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오후 네 시
아이들을 좋아해서 시작한 돌봄 활동은 의외로 적성에 잘 맞았다. 가끔 부모님들이나 친구의 소개로 새로운 아이들을 맡게 되기도 했다. 이번 주 일요일에는 초등학교 1학년과 3학년 자매를 처음 돌보게 되었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정기적인 일이 아니라 보수가 더 후했다. 아이들과 즐겁게 놀아주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엄마와 아빠가 약속이 있는 동안 대학생 언니가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에 지원은 선뜻 수락했지만, 첫 대면은 언제나 설렘과 긴장이 공존했다.
“서지원 씨?”
약속된 장소인 롯데리아에 들어서자, 밝은 목소리가 지원을 불렀다. 아이들의 엄마는 예상과 달리, 삼십 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젊고 세련된 여성이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두 아이도 덩달아 지원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예상치 못한 환영에 지원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졌다. 아이들은 자신들을 책임질 언니를 향한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였다.
“아, 네. 안녕하세요. 서지원입니다.”
“그래요. 지원 씨, 우리 꼬마 공주님들 잘 부탁해요.”
지원은 아이들의 이름을 물었다.
“아, 이름이?”
그러자 예상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신비롭게 흐르는 강물에 비치는 아침 햇살.”
“새벽 별빛이 잠드는 숲을 깨우는 이른 아침.”
순간 지원은 말을 잃었다. 단순히 이름을 물었을 뿐인데, 아이들은 마치 시를 읊듯 대답했다. 당황한 표정을 짓자 아이들이 웃었다. 엄마는 아이들을 향해 장난스러운 얼굴을 짓더니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듯한 신호를 보냈고, 아이들도 따라 하며 쉬- 하는 소리를 냈다.
“놀라지 마세요.”
엄마가 웃으며 설명했다.
“이 아이들의 본명이에요. 평소에는 줄여서 신아, 새아라고 부르면 돼요.”
지원은 신아와 새아라는 이름을 속으로 몇 번 되뇌었다. 이렇게 특별한 이름을 지어준 부모라면 보통 사람들은 아닐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긴장감이 몰려왔다. 엄마는 단호하면서도 간결하게 말했다.
“들었죠?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저녁 7시까지 우리 공주님들과 놀아주시면 돼요. 아이들이 하고 싶은 걸 함께해 주고, 점심과 저녁도 아이들이 먹고 싶어 하는 걸로 사주시면 돼요. 끝나면 여기로 다시 데려오면 되고요.”
아이들의 엄마는 신용카드 한 장과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이걸로 식사와 간식비를 계산하고, 봉투에는 약속된 금액이 들어 있어요.”
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아이들을 맡기면서 신용카드까지 건네는 엄마. 게다가 선불로 돌봄 비용까지 지불하는 쿨한 태도. 신뢰가 고맙기도 했지만, 낯설고 어색했다.
그녀는 소도시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겼다. 단정하게 묶은 긴 머리, 은은한 광택이 도는 실크 블라우스, 손목에 가볍게 걸친 얇은 골드 체인 팔찌까지 모든 것이 세련된 감각이었다. 작은 명품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가방을 자연스럽게 들고 있었고, 목소리에는 조용하지만 단호한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마치 이런 상황이 너무나 익숙하다는 듯, 모든 것이 이미 계획된 흐름처럼 흘러갔다.
지원은 문득, 그녀가 단순히 외적인 세련됨뿐만 아니라 생활 방식 자체가 자신이 아는 평범한 부모들과는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특히 아이들을 맡기는 방식이 무척 효율적이고 간결했다. 마치 비즈니스 미팅을 주선하듯 깔끔하게 거래를 마무리하는 모습에 어딘지 모르게 거리감이 느껴졌다.
지원이 머뭇거리는 사이, 아이들은 어느새 그녀의 손을 양쪽에서 꼭 잡았다. 신아와 새아 역시 어머니에게서 풍기는 세련미를 닮아 있었다.
아이들은 또래에 비해 유난히 단정한 인상을 풍겼다. 신아는 긴 머리를 반듯하게 빗어 넘겨 반묶음으로 고정했고, 새아는 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한 모습이었다. 그들의 옷차림은 평범한 캐릭터 티셔츠나 트레이닝복이 아닌, 은은한 파스텔 톤의 원피스와 가디건으로 차분하게 스타일링되어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흔한 대형마트 브랜드가 아닌 고급스러운 느낌이 묻어났다.
더욱이 아이들의 태도 역시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다. 보통 이 또래의 아이들이라면 처음 만난 어른에게 낯을 가리거나, 혹은 장난기 넘치는 행동을 할 법도 한데, 신아와 새아는 마치 어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법을 배운 듯한 태도를 보였다. 말투는 또렷하고 차분했으며, 손을 잡는 방식마저 조심스러웠다.
“언니, 이제 어디 가?”
신아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새아도 기대에 찬 얼굴로 지원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의 표정에는 분명 설렘과 호기심이 가득했지만, 그 안에 어딘가 자연스럽게 배어든 단정함이 있었다. 마치 철저하게 예의를 갖춰 교육받은 듯한 느낌이었다. 지원은 순간, 이 아이들도 어머니처럼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 어디부터 갈까?”
지원은 아이들의 손을 꼭 잡은 채, 천천히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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