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오후 네 시
지원은 할아버지가 건너뛴 문장들 사이에서 그날의 공기를 더듬었다. 미처 말하지 못한 숨결과 잊힌 단어들을 따라가며, 그 시간이 품고 있던 온기를 떠올려 보았다.
"영숙, 당신에게.
영숙, 오늘도 당신을 생각하오. 창가에 기대어 바다를 바라보면, 당신의 눈동자가 자꾸만 겹쳐 보이오. 어린 시절에도, 그리고 지금도 변함없이, 나는 당신을 처음 마주한 순간을 기억하오. 그때 나는 내 안에 이런 감정이 존재한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소. 당신과 헤어지고 서울로 올라가던 날, 나는 어리석게도 사랑이란 것이 예측 가능한 줄로만 알았지요. 출세하면, 당신이 준 볼펜으로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된다면, 반드시 다시 만나겠다고 다짐했소. 하지만 떠나는 날, 도서관 창가에 서있던 당신을 학교 담벼락 뒤에서 오래도록 바라보았을 뿐, 나는 한 걸음도 더 내디디지 못했소. 뜨거운 눈물이 가슴을 적셨지만, 그저 조용히 돌아섰을 뿐이오.
성인이 되어 당신을 다시 마주할 때마다, 나는 흔들렸소. 당신이 웃을 때마다, 당신이 말을 건넬 때마다, 내 안의 온 세계가 출렁였소. 그 시절, 당신의 손을 붙잡고 싶었으나 차마 그러지 못했소. 당신이 내게 미소 지을 때마다, 혹여나 내가 너무 욕심을 내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던 것이오. 그러나 지금 이 편지를 쓰며 후회하오. 왜 조금 더 용기를 내지 못했던가.
영숙, 당신은 내게 어떤 사람이오? 나는 바람이 부는 날에도, 비가 내리는 밤에도 당신을 떠올리오. 마치 오래전부터 정해진 운명처럼, 나는 언제나 당신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소. 당신도 알고 있소? 당신은 내 인생의 가장 찬란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오, 우리가 처음 손을 맞잡았던 날? 당신의 손끝이 내 손등을 스칠 때, 나는 모든 것이 멈춰버린 줄 알았소. 당신의 체온이 내 손바닥에 스며드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조금 더 오므렸소. 혹여나 당신이 날 밀어낼까 두려우면서도, 간절히 바랐소. 제발,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나는 알고 있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나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내 삶에 영원히 남을 것이오. 영숙, 부디 이 편지를 받고도 내게 미소 지어주겠소? 오늘은 편지로만 전하지만, 언젠가 직접 당신의 귀에 속삭이고 싶소.
영원히, 당신의 용수.“
지원은 할아버지가 읽지 않은 문장들이 이런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았을까. 편지를 쓰던 날,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리고 다시 낭독할 때, 차마 끝까지 읽지 못하고 멈춘 순간, 어떤 감정이 밀려왔던 것일까. 지원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치 할아버지가 머물던 그 시절로 되돌아간 듯, 편지의 잔향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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