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애독자 이기 이전에 애서가이다. 서가를 마주하고 글을 쓰다가 지루할 때면, 나의 눈길은 늘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에게 다가간다. 꽃혀있는 책의 제목만 읽어도 행복하다면, 분명 나는 애서가이다. 그들 중 100 여권쯤은 아직도 읽히지 못한 채 언젠가 자신이 간택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 기다림도 인연일까? 마구 사들이던 플라톤의 책들을 어느 순간 모두 읽어버리는 참사를 벌였던 날들의 기쁨도 있더라. 과연 내 머릿속에 무엇이 남아 있을지 의문이지만, 여하튼 일정 기간동안 플라톤을 사랑했다는 성취감이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이고 이건 바로 책과 나, 플라톤과 나, 철학과 나의 상호작용을 통해 내 글 속에 어떤 식으로든 무늬를 남기리라 생각하니, 자꾸만 헛웃음이 꼬리를 문다.
이번 겨울 방학 동안 여유 있는 시간에 각 700페이지에 달하는 책 두 권을 편집했다. 하루에 4, 5시간을 집중해 그 결과물을 만들었다. 도저히 컴퓨터로 교정을 볼 수가 없어서 일단 인쇄를 맡겨, 인쇄본으로 교정할 계획이다. 나의 수고로움이 결과를 만들어낸 것을 축하한다는 의미로 나에게 ‘특별상’을 주었다. 그동안 사고 싶은 목록에 남겨두었던 책들을 질러 버리고 말았다.
1, 2. [세트] 더 좋은 문장을 + 더 나은 어휘를 쓰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책, 이주윤 지음
3. 나의 집이 점잖게 피를 마실 때, 박해수 지음
4. 도파민네이션 - 쾌락 과잉 시대에서 균형 찾기 애나 렘키 지음, 김두완 옮김
5.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지음, 황가한 옮김
6. 아비투스 (양장), 도리스 메르틴 지음, 배명자 옮김
7. 프란츠 카프카 (서거 100주기 특별판), 프란츠 카프카 (지은이),박병덕 (옮긴이)
8. 기다림 망각, 모리스 블랑쇼 지음, 박준상 옮김
9. 문학의 공간, 모리스 블랑쇼 지음, 이달승 옮김
10. 우정, 모리스 블랑쇼 지음, 류재화 옮김
11. 저 너머로의 발걸음, 모리스 블랑쇼 지음, 박영옥 옮김
12. 최후의 인간, 모리스 블랑쇼 지음, 서지형 옮김
13. 카오스의 글쓰기, 모리스 블랑쇼 지음, 박준상 옮김
14. 카프카에서 카프카로, 모리스 블랑쇼 지음, 이달승 옮김
35인의 현대 철학자들을 개관하는 책을 편집하면서, 블랑쇼의 글을 너무 읽고 싶어져서 7권의 블랑쇼의 책을 샀다. 그리고 2025년 군산대 독서모임 ‘필담’이 함께 읽을 책 5권, 여기에 충분하지 못한 나의 글쓰기 실력을 고취시키기 위해 2권을 더해 총 14권을 질러버렸다. 왜 이리 흥분되는지. 책의 제목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들뜨고, 행복하고, 기대에 부풀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누군가를 마침내 만난 듯한 기분. 손끝에 스치는 활자의 감촉이 먼저 와닿는다.
책이 도착하는 날, 나는 신중한 사냥꾼처럼 상자를 열고, 한 권 한 권 손에 들며 그 무게를 가늠했다. 낯선 문장들이 펼쳐지기 전의 긴장감, 책장을 한 장 한 장 펼치며, 냄새를 맡고, 숨을 고르며, 차츰 익숙해지는 리듬.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책들이 나를 찾아왔을까, 아니면 내가 그들을 찾아갔을까. 책과의 인연은 언제나 그렇게 우연처럼 다가와 필연처럼 남을 것이다.
책을 펼치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독서가 아니다. 그것은 문장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 활자와 활자 사이를 유영하는 일, 사유와 감각이 한데 뒤섞여 새로운 무늬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블랑쇼의 글이 그러하듯, 그의 문장이 나의 문장을 만들고, 그의 사유가 나의 사유에 파문을 일으키는 순간을 나는 기다린다. 그의 문장들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른 채, 나는 이미 그 세계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니 나는 아직도 서가 앞에서 행복하다. 읽히지 못한 책들이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다. 어떤 책은 오랫동안, 어떤 책은 짧은 시간 동안, 하지만 결국에는 모두 나의 문장 속에서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런 믿음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믿음을 안고 다시금 책을 펼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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