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초짜 철학도의 분투기
기말고사가 가까워졌다.
이즈음에는
과목마다 리포트를 작성해 제출해야 한다.
특히 페이지가 많은 리포트는
늘 부담이다.
마감을 앞두기라도 한다면
초조해 애초에 구상한 리포트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다.
하여 시험공부보다
리포트 작성을 먼저 끝내야
마음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오늘 아침,
드디어 고대 서양철학
과제를 제출하고 나니
다소 마음이 가볍다.
이제 딱 하나 남은 리포트
‘금오신화’를 읽은 후의
독후감뿐이다.
이건 주말에 끝내기로...
이번 서양고대철학의
리포트 주제로 나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고찰‘
(호메로스에서 플라톤까지)을 택했다.
짜깁기 수준에 불과하지만
여하튼 끝냈다는데
의의를 찾아야겠다.
‘인간의 영혼’에 대한 고찰‘
(호메로스에서 플라톤까지)
목차
<서론>
<본론>
1.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영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1). ‘영혼’이란 단어의 기원
2) 영혼의 정체성은?
3)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4) 영혼 개념의 변천
2. 소크라테스는 영혼에 대해 무엇을 언급했을까?
3. 플라톤은 영혼에 대해 어떤 주장들을 펼쳤을까?
1) 플라톤의 영혼불멸설과 영혼 윤회설
2) 플라톤의 상기론
3) 영혼은 조화가 아니며 생명의 원리이다.
4) 플라톤의 영혼 삼분설
5) 플라톤의 영혼의 해방
6) 영혼의 돌봄
<마무리>
<서론>
나는 지난 1학년 2학기 때 소크라테스의 swan song, “네 영혼을 잘 돌보라.”라는 말을 듣고, 도대체 영혼이란 무엇이고 또 그 영혼을 잘 돌보는 방법은 어떤 것인지 몹시 궁금했으나 더 번잡한 일들에 묻혀 잊고 지냈다. 사실 지난 삶의 잡다한 경험으로 나에게 영혼이란 인간의 ‘넋(혼)’, 혹은 ‘정신세계’와 연결되었는데 나는 한편 영혼이 없는 생명체가 있을까, 라는 의문과 함께 영혼은 생명체가 지닌 필수적인 항목이며 만일 인간에게 영혼이 없다면 그건 일종의 기계와 같은 물질이 아닐까, 라는 얄궂은 상상을 해보곤 했다. 하여 이번 과제를 기회로 좀 더 ‘인간의 영혼’이란 개념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우선 일반 상식선에서 영혼의 개념을 살펴보면 종교, 철학, 문화에 따라 다르게 정의 됨을 알아챌 수 있겠다.
종교관에 따라 분류한다면 기독교에서의 말하는 영혼이란 죽음을 맞이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부여한 불멸의 존재인 영혼이 육체를 이탈한 후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존재하는, 하나님의 구원에 따라 천국이나 지옥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고 하는 인간의 영혼이 있겠고 불교적 관점에서 영혼(아트만)은 개인의 행위와 업보에 따라 윤회를 거듭하며 고정된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화하는 것으로 설정되는데, 힌두교적인 관점에서 영혼(아트만)은 불멸의 존재로, 육체와는 별개의 존재로 윤회를 통해 계속해서 새로운 몸을 받으며, 궁극적으로는 해탈(목샤)을 목표로 하며 이슬람에서의 영혼은 알라가 인간에게 준 불멸의 존재로, 죽음 후에는 부활하여 최후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상식선에서 나름 개념화되었을 수도 있겠다.
더불어 동양철학에서 영혼에 대한 관점들은 서양철학과는 다른 독특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데 먼저 유가를 기초로 한 유교(儒敎)에서는 인간의 영혼을 혼(魂)과 백(魄)으로 나누며 혼(魂)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정신적 요소로, 사후에는 조상신으로서 숭배받고 백(魄)은 물질적 요소로, 몸과 함께 땅으로 돌아가는 이른바 혼백 사상(魂魄思想)이 탄생해 조상 숭배와 제사의 중요한 기반이 된다.
또한 노장사상(老莊思想)을 기초로 하는 도교(道敎)에서는 영혼을 다층적으로 보는데 인간은 여러 혼(魂)과 백(魄)으로 구성되며, 각각의 혼백(魂魄)이 특정 기능을 담당하며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불사(不死)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하며, 이를 위해 수련과 도덕적 생활을 중시하게 된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기존 힌두교의 교리인 아트만(영혼)이라는 고정된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는. 대신, 무아(無我)의 개념을 강조하며, 이는 모든 존재가 고정된 자아 없이 변화하고 상호 의존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으로 윤회는 개인의 행위(業, karma)에 의해 계속되며, 해탈은 이러한 윤회의 고리를 끊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처럼 동양철학에서는 영혼에 대한 개념이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되며, 각 사상은 고유의 방법으로 인간의 존재(存在)와 사후(死後) 세계를 이해한다. 이러한 영혼에 대한 개념은 동양 문화와 종교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며, 개인과 사회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쳐왔다.
그렇다면 서양철학에서의 영혼의 대한 관점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변천하게 되었을까? 본 고에서는 아무래도 고대 서양철학의 과제인 만큼 고대 그리스의 문화와 사상을 중심으로 즉 고대 그리스의 영혼의 개념으로부터 플라톤까지의 영혼론을 살펴보려 한다.
<본론>
1.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영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1). ‘영혼’이란 단어의 기원
그리스어로 ‘영혼’을 뜻하는‘프쉬케(psyche)’는 그리스신화에서 에로스(Eros)와 결합하여 신들로부터 불멸을 선물 받은 여인 ‘프쉬케(Psyche)’의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어원적으로 ‘숨을 쉬다. ’를 의미하는 ‘프쉬코(psycho)’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영혼’의 개념을 이와 같이 ‘숨’ 혹은 ‘목숨’, ‘생명’ 등의 의미로 묘사되고 있는 장면을 고대 그리스 서사시 시대의 호메로스의 작품 속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데 “죽음의 순간에도 영혼은 소멸되지 않고 육체를 떠나 하데스에게 가는 것” 『일리아스』7권, 11권, 16권, 22권; (『오디세이아』10권)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사망한 사람의 영혼은 “숨(pneuma)”이나 “연기”처럼 산산이 흩어지거나(『일리아스』16권, 23권) 혹은 “그림자(skia)” (『오디세이아』11권) 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또한 헥토르가 전투 중에 다쳐서 실신한 사르페논을 보면서 “그의 영혼이 그를 떠났다.”(『일리아스』5권) 라고 묘사된 대목을 볼 때 인간은 죽었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실신(失神)했을 때에도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죽음의 순간에 영혼은 “헤르메스의 황금 지팡이를 따라 박쥐처럼 찍찍거리며 지하 세계로 인도”되는데(『오디세이아』24권), 하데스의 영혼들은 거기서 마치 아무런 의식도 없는 듯이 떠돌아다니는 모양새를 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지하 세계로 내려간 오디세우스를 알아보지 못하다가 희생물로 바쳐진 짐승의 검은 피를 받아먹고서야 겨우 기억을 되찾고 오디세우스와 이야기를 짧게 나누는 대목(『오디세이아』11권)이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호메로스 시대에는 ‘영혼’이 감정이나 이성 등의 다양한 기능들을 포괄하지 못하고, 다만 생명의 원리로서만 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호메로스의 작품에서는 대개 영혼이 죽음과 죽은 자들에게만 한정되어 사용되기 때문이다. 또한 호메로스는 살아 있는 ‘인격’을 가르키는 어떠한 낱말도 가지고 있지 않다. 즉 호메로스의 영혼 개념은 인식 능력과는 별다른 관련이 없으며 단순히 ‘생명’의 원리로만 사용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그것은 이 세계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갖고 있는 것이며 살아 있지 않은 것들과의 구별해 주는 원리로 이것은 영혼을 포괄적으로 사용하는 현대적인 용법에 비해 상당히 제한적으로 보인다. 결국 호메로스에서는 영혼 대부분이 목숨이라는 단어와 대체해 사용되었으로 영혼이란 단어 속에는 단순히 생명이나 목숨 이상의 어떤 의미가 규정되지 않은 채로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겠다.
2) 영혼의 정체성은?
이렇듯 호메로스에게 인간의 영혼은 생명 자체와 같았다. 영혼이 빠져나간 인간의 몸은 죽음의 전리품에 불과하며 인간은 언제가는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들은 끊임없이 “왜 인간이 신과 같이 불멸할 수 없는가?“, 혹은 ”만약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살아남아 어디로 가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태어난 후에도 불멸하는 신, 그들은 죽음을 통과하지 않는 존재인데 반해 인간들은 태어나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존재이다. 죽음이라는 통과 의례를 거치면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으며 이 세계에 단지 시체를 남겨두고 영혼이 신체로부터 빠져나와 하데스에서 살아간다고 하지만 그것은 허상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가 남긴 작품들에서 호메로스는 죽은 자의 영혼에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죽은 자의 영혼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죽음 이후에는 영혼은 살아 있을 때 가졌던 인격을 보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디세이아 제11권에 나오는 지하 세계의 영혼들은 특이한 방식으로 동일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온다. 영혼들은 하데스의 영혼들을 알아 보지만 죽은 자의 영혼들 자체는 처음에 오디세우스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렇듯 호메로스는 죽은 자의 영혼을 만질 수도 붙잡을 수도 없는, 거의 물질적 특성을 가지지 않는데도 눈에 보이는 지각할 수 있는 존재였다. 아마 호메로스가 보여주는 영혼은 우리가 말하는 현대적인 의미의 영혼이 아니고 ‘허상’ 혹은 ‘환영’ 혹은 ‘모사물’과 같은 어떤 것이지 않았을까? 호메로스에서 인간은 죽는 순간에 영혼이 빠져나가 하데스로 가게 된다.
3)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살아있는 인간의 영혼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물론 영혼이 비물질적인 어떤 것이라면 영혼의 공간적 위치를 말하려 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비물질적인 것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초기 그리스인들은 살아 있는 인간의 영혼이 머무는 자리를 분명 신체(soma)라고 지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도 나의 영혼이 나의 신체에 있다고 생각하지, 신체 밖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리스인들 또한 영혼이 신체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영혼이 신체의 어디에 있다고 생각했을까?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듯 그리스인들도 인간의 생명과 밀접한 곳은 머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명의 원리로서 영혼은 대개 머리와 연관된다. 그렇지만 때로는 예외적으로 영혼이 ‘사지’에서 빠져나가는 걸로 묘사되기도 한다.
호메로스의 경우에도 대개 머리(kephale)는 ‘생명’과 ‘명예’와 연관되어 있다. 우선 머리는 생명의 자리와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 호메로스는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표현을 “너의 머리로 대가를 치를 것이다.” 즉 “너의 머리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라고 한다.
다음으로 머리는 명예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들은 맹세를 할 때도 자신의 머리에 걸고 한다. 제우스는 자신이 잠을 자는 동안에 트로이군이 전쟁에서 패하게 되자 헤라가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자신을 유혹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헤라가 포세이돈과 짜고 그리스군이 승리하도록 만든 것이라고 비난을 하며 위협을 한다. 그러자 헤라는 자신이 맹세코 포세이돈과 사전 모의를 해서 제우스를 잠들게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녀는 제우스에게 하늘과 땅 및 스튁스(styx)강에 걸고 맹세할 뿐만 아니라 제우스 자신의 거룩한 머리에 걸고 맹세를 한다.
나아가 신들뿐만 아니라 인간들도 누구한테 맹세를 하거나 또는 누군가에 의해 맹세를 하게 될 때 머리에 걸고 한다. 이렇듯 그리스인들은 영혼이 머무는 머리를 몸 전체의 대표적인 부분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머리는 목숨이 들어있는 부분으로서 중요하지만 점차 영혼이 다양한 기능을 포괄하게 되면서 머리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4) 영혼 개념의 변천
초기 그리스에서 주로 생명력을 표현하는데 사용되던 영혼은 후대로 가면서 점차 보다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제 영혼은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의 경우에서와 같이 단순히 생명을 의미하지 않게 된다. 자아와 욕망의 주체로서의 영혼, 감정의 원천으로서의 영혼으로서의 기능적 측면을 강조되기도 한다. 이것들은 초기 그리스 서사시와 서정시 및 비극을 통해 나타나는데 우리가 영혼의 기능이라 말하는 다양한 능력들이 영혼의 개념에 통합되어 나타나기 시작한다. 호메로스에게 영혼은 단지 죽은 자의 입에서 빠져나가는 ‘숨’ 같은 것이었다면 점차 영혼 이외에도 살아있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적, 지성적 활동을 지시하기 위해 튀모스(thymos), 누스(nous), 프렌(phren), 카르디아(kardia) 등과 같은 용어들이 독립적으로 사용된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 세계의 궁극적인 원인을 원리(arche)의 개념으로 설명했는데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는 ‘물’을 아르케로 보았다. 그에게 물은 이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인 질료이라고 주장하는데 그의 영혼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단편은 별로 없으나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탈레스는 영혼을 다른 것을 움직이게 하는 운동인으로 여겼다. “탈레스도 영혼을 다른 것을 움직이게 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돌(자석)이 철을 움직이게 한다는 이유로 그것이 혼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와 히피아스(Hippias)는 탈레스가 영혼이 없는 것에도 영혼을 부여했다고 말한다. 물론 탈레스가 자석이 다른 것을 끌어당기는 것을 보고 영혼을 가졌다고 주장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것처럼 다른 것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과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분명히 구별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탈레스는 모든 것들은 신들로 가득 차 있다고 했다. “탈레스는 신은 우주의 지성(nous)이다. 모든 것은 살아 있으며 다이몬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영혼이 전체(우주) 속에 혼합되었다고 믿은 다른 학자들의 생각과 연관된다. 이러한 단편을 두고 일부에서는 탈레스가 물활론(hylozoism)적 사고를 하고 있다고 하거나 또는 아직 신화적 사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먼저 물활론은 물질과 영혼의 구분을 분명하게 하지 못하는다는 전제에 기초하고 있기때문에 탈레스를 비롯한 밀레토스 학파를 단순히 물활론자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또한 탈레스의 주장이 신화적 사유와 연속적인 측면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근동의 우주 생선 신화는 거의 대부분 물로 시작하고 있다. 모든 생명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신화뿐만 아니라 철학에서도 모든 것의 근원 또는 원리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탈레스는 물을 신화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반복적인 관찰과 경험을 통해 얻은 결론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탈레스는 신화와 철학이라는 연속성과 단절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고대 자연철학자인 아낙시메네스는 영혼에 대해 보다 특별한 언급을 하고 있는데 그는 만물의 근원으로서 아낙시만드로스처럼 무한정한 것이 아니라 한정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공기를 가장 우선적인 원리로 놓았는데 공기는 희박과 농축에 따라 존재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공기가 희박하면 불로 되고 농축되면 바람으로, 구름으로 더 나아가 물로, 흙으로, 돌로 된다. 아낙시메네스는 이러한 운동이 영원하다고 하는데 여기서 공기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질료인 역할을 하지만 운동인의 역할도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낙시메네스가 공기를 원리로 삼은 것은 숨과 생명과의 연관성 때문이다.
인간은 살아있기 위해 숨을 쉬어야 한다. 생명체마다 숨을 쉬는 기관이나 방식은 다를 수 있지만 숨 혹은 호흡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숨과 공기가 생명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한에서 영혼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더 나아가 아낙시메네스는 공기가 신이라고 한다. 그것은 생성되며 측정할 수 없으며 한정되지 않으며 항상 운동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공기로부터 신들과 신적인 것들이 생성되었다는 주장을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아낙시메네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초기 자연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원리(arche)가 신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공기가 신이라는 아낙시메네스의 주장이 우주 안에 있는 신들 자체가 실제로 신적인 모든 것을 둘러싸는 공기로부터 나왔다는 취지로 추론할 수 있다.
영혼에 대한 아낙시메네스의 독특한 발상은 우주 안의 공기가 기능과 인간 안의 공기인 영혼의 기능을 유비적으로 설명한다는 점이다. 아낙시메네스가 공기가 존재하는 것들의 원리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모든 것들이 공기로부터 생겨나서 다시 공기로 해체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처럼 우리를 결합하는 것은 공기이므로 프네우마(pneuma)와 공기(aer)는 전 우주(kosmos)를 둘러싸고 있다.” 아낙시메네스에게 인간의 영혼은 분명 공기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혼이 우리를 결합하는 것처럼 공기도 우리를 결합한다는 것이다. 영혼인 공기는 바로 우리 자신의 단일성의 원리이다. “우리는 결합시키는 것”에서 ‘우리’는 영혼과 육체를 가리킬 수도 있고 육체의 다양한 부분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라면 영혼이 육체와 결합하여 지배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며 후자의 경우라면 육체의 다양한 부분들을 결합시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영혼이 육체를 결합시킨다는 생각은 소크라테스 이전 문헌에서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단순하게 죽음에 이르러 영혼이 육체를 떠나면 육체가 분해된다는 사실로부터 ‘결합되지 않은’ 것을 설명하려 할 수도 있다. 또한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세계의 숨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영원히 살아 있으며 신적이라고 말해진다. 인간 안에 우주의 숨 혹은 영혼이 우주를 결합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과 우주를 유비적으로 생각한 아낙시메네스의 사상은 아주 독특한 면을 보여주고 있지만 실제로 이미 당시 사회에 잘 알려진 사상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렇듯 초기 자연 철학자들에게 나타난 영혼 개념은 주로 생명이라는 특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특히 탈레스나 아낙시메네스가 모든 것의 궁극 원리를 물이나 공기라고 한 이유는 생명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으로 그리스 초기 자연 철학자들은 영혼의 주요 기능인 생명 현상을 모든 살아있는 것의 운동과 변화의 원리로 설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영혼은 감각과 지성 및 욕구의 기능을 하는 것이고 이러한 단초를 우리는 또한 헤라클레이토스와 아낙사고라스, 데모크리토스를 통해 거론할 수 있겠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서 죽고 죽음은 인간의 운명이다. 이것은 모든 존재의 생명과 소멸의 과정속에 있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깨어 있는 것과 잠든 것, 젊은 것과 늙은 것은 동일한 것이다. 왜냐면 살아 있는 것이 변하면 죽는 것이 되고, 깨어 있는 것이 변하면 자는 것이고 젊은 것이 변하면 늙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든 것은 순환하다. 그러나 그것은 일정한 법칙(logos)에 따라 변화한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는 개별적인 영혼 자체가 불멸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영혼은 물이 되는 것이, 물은 흙이 되는 것이, 흙은 물이 되는 것이, 물은 영혼이 되는 것이 죽음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서 영혼은 자기 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다. 그것은 불과 전혀 다른 특성을 가진 물과 흙 등으로 변화한다. 불이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물이나 흙으로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최초의 영혼이 물이나 흙과 같은 전혀 다른 실체로 되었다가 다시 불로 될 때, 여기서 불이나 물 및 흙은 보편적인 것이지 개별적인 것은 아니다. 만약 개인 영혼의 윤회설을 주장하면 헤라클레이토스가 죽음 이후에 개별자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줄 아주 강력한 반증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죽음 이후에 보상과 관련하여 “더 큰 죽음은 더 큰 몫을 받는다.”와 같은 단편은 마치 개별적인 영혼을 전재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가 인간 삶에 대해 설명한 것을 보면 그러한 개념에 대한 부정을 전제하고 있다. 우리가 이 점에 주목하는 이유는 개별적인 영혼의 동일성이 확보되어야 죽음 이후에 개별적인 영혼의 불멸과 윤회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혼 개념은 오르페우스 종교와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혼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헤라클레이토스는 영혼을 제1원리라 불렀고 가장 덜 물질적이며 영원한 흐름 속에 있다고 주장했다. 우선 영혼이 제1원리라는 것은 모든 것들이 영혼으로부터 생성되어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영혼은 자연(physis)에 국한되어 있다. 다음으로 영혼이 가장 덜 물질적이라는 주장은 헤라클레이토스가 영혼이 물질적이라고 생각을 아직 떨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는 여전히 영혼을 물질적인 것으로 생각하며 ‘불’을 비유한다. 영혼의 운반체는 항상 살아 있으며 항상 운동하는 불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을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표현할 때 빛으로 비유한다. 빛은 불의 가장 건조한 상태로서 설명된다. 영혼이 건조하게 되어 빛과 같이 되면 가장 현명하고 가장 뛰어나게 된다. 그러나 영혼이 습한 상태이면 즐거움을 얻을 수 있지만 심한 경우에는 물로 변한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영혼은 영원히 변화하는 과정 중에 있다고 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영혼들에게 죽음은 물이 되는 것이고, 물에게 죽음은 흙이 되는 것이다. 흙에서 물이 생기고 물에서 영혼이 생겨난다.” 고 주장한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정한 법칙인 로소스에 따라 변화한다.
영혼에 대해서 헤라클레이토스가 그 이전 철학자들과 구별되는 점은 영혼이 단순히 생명의 원리라는 것 이외에 본격적으로 인식 능력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영혼을 가진 한에서 눈과 귀는 사람들에게 나쁜 중인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영혼의 등급을
따지며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영혼을 가진 사람에게 눈과 귀를 통해서 얻게 되는 앎은 나쁜 작용을 한다고 평가한다. 이것은 감각이 우리를 속이거나 방해하여 진리를 알지 못하게 한다는 말은 아니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인간을 속이는 것은 감각이 아니라 영혼이다. 영혼이 감각, 지각을 통해서 수용한 것을 해석하면서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 초기 이오니아학파 철학자들이 호메로스와 같이 영혼을 생명의 원리로 보았던 것과는 달리 헤라클레이토스가 영혼의 인식 능력에 주목했다는 점은 중요하다. 이것은 영혼의 능력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헤라클레이토스는 인간의 영혼이 생각하는 능력을 통해 자기 자신을 탐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 “나는 나 자신을 탐구했다.”는 델포이 유명한 격언 “너 자신을 알라.”를 연상시킨다. 델포이의 격언이 인간과 신의 차이를 알고 오만을 부리지 말라는 경고라면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은 영혼의 훈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 그래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인간들이 자기 자신을 알 수 있으며 절제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리스 철학에서 영혼의 능력을 세분하여 보다 정교하게 감각과 지성을 구별했던 철학자 아낙사고라스를 간과할 수 없다. 영혼 자체에 대한 그의 단편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그는 영혼을 물질적인 것이지만 지적인 것으로 생각했다고 하며 영혼을 지성(nous)이라고 불렀다. 그는 최초로 인식과 운동의 원리로서 지성을 설명하여 소크라테스의 칭송과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고 전해진다. 소크라테스는 아낙사고라스의 책을 읽고 모든 것을 질서 짓고 모든 것의 원이 되는 것을 지성이라고 말하는 것을 알았는데 그는 아낙사고라스가 실제로는 지성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을 알고 실망했다는 말했다고 한다.
아낙사고라스는 헤라클레이토스와 마찬가지로 지성을 설명하면서 물질성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것들 중에 지성은 가장 미세하고 순수하다고 한다. 지성은 인식의 원리이기도 하다. “모든 것에 대해서 모든 앎을 가지고 있으며 가장 힘이 세다.” 모든 것을 안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보장한다. 또는 지성은 운동의 원리로서 모든 것은 지성에 의해 운동하게 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실망을 금치 못했던 것처럼 아낙사고라스는 최초의 운동 원인을 지성이라 하지만 그다음부터는 지성과 상관없이 기계적인 운동이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스 초기 자연철학에서 영혼의 비물질성에 대한 논의는 기대하기 쉽지 않고 레우키포스(Leukippos)와 데모크리토스(Demokritos)에 이르면 영혼의 물질성은 더욱 확고해진다. 이들은 모든 것의 원리를 원자(atom)를 말하며 원리들의 수가 무한하다고 말한다. 원자들은 “자를 수도 없고 나눌 수도 없으며 꽉 차 있기때문에 영향을 받지도 허공을 갖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영혼도 불 또는 열의 일종으로 구의 형태라고 생각했다. 구의 형태를 가진 것들은 모든 것 속에 가장 쉽게 침투할 수 있고 그 자신이 움직이고 있으므로 다른 것들도 움직일 수 있다. 영혼이 다른 원자들과 다른 점은 단지 구형이기 때문에 훨씬 쉽게 움직일 수 있고 다른 것들보다 먼저 움직여서 다른 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뿐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영혼의 운동이 자발적인 내적 원리가 아니라 다른 원자들과의 역학적인 충동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했다. 초기 자연철학자들이 자발적 운동, 즉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영혼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특징을 띠고 있다. 말하자면 영혼의 운동이 자발적인가 또는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더 빠른지 또 느린지의 속도의 문제로 변형된 것이다. 심지어 영혼의 인식 능력인 감각, 지각과 사유도 원자들 간의 접촉과 연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가령 눈에 부딪히는 이미지가 없다면 시각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다. 나아가 영혼의 탄생과 죽음은 단지 원자들의 결합과 분리일 뿐이기 때문에 불멸성의 문제는 제기되지 않는다. 데모크리토스의 경우에 영혼과 생명의 개념에서 신비하고 이성적인 것은 무엇이건 완전히 제거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후에 영혼의 비물질성에 대한 논의는 데모크리토스에 이르러 정체되어 버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영혼의 인식능력과 관련된 문제도 단순히 영혼 원자들의 기계적인 운동과 변화에 따른 것으로 환원되어 새로운 전환이 필요하게 되었다.
2. 소크라테스는 영혼에 대해 무엇을 언급했을까?
이러한 전환을 위해 이제 소크라테스를 언급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글로 된 어떠한 주장을 편 것은 없다. 그의 제자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라는 스승의 입을 빌려 자신의 글을 통해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전했을 뿐이다.
이렇듯 플라톤 철학에서 언급되는 영혼 불멸설이 맨 처음 언급되는 대화편인 『메논』인 듯 한데 이것은 플라톤의 상기론을 도입하기 위해 가정적으로 언급될 뿐이다. 다만 그의 영혼불멸설을 좀 더 강하게 논증적으로 주장하는 대화편은 『파이돈』이고 그 밖에도 『국가』의 10권, 『파이드로스』 등에서 영혼 불멸을 논의하고 있지만 수업 중에 교수님의 언급처럼 중기 이후 플라톤의 작품들은 자신의 견해들을 바탕으로 글을 썼을 것이므로 이련 견해들은 플라톤 자신의 견해로 간주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와 관련해서는 『소크라테스의 변론』 40c-41c에서 사후 세계가 있는지에 대해 단정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열어놓고 있지만 영혼불멸설을 소크라테스가 주장했다고는 할 수 없겠다.
플라톤의 『파이돈』은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관련된 철학적 대화로, 영혼의 불멸성과 사후 세계에 대한 그의 견해를 탐구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기 직전에 친구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전개되며, 영혼의 본질과 죽음의 의미를 깊이 있게 다룬다.
그 주요 내용과 논증으로는 소크라테스는 영혼이 순수하고 지혜로운 상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육체는 영혼을 타락시키고 혼란에 빠뜨리지만, 철학적 삶을 통해 영혼은 다시 그 순수한 상태를 회복할 수 있다는 영혼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이런 대화들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이를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철학자의 삶이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며, 죽음을 통해 영혼이 더 나은 상태로 이동한다고 믿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죽음에 임한 이런 담담한 태도는 제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며, 그의 철학적 신념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즉 『파이돈』을 통해 알 수 있는 영혼적인 측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견해는 철학자들이란 몸에 대한 관심보다는 가능한 한 몸과 멀리 떨어져 혼으로 향하게 되는 생각을 해서 그들은 몸과 혼이 최대한 벗어나는 것을 원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된다면, 지혜(phronēsis)의 획득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혼이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들, 달리 말해 진리 혹은 올바른 무엇인가가 그 자체로 있는 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몸과 떨어져야 있어야 하며, 로고스(추론함)로 인하여 그것이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것이 순수화(정화: katharsis)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몸과 혼이 분리(chōrismos)되는 것이 바로 혼을 정화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결과적으로 죽게 되었다고 해서 성을 내는 사람들은 그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몸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죽음이라는 것은 진정한 철학을 연습함과 동시에 정화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통해서 혼은 그 자체로 있을 수 있게 되며 지혜의 완전한 인식을 할 수 있게 되고 이러한 지혜를 통해서 다른 탁월성(aretē)들 또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죽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 꾸준히 정화의 수련을 지속해 온 혼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 즉 철학자(Philosopher)들은 이러한 삶을 살아왔고 따라서 죽음을 통해서 그들이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파이돈』에서 플라톤이 제시하고자 한 것은 영혼의 불멸성의 단초가 되기는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불멸성보다는 철학자로서의 삶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논의하고자 했을 것이다. 즉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철학자에게 있어서의 죽음이라는 것은 완전한 지혜를 인식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육체는 필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육체라는 것은 이 단계를 이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과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죽음이라는 것이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완전한 지혜의 인식과 함께 참된 탁월성들과 같은 좋은 것들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으며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동안에 지속적인 ‘혼의 정화’인 수련이 필요하므로 결국 철학함을 통하여 혼을 돌보는 삶의 자세가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죽음은 그 자체로는 특정한 의미나 가치를 지니지 않으며 오로지 삶을 통해서 조명될때에만 그 진정한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형상에 대한 존재론적 논의나 혼의 불멸성에 대한 논증은 이러한 삶에 대한 요구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근거로써 제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합리적인 도덕적 인격을 발전시키는 것이며, 이러한 발전이 인간의 궁극적 행복을 달성하기 위한 열쇠라고 주장한다.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참된 선을 이성으로 통찰해야만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선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다면, 그는 그것 이외의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훌륭함은 지식이다". 따라서 절대 선에 대한 확실한 통찰을 성취한 철학자만이 진정한 정치가이다. 이러한 도덕적 확신의 형이상학적 기초와 정당성을 제공하는 소크라테스의 원리들을 플라톤은 그의 저작 『파이돈』에서 분명히 개진하고 있는 셈이다.
3. 플라톤은 영혼에 대해 어떤 주장들을 펼쳤을까?
1) 플라톤의 영혼불멸설과 영혼 윤회설
플라톤은 영혼의 윤회를 주장한다. 인간의 육체가 죽게 될 때 영혼은 육체와 분리되어 지상에 있을 때 얼마나 영원한 진리와 이데아를 많이 보았나 못 보았나에 따라 다른 육체에 다시 자리 잡게 될 때 높은 단계에 자리할 수도 있고 동물 등과 같은 낮은 단계에 자리 잡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고상하고 완전한 영혼들은 지상 세계를 떠나 이데아의 세계에 머문다. 그의 또 중기의 저서 『파이드로스』에서 말하고 있는 윤회의 기준은 인간의 삶의 가치의 표를 제시하는데, 영원한 진리의 이데아를 많이 보았던 영혼은 철학자나, 아름다운 신(詩神)과 에로스에 봉사하는 자의 육체를 얻을 수 있고, 영혼의 법을 충실하게 지키는 자는 왕의 몸으로, 세 번째는 정치가나 장사꾼에, 네 번째는 육체로 일하는 자나 의사로, 다섯 번째 영혼은 점쟁이나 사제 등으로, 여섯 번째는 시인으로서의 생활이 주어진다. 일곱 번째는 수공업이나 농부의 생활이, 여덟 번째는 철학자나 농부들에게 아첨하는 생활이, 아홉 번째 영혼에게는 차주의 삶이 주어진다. 영혼이 처음 태어난 후에 다시 아홉 번의 제비를 뽑은 일만 년이 된 후에 그들의 고향인 별나라에 되돌아간다. 그러나 철학자는 세 번의 제비를 뽑은 삼 천년 후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새로운 윤회를 반복하게 된다는 것을 언급한다.
플라톤은 영혼의 불멸성을 증명하기 위해 『파이드로스』에서 운동의 개념을 도입한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최후의 날에 있었던 대화로 설정된 『파이돈』에서도 영혼의 불멸설을 논하고 있다. 플라톤의 영혼 불멸성의 논증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뉜다.
첫째, 모든 영혼은 불멸한다. 왜냐하면 항상 운동하는 것은 불멸하기 때문이다. 즉 영혼은 항상 운동한다. 그러나 다른 것을 움직이거나 다른 것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은 움직임을 멈췄을 때 살아 있기를 그친다. 스스로 움직이는 것만이 유일하게 자기 자신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움직임을 멈추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다른 모든 것들의 운동의 원천이자 시초(arche)가 된다.
둘째, 시초는 생성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생성되는 것은 반드시 시초로부터 생성되지만 시초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생성되지 않는다. 만일 시초가 어떤 것으로부터 생성되었다면 그것은 이미 시초가 아닐 것이다. 만약 그것이 생성된 것이 아니라면 소멸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만일 시초가 소멸된다면 그것이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생성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것이 시초로부터 생겨나야 한다면 그것으로부터 다른 것이 생겨나는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움직이는 것은 운동의 시초이다. 시초는 소멸될 수도 없고 생성할 수도 없다. 그렇지 않다면 온 하늘과 땅이 무너져 내려 정지하게 될 것이고 다시는 운동의 시초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셋째 모든 움직이는 물체는 그 운동의 원인이 외부에 있거나 내부에 있다. 외부의 원인에 의해 운동을 하는 것은 영혼이 없는 것이며 내부의 원인에 의해 자기 자신으로부터 운동을 하는 것은 영혼이 있는 것이다. 실제로 자기 자신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은 영혼밖에 없다면 영혼은 필연적으로 생겨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이다. 플라톤은 영혼이 항상 운동하기 때문에 불멸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만약 운동의 원인이 다른 것에 있다면 그것이 자기 자신을 떠나면 운동을 멈추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소멸하게 된다. 그러나 만약 운동의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면 그것은 운동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영혼은 불멸한다.
이처럼 플라톤은 그의 저작 『파이돈』에서 먼저 영혼의 운동 개념을 통해 영혼의 불멸에 관해 논한 후에 다시 영혼의 비복합적 개념을 통해 영혼의 불멸에 관해 아주 긴 논쟁을 시작한다. 초기 자연철학자들에게 나타나는 영혼이 물질적이라는 견해를 전면적으로 반박하는 내용이다.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는 영혼이 신체와 분리되면 결국 바람처럼 흩날리며 소멸되지 않겠느냐는 반론에 영혼은 비복합적인 것이므로 불멸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복합적인 것은 여러 원소들로 결합된 것을 말하는데 기본적인 원소들이 결합되면 생성되고 분해되면 소멸하므로 복합적인 것은 생성되고 소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첫째, 복합적인 것은 본성적으로 분해될 수 있는 것인 반면, 비복합적인 것은 분해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비복합적인 것은 항상 그대로 있으면서 불변하는 것이며 복합적인 것은 항상 변화하며 결코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둘째 항상 변하지 않는 것은 같음 자체, 아름다움 자체와 같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들인 반면에 항상 변하는 것들은 수많은 개별적인 비슷한 것들이나 아름다운 것들과 같은 것이다. 셋째 존재하는 것들은 두 종류가 있다. 그것은 감관에 의해 자각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것과 이성에 의해 파악할 수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넷째 우리 자신을 두고 볼 때 신체는 눈에 보이는 것에 가깝고 변하는 것이요.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가까우며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신적인 것과 유사하고 불멸한다. 그러나 신체는 결국 소멸한다.
플라톤은 우선 영혼불멸론의 제 1논증은 ‘순환론’을 제시한다.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가 철학은 육체로부터 영혼을 분리하여 그 자체로 순수하게 참된 실재를 인식하는 것이라고 설파하자 케베스는 영혼이 육체를 떠나면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고 사람이 죽는 그날 소멸하며 마지막이라고 말한다. 그는 육체를 떠나자마자 영혼은 연기나 입김처럼 무산되어 버리고 사라져 없어진다고 생각하여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제시하며 소크라테스에게 이것을 반박할 논거와 증거를 제시할 것을 요구한다.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생긴다. 즉 아름다움과 추함, 옳음과 옳지 않음, 큼과 작음 등과 같이, 모든 반대되는 것들은 모두 반대되는 것들로부터 생겨난다. 가령 잠자는 것과 깨어 있는 것은 반대이다. 잠자는 것에서 깨어 있는 것이 나오고 깨어 있는 것으로부터 잠자는 것이 나온다. 삶과 죽음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죽음은 삶의 반대이다. 죽은 자로부터 산 자가 나오고 산 자로부토 죽은 자가 나온다. 만약 그렇다면 죽은 자의 영혼은 어디엔가 있다가 거기서 되살아 올 것이다. 나아가 이 논증을 보완하기 위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상기론을 도입한다.
2) 플라톤의 상기론
영혼불멸론의 제 2논증은 ‘상기론’이 제시된다. 『파이돈』에서 상기론은 출생 이전의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제공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를 상기하게 된다면 그는 그것을 언젠가 알고 있었어야만 한다. 특히 어떤 사람이 오래되었고 생각조차 하지 않은 탓에 벌써 잊어버렸던 것에 관해 이러한 경험을 할 때 우리는 상기라고 한다. 그런데 상기는 닮은 것들로부터 일어나기도 하지만 닮지 않은 것들로 일어나기도 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상기할 수 있도록 동일한 것이 있어야 한다. 즉 나무토막과 혹은 돌과 돌이 동일하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과는 다른 동일한 것 자체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인 것 자체”에 관한 지식은 어디서 갖게 되었는가? 우리는 나무들이나 돌들과 같은 것들을 보고서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들로부터 이것과 다른 어떤 것, 즉 동일함 자체를 생각해낸 것이다. 그렇지만 동일한 것들과 동일함 자체는 같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동일한 것들을 보고 동일함 자체를 생각하게 되었는가? 여하간 우리가 어떤 것을 보고 그로 인해 다른 것을 생각해낸다면 그것이 바로 상기이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것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하여 유사한 것인지 혹은 그것과 유사하기는 하지만 부족하다고 말하려면 반드시 그 대상을 앞서 알고 있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동일함 자체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상기할 수 있는 것은 보거나 만지거나 또는 그 밖의 다른 감각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감각만으로는 동일함 자체에 이를 수 없다. 그렇다면 동일함 자체는 우리가 듣거나 보거나 또는 다른 방식으로 지각하기 이전에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움 자체, 좋은 자체, 올바름 자체, 신성함 자체와 같이 ‘~인 것 자체’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가지고 있다가 태어나면서 잃어버렸지만 후에 그런 것과 관련하여 감각을 사용하여 이전에 언젠가 우리들이 가진 적이 있던 그 지식들을 도로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헐, 왜 이 대목에서 칼 융의 인간 집단 무의식의 단초가 보이는지?)
3) 영혼은 조화가 아니며 생명의 원리이다.
심미아스는 플라톤의 저작 『파이돈』에 나오는 인물로 소크라테스의 죽음 전 함께 있으며 대화하는 인물이다. 심미아스는 영혼이 신체의 구성 요소들 간에 조화라는 이론을 주장하며 신체가 소멸하면 영혼도 소멸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가령 어떤 사람이 리라와 그것의 줄의 화음과 관련해 화음은 리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되 보이지 않으며 비물체적이며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우며 신적인 것에 반하여 리라의 줄들은 물체적이며 복합적이어서 땅에서 나온 것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 사멸하여 없어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식의 논법을 적용하자면 만일 누가 리라를 부수고 그 줄을 끊으면 화음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어디엔가 그대로 계속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육체의 줄이 질병이나 다른 상해로 인해 지나치게 느슨하게 되거나 너무 팽팽하게 조여져 있게 되면 아무리 영혼이 신적인 것이라고 해도 음악의 화음과 같이 즉시 소멸해버리고 만다. 다른 한편 육체의 잔해가 화장되거나 썩어 없어질 때까지 꽤 오랫동안 존속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영혼이란 육체의 구성 요소들의 조화요, 죽음에 처하면 먼저 소멸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케베스는 영혼이 신체보다 더 오래간다는 사실을 인정할지라도 영혼이 윤회를 거듭하다 보면 마지막에 남는 영혼은 자신이 사용한 육체를 남기게 되어 결국 육체보다 더 오래 지속하지는 못할 것이 아니가, 라고 반문한다. 어떤 직조공이 나이가 많아서 죽었다고 하자. 누군가 말하기를 그는 죽은 것이 아니고 어디엔가 편안히 잘 있는데 그 증거로 그가 짜서 만들어 입었던 옷이 그대로 잘 있고 없어지지 않은 것을 제시한다. 혹 누군가 사람이 더 오래가는가, 아니면 사람이 쓰고 입었던 옷이 더 오래가는가를 물을 수 있다. 그러면 사람이 더 오래간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직조공이 많은 옷을 지어 입고 버렸겠지만 맨 마지막에 지은 옷은 만일 그것이 닳아 없어지기 전에 그 사람이 죽는다고 하면, 그 사람보다 더 오래갈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옷보다 못하거나 약하다는 것은 아니다.
영혼과 육체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영혼은 더 오래가고 육체는 영혼보다 더 약하고 덜 오래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영혼이 많은 육체를 입고 버리고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육체는 소모되고 소멸되지만 영혼은 항상 새로운 옷을 짜 입으며 소모 된 것을 보충해 갈 수 있다. 그러나 영혼이 사멸하는 날엔 영혼이 그 최후의 옷을 입겠고 이 옷은 그 영혼보다 조금 더 오래갈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육체보다 낫다는 것을 근거로 영혼이 사후에도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영혼이 여러 번 태어났다 죽었다 할 만한 힘을 가졌다고 인정한다 할지라도 이와 같이 영혼이 거듭나는 일에 마침내 지쳐 언젠가는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죽어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미 증명한 ‘상기론’과 심미아스가 주장한 ‘영혼 조화설’이 양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심미아스에 대한 반증을 재개한다.
첫째, 영혼은 육체와 결합되기 이전에 존재하였기 때문에 영혼이 육체의 구성 요소들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은 잘못이다. 영혼은 화음과 비슷한 것이 아니다. 화음은 먼저 리라와 그것의 줄들이 존재한 다음 생겨났다가 맨 먼저 사라지는 것이지만 영혼은 육체나 그것의 구성 요소들이 존재하기 전에 존재했던 것이다.
둘째, 조화 또는 화음에는 여러 가지 정도가 있으나 영혼에는 정도가 있을 수 없다. 즉 화음 대해서는 좀 더 잘 조화될수록 더 참된 조화요, 좀 덜 조화될수록 덜 참된 조화라고 할 수 있으나 영혼에 대해서는 한 영혼이 다른 영혼보다 좀 더 영혼답거나 좀 덜 영혼답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영혼 조화설을 주장한 사람은 덕과 악덕이 영혼 속에 있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덕은 조화되어 있는 것이고 악덕은 조화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자신 외에 자신 안에 또 다른 조화를 가지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더욱이 영혼이 조화라고 한다면, 영혼은 어떠한 악덕도 결코 갖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화는 부조화와는 전혀 상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영혼은 육체에 대립될 수 있으며 육체를 통제할 수 있다. 영혼은 육체가 느끼는 것에 보조를 같이하는 경우도 있지만 육체가 덥고 목마른 경우에 영혼이 물을 못 마시게 하는 일도 있고 배고플 때 먹지 못하게 하는 일도 있다. 즉 영혼이 육체의 욕구를 반대하는 일은 무수하게 많다. 그러나 만일 영혼이 조화라고 한다면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 너무 팽팽하게 매어있거나 혹은 너무 느슨하게 매어있든지 간에 이 모든 경우에 영혼을 절대로 그 구성 요소에 반대할 수 없다. 그러나 영혼은 육체에 정반대되는 일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평생 육체의 훈련과 의술 같은 것으로 육체에 고통을 줌으로써 육체를 가혹하게 다루기도 한다. 소크라테스는 케베스의 반론에 대해 영혼은 죽지 않으며 파괴될 수 없다고 답변한다. 영혼은 육체의 생명의 원리이다. 즉 육체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은 영혼이다. 영혼은 생명을 주는 것이요. 죽음은 생명과 반대되는 것이다. 영혼은 그것이 지니고있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혼은 불사이며 불멸이다.
4) 플라톤의 영혼 삼분설
플라톤은 『국가』 4권에서 영혼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영혼 삼분설이란 지혜(wisdom)의 이성적인 부분, 용기(courage)라는 감성적인 부분, 절제(temperance)라는 욕구적인 부분를 말한다. 이 세 부분 중 첫 번째의 것은 이성적인 부분으로 이것은 합리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부분인 이성적인 부분이 어떤 사람의 영혼을 지배하면, 그 사람은 지혜라는 덕을 소유한 사람이다. 이것은 즉, 만약 어떤 사람이 이성적으로 행위한다면, 그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 위의 이성적인 부분과는 반대로 이성적인 부분보다는 좀 덜 합리적이고 감성적인 부분으로, 기개적인 부분과 욕구적인 부분이 있다. 기개적인 부분에 대하여 설명하자면, 어떤 사람의 정신 혹은 감성적인 부분이 항상 어떤 상황에서 그가 소유한 합리적인 과정에 일치하여 행위한다면, 그는 용기의 덕을 소유한 사람인 것이다. 설명하자면, 만약 멈춰서 싸움을 하는 것이 합리적이면, 용기가 있는 사람은 멈춰서 싸움을 할 정신 혹은 감성적인 책무를 지닐 것이라는 의미이다. 다음으로 욕구적인 부분을 살펴보면, 만약 어떤 사람의 욕구가 통제 가능하면, 그 사람은 절제의 덕을 소유한 것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의 욕망이 너무 강하고 욕망이 그 사람의 더 좋은 결정을 불가능하게 한다면, 그 사람은 절제의 덕이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부분의 조화로서 나타난 정의에 대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만약 어떤 사람의 이 세 부분의 영혼인 지혜, 용기, 그리고 절제가 서로서로 조화를 이룬다면, 그는 정의의 덕을 소유한 사람이다. 그리고 정의의 덕을 소유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내적 불화로 인한 고통을 겪지 않을 것이다. 정의로운 사람의 영혼은 완전하게 통합되거나 혹은 통일된다. 따라서 이와 같이 정의로운 사람은 결코 내적 갈등을 경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다. 그 결과 플라톤에게 있어서의 정의는 최종의 결과물이거나, 혹은 가장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덕이다.
5) 플라톤의 영혼의 해방
플라톤은 우리가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면 끊임없는 영혼의 윤회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고 주장한다. 영혼이 신체로부터 해방되면 신들의 세계로 귀환할 수 있다. 영혼은 본성적으로 불멸하는 존재로서 신들의 세계에 있었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인간의 영혼이 추락하여 신체에 결합되어 윤회를 하게 된 이유를 신화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천상의 모든 영혼이 신들의 향연에 참석하기 위해서 제우스가 지휘하는 신들의 마차를 따라 길을 떠난다. 그런데 신들의 마차와는 달리 인간들의 마차는 간신히 따라 올라 어떤 영혼은 참된 실재를 간신히 보게 되고, 다른 영혼은 보는 둥 마는 둥하고, 또 다른 영혼은 전혀 보지 못하기도 한다. 결국 영혼들이 서로 앞을 다투다가 날개가 부러져 지상으로 추락하게 된다. 그래서 영혼은 지상의 가장 무거운 요소인 흙과 결합하여 신체라는 감옥에 갇히게 되고 창살을 통해서만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다시 영혼의 날개를 통해 천상의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수 많은 신체들을 거치며 떠돌게 된다.
플라톤은 영혼이 추락하게 된 이유를 신들의 영혼과 달리 인간들의 영혼이 가진 근본적인 한계로 설명한다. 즉 인간들의 영혼은 신들의 영혼보다 무거워 날아오르기가 어렵기 때문에 서로 앞다투다가 추락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혼이 윤회에서 벗어나 다시 신들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플라톤은 영혼이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설명한다. 지상의 영혼이 신들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천상에서 보았던 참된 실재, 즉 진리를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영혼은 신체와 결합하면서 진리를 망각하게 되고 막연한 동경만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상태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인간 영혼은 ‘쌍두마차’에 비유될 수 있다. 마부가 이성이고 두 마리 말들은 각기 기개와 욕망이다. 이성인 마부가 하늘로 올라가려는 기개라는 말과 땅으로 내닫으려는 욕망이라는 말을 잘 통제해야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다.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신체로부터 비롯된 인간의 욕망을 부정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면서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욕망을 절제하는 금욕적 생활을 강조했다. 그러나 『파이드로스』에서는 욕망이 오히려 진리를 인식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는 입장을 펼친다. 물론 여기서는 최소한 이성에 의해 지배될 수 있는 욕망을 말한다. 따라서 『파이돈』과 『파이드로스』에 나타나는 욕망에 대한 관점이 달라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금욕주의적 성향이 있다.
또한 플라톤은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을 에로스(eros)라 말한다. 에로스는 일종의 욕망이다. 인간이 진리를 인식하는데 이성 능력이나 감각 능력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플라톤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진리에 대한 ‘사랑’이다. 우리는 에로스를 통해 잃어버린 영혼의 날개를 되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에로스는 영혼의 날개를 다시 돋아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리에 대한 사랑을 하면 영혼의 날개가 돋아나서 신들의 세계로 되돌아갈 수 있게 해준다. 『향연』에서도 에로스를 통해 진리를 인식할 수 있고 불명할 수 있다고 한다. 플라톤은 에로스를 광기의 일종이라고 한다. 흔히 광기는 나쁜 것으로 생각되지만 가장 좋은 것들은 광기를 통해 오는데 이 광기가 신들로부터 온다고 설명한다. 해서 그것은 아름답고 훌륭하다. 플라톤은 신의 선물로 제공되는 광기를 통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들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플라톤은 신들로부터 오는 광기를 네 종류로 구분한다.
첫째, ‘예언적 광기’로 신관들의 예언을 통해 개인과 국가의 행복에 기여한다.
둘째, ‘종교적 광기’로 재앙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정화를 목적으로 한다.
셋째, ‘시적 광기’로 무사 여신들에게서 오는 신들림과 광기이다.
넷째, ‘사랑의 광기’ 또는 ‘철학적 광기’로 참된 실재를 상기해 내는 데 목적이 있다.
플라톤은 우리가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 신적인 광기에 사로잡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보며 진정한 아름다움을 상기한다면 날개가 돋아 날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되어 지상의 것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 추락한 영혼에 날개가 다시 돋아나게 하여 신들의 세계로 돌아가도록 하는 데 진리를 향해 이끌어 주는 힘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진리에 대한 사랑이다. 그리하여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을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6) 영혼의 돌봄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이 글을 시작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영혼이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는 것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있다는 전제하에 어떻게 하면 나의 영혼을 잘 돌볼 수 있을까, 하는 점에서 출발했다. 이제 플라톤은 나에게 그것에 대한 답을 줄 차례이다.
플라톤은 우리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어 가는 시기에 육체를 잘 보살펴야 하는 것처럼 영혼이 성숙해지는 시기가 되면 영혼의 ‘훈련(gymnasia)’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혼의 훈련은 우리에게 철학적 성향을 만들어 줄 수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노예처럼 고생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단지 명예를 얻기 위해서 한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궁극적으로 영혼의 훈련은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언급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진리를 인식할 수 있을까?
플라톤은 『국가』에서 진리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본성적으로 항상 배우는 것을 좋아해야 힘들다고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파이드로스』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마치 연인을 사랑하는 것에 비유한다. 사랑하는 데에는 항상 즐거움만 따르는 것이 아니고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슬픔도 동반되는데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인내와 끈기를 그 길을 견뎌낼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또한 플라톤은 신체의 훈련과 영혼의 훈련 중 어느 한쪽만 소홀히 해도 올바른 탐구 자세가 아니라고 한다. 절름발이의 비유를 통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절반만 좋아하고 절반은 싫어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영혼이 훌륭한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신체도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체 훈련을 위해 다양한 것들을 요청한다. 그것은 모두 신체의 욕구를 조절하기 위한 것으로 가령 술을 삼가고 음식도 제한할 것을 요청한다. 가능한 한 단순하게 살 것을 요청하는데 일상적 삶에서 ‘단순하게 살라.’라는 표어는 신체뿐만 아니라 영혼에게도 유익하므로 신체에 건강을 낳고 영혼에 절제를 낳는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에서 말하듯이 철학은 영혼의 전향이다. 동굴 안의 인간은 현상에만 집착해서 생겨난 편견이라는 사슬에 결박된 존재여서 어느 날 고개를 돌려 자신이 바라봤던 세계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동굴 밖으로 나가기를 결심해 여기서 영혼의 ‘전향’, 즉 처음으로 자기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되어 결국 ‘자기 자신에게 시선 돌리기’를 통해 타자들로부터 시선을 해방함과 동시에 세계의 사물로부터 시선을 해방시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플라톤은 『알키비아데스』에서도 다른 사람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먼저 돌보아야 한다고 말하며 쾌락과 욕망을 극복하려는 절제의 통해 자신의 욕망을 자신의 의지대로 사용할 수 있는 주인이 되기를 주장한다.
<마무리>
이렇듯 본 고에서는 고대 그리스에서 영혼(psyche)의 개념에서부터 소크라테스를 거쳐 플라톤의 영혼론까지를 고찰해 보았다. 이후 영혼의 개념을 ‘운동’, ‘지각’, ‘비물질성’ 등으로 설명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중세의 스토아 학파, 물질적 세계와는 별개의 실체로 영혼을 생각했던 데카르트 등의 주장들을 더 알아보고 싶지만 차 후로 미루기도 한다.
어쩌면 내가 살고 있는 현대의 과학은 나에게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혹은 영혼이란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영혼의 개념을 신경 과학이나 심리학적으로 접근하려고 많은 연구가들의 시도가 있겠지만 영혼이란 개념이 물질적이어서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없기에 그것의 유무(有無) 등을 단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다.
그런 것들에 비추어 보아 나에게 영혼이란, 인간의 정신세계와 분리할 수 없는 요소로서의 측면이 가장 우선시 될 성싶다.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숨’이란 것은 다소 육체적인 활동의 하나이므로 영혼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겠지만 영혼이란 인간의 삶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기능을 담당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삶이란 또 어떤 것일까? 라는 문제로 전이될 수 있겠다.
나는 결코 인간의 욕망을 간과할 수 없다는, 욕망이 인간의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중요도 측면에서도 강조되어야 함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어쩌면 ‘욕망하는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삶의 경험으로 충분히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 인간의 삶에 더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욕망을 통제할 수 있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 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라는 것과 더불어 철학적 세계를 끊임없이 탐구해야 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이것은 위에서 고찰한 것처럼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영혼을 돌보는 것을 인간의 가장 중요한 과제와 연결되기도 한다. 그들은 영혼의 돌봄을 통해 진정한 행복과 선을 추구할 수 있다고 믿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철학자는 각각의 방법으로 영혼을 돌보는 방법을 제시했다.
소크라테스는 영혼을 돌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강조했으며 자기 성찰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반성하고, 도덕적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 지혜의 추구를 통해 영혼을 성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즉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계속해서 배우고 성장하는 자세를 가짐과 동시에 영혼의 최상의 상태로서의 덕(아레테)로서 정의, 용기, 절제 등을 실천함으로써 건강한 영혼의 상태를 설파한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로서 그의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며 이데아 세계를 주장하는데 플라톤은 영혼이 이데아의 세계, 즉 진리와 선의 세계에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철학적 탐구와 교육을 통해 이데아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영혼을 고양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철학적 대화를 통해 진리를 탐구하고, 이를 통해 영혼을 정화시키는 방법을 제시한다. 또한 언제나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본성적으로 항상 배우는 것을 좋아해야 힘들다고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파이드로스』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마치 연인을 사랑하는 것에 비유한다. 사랑하는 데에는 항상 즐거움만 따르는 것이 아니고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슬픔도 동반되는데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인내와 끈기를 그 길을 견뎌낼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더불어 플라톤은 신체의 훈련과 영혼의 훈련 중 어느 한쪽만 소홀히 해도 올바른 탐구 자세가 아니라고 한다. 절름발이의 비유를 통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절반만 좋아하고 절반은 싫어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영혼이 훌륭한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신체도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체 훈련을 위해 다양한 것들을 요청한다. 그것은 모두 신체의 욕구를 조절하기 위한 것으로 가령 술을 삼가고 음식도 제한할 것을 요청한다. 가능한 한 단순하게 살 것을 요청하는데 일상적 삶에서 ‘단순하게 살라.’라는 표어는 신체뿐만 아니라 영혼에게도 유익하므로 신체에 건강을 낳고 영혼에 절제를 낳는다고 말한다.
그의 대화편에서는 철학적 대화를 통해 지식과 덕을 추구하는 과정이 중요하게 다뤄지기도 한다. 또한 플라톤은 『국가』에서 정의로운 삶을 사는 것이 영혼의 건강과 행복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주장하며 그는 개인의 영혼이 정의롭게 조직될 때, 사회도 정의롭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정의로운 삶을 이야기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둘은 모두 영혼의 돌봄을 인간 존재의 핵심적인 과제로 보았으며, 이를 위해 철학적 탐구, 자기 성찰, 덕의 실천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나는 영혼이란 인간의 본질이고 실체이지만 영혼의 불멸성에 대해 여전히 회의적이다. 아니 솔직히 감정적으로 믿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내 이성은 어쩌면 내 영혼은 영혼이 불멸이라고 믿어야 한다고 속닥거린다. 그래야만 유구했던 인류의 역사의 조각들이 나에게 전달되어 왔지 않았을까, 라고 되묻기도 한다. 그것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다이몬이든 나의 영혼의 소리든 간에 나는 영혼의 존재를 믿고 영혼의 불멸성을 믿어야만 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제 그것을 논증할 차례이지만 이것 또한 다음으로 미루기로 한다.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보며 진정한 아름다움을 상기한다면 날개가 돋아 날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되어 지상의 것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 추락한 영혼에 날개가 다시 돋아나게 하여 신들의 세계로 돌아가도록 하는 데 진리를 향해 이끌어 주는 힘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진리에 대한 사랑이다. 그리하여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을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라는 플라톤의 메아리를 오늘도 아름다운 음악처럼, 신선한 공기처럼 가슴으로 껴안으며 삶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내 영혼의 날개를 돋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사유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 주제가 나에게 아직 벅찬 것이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계속 추구해야만 할 내 인생의 또 하나의 과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느낀 여정이었음에 감사드린다. (끝)
참고문헌: 1. 논문 <앎에 있어서 소크라테스와 붓다의 영혼 문제> 최정윤(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박사수료)
2. 『철학과 문화』 제30집 소크라테스의 죽음의 의미와 플라톤의 영혼: 윤리학적 관점으로 by 정진규
3. 시민인문학 제25호 서양 고전문학을 중심으로 살펴본 ‘영혼’과 ‘용기 by 허진
4. 『영혼이란 무엇인가』 장영란, 서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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