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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창작들

(8화) 오후 네 시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5. 3. 2.
 
 


(8화) 오후 네 시

약속된 장소에 도착하자 실내는 아직 적막에 잠겨있었다. 이른 시간이었는지, 익숙한 얼굴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충 맞춰진 긴 테이블 끝에 앉자마자, 문이 열리며 일 학년 동기 셋이 왁자지껄한 기운을 몰고 들어왔다. 곧이어 선배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고,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자리를 채우자, 조교를 대동한 이 교수가 천천히 등장했다.
그는 분홍빛 셔츠에 진초록 계열의 바지를 걸치고, 그 위에 같은 톤의 농구화를 신었다. 언제나처럼,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 화려한 차림새였다. ‘패션계의 왕자’라는 별명이 허울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는 듯했다. 젊음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학생들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가진 생기와 기백에 가까웠다. 흐뭇함과 선망이 한꺼번에 밀려와 지원을 압도했다. 그리고 그 틈새에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은밀한 쾌감이 서서히 그녀를 당혹케 했다.
“자, 오늘은 새로운 학기를 맞아 학교 신문의 발전을 위한 의견을 나누고, 부원들의 단합을 도모하기 위해 교수님께서 특별히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반가운 소식을 전하게 되어 기쁩니다. 지난봄, 여러분의 노고 덕분에 마침내 교수님의 사진첩이 발행되었습니다. 더불어 서울 인사동,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의 거리인 인사 아트센터에서 내년 봄, 교수님의 전시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편집장의 높고 또렷한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순간, 부원들의 박수와 환호가 우레처럼 터져 나왔다.
“아, 이쯤에서 우리 모두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수님의 소감과 앞으로의 각오를 들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편집장은 익살스럽게 분위기를 띄우며, 이 교수의 반응을 유도했다. 부원들의 눈빛은 존경과 선망으로 촘촘하게 엮여 그를 향했다. 이 교수는 자리에 앉은 채, 하나하나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모다, 지랄 떨지 말고 술이나 마시지. 폼 잡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내가 몇 번을 말했나? 이런 격식 따위, 허례허식에 불과하다고. 말도 낭비하지 말라고, 이 년이 넘도록 그렇게 강조하고 또 강조했건만.”
좌중을 두리번거리던 그의 얼굴에는 어딘지 모를 떨떠름한 기색이 스쳤다. 편집장은 순간 당황한 듯했으나, 이내 익숙하다는 듯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에이, 교수님. 오늘만큼은 귀한 자리 아닙니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의 말꼬리를 붙잡듯 여기저기서 ‘교수님, 교수님’ 하는 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이 교수는 잠시 침묵했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한마디로, 젊은이답게 화끈하게 살아.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게. 카르페 디엠. 오늘의 한 마디, 알겠나?”
마치 기다렸다는 듯, 부원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일제히 외쳤다.
“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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