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내가 말하는 곳이 아니라, 듣고 멈추고 기다리는 방식이 되었다. 바흐친은 이론이 아니라, 내 문장의 윤리였다.”
오랫동안 마음속으로만 묵혀두었던 과업을 하나 완성했다. 최애하는 나의 작가, 한강과 밀란 쿤데라를 바흐친적 시선으로 분석해 보는 일이었다. 철학과 문학을 동시에 공부하는 나로서는, 이 두 작가의 작품을 분석하는 일이 참으로 즐거우면서도 쉽지 않았다. 미천한 지적 편린들을 연결하는 일은 AI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완성할 수 있었다.
논문의 제목은 『다성성의 두 얼굴: 한강과 쿤데라 작품에 나타난 바흐친적 상상력의 비교 연구』이다.
"진실은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다." — M. M. 바흐친
한강과 쿤데라, 서로 다른 언어와 세계를 살아간 두 작가. 나는 그들의 소설 속에서 바흐친의 '다성성'을 다시 읽었다. 말해지는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 웃음과 침묵, 존재의 무게와 윤리의 거리. 문학은 그 경계에 서서 묻는다. 우리는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누구의 목소리를 지우고 있는가.
이 논문은 단순한 이론의 적용이 아니라, 문학을 통해 사유하는 법을 배우고, 철학을 글쓰기의 온기로 옮기려는 시도였다. 그리고 언젠가, 나 역시 나만의 다성적 문장으로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촛불이 되고 싶다.
맨 마지막으로, 이 논문을 쓰며 진행했던 내 나름의 사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고, 그 후 얼마간 나는 충만한 가슴을 어쩌지 못했다. 배운다는 것, 그리고 배운 무언가에 대해 사유하고 정리하며 문장으로 써내려 가는 일이 나의 영원한 과업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 기쁨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마음은, 또 무엇일까?
이 논문을 쓰는 동안, 바흐친은 더 이상 텍스트 해석을 위한 하나의 ‘이론가’가 아니게 되었다. 처음 그를 접했을 때 나는 ‘다성성’, ‘카니발’, ‘이중 언어’ 같은 개념어에 주목했고, 그것들이 제공해 줄 수 있는 분석 도구로서의 유용성을 탐색했다. 그러나 한강과 쿤데라의 작품을 워낙 좋아하는 까닭에 예전의 기억들을 되살리며, 그들 속에서 바흐친적 요소들이 개념이 아니라 태도로 작동하고 있음을 발견한 이후부터, 나의 바흐친 읽기는 점차 이론에서 삶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다성성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그것을 하나의 서사 전략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성성을 존재를 대하는 태도, 타자를 대면하는 방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리를 유예하고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윤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바흐친은 문학을 통해 세계를 고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언제나 움직이는 중간 지점, 완성되지 않은 관계들, 미결의 상황 속에서 발화되는 진실에 주목했다. 이 윤리적 사유는 문학을 읽는 내 태도뿐만 아니라, 세상을 읽는 내 방식에도 점진적인 균열과 전환을 가져왔다.
한강의 작품 속, 말해지지 않은 것을 향해 귀 기울이는 것의 중요함을 배웠고, 쿤데라의 작품 속, 모든 진지함에 유머와 아이러니로 응답하는 작가적 태도를 되새기게 되었다. 그들 안에서 바흐친의 다성성은 고전적 개념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말하지 않음의 방식, 혹은 너무 많이 말함으로써 말의 무게를 해체하는 방식, 즉 극단적으로 다른 형식으로 구현된 동일한 사유의 태도였다. 이때 나는 ‘다성성’이란 것이 수많은 목소리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목소리에 의심을 거는 용기임을 깨달았다.
연구의 전 과정을 통틀어 가장 강하게 내 안에 남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나는 지금 어떤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가?" "나는 이 글을 쓰는 동안 타인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고 있었는가?" 바흐친은 우리가 진정으로 타자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자신의 음성을 일시적으로 비워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사유는 단지 문학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무수한 목소리들이 동시에 말하는 소셜 미디어의 공간, 끝없이 단정하고 확신하는 언어들 속에서 바흐친은 오히려 속도를 늦추고, 듣고, 중첩되는 목소리 속에서 대화의 윤리를 회복하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 논문은 나에게 있어 문학 이론의 공부라기보다는, 하나의 사유 윤리와 만나는 과정이었다. 이론은 대상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론을 통해 자신을 의심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나는 이제 생각한다. 그래서 바흐친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단지 더 정교한 분석을 위한 도구를 갖추는 것이 아니라, 더 정직한 독자가 되는 일, 더 열린 존재가 되려는 연습, 그리고 말보다 듣기에 민감해지는 감각을 훈련하는 일이었다.
나는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어설픈 초짜 철학도로서 내 사유는 종종 너무 무거운 논리 속에 묻히거나, 너무 정교한 추상 속에 길을 잃곤 했다. 그런 나에게 문학은 사유에 온기를 부여하는 숨결이었다. 나는 언젠가 나의 철학적 사유를 소설이라는 형태, 혹은 철학적 에세이라는 언어로 옮기고 싶다는 오래된 소망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글이 누군가의 삶 속에서 작은 불꽃 하나, 혹은 촛불 하나만큼이라도 밝힐 수 있기를 바랐다. 바흐친은 이 소망의 방향을 정돈해주었다. 그는 ‘다성성’을 통해 나에게 묻고 있었다. 너는 어떤 목소리로, 누구를 향해, 어떤 책임으로 말하고 있는가?
한강의 침묵은 말보다 강했고, 쿤데라의 아이러니는 어떤 진지함보다 더 정직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다르게 말하는 법’을 실천하고 있었고, 그 다름 속에서 바흐친은 개념이 아니라 숨결처럼, 침묵과 웃음 사이를 떠도는 미세한 진동처럼 느껴졌다. 다성성이란 결국 내가 말하고자 하는 ‘나’가 단 하나의 언어로 구성되지 않음을, 그리고 그 언어는 타자와의 접촉 속에서만 살아날 수 있음을 고백하는 방식이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이론을 반복하는 일이 아니라, 어떤 세계에 귀 기울이겠다는 윤리적 약속에 가깝다. 철학은 나를 사유하게 했지만, 문학은 그 사유가 다른 이의 내면에 스며들 수 있는 온도를 고민하게 했다. 바흐친은 바로 그 경계에서 내 손을 잡은 존재다. 다성성은 글쓰기의 전략이 아니라, 글을 쓰는 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잠시 내려놓고 타자의 목소리를 기다릴 줄 아는 태도다. 나의 사유는 이제 그 기다림 속에서 문장을 세운다.
나는 여전히 확신보다는 의심에 가까운 언어로 글을 쓴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타자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누군가에게 단 하나의 문장이, 단 한 줄의 문학이, 단 한 번의 침묵이 삶을 견디게 하는 언어가 되듯이. 바흐친이 말한 다성성은 나에게 그런 글을, 그런 사유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문으로 열려 있었다. 그 문 앞에서 나는 오늘도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나의 문장을 준비한다.
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이제 내게 있어 어떤 장르나 형식을 익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타자를 어떻게 대면하며, 나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 써 내려갈 것인지에 대한 하나의 윤리적 선택이자 존재의 방식에 가까운 일이 되었다. 바흐친은 문학을 ‘말의 실천’으로 보았고, 그 실천은 곧 타자와 맺는 응답 가능성의 관계로 작동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 문장을 더 이상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그 문장을 살아내고자 한다.
이제 나는 문학을 읽을 때마다, 그것이 말하고 있는 것보다 그 문장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어떤 타자의 가능성을 열고 있는가를 함께 듣는다. 그리고 내가 글을 쓸 때마다, 나 역시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나는 지금 누구를 향해 쓰고 있으며, 이 문장이 누구에게 말을 걸고 있는가? 바흐친의 다성성은 나에게 끊임없이 물음표를 남긴다. 이 문장은 하나의 목소리로 닫히고 있지는 않은가? 이 말의 형식은 다른 말들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는가?
그 과정 속에서 문학은 나에게 단지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공간이 되었고, 더 나아가 윤리의 가능성을 체현하는 언어의 형식이 되었다. 나는 그 형식 안에서 나 자신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히 살아가고자 한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소설을 쓸 때, 그 문장들 속에서도 바흐친의 이론은 여러 목소리 사이를 서성이는 긴장, 침묵을 감지하는 감각, 완결을 유보하는 윤리적 기다림으로 살아 있으리라 믿는다. 나의 문학은 아마도 그 물음과 여백, 그 상호성의 공간에서 출발할 것이다.
다성성의 두 얼굴:
한강과 쿤데라 작품에 나타난 바흐친적 상상력의 비교 연구
Ι. 서론
1. 연구의 목적과 문제의식
2. 바흐친 이론의 현대적 중요성
3. 연구 대상 및 방법론 소개
ΙΙ. 미하일 바흐친의 생애와 사상: 전복의 철학자
1. 바흐친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1) 제정 러시아에서 소련으로 이어지는 격동기
2) ‘바흐친 서클’과 지적 공동체
3) 유배와 검열 속 사유의 지속
2. 철학적 배경과 영향받은 사조들
1) 소크라테스적 대화
2) 현상학
3) 러시아 형식주의
3. 바흐친 문학 이론의 핵심 개념
1) 대화주의 (Dialogism)
2) 다성성 (Polyphony)
3) 카니발 이론 (Carnivalesque)
4) 헤테로글로시 (Heteroglossia)
4. 이론들의 유기적 관계와 전체 사상 구조
1) 언어와 존재의 관계
2) 타자의 사유와 윤리적 상상력
ΙΙΙ. 한강 작품에 나타난 바흐친적 상상력
1. 『소년이 온다』: 증언, 침묵, 다중 시점의 구성
2. 『채식주의자』: 육체와 침묵의 카니발
3. 『흰』: 언어의 해체와 감각의 이중성
ΙV. 밀란 쿤데라 작품에 나타난 바흐친적 상상력
1.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존재론적 질문과 다성적 시선
2. 『농담』: 유머와 권력의 해체
3. 『불멸』: 작가의 메타언어와 캐릭터의 자율성
V. 다성성의 두 얼굴: 한강과 쿤데라의 비교 분석
1. 내면성과 철학성: 감각적 다성 vs 관념적 다성
2. 말해지지 않음과 과잉의 언어
3. 작가의 위치와 인물의 자율성
4. 카니발성의 성격 차이: 침묵의 전복 vs 유머의 전복
VΙ. 바흐친 이론의 현대 문학 적용 가능성과 비판적 고찰
1. 동시대 문학 담론에서의 수용 양상
2. 문화적 맥락의 차이와 해석의 유효성
3. 다성성의 현재성과 한계
4. 이론적 유연성과 재해석 가능성
1) 디지털 문학, 탈서사적 서사와의 접점
2) 비서구 문학과 젠더 서사에서의 수용과 저항
3) 바흐친 이론의 오늘적 의미
VΙΙ. 결론
1. 한강과 쿤데라를 통한 바흐친 이론의 재조명
2. 비교 분석의 의의와 문학 연구에의 기여
3. 향후 연구 방향 제언
VΙΙΙ. 연구 후기: 나의 인식 변화와 바흐친 읽기
1. 이론에서 삶으로: 바흐친을 다시 읽는 태도
2. 문학과 철학을 잇는 통로로서의 다성성
3. 사유의 공간이자 윤리의 방식으로서의 문학
다성성의 두 얼굴:
한강과 쿤데라 작품에 나타난 바흐친적 상상력의 비교 연구
Ι. 서론
1. 연구의 목적과 문제의식
현대 문학은 더 이상 단일한 목소리, 중심적인 서사를 통해 세계를 해석하지 않는다. 다양한 존재 의식과 감각, 언어들이 충돌하고 교차하는 가운데, 문학은 오히려 다성적이고 비권위적인 상상력의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문학의 존재 방식을 가장 깊이 사유한 이론가가 바로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이다. 그는 대화주의, 다성성, 카니발 이론 등을 통해 언어와 존재의 비동시성, 타자성, 권위의 해체를 철학적이면서도 문학적으로 고찰해 왔다. 바흐친의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문학과 인문학을 넘나드는 가장 역동적인 사유의 원천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바흐친적 사유는 단지 개념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문학작품 속에서 구현될 때 비로소 그 이론의 미학적·윤리적 깊이를 드러낸다. 그 대표적 사례로 본 논문은 한강과 밀란 쿤데라의 문학 세계를 주목한다. 한강의 작품은 말해질 수 없는 고통, 침묵, 감각의 서사를 통해 다성성과 카니발성의 한국적 양태를 구현하고, 쿤데라는 유희적 시선과 사유의 분열을 통해 대화주의와 헤테로글로시의 실천적 모델을 제시한다.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 문학 전통 속에서 활동하는 두 작가의 작품은, 바흐친이 주장한 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문학의 가능성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구현하며, 다성성의 두 얼굴을 보여준다.
본 연구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 아래, 바흐친 문학 이론의 핵심 개념들을 정리한 후, 한강과 쿤데라의 주요 작품을 중심으로 바흐친적 상상력이 어떻게 문학적으로 실현되고 있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바흐친 이론의 사유 구조를 새롭게 조망하고, 현대 문학에서 그 이론이 어떠한 철학적·미학적 성취를 이루고 있는지를 비교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본 연구의 핵심 목적이다.
2. 바흐친 이론의 현대적 중요성
미하일 바흐친의 문학 이론은 단순히 20세기 초 러시아의 비평 담론에 국한되지 않으며, 오늘날까지도 문학, 언어, 문화 이론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소환되고 있는 철학적 담론의 중심축 중 하나이다. 바흐친은 소설이라는 문학 형식을 중심으로 인간 존재와 언어, 사회적 담론의 본질을 사유함으로써, 문학 이론을 존재론적, 윤리적 성찰의 지평으로 확장시킨 사상가로 평가된다.
특히 그가 제시한 ‘대화주의(dialogism)’와 ‘다성성(polyphony)’ 개념은 단일한 목소리나 중심 화자에 의존하지 않고, 상이한 목소리들 간의 긴장과 충돌, 공존을 통해 서사가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이러한 이론은 기존의 일원론적 서사 구조를 비판하면서, 복수의 주체들이 각기 자율적인 입장에서 세계를 인식하고 발화할 수 있는 문학적 조건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현대 문학의 핵심적인 이론적 토대로 기능하고 있다.
나아가 바흐친의 ‘헤테로글로시(heteroglossia)’ 개념은 언어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며 다층적인 층위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는 문학 텍스트가 단일한 의미나 목소리로 환원될 수 없으며, 언어 내부의 이질성과 사회적 투쟁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러한 관점은 이데올로기 비평, 탈식민주의 문학론, 젠더 연구 등 다양한 현대 비평 이론과 접속하며, 문학을 해석하는 방식에 다층적이고 교차적인 시선을 부여한다.
더불어 ‘카니발적 상상력(carnivalesque)’은 제도화된 권위와 위계질서를 잠정적으로 중단시키는 문학적 장치를 설명함으로써, 문학이 지닌 전복성과 유희성, 그리고 사회 질서에 대한 비판적 실천 가능성을 조명하는 데 기여한다. 이러한 바흐친의 사유는 디지털 서사, 다중 시점 내러티브, 인터렉티브 문학 등 동시대 서사의 다양한 형식적 실험에도 적용 가능하며, 이론의 현대적 확장 가능성을 입증한다.
이처럼 바흐친의 문학 이론은 언어의 윤리성과 문학의 타자성을 사유하는 사상적 자원으로서, 동시대 문학이 당면한 역사적·사회적·존재론적 물음들에 응답할 수 있는 하나의 해석틀을 제공한다. 그렇기에 바흐친은 여전히 현재적이며, 동시대 문학 담론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독해되어야 할 이론가로 자리매김 된다.
3. 연구 대상 및 방법론 소개
본 연구는 미하일 바흐친의 문학 이론, 특히 대화주의, 다성성, 카니발 이론, 헤테로글로시의 개념을 중심으로, 한강과 밀란 쿤데라의 주요 소설들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이 두 작가는 각기 한국과 체코(및 프랑스)라는 상이한 문화적·언어적 맥락 속에서 활동하면서도, 문학이 타자의 목소리를 수용하고 중심의 권위를 해체하는 장이 될 수 있음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실현해 온 작가들이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흰』은 침묵, 고통, 비가시적 감각의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발화의 불가능성과 가능성을 탐색하는 작품들로, 바흐친이 사유한 언어의 윤리적 책임, 말해지지 않는 타자에 대한 응답의 가능성을 문학적으로 구체화한다. 반면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농담』, 『불멸』은 철학적 사유와 유희적 형식, 자아의 분열과 서사의 메타적 성찰을 통해 다성성의 미학을 보다 이론적으로 구현한 작품들로 평가된다.
분석 방법론은 다음과 같은 단계로 구성된다. 첫째, 바흐친 이론의 개념적 맥락을 검토하고, 이들 개념이 서사 구조, 인물 구성, 언어 사용, 시점 배열, 장르적 전복성에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는지를 개념적으로 정리한다. 둘째, 개별 작품 분석을 통해 각 작가가 구현하는 다성성의 양상과 서사 전략을 구체적으로 도출하며, 셋째, 비교 분석을 통해 두 작가의 작품에 나타나는 바흐친적 상상력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구조적으로 조명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본 연구는 바흐친 이론이 단지 문학 해석의 도구가 아니라, 현대 문학의 존재론적·윤리적 구조를 사유하는 데 유효한 이론적 틀이 될 수 있음을 입증하고자 한다. 아울러 한강과 쿤데라라는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바흐친적 문학이론이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적 조건 속에서도 다양하게 변주되고 수용될 수 있음을 밝히는 데에 이 연구의 초점이 있다.
ΙΙ. 미하일 바흐친의 생애와 사상: 전복의 철학자
1. 바흐친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1) 제정 러시아에서 소련으로 이어지는 격동기
미하일 바흐친(Mikhail Mikhailovich Bakhtin, 1895–1975)은 1895년 제정 러시아 하에서 태어나, 러시아 제국의 붕괴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그리고 이후 소련 체제의 수립이라는 급격한 정치·사회적 전환기를 살아간 지식인이었다. 그는 고전 언어와 철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초기에는 문학보다 철학적 사유에 더 집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세기 초 러시아는 전통과 급진적 이념, 종교와 과학, 귀족 계급과 노동 계층 간의 긴장이 첨예하게 충돌하던 시기였으며, 바흐친의 사유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혼란과 격동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의 문학 이론이 중심의 해체, 다성적 존재, 언어의 탈권위성을 강조하게 된 것은, 당시 절대적 이념과 국가 권력이 개인의 목소리를 억압하던 시대적 맥락과 깊은 관련이 있다.
2) ‘바흐친 서클’과 지적 공동체
1920년대 초반부터 바흐친은 철학자이자 언어학자, 문학 연구자들과 함께 ‘바흐친 서클’(Bakhtin Circle)이라 불리는 지적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 모임에는 파벨 메드베제프(Pavel Medvedev), 발렌틴 볼로쉬노프(Valentin Voloshinov) 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언어, 의미,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중심으로 활발한 이론적 교류를 이어갔다.
이 시기의 바흐친 서클은 형식주의의 형식주의를 넘어서려는 시도, 즉 언어를 단순한 기호 체계로 보지 않고, 사회적 관계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의미화되는 살아 있는 실천으로 이해하려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이론적 전환을 보여준다. 특히, 오늘날 바흐친의 개념으로 널리 알려진 ‘헤테로글로시’와 ‘대화주의’의 사유 구조는 이 시기 서클 내부의 토론과 집단적 사유를 통해 형성된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소련 당국은 이러한 지적 활동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위험한 비판적 태도로 간주했고, 바흐친 서클의 구성원들은 점차 검열과 탄압을 받게 된다. 이 시기는 바흐친에게 있어 자유로운 사유의 제약과 검열 체제 속에서 사유를 지속해 나가야 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3) 유배와 검열 속 사유의 지속
바흐친은 1929년, 종교와 철학적 사유를 이유로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어 시베리아 유배형을 선고받았으며, 이후 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소련의 여러 지방 도시에서 교사나 연구자 신분으로 제한된 학문 활동을 이어갔다. 이 시기 그의 저작 대부분은 출판되지 못했으며, 검열을 피하기 위해 가명으로 발표하거나, 동료의 이름으로 대신 출간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도스토옙스키의 시학 문제』(1929)는 유배 직전에 발표한 저작으로, 다성성 개념의 출발점이 되는 핵심 이론서로 평가된다.
이후 『라블레와 그의 세계』는 수 차례 출판이 좌절되다가 1965년에 제한적으로 출간되었는데, 이 저작은 바흐친의 카니발 이론과 웃음의 미학이 집약된 대표적 저술로, 당시 소련 체제의 공식적 이념과는 명백히 충돌하는 전복적 상상력을 담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억압적 조건 속에서도 사유를 멈추지 않았고, 검열과 체제 감시를 피해 은유와 비틀림의 언어로 자신의 이론을 전개했다. 그의 사유는 체제 내에서 발화의 자리를 보장받지 못한 '비권위적 지식인'의 사유였으며, 바로 그 점에서 바흐친 문체 특유의 난해함과 복잡한 개념 구조가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1975년, 바흐친은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그는 말년까지 병과 빈곤에 시달렸고, 학문적 제도 안에서 어떠한 권위도 갖지 못한 채 생을 마무리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후, 서구 학계를 중심으로 그의 저작들이 재조명되었고, 그는 단숨에 20세기 후반 인문학의 핵심 사상가로 부상했다. 이러한 역설적 상황은, 바흐친이 생애 동안 강조했던 ‘중심 바깥의 목소리’, ‘말해지지 않음의 존재론’, 그리고 ‘경계에서의 사유’가 그의 삶과 죽음을 통해 상징적으로 실현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는 체제 안에서 살아남은 이론가가 아니라, 체제 바깥에서 끊임없이 타자의 언어를 사유했던, 말 그대로의 전복의 철학자였다.
2. 철학적 배경과 영향받은 사조들
1) 소크라테스적 대화
바흐친의 사유에서 ‘대화’는 단순한 담화 행위나 커뮤니케이션의 형식이 아니라, 존재의 형식이자 인식의 방식, 그리고 윤리적 실천으로 작동하는 핵심 개념이다. 그는 이 개념의 철학적 기원을 소크라테스적 대화(socratic dialogue)에서 찾으며,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대화주의(dialogism) 개념을 이론화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대화편』을 통해, 진리를 일방적으로 선언하기보다는 질문과 응답, 반론과 숙고의 과정을 통해 진리에 다가가는 존재론적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대화는 상대의 인식, 경험, 감정까지도 고유한 세계로 인정하며, 대화를 통해 상호 변화하고 성장하는 가능성을 함축한다.
그러나 바흐친은 이러한 소크라테스적 대화 개념을 단지 철학적 탐구 방식에 그치지 않고, 문학의 형식과 언어의 윤리성에까지 확장하여 사유한다. 그는 소설이라는 장르야말로 복수의 의식과 목소리들이 자율적으로 존재하며, 결코 하나의 진리로 통합되지 않는 열린 장이라고 보았고, 이를 통해 소설을 “대화적 예술”로 정의했다. 이때 대화란 결코 종결되지 않는 사유의 과정이며, 타자와의 차이를 유지한 채 지속되는 상호 응답성의 관계로 이해된다.
바흐친이 강조한 ‘대화성’은 곧 타자의 목소리를 듣고, 침묵 속에 남아 있는 존재들까지 언어의 장으로 불러내는 윤리적 실천이기도 하다. 그는 일방적인 내레이션이나 작가의 권위적 시선을 해체하며, 각 인물과 담론들이 독자적인 관점을 지닌 주체로 존재할 수 있는 서사적 공간을 옹호하였다. 이러한 사유는 단순히 소설 형식의 문제를 넘어, 타자의 존재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라는 철학적 물음과도 직결된다.
결국 바흐친에게 있어 소크라테스적 대화는 인간 존재가 결코 독립된 단일 주체가 아니라, 항상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기초적인 사유 구조였다. 그리고 그 사유는 문학 속에서 더욱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작동한다고 그는 믿었다.
2) 현상학
미하일 바흐친의 사유는 비록 현상학 전통의 직접적인 계승자는 아니지만, 그의 언어관과 존재론적 관점은 후설(Edmund Husserl)의 지향성 개념과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존재 사유와 긴밀한 대화를 형성한다. 특히 바흐친이 언어를 단순한 전달 수단이 아니라, 의미와 존재를 구성하는 대화적 실천으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그는 현상학적 문제의식을 문학 이론으로 전유하고 확장한 사상가라 할 수 있다.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은 인간의 인식이 단순히 외부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어떤 대상을 향한다는 ‘지향성(intentionality)’ 개념을 통해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구성한다고 보았다. 이와 유사하게, 바흐친 또한 언어가 고정된 의미를 지닌 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화되는 살아 있는 실천이라고 보았다. 즉, 언어는 화자 개인의 내부에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타인의 응답 가능성을 내포한 발화 행위이며, 그 자체로 관계적이고 열린 구조를 가진다.
그러나 바흐친은 후설과 달리, 자기 반성적 주체의 중심성에 비판적이다. 그는 의미란 결코 한 주체의 의식 안에서 완결되지 않으며, 항상 타자의 목소리, 응답, 맥락적 관계 속에서만 완성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점에서 바흐친은 지향성의 개념을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으로까지 심화시키며, 후설의 인식론적 틀을 넘어서는 사유를 보여준다.
하이데거의 존재론 역시 바흐친의 사유와 유의미한 접점을 형성한다.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를 세계-내-존재(Dasein)로 파악하며, 존재가 언제나 언어와 시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그의 선언은, 언어가 단지 의미를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존재를 열어주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바흐친의 언어관과 공명한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언어를 다소 철학적·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사유한 반면, 바흐친은 언어의 사회성, 이데올로기성, 계급성과 같은 역사적 조건들에 훨씬 더 주목했다. 즉, 바흐친에게 언어는 존재를 드러내는 추상적 매개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 속에서 충돌하고 투쟁하며 구성되는 이질적 다성체다. 그는 언어가 언제나 권력, 억압, 응답, 저항의 장 속에 있다는 사실을 문학 속에서 천착하였으며, 이를 통해 현상학적 존재 사유를 사회적 언어 실천의 차원으로 전환시킨다.
이처럼 바흐친은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으로부터 존재와 타자, 의미 구성에 대한 철학적 긴장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언어적 실천과 문학적 형식 속에 구체화한 사유의 전환자였다. 그는 존재론과 언어론, 사회학과 미학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문학이야말로 가장 ‘현상학적이며 대화적인 예술’임을 보여주려 한 철학적 문학자였다.
3) 러시아 형식주의
러시아 형식주의(Russian Formalism)는 1910년대 후반 제정 러시아가 붕괴하고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기점으로 급격한 사회 변동이 일어나던 시기의 당대 지식인 집단 내에서 형성된 문학 이론의 새로운 시도였다. 급변하는 정치 체제와 기존 가치의 해체 속에서, 문학의 본질은 무엇이며, 문학이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었고, 이에 대한 과학적·형식적 접근의 필요성이 고조되었다.
특히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문학을 종교적, 도덕적, 정치적 수단으로 이해하던 낡은 해석 체계에 반발하며, 문학의 자율성과 언어 구조의 독자성을 이론화하려 했다. 이는 당시 러시아 지식 사회 전반에 퍼져 있던 과학주의적 경향과도 결을 같이하며, 문학을 사회학적 환원이나 도덕적 교훈에서 벗어나 ‘언어로 구성된 특수한 예술’로 파악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형식주의자들은 문학을 기술적으로 분석 가능한 대상으로 간주하고, 특히 문학 언어의 형식적 조직과 조형성, 작법상의 장치, 구조적 배치에 주목하였다.
대표적인 이론가로는 빅토르 시클로프스키(Viktor Shklovsky), 보리스 에이헨바움(Boris Eikhenbaum), 그리고 로만 야콥슨(Roman Jakobson, 러시아 출신의 유대계 언어학자로 후에 체코와 미국에서도 활동) 등이 있다.
이들은 문학을 일반 언어와 구별되는 독립적 체계로 간주하며, 시클로프스키의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 야콥슨의 ‘문학성(literariness)’ 개념 등은 20세기 문학이론의 지형을 전환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바흐친은 이러한 형식주의의 문학 언어에 대한 주의 깊은 탐구와 예술적 구조에 대한 분석 정신을 일정 부분 계승하면서도, 그 한계 또한 분명하게 인식하였다. 그는 형식주의가 문학을 지나치게 자율적 구조물, 기법의 총합, 기호 체계의 구성물로 환원한다고 보았다. 특히 사회적 맥락, 담론 주체의 역사성, 타자와의 상호성이 결여된 문학 이해 방식은 바흐친의 사유가 지향하는 언어의 사회적·윤리적 실천으로서의 문학과는 명백히 배치된다. 바흐친은 문학을 일방향적 의미 전달이나 닫힌 구조가 아닌, 복수의 목소리들이 충돌하고 공존하는 ‘다성적 대화의 장(場)’으로 보았다. 그에게 문학은 언제나 타자의 응답 가능성을 내포한 언어적 사건이며, 작가, 인물, 독자, 사회 담론이 끊임없이 관계 맺고 재배열되는 살아 있는 실천이었다. 또한 그는 문학 장르의 진화를 기술적 형식의 진보로 보지 않고, 담론 구조의 변동, 권력관계의 재구성, 언어 이데올로기의 역사적 전환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이처럼 바흐친은 러시아 형식주의로부터 문학의 구조적 특성과 언어 형식의 예민한 감각을 부분적으로 계승하면서도, 이를 사회성과 윤리성, 타자성과 이념성의 차원으로 확장함으로써 문학을 언어, 존재, 사회가 교차하는 대화적 실천의 장으로 재정의한 사상가였다.
3. 바흐친 문학 이론의 핵심 개념
1) 대화주의 (Dialogism)
바흐친 이론의 중심에는 단연 ‘대화주의(dialogism)’ 개념이 자리한다. 대화주의란 단순히 두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언어, 인식, 사회, 문학 전반에 걸쳐 관통하는 세계 이해의 방식이다. 바흐친은 인간 존재가 언제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며, 언어 또한 그 자체로 타자를 향한 응답의 구조를 지닌다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대화주의는 존재론적이며 동시에 윤리적인 개념이다.
그는 언어를 고정된 의미의 전달 수단이 아니라, 상호 작용적이며 맥락 의존적인 행위로 간주했다. 모든 발화는 이전 발화에 대한 반응이며, 동시에 미래의 응답을 예비하는 구조를 갖는다. 이처럼 대화주의는 언어를 닫힌 체계가 아니라, 열려 있는 상호작용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즉, 모든 언어 행위는 본질적으로 타자와의 대화이며, 의미는 오직 이 대화의 흐름 속에서만 생성된다.
바흐친은 이러한 대화주의를 통해 기존의 모노로지(monologism), 즉 단일한 권위의 목소리와 진리를 주장하는 서사 구조를 비판했다. 그는 특히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분석하면서, 그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인물들의 목소리가 작가의 이념이나 목적에 종속되지 않고 각기 독립적인 의식과 가치 체계를 지닌 자율적인 발화 주체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바흐친은 이를 다성성(polyphony)이라는 개념으로 연결시켜 설명한다. 즉, 대화주의는 다성성을 가능케 하는 사유 방식이자 미학적 전제라고 할 수 있다.
문학에서 대화주의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구현된다.
첫째, 인물 간의 대화나 충돌이 단순한 플롯 장치가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관이 맞부딪치는 장으로 제시된다.
둘째, 작가의 목소리 역시 절대적이지 않으며, 등장인물의 목소리와 동일선상에 놓인다.
셋째, 하나의 진리나 해답이 제시되지 않고, 열린 의미 구조와 다층적 해석 가능성이 강조된다.
이러한 대화주의는 단지 문학적 형식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와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타자의 목소리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라는 윤리적, 철학적 질문으로 확장된다. 바흐친에게 문학은 타자와의 대화 속에서 나 자신을 변형시키고 재구성하는 장이며, 이는 곧 문학의 윤리성과도 맞닿아 있다.
이와 같은 대화주의는 바흐친 사유의 핵심을 이루는 방식이자 태도이며, 그의 모든 개념들인 다성성, 카니발, 헤테로글로시로 확장되는 이론적 중심축이다. 그것은 문학을 중심 없는 열린 공간으로 만들고, 인간 존재를 단일한 주체가 아닌 ‘타자에게 열려 있는 말하는 존재’로 다시 정의하게 만드는 사유의 기초이기도 하다.
2) 다성성 (Polyphony)
바흐친의 문학 이론에서 ‘다성성(polyphony)’은 대화주의의 미학적 실현 양식이자, 그의 문학 이론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이다. 이 개념은 바흐친의 대표 저작인 『도스토옙스키의 시학 문제』(1929, 개정판 1963)를 통해 본격적으로 정식화되었으며,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가리켜 “진정한 다성적 소설(polyphonic novel)”이라 명명한다.
다성성이란 단순히 다양한 인물들이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의미를 넘어서, 각 인물이 고유한 의식과 존재론적 입장을 지닌 독립된 사유 주체로서 말하고 존재하는 구조를 의미한다. 이때 인물은 작가의 사상이나 플롯에 종속된 기능적 도구가 아니라, 자기 세계와 언어를 가진 자율적인 주체로 등장하며, 그 목소리는 작가의 권위적인 시선과도 수평적 관계를 유지한다.
바흐친은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을 분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단지 주제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들의 의식을 창조하고, 그 의식 속에서 주제를 발전시킨다.” — 『도스토옙스키의 시학 문제』
즉,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하나의 이념을 전달하거나 줄거리 진행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각자의 삶과 신념을 내면화한 존재로서 서로 충돌하고 응답한다. 이러한 다성성의 대표적 예는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죄와 벌』에서 라스콜니코프는 “위대한 인간은 법을 넘을 수 있다”는 사상 아래 살인을 저지르지만, 그의 내면은 끊임없이 죄책감과 정당화 사이에서 대립하는 목소리들로 분열된다. 반면, 소냐는 성경을 바탕으로 비폭력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의 윤리를 조용히 견지한다. 소냐는 단순한 도덕적 이상을 설파하는 인물이 아니라, 고통과 침묵을 통해 자신만의 존재 방식으로 세계에 응답하는 타자적 주체이다. 이 둘의 관계는 선과 악, 정의와 속죄라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관이 대화의 방식으로 격돌하고 공존하는 공간으로 작동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그 다성성이 더욱 복잡하게 전개된다.
특히 이반의 ‘대심문관 장면’은 다성적 구조의 정수라 할 만하다. 이 장면에서 이반은 허구적으로 예수를 등장시켜 “인간에게 자유를 준 것이 오히려 저주였다”는 충격적인 명제를 전개한다.
“자유를 그들에게 준 분이 잘못한 것이다...... 인간은 자유를 감당할 수 없다.”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여기서 이반의 발화는 단지 신을 비판하려는 철학적 장치가 아니라, 작가도 결코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실존적 질문을 담은 인물의 고유한 사유이다. 조시마 장로나 알료샤가 제시하는 신앙적 윤리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도, 그 대립 자체가 종합되지 않고 열린 채 유지되는 것, 바로 이것이 다성성의 미학이다.
바흐친은 이러한 구조를 통해 작가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해석하는 절대자의 위치에서 물러나고, 등장인물 각각이 작가와 동등한 발화 권리를 갖는 평등한 서사 구조를 창조했다고 평가한다. 독자 또한 하나의 ‘정답’을 찾기보다는, 끊임없는 질문과 응답의 유예 상태 속에서 사유하게 된다.
바흐친에게 다성성은 곧 문학의 윤리적 조건이다. 하나의 목소리나 이념이 타자의 목소리를 억압하거나 삭제하지 않고, 서로 다른 세계들이 진지하게 청취되고 응답될 수 있는 서사 구조, 즉 타자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문학의 윤리적 실천으로서 다성성이 작동하는 것이다.
요컨대 다성성은 바흐친 사유의 핵심이자, 그의 문학 이론이 지향하는 비권위적 상상력, 다원적 존재론, 그리고 타자에 대한 응답의 윤리를 구현하는 결정적인 개념이다. 대화주의가 언어와 세계를 바라보는 사유 방식이라면, 다성성은 그것이 소설이라는 장르 안에서 구체화되는 미학적 구조이자 서사적 윤리이다.
3) 카니발 이론 (Carnivalesque)
바흐친의 문학 이론에서 ‘카니발성(carnivalesque)’은 대화주의와 다성성을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확장한 개념으로, 작가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을 분석한 저서 『라블레와 그의 세계』(1965)에서 집약적으로 전개된다. 그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민중 축제인 ‘카니발’을 단순한 유희나 풍속의 행사가 아니라, 기존의 위계 질서와 권위 담론이 일시적으로 해체되고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말할 수 있는 사회적 역전의 공간, 즉 ‘세계의 일시적 재전복’이 실현되는 장으로 파악한다. 카니발은 통치자와 백성, 고상함과 저속함, 중심과 주변이 전도되고 혼재하는 시간 속에서 웃음, 신체, 욕망이 기존 질서와 언어를 해체하며 새로운 의미의 가능성을 연다.
바흐친은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을 분석하며, 이 카니발적 상상력이 문학 속에서 구현되는 방식이 단지 내용이나 소재의 차원이 아니라, 문학 형식 그 자체를 구성하는 심층 구조라고 보았다. 라블레의 작품에는 음식, 배설, 성, 신체의 하부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지배 이념과 교리, 성직자의 언어, 귀족 계급의 말투는 조롱과 패러디의 대상이 된다. 이때 바흐친이 주목한 것은 단지 선정적 유희가 아니라, 문학이 어떻게 공식 언어를 웃음의 언어로 대체하고, 억압된 욕망과 하층의 목소리, 다중의 언어를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 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미학적 통찰이었다.
이러한 카니발성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들에서도 발견된다. 특히 『악령』(『마귀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인 키릴로프, 베르호벤스키, 샤토프 등은 혁명과 무신론, 이상주의와 허무주의 사이에서 갈등하며, 극단적인 이념을 수행하는 방식 자체가 과장과 역설, 파탄으로 귀결되는 전복적 언어 행위를 보여준다. 예컨대 키릴로프는 “신이 없다면 내가 신이 된다”는 논리를 따라 자살을 택하는데, 이는 신의 부재를 긍정하려는 의지이면서 동시에 절망의 형식을 취한 모순된 실천이다. 이처럼 도스토옙스키는 인물들이 체현하는 언어와 사유의 과잉을 통해 기존 이념과 논리 체계 자체를 해체하며, 작가적 권위에 복속되지 않은 카니발적 인물들의 자율성과 충돌성을 통해 서사 구조의 다층성을 드러낸다.
바흐친이 말하는 카니발은 곧 문학이 수행하는 전복의 형식이다. 그것은 단지 통치 권력에 대한 조롱이나 해학이 아니라, 공식 언어로는 말해질 수 없는 타자의 언어, 주변적 몸, 감춰진 욕망, 침묵당한 목소리들을 불러내는 문학적 가능성의 구조이다. 따라서 카니발성은 다성성과 마찬가지로 문학의 윤리적·정치적 잠재력을 사유하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 바흐친에 따르면, 문학은 바로 이러한 카니발적 상상력을 통해 중심과 권위에 균열을 일으키고, 말해지지 않던 것들, 들리지 않던 목소리들이 말하고 웃고 응답하는 열린 대화의 공간이 될 수 있다.
4) 헤테로글로시 (Heteroglossia)
바흐친 문학 이론의 또 하나의 핵심 개념인 헤테로글로시(heteroglossia, 다언어성)는 그가 소설이라는 장르에 부여한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언어를 단일하고 순수한 체계가 아닌 사회적 다양성과 충돌의 장(場)으로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바흐친에 따르면, 모든 언어는 그 자체로 사회적 위치와 계층, 이념과 시대, 화자와 청자의 관계를 내포하고 있으며, 언제나 다른 목소리와 충돌하거나, 그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존재한다.
그는 이를 특히 소설 장르에서 포착했다. 소설은 시나 연설처럼 통일된 어조나 양식이 지배하는 장르가 아니라, 다양한 인물과 사회 계층, 시대의 언어가 뒤섞여 있는 혼성적 텍스트다. 따라서 진정한 소설은 하나의 언어가 지배하는 ‘모놀로그적’ 구조가 아니라, 수많은 이질적 언어들이 공존하고 교차하는 다성적 공간이며, 이런 언어의 층위와 긴장이 바로 ‘헤테로글로시’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하나의 작품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공식 언어, 구어체, 방언, 학술 용어, 욕설, 종교적 언어, 정치적 수사 등 서로 다른 담론 양식으로 말할 때, 독자는 단일한 의미에 귀속되지 않고 언어 그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투쟁의 장이라는 사실을 체험하게 된다. 이는 언어를 중립적인 표현 수단이 아니라, 권력과 저항, 이념과 감정이 맞물려 있는 살아 있는 실천으로 보았던 바흐친의 언어관과 직결된다.
헤테로글로시는 단순히 문체의 다양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하나의 언어 속에 존재하는 이질성과 응답성, 그리고 그것이 구성하는 ‘목소리들의 다층적 공간’에 대한 사유라고 할 수 있다. 바흐친은 말한다.
“언어는 언제나 타인의 말로 구성되어 있으며, 발화란 곧 그 말에 대한 응답이다.”
따라서 작가가 창조한 언어는 언제나 타자의 언어를 의식하고, 그것과 관계를 맺고, 때로는 조롱하거나 모방하고, 전유하거나 전복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바로 이러한 헤테로글로시의 집약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나 『악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자 자기만의 어조와 담론 스타일을 지니며, 작가의 언어에 종속되지 않고 고유한 세계관을 언어로 드러낸다. 키릴로프의 초월적 무신론, 이반의 철학적 회의, 조시마의 종교적 신념, 알료샤의 경건한 감성은 서로 번역 불가능한 목소리로 공존하며, 독자는 그 충돌을 통해 단일한 진리를 넘는 인식의 차원으로 이끈다. 헤테로글로시는 바로 이 충돌과 공존, 단절과 응답의 언어적 구조를 의미하며, 이를 통해 바흐친은 소설이란 장르 자체가 세계에 대한 다중적 관점을 담아낼 수 있는 가장 복합적이고 열린 형식임을 입증하고자 했다. 더 나아가 헤테로글로시는 현대 문학에서 공식 언어에 침묵당한 소수자의 언어, 주류 담론에 가려진 내면의 말들, 검열된 진실과 왜곡된 기억을 ‘다른 말들’로 들려주는 방식으로 확장되고 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서 등장하는 다중 화자와 말해지지 않는 말, 쿤데라의 『농담』에서 나타나는 공산당의 언어와 개인적 기억 사이의 간극은 모두 하나의 언어로는 결코 포착될 수 없는 현실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헤테로글로시의 문학적 구현이다.
이처럼 헤테로글로시는 언어를 둘러싼 정치적·윤리적 상상력이며, 문학이 인간의 삶과 진실을 보다 풍부하게 포착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언어적 혼성성과 대화성의 윤리를 보여준다. 이는 단지 기법이 아니라, 문학이 타자를 사유하는 방식이자, 침묵과 권력, 기억과 응답을 포괄하는 윤리적 장치이기도 하다.
4. 이론들의 유기적 관계와 전체 사상 구조
1) 언어와 존재의 관계
바흐친의 문학 이론에서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나 자아의 표현 수단이 아니다. 그는 언어를 존재와 세계 인식의 근원적 방식, 나아가 타자와 관계 맺는 윤리적 행위로 보았다. 즉, 언어는 자아가 외부 세계를 담아내는 그릇이 아니라, 자아와 타자가 서로를 드러내고 응답하는 과정 자체이며, 이러한 대화적 행위를 통해 존재는 비로소 형성되고 의미화된다는 것이다.
바흐친에게 존재란 고정된 본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타자와의 대화 속에서 생성되는 역동적 관계이다. 이는 후설의 지향성과 하이데거의 존재-언어 사유와도 겹치는 지점이 있지만, 바흐친은 이를 철학적 추상으로 머무르지 않고, 언어의 사회적 맥락과 윤리적 응답 가능성 안에서 구체적으로 사유했다. 그에게 인간 존재는 고립된 주체가 아니라, 항상 타자의 말 속에서 응답을 요구받는 존재이며, 따라서 ‘나는 말한다’가 아니라 ‘나는 타자에게 응답하며 존재한다’가 인간 언어의 근원적 구조다.
이러한 사유는 곧 그의 대화주의(dialogism) 개념과 직결된다. 모든 언어는 타인의 말에 대한 응답이며, 그 자체로 또 다른 응답을 예비하는 열려 있는 의미의 연쇄다. 이때 발화는 단지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 참여하고 타자와 공존하는 윤리적 행위가 된다. 말이란 곧 존재를 향한 방식이자,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사유의 윤리적 구조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흐친은 문학이 단지 상상의 이야기나 미학적 형식이 아니라, 언어를 통한 존재의 재구성, 세계에 대한 다중적 응답의 장이라고 본다. 소설이란 장르가 탁월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존재들의 다성적 공존을 가능한 언어 공간이기 때문이다. 작가, 인물, 독자 각각이 고유한 언어로 응답하면서, 그들은 고정된 의미가 아니라 끝없는 대화 속에서 서로를 존재하게 만든다.
바흐친은 이 과정을 ‘대화적 존재론’이라 불러도 좋을 방식으로 풀어내며, 언어와 존재, 말과 삶,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언제나 응답성과 비완결성, 관계성과 윤리성 안에서 사유했다. 그의 문학 이론은 따라서 단지 기법의 설명을 넘어서, 언어를 통한 세계 인식, 존재 방식, 그리고 타자와의 윤리적 만남의 구조를 드러내는 철학적 사유이기도 하다.
2) 타자의 사유와 윤리적 상상력
바흐친의 문학 이론은 궁극적으로 타자의 존재를 어떻게 사유하고, 그 목소리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라는 윤리적 문제의식으로 귀결된다. 그에게 문학은 단순히 인물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장르가 아니라, 타자의 고유한 언어와 세계를 존중하고, 그 세계가 말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는 윤리적 행위이다. 이는 단지 문학의 내용이 ‘윤리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형식 자체가 윤리적 상상력을 요구하는 실천적 공간임을 뜻한다.
바흐친에게 타자란 결코 나의 세계 속으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는 자기 고유의 의식과 세계관을 지닌 존재다. 따라서 타자와의 관계는 동일화나 동정이 아니라, 차이의 인정과 응답의 열림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사유는 그의 ‘대화주의’ 개념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모든 언어는 타자의 말에 대한 응답이며, 의미는 고립된 자아의 내면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발생한다. 이때 타자의 말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며 존재 양식이 된다.
문학 속 인물들은 바흐친에게 하나의 기능이나 상징이 아니라, 자율적 목소리를 지닌 윤리적 주체들이다.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분석하면서, 인물들이 작가의 세계관에 종속되지 않고 각자의 사유와 고통, 신념과 윤리를 고유한 언어로 말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즉,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작가가 부여한 의미를 수행하는 수단이 아니라, 작가조차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타자적 존재’들이다. 이것이 곧 다성성이 지닌 윤리적 기초이며, 바흐친이 보기에 문학이 타자에 대한 사유의 공간이 될 수 있는 이유다.
이러한 시선은 오늘날 문학이 마주한 질문들과도 깊이 연결된다. 사회적 소수자, 침묵당한 역사, 말할 수 없었던 고통, 이 모든 것들은 타자의 목소리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라는 물음 아래 놓인다.
바흐친의 이론은 이때 타자의 말하기를 가능케 하고, 그 말에 응답할 수 있는 윤리적 상상력의 구조를 제공한다. 그에게 문학은 일방향적인 진실을 선포하는 권위의 장이 아니라,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나 자신의 위치를 재구성하고, 그 만남의 틈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과정이다. 결국 바흐친의 문학 이론은 언어와 문학의 문제를 넘어서, 존재론적·윤리적 사유로 확장된다. 타자를 사유한다는 것은 곧 나의 응답 가능성을 열어두는 일이며, 문학은 그러한 응답의 윤리를 훈련하는 가장 깊은 사유의 장소다. 그의 이론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오늘날에도 문학이란 여전히 타자의 목소리를 정당하게 들려줄 수 있는 드문 공간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ΙΙΙ. 한강 작품에 나타난 바흐친적 상상력
1. 『소년이 온다』: 증언, 침묵, 다중 시점의 구성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참혹한 비극을 중심에 두고, 그 사건을 하나의 시점이나 단일한 진실로 환원하지 않고, 다수의 인물과 다층적인 언어, 그리고 침묵과 비어 있음을 통해 풀어가는 다성적 서사 구조를 지닌다.
이 작품은 바흐친이 말한 “진리는 하나의 의식 속에서 존재할 수 없다. 반드시 대화 속에서 존재한다”는 대화주의의 정신과 “타자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윤리적 상상력”을 현대적 방식으로 구현한 서사라 할 수 있다.
소설은 총 일곱 개의 장으로 구성되며, 각 장마다 중심 화자가 달라진다. 동호, 정대, 은숙, 김진수, 임선생, 어머니,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작가 자신의 목소리까지, 이야기는 끊임없이 시점과 화자, 서술 방식을 바꾸며 광주의 학살과 그 이후의 트라우마를 다각도에서 재현한다.
이러한 구성은 바흐친의 다성성(polyphony) 개념과 밀접하게 닿아 있다.
여기서 각 인물은 단지 하나의 사건을 다양한 입장에서 설명하는 증인들이 아니라, 자기만의 고유한 감각, 언어, 침묵과 사유를 가진 윤리적 주체들이다. 바흐친의 정의대로, 그들은 작가의 이념에 종속되지 않고, 작가와 수평적인 위치에서 세계에 대해 발화하고 침묵하는 존재로 남는다. 특히 이 작품의 핵심 중 하나는, ‘말해지는 것’보다 ‘말해지지 않는 것’의 윤리에 있다.
죽은 자의 목소리로 진행되는 2장, 고문 후유증으로 감정을 잃어버린 인물의 내면 독백, 아이의 시체를 수습하던 생존자의 속수무책의 기억 등은 극단적인 폭력의 상황에서 말의 무력함과 동시에 말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작품 중 정대의 혼령은 이렇게 속삭인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내게서 도망친 것이다.”
이 문장은 말하지 못하는 죽음이 말해지는 세계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그 단절에 대해 누가, 어떻게 응답할 수 있는가를 독자에게 묻는다.
바흐친은 언어를 타자와의 응답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실존적 사건으로 보았고, 『소년이 온다』에서의 말들은 그 사건 자체에 대한 증언이라기보다는, 그 말할 수 없음에 응답하려는 절박한 윤리적 시도로 기능한다. 말이란 단지 진실을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라, “응답할 수 없는 죽음을 향한 불완전한 몸짓”이며, “진정한 말은 언제나 타자의 말과 얽히고 충돌하는, 살아 있는 관계의 행위”라는 바흐친의 언어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의 목소리는 어떤 해답도 제시하지 않지만, 그 다성적 배열은 독자로 하여금
진실에 다가서려는 윤리적 상상력을 요구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실이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말해질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을 때조차, 문학은 그 침묵을 감싸는 응답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또한 이 작품은 바흐친이 강조한 헤테로글로시(heteroglossia)의 측면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작품 곳곳에는 피해자의 내면 언어, 검열관의 기계적 언어, 침묵 속의 종교적 언어, 거리의 언어, 출판사의 공식적 언어 등이 교차하고 충돌한다. 이들은 하나의 통일된 어조로 묶이지 않고, 서로 다른 사회적 계층과 이념, 시대를 반영하며 소설이라는 공간 안에서 언어의 정치성과 사회성을 복합적으로 드러낸다. 이는 바흐친이 말한 “언어는 고정된 체계가 아니라, 사회적 목소리들의 끊임없는 투쟁 속에서 의미를 구성하는 역동적 장이다” 라는 관점을 소설적 차원에서 구체화한 예시로 볼 수 있다.
『소년이 온다』의 마지막 장에서 작가-화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너를 잊지 않기 위해 쓴다.”
이 문장은 단지 문학의 기록 행위가 아니라, 죽은 자를 향해, 침묵을 향해, 사라진 목소리를 향해 응답하는 윤리적 행위로 해석된다.
바흐친의 말처럼, “말은 언제나 타인을 향해 열려 있는 응답의 구조 속에 존재한다.” 이 작품은 바로 그 응답 가능성의 사유를 한국 현대사의 고통스러운 장면 속에서 실현해 낸다. 이처럼 『소년이 온다』는 바흐친적 상상력의 현대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말과 침묵, 응답과 부재, 진실과 허구 사이를 교차하며, 하나의 중심도 결론도 없이, 각기 다른 인물의 목소리를 따라가는 이 서사는, 문학이란 무엇보다도 타자에 대한 응답이어야 한다는 진실을 조용히 말하고 있다.
2. 『채식주의자』: 육체와 침묵의 카니발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육체, 욕망, 침묵, 상징, 그리고 사회적 규율의 충돌을 다루는 작품이다. 영혜라는 인물이 육식을 거부하고 식물을 닮은 존재로 이행해 가는 여정은 단지 개인적 선택이 아니라, 바흐친이 말한 “신체의 해방”과 “언어 권력의 전복”이라는 카니발적 상상력의 현대적 변형으로 읽힐 수 있다.
영혜는 “고기를 먹지 않기로 했다”는 단순한 진술에서 시작해, 점점 자신의 신체 자체를 욕망의 대상이자 저항의 도구로 바꿔 나간다. 그녀는 말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으며, 주변 인물들의 시선 속에서 침묵하는 타자로 남는다. 그 침묵은 단지 소극적인 반응이 아니라, “욕망의 언어로 침식된 세계에 침묵으로 응답하는 윤리적 거부”로 기능한다. 남편의 시점에서 영혜는 “아무 일도 아닌 일로 남의 삶을 휘젓는 여자”이며, 형부의 눈에는 “신성한 육체의 캔버스”가 되고, 언니 인혜에게는 “더는 감당할 수 없는 타자”가 된다. 이처럼 세 명의 서술자는 각기 다른 언어와 감정, 욕망과 죄책감의 화법으로 영혜를 바라보지만, 정작 영혜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 어떤 언어에도 포섭되지 않는 다성적 침묵의 주체로 자리한다.
영혜의 말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 순간 이렇게 내면을 토로한다: “나는 식물이 되고 싶어요. 뿌리를 내리고, 물을 마시고, 햇빛을 받아들이며 그렇게 조용히.” 이 고백은 인간 사회의 언어 질서에서 벗어나 식물적 존재로 이행하려는 절박한 탈주의 상상을 드러낸다. 그녀의 선택은 말로 설명되지 않고, 몸으로 실현된다. 이는 바흐친이 중세 카니발에서 보았던, 신체와 욕망, 말과 질서의 전복적 장면이 이 현대 소설 속에서 다시 펼쳐지는 것이다.
바흐친은 『라블레와 그의 세계』에서 이렇게 말한다: “카니발은 일시적이나마 위계와 권위를 무너뜨리는 신체와 웃음의 축제이며, 모든 언어와 질서가 재전복되는 열린 시간이다.”
영혜의 침묵은 바로 그런 재전복의 시간이다. 그녀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가장 강력한 언어를 구사한다. 그 침묵은 사회가 허락한 말의 틀을 무화시키며, 신체 자체를 하나의 비언어적 발화로 만들어낸다. 또한 이 작품은 바흐친이 말한 다성성의 구조를 정교하게 따른다.
영혜는 세 명의 화자에 의해 서술되지만, 그 중 누구도 그녀의 진실을 파악하거나 설명하지 못한다. 각 화자는 자신의 시선과 한계 안에서만 영혜를 바라보며, 그 결과 『채식주의자』는 누구도 중심에 서지 못한 다중 서사의 병렬 구조를 형성한다.
바흐친은 이렇게 말한다: “다성적 소설에서는 어떤 인물도 단지 기능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모든 목소리는 자율성을 지닌 의식이며, 작가조차도 그 목소리를 지배할 수 없다.”
영혜는 단지 무력한 피해자가 아니다. 그녀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설명하려는 모든 목소리를 거부하는 윤리적 자율성의 인물로 존재한다. 그 자율성은 말이 아니라, 몸과 식물이라는 상징의 언어로 나타난다.
이처럼 『채식주의자』는 바흐친의 이론 중 카니발성, 다성성, 대화주의가 침묵과 신체, 시선의 충돌이라는 감각적 문학 공간 속에서 실현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말하지 않는 타자에 대해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독자에게 윤리적 상상력을 요구하는 문학의 공간을 마련한다.
3. 『흰』: 언어의 해체와 감각의 이중성
한강의 『흰』은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해체하고, 단어와 이미지, 감각의 파편들을 통해 기억과 존재, 부재와 감응을 탐색하는 독특한 산문적 서사다. 이 작품은 한 인물의 삶이나 사건을 따라가지 않는다. 대신 ‘흰’이라는 색채를 중심으로 죽음과 탄생, 상실과 복원의 감각적 풍경을 언어 이전의 깊이에서 조망한다.
이처럼 말해지지 않는 것을 언어로 감싸 안으려는 이 시도는, 바흐친이 말한 ‘응답의 문학’, ‘비완결성의 존재론’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작품은 “흰 것들”에 대한 단편적 서술로 시작된다.
“눈, 이, 쌀, 소금, 백합, 손수건, 뼈, 달빛.”
이러한 나열은 단지 시적인 장식이 아니라, 말로 붙잡을 수 없는 감각적 기억의 파편들이며,
기억되지 못한 것들을 다시 호명하려는 언어의 몸짓이다. 이런 방식은 바흐친이 강조한 언어의 ‘비완결성(unfinalizability)’과 통한다. 그는 “삶은 하나의 열린 의미 작용이며, 언어는 그 열린 관계 속에서 타자의 응답을 기다린다”라고 말한다.
『흰』의 서사는 서사적 완결을 지향하지 않고, 언어가 비어 있는 틈을 따라 걷는 여정처럼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한 문장도 명확히 종결짓지 않는 슬픔과 윤리를 마주하게 된다.
작품 속 주인공은 이름 없는 ‘죽은 아이’를 중심에 두고, 그 아이에게 말을 건넨다. 하지만 그 말은 결코 완전한 진술로 닿지 않으며, 침묵과 기다림, 회피와 기도 속에서 반복적이면서도 멈칫거리는 언어들로 흐른다. 주인공은 말한다:
“나는 너를 위해서 흰 것들을 쓰기로 했다. …… 쓰는 일은 잊지 않기 위한 것, 살아남은 자로서의 책무였다.”
이 고백은 바흐친이 말한 “응답의 윤리”, “말할 수 없는 타자를 향한 말의 책무”와 일치한다.
여기서 ‘쓰기’는 단지 창작이 아니라, 응답할 수 없는 죽음을 향해 타자의 존재를 지켜보려는 윤리적 자세가 된다. 즉, ‘나는 쓴다, 고로 응답한다’는 문학적 행위의 변증법이 이 작품의 구조를 이루는 것이다.
『흰』은 또한 헤테로글로시(heteroglossia)의 내부화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의미의 사회적 언어 충돌은 이 작품에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그 대신 감각과 상징, 몸과 색, 기억과 부재가 서로 다른 언어로 조우한다.
“벽지의 흰빛”, “화장터의 하얀 연기”, “갓난아이의 뼈” 등은 하나의 서사어로 통일되지 않고, 각기 다른 감각과 맥락의 목소리들로 남는다. 이러한 내부적 이질성은 바흐친의 말처럼,
“언어는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언제나 타자적 목소리를 동반한다.”
는 생각을 감각적으로 실현한다. 특히 『흰』의 배경이 되는 공간은 낯선 이국(바르샤바)이며, 이방인으로서의 화자는 말할 수 없는 존재의 경계에 놓인다. 그녀는 한국어와 폴란드어 사이의 틈, 의미와 침묵 사이의 틈에서 살아가며 그 단절을 메우려는 글쓰기를 수행한다. 그 글쓰기는 “너에게 말을 걸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며, 그래서 더 윤리적이다. 이와 같이 『흰』은 말해지는 것보다 말해질 수 없는 것을 사유하려는 시도이며, 그 말해질 수 없음에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응답하려는 글쓰기의 윤리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바흐친의 언어철학과 문학 윤리의 가장 정제된 구현이며, 언어의 본질이 응답성과 타자성을 전제로 할 때 문학은 가장 깊은 형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ΙV. 밀란 쿤데라 작품에 나타난 바흐친적 상상력
1.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존재론적 질문과 다성적 시선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실존적 질문과 서사적 실험이 복합적으로 얽힌 작품이다. 작가는 1968년 체코 프라하의 봄과 소련의 침공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사랑과 성, 자유와 억압, 신념과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물들의 삶을 따라가며 존재란 무엇인가, 삶의 무게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철학적으로 성찰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질문은 다음의 문장으로 요약된다:
“한 번뿐인 삶이라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아닐까?”
(“If we have only one life to live, we might as well not have lived at all.”)
이 문장은 삶의 ‘가벼움’이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을지, 아니면 모든 의미를 무력화시키는지를 묻는 존재론적 아이러니로 작동하며, 이는 바흐친의 이론에서 말하는 완결되지 않은 존재, 질문으로서의 존재와 통하는 문제의식이다. 이 작품의 독특한 점은 작가의 목소리와 인물들의 시선이 교차하면서, 하나의 절대적 관점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다성성이란 단순히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각 인물이 고유한 세계관과 사유 체계를 가지고, 작가의 관점에 종속되지 않은 채 자율적으로 말하는 구조를 의미한다. 예컨대 토마시는 육체의 자유를 믿는 인물이지만, 그의 관계는 단순한 방종이 아니라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가벼움은 자유와 관련이 있을까, 아니면 무의미와 더 가까울까?”
이 질문은 단지 사유의 형태가 아니라, 작품 속 인물이 존재를 응시하며 자기 세계의 윤리를 형성하는 방식이다. 반면, 테레사는 삶의 무게를 감당하려는 인물로, 자신의 고통과 수치심을 내면화하면서 감정과 윤리의 언어를 구축한다. 이 두 인물은 동일한 사건을 겪으면서도, 서로 다른 언어와 세계 속에 머물며 자기만의 목소리로 응답한다.
작품은 이러한 인물들의 대비 속에서도 누구 하나의 시선을 중심으로 삼지 않는다. 작가는 말한다:
“사람의 운명은 그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문장은 바흐친이 말한 ‘다성적 존재’의 조건, 즉 누구도 자기 삶의 진실을 독점할 수 없으며, 모든 삶은 미완의 질문이라는 사유와 맞물린다. 또한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이 서사에 철저히 개입하면서도, 그 개입이 최종 해석을 부여하는 권위적 목소리가 되지 않도록 유예하는 전략을 취한다. 쿤데라는 인물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들을 만들어냈지만, 나는 그들을 끝까지 알지 못한다.”
이 문장은 바흐친이 주장한 비완결성(unfinalizability)과 정확히 호응한다. 즉, 작가 자신도 인물의 삶을 완전히 결정하지 않으며, 그들의 세계는 언제나 더 말해질 수 있고, 다른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열린 가능성으로 남는다.
2. 『농담』: 유머와 권력의 해체
밀란 쿤데라의 『농담』(1967)은 전체주의 체제 아래에서 개인이 겪는 억압을 농담이라는 사소한 언어적 행위로부터 조망하는 작품이며 ‘웃음’이라는 가장 사적인 감정이 가장 정치적인 제재를 받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주인공 루드비크가 친구에게 보낸 엽서에서 “낙관주의는 인민의 아편이다. 건강하십시오.”는 전체주의 체제의 검열을 거치며 체제에 대한 조롱으로 간주되고, 그의 인생은 돌이킬 수 없는 전환점을 맞는다. 이때 농담은 단지 장난스러운 유희가 아니라, 바흐친이 말한 전복적 언어, 즉 권위의 진지함을 무너뜨리는 해체적 발화로 기능한다. 웃음은 여기서 체제의 금기를 건드리는 ‘금기의 언어’가 되며, 억압적 이념 구조에 균열을 내는 서사의 장치로 작용한다.
바흐친은 『프랑수아 라블레와 그의 세계』에서 웃음을 고정되고 폐쇄된 것, 권위와 절대성으로 보이는 모든 것에 균열을 내는 힘이라 규정한다. 그는 말한다. “웃음은 고정되고 폐쇄된 것, 권위와 절대성으로 보이는 모든 것에 균열을 낸다. 그것은 잠정적인 죽음이며, 동시에 재탄생의 서사다”(Rabelais and His World, p. 92). 이러한 웃음은 체제와 이념의 근본을 조롱하고, 인간의 육체성과 공동체적 생명을 회복시키는 카니발의 기능을 현대 정치 현실 속에 재현한다. 쿤데라의 유머는 단지 체제에 대한 비판을 넘어, 인간의 자유와 불확실성을 긍정하는 실존적 언어이기도 하다. 그에게 유머란 “세계의 단일성과 진지함에 대한 마지막 저항”이며, 웃음은 질서의 얼굴에 던져지는 유일한 침묵 없는 항의다.
『농담』은 이런 바흐친적 의미의 웃음을 서사의 중심에 두며, 권력의 언어를 해체하는 하나의 장르로 ‘농담’을 구성한다. 루드비크의 음성은 국가 권력이라는 단일한 이념적 음성과 충돌하며, 그 안에서 자율성과 다성성을 획득한다. 바흐친은 『도스토옙스키 시학의 문제』에서 다성성을 “작가가 모든 인물의 의식 세계를 자율적이고 독립된 음성으로 인정하는 서사 구조”라고 말하며, 이러한 서사는 진실을 단 하나의 목소리에서가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음성들의 대화 속에서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썼다. “진정한 다성적 소설이란, 서로 다른 의식들이 서로 다른 세계 안에서, 작가의 직접적인 중재 없이 자율적으로 공존하고 충돌하는 구조다”(Problems of Dostoevsky’s Poetics, p. 6).
루드비크는 권력에 억눌리는 단일한 피해자가 아니다. 그는 자기 아이러니로 자신을 조롱하고, 체제를 조롱하며, 진실이 결코 하나일 수 없음을 증명한다. 작중 인물들인 루드비크, 헬레나, 야로슬라프, 코스트카는 저마다 다른 가치와 언어를 지니고 있으며, 그 어느 것도 중심이 되지 않는다. 작가는 이들을 통제하지 않으며, 독자 역시 특정 인물에 윤리적 우위를 부여할 수 없게 된다. 이렇듯 『농담』은 단일한 이념으로 구조화된 세계에 다성적 균열을 발생시키는 반서사적 장치들을 끊임없이 작동시킨다.
또한 루드비크의 농담은 이중적인 언어로서 기능한다. 그는 그 농담을 진심으로 쓴 것이 아니었고, 일종의 익살이었다. 하지만 체제는 그것을 반혁명적 문서로 판정한다. 이때 하나의 발화 속에 상반된 두 개의 의식이 공존하게 되며, 바흐친이 말한 이중언어(double-voiced discourse)의 조건이 성립한다. 바흐친은 이중언어를 “하나의 말 속에 두 개의 의식이 공존하는 상태”라고 설명하며, 그것이 체제 언어를 교란시키는 수단이 된다고 본다. 루드비크의 농담은 그 자체로 체제 언어를 내부로부터 전복하고, 권위의 언어를 반어적으로 재구성한다. 이러한 언어는 단지 개인의 유희가 아니라, 체제의 언어 구조 자체를 위반하는 정치적 발화로 읽힐 수 있다.
바흐친은 진실이 하나의 권위적 음성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의식의 대화 속에서만 드러난다”고 말한다(Problems of Dostoevsky’s Poetics, p. 81). 『농담』은 바로 이 다성적 진실을 향한 소설이다. 진실은 루드비크의 복수심 속에도, 헬레나의 자기기만 속에도, 야로슬라프의 민속주의 속에도 단편적으로 존재한다. 작가는 그 어느 쪽도 옹호하지 않으며, 오히려 각 인물의 언어 속에서 ‘진지한 것의 부조리함’을 드러내고 해체한다. 유머는 여기서 단순한 해방이 아니라 윤리적 사유의 출발점이 된다. 웃음은 권위의 가면을 벗겨내고, 인간의 존재 조건을 다시 질문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이처럼 『농담』은 유머를 통해 권위적 질서를 해체하고, 바흐친이 말한 다성성과 카니발의 원리를 현대 소설적 형식 안에서 구현한 작품이다. 쿤데라의 유머는 단지 가벼운 풍자가 아니라 “진지한 것을 진지하지 않게 만드는 힘”이며, 억압적 세계 속에서 발화하려는 인간의 본능적 충동이다. 그는 웃음을 통해 질서의 바깥으로 나가고자 하며, 그 바깥에서조차 결코 단일한 의미를 생산하지 않는다. 그 웃음은 불안정하고 모순적이며, 바로 그렇기에 가장 인간적인 진실을 품고 있다. 바흐친이 말했듯, “카니발은 인간이 자신을 낯설게 보고, 세상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변형의 공간이다”(Rabelais and His World, p. 11). 『농담』은 이 낯설게 보기의 문학적 실현이며, 웃음이라는 언어로 다성적 세계를 열어젖히는 혁명이다.
3. 『불멸』: 작가의 메타언어와 캐릭터의 자율성
밀란 쿤데라의 『불멸』은 바흐친이 말한 다성성의 미학이 가장 정교하게 구현된 소설 중 하나다. 이 작품은 1990년 프랑스어로 출간되었으며, 쿤데라가 체코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집필한 첫 장편소설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다. 이미 프랑스로 망명한 이후였던 쿤데라는 『불멸』을 통해 자국의 문학 전통에서 벗어나, 프랑스 문학의 계보 안에서 자신의 소설 미학을 새롭게 구성해 나간다. 이 작품은 고전적 소설 형식에서 벗어나, 작가의 목소리와 인물들의 목소리, 그리고 철학적 사유가 서사 속에 다층적으로 병존하며 충돌하는 구조를 갖는다. 『불멸』에서 작가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설계자가 아니다. 그는 이야기의 인물들과 나란히 등장하며,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삶과 운명을 두고 고민하고, 심지어는 인물로부터 의심받고 거부당하기도 한다. 이처럼 『불멸』은 하나의 완결된 서사가 아니라, 구성되고 해체되며 다시 쓰이는 이야기의 흐름 자체를 탐구하는 소설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바흐친의 이론, 특히 메타언어로서의 소설, 다성성, 그리고 인물의 자율성이 작품에 깊이 접속된다.
바흐친은 『도스토옙스키 시학의 문제』에서 “진정한 다성적 소설이란 작가가 모든 인물들의 자율적 의식을 인정하고, 그들의 언어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허락한 서사 구조”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작가는 더 이상 인물 위에 군림하는 창조자가 아니라, 인물들과 함께 ‘존재하는 자’이며,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진실을 구성해나가는 존재다. 그는 말한다. “다성성은 서로 다른 의식들이 서로 다른 세계 안에서 자율적으로 충돌하고 공존하는 공간이다. 작가는 이 세계들을 완전히 통제하지 않는다”(Problems of Dostoevsky’s Poetics, p. 6).
『불멸』의 작가 ‘나’는 이 정의를 정확히 수행한다. 그는 자신의 인물들, 특히 아그네스를 향한 애정을 드러내며, 그녀가 허구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대우한다. 그가 아그네스를 따라가며 그녀의 고독, 육체성, 그리고 죽음의 방식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소설이라는 장르 안에서의 윤리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아그네스는 그의 통제를 따르지 않으며, 작가 자신이 “내가 그녀를 만든 게 아니라, 그녀가 나를 소설 속으로 불러들였다”고 말하는 순간에 이르면, 바흐친이 말한 인물의 자율성과 서사의 다성성이 완전히 실현된다.
『불멸』은 이처럼 끊임없이 자기반성을 수행하는 서사이자, 메타 언어적 성찰의 장이다. 쿤데라는 인물들을 조작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의 관계를 노출시키며, 독자에게 자신이 소설을 ‘쓰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메타화된 소설은 서사를 절대적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경고하며, 진실이란 언제나 “작성되고 있는 과정”임을 제시한다. 바흐친이 말하듯, “진실은 완결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대화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다”(Problems of Dostoevsky’s Poetics, p. 293). 쿤데라의 작가 화자는 이 열린 진실의 공간 속에서 스스로를 해체하고, 독자 앞에서 그 불완전성을 고백한다. 소설은 이 고백의 현장이자, 언어적 실험실이 된다.
특히 아그네스와 로라 자매의 대비는 바흐친적 다성성이 인물 내면에까지 확장된 사례다. 두 사람은 여성성과 육체성, 사랑과 고독에 대해 상반된 태도를 보이지만, 작가는 어느 쪽에도 도덕적 우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로라는 적극적으로 자기 몸을 타자에게 드러내며, 그 몸을 통해 사랑을 갈구하는 인물이고, 아그네스는 오히려 그 몸을 감추고 홀로 있으려 하며, '보이지 않는 존재로 남는 것'을 원한다. 이 두 음성은 서로를 반박하면서도 동시에 존재하며, 어느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다. 여기서도 작가는 화해나 결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이들의 욕망과 태도를 가만히 병치시킬 뿐이다. 이때 소설은 더 이상 설명하거나 가르치는 장르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다중성과 말할 수 없음의 장”으로 전환된다.
『불멸』이 지닌 가장 중요한 특성은 바로 완결을 거부하는 서사 구조다. 작중에는 프랑스 철학자, 괴테, 헤밍웨이와 같은 실존 인물들도 등장하고, 이들은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들며 등장인물들과 나란히 자리한다. 쿤데라의 작가는 이 세계를 구성하는 동시에, 그 구성 행위 자체를 지속적으로 질문한다. 이 질문은 바흐친이 말한 대화적 진실, 즉 하나의 중심이 아닌 다수의 음성 속에서 떠다니는 의미로 수렴된다. 그 어떤 발화도 궁극적이지 않으며, 모든 것은 대화 속에서 열려 있다.
작가가 서사 속에 직접 등장하는 이 메타픽션적 형식은 바흐친이 말한 작가와 인물 간의 거리, 그리고 의식의 복수성을 그대로 구현한 것이다. 작가는 인물에 몰입하거나 동일화되지 않으며, 그들의 세계를 절대화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인물과 대화하고, 때로는 그들과 입장을 교환하며, 심지어는 인물에게 이끌리는 존재로 그려진다. 아그네스를 따라 작가가 꿈처럼 겹쳐질 때, 독자는 하나의 음성으로 작품을 읽을 수 없게 된다. 이 다성적 구성은 독자에게도 능동적 사유를 요구하며, 작가와 인물 사이, 현실과 허구 사이, 죽음과 불멸 사이에서 의미를 구성하게 만든다.
『불멸』은 그 제목과는 다르게, 영원한 의미의 고정화를 거부한다. 작중 인물들은 불멸을 욕망하면서도, 결국 그것이 얼마나 허상에 가까운지 자각하게 된다. 인간의 욕망, 존재의 의미, 작가의 권위 등 모든 것은 해체의 대상이 되고, 그 잔해 위에서 오직 다성적 대화만이 지속된다. 이것이 바로 쿤데라의 ‘불멸’이 가지는 아이러니이자 문학적 윤리다. 바흐친이 말했듯, “소설은 언제나 삶의 끝이 아닌 중간에 있다. 그것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생성되고 있는 진리다”(Problems of Dostoevsky’s Poetics, p. 27).
이와 같이 『불멸』은 바흐친의 다성성 개념을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구현해 낸 현대 소설의 한 전범이다. 작가의 목소리는 인물의 목소리보다 우위에 있지 않으며, 인물들은 모두 독립된 자아로 발화한다. 소설은 더 이상 절대적 진실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진실이 생성되는 실험의 공간,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의 장으로 재구성된다. 쿤데라는 소설이 “대화하는 예술”이며, “죽음을 향해 끊임없이 말을 걸며 반응하는 인간의 유일한 형식”이라는 사실을 이 작품을 통해 증명한다.
V. 다성성의 두 얼굴: 한강과 쿤데라의 비교 분석
1. 내면성과 철학성: 감각적 다성 vs 관념적 다성
한강과 쿤데라의 소설은 모두 바흐친이 말한 ‘다성성’의 문학적 미학을 구현하지만, 그 성격과 구현 방식에서는 뚜렷한 차이를 드러낸다. 쿤데라의 다성성이 철학적 명제와 사유 중심의 ‘관념적 다성’을 중심축으로 삼는다면, 한강의 소설은 육체적 고통, 침묵, 감각의 층위에 뿌리 내린 ‘감각적 다성’에 가까운 면모를 보인다. 이 둘은 다성성이라는 공통의 미학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세계를 파고든다. 하나는 관념을 통해 세계를 사유하고, 다른 하나는 몸과 감각을 통해 세계를 증언한다.
바흐친은 『도스토옙스키 시학의 문제』에서 다성성을 “서로 다른 인격의 자율적 의식들이 충돌하고 공존하는 서사 구조”로 규정하며, 이때 중요한 것은 단지 인물의 수가 아니라, 그들이 가진 세계 인식의 독립성이라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다성성은 단순히 여러 인물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인식론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다. 한강과 쿤데라는 이 정의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구현해 낸다.
밀란 쿤데라의 다성성은 철저히 관념적이다. 그의 인물들은 철학자처럼 말하고,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며, 내면의 사유를 긴 독백이나 대화로 풀어낸다. 특히 『불멸』에서 인물들은 육체적 사건보다 사유의 방식에 더 많은 에너지를 할애한다. 아그네스는 육체를 소멸의 상징으로 여기며 그로부터 도피하려 하고, 로라는 그 육체를 과시의 수단으로 활용하며 사랑과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이때 두 인물은 각기 다른 인간관과 세계 인식을 제시하며, 작가는 이들의 입장을 통제하지 않고 병치시킨다. 이러한 방식은 바흐친이 말한 “작가가 인물 위에 군림하지 않고, 자율적인 사유가 충돌하는 장을 마련하는 것”과 일치한다. 쿤데라의 소설은 이러한 인식론적 대화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소설이 철학을 수행하는 형식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고자 하며, 실제로 『불멸』에서는 철학자, 작가, 허구 인물들이 동일한 장면 안에서 동등하게 대화하고 충돌한다.
이러한 쿤데라의 서사 전략은 바흐친이 말한 “대화적 철학”을 현대 소설에서 구현한 대표적 사례로 읽을 수 있다. 바흐친은 “진실은 단일한 음성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의식의 대화 속에서만 드러난다”고 말한다(Problems of Dostoevsky’s Poetics, p. 81). 쿤데라에게 있어서 소설은 바로 이 진실의 생성 공간이다. 그의 서사에서는 결론이 없다. 정답을 주기보다 문제를 병치시키고, 의미를 해체하기보다 끊임없이 미루며, 사유의 틈새를 남겨둔다. 『농담』에서 권력과 농담이 충돌하는 서사적 아이러니 역시, 하나의 메시지로 환원되지 않는 다성적 사유의 장으로 남는다.
반면 한강의 다성성은 철학적 명제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의 세계에서 다성성은 사유보다 감각에서 출발한다. 특히 『소년이 온다』에서는 말해지지 않는 것, 말할 수 없는 것, 말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중요한 층위를 이룬다. 이 소설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하되, 이를 설명하거나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한강은 인물들의 감각과 몸의 기억, 침묵과 울음, 환청과 환영을 통해 말해지지 않은 진실을 떠올리게 한다. 이 작품에서 발화는 결코 권력의 도구가 아니다. 발화는 오히려 고통의 증언이며, 침묵은 또 다른 형태의 언어다. 소년 동호가 죽은 이후에도 서사의 중심에는 여전히 그의 시점이 놓여 있고, 동호의 목소리는 “죽은 자의 목소리”로서 생존자들의 고통과 윤리를 관통한다. 여기서 다성성은 살아 있는 자들의 목소리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말할 수 없는 자, 말하지 못한 자, 말해서는 안 되었던 자의 목소리까지 포함한 윤리적 다성성의 층위가 열린다.
한강은 이러한 감각적 다성성을 실현하기 위해 인물의 내면을 직접 서술하기보다, 몸의 반응과 주변 사물, 풍경, 감각의 단편들을 병치하며 구성한다. 예컨대 피 냄새, 발자국, 환청, 꿈, 무게 같은 요소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그것들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발화하게 만든다. 이때 독자는 하나의 중심 서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인물의 감각적 단편 속에서 진실을 ‘조각처럼’ 모아야 한다. 이러한 서사는 바흐친이 말한 “의식 간의 대화”를 내면과 외부 감각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확장시킨다. 즉, 『소년이 온다』는 철학적으로 발화되는 세계가 아니라, 고통과 상처를 통해 내면화된 감각적 진실이 다층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다.
이처럼 한강과 쿤데라는 모두 다성성을 구현하지만, 그 구현 방식은 ‘관념’과 ‘감각’이라는 서로 다른 출발점에서 비롯된다. 쿤데라는 의미를 미루는 유희 속에서, 인간 존재의 조건을 철학적으로 탐구한다. 그는 소설을 “철학적 아이러니의 무대”로 만들며, 그 안에서 권력, 사랑, 육체, 죽음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지적 담론으로 다루는 동시에, 어떤 궁극적 결론도 유예한다. 반면 한강은 의미를 감각에 맡긴다. 그녀의 소설은 고통받은 자들의 몸을 통해 진실을 이야기하며, 그것을 설명하려 하지 않고, 다만 함께 감각하게 한다. 쿤데라의 인물들은 사유하고 반박하며 말하는 존재이고, 한강의 인물들은 견디고 응시하며 감각하는 존재다. 이 대비는 다성성의 이론이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현대 소설 속에 뿌리내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바흐친은 소설이 삶을 통합된 하나의 질서로 제시하지 않고, 그 안의 이질성과 충돌을 그대로 드러낼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예술이 된다고 보았다. 쿤데라와 한강은 이 원리를 각자의 방식으로 구현한다. 쿤데라는 철학적으로, 한강은 감각적으로. 다성성은 이 둘 사이에서 단지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윤리를 구성하는 방식 그 자체로 변모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 명의 작가 안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의 이질성과 상처를 수용하는 보편적 미학으로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2. 말해지지 않음과 과잉의 언어
한강과 쿤데라의 소설은 모두 다성성의 원리를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이 다성성이 실현되는 지점, 다시 말해 ‘말해지는 것’과 ‘말해지지 않는 것’의 구획 방식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쿤데라의 서사에서는 모든 것이 말해진다. 사유는 드러나며, 인물들은 끊임없이 세계를 해석하고, 작가는 그 해석들 사이를 유유히 넘나들며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반면 한강의 서사는 말하지 않음의 힘, 더 나아가 말하지 못하는 자리에서 출발한다. 바흐친이 다성성을 단일한 서술자의 권위로부터 해방된 인물들의 자율적 목소리라 정의했다면, 이 목소리가 실현되는 서사의 장은 필연적으로 ‘발화의 경계’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이때 한강과 쿤데라는 다성성을 구성하는 ‘발화의 공간’을 전혀 다르게 설정한다.
쿤데라의 소설에서 인물들은 종종 작가 자신과 동일한 수준의 메타적 시야를 갖는다. 『불멸』의 인물들은 자신이 허구임을 자각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자기 존재의 의미를 사유하고 논쟁한다. 이는 쿤데라가 소설을 철학적 실험장으로 삼고, 그 안에서 인물들이 철학적 개념을 구현하거나 해체하는 역할을 맡도록 구성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인물들의 삶을 관찰하면서도, 때로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심지어는 자신의 서술을 중단하고 인물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여기서 ‘말해지는 것’은 단지 플롯의 진행이나 감정의 묘사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인식이며, 그 인식이야말로 쿤데라가 말하고자 한 세계의 핵심이다. 말해지는 것 안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사유, 회의, 아이러니, 유희. 그리고 그것들은 끝없이 발화되며, 소설은 그 무한한 발화의 장으로 존재하게 된다.
반면 한강의 서사에서 ‘말해지지 않은 것’은 결코 결핍이나 공백이 아니다. 오히려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말하게 되는 서사 전략이 한강의 소설에서 중심을 이룬다. 『소년이 온다』는 그 극적인 예다. 이 작품은 광주 민주화운동이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참사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직접적으로 설명하거나 설명되도록 유도하지 않는다. 인물들은 자신의 고통을 분명히 경험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언어화하지 않는다. 동호, 정대, 은숙, 임 선생 등 각 인물의 서사는 모두 일정 지점에서 ‘말하기’를 멈춘다. 이 멈춤은 단지 텍스트의 결핍이 아니라, 말해질 수 없는 것의 윤리적 경계이다. 한강의 소설은 바로 이 경계에서 발화되지 않은 목소리들의 공명으로 다성성을 구성한다.
이때 바흐친의 다성성 개념은 단순히 “말하는 목소리의 다양성”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인식과 의식의 존재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한다. 『소년이 온다』는 죽은 자와 산 자, 가해자와 목격자, 침묵자와 고백자 간의 발화의 비대칭성을 구성하며, 다성성을 말하는 자들의 대화만으로 제한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하지 못한 자, 말하지 않는 자, 그리고 말해서는 안 되는 자리의 고요함 속에서도 목소리는 존재한다. 바흐친은 진실이 “완결된 말이 아니라, 살아 있는 대화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이라 보았고, 한강은 이 대화 속에 침묵과 애도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배치함으로써 다성성의 윤리적 차원을 확장한다.
더욱이 한강의 인물들은 ‘말하기’보다 ‘견디기’를 통해 자기 존재를 구성한다. 동호는 죽은 뒤에도 서사의 중심에서 계속해서 세계를 응시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죄책감과 고통을 끝내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이는 단지 발화의 실패가 아니라, 언어의 한계를 드러내는 전략이다. 한강은 언어가 더 이상 고통을 전달할 수 없을 때, 오히려 그 침묵이야말로 진실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소설적 형식 안에서 천천히 보여준다. 이때 다성성은 음성의 다발이 아니라, 무음 속에서 드러나는 존재의 균열들이다.
반면 쿤데라는 발화를 멈추지 않는다. 그는 서사적 메타언어를 통해 끊임없이 인물과 사건을 해석하고, 아이러니를 더하고, 독자를 ‘거리를 둔’ 위치로 유도한다. 그의 인물들은 사유하고, 말하고, 다시 사유한다. 이 점에서 쿤데라의 다성성은 완전히 의식화된 목소리들의 논쟁적 장이며, 독자에게 사유의 놀이와 인식의 유예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말해지는 것 안에서만 진실이 생성될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은, 소설을 말의 장으로 확장시킨다. 이에 반해 한강은 말의 한계, 발화되지 않은 감정, 침묵의 비언어적 목소리를 통해 진실에 접근한다. 쿤데라는 의미를 생성하는 말의 힘을 믿고, 한강은 말을 초과하는 감각과 침묵의 공간을 열어둔다.
이러한 차이는 결국 다성성이 형성되는 방식의 차이로 이어진다. 쿤데라는 다성성을 통해 사유의 층위를 구축하며, 인물들이 지닌 다양한 세계관이 서로 간섭하고 대화하는 구조를 만든다. 반면 한강은 다성성을 통해 감정의 결을 드러내며, 서사의 균열 지점들에서 잠재된 감정의 파편들을 퍼올린다. 쿤데라에게 다성성은 말로 인식되는 세계의 복수성이라면, 한강에게 다성성은 말로 도달할 수 없는 세계의 다층성이다.
바흐친은 다성성을 말의 중첩이라기보다는 존재의 다층적 인식으로 보았다. 그렇기에 한강과 쿤데라 모두 그의 다성성 개념 안에 포함될 수 있지만, 그것이 실현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불멸』과 『소년이 온다』는 각각 ‘과잉 발화의 미학’과 ‘말해지지 않음의 미학’으로 나뉘며, 그 경계 위에서 다성성의 또 다른 가능성을 탐색한다. 말해지는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 사이의 간극은 결국 문학이 진실에 도달하는 서로 다른 두 방법이며, 독자는 그 사이에서 ‘듣는 태도’와 ‘감각하는 자세’를 동시에 요청받는다.
3. 작가의 위치와 인물의 자율성
한강과 쿤데라의 다성성은 단지 인물의 음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다성성의 구조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위치, 즉 서사에 대한 작가의 개입 혹은 퇴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작가는 자신의 창조물인 인물들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관여하고, 어느 지점에서 물러서는가? 이 문제는 단지 기술적인 서술 방식의 차이가 아니라, 서사에 대한 윤리적 태도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바흐친이 소설을 “작가와 인물 간의 거리로 구성된 예술”이라 보았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위대함은 인물을 도구로 삼지 않고, 독립된 인격으로 존중하며 말하게 만든 데 있다”고 썼다(Problems of Dostoevsky’s Poetics, p. 63). 이때 다성성은 단순한 플롯상의 복수 인물 구성이 아니라, 작가가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을 때만 가능한 문학적 윤리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밀란 쿤데라는 다성성의 적극적 조율자다. 그는 『불멸』에서 서사의 문을 열고 들어와 직접 말하며, 자신의 인물들을 이야기 속에서 ‘만나고’, ‘애도하고’, 때로는 ‘떠나보낸다’. 그는 작중 화자로서 자유롭게 등장하고 퇴장하며, 인물의 사유에 끼어들고, 그것을 철학적 논평으로 이어간다. 이러한 작가의 개입은 결코 전통적인 의미의 ‘작가적 전지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쿤데라는 자신의 권위마저도 해체하고, 자신의 서술 행위를 메타적으로 의심하는 자로서 등장한다. 그는 말한다. “나는 그녀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어느 날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나타났다.” 이처럼 쿤데라는 작가의 전지적 권한을 거부하면서도, 동시에 서사의 중심부에 머무른다. 이 모순된 위치, 즉 작가의 개입과 거리 두기가 공존하는 지점에서 쿤데라의 다성성은 발생한다.
작가는 인물을 도덕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는 인물의 삶을 설계하지도 않고, 독자에게 교훈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인물의 세계에 들어가 함께 의심하고 방황하며, 사유의 흐름을 따라간다. 『불멸』의 아그네스는 자신이 불멸을 원하지 않는 존재임을 깨닫고 퇴장하며, 작가는 그 퇴장을 애도한다. 그 애도는 창조자가 피조물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세계를 산 자로서의 윤리적 감응에 가깝다. 이런 장면에서 쿤데라의 작가는 다성성의 창조자이자 해체자이며, 무대 위에 선 음유시인이자 조용히 퇴장하는 관찰자다.
반면 한강은 훨씬 더 절제된 방식의 거리 두기를 실천한다. 그녀는 자신을 이야기 안에 등장시키지 않으며, 인물들의 발화나 감정에 개입하지 않는다. 『소년이 온다』에서 그녀는 인물들의 경험을 설명하거나 중재하지 않고, 그들의 감각과 침묵을 고스란히 배치함으로써 서사의 공간을 열어둔다. 특히 ‘정대’나 ‘은숙’의 장에서는 그들의 목소리가 거의 서술자의 언어와 구별되지 않게 이어지며, 이때 독자는 특정한 해석이 아니라 고통의 생생한 전달 앞에 마주서게 된다.
이러한 작가의 퇴장은 단순히 등장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고통 앞에서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열어주는 윤리적 선택에 가깝다. 바흐친이 다성성의 조건으로 ‘작가와 인물 간의 거리’를 들었을 때, 그는 이 거리를 권위의 철회이자, 타자의 목소리를 위한 공간으로 이해했다. 한강은 이 공간을 침묵과 간격으로 유지한다. 그녀는 독자에게 어떤 감정도 강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판단하기를 유보한 채, 비어 있는 자리로서의 독서 경험을 제공한다. 이 경험은 다성성의 또 다른 형태, 즉 ‘해석되지 않은 채 남겨진 음성’으로 작동한다.
쿤데라가 자신의 서사를 철학적 대화의 장으로 구성하고, 그 안에서 작가 자신도 하나의 ‘목소리’로 등장하는 데 반해, 한강은 철저히 배제된 상태로 자신을 위치시킨다. 그러나 이 배제는 무관심이나 방관이 아니다. 오히려 윤리적 침묵의 실천, 자기 삭제를 통한 타자성의 보증이다. 『소년이 온다』에서 가장 절절한 장면들은 설명 없이 독자를 지나간다. 광주의 시신들, 은숙의 몸에 각인된 기억, 정대의 트라우마. 작가는 그것들을 주제화하지 않고, 상징화하지도 않으며, 그저 거기 있게 한다.
이와 같이 쿤데라와 한강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작가적 거리’를 구현한다. 쿤데라는 개입하는 자로서의 거리를 유지하며, 다성성을 철학적 아이러니와 논증의 무대로 구성한다. 한강은 퇴장하는 자로서의 거리를 선택하고, 다성성을 감각과 침묵의 윤리적 배치로 실현한다. 이 차이는 단지 스타일의 차원이 아니라, 세계와 타자를 대하는 두 작가의 문학적 태도이자 윤리적 선택으로 연결된다. 바흐친이 말한 “진정한 다성성은, 작가가 인물의 세계를 존중하며 그 안에 머무르지 않되 침범하지 않는 능력에 있다”(Problems of Dostoevsky’s Poetics, p. 65)는 명제는, 이 두 작가에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실현된다.
한강은 침묵함으로써 말하게 하고, 쿤데라는 말함으로써 침묵의 여운을 남긴다. 이들의 서사적 거리 두기는 다성성을 실현하는 기술이자 윤리이며, 독자에게 해석과 감응의 책임을 전가하지 않되 열어두는 방식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문학은 단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게 하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진실을 겨냥하게 된다. 작가는 이 경계에서 서사를 조율하며, 자신이 떠난 자리에서 타인의 목소리를 울릴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한다. 그것이 바로 다성성의 윤리적 깊이이며, 문학이 여전히 타자성을 구성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술로 남는 이유다.
4. 카니발성의 성격 차이: 침묵의 전복 vs 유머의 전복
바흐친이 문학에서 가장 강조한 개념 중 하나는 바로 카니발성이다. 그는 『라블레와 그의 세계』에서 카니발을 위계의 해체, 진지함의 전복, 민중적 자유의 잠정적 실현으로 규정하며, 이러한 원리가 소설이라는 장르의 근본 형식에 깊이 작용한다고 주장했다. 카니발은 “공식 문화의 이데올로기적 중심에 맞서, 웃음과 풍자, 변형과 전복의 논리를 통해 삶의 이면을 드러내는 힘”이며, 무엇보다 정체성과 질서, 권위의 경계를 흐리고 무너뜨리는 놀이적 실천이다(Bakhtin, Rabelais and His World, p. 10). 한강과 쿤데라의 소설은 모두 이러한 카니발성을 내재하지만, 그 방식은 극적으로 다르다. 쿤데라는 유머와 아이러니를 통한 전복의 미학을 구현한다면, 한강은 침묵과 고요를 통한 비가시적 전복을 실천한다. 이 둘은 각각의 방식으로 바흐친이 말한 카니발적 정신을 현대 문학의 감각 속에 되살려낸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바흐친적 의미에서 카니발의 후예라 할 수 있다. 특히 『농담』에서 그는 전체주의 체제의 경직된 언어 질서에 농담이라는 웃음의 장치를 던져 넣음으로써, 권력의 이념을 조롱하고 뒤흔든다. 루드비크의 농담은 단지 개인적 유희가 아니라, 체제의 이데올로기적 진지함을 전복시키는 카니발적 언어다. 그는 바흐친의 정의를 충실히 반영하며, 웃음이 어떻게 “진지하고 영원불변해 보이는 것을 상대화하고, 일시적으로 해체하는 힘”인지를 문학적으로 구현한다(Bakhtin, p. 89). 쿤데라의 세계에서 웃음은 위계에 맞선 평등의 정서이며, 아이러니는 질서에 대한 마지막 저항이다. 작가는 이 웃음을 통해 독자에게 사유의 자유를 열어주고, 어떤 권위도 절대화될 수 없음을 반복적으로 상기시킨다.
또한 『불멸』에서도 유머는 서사의 핵심 윤리로 작동한다. 작가 자신이 서사에 개입하여 “나는 그녀를 만들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 날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고 말하는 순간, 쿤데라는 자신의 권위적 위치를 우스꽝스럽게 낮추며 소설의 무게를 해체시킨다. 이때의 유머는 단순한 웃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거리 두기와 진지함의 상대화이다. 바흐친이 말한 ‘카니발적 이중성’ 즉 신성함과 세속성, 고귀함과 비천함의 교차는 쿤데라의 소설 전반에서 메타적인 아이러니로 발현된다. 그의 소설에서는 체제, 철학, 인간관계 모두가 농담의 대상이 되며, 그 농담이야말로 삶의 유일한 진실로 남는다.
그러나 한강의 문학에서 카니발성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녀는 웃지 않는다. 오히려 침묵하고 응시하며 고통을 견디는 방식으로 카니발적 질서 전복을 실현한다. 바흐친의 정의를 엄밀히 따지자면, 카니발은 일시적으로라도 위계가 전도되는 시간이며, 그 안에서 새로운 진실이 발화될 수 있는 순간이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바로 이 순간을 ‘침묵’이라는 방식으로 호출한다. 작품 속 인물들은 공적인 질서, 국가의 언어, 이념의 담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며, 그들이 발화할 수 있는 방식은 신음, 꿈, 환청, 몸의 떨림 같은 비언어적 기호에 가깝다. 그러나 그 침묵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식 언어가 숨기고 왜곡한 진실을 더 강렬하게 드러낸다.
『소년이 온다』에서 ‘침묵의 전복’은 죽은 자가 산 자의 말을 대체하는 순간에 절정에 이른다. 죽은 동호는 살아 있는 이들보다 더 또렷한 시선으로 세계를 응시하며, 그는 발화할 수 없기에 오히려 가장 많은 것을 말한다. 그의 침묵은 국가 폭력의 언어를 해체하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감각적 카니발을 형성한다. 이때 독자는 한강이 보여주는 ‘죽은 자의 시점’이라는 카니발적 반전을 통해, 통제된 역사적 서사를 벗어난 감각적 진실의 장으로 진입하게 된다. 침묵은 여기서 역설적으로 카니발의 언어가 된다.
이처럼 한강의 카니발성은 웃음도 풍자도 없지만, 그 자체로 체제의 질서를 교란시킨다. 체제는 진실을 말하지 못하게 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침묵을 선택하거나 강요당하지만, 작가는 그 침묵을 존재의 언어로 변환시킨다. 이때 카니발은 더 이상 떠들썩한 축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공식적 말하기로부터 추방된 자들의 조용한 귀환”이며, 고요 속에서 뒤집히는 위계의 재편성이다. 『소년이 온다』의 세계에서는 광기의 군중 대신, 두려움에 몸을 떨며 시신을 안고 버텨야 하는 자들이 있고, 그들의 침묵이 모든 공식 언어를 무너뜨리는 해체의 중심에 놓인다.
따라서 쿤데라의 유머는 권력과 진지함에 맞선 언어의 카니발, 한강의 침묵은 국가 폭력에 저항하는 존재의 카니발이다. 둘 다 위계의 전복과 질서의 해체를 수행하지만, 그 매개는 정반대에 있다. 쿤데라는 웃음으로, 한강은 침묵으로, 그러나 모두 무엇인가를 말할 수 없게 만들었던 세계의 언어에 맞서 말한다. 바흐친이 강조한 “영원한 것은 없다”는 카니발의 원리는, 두 작가에게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살아난다. 유머는 영원의 가면을 벗기고, 침묵은 그 뒤에 있던 얼굴을 드러낸다.
이렇듯 침묵의 전복과 유머의 전복은 각각 바흐친의 카니발적 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문학이 세계를 전복하는 방식의 스펙트럼을 극단으로 확장시킨다. 쿤데라가 말함으로써 권력을 해체한다면, 한강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권위의 공백을 드러낸다. 둘의 전략은 다르지만, 그 도착지는 같다. 그것은 위계의 세계를 흔들고, 진실의 다성적 공간을 열어젖히는 문학의 힘이다.
VΙ. 바흐친 이론의 현대 문학 적용 가능성과 비판적 고찰
1. 동시대 문학 담론에서의 수용 양상
바흐친의 다성성 이론과 카니발 개념은 20세기 후반 이후 현대 문학 비평의 핵심적인 이론 자원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포스트구조주의, 후기모더니즘 문학, 그리고 탈이데올로기적 서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시기, 바흐친은 진리를 하나의 권위적 담론이 아닌 대화와 충돌의 장에서 찾고자 했던 이론가로서 주목받았다. 그의 이론은 기존의 중심적 서사, 단일한 작가 의식, 폐쇄적 세계관을 해체하고, 복수의 음성, 열린 구조, 서사 내 갈등의 존재론적 정당화라는 현대 문학의 특성과 깊이 호응하였다.
바흐친의 개념들이 동시대 문학 담론 속에 수용된 방식은 대체로 다성성과 카니발성이라는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우선 다성성은 근래 문학 비평에서 ‘타자성’, ‘서사 윤리’, ‘비권위적 작가성’과 밀접하게 연결되며, 단일한 진리의 서사에 균열을 내는 하나의 미학적 전략으로 기능하고 있다. 서구 비평계에서는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바흐친의 분석을 확장하여, 윌리엄 포크너, 토니 모리슨, 줄리언 반스, 사만타 슈웨블린 등 현대 작가들의 다층적 인물 구성과 인식의 충돌 구조를 분석하는 데 활용되었다. 국내 문학 비평에서도 바흐친은 억압된 목소리의 복원, 침묵과 말 사이의 간극을 이해하는 이론적 장치로 수용되어, 한강, 김애란, 박민규, 천명관 등 동시대 작가들의 서사 분석에 자주 인용되고 있다.
특히 한국 문학에서는 2000년대 이후 ‘현실 인식’과 ‘내면 탐구’의 긴장을 해소하는 이론적 틀로서 바흐친이 활용되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바흐친 이론이 문학을 윤리화하거나 정치화하지 않으면서도, 서사 안의 다양한 현실을 충돌하는 목소리로 드러내는 데 탁월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강의 『소년이 온다』와 같은 작품은 전통적인 리얼리즘 서사나 역사적 진술의 방식으로는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침묵과 감각의 층위를 다루며, 이때 바흐친의 다성성과 카니발 개념은 그 서사의 윤리적 구조를 분석하는 데 적합한 이론적 프리즘을 제공한다.
또한 카니발성은 최근의 문학 담론에서 ‘공식 담론에 대한 전복’, ‘신체적 저항’, ‘비일상의 일시적 실현’이라는 의미로 확장되어 다양한 장르에 응용되고 있다. SF, 포스트 아포칼립스, 스릴러, 게임 서사 등 기존 장르 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들에서는 카니발적 상황이 서사 전체의 전제를 구성하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작품에서 바흐친의 카니발 개념은 체제 비판의 대안 서사, 혹은 장르적 놀이를 통한 현실 인식의 재구성이라는 이름으로 이론적 타당성을 획득한다. 쿤데라의 경우처럼 철학적 유희를 통해 기존 질서를 해체하는 작가도 있고, 박상영이나 김초엽처럼 장르의 기대를 전복하면서 서사를 재구성하는 작가들 역시 그 이면에는 바흐친적 ‘이중 언어’, ‘경계 놀이’의 감각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흐친 이론의 동시대적 수용은 때때로 지나치게 형식론적, 개념적 적용에 머무르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예컨대 다성성은 종종 단순히 복수 인물의 시점이 등장하는 것, 또는 작가의 개입이 드러나지 않는 것만으로 환원되기도 하며, 카니발성은 단순한 패러디나 장르적 일탈의 징후로만 이해되는 경향도 있다. 이는 바흐친 이론의 핵심에 자리한 존재론적 긴장, 즉 ‘진리의 불가능성 속에서도 서로를 대면하려는 타자적 실천’이라는 윤리적 토대를 간과하게 만든다. 바흐친은 다성성을 단지 기법이나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가 상호 응시되는 방식”, 즉 “의식과 의식이 서로를 향해 열리는 과정”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Problems of Dostoevsky’s Poetics, p. 272).
따라서 오늘날 바흐친 이론을 문학 분석에 적용하고자 할 때, 그것이 단지 분석의 틀이나 유희적 구조의 설명으로 축소되지 않도록 하는 윤리적 감수성이 필요하다. 바흐친이 말한 “열려 있는 진실”, “미완의 존재”, “상호 대면의 책임”이라는 개념은 단지 텍스트 내부의 다중 구조가 아니라, 문학과 현실 사이의 윤리적 통로를 여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한강의 침묵 서사, 쿤데라의 철학적 아이러니, 이 둘의 다성적 구조는 모두 그러한 바흐친의 존재론에 닿아 있다.
바흐친의 사유는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권력과 진실, 언어와 침묵, 정체성과 타자성의 문제가 첨예하게 대두되는 오늘의 문학 속에서, 그의 이론은 하나의 기호가 아니라 실천 가능한 사유의 형식으로 작동한다. 그 이론이 요청하는 것은 단순한 인용이 아니라, 문학 안에서 타자를 윤리적으로 구성하는 감각, 그리고 그 감각을 독자에게 전이시키는 서사의 윤리이다. 동시대 문학 담론 속에서 바흐친은 여전히 유동하는 힘으로 존재하며, 그 개념들은 고정된 해석이 아니라 ‘열린 대화’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언어로 작동하고 있다.
2. 문화적 맥락의 차이와 해석의 유효성
바흐친 이론이 동시대 문학 분석에서 폭넓게 수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적용에는 언제나 하나의 문화적 맥락의 간극이라는 문제의식이 따라붙는다. 바흐친은 러시아 혁명기 전후라는 극단적 역사 조건 속에서 사유했고, 그의 언어는 정교한 철학적 개념과 동시에 러시아 민중문화, 종교적 전통, 슬라브적 대화주의 세계관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할 때, 21세기 한국이나 서구의 현대 문학에 그의 이론을 적용하는 과정에서는 해석의 유효성과 문화적 전환의 필요성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가령, 바흐친이 다성성의 원형으로 제시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종교적 윤리의 무대 위에서 타자와의 대면을 요청하는 문학이었다. 그의 인물들은 선과 악, 자유와 구원의 문제를 윤리적·존재론적 수준에서 논박하며, 이때의 다성성은 단순한 다원주의가 아니라 구원을 향한 영적 사유의 대화로 구성된다. 하지만 이러한 구도는 세속화된 현대 사회의 문학 안에서 직접적으로 계승되기 어렵다. 바흐친의 개념을 오늘의 문학에 적용할 때, 다성성이 윤리적 타자성이나 감각의 차이로 대체되는 것은 필연적 전환이자 해석의 재구성이다. 문제는 이 전환이 바흐친 이론의 본래적 사유 구조를 단순화하거나 탈맥락화할 위험이 있다는 데 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와 같은 작품을 바흐친의 다성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 구조상 타당하며 효과적이지만, 이는 바흐친이 제시했던 ‘의식 간의 대화’보다는 오히려 침묵과 애도의 미학, 혹은 말해지지 않은 존재들의 감각적 잔존이라는 맥락에서 구성된다. 즉, 바흐친이 전제한 대화의 공간이 ‘언어’가 아니라 ‘침묵’과 ‘기억’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환은 문화적 감각과 시대적 요구에 따른 이론의 창조적 수용이자 동시에 이론적 전이의 국면을 드러낸다. 여기서 우리는 “이것이 과연 바흐친적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바흐친이 말했던 대화의 윤리를 어떻게 새로운 문맥에서 이어갈 것인가”라는 실천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쿤데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쿤데라가 바흐친과 마찬가지로 문학을 철학적 사유의 장으로 보았다는 점, 그리고 다성성을 단일한 진리에서 벗어나려는 장치로 삼았다는 점은 이론의 상응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쿤데라는 체코 출신 작가로서 프랑스어로 글을 쓰며 이념의 변방에 위치해 있었고, 그의 문학은 바흐친의 세계관보다 훨씬 더 니힐리즘적이고 아이러니한 무중력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쿤데라의 다성성은 구원이나 진리의 발견이 아니라, 진리의 영구적 유예, 혹은 해석의 유희로 구현된다. 이것은 바흐친이 상정했던 ‘책임을 지닌 대화’와는 다소 결이 다른 다성적 실천이다. 다시 말해, 바흐친의 다성성이 윤리적 타자성의 정립에 가깝다면, 쿤데라의 다성성은 철학적 상대주의의 놀이에 가깝다. 이 차이를 인식하지 않은 채 두 작가를 동일한 다성성의 계보 안에 배치한다면, 바흐친 이론의 윤리적 핵심은 소멸할 수 있다.
이처럼 바흐친 이론을 문화적 맥락을 달리하는 텍스트에 적용할 때는 두 가지 함정을 경계해야 한다. 첫째는 이론의 표면적 확장이다. 즉, 인물의 다중 시점, 작가의 비개입, 구조적 분산성 등을 다성성의 징후로 기계적으로 독해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다성성은 하나의 기술적 수사로 전락하고, 바흐친이 말했던 존재론적 대면의 윤리는 소멸한다. 둘째는 문화적 감수성의 이식 실패다. 바흐친의 세계는 집단적 카니발, 민중적 웃음, 종교적 윤리, 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직조되어 있으므로, 그 정신을 전혀 다른 문화권에 적용할 때는 다성성의 정치성과 윤리성을 어떻게 재전유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깊이 사유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흐친 이론이 현대 문학에서 여전히 강력한 해석의 도구로 작동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이론이 결코 닫힌 체계가 아니라 열려 있는 사유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제시한 개념들이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용될 수 있음을 인정했고, 소설이라는 장르가 가진 개방성과 변형 가능성을 누구보다도 강조했다. 바흐친에게 중요한 것은 형식 그 자체가 아니라, 형식이 생성하는 관계성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이론은 적용될 때마다 새롭게 사유되어야 하며, 단일한 원형으로 귀속되어서는 안 된다.
이처럼 바흐친 이론을 동시대 문학에 적용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문화적 맥락에 대한 인식과 해석의 유연성이다. 그것은 단순한 인용이나 구조적 유사성의 확인이 아니라, 바흐친이 지향했던 ‘타자와의 관계로서의 문학’, ‘윤리적 대화로서의 서사’라는 철학적 태도를 어떻게 재맥락화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동시대 독자와 작가, 그리고 연구자는 바흐친을 따라가야 할 권위가 아니라, 함께 사유할 동반자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만 그의 이론은 지금 여기에서 여전히 유효한 사유의 언어로 살아남을 수 있다.
3. 다성성의 현재성과 한계
다성성은 20세기 후반부터 오늘날까지 문학의 윤리적 가능성과 해체적 전략을 동시에 포괄할 수 있는 핵심 개념으로 기능해 왔다. 단일한 권력 담론에 맞서, 서로 다른 의식과 세계 인식이 병렬적으로 공존하고 충돌할 수 있는 구조를 옹호하는 다성성은, 포스트모던 이후의 서사 전략과도 깊은 접점을 이루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문학 환경은 바흐친이 사유하던 시대와는 질적으로 달라져 있으며, 이로 인해 다성성 개념의 현재성은 그 자체로 재고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즉, 다성성은 여전히 유효한가? 아니면 그것은 하나의 이론적 이상으로 남아 있는가?
오늘날 문학이 직면한 현실은 바흐친의 시대보다 더욱 분산적이고 불균형하며, 감각화되어 있다. 디지털 시대 이후의 문학은 다중적 음성의 공존을 넘어, 목소리의 범람과 소멸이 공존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과잉된 정보, 반복되는 감각, 자기 고립화된 세계 속에서 타자의 음성이 실질적 대화로 기능하기보다, 각자의 울림으로 흩어지거나 소거되는 현상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이러한 조건에서 다성성이 말하는 ‘대화의 가능성’은 때때로 공명 없는 병치, 혹은 무의미한 소음으로 전락할 위험을 내포한다.
더구나 현대의 문학적 서사에서 ‘타자’는 단순히 다른 의견이나 관점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존재 조건 자체가 비가시화되거나 말해질 수 없는 이들, 곧 ‘무언의 타자’로 등장한다. 예컨대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서처럼 말하지 못한 존재들의 침묵과 잔존의 서사를 다루기 위해서는, 단지 서로 다른 입장을 나열하는 다성성 이상의 문학적 장치가 필요하다. 바흐친의 다성성이 발화 가능한 의식들의 대화 구조에 기초한 것이라면, 오늘날의 문학은 발화 불가능성 자체를 다뤄야 하는 지점에 도달해 있다. 이로 인해 다성성 개념은 새로운 윤리적·미학적 확장 없이는, 현재의 문학 조건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다성성은 종종 작가의 책임 회피 혹은 중립적 태도의 정당화 수단으로 오용되기도 한다. ‘모든 목소리를 공평하게 담는다’는 이상은 현실의 불균형한 권력 구조, 구조적 억압, 그리고 역사적 폭력의 차이를 지우는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다. 특히 정치적 사건이나 사회적 갈등을 다룰 때, 다성성은 때때로 양비론적 회피 또는 탈정치적 중용주의의 언어로 오해되며, 문학의 윤리성을 흐릴 위험도 동반한다. 바흐친은 다성성이 윤리적 대화의 구조라고 보았지만, 이 대화는 어디까지나 책임을 수반한 상호 응시를 전제로 한다. 책임 없는 병치, 불균형한 권력 하의 대화는 결국 다성성이 아니라 위장된 독백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성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오히려 오늘의 문학은, 바흐친이 말한 그 “완결되지 않은 진실”, “미완의 존재들 간의 대화”라는 개념을 재 사유할 시점에 도달해 있다. 다성성은 문학이 타자를 만나는 방식, 권력을 해체하는 방식, 존재를 윤리화하는 방식의 근본적 구조로서, 기술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인간 간의 근원적 대화 가능성을 믿는 희미한 불씨와 같다. 그것은 말할 수 없음을 이해하고, 침묵과 고통을 상상하고, 완결을 유예하는 문학적 윤리로 이어진다. 쿤데라의 유머와 아이러니, 한강의 침묵과 응시는 서로 다른 다성적 전략이지만, 둘 다 결국 ‘진실이 단일한 목소리 안에 있지 않다’는 바흐친의 믿음에 서 있다.
다성성의 현재성은 그 개념의 확장성과 유연성에 달려 있다. 그것은 단일 이론으로 고정될 수 없으며, 언제나 문학의 현장 안에서 다시 사유되어야 한다. 이제 다성성은 단지 여러 목소리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못하는 자를 말하게 하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감지할 수 있는 감각의 훈련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때 비로소 다성성은 구조가 아니라 윤리로서, 수사학이 아니라 감응의 형태로서, 살아 있는 문학의 힘으로 다시 작동하게 된다.
4. 이론적 유연성과 재해석 가능성
1) 디지털 문학, 탈서사적 서사와의 접점
오늘날의 문학은 종이책을 넘어 디지털, 하이퍼텍스트, 멀티모달 서사의 영역으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이 새로운 환경에서 바흐친의 이론은 형식적 의미에서 탈서사적 서사의 다성적 구조와 높은 친화성을 보인다. 특히 웹소설, 인터랙티브 픽션, SNS 기반 서사는 하나의 중심 플롯이나 권위 있는 서술자가 부재하며, 독자가 선택하거나 분기 구조에 따라 서사를 공동 구성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때 서사는 다중적이고 유동적이며, 고정된 의미를 생산하지 않는 ‘열린 구조’로서 기능한다. 이러한 특징은 바흐친이 강조한 “진리는 대화 속에서 생성된다”는 원리와 맞닿아 있다.
하이퍼텍스트 서사는 단일한 이야기 구조가 아니라, 서로 다른 플롯 단위들이 네트워크처럼 얽혀 있는 형태로 구성되며, 각 단위는 상호참조와 변주를 통해 다른 목소리를 생성한다. 바흐친의 개념에서 보면, 이것은 단순한 이야기의 나열이 아니라 “복수의 인식 주체들이 각자의 세계관으로 세계를 말하는 구조”, 즉 현대적 다성성의 구현이다. 또한 AI 기반 창작이나 자동 생성형 이야기 구조에서는 작가의 역할이 해체되거나 비가시화되며, 이것은 바흐친이 소설의 핵심으로 보았던 작가와 인물 사이의 거리 문제를 다시 사유하게 만든다. 바흐친의 이론은 비록 활자 기반의 고전적 소설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그 핵심이 ‘고정되지 않은 진실’과 ‘복수의 의식 간 대화’에 있다면, 디지털 서사 환경은 오히려 그의 사유를 더욱 확장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즉, 바흐친의 이론은 디지털 시대에 새로운 형식으로 변용 가능하며, 탈서사적 실험이 인간 중심의 서사에서 벗어나는 데도 여전히 유효한 해석의 틀이 된다. 물론 여기에는 재해석의 전제가 따라야 한다. 더 이상 인물 중심의 고전적 소설 구조가 아닌 조건 속에서, ‘목소리’란 무엇인가? ‘의식’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이 질문에 답하려는 시도 자체가 바흐친의 이론을 살아 있는 사유로 만드는 길일 것이다.
2) 비서구 문학과 젠더 서사에서의 수용과 저항
바흐친의 이론은 유럽 중심의 문학 전통 속에서 형성되었으나, 그 적용 가능성은 문화권을 넘어 확장되어 왔다. 특히 비서구 문학과 젠더 서사는 바흐친의 개념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그에 대한 비판과 전유의 장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문맥에서 다성성은 단지 문학적 구조가 아니라, 식민주의적 서사 체계에 대한 저항, 혹은 가부장적 언어 구조의 해체라는 실천적 의미로 전환된다.
예를 들어, 식민 이후 문학이나 제3 세계 문학에서는 지배 담론에 의해 침묵당한 타자의 언어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한 작업이다. 이때 바흐친의 다성성은 중심-주변, 권력-피억압, 주체-타자의 경계를 해체하는 비판적 이론틀로 기능할 수 있다. 특히 억압된 공동체의 목소리, 구술 전통의 복원, 기억의 회복을 다룰 때 바흐친은 민중성과 대화성의 철학을 통해 중요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의 이론이 여전히 유럽 중심의 사유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비판적으로 인식할 필요도 있다. 비서구 문학은 단지 바흐친 이론의 사례가 아니라, 그것을 다르게 읽고 쓰는 공간이다.
젠더 서사 역시 바흐친 이론과의 긴장 속에서 중요한 전환을 보여준다. 바흐친은 여성주의 이론가들과의 직접적 접점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여성의 목소리가 전통적으로 배제되거나 단일한 남성 서사 속에 종속되었다는 점에서, 다성성 개념은 여성 주체의 복수화, 여성의 내적 불일치, 침묵과 말 사이의 권력 구조를 재구성하는 데 유효한 이론이 된다. 특히 여성 주체들이 발화할 수 있는 공간을 구성하거나, 남성 중심의 서사 구조를 해체하려는 문학에서 바흐친의 ‘이중언어’ 개념이나 ‘낮은 목소리의 반란’이라는 테마는 젠더 비평과 연결될 수 있다.
하지만 주의할 것은, 바흐친 이론이 성별, 계급, 인종의 물리적 불균형을 구조적으로 충분히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가 전제한 대화는 존재론적 평등성에 기초한 이상적 장면이며, 이는 현실의 권력 불균형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젠더 및 탈식민 서사에서 바흐친의 이론은 일방적으로 수용되기보다, 비판적 전유와 재사유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오히려 이론의 생명력을 지속시키는 길이 된다.
3) 바흐친 이론의 오늘적 의미
이상과 같은 논의를 바탕으로 할 때, 바흐친 이론의 오늘적 의미는 단순한 비평 도구나 분석 프레임을 넘어선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타자와 어떻게 관계 맺을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바흐친은 하나의 고정된 이론가가 아니라, 타자의 존재 가능성을 문학적으로 사유한 철학자이며, 그의 언어는 여전히 우리 시대의 윤리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오늘날 문학은 고통의 서사를 어떻게 전할 것인가, 역사적 트라우마와 공적 기억은 어떻게 다뤄져야 하는가, 목소리조차 지워진 존재를 어떻게 언어화할 수 있는가 같은 질문 앞에 놓여 있다. 바흐친이 말한 다성성과 카니발성은 이 질문들에 완전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닫히지 않은 대화로서의 문학, 책임을 지는 발화로서의 소설, 침묵을 포함하는 윤리로서의 서사라는 방향을 제시해준다.
이처럼 바흐친 이론의 오늘적 의미는 문학을 다시 타자성과 윤리의 자리로 호출하는 데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다성성은 여전히 살아 있는 사유이며, 지금도 다시 말해지고 다시 읽혀야 할 문학의 언어다.
VΙΙ. 결론
1. 한강과 쿤데라를 통한 바흐친 이론의 재조명
이 논문은 한강과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중심으로 바흐친의 다성성과 카니발성 개념이 현대 문학 속에서 어떻게 변용되고, 재맥락화되며, 재의미화되는지를 살펴보았다. 바흐친의 이론은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시학적 분석을 바탕으로, 권위적 진리의 단일성에 맞서는 복수의 의식, 서로 충돌하는 인식 구조, 그리고 웃음과 전복의 카니발적 언어를 강조한다. 그의 다성성 개념은 단지 서술 기법이나 인물 구성의 전략을 넘어, 문학이 타자와 마주할 수 있는 윤리적·존재론적 사유의 가능성으로 자리매김 되어왔다.
한강과 쿤데라는 각각 매우 다른 방식으로 바흐친의 이론을 문학적으로 실현한다. 쿤데라는 철저히 사유 중심의 철학적 다성성을 추구한다. 『농담』과 『불멸』에서 그는 체제의 권위적 언어를 해체하고, 인물들과의 경계를 허물며, 작가 자신을 서사 속에 적극적으로 개입시키는 방식으로 서사적 메타언어를 실현한다. 그는 인물의 독립된 의식을 보장하는 동시에, 유머와 아이러니를 통해 카니발적 전복을 수행한다. 이때 웃음은 단순한 풍자가 아니라 진지함을 무너뜨리고 진리를 상대화하는 윤리적 기호가 되며, 다성성은 다양한 사유가 공존하는 아이러니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반면 한강은 감각적 다성성을 구현한다. 『소년이 온다』에서 그녀는 언어가 결코 고통의 진실을 완전히 담을 수 없음을 전제한 채, 침묵과 몸의 반응, 기억의 파편을 통해 ‘말해지지 않은 것’을 문학적 언어로 드러낸다. 이때 다성성은 말의 다발이 아니라 발화하지 못한 목소리, 존재의 잔향을 통해 형성된다. 한강은 작가로서의 개입을 최대한 배제하며, 고통받는 자의 내면에 독자를 머무르게 하고, 해석보다 감응을 우선하게 만든다. 그녀의 침묵은 쿤데라의 유머처럼 권력의 언어를 전복하며, 말할 수 없음이 곧 문학의 언어가 되는 새로운 다성성의 장을 연다.
이처럼 두 작가는 바흐친의 다성성 개념을 단순히 반복하거나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문화적 맥락, 서사 전략, 윤리적 태도에 따라 재해석하고 실천함으로써 이론의 현재적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쿤데라는 다성성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과 자유를 철학적으로 사유하고, 한강은 다성성을 통해 역사적 트라우마와 윤리적 침묵을 감각적으로 응시한다. 두 작가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바흐친이 추구한 문학의 근원, 즉 열린 진실을 향한 대화의 가능성을 문학 안에서 구현하고 있으며, 바로 이 점에서 바흐친 이론은 오늘의 문학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사유로 기능한다.
이처럼 이들의 작품은 바흐친 이론이 지닌 형식적 유연성과 윤리적 밀도를 동시에 드러낸다. 쿤데라의 아이러니는 다성성을 유희적 사유로 확장시키고, 한강의 침묵은 다성성을 윤리적 감각으로 심화시킨다. 이 두 갈래의 실천은 바흐친 이론이 문학 속에서 어떻게 다양한 문화적 층위와 시대적 정서에 따라 변주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강과 쿤데라를 통해 조명된 바흐친 이론은 단지 20세기 러시아 문학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21세기 문학이 타자와 관계 맺는 방식, 문학이 진실에 도달하는 경로, 작가가 책임지는 서사의 윤리를 사유하는 데 여전히 유효하고 강력한 이론적 틀이 된다.
2. 비교 분석의 의의와 문학 연구에의 기여
한강과 쿤데라라는 두 작가를 바흐친 이론을 매개로 비교 분석한 이번 논문은, 문학의 다성성과 서사 구조를 해석하는 데 있어 문화적, 미학적, 윤리적 차원의 복합적 접근이 필수적임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이 분석은 단순히 두 작가의 유사성과 차이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학의 근본적인 존재 방식, 즉 타자와의 대면, 진실의 구성, 서사의 윤리에 대한 질문을 공유하고 실천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이런 점에서 이 비교는 바흐친 이론의 단순 적용을 넘어, 이론을 재맥락화하고 살아 있는 사유로 다시 활성화한 실천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먼저 한강과 쿤데라의 비교는 서사 형식의 차원에서 다성성 개념을 구체화하고 다양화하는 데 기여했다. 쿤데라의 서사는 이론 의식이 전면에 드러나는 철학적, 메타 서사적 실험을 통해 다성성을 구현하며, 유머와 아이러니로 체제와 존재의 진지함을 해체하는 ‘관념적 다성성’을 드러낸다. 반면 한강은 침묵, 고통, 감각의 층위에서 말해지지 않은 존재들의 발화 가능성을 탐색하며, 말로 환원되지 않는 진실의 윤리적 깊이를 통해 ‘감각적 다성성’을 구현한다. 이처럼 동일한 이론 개념이 작가의 문화적 배경, 시대적 경험, 서사적 지향에 따라 어떻게 변주되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낸 것은 비교 분석의 중요한 성과이다.
둘째, 이 비교는 바흐친 이론이 가진 해석학적 유연성과 문화적 한계 모두를 점검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쿤데라의 다성성은 바흐친의 원전 사유와 높은 친연성을 보이는 반면, 한강의 서사는 바흐친이 상정한 ‘발화 가능한 의식들 간의 대화’라는 범위를 넘어서, 침묵과 감응, 죽은 자의 시점, 말하지 않음의 윤리를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다성성 개념을 확장시킨다. 이로써 바흐친 이론이 비서구 문학이나 젠더 서사, 역사적 트라우마를 다루는 현대 문학에 적용될 때 어떠한 이론적 변용이 필요한지, 그 전제와 가능성에 대한 반성적 사유의 틀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바흐친 이론을 단순히 인용하거나 모방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실제 텍스트의 특수성과 대화하는 비평적 실천을 장려하는 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셋째, 이 비교 분석은 문학 연구가 단순한 ‘재현 분석’이나 ‘주제 해석’을 넘어, 문학과 철학, 윤리와 정치의 교차점에서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기능한다. 쿤데라와 한강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문학이 진실을 사유하게 만들며, 서사를 통해 타자와 마주하는 고유한 윤리적 지형을 구축한다. 이 과정에서 바흐친의 다성성과 카니발성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서사를 통과해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드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는 문학연구의 외연을 넓히는 동시에, 문학을 살아 있는 사유의 실천으로 되돌리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비교는 한국 문학을 단지 지역적 현상으로 보는 시각을 넘어서, 세계 문학적 비교 연구의 지평 안에 적극적으로 위치시키는 실천이기도 하다. 바흐친이라는 보편적 사유 틀을 통해 한국 작가 한강의 작업을 조망하는 이 분석은, 비서구 작가가 세계문학 담론에 어떻게 독창적으로 기여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시가 된다. 동시에, 쿤데라처럼 유럽과 이념의 경계에 위치한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문학이 국경을 넘어 어떻게 타자성과 윤리를 재구성할 수 있는지를 모색하게 한다.
요컨대, 이번 비교 분석은 바흐친 이론을 통해 쿤데라와 한강을 새롭게 읽는 동시에, 쿤데라와 한강을 통해 바흐친 이론의 지평을 다시 열어보는 쌍방적 해석의 공간을 창출하였다. 이 점에서 이 연구는 단순한 사례 적용이 아닌, 이론과 텍스트 사이의 창조적 교섭이자, 동시대 문학 연구가 나아가야 할 열린 대화의 한 형식으로 기여한다고 할 수 있다.
3. 향후 연구 방향 제언
바흐친이 사유한 다성성은, 애초부터 닫힌 이론 체계가 아니라 열려 있는 사유의 형식이었다. 그는 단일한 진리, 권위 있는 목소리에 맞서, 타자들의 복수 목소리가 대화와 충돌을 통해 살아 숨 쉬는 서사를 구상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텍스트의 생산과 독서 주체가 인간 중심에서 벗어나고 있는 전환의 국면, 곧 AI 시대의 문학을 맞이하고 있다. 이 시대에 바흐친의 이론은 여전히 유효한가? 혹은, 다성성은 인간 외부의 비의식적 기계 텍스트까지 포괄할 수 있는 유연성을 지니고 있는가?
AI 시대의 문학적 환경은 기존 문학 개념들의 전면적인 재검토를 요구한다. AI 텍스트 생성기, 언어 모델 기반 서사 구조, 독자 맞춤형 하이퍼서사, 그리고 인터랙티브 픽션 등은 작가와 독자, 창작과 해석, 이야기와 의미의 경계를 유동화하고 있다. 이 새로운 조건에서 다성성은 더 이상 ‘서사 내 인간 의식 간의 대화’에 머무를 수 없다. AI에 의해 생성되는 서사에는 흔히 정체성이 모호한 발화 주체들, 기계적 문법에 따라 조립된 대화, 비인격적인 발화 조각들이 넘쳐나며, 이들은 바흐친이 강조한 ‘자율적 인격의 음성’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조건 위에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에 바흐친의 다성성은 오히려 새로운 방식으로 재의미화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것은 이제 ‘의식 있는 주체의 발화’가 아니라, 발화의 조건 자체를 되묻는 이론, 대화와 인식의 불가능성을 사유하는 틀로 전환되어야 한다. AI가 구성하는 서사는 특정한 정체성을 가진 화자의 언어라기보다는, 수많은 말과 맥락, 사전 지식과 코드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익명의 다성이다. 이런 구조는 인간 의식의 자기 동일성에 근거한 바흐친의 이론과 충돌할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기계적 다성성이라는 새로운 층위의 대화 가능성을 열어준다.
AI 서사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것이 의식 없이 ‘다중적 발화 구조’를 구성한다는 점이다. 즉, AI는 의미를 이해하거나 책임지지 않으면서도, 의미를 흉내 내는 구조, 문체를 조합하는 양식, 다양한 시점과 음성을 교차시키는 서사적 기술을 구사한다. 이 점에서 AI가 생성한 텍스트는 바흐친이 말한 다성성의 기계적 재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바흐친에게 다성성은 단지 여러 목소리의 병치가 아니라, 각각의 인식 주체가 독립적이고 윤리적인 책임을 지닌 채 말하는 것이었다. 반면 AI는 윤리적 책임이 부재한 상태에서 다성성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문학 이론은 이 불균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질문은 단지 이론적 사변이 아니다. AI가 점점 더 정교한 창작을 수행하고, 인간과 기계가 공저자(co-author)로 등장하는 오늘, 문학 이론은 인간만의 사유, 인간만의 목소리에 기초한 해석에서 벗어나야 한다. 바흐친의 이론이 다시 필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문학을 대화의 장, 진실의 미완성성, 타자와의 끝없는 상호작용으로 규정했다. 이 개념은 AI 시대에도 유효하다. 단, 이제 그 ‘타자’는 인간의 얼굴만을 지니지 않는다. 기계적 타자, 비인격적 발화, 의미의 조각들을 수집한 서사적 알고리즘도 또 다른 종류의 대화의 주체로 등장한다.
앞으로의 문학 이론은 바흐친이 제안했던 다성성을 더욱 열어두어야 한다. 말하는 존재가 누구인가, 그 발화는 어떤 조건 아래 구성되었는가, 그것은 책임을 수반하는가, 발화와 수용은 어떤 경로로 연결되는가 같은 질문을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바흐친의 다성성은 ‘의식과 의식 간의 대화’에서 ‘존재와 존재 간의 구조적 상호관계’로 확장될 수 있다. 그것은 AI, 알고리즘, 데이터, 탈인간적 주체가 서사의 일부가 된 시대에 문학의 정체성을 다시 묻는 하나의 철학적 도구가 될 것이다.
또한, AI가 창작 주체로 등장하면서 작가의 권위와 정체성, 저작권의 개념, 작가와 인물 간의 거리 같은 고전적 문학 이론의 핵심 항목들도 모두 재정립되어야 할 시점이 도래했다. 바흐친이 강조한 ‘작가와 인물 간의 윤리적 거리’ 개념은, 이제 인간 작가와 기계 작가 간의 거리, 혹은 기계가 만든 인물에 대한 독자의 감응이라는 새로운 이론적 장으로 옮겨갈 수 있다. 이때 다성성은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경계 너머 존재들과 관계 맺기 위한 윤리적 태도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결국, AI 시대의 문학은 인간 중심의 문학에서 비인간적 타자와 공존하는 문학으로 이행하는 중이다. 그 세계 안에서 바흐친의 다성성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 유효성은 단지 반복적인 개념의 전유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보여준 사유의 열림, 진리의 미완성성, 타자에 대한 응답 가능성이라는 철학적 핵심이 새로운 조건 속에서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AI 시대의 문학 이론은 다성성을 다시 불러내야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다성성 속에 인간 이외의 목소리들까지 포함하는 감각의 언어, 윤리의 상상력, 철학의 예술로서 불러내야 한다.
VΙΙΙ. 연구 후기: 나의 인식 변화와 바흐친 읽기
1. 이론에서 삶으로: 바흐친을 다시 읽는 태도
이 논문을 쓰는 동안, 바흐친은 더 이상 텍스트 해석을 위한 하나의 ‘이론가’가 아니게 되었다. 처음 그를 접했을 때 나는 ‘다성성’, ‘카니발’, ‘이중 언어’ 같은 개념어에 주목했고, 그것들이 제공해 줄 수 있는 분석 도구로서의 유용성을 탐색했다. 그러나 한강과 쿤데라의 작품을 워낙 좋아하는 까닭에 예전의 기억들을 되살리며, 그들 속에서 바흐친적 요소들이 개념이 아니라 태도로 작동하고 있음을 발견한 이후부터, 나의 바흐친 읽기는 점차 이론에서 삶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다성성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그것을 하나의 서사 전략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성성을 존재를 대하는 태도, 타자를 대면하는 방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리를 유예하고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윤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바흐친은 문학을 통해 세계를 고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언제나 움직이는 중간 지점, 완성되지 않은 관계들, 미결의 상황 속에서 발화되는 진실에 주목했다. 이 윤리적 사유는 문학을 읽는 내 태도뿐만 아니라, 세상을 읽는 내 방식에도 점진적인 균열과 전환을 가져왔다.
한강의 작품 속, 말해지지 않은 것을 향해 귀 기울이는 것의 중요함을 배웠고, 쿤데라의 작품 속, 모든 진지함에 유머와 아이러니로 응답하는 작가적 태도를 되새기게 되었다. 그들 안에서 바흐친의 다성성은 고전적 개념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말하지 않음의 방식, 혹은 너무 많이 말함으로써 말의 무게를 해체하는 방식, 즉 극단적으로 다른 형식으로 구현된 동일한 사유의 태도였다. 이때 나는 ‘다성성’이란 것이 수많은 목소리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목소리에 의심을 거는 용기임을 깨달았다.
연구의 전 과정을 통틀어 가장 강하게 내 안에 남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나는 지금 어떤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가?”
“나는 이 글을 쓰는 동안 타인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고 있었는가?”
바흐친은 우리가 진정으로 타자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자신의 음성을 일시적으로 비워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사유는 단지 문학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무수한 목소리들이 동시에 말하는 소셜 미디어의 공간, 끝없이 단정하고 확신하는 언어들 속에서 바흐친은 오히려 속도를 늦추고, 듣고, 중첩되는 목소리 속에서 대화의 윤리를 회복하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 논문은 나에게 있어 문학 이론의 공부라기보다는, 하나의 사유 윤리와 만나는 과정이었다. 이론은 대상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론을 통해 자신을 의심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나는 이제 생각한다. 그래서 바흐친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단지 더 정교한 분석을 위한 도구를 갖추는 것이 아니라, 더 정직한 독자가 되는 일, 더 열린 존재가 되려는 연습, 그리고 말보다 듣기에 민감해지는 감각을 훈련하는 일이었다.
나는 여전히 이론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문학을 모두 읽지 못했으며, 진실의 전부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바흐친은 내게 그 모든 ‘못함’ 속에서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완결되지 않음이 곧 대화의 조건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이제 나는 이 이론을 다시 책상 위에 두기보다는, 삶의 언어 속에, 말하지 못한 이들과의 침묵 속에, 그리고 앞으로 쓰게 될 문장들 속에 새겨보려 한다.
2. 문학과 철학을 잇는 통로로서의 다성성
바흐친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그를 문학이론가로 이해했다. 다성성과 카니발성, 이중언어와 대화성 같은 개념들은 텍스트를 설명하기 위한 분석의 틀로 다가왔고, 그의 사유는 곧잘 ‘소설의 형식적 혁신’을 말하는 방식으로 수용되곤 했다. 하지만 한강과 쿤데라를 바흐친의 시선으로 다시 읽고 난 후, 나는 다성성을 더 이상 서사 구조에만 국한된 개념으로 읽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문학과 철학 사이에 놓인 다리, 감각과 사유 사이를 가로지르는 하나의 사유의 형식이자 태도의 언어로 다가왔다.
다성성은 단순히 ‘여러 목소리’가 공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일한 의미를 강요하지 않겠다는 철학적 결단이며, 해석의 완결을 유보하는 존재론적 선택이다. 바흐친은 단지 소설의 구조를 해명한 이론가가 아니라, 인간 존재가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을 끊임없이 물은 사상가였다. 그의 사유는 나로 하여금 문학을 다시 보게 했고, 나의 철학을 다시 쓰게 했다.
나는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어설픈 초짜 철학도로서 내 사유는 종종 너무 무거운 논리 속에 묻히거나, 너무 정교한 추상 속에 길을 잃곤 했다. 그런 나에게 문학은 사유에 온기를 부여하는 숨결이었다. 나는 언젠가 나의 철학적 사유를 소설이라는 형태, 혹은 철학적 에세이라는 언어로 옮기고 싶다는 오래된 소망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글이 누군가의 삶 속에서 작은 불꽃 하나, 혹은 촛불 하나만큼이라도 밝힐 수 있기를 바랐다. 바흐친은 이 소망의 방향을 정돈해주었다. 그는 ‘다성성’을 통해 나에게 묻고 있었다. 너는 어떤 목소리로, 누구를 향해, 어떤 책임으로 말하고 있는가?
한강의 침묵은 말보다 강했고, 쿤데라의 아이러니는 어떤 진지함보다 더 정직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다르게 말하는 법’을 실천하고 있었고, 그 다름 속에서 바흐친은 개념이 아니라 숨결처럼, 침묵과 웃음 사이를 떠도는 미세한 진동처럼 느껴졌다. 다성성이란 결국 내가 말하고자 하는 ‘나’가 단 하나의 언어로 구성되지 않음을, 그리고 그 언어는 타자와의 접촉 속에서만 살아날 수 있음을 고백하는 방식이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이론을 반복하는 일이 아니라, 어떤 세계에 귀 기울이겠다는 윤리적 약속에 가깝다. 철학은 나를 사유하게 했지만, 문학은 그 사유가 다른 이의 내면에 스며들 수 있는 온도를 고민하게 했다. 바흐친은 바로 그 경계에서 내 손을 잡은 존재다. 다성성은 글쓰기의 전략이 아니라, 글을 쓰는 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잠시 내려놓고 타자의 목소리를 기다릴 줄 아는 태도다. 나의 사유는 이제 그 기다림 속에서 문장을 세운다.
나는 여전히 확신보다는 의심에 가까운 언어로 글을 쓴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타자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누군가에게 단 하나의 문장이, 단 한 줄의 문학이, 단 한 번의 침묵이 삶을 견디게 하는 언어가 되듯이. 바흐친이 말한 다성성은 나에게 그런 글을, 그런 사유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문으로 열려 있었다. 그 문 앞에서 나는 오늘도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나의 문장을 준비한다.
3. 사유의 공간이자 윤리의 방식으로서의 문학
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이제 내게 있어 어떤 장르나 형식을 익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타자를 어떻게 대면하며, 나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 써 내려갈 것인지에 대한 하나의 윤리적 선택이자 존재의 방식에 가까운 일이 되었다. 바흐친은 문학을 ‘말의 실천’으로 보았고, 그 실천은 곧 타자와 맺는 응답 가능성의 관계로 작동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 문장을 더 이상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그 문장을 살아내고자 한다.
문학은 내게 사유의 공간이었다. 철학이 ‘왜’라는 질문을 끝없이 밀고 나가는 학문이라면, 문학은 그 질문이 말로 다 해명되지 못한 채 머무는 자리를 보여주는 언어였다. 바흐친은 이 간극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소설이라는 형식이야말로 ‘모든 것이 확정되지 않고, 끝까지 살아 있는 채 남아 있는 장소’라고 말했다. 나 역시 글을 쓸 때, 완결된 의미가 아닌 미완의 문장, 단정이 아닌 잠정적인 응시를 택하고 싶다. 그것은 이론의 부정이 아니라, 이론의 윤리적 확장을 위한 자리다.
바흐친의 다성성은 내게 ‘다양한 입장을 나열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하지 못한 자리에 귀 기울이라’, ‘의심할 수 있는 능력을 포기하지 말라’, 그리고 ‘자신의 말이 하나의 목소리에 불과함을 잊지 말라’고 속삭였다. 이 속삭임은 내 글쓰기의 기조가 될 것이고, 나아가 문학을 대하는 내 태도의 근간이 될 것이다. 이제 문학은 내게 어떤 감동이나 해석의 대상이라기보다, 존재를 감각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자, 살아 있는 자의 윤리로서의 말 걸기가 될 것이다.
내가 문학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것이 누군가의 삶을 바꾸기 위해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누군가의 삶에 불을 붙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말은 때로 아무 힘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깊은 침묵의 틈에 남겨진 한 문장이 한 사람의 마음에 오래 머무를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믿는다. 바흐친은 그러한 문장을 가능하게 만드는 언어의 형태를 사유했다. 다성성은 그 형태의 토양이고, 나는 그 안에서 언어를 길러내는 작은 정원사이고자 한다.
사유의 도구였던 문학은 어느덧 내 윤리의 방식이 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무엇을 말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들을 것인가’, ‘어떻게 기다릴 것인가’,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의 문제로 확장되었다. 이 논문을 쓰며 나는 질문하는 법을 배웠고, 멈추는 법을 배웠으며,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사이의 작은 간격에 귀 기울이는 훈련을 해왔다. 그것은 문학이 내게 준 가장 깊은 교육이자, 철학이 나에게 도달하고자 했던 세계의 방식이었다.
이제 나는 문학을 읽을 때마다, 그것이 말하고 있는 것보다 그 문장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어떤 타자의 가능성을 열고 있는가를 함께 듣는다. 그리고 내가 글을 쓸 때마다, 나 역시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나는 지금 누구를 향해 쓰고 있으며, 이 문장이 누구에게 말을 걸고 있는가? 바흐친의 다성성은 나에게 끊임없이 물음표를 남긴다. 이 문장은 하나의 목소리로 닫히고 있지는 않은가?, 이 말의 형식은 다른 말들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는가?
그 과정 속에서 문학은 나에게 단지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공간이 되었고, 더 나아가 윤리의 가능성을 체현하는 언어의 형식이 되었다. 나는 그 형식 안에서 나 자신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히 살아가고자 한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소설을 쓸 때, 그 문장들 속에서도 바흐친의 이론은 여러 목소리 사이를 서성이는 긴장, 침묵을 감지하는 감각, 완결을 유보하는 윤리적 기다림으로 살아 있으리라 믿는다. 나의 문학은 아마도 그 물음과 여백, 그 상호성의 공간에서 출발할 것이다. (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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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손정수. (2014). 「문학에서 다성성의 윤리와 이론: 바흐친을 중심으로」, 『인문과학연구』, 39, 89–117.
6. 한강. (2014). 『소년이 온다』. 창비.
7. 임우기. (2016). 『바흐친과 현대 소설 이론』.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8. 한강. (2016). 『흰』.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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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김지은. (2018). 「침묵의 서사와 윤리적 독서: 한강 『소년이 온다』에 나타난 다성성 연 구」, 『현대소설연구』, 69, 105–132.
11. 강수경. (2020). 『다성성과 윤리: 바흐친 문학 이론의 현재적 해석』. 민음사.
12. 이혜미. (2020). 「‘말해지지 않은 목소리’의 윤리: 『소년이 온다』의 바흐친적 독해」, 『현대 문학의 연구』, 84, 141–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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