상화된 잔해이며, 총체화될 수 없는 역사적 파편들이 응시되어야 할 진실의 장소이다.

알레고리는 감정이 아니라 인식의 형식이다

벤야민에게 알레고리는 단지 애도나 감성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불균형과 단절을 그대로 드러내는 인식의 전략이다. 그는 이러한 형식을 통해 역사를 진보의 연속이 아닌, “무수한 패배와 단절의 연속으로 재사유한다. 이때 알레고리는 기억되지 못한 존재들의 흔적, 말해지지 않은 진실의 기호, 지금-여기에서 되살아나야 할 과거의 호출이 된다. 이 사유는 벤야민이 말년에 집필한 역사철학테제로 결집된다. 그곳에서 그는 알레고리의 사유를 더욱 급진적으로 정치화하며, 역사의 잔해 속에서 혁명의 시간성을 포착하려 한다.

역사철학테제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Ü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는 그가 사망 직전(1940)에 집필한 단편 형식의 메모들로 구성된 텍스트로,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사유인 마르크스주의와 유대적 메시아주의, 기억과 알레고리, 정치와 미학가 가장 응축된 형태로 담겨 있다.

이 텍스트는 역사철학에 대한 급진적인 전복이자, 억눌린 과거를 위한 해방적 윤리의 선언이다.

진보의 신화에 대한 전면적 거부

벤야민은 18~19세기 역사주의, 계몽주의, 그리고 일부 마르크스주의까지를 관통해온 역사는 진보한다는 신념을 전면적으로 비판한다. 그는 이것을 지배자의 서사, 즉 승자들이 과거를 해석하고 정당화하는 방식이라 보고, 이렇게 말한다:

역사의 전통은 승리자들의 기록으로 가득 차 있다.”

과거의 억압된 자들은 경고 없이 사라진다.”

따라서 진정한 역사 인식은 기억되지 못한 자들의 고통을 재소환하는 것이며, 그것은 현재의 구조를 깨뜨릴 수 있는 혁명의 시간 속에서만 가능하다.

역사의 천사파울 클레의 그림에 붙여진 9번째 테제

가장 유명한 테제 중 하나는 파울 클레의 그림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를 인용한 9번째 테제다:

천사는 등을 미래로 돌리고 과거를 응시한다. 과거는 하나의 단일한 재난처럼 그의 앞에 쌓인다. 그는 멈추고 싶지만, 폭풍이 그의 날개를 부풀게 하며 천사를 앞으로, 미래로, 등지고 내몬다. 이 폭풍이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테제는 과거를 구제하지 않는 한, 어떤 진보도 폭력과 억압 위에 세워진 허위일 뿐임을 말한다. 여기서 벤야민은 역사는 구제되지 않은 죽음과 패배자들의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고, 혁명은 그 기억을 현재에 불러오는 메시아적 도약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Jetztzeit: ‘지금-여기의 시간성

벤야민은 지금-시간(Jetztzeit)’ 개념을 통해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Homogene und leere Zeit), 즉 역사의 기계적 연속성을 거부한다. 그는 혁명을 단지 미래를 위한 준비가 아니라, “억눌린 과거가 현재의 의식에 불현듯 개입하는 사건”, “시간의 흐름을 일순간 멈추게 하는 충격으로 이해한다. 혁명은 과거를 매장한 시간의 흐름을 중단시키는 실천이며, 이것이 바로 벤야민적 역사 유물론의 급진적 전환이다.

혁명은 과거를 위한 것이다

벤야민은 마르크스주의의 일부 진보주의를 수정하며, “혁명은 억압받는 자들이 미래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억눌린 자들의 이름으로 싸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 혁명은 단지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말해지지 못한 역사, 기억되지 못한 삶, 사라진 자들의 진실을 현재에 회복하는 윤리적 행위이다.

요약: 벤야민 역사철학의 핵심

역사는 단선적인 진보가 아니라, 파편적 기억과 억압의 잔해다.

진정한 역사 인식은 기억각성의 정치적 실천이다.

혁명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위한 도약이다.

메시아적 시간은 현재 속에서 불현듯 열리는 구원의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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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