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오후 네 시
“왜요, 교수님. 분명 기억하고 계시겠죠. 그날 교수님과 스치듯 마주쳤던 눈빛을 제가 어떻게 잊겠어요? 지금도 생생해요. 교수님의 머리칼 색, 어쩐지 달콤하게 느껴지던 담배 냄새, 그리고 스웨터와 아쿠아 블루빛 스카프까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지원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슴이 떨려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 자네를 만나고 난 후, 나는 집에 돌아와 폴 고갱의 화첩을 펼쳤다네. 그리고 고갱의 연인, 테후라를 보았지. 문득 생각이 들었네. 자네가 테후라였어.”
이교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날 밤, 나는 테후라를 만난 기념으로 고갱의 화첩 겉표지에 짧은 글을 남겼다네. 가끔씩 그 화첩을 들춰보다 보니, 어느새 외워버렸어. 내가 실없는 사람처럼 보이나?”
지원은 걸음을 멈췄지만 그의 눈길을 마주할 수 없었다.
“아니에요.”
사실 그녀도 며칠 전 고갱의 화첩 속에서 테후라를 본 적이 있었다. 할머니가 어릴 적부터 자신을 ‘흑진주 테후라’라고 불렀던 기억까지도. 그러나 이 모든 우연의 무게가 갑자기 버겁게 느껴졌다. 입을 열고 싶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원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교수도 덩달아 침묵에 잠겼다.
둘은 나란히 걸었다. 앞쪽으로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저, 교수님. 집에 가시려면 어느 쪽으로 가세요?”
지원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음…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 이쪽일까, 저쪽일까?”
이교수는 아이처럼 웃었다. 지원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음 정류장까지만 나랑 같이 걸어주겠나?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알 때까지 말이야.”
지원은 피식 웃었다. 마치 떼쓰는 유치원생 같았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이 교수도 따라 웃었지만, 그 웃음에는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묻어 있었다. 그 쓸쓸함이 이상하게도 지원의 마음을 흔들었다.
“제가 좀 피곤해서요.”
그의 곁을 떠나고 싶어 핑계를 댔다.
“그럼…… 다음 정류장까지만.”
이 교수의 간절한 눈빛에, 지원은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 교수는 갑자기 멈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원도 무심코 따라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름이 지나갔건만, 밤하늘엔 별이 쏟아질 듯 빼곡하게 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총총한 별빛 아래를 말없이 걸었다. 다음 정거장도, 그다음 정거장도 지나쳤다. 목적지도 없이, 오직 발길이 가는 대로.
어느덧 은파 호수 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참 이상했다. 그저 함께 걸었을 뿐인데, 방향조차 신경 쓰지 않았는데, 어느새 이곳까지 와 있었다. 저 멀리서 ‘티티카카’의 불빛이 보였다.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이 밤공기에 스며들었다. 둘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티티카카’의 계단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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