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오후 네 시
낯선 대학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원에게, 이 교수와의 인연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그저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서 어쩌다 눈도장을 찍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반경 안으로 들어서게 된 것일까. 아니면 어차피 스쳐 지나갈 운명이었기에,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을까. 그러나 실상은 거꾸로였는지도 모른다. 지원이 이교수의 영향 아래 놓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교수가 지원의 마음속을 어슬렁거리며 거닐고 있었는지도.
"어이, 서지원. 자네는 뭘 하나? 이럴 때 함께 마셔주는 것이 예의 아닌가. 설마 내숭을 떠는 것은 아니겠지?"
이미 혀끝에 취기가 오른 이교수가 주전자를 번쩍 들어 올리며 지원을 향해 웃었다. 어서 잔을 받아들고, 그 잔을 자신을 위해 채워주라는 은근한 압력이었다. 지원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주춤거리다 결국 잔을 내밀었다. 그러자 이교수는 잔이 넘치도록 막걸리를 따랐다. 주저할 틈도 없이 지원은 잔을 들어 단숨에 털어 넣었다. 부원들은 그런 지원의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다 이내 다시 저희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지원은 비어낸 잔에 다시 막걸리를 가득 채워 이교수에게 내밀었다. 이교수는 만족스럽다는 듯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다시 한 번 건배를 외쳤고, 술잔이 돌고 돌며, 부어라 마셔라 흥겨운 술판이 무르익었다.
어디선가 노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순간, 이교수 또한 흥이 오른 듯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구성지게 뽑아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어딘가 낯설면서도 묘하게 익숙했다. 지원은 알딸딸한 기분으로 이교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얼핏 스친 눈길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흠칫 놀란 지원은 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조용히 가방을 챙겨 자리를 떴다.
몇 잔 마시지 않았는데도 얼굴이 달아오르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몸이 흐트러지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평소의 주량을 떠올리면 고작 반도 채 마시지 않은 터였다. 그런데도 취기가 몇 갑절로 밀려왔다. 더는 그 자리에 머물 수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가을바람이 차갑게 스며들었다. 지원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옷깃을 여몄다. 술과 담배가 뒤섞인 냄새가 속을 울렁이게 만들었다. 그저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버스 정류장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서지원, 누구하고 약속이라도 있나?"
낯익은 목소리가 바싹 옆에서 들려왔다. 지원은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뭘 그렇게 놀라나? 내가 뭐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은가?"
이교수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자연스럽게 지원의 옆으로 걸음을 맞추었다. 지원의 가슴이 알 수 없는 떨림으로 가득 찼다. 자신의 속내를 들켜버린 건 아닐까, 얼굴이 더욱 뜨거워졌다.
"서지원, 내숭. 자넨 나를 알고 있었지? 우리, 만난 적 있지 않은가? 입학하기 전에."
지원의 가슴에 마치 종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남내리 서재."
그 한마디에 지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어둠 속에 박제된 기억을 더듬었다.
"나는 흙진주 테후라를 보았네.
유황빛 눈을 가진 테후라.
그녀 안의 꿈틀거리는 알 수 없는 신비.
그 태고의 신비 속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나란히 걷고 싶네.
알 수 없는 우주의 정령들이 춤추는
태고의 신비 속을 걸어,
마침내 나는 테후라를 만났다네."
갑자기 이교수는 마치 술에 취한 시인처럼 읊조렸다. 그것이 시인지 넋두리인지, 혹은 오래전 기억의 단편인지 알 수 없었다.
"서지원, 이 년 전 겨울, 자네가 고등학교 이학년이던 때였지. 남내리 박 선생의 서재에서, 그때 자네를 처음 보았네. 자네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겠지만."
지원은 당황했다. 아니, 단순한 당황이 아니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야릇한 쾌감이 일렁였다. 어딘가 아득하고 불분명했던 기억이, 한 순간 선명한 형상을 띠고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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