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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창작들

(20화) 오후 네 시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5. 3. 14.

 

 

 

(20) 오후 네 시

 

그럼, 1998320일 편지 읽는다.”

지원은 무작정 편지 노트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그때, 지원은 아마 다섯 살쯤 되었을 것이다. 편지를 읽고 난 후, 지원은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자신이 예쁘다고 자랑하던 부분에 또 한 번 감동했다.

영숙씨, 내가 그렇게 예뻤어?”

지원은 할머니가 늘 우리 공주님, 우리 공주님, 흑진주 공주님이라 부르던 시절이 엊그제 같았다. 연약해진 할머니를 보니, 인생의 무상함이 실감났다. 할머니는 지원이 읽은 연애편지에 감회에 젖었는지, 눈곱 낀 눈가로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 지원은 자신이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 들킬까봐 모른 척하며 다음 편지를 읽었다.

1998323.

이 편지에는 대부분 지원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를 부르던 걸 녹음했다는 이야기였다. 언젠가 지원은 그때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들려주기 위해 녹음한 자신이 부르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돌아온 할아버지는 그 테이프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때까지 반복해서 들었다고 했다. 새삼 돌아가신 할아버지도 그리웠다. 비록 함께한 시간은 몇 년에 불과했지만.

다음 편지에는 갈매기의 꿈이라는 책 내용이 있었다. 책은 할머니의 보물 1호였다. 초등학교 시절, 할아버지에게 받은 책을 육십 년 가까이 간직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결혼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삼십 후반쯤, 할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한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음속에 어떤 남자를 품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살 수 있었을까? 결혼을 꼭 해야 했을까? 그토록 사랑했다면 기다려야만 하지 않았을까? 지원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번도 할머니에게 물어본 적은 없었다.

지원은 할머니를 내려다보았다. 너무 많은 편지를 한꺼번에 읽은 것 같았다. 낭독하는 지원의 목소리가 자꾸 잠기려 했다. 편지의 내용은 서안나, 즉 지원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였다. 할아버지는 지원의 엄마인 서안나를 6개월만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6개월 뒤 한국에 돌아오면 결혼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할머니는 7년을 기다린 끝에 서안나를 데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고 했다.

서안나는 남태평양 키리바시에서 온 소녀였다. 햇살에 반짝이는 듯한 금빛이 섞인 피부, 어깨 위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은 끝자락이 살짝 웨이브를 이루었다. 푸른 바닷빛을 머금은 눈동자, 키리바시의 끝없는 바다와 하늘을 보는 듯했다는 표현이 펼쳐져 있었다. 서안나는 사람들 앞에서는 부드럽고 조용했지만, 그녀의 눈빛 속에서 감춰진 감정은 할머니도 쉽게 읽을 수 없었고, 그 눈빛은 때로는 지나치게 무겁고, 때로는 고요한 바다처럼 깊어서 그녀가 입을 열면, 그 소리는 달콤하고 부드럽지만, 말 속에 담긴 뜻은 언제나 미묘하게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며, 할머니의 글 속에 신비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할머니는 단지 누구에게도 키리바시에서 온 그 소녀인 서안나를 뺏기고 싶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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