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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24년도 1학기 고대서양철학사 기말 고사 요약본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4. 6. 15.

 

 

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초짜 철학도의 분투기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대화하는 방법

- 아이 낳는 걸 도와주듯이, 네 안에 품고 있는 진리를 낳도록 도와주마!!!

- 산파는 아이를 직접 낳지 않는다.

- 그도 지혜를 직접 제시해 주지 않고, 대화를 통해 “그의 잘못을 지적함으로써” 스스로

깨닫도록 도와줄 뿐이다.

- 산파술은 틀렸음을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 스스로 사유의 과정을 거쳐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하는 방법이다.

 

2.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배경: 소크라테스가 사형 선고 받게 된 이유

1) 정치적 이유: 친스파르타(30인 과두정) 정권에 협력한 자이다.

- 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 연합군의 분열: 스파르타 <-> 아테네 (B.C.431-404, 펠로폰네소스 전쟁)

- 스파르타 승리: B.C.404년 아테네에 1년간 친스파르타 정권 들어섬.

(30인 과두정 ­ 민주파 시민 1000~1500명 학살 사건)

- 소크라테스의 재판(70세, B.C.399년): 회복된 민주정 / 과두정의 수괴.

2) 철학적 이유: 당대 지식인들에게 ‘공공의 적’이 된 상황.

- ‘산파술’의 예상치 못한 결과.

- 보통 사람들은 단점을 지적해 주면, 겸허히 받아들이지 않고 화를 낸다. 반성의 계기가

아니라, 공격받아 불쾌한 셈이다.

- 소크라테스의 경우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는 대화법 탓에 적지 않은 적을 만들어냈다.

- 소크라테스의 고발인 3명: 정치가와 기술자(아뉘토스), 시인(멜레토스), 변론가(리콘)

[국회의원과 과학자, 문화예술인, 법조인]

3) 대중적 이유: 소피스트 중 하나로 혼동

“소크라테스는 ① 지혜로운 사람으로, ② 더 약한 논변을 더 강한 논변으로 만드는 자이며, ③ 젊은이들을 망치고(타락시키고), ④ 국가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신령한

것들을 믿음으로 해서 불의를 행한다.”

- 소크라테스 고발 내용과 소피스트들에 대한 대중의 평판 일치. (아리스토파네스, 구름)

 

3. 소크라테스츼 죽음과 혼의 불멸설

Q. “도대체 소크라테스는 죽음이 왜 기쁜가?”

죽음이란?: 영혼과 몸이 분리되어, 영혼만 남는 사건. 인간은 ‘몸’이 아니라 ‘영혼’이다. [감옥 에 갇힌 사람]

영혼이 본질적인 부분이고, 몸은 우연적인 부분

우연적인 부분들의 소멸이 인간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혼은 죽음 이후 사라지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은 (감옥에 갇혀 있던 자가 풀려나듯) “몸으로부터 영혼이 풀려나서 깨끗해지는 사건”이다. 죽음은 좋은 것이고,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 사형이 집행되어(독약을 먹고) 죽음을 기다리는 소크라테스.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마리를 빚졌네.”

의술의 신에게... 죽음은 삶이라는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이니, 감사의 제사를 바쳐라.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소크라테스.

 

4. 소크라테스의 산파술(논박술)의 의미

① 상대방의 믿음(들)이 가진 비일관성(서로 모순됨)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무지를 깨닫

도록 도움을 주는 일. => 영혼의 치유술. (논박의 과정이 곧 ‘너 자신(의 상태)을 알게’

하는 과정)

② 혼의 치유자. 혼의 ‘의사’: 대개 몸이 아프면 병원을 찾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혼이 아 플 때는 아픈 것조차 모를 뿐만 아니라 설사 안다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③ 논박술의 절차

ⓐ 자신은 무지한 주제에 대해 ‘그것(용기, 경건, 절제, 정의...)은 무엇인가(ti­esti)?’라는 정의 물음을 대화 상대자에게 던진다.

ⓑ [그 주제에 대해 안다고 여기는] 대화 상대자는 물음에 대답하고자 자기 의견을 제시한다.

ⓒ 대답의 논리적 타당성과 내용의 건전성을 살펴, 그 의견을 따진다(elenchein).

ⓓ 즉, 논변의 자기모순, 무한소급, 순환논법 등 논리적 부당성이나,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통념에 반한다는 점 등을 지적함으로써, 대답의 오류를 지적한다.

ⓔ 소크라테스의 따짐을 넘어서지 못한 대화 상대자는 다른 대답을 제시할 것을 요구받는다. ⓕ 대화상대자는 새로운 대답을 제시해도 다시 따짐을 넘어서지 못하거나, 혹은 또 다른 대답 을 제시 못한다.

ⓖ 결국 대화 상대자는 자신이 안다고 믿었던 바에 대해 사실 무지하다는 점이 드러난다. (인 지 상태 검토)

ⓗ 자신의 무지가 드러나자 대화 상대자는 이에 대한 특별한 심리적 반응을 보인다.

ⓗ­1) 어떤 대화 상대자는 자신의 무지를 적극적으로 부인하며, 소크라테스에게 분노한다. ⓗ­2) 어떤 대화 상대자는 자신의 무지에 대해 반신반의하며, 소크라테스를 피한다.

ⓗ­3) 어떤 대화 상대자는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진리를 찾겠노라 약속하며, 소크라테스 에게 고마워한다.

ⓘ 대화 상대자가 자신 및 진리에 대해 어떤 심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심리 상태 검토)

ⓙ 결국 소크라테스의 엘렝코스로 인해 인지 및 심리 상태가 검토되어 확인된다. (영혼의 상 태(인지, 심리 상태)의 자각)

 

5. 소크라테스의 사상

⑴ 소크라테스의 영혼론

- “너 자신을 알라”(Know yourself)

- “자신”은 무엇?: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사랑하면서,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1) “몸”이라고 생각해서~ (웰빙족: 몸을 사랑하고, 몸을 가꾸기).

2) “영혼”: 사랑하고, 돌보고, 가장 좋은 상태를 유지해야 할 대상.

너 자신을 알라 => 너의 영혼을 돌보고,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하라.

- “영혼”은 무엇

1) 일리아스 “영웅들의 ‘혼’을 하데스로 보내고 그들 ‘자신’은 개와 새의 밥이 되게 했다.” (자신 = 몸 / 혼 = 유령, 그림자, 숨)

2) 소크라테스가 처음으로 영혼이란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이게끔 해주는 본질. “앎의 주체, 도 덕의 주체”

 

* ‘너 자신을 알라’의 의미:

- ‘자기 혼의 상태를 자각하라’.

- 이때 ‘혼’은 앎과 도덕의 주체.

- 따라서 ‘잘 산다’는 것은 ‘완벽한 앎과 완벽한 도덕을 갖추는 것’, 즉 ‘혼이 잘 되는 것’.

- 완벽한 앎은 신의 것, 완벽한 무지는 동물들의 것. 중간자로서의 인간은 중간 상태.(향연) - ‘앎’의 전제조건: 무지의 자각.

- 중간자로서의 인간이 하는 일이 바로 ‘필로소피아’(philosophia), 즉 ‘(신적) 지혜를 끊임없 이 추구하는 활동’으로서의 철학이다.

 

⑵ 덕(탁월함)과 앎(지식)의 단일성: 지덕 일치설, 지행합일설

① 인간은 어떤 것이 정녕 좋다는 것을 알면, 자연스럽게 그것을 응당 추구하고 행한다(지

행합일). => 인간은 자신의 본성을 손상시키고 파괴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악행을 선택하지는 않는다(의지박약(아크라시아) 불가능성).

② 그럼에도, 좋지 않은 것을 추구하고 행하는 것으로 보이는 까닭은 사람들이 그것을 일견 어느 측면에서라도 ‘좋다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③ 본성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 참되지는 않되 단지 그럴듯해 보이기만 하는 행복과 진정한 행복을 옳게 분간 해내지 못한다면, 즉 이에 대한 무지에 빠져 있다면, 인간은 사 실상 좋지 않은 것을 추구하고 행하게 되기도 한다. => 이는 곧 인간의 부덕함이 무지에 기인함을 의미한다.

④ ‘부덕이 무지’라는 주장은 결국 ‘덕(탁월함)이 지식(앎)’이라는 점을 반증한다. 그러므로 탁 월함 가운데 최고인 좋음[善]과 지(知)는 단일한 것이 된다.

 

<플라톤과 플라톤의 사상>

 

1. 플라톤의 영혼론

⑴ 호메로스: 전통적인 영혼관

① 여러 심리적 기능들의 주체는 ‘영혼’이 아니었음.

튀모스(thymos): 감정의 원천 (기개, 분노)

노오스(noos): 사고의 작용 등

마음의 심리적 기능들

② 영혼은 죽을 때 몸에서 빠져나가 하데스(저승)에서 그림자처럼 거주하는 것.

⑵ 플라톤의 영혼의 특징 = 자아(self)

① 마음의 여러 심리적 기능들의 통합으로서의 ‘영혼’. 대비 개념으로서의 ‘몸’. (이원론의

확립)

② 심리적(마음의) 기능 = 영혼의 기능: 감정(욕구)의 주체, 인식(지각)의 주체, 도덕적 행

위의 주체, 생명의 원리

③ 영혼 => ‘자아’(self)

⑶ 플라톤의 영혼의 특징 = 도덕(윤리)의 주체

영혼 => 도덕/비도덕적 행동의 ‘결과’를 짊어지게 되는 윤리적 “책임”의 주체

⑷ 플라톤의 영혼의 특징 = 인식의 주체

① 영혼을 돌보는 가장 중요한 내용: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좋음과 나쁨에 대한 앎

의 획득”.

② 전통 인식관: 하데스에 간 프쉬케는 ‘사유 능력이 박탈된 존재’.(일리아스, 11.141)

플라톤: 육체를 떠난 영혼은 ‘사유 능력이 최고조에 도달한 존재’

③ 플라톤의 기여: 영혼(프쉬케)은 다름 아닌 앎의 담지자로서 “이성적 존재”

 

2. 플라톤의 영혼 삼분설 (플라톤의 국가)

⑴ 다양한 영혼(마음, 정신, 심리) 작용의 통합

① 이성적인 부분(계산하는 부분)

② 기개적인 부분(화내는 부분)

③ 욕구적인 부분(신체적 욕구를 갖는 부분)

⑵ ‘전체’로서의 영혼은 서로 독립적인 세 ‘부분’들을 갖는다.

① 물을 마시기를 원하면서 동시에 마시지 않기도 원하는 사람 => 영혼 안에는 물 마시기

를 원하는 부분과 원치 않는 부분이 별도로 존재한다. (원하는 부분: 목마름 때문에 발생

하는 신체적 “욕구 부분” / 원치 않는 부분: 물의 오염 등 때문에 발생하는 “이성 부분” => 독립적으로 존재) [욕구 <-> 이성]

② 이 둘과 별도로 화와 같은 감정을 표출하는 “기개(분노, 화 등) 부분”이 존재함.

ex1> 신체적 “욕구”에 굴복하고서 이 욕구에 대해 “화”를 내는 레온티오스 [욕구 <->

기개]

ex2> “분노” 때문에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을 다 죽이고 싶지만, 자신의 “계획” 때문에 참

는 오뒷세우스. [기개 <-> 이성]

⑶ 영혼의 부분들은 각각 “인간을 움직이는 동기의 원천들”(우리와 비교)

① 이성적인 부분: 앎이나 “지혜”를 추구하는 부분

② 기개적인 부분: “명예”나 승리를 추구하는 부분

③ 욕구적인 부분: 돈이나 “이익”을 추구하는 부분 (581a 이하)

=> 인간에게 세 가지 다른 삶의 동기의 원천과 목표가 있다면, 이 셋의 (자기분열이 아니

라) “조화”야말로 행복하고, 좋은 삶을 사는 데 필수적. (세 부분이 조화하도록 하라! =

영혼을 돌보라!)

cf> 몸의 건강은 몸을 이루는 요소들의 “조화”, 영혼의 건강은 각 부분들의 “조화”.

⑷ 조화의 방법

① 기초적인 조건: 한 부분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나머지 두 부분이 지지와 지원을 보낼 수 있도록 조직화. <=> 조직화가 안 되면, 각 부분들이 서로 주도권 을 잡으려고 항상 다투거나, 한 부분만 득세하는 불균형 상태.

② 바람직하지 않은 부분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면... => 나머지 부분들은 자신에게 이질적인 목표에 종사하게 되고 “조화와 질서”가 무너짐.

ex> 앎을 사랑하는 부분이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지에만 골몰하거나, 명예를 사랑

하는 부분이 “돈” 많은 것을 명예로 여겨 이에 따라 올바른 자랑스러움/수치스러움을 느끼지 못하거나.(553c~d) => 언제든 조화가 깨질 수 있음.

③ ‘기개’나 ‘욕망’이 아니라, “지혜”를 추구하는 부분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그에 맞

춰 조직화 되면, 나머지 부분들은 자신들에게 이질적인 목표에 종사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음. 왜냐하면 “지혜를 추구하는 부분” 부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바로 “좋음에

대한 앎”이므로, 오히려 나머지 두 부분이 자기 고유의 목표를 더 잘 추구하게 됨. => 명예를 사랑하는 부분은 그러한 앎을 명예로 여기고(진정으로 명예로운 것), 이득을 사

랑하는 부분은 그러한 앎을 얻기에 적절하도록 신체적 욕구들을 조절하게 됨(진정으로 이익이 되는 것).

⑸ 영혼의 조화로운 상태

 

3. 플라톤의 영혼과 정의(justice) (플라톤의 국가)

* ‘정의’: 오늘날 정의라는 말은

① 사회 정의를 의미한다. 어떤 개인이 정의롭다고 하는 경우도 ‘그 개인이 행한 사회적 행위 에 대한 평가’를 나타낼 뿐,

② “그 개인의 내적 욕망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반면 플라톤의 정의는

① 사회관계를 구성하는 계층들 간의 조화 -> 각 계층들의 고유한

자기 직분의 수행 [국가의 부분들의 조화]

② “개인들의 상이한 내적 욕망들 간의 조화” [개인(영혼)의 부분들의 조화]

 

⑴ 플라톤의 이상 국가의 조건:

개인 영혼의 부분들 - 국가를 구성하는 계층들

①개인 영혼의 덕목들 - 각 계층이 갖는 기능적 덕목들

② 개인 영혼의 조화로서의 정의 – 국가의 각 계층의 조화로서의 정의

③ ① 영혼의 세 부분과 국가의 세 계층

[영혼] [국가]

이성적인 부분 – 통치자 계층

기개적인 부분 – 군인 계층

욕구적인 부분 – 생산자 계층

② 영혼의 세 부분의 덕목과 국가의 세 계층의 덕목

[영혼] [국가]

개인의 지혜(이성적인 부분) – 통치자 계층의 지혜

개인의 용기(기개적인 부분) – 수호자 계층의 용기

개인의 절제(욕구적인 부분) – 생산자 계층의 절제

③ 국가의 정의: 각 계층이 자기 직분을 다함. 각 계층이 자기 직분을 다함: 개인 영혼의 부분들이 조화를 이룸

통치자 계층: 내부의 영혼, 이성, 기개, 욕구적 부분이 ‘조화’를 이루어야 함.군인 계층

생산자 계층

 

⑵ 각각의 영혼의 조화의 차이 [3-⑸ 조화의 방법 참조]

Q① 통치자의 내적 조화가 가장 완벽하고, 군인, 생산자 순으로 완벽한 것일까?

NO. 그렇게 되면 ⓐ 군인, 생산자가 자기 직분을 완전히 수행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되

고, ⓑ 두 계층의 불완전한 조화 자체로 통치자와 국가가 불완전해짐을 의미한다.

따라서, 통치자는 이성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군인은 기개를 극대화하는 방식, 생산자

는 물질적 생산 욕구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모두 각각의 내적 조화를 이룸.

Q② 통치자는 이성적 영혼만 있고, 군인은 기개적 영혼만 있고, 생산자는 욕구적 영혼만 있을까?

NO. 영혼 삼분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가 세 부분을 가지고 모두가 최

상의 조화를 실현해야 한다.

Q③ 이성(지혜)만이 우수성의 기준이어서, 통치자가 우수하고 나머지는 수준이 떨어지는 걸 까? NO. 생산자는 통치자 수준의 이성 능력을 성향상 바라지도 않고, 설사 억지로 가지 라고 한들 자기의 내적 조화에 장애만 초래할 뿐이다.

ex> 최고의 클래식 음악가와 발라드 음악가와 트로트 음악가가 각자 최고의 조화를 구현하 되 그 빛깔들은 서로 다르고 그것이 각자 자기 성향의 최고 발현인 한, 다른 음악가

에 대해 열패감을 느낄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Q④ 계층들 간에 통치자의 영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NO. ex> 훌륭한 오케스트라에서 구성원 모두가 훌륭한 연주를 위해 중요하지만, 누구든

자신들이 ‘지휘자’의 위상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과 같다. => 통치자가 가 장 중요하고 그의 이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각 계층은 ‘성향상’ 자기 직분의 완성에서 가장 행복을 느끼며, 그런 한에서 다른 계층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다.

ex> 모두가 피아노를 잘 연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연주 능력이 떨어지는 사

람은 ‘열패감’을 느낀다. 하지만 피아노 연주에 관심 없는 사람은 열패감을 느낄 이 유가 없다.

⑤ 플라톤의 정의로운 국가: 상이한 욕구와 성향을 지닌 사람들 간의 상호 호혜적 의존 관계

=> 각자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본성에 대한 좀 더 나은 이해, 그같은 앎에 입각한 내적 잠재 능력의 발현임. 이상국가란 이를 보장하는 시스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 (다원주의 적 국가관의 가능성)

<-> 자본주의 사회: 욕망이 획일화된 사회에서는 욕망의 실현 여부가 모든 가치의 척도이

므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열패감’을 느끼거나, 만인의 만인에 대한 경쟁이 불가피함. 이

사회는 욕망을 증대시킬 힘으로 권력을 선망, 소수에게 편중된 가치에 비례하여 부정의한 국가가 됨.

⑥ 정치 체제의 변화: 물질적 욕망으로 획일화된 사회, 소수가 가치 분배를 결정한다면?

정체의 타락은 영혼의 타락과 대응함.

정치 체제 타락의 핵심 원인은 지배자들의 영혼의 타락.

 

* 국가와 관련된 가장 큰 오해들:

1. 처자와 재산의 공유

2. 철인왕

3. 전체주의(전체주의란? 전체주의는 공동체, 국가, 이념을 개인보다도 우위에 두고, 개인을 전체의 존립과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사상)

4. 국가의 종류 (국가, 정치가)

⑴ 국가의 종류:

6 정체론

“수”를 기준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준법/불법” 지배 체제로 나눔

① 1인 지배 체제

ⓐ 왕정 (basilikē) = 입헌 군주정

ⓑ 참주정 (tyrannikē)

② 소수자 지배 체제

ⓐ 귀족정 (aristokratia)

ⓑ 과두정 (oligarchia)

③ 다수자 지배 체제

ⓐ 준법 민주정 (demokratia ennomon)

ⓑ 불법 민주정 (demokratia paranomon)

⑵ 6정체의 상대적 우열

① “준법” 지배 체제 중에서는

왕정 → 귀족정 → (준법) 민주정

② “불법” 지배 체제 중에서는

(불법) 민주정 → 과두정 → 참주정

ⓐ “불법” 체제하에서는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될수록 위험하므로, 민주정이 가장 좋음. => 조 화를 상실하고 욕망이 획일화된 사회에서는 차라리 권력이 다수에게 분산되는 것이 최선.

ⓑ 참주정이 가장 나쁨. => 정치 체제상 우열의 결정 기준은 “통치자의 영혼이 얼마나 건강한 상태인가”, “지배자가 참다운 정치 기술 내지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그런 정치가가 존재 하는지”에 달려 있음.

 

<플라톤의 이데아론>

 

“… we must make a distinction and ask, What is that which always is and has no

becoming, and what is that which is always becoming and never is?

우리는 항상 존재하고 그리고 생성되지 않는 것은 무엇이며, 항상 생성되고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 구별하고 질문해야 한다.

 

That which is apprehended by intelligence and reason is always in the same state,

지성과 이성에 의해 파악된 것은 항상 같은 상태(항상 존재하지만)에 있지만

but that which is conceived by opinion with the help of sensation and without reason

그러나 감각의 도움을 받고 이성 없는 의견에 의해 파악된 것은

is always in a process of becoming and perishing and never really is.”

항상 생성되고 소멸되는 과정에 있으며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Plato, Timaeus, 27d~28a)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실린 글로 이데아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내린 글로 해석된다. 즉 감각 세계에 대한 회의주의적 입장과 이데아 세계를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보편적 진리로 보는 플라톤의 입장을 나타낸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만약에 아름다움 자체 이외에 다른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이것이 아름다운 것은, 이것이 그 아름다움 자체에 관여하기(participate, 참여하기) 때문이지, 그 밖의 다른 어느 것 때문도 아닌 것으로 내겐 보이네. 또한 모든 경우에도 그러하다고 말하겠네. 또한 만약에 누군가가 내게 무엇이건 그게 아름다운 까닭을 말하기를, 그게 화사한 빛깔이나 특유한 모양 또는 그런 등속의 다른 어떤 것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런 다른 것들은 개의하지 않으이. 다른 모든 것의 경우에는 내가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일세[…] 그게 아니라 그것을 아름답도록 만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저 아름다움의 나타나 있게 됨(presence, 臨齋)이거나 결합(joining together)이거나 또는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이건 간에 말일세.” (Plato, Phaedo, 100d~c, 박종현 역)

 

1.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

동굴의 비유(영어: Allegory of the Cave 또는 Plato's Cave)는 이데아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생각한 비유이다. '국가' 제7권에서 상술된다.

'국가' 제7권의 기술

(514A-515A) …… 지하의 동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자. 빛으로 향한 동굴의 좁은 통로가 입구까지 달하고 있다.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손과 발, 목이 속박되고 있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쭉 동굴의 안쪽을 보면서, 되돌아 보는 것도 할 수 없다. 입구의 아득한 위쪽에 불이 불타고 있고, 사람들을 뒤로부터 비추고 있다. 불과 사람들의 사이에 길이 있어, 길을 따라서 낮은 벽이 만들어져 있다. …… 벽을 따라서, 여러가지 종류의 도구, 나무나 돌 등으로 만들어진 인간이나 동물의 상이 벽 위에 옮겨져 간다. 옮겨 가는 사람들 속에는 소리를 내는 것도 있으며, 입 다물고 있는 것도 있다. ……

해설

동굴에 사는 속박된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은 '실체'의 '그림자'이지만, 그것을 실체라고 믿어 버리고 있다. '실체'를 옮겨 가는 사람들의 소리가 동굴의 안쪽에 반향하고, 이 믿음은 확신으로 바뀐다. 똑같이, 우리가 현실에 보고 있는 것은 이데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다고 플라톤은 생각한다.

즉, 세상 만물은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하고 동굴 밖에 실체가 존재하며 인간은 그 실체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

선분의 비유(Analogy of the divided line)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플라톤에 의해 쓰여진 비유로 국가 (플라톤)에 등장한다. 이것은 글라우콘과 소크라테스 사이의 대화 중에 나왔고, 태양의 비유에 이어 바로 등장한다. 한 선을 A,B,C,D,E로 나눈 뒤 그 중 AC를 가시적인 세계로 CE를 지적인 세계를 나타낸다고 표현한다. AC의 선은 짧고, CE는 길다. 여기서, AB는 물리적인 것의 그림자와 투영된 것을 나타내고 BC는 물리적인 것 자체를 나타낸다. 이것은 지식의 두 가지 영역 즉, 우리가 보통 매일 경험하는 것의 환상과 구체적인 물건들이 그림자를 갖는 것에 대한 믿음으로 나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

플라톤 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상은 이데아(idea)4)라는 개념이다. 이데아란 어떤 개별적인 사물이 없어지더라도 계속해서 존재하는 그 사물의 원형이며, 감각적 세계에서 마주치는 사물의 모범이자 개별자에 의해 마침내 실현되어야 할 이상, 즉 사물의 전형(典型)을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의 현실에는 많은 동그라미(圓)가 있는데, 그것들이 아무리 완전한 것 같아도 엄밀하게 보면 어딘가 흠이 있기 마련이다.

 

이 세계에는 절대적으로 완전한 의미의 동그라미는 있을 수 없으며, 어쩌면 우리는 한 번도 그 이데아를 못 봤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가 ‘저’ 동그라미보다 ‘이’ 동그라미가 더 동그라미에 가깝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완전한 모양의 동그라미와 비교하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 동그라미야말로 동그라미의 이데아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각 세계와 이데아 세계란 어떻게 다를까? 이를 알기 위해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들고 있는 ‘동굴의 비유’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온몸이 의자에 묶여 있는 감옥(동굴) 안의 죄수와 같다. 그리고 머리의 방향조차 제대로 돌릴 수 없어서 항상 출입구와 맞서 있는 동굴의 벽밖에 볼 수 없다. 이 갇혀 있는 자의 등 뒤인 입구 쪽에는 동굴을 가로질러 사람 키만 한 벽이 있고, 그 뒤에는 불이 타오르고 있다.

 

또한 그 불과 벽 사이를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으며, 이때 이 벽보다 높이 솟아난 부분의 그림자가 동굴의 입구를 지나 벽에 비춰진다. 그 순간 왕래하는 사람들이 내는 소리라든가 동물의 울음소리가 죄수들의 귀에 들린다고 했을 경우, 죄수들은 그림자가 그 소리를 낸다고 착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동굴에서 나와 대상 자체를 불빛 속에서 직접 본다면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나아가 태양 아래에 있는 인간과 동물 그리고 사물들을 직접 본다면 자신이 그동안 엄청난 착각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미 밝은 세계를 체험한 사람이 동굴 안으로 들어와 동료 죄수들에게 “너희들이 보고 들은 것들은 참된 현실이 아니다”라고 설명해 준다고 한들, 아무도 이를 믿지 않고 비웃기만 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들을 참된 세계의 빛으로 인도하려고 계속 노력한다면 그 사람은 오히려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

 

이 비유에서 동굴이란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이 감각적 세계를 의미하며, 죄수란 우리 자신을 가리킨다. 인간은 감각이라는 캄캄한 동굴에 갇혀 참다운 진리의 세계를 보지 못하다가 어느 날 우연히 동굴에서 빠져나와 우리의 영혼이 이념의 세계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

 

이때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온 철학자(진리를 갈망하는 자)는 이웃에게 참다운 진리를 설파하지만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끝까지 진리를 전하는 일이야말로 철학자의 사명이며, 이 일을 위해 소크라테스는 죽음마저 사양하지 않았던 것이다.

 

‘동굴의 비유’에서 말하는 참된 세계가 이 땅의 실재적이고 시공간적인 세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 세계는 진실로 존재하는 이데아의 세계를 흉내 낸 첫 번째 것에 불과하며, 이것을 다시 흉내 낸 것이 벽에 비친 그림자의 세계다. 이를 거꾸로 이야기하자면 그림자의 세계는 이 땅의 존재에 바탕을 두었으며, 이 땅의 세계는 다시 이데아의 세계에 바탕을 두고 있고, 이 이데아의 세계는 다시 절대자에게 바탕을 둔다.

 

결국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를 통해 주장하는 것은 죄수가 동굴의 밑바닥을 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와야만 태양을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이 이념의 세계로 비약해야만 보편적인 이데아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플라톤의 이원론(二元論)적인 세계관이 확립된다. 즉 동굴 안의 세계는 물질 · 육체 · 비진리 · 변화무쌍 · 찰나 · 무가치 · 무의미 등으로 표현되고, 동굴 밖의 세계는 정신 · 영혼 · 진리 · 불변 · 영원 · 가치 · 의미 등으로 묘사된다.

 

물론 앞에서 말한 동그라미뿐만 아니라 그 밖의 사물이나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도 이러한 예를 적용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데아란 가장 이상적인 형태이면서도 결국 우리의 관념 속에 머물 수밖에 없다고 하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각 사물마다 각각의 이데아가 있지만, 최고의 이데아는 이데아의 이데아, 곧 ‘선의 이데아’다. 모든 존재는 이 ‘선의 이데아’에 의해 지배되며, 최고의 절대 목적인 이것에 의해 통일된다. 태양이 모든 사물을 키우듯, 선의 이데아는 전 세계를 지배하는 이성이며, 이런 의미에서 우주적 이성이자 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이데아를 어떻게 포착할 수 있을까? 플라톤은 오직 철학에 대해 강한 충동을 느끼는 자만 그것을 잡아낼 수 있다고 봤으며, 이 충동을 에로스(Eros)5)라고 불렀다. 생식이나 본능의 뜻을 가진 에로스는 사랑의 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육체에서 느끼는 쾌감은 가장 저급한 에로스이고, 그 다음에 음악과 수학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진리를 향한 강렬한 철학적 충동에 의해서만 참다운 세계를 볼 수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의 분류>

학문의 분류

⑴ 이론학 theoretical knowledge: 존재하는 것, 일반을 다룬다. 감각세계에 대한 지식, 있는 세계 대상 자체에 대한 앎이다. - 형이상학, 수학, 자연 학, 영혼론, 동물론...

⑵ 실천학: 윤리, 정치(규범)학. - 윤리학, 정치학, 가정경제학

⑶ 제작학: techne, 전술학, 시학... - 수사학, 시학

 

* 논리학: 학문이 아니라 학문의 ‘도구’. - 명제론, 분석론, 오류론

* theoretical science

① 자연학의 대상: ⓐ ‘변화’(운동)가 본질적 특징. 하늘의 천체들, 동물, 식물 등 생성과

소멸, 크기의 증감, 성질의 변화, 장소 이동하는 물질적인 것들.

ⓑ 다른 것들과 떨어져서도 자기 자리를 가지고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들. –> 자연학: ‘독립’(獨立)적이고 ‘변화’(운동)하는 대상을 다루는 학문

② 수학의 대상: ⓐ ‘변화(운동) 불가능’이 본질적 특징. 수(산술)와 도형(기하학).

ⓑ 자신의 자리가 따로 있지 않고 물체 ‘안에’ 있는 것들. 둥근 공 안에 있는 원 모양, 탁자 안에 있는 사각형. -> 수학: ‘의존’적이고 ‘변화하지 않는’ 대상을 다루는 학문.

③ 신학(제일철학)의 대상: ⓐ ‘변화’ 불가능한 부동의 실체.

ⓑ 다른 것들과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들. -> 신학(제일철 학): ‘독립’적이고 ‘변화하지 않는’ 대상을 다루는 학문.

4.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신학 또는 제일 철학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이 아니라, ‘제일철학’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제일철학은 “제일(첫 번째)의 원인과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는 이 원인의 탐구는 두 갈래로 진행된다.

① ‘존재하는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을 탐구하는 길이다. 나중에 “존재론”(ontology)이라는 이 름을 얻게 된 이 길은 존재하는 것들 ‘일반의’ 구조를 탐구하고, 존재의 가장 ‘보편적’인 원리를 탐구하고, 존재하는 것들, 일반의 필연적이고 ‘본질적인’ 특성을 탐구하는 길이다. => 일반 형이상학 (존재론, Ontology)

② ‘최고의 존재자’를 탐구하는 길이다. 이 탐구의 관심은 이 세계 전체에 질서를 부여하는, 가장 처음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그 전형적인 형태는 최고의 신적인 존재를 탐구하는 ‘신 학’(theology)이다. 신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세계 전체 질서의 문제 외에 신이 우주의 제 일가는 운동인으로서 어떻게 기능을 발휘하는가의 문제도 다룬다. => 특수 형이상학 (신학 Theology)

* ‘존재하는 한에서의 존재’란?

- 존재자들의 향일성(向一性, pros hen)

- ‘존재하는 한에서의 존재’라는 표현은 이렇게 풀이할 수 있다. 예컨대 사람을 놓고 보자. 사 람은 생물체이면서, 사회적 존재이면서, 심리적 활동의 주체이다. 그래서 똑같은 사람을 두 고서도 우리는 사람을 생명체인 한에서, 사회적 존재인 한에서, 심리적 활동의 주체인 한 에서 다룰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따라서 생물학, 사회학, 심리학이 나뉜다. 다시 말해서 생 물학은 생명체로서 사람을 다루고, 심리학은 심리적 행위의 주체로서 사람을 다룬다.

- 존재하는 것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존재하는 것은 학문의 대상이다. 어떤 학문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대상으로 다룰 수는 없다. 자연학의 대상도 있는 것이고, 수학의 대상도 있는 것 이다. 하지만 있는 것을 어떤 관점에서 다루는가에 따라 자연학과 수학은 갈라진다. 자연학 이 운동하는 한에서 존재하는 것을 다룬다면, 수학은 수량의 측면이나 기하학적인 측면에서 존재하는 것을 다룬다. 반면에 제일 철학은 있는 것을 그런 운동의 측면이나 양적인 측면이 아니라 그저 존재한다는 측면에서만 다룬다. 제일 철학이 ‘존재하는 한에서의 존재’를 대상 으로 한다는 말은 그러므로, 그것이 존재하는 것을 오로지 존재하는 것의 측면에서 다룬다 는 것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의 존재론: 실체 우위의 존재론>

* 존재

우리의 의사소통에서 ‘is’가 어떻게 쓰이는가? 일상 언어에 주어진 기본적인 데이터에서부

터 출발. ‘is’는 동음이의(homonymous)어와 같다. ‘배’가 복부, ship, 과일을 의미하듯 이... -> ‘is’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있는 것’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지만, ‘하나와의 관계속에서’(pros hen) 즉 어떤 하나의 자연적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쓰이는 것이지 동음이의적인 뜻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다. 그 사정은 이렇다. ‘건강한’은 모두 건강과의 관계 속에서 쓰이는데, 어떤 것(어떤 건강한)은 건강을 지켜준다는 뜻에서, 어떤 것은 건강을 낳는다는 뜻에서, 어떤 것은 건강의 징후라는 뜻에서, 어떤 것은 건강의 수용자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리고, ‘의술적’이라는 말 역시 의술과의 관계 속에서 쓰인다. 이와 마찬가지로 ‘있는 것’ 역시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지만 그 모두가 하나의 원리(실체)와 관계 맺고 있다. 그런데 건강한 것들 모두에 대해서 하나의 학문이 있으니, 다른 것들의 경우도 사정이 같다. 왜냐하면 하나에 따라서 일컬어지는 것들뿐만 아니라 하나의 자연적인 것과의 관계속에서 일컬어지는 것들을 이론적으로 고찰하는 것 또한 하나의 학문이 할 일이기 때문인데, 그것들도 어떻게 보면 하나에 따라서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있는 것들을 있는 것들인 한에서 이론적으로 고찰하는 것은 하나의 학문의 과제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어디에서나 학문은 주로 첫째가는 것을 다루며, 다른 것들은 그것에 의존하고 또 그것에 의해 그 이름을 얻는다. 그런데 만일 이것이 실체라면, 철학자는 마땅히 실체들의 원리들과 원인들을 소유해야 할 것이다.(형이상학 4 2, 1003a33-b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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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주’(category)란 무엇인가?

먼저 “범주”라는 말의 뜻부터 알아보자. “範疇”라는 한자어는, 그리스어 동사 “katēgorein”에서 나온 명사 “katēgoria”를 옮긴 말이다. “katēgorein”은 본래 법률 용어로서 어떤 사람을 “비난하다”(to speak against), “고발하다”(to accuse)를 뜻하며, 이에 따라 “katēgoria”도 “고발”, “비난”의 뜻을 갖는다. 논리학에서 쓰이는 “katēgoria”란 용어는 그런 법률적인 뜻에서 따라 나온 것으로서,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진술”(statement)이나 그에 필요한 “술어”(predicate) 또는 술어의 종류를 가리킨다. 사실 법정에서 어떤 사람을 고발하려면 그에 대해 여러 가지 진술을 해야 할 것이고, 그 안에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등을 밝혀야 할 것이다. “katēgoria”의 “고발”이라는 법률적인 뜻에서 “진술” 또는 “술어”라는 논리학적인 뜻이 파생되었다고 보면 된다.

범주로서의 실체

- ‘What is X?’[X는 무엇이냐?]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에 해당하는 것이 실체(substance)

범주. ‘What are you?’ 라고 물었을 때, ‘I feel good.’이나 ‘I am sad’라고 답한다면

멍청한 범주 오류이다. ‘What are you?’ 라는 질문에 최소한 ‘I'm a student’라고 답하

면 논의할 여지가 생긴다. 진/위는 그 다음 문제이다. 이렇게 ‘What is X?’에 어울리게

답한 것들의 집합이 실체이다. 실체를 의미하는 substance(substantia(Latin))는 희랍어식 표현인 ‘to ti esti’(‘The what is’)에 대한 번역어다. ousia(beingness)는 be동사의 명사형 으로, ‘임’을 뜻한다. 범주로서의 성질 사물의 제 1성질. ‘poios esti’[X는 어떤 것이냐?]는 사물의 성질, 색깔...을 묻던 그리스어 일상어이고, 영어로는 ‘what kind of’ 정도. 이 물음 에 대한 답변들을 묶어서 ‘quality’라고 한다.

범주로서의 양

‘pos esti X’[X가 얼마만큼이냐?]는 사물의 개수, 양을 묻는 물음이고, 이 물음에 대한 답

변들을 묶어서 ‘quantity’라고 한다.

범주로서의 관계

주인~노예에 대해서, 아버지~자식에 대해서... 관계술어는 이항술어이다. 두 개 이상의 주어

를 가진 술어. 범주로서의 시간, 장소, 위치 ‘성질’보다는 덜 적합해도 사물에 관계된 범주이다

범주로서의 소유, 능동, 수동...

* 실체 범주와 여타 범주들 간의 관계: 실체의 우위성 - 색깔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논하려 면, 어느 표면에 붙어 있으므로 평면을 끌어들여야하고, 또한 평면만 존재할 수는 없으므로, 다시 이 평면의 주인인 어떤 사물(실체)를 끌어들여야 한다. 성질, 양, 관계, 시간, 공간, 위 치, 운동 등의 존재를 논하려면[혹은 정의하려면] 그것들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사물(실체)이 라는 범주(이 실체는 모든 범주의 중심 조회점이다)를 끌어들여 여기에 의존해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175cm는 따로 있지 않다. 이는 ‘사람’에게 붙어 있는 키다. 플라톤과 아리스 토텔레스의 철학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이런 것이다. “amicus Plato, magis amica veritas. (니코마코스 윤리학)”

① 아리스토텔레스: ‘사물’(실체)이 있고, 그 안에(위에...) ‘면’(양)이 있고, 그 안에(위에) ‘색 깔’(성질)이 존재한다’.

② 플라톤: ‘평면’이나 ‘색’은 이것들이 구현된 구체적인 사물들과 같이 구체적인 사물과 독립해서(seperately)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세계관의 생물학적 성격>

- 아리스토텔레스가 첫째 실체로 내세우는 것은 이 사람 이 말과 같은 개별적 실체들이고 이 것들은 생명체들이다.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용기 자체, 아름다움 자체, 큼 자체와 같 은 윤리적이고 기하학적인 보편자들을 참된 뜻에서 있는 것, 즉 실체로 내세웠던 플라톤과 전혀 다른 세계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범주론의 실체 이론에 시사된 이런 생물학적인 세 계관은 그의 저술 여러 곳에, 특히 그의 생물학 연구의 의의와 방법을 밝힌 동물부분론(De partibus animalium) 1권 5장에 더없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부분은 생물학 연구의 권 리장전이고 아리스토텔레스 세계관의 요약이다. 인용문이 길지만 거기 담긴 아리스토텔레스 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 세계를 두 영역으로 구분한다. 하나는 달 위의 세계인데, 이 세계의 구성원들에는 해와 달과 별들을 비롯한 천체들이 있다. 이것들은 생성과 소멸에서 벗어나 영원히 있는 것이요 신적이고 존귀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달 아래 세계인데, 이 세계는 식 물, 동물, 사람이 차지한다. 이런 구분에 잇대어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종류의 연구를 구분한 다. 하나는 신성한 것들에 관한 철학인데,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천문학 연구를 가리킨다. 다른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에는 독립적인 학문의 영역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던 학문 으로 달 아래 세계에 있는 생명체들에 대한 연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특유의 균형 감각 을 보여주면서 두 연구가 가진 그 나름의 매력을 인정한다. 신성한 것들에 대한 연구는 우 리가 그것들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자료가 적고 그 대상이 우리에게 멀리 있어 지식을 얻기 어렵지만 그 대상의 존귀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매력을 끌고, 그에 반해 우리 곁에 있는 생명체들에 대한 연구는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그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학문적 우위를 차지한다고 그는 말한다. 생명체들은 생성하고 소멸하며 끊 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해서는 어떤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학문도 가능하지 않 다고 보았던 플라톤과 아카데미아의 학문관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이어서 아리스토텔레 스는 이렇게 덧붙인다.

- 이 글은 생물학 연구를 권유하는 글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눈 앞에 있는 생명체의 가치 경 중에 구애받지 말고 온 힘을 다해 모든 것을 다루자고 권유한다. 그에 따르면, 자연은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제작자요 모든 것을 낳는 것(natura naturans)이며 그런 점에서 신적인 능력이다. 자연은 어떤 것도 헛되이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래서 자연이 만들어 낸 것들은, 비록 그 모습이 추하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생명 활동을 유지하 고, 이 활동을 “위해서” 각 부분들이 어떻게 유기적인 활동을 하는지에 대해 그 원인을 아 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우리는 진짜처럼 그려진 벌레 그림을 보면서 기뻐하고 그 그림을 그린 예술가의 능력에 감탄한다. 그런데 진짜 벌레를 보고서는 그것을 징그럽다고 피하고 그것을 만들어 낸 자연의 능력에 감탄할 줄 모른다면, 이것은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일이 아 닌가? 가치가 없는 생물들을 연구하는 것은 가치 없는 일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아리스 토텔레스는 비웃는다. 그들은 그저 유아적인 혐오증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그들은 가치 없 어 보이는 생명체 안에도 어떤 신적인 자연의 힘이 드러나 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명체들은 가치 유무를 떠나서 모두 자연의 작품들이다. 그 안에는 놀랄 만한 점이 있고 합목적적인 활동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자연과 자연적 생명체들의 합목적성은 그것들을 아 름다운 것으로 만든다. 보기에 흉측하고 역겨운 냄새가 나는 벌레 안에도 합목적적인 아름 다움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자연과학)>

1) 특징: 자연현상의 특징은 ‘변화(움직임)’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변화도 범주에 의한 변화이지, 그냥 헤라클레이토스적인 변화가 아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고 말하려면, 변화 중에도 변화하지 않는 실체로서의 소크라테스가 전제되어야 하며, 변화 이전의 것인 얼굴(quality)(붉은 얼굴 흰 얼굴)이 전제되어야 한다. 위의 변화는 성질 변화(alteration)인 것이다. 변화에는 실체가 가지고 있는 속성들만이 변화하는 것과, 실체의 생성과 소멸(나고 죽음)뿐이다. 결국 실체(알맹이)는 변화하는 게 아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와 다르다.

2) 학문이론 -> 4원인설.

① 학문적 앎episteme과 그 이전의 앎이 다른 이유는, “aitia(원인, 까닭)”를 포괄한다는 점이 다. “앎은 원인에 대한 앎이다” 학문적 앎은 ‘a is B’라는 언명에 대해서, ‘왜 a는 B인가?’ 를 묻고, 이에 대해, ‘B가 C이기 때문에,,,’라고 답할 때 주어진다. 이런 원인에 대한 앎이 학문적 앎이다. aitia는 네 가지이다. 이름하여

② 四原因說 “이 사건은 왜 일어난거야?” 혹은 “이 물체는 왜 이렇게 생긴 거지?”와 같은 질 문(왜-물음)에 대한 4가지 방식의 답변이 이 사건이나 물체의 원인(aition, 왜-물음에 대한 답변 혹은 설명).(자연학 2권 3장, 형이상학 1권 3장).

ex> 어떤 제작된 동상을 앞에 두고 “이 동상은 왜 이렇게 생긴 거지?”라는 ‘왜-물음’을 묻

는다면 다양한 방식의 답변이 가능할 텐데, 답변 하나에 원인 하나가 대응함.

(1) “그 동상은 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야”라고 답하면, 우리는 ‘질료-원인’(질료인) 을 답변으로 제시한 것.

(2) “그것은 페리클레스를 재현한 동상이기 때문이야”라고 답하면, 그 동상의 본질적 성질을 답변으로 하는 ‘형상-원인’을 제시한 것.

(3) “그것은 조각가가 만들었기 때문이야”라고 답하면, 동상을 만든 원천을 언급함으 로서, ‘작용-원인’을 언급한 것.(운동인)

(4) “그것은 페리클레스를 재현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야”라고 답하면, 우리는 동상을 만든 목적을 언급함으로서 ‘목적-원인’을 제시한 것.

 

<아리스토텔레스의 신 존재 증명>

자연 철학적인 신 존재 증명

- 움직이는 모든 피동자들은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시동자를 필요로 한다.

- 시동자의 연쇄는 무한할 수 없다. 최초의 움직이게 하는 존재자가 있다.

이 존재자를 부동의 시동자라 부르며 이는 자신은 움직여지지 않으면서 다른 것들을 움직 이게 하는 존재자를 말한다. (운동을 통한 증명)

2. 목적론적 신 존재 증명

- 최초의 시동자는 어떻게 움직이게 하는 것일까,라는 물음에 신은 욕구의 대상, 즉 목적이 되어 다른 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매력 발산’을 통해 다른 것들로 하여금 자신을 향해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다. 즉 신을 모방하 려는 욕구가 다른 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목적론적 신의 존재 증명.

 

<아리스토텔레스 행복의 윤리학>

(1) 삶의 최고의 목적 = 행복

- “우리는 모두 좋은 것들을 욕망하는데, 좋은 것들 사이에는 수단과 목적의 관계가 있고, 그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이 행복이다.”

- 행복은 좋은 것들 가운데 ‘가장 좋은 것’, 목적들 중에 ‘최고의 목적’.<-> ‘행복은 구체 적으로 무엇인가?’ ü 서로 다르다: 병원에 입원한 사람?, 주식하는 사람?, 많은 사람 들?...ü 같은 사람도 매번 다르다: 돈이라던 사람도 병원에 입원하는 순간...

(2) 행복에 대한 통념

-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며, 대중과 지혜로운 자들이 같은 답을 내놓는

것은 아니다.”

- 그리스인들의 통념: “돈 많은 것”, “명예를 얻는 것”, “즐겁게 사는 것”

- 행복에 대한 다양한 통념들이 있다는 것은 FACTS / 하나의 행복은 “정당화될 수 있을 까?”

- 기준 두 가지: “완전성”(수단이어서는 안된다), “자족성”(다른 것에 의존해서는 안 된 다).

① 돈?: 돈은 다른 좋은 것을 위한 “수단”이 아님(수단적 목적). 최고의 목적이 아니 다.

② 명예?: 명예는 타인의 인정에서 오므로, 타인의 시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자 족적이지 않다.

③ 쾌락?: 쾌락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부분적인 “쾌락주의”.(금욕주의자가 아니다) 쾌 락의 감정은 무언가를 했을 때 따라오는 것. 그 ‘무언가’가 문제이지, 쾌락의 감정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젊음에 아름다움이 “따르듯이” 행복에 쾌락이 “따른다.”

(3)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다이모니아(행복)’ - 모든 좋음들 중 최상의 좋음 = eudaimonia = 행복 (=> beatitude => happiness) - 어원 ‘eu-daimōn’: ‘다이몬의 은총을 입었다.’ ‘좋 은 팔자를 타고났다.’

① 그리스인들: “예컨대 돈이 많고 높은 명예를 지닌 사람들,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eudaimōn이라고 불렀다.”

② 아리스토텔레스: “한 명의 인간으로서 잘 사는 것, 잘 행동하는 것”이 행복이다. (욕망을 달성했을 때 따라오는 만족감이 문제가 아니라, 욕망의 내용이 무엇이냐 가 문제이다.)

è 행복: 주관적 만족감이 아니라, “객관적인 성공(성취, 달성)”이다.

[만족감(쾌락)은 객관적인 성공에 ‘따라오는’ 것이다.]

è 그렇다면 “인간인 한에서”, “인간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욕망할 것인가?

(4) 기능과 행복: 기능논변

- 세상 모든 만물(인간 포함)은 모두 ‘고유하게 할 일(기능)’이 있다. -> 인간의 기능은 무엇?

① “도끼”의 고유한 기능은 절단이고, 이 기능을 잘 실현하는 도끼가 ‘잘 드는 도끼’, ‘좋은’ 도끼이다. / “의자”의 기능 / “형광등”… à “눈”(eye)의 기능 / “손”, “다리”...

② “피리 연주자”의 고유한 기능은 피리 연주이다. 이 기능을 ‘잘’ 실현하면, 그는 피리를 잘 연주하는 ‘좋은’ 피리 연주자이다. “의사”, “선생님”, “학생”…)

è 모든 것들은 ‘고유하게 할 일(기능)’이 있다.

③ 도끼의 ‘절단 능력’, 피리 연주자의 ‘연주 능력’이 바로 각각의 ‘기능’이다. -> 기능을 “잘” 발휘하는 것이 ‘행복’

④ 좋은 피리 연주자나 그냥 피리 연주자(좋은 도끼와 그냥 도끼) 모두 ‘기능’은 똑 같다. 하 지만 훌륭한 피리 연주자(도끼)에게는 그렇지 못한 연주자에게 없는 것이 있다. “탁월한 연 주 능력(절단 능력)”이 그것이다. è 각각의 기능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것이 각각의 행복 이다.

(5) “인간으로서의” 행복

- 행복은 다른 사물, 동물, 식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잘 행동하는 것, 잘 사는 것이다. -> 최고 목적으로서 행복은 ‘인간으로서’ 잘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를 알아야, “인간”의 고유한 할 일, “인간”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행복’을 알 수 있 다. - “기능 논변” 정리

① 각자가 가진 고유한 기능이 있는데, 이 기능을 잘 실현할 때 최선의 상태에 이른다.

② 인간에게 고유한 기능이 있는데, 이 기능을 잘 실현할 때 행복하다. è 인간의 행복은 “인 간의 고유한 기능”을 잘 발휘하는 것이다.

(6) 인간의 고유한 기능은 무엇인가? -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에는 세 가지가 있다. (능 력 = 기능)

① 영양을 섭취하고 성장하는 능력 (식물적 기능)

② 감각하고 운동하고 욕망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능력 (동물적 기능)

③ 생각하는 능력 (인간의 기능)

è 따라서 인간의 행복은 무엇보다 세 번째 “생각하는 기능”을 잘 발휘하는 것이다.

(7) “생각하는 기능”의 두 종류

- “생각하는 기능”은 두 가지 방향으로 발휘된다.

① 순수하게 생각하는 기능. 수학 문제를 풀거나 왜 사는지를 고민하는 것처럼 직접 행동 과 무관한 이성 사용. -> 이론이성

② 동물적 기능이 올바르게 발휘되도록 통제하는 기능. 빵을 얼마나 먹을지 고민하고, 화 나는 일에 대해 참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정서나 욕구와 관련된 일을 고민하는 이성 사용. -> 실천 이성. [정서나 욕구를 통제할 때 필요한 이성]

è 둘 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

(8) 두 종류의 이성 능력을 잘(탁월하게) 발휘한다는 것은?

- 사람이 잘 살기 위해서는 인간의 고유한 기능, 즉 이성 기능을 잘 실현해야 한다.

- 이성 기능(이성 능력)의 두 가지 “탁월성”

- 이때 “탁월성”이 곧 “덕”이다.

è 순수이성, 실천이성 둘 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 è 실천이성의 기능 을 잘 발휘하려면?: 감정이나 욕망을 잘 통제 -> “중용”의 상태

(9) “중용”이란?

Ex> ‘용기’는 만용과 비겁 중간.

① 여친과 길을 가다 깡패가 시비를 건다. 어떻게 할까? 이때 용기가 뭘까? 용감하게 맞짱뜬 다? 용감하게 도망간다? 이것은 만용과 비겁이다. 용기는 지나침과 부족함의 중간이다. (예컨대 ‘여자친구를 보호하면서 내가 다 맞는거다. 사람들이 올 때까지.’)

② 매 상황마다 용기, 절제의 내용은 달라진다. 여덟 살짜리 꼬마가 내 여친을 내놓으란다. 용 기. 꿀밤을 때리고 알아듣게 타이르는 것이다. ‘여친 보호하고 맞아주는 것’이 아니라.

③ 용기는 ‘두려움(과 태연함)’이라는 감정을 너무 지나치지도(비겁), 너무 모자라지도(만용) 않 게 적절하게(즉 중용에 맞게)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다. - 이때 용기는 ‘덕’이고, 비겁과 만용은 ‘악덕’이다. è 덕(탁월함)은 감정이나 욕망을 잘 조절하는 중용의 상태이다.

 

1. 스토아학파: 세계시민주의와 무정념

• 개요

- 기원전 3세기 키프로스 섬 키티움 출신의 제논이 창설

- 원래 무역상이었다가 아테네에 난파된 사건으로 학당 설립

- 학당의 주랑(스토아)을 오가며 강의를 해서 ‘스토아’ 학파로 불리게 됨

- 초, 중기 스토아주의는 형이상학, 자연철학을 주로 연구

- 후기 스토아주의는 로마를 중심으로 노예부터 황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됨 (에

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서구 사상사에 현재까지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함

• 스토아학파의 핵심 주장

⑴ 우주에 관한 결정론: 우주 전체는 법칙, 즉 자연 법칙을 따름 à 우주와 자연 안에는 ‘신의 섭리’가 깃들어 있음 à 신은 세계와 분리되어 있지 않은 일종의 세계영혼(The World Soul) à 우리는 저마다 신성한 불(신)의 일부를 품고 있음 à 세상 만물은 자연의 일부

⑵ 자유의지: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신의 뜻[=자연의 이성적 목적]과 일치시킬 경우에만 자연 과 조화 à 덕은 자연의 법칙(logos)과 일치된 의지 속에 있음 à 사악한 사람은 억지로 신 에게 복종하지만, 선한 사람은 자유의지에 따라 복종 à 유일한 참된 선은 덕(건강, 행복, 재산 같은 것들은 중요하지 않음) à 현실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모든 일은 그 사람 자신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음

※ 철학의 체계(나무의 비유):

ⓐ 논리학(logikê) : 보호대 역할을 하는 울타리

ⓑ 자연학(physikê) : 땅과 나무

ⓒ 윤리학(ethikê) : 열매

(동물의 비유: ⓐ 논리학은 뼈와 힘줄, ⓑ 자연학은 피와 살, ⓒ 윤리학은 영혼)

⑶ 아파테이아 apatheia: 부동심, 평정심 à 신의 뜻에 합치하여 정념(pathos)에 휘둘리지 않 는 상태이자 모든 정념, 감정에서 해방된 상태 à 판단을 참되게 함으로써 거짓에서 벗어나 각자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음

• 정념의 극복 : 아파테이아, 무정념의 상태

- 대부분의 사람은 탐욕, 불안, 근심, 두려움, 분노, 괴로움, 좌절, 후회, 허망함, 시기, 질투 등의 온갖 정념, 감정(pathos)에 시달림

- 정념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이성적 합리성이 작동되지 못할 때 얻어진 오류 판단

- 따라서 정념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탁월한 치료책으로서 apatheia 제시.

- ‘무정념’의 상태가 스토아 윤리학의 목표

- 이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에픽테토스의 ‘우리에게 달린 것/우리에게 달리지 않은 것’의 구분 à 자연 법칙에 거스르려다가 정념에 휘둘리지 않고, 자연 법칙 내에서 할 수 있는 것 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여, 후자에만 집중

 

• 스토아학파의 대표 철학자: 에픽테토스 - 노예 출신 철학자 (55년경~135년경)

- 주요저서 엥케이리디온, 강의 (<인생을 바라보는 지혜>, <불확실한 세상을 사는 확실한 지혜>, <왕보다 자유로운 삶>... / 같은 스토아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과 더불어 자기 계발서의 전범)

- 그리스인으로 원래 노예였다가 자유민이 되어 행정장관까지 지냄 à 노예 시절 잔혹한 형벌 로 절름발이가 되었음 à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지식인들은 쓸모가 없다면서 철학자들을 모 두 추방한 90년까지 로마에서 살며 가르쳤음

- 에픽테토스가 살았던 로마 제국 시대의 상황: 지배 계급에게는 행복한 시절이었을지 몰라도 모든 사람에게 삶의 활력을 주는 시대가 아니었음 à 노예제도의 폐해, 검투사들의 혈투를 즐김, 양곡이 풍부하지 않음, 권력은 황제가 임명한 행정장관들에게 집중

-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인내와 극기, 체념의 윤리를 가르침

 

• 에픽테토스의 핵심 주장

⑴ 덕이 최고선이자 참된 선

- 우리는 지상의 죄수들로 지상의 육체 속에 갇혀 있지만, 육체 속에 갇힌 우리에게는 신성이 깃들어 있으며, 신성을 일깨워 덕을 쌓을 때 속세에서 해방된 자유를 누릴 수 있음

- 우리에게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과 달려 있지 않은 것 구별 à 전자는 내적 자유와 덕/ 후 자는 타고난 신체, 가족, 부, 명예 같은 외적인 것

- 덕은 가혹한 운명이나 불운에 대처하는 삶의 기술; 처세, 체념의 윤리

⑵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

- 우리는 모두 신이 우리에게 나눠준 신성의 일부를 간직한다는 점에서 모두 동등 à 신은 인 간의 아버지이기에 우리는 모두 형제

- 인류의 형제애를 인정하고 노예들의 평등을 주장

- 노예제도를 승인한 철학자들보다 도덕적 관점에서 고상 à 당대의 관습적 사고에 따르면 속 세를 초월한 견해

- 후대 인류에게 전한 귀중한 가르침

• 세계시민주의

- 스토아학파에 따르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상호교제와 공동체를 위해 존재- 또한 폴리 스는 거주지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거주하는 사람들의 조직체계를 가리키기도 하며, 폴리스 는 법칙에 의해 질서지워지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사람들의 집합체가 아니 라 조직체

- 여기서 법칙이란 법률적 규범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합리성(옳고 그름의 기준이자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될 일에 대한 규정)을 가리킴.

• kosmos로서의 kosmopolis

- 현존하는 어떤 인간 조직도 올바른 이성, 합리성에 의해 질서 지워진 것이 아니므로, 지구 상에 존재하는 기존의 공동체는 폴리스일 수 없음

- 오히려 전 우주야말로 올바른 이성에 의해 질서 지워진 것이며 온 인류가 사는 곳

- 따라서 우주 전체가 진정한 의미의 폴리스

- 결국 스토아학파의 (코스모)폴리스는 전우주를 포괄하는 개념이며, 여기에는 인간이나 동물 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와 지구, 별, 심지어 신들까지도 포함됨.

 

• 로마 스토아주의(Roman Stoicism): 후기 스토아주의

- 철학의 대중화: 노예(에픽테토스)부터 로마 황제에 이르기까지(황제 마루쿠스 아우렐리우스 121-180, <명상록>). - 공화정 말기부터 로마의 보수적 지식인들은 스토아 사상이 로마의 전통적 덕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

- 그들은 로마가 제정으로 넘어가면서 전통적 덕목이 쇠퇴함을 한탄

- 스토아 사상을 도덕적 타락에 대한 방어책이자, 절대 권력(황제)의 지배와 전횡에 대한 정신 적 저항의 무기로 활용

• 스토아주의의 영향사

⑴ 초대 교부들의 비판과 수용

- 테르툴리아누스, 퀴프리아누스 등 초대교부들은 스토아주의를 이교도 철학으로 간주하고 경 계했지만, 로고스, 섭리, 덕, 프네우마 등의 스토아 용어들을 신학 용어로 수용

- 스토아 세계관과 윤리학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정신적・문화적 지향성을 강화

⑵ 자연법

- 모든 인류가 자연적으로 알고 따르며 지킬 수 있는 법이 존재한다는 스토아학파의 생각은 로마 법률을 거쳐 중세로 전승

- 보편적인 법으로서의 자연법과 보편법의 특수화로서의 실정법을 구분하는 로마인들의 생각 은 12세기 존 살리스베리와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면밀하게 논의됨

⑶ 에픽테토스와 마테오 리치

-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은 초대교회 때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들이 손에 들고 다니면서 애독한 책

- 오리게네스, <켈수스 논박> : “플라톤은 학자들의 손 안에만 있었으나, 에픽테토스는 그의 말을 통해 삶의 지혜를 얻고자 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크게 찬양받았다.” - <엥케이리디 온>은 17세기 초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에 의해 동양에서 <25言>이라는 책으로 발췌 의역되어 소개됨

- 마테오 리치는 “에픽테토스”라는 이름을 명시적으로 기술하지 않았지만, <엥케이리디온> 원 문 일부를 자신의 기억에 의존해 번역 (유교와 유사하다고 생각)

⑷ 신스토아주의

- 후기 르네상스 및 근대 초기를 살았던 립시우스(1547-1606)는, 스토아주의를 인간 본성에 관한 철저한 인문주의적(그리고 그리스도교적) 철학으로 해석

- “자연과의 일치”라는 스토아적 통찰을 근대적 휴머니즘으로 복권시키려는 그의 노력으로 인 해 소위 '신 스토아주의’운동이 형성

- 그로티우스(H. Grotius)에 의한 자연법 전통의 근대화와 스피노자(B. Spinoza)의 철학은 신 스토아주의 운동의 대표적 사례

 

2. 에피쿠로스주의: 쾌락과 ataraxia

• 에피쿠로스(기원전 341-270)

- 구 밀레토스 인근 사모스 섬에서 아테네 출신 이주민의 아 들로 출생

- 18세 때 병역의무 때문에 아테네에 와서, 크세노크라테스의 강의를 듣기 위해 아카데미아를 방문

- 기원전 307년 아테네에서 서구 최초의 대안 생활공동체(정원, kepos) 설립 à ‘우정’의 중시

•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

- 고통(괴로움)은 ‘나쁜 것(악(惡))’이고, 쾌락(즐거움)은 ‘좋은 것(선(善))’이다.

- 인간이 잘 살기 위해서는 나쁜 것은 피하고, 좋은 것은 추구하면 된다.

- 왜 사는가? à 행복해지기 위해서... à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à 인간이 가장 싫어 하는 것은 무엇인가? à 고통, 괴로움 (고(苦)) à 따라서 행복이란? à 고통과 괴로움을 피하 는 것... 즉 즐거움과 쾌락을 얻는 것...

- 그렇다면 왜 사는가? à 행복해지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쾌락을 얻기 위해서 산다 à ‘쾌락 주의’

- 경험주의적 태도

- “쾌는 중요한 그리고 생득적(生得的)인 선(善)이라고 인정된다. 우리의 모든 선택과 회피의 행동은 ‘쾌’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우리의 쾌 경험을 ‘모든 좋은 것을 판단하는 척도’로 사용하면서 쾌에로 소급한다.”

• 어떤 종류의 쾌락을 추구해야 하는가?

- ‘쾌락’에도 종류가 있다. (에피쿠로스에 대한 오해의 원천)

- “쾌락이란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듯, ‘방탕한 사람들의 쾌락’이나 또는 ‘관능적 즐거움에 속 하는 쾌락’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à 그것은 ‘육체의 고통으로부터의 부재(不在)와 영혼의 혼란으로부터의 부재’를 의미한다.

- 따라서 그가 추구하려던 쾌락은 “정신의 아름답고도 지속적인 황홀경”에서 나온다. 이는 좋 은 사람들과의 대화, 음악 및 예술 감상, 무엇보다 냉정한 추론으로서의 철학함을 통해 달 성될 수 있는 정신적인 것이다.

• 소극적, 부정적 개념

- 적극적으로 육체적,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는 데서는 고통만 가중될 뿐이니(쾌락의 역설), 온 갖 고통을 제거하는 소극적 쾌락을 추구해야 한다.

-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정의상 ‘쾌의 추구’ 쪽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에 있다. 고통 으로부터의 해방은 고통이 사라진 부재(不在)의 상태이다.

- 이런 의미에서 에피쿠로스 쾌락주의는 쾌락을 추구하는 데서 성립하는 게 아니라, 고통을 제거하는 데서 성립한다고 말해야 한다. [= 불교의 공(空)과 비슷함]

• (소극적) 쾌락주의, 정념으로부터의 해방

- 고통을 가져오는 ‘정념’으로부터 해방된 자가 행복한 자이다. (정념: 두려움, 공포, 탐닉, 욕 망, 증오, 후회, 시기, 질투, 슬픔, 절망 등...)

- 에피쿠로스는 정념을 ‘마음 속 격렬한 운동’으로 본다. 정념에 빠진 자는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다. 마치 브레이크가 터져버린 기관차의 운전자가 어찌할 줄 모르면서 기관차의 질주 대로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과 같다.

- 정념을 없애기 위해서는 ‘마음 속 운동’을 ‘정지’시켜야 한다. 잔잔하고 고요한 마음의 상태, 그래서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마음의 상태를 “(고통이 제거된, 정념으로부터 벗어난) 영혼의 평온상태”, 즉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한다.

- 정신적 고통, 동요의 주요한 원인 : (1) 신들에 대한 공포와 (2) 죽음에 대한 공포

(1) 신에 대한 논변

- 에피쿠로스는 신의 존재를 인정했으며, 신들이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음. <전제>

- 신들이 행복하다면 굳이 인간들 때문에 더 기뻐하거나 고통스러워할 이유는 없음. à 인생사 에 시시콜콜 간섭하다 보면 행복할 겨를이 없을 것이기 때문.

- 따라서 신들은 인간의 행동에 무관심하고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관여하지 않음 à 우 리는 신들의 분노나 처벌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음 <결론>

※ 죽음이 고통을 가져올 때..

① 사람들은 평상시 죽음이 두려워 어떻게든 삶을 늘리려고 열망한다. 조그만 질병에도 병원 을 들락거리며 몸에 좋다는 온갖 보양식을 찾는다.

② 동시에 그들은 사람이 너무 고통스러울 때 어떻게 해서든 죽으려고 열망한다. 희망이 없 고, 허무할 때 그들은 자살을 꿈꾸는 것이다.

- 죽음을 피하려고 하든, 꿈꾸든 간에 그들이 자신의 “삶”을 그 자체로 누리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회피의 대상이든 소망의 대상이든 보통 사람들의 삶은 이렇게 죽음의 공포가 지배한다. 이것이야말로 ‘영혼의 혼란’, ‘최고의 고통을 주는 혼란’이다.

(2) 죽음에 대한 논변

- 내가 죽은 다음에 ‘나’는 존재하지 않음 à 고통과 두려움을 겪을 주체가 없는데 죽음을 고 통스러워하고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음. à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님.

- 분해되어 소멸한 것은 감각이 없으며 감각이 없으면, 감각을 통한 고통도 겪을 수 없음.

- 죽은 자들이 저승에서 고통을 겪는다는 이야기는 허황된 이야기일 뿐이며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

- 현자가 죽음에 대해 취해야 하는 태도는 이런 것이다.

- 죽지 않으려고 하거나, 죽으려고 하지 말고, 다시 말해서 ‘죽음’이 ‘삶’을 좌지우지하지 못하 도록 해야 한다. 이는 삶을 있는 그대로 누리라는 것이다. 6개월 후에 죽는다 해도 그는 죽 음의 공포에 휩싸임 없이(위 논변대로), 남은 삶을 누릴 수 있다.

- 행복한 삶은 쾌락적인 삶이고, 쾌락적 삶 중에서 영혼의 혼란으로부터 평정을 가져다주는 지적인 쾌락을 누리면서 살 일이다.

• 최고로 행복한 사람, 현자 (sophos)

- 정신적 동요와 두려움은 ‘무지’ 때문에 발생함

- 즉 대중들이 죽음과 신들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자연현상의 궁극적 원인에 관한 올바른 지식 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

-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잘못된 생각들을 제거하는 동시에 우리 마음 속에 올바른 믿음을 심 어줌으로써 죽음과 신이 두려워할 만한 것이 아님을 입증하고자 함

- 죽음에 대한 공포를 제거하고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신과도 같은 사람

è 신과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 진정한 쾌락을 획득한 사람으로서의 ‘현자’

• 쾌락주의와 우정

- 에피쿠로스는 전통적 폴리스의 한계를 넘어선 우정 공동체를 추구

- 하지만 쾌락의 추구, 즉 고통의 제거가 모든 행동의 최종적 목표라면, 타인에 대한 진정한 우정(=사랑)을 추구할 이유가 있을까?

- 에피쿠로스는 우정이 마음의 평정을 위해 유용하다고 생각.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우리의 관심은 나의 쾌락이지만 우리는 우리자신 뿐 아니라 친구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수 있 는 존재임. 왜냐하면 우정이 없다면 인생에서 지속적인 기쁨을 누릴 수 없으며, 우리가 친 구들을 우리 자신만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정을 유지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진정한 마 음의 평정은 멀어지기 때문.

- 따라서 우정은 쾌락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짐

• 마음의 평정에 이르는 방법: 영혼 치유법

⑴ 현자의 목표는 쾌락을 주는 것보다 고통을 없애는 일 à 고통을 없앰으로써 참다운 쾌락, 즉 아타락시아에 도달 à 철학은 행복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 계획된 실천 체계 à 상식이 필요할 뿐, 정교한 논리 훈련은 필요 없음

⑵ ‘성적인 사랑’은 가장 적극적인 쾌락 중 하나로 금지 à 사회생활을 통해 얻는 쾌락 가운데 제일 안전한 ‘우정’을 권장 à 우정은 지혜와 마음의 평정에 도달하도록 돕는 감정

⑶ 아타락시아를 방해하는 주요인은 두려움과 공포심 à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두 원인 은 신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à 신들은 인간의 일에 간섭할 이유가 없음 / 영혼이란 육체 가 죽으면 소멸함 à 이를 입증하는 형이상학을 모색 à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 계승

 

• 에피쿠로스주의의 영향사: 헬레니즘 시기 에피쿠로스주의의 확산

- 기원전 1세기 중엽 키케로는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이 이탈리아 전역을 장악했으며 특히 무식 한 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보고

-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비롯한 저명인사들도 에피쿠로스주의에 대해 호의적이었음

- 에피쿠로스주의는 신의 개입이나 섭리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많은 로마 사상가들(가령 스 토아 학파와 초대 교회 교부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에피쿠로스 공동체는 아카데미아 학파나 소요학파보다 오랜 기간 명맥을 유지

- 초대교회의 교부들이 보기에 에피쿠로스는 세계의 질서와 신의 섭리를 의문시한 무신론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피쿠로스주의자들과 초대 교부들은 이교도적 미신에 대한 반감을 공유

- 아우구스티누스(354-430)와 락탄티우스(약 240-320)도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와 유물론적 신론을 비판하면서도, 에피쿠로스가 무절제한 육체적 욕구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인 정

• 오해와 맹목적 비난

- 중세 이후 근대 초기까지 에피쿠로스주의는 무신론과 거의 동의어로 간주되었고, 에피쿠로 스주의에 대한 오해와 맹목적 비난이 지속됨

- 그래서 epicure라는 단어는 ‘식도락가’를 뜻하게 되었고, epicureanism은 ‘식도락’이라는 의미로 사용됨. 에피쿠로스주의에 대한 이러한 오해는 중세 이후 에피쿠로스나 루크레티우 스의 글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음.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라틴 어 판은 1675년에 이르러서야 영국에서 출판

-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에서 에피쿠로스주의는 인간을 타락시키고 사회적 불안을 일으키는 세력으로 간주됨 ß 아마도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이유

- 그 결과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를 흠모하면서 우주 안에 무한한 수의 세계가 존재한다 고 주장한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는 이단 혐의로 화형당함.

• 관심의 회복

- 에피쿠로스주의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 사람은 가톨릭 사제였던 피에르 가상디

(1592-1655). 그는 원자론을 기독교 신학과 접목시켜서 신이 원자들을 창조했고 운동시켰 다고 주장. 즉 우주는 원자들의 우연한 결합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신의 선한 섭리가 표현된 결과(즉 신의 피조물)라는 것. 한편 가상디는 에피쿠로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무한한 수의 원자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 오직 신만이 무한하기 때문

- 가상디의 영향을 받은 영국의 대표적 철학자가 토마스 홉스(1588-1679)는 『리바이어던』 (1651)에서 존재 하는 모든 것이 물질이며, 자연현상은 운동하는 물질에 의해 생겨난다

고 주장

- 인간을 자연 세계의 일부로 간주하는 에피쿠로스의 자연주의 철학이론은 17, 8세기 이후 서구 자연학과 윤리학에서 각광받고 수용됨. 가령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은 에피쿠로 스주의를 공리주의의 선구로 파악했고, 데니스 디드로(1713-1784)와 토마스 제퍼슨 (1743-1826), 제레미 벤담(1748-1832) 등은 자신을 에피쿠로스주의자로 부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