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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창작들

(7화) 오후 네 시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5. 3. 1.

 

 

 

 

할머니의 병실을 나서며 지원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침대 맞은편에 걸린 고흐의 ‘낮잠’ 복사본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왜 고흐는 밀레의 ‘오후 네 시’를 모작했을까. 그리고 왜 할머니는 평생 꿈꾸었던 그 그림 같은 삶을 끝내 현실로 그려내지 못했을까. 생각할수록 가슴 한편이 저릿이 시려왔다.

약속된 장소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지원이 꿈꾸는 미래라는 그림 또한 자신의 손끝에서 그려질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가슴을 채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할머니의 부재였다. 만약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난다면, 지원은 끈 떨어진 연처럼 끝없이 부유하는 운명에 놓일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우주의 어둠 속에서 먼지처럼 떠도는 삶, 그 고독과 공허가 다시금 지원을 짓눌렀다.

지원은 태어나 채 사흘이 지나기도 전에 할머니의 품으로 안겨졌다. 엄마가 되어준 할머니 덕에 오래도록 ‘엄마’라는 존재 자체를 의식하지 않았다. 그러다 초등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세상에는 할머니가 아닌 다른 ‘엄마’들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원에게 가족이란 오롯이 할머니 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서용수 할아버지가 찾아와 비로소 셋이 되었고, 몇 해 지나 할아버지가 떠나면서 다시 둘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할머니마저 저 세상으로 가버린다면……

매주 병원을 찾을 때마다 할머니는 한 줌 바람처럼 점점 쇠약해져갔다. 지원의 가슴은 말할 수 없이 허전했다. 주민등록증을 갓 받아든 성인이었지만 여전히 자신을 온전히 품어줄 누군가가 절실했다. 그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자신에게 흘러넘치는 사랑의 에너지를 온전히 받아줄 단 한 사람이 필요했다. 무조건적인 내 편, 이유 없이 곁에 있어줄 존재, 그것은 본능 같은 것이었다. 만약 가까운 이가 아무도 없다면, 자신의 삶이 얼마나 텅 비어버릴지를 상상하는 것조차 견딜 수 없었다.

계절은 어느새 여름의 잔열을 거두고, 가을바람을 들여놓았다. 한낮엔 여전히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다가도, 저녁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서늘한 바람이 옷깃을 스쳤다. 지평선 너머로 기울어가는 해는 서둘러 어둠을 몰고 와, 땅거미는 마치 우사인 볼트처럼 질주했다. 불안감이 조용히 지원의 마음을 짓누르는 한편, 알 수 없는 설렘도 스며들었다.

그 감정은 마치 할머니가 부르던 “지원아”라는 목소리가 길게 연기처럼 피어오르던 순간과도 같았다. 처마 끝에서 바라보던 잿빛 구름이 점점 무거워지다 마침내 하얀 눈송이로 내려앉는 순간과도 같았다. 억수처럼 쏟아지던 소나기가 거짓말처럼 멎고, 하늘 끝 어딘가에 아련한 무지개가 걸리는 찰나와도 같았다. 그리하여 지원의 가슴속에는 은밀하고도 서늘한, 어딘지 모르게 나른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이었으나, 그럼에도 분명 존재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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