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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창작들

(11화) 오후 네 시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5. 3. 5.

 

 

 

 

 

(11) 오후 네 시

 

 

왜요, 교수님. 분명 기억하고 계시겠죠. 그날 교수님과 스치듯 마주쳤던 눈빛을 제가 어떻게 잊겠어요? 지금도 생생해요. 교수님의 머리칼 색, 어쩐지 달콤하게 느껴지던 담배 냄새, 그리고 스웨터와 아쿠아 블루빛 스카프까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지원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슴이 떨려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 자네를 만나고 난 후, 나는 집에 돌아와 폴 고갱의 화첩을 펼쳤다네. 그리고 고갱의 연인, 테후라를 보았지. 문득 생각이 들었네. 자네가 테후라였어.”

이교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날 밤, 나는 테후라를 만난 기념으로 고갱의 화첩 겉표지에 짧은 글을 남겼다네. 가끔씩 그 화첩을 들춰보다 보니, 어느새 외워버렸어. 내가 실없는 사람처럼 보이나?”

지원은 걸음을 멈췄지만 그의 눈길을 마주할 수 없었다.

아니에요.”

사실 그녀도 며칠 전 고갱의 화첩 속에서 테후라를 본 적이 있었다. 할머니가 어릴 적부터 자신을 흑진주 테후라라고 불렀던 기억까지도. 그러나 이 모든 우연의 무게가 갑자기 버겁게 느껴졌다. 입을 열고 싶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원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교수도 덩달아 침묵에 잠겼다.

둘은 나란히 걸었다. 앞쪽으로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 교수님. 집에 가시려면 어느 쪽으로 가세요?”

지원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 이쪽일까, 저쪽일까?”

이교수는 아이처럼 웃었다. 지원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음 정류장까지만 나랑 같이 걸어주겠나?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알 때까지 말이야.”

지원은 피식 웃었다. 마치 떼쓰는 유치원생 같았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이 교수도 따라 웃었지만, 그 웃음에는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묻어 있었다. 그 쓸쓸함이 이상하게도 지원의 마음을 흔들었다.

제가 좀 피곤해서요.”

그의 곁을 떠나고 싶어 핑계를 댔다.

그럼…… 다음 정류장까지만.”

이 교수의 간절한 눈빛에, 지원은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 교수는 갑자기 멈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원도 무심코 따라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름이 지나갔건만, 밤하늘엔 별이 쏟아질 듯 빼곡하게 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총총한 별빛 아래를 말없이 걸었다. 다음 정거장도, 그다음 정거장도 지나쳤다. 목적지도 없이, 오직 발길이 가는 대로.

어느덧 은파 호수 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참 이상했다. 그저 함께 걸었을 뿐인데, 방향조차 신경 쓰지 않았는데, 어느새 이곳까지 와 있었다. 저 멀리서 티티카카의 불빛이 보였다.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이 밤공기에 스며들었다. 둘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티티카카의 계단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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