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초짜 철학도의 분투기
< 백제 멸망 요인>
1) 외부적으로 : 외교 실패(대 중국)
백성의 민심을 잃음
동맹 관계가 없었다.
2) 내부적 요인: 지배 세력이 신임을 잃었고 내부 통합에 실패했다.
< 고구려의 멸망 요인>
1) 외부: 끝 모를 전쟁에 노출되었고
외교 노선이 지나치게 강경했다.
2) 내부적: 연합정권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왕권 약화(불교 중심에서 도교 중심으로 전환)
지배 세력의 분열(특히 당나라에 투항하는 임금들이 있었다.)
<통일 신라의 멸망 원인>
1) 정치적: 지배계급의 분열과 타락
통치 방식의 문제: 왕경 주심의 국가 운영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음
고구려나 백제의 유민을 포용하지 않음
인프라를 국가 동력 장치로 이끌지 못함
2) 경제적: 귀족에게 유리한 토지 제도(녹읍제 부활)
부의 편중(개간 등의 면세 특권)
3) 사회적: 유민 발생이 많아짐
농민들의 저항
호족, 육두품, 선종과 같은 새로운 세력이 등장함
<왕건의 성공 요인>
1) 사성 정책: 왕씨성 하사(왕규)
토성(土姓) 하사(안동 권씨: 특정 지역을 특정 성씨에게 줌으로서 본관 제도 발 생)
이러한 사성 정책으로 인해 지역 사람들이 자기 존재감이 생기는 사회적 혁명의 계기가 됨.
그러나 고려 중후반으로 가면서 4성을 다 줌으로써 지방의 기득권 층이 약화 되기도 하며 이러한 사성 정책은 포용 70프로, 견제 30프로의 의미를 가졌다.
2) 호족들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의미로 토성(土姓) 부여. 이는 호족들에서 지방 세력이 나오므 로 지방 세력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지방 사회를 인정하므로써 지방 사회가 열리는 계기 가 되었다.
3) 적절한 통제책
- 사심관 제도(적절한 통제책, 최초 경주 사심관은 김부식, 온건한 견제책이라 할 수 있음)
경주 왕실 사람을 개성으로 부름. 이러한 사심관을 통해 그 지방을 세력에 두었다.
- 기인제도(其人制度): 개성에 지방 호족을 불러들여 그 지역의 고문으로 인정하고 중앙과 지방이 상호 협력 관계임을 알려 간접적 통제책을 발휘함.
- 포용책(왕건은 정치 덕목에서 중요한 포용력을 발휘했지만 견휜과 궁예는 포용력을 잃음)
신라말에 이르러 백제, 고구려 유민들이 각자 도생의 길을 찾았고 고려는 지방을 통합함 으로써 즉 문화적 융합을 통해 물리적 통합을 극복한 사례로 화합국 통치에 이르며 지방 분권 시대로 열어 진정한 통합을 이뤘다. 또한 왕건은 처음 해상 세력이었으나 서해 해상 권과 관련해 송악(개성)일대의 고구려 유민을 자기 세력으로 만들었다.
<고려>
1) 호족의 나라에서 귀족의 나라로 – 고려의 체질 개선 어떻게 가능했나?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訓要十條 二十六年(943年)
내 듣건대 순(舜)은 역산(歷山)에서 밭을 갈다가 요(堯)의 양위를 받았고, 한(漢) 고조(高祖)는 패택(沛澤)에서 일어나 드디어 한의 왕업을 이룩하였다. 나도 평범한 집안에서 일어나 잘못 추대되어, 더위와 추위를 무릅쓰고 마음과 몸을 몹시 고달피 해가면서 19년 만에 국내를 통일하고, 즉위 25년에 몸은 이미 늙었다. 행여나 후사들이 방탕하여 기강을 문란하게 할까 두려워하여 훈요를 지어 전하노니, 조석으로 읽어 길이 귀감으로 삼으라.
訓要(훈요)
1조
내국가의 대업은 여러 부처의 호위를 받아야 하므로 선(禪) · 교(敎) 사원을 개창한 것이니, 후세의 간신이 정권을 잡고 승려들의 간청에 따라 각기 사원을 경영, 쟁탈하지 못하게 하라.
2조
신설한 사원은 도선(道詵)이 산수의 순(順)과 역(逆)을 점쳐놓은 데 따라 세운 것이다. 그의 말에, “정해놓은 이외의 땅에 함부로 절을 세우면 지덕(지력)을 손상하고 왕업이 깊지 못하리라” 하였다. 후세의 국왕 · 공후(公侯) · 후비(后妃) · 조신 들이 각기 원당(願堂)을 세운다면 큰 걱정이다. 신라 말에 사탑을 다투어 세워 지덕을 손상하여 나라가 망한 것이니, 어찌 경계하지 아니하랴.
3조
왕위 계승은 맏아들로 함이 상례이지만, 만일 맏아들이 불초할 때에는 둘째 아들에게, 둘째 아들이 그러할 때에는 그 형제 중에서 여러 신하의 추대를 받아 대통을 잇게 하라.
4조
우리 동방은 예로부터 당(唐)의 풍속을 숭상해 예악 문물을 모두 거기에 좇고 있으나, 풍토와 인성이 다르므로 반드시 같이할 필요는 없다. 거란(契丹)은 금수의 나라이므로 풍속과 말이 다르니 의관 제도를 본받지 말라.
5조
나는 우리나라 산천의 신비력에 의해 통일의 대업을 이룩하였다. 서경(지금의 평양)의 수덕(水德)은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을 이루고 있어 길이 대업을 누릴 만한 곳이니, 사중마다 순수(巡狩)하여 100일을 머물러 안녕을 이루게 하라.
6조
나의 소원은 연등(燃燈會)과 팔관(八關會)에 있는 바, 연등은 부처를 제사하고, 팔관은 하늘과 5악(岳) · 명산 · 대천 · 용신(龍神) 등을 봉사하는 것이니, 후세의 간신이 신위와 의식절차의 가감을 건의하지 못하게 하라. 나도 마음속에 행여 회일(會日)이 국기(國忌)와 서로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니, 군신이 동락하면서 제사를 경건히 행하라.
7조
임금이 신민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우나, 그 요체는 간언을 받아들이고 참소를 멀리하는 데 있으니, 간언을 좇으면 어진 임금이 되고, 참소가 비록 꿀과 같이 달지라도 이를 믿지 아니하면 참소는 그칠 것이다. 또, 백성을 부리되 때를 가려 하고 용역과 부세를 가벼이 하며 농사의 어려움을 안다면, 자연히 민심을 얻고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할 것이다. 옛말에 “향긋한 미끼에는 반드시 고기가 매달리고, 후한 포상에는 좋은 장수가 생기며, 활을 벌리는 곳에는 새가 피하고, 인애를 베푸는 곳에는 양민이 있다”고 하지 아니하였는가. 상벌이 공평하면 음양도 고를 것이다.
8조
차현(車峴) 이남, 공주땅 강 밖의 산형 지세가 모두 본주(本主)를 배역(背逆)해 인심도 또한 그러하니, 저 아랫녘의 군민이 조정에 참여해 왕후(王侯) · 국척(國戚)과 혼인을 맺고 정권을 잡으면 혹 나라를 어지럽히거나, 혹 통합의 원한을 품고 반역을 감행할 것이다. 또 일찍이 관노비나 진 · 역의 잡역에 속했던 자가 혹 세댜.
9조
무릇 신료들의 녹봉은 나라의 대소에 따라 정할 것이고 함부로 증감해서는 안 된다. 또 고전에 말하기를 “녹은 성적으로써 하고 임관은 사정으로써 하지 말라”고 하였다. 만일 공적이 없는 사람이거나 친척과 가까운 자에게 까닭 없이 녹을 받게 하면 백성들의 원성뿐만 아니라 그 사람 역시 복록을 오래 누리지 못할 것이니 극히 경계해야 한다. 또 이웃에 강폭한 나라가 있으면 편안한 때에도 위급을 잊어서는 안 되며, 항상 병졸을 사랑하고 애달피 여겨 요역을 면하게 하고, 매년 추기(秋期) 사열(査閱) 때에는 용맹한 자에게 마땅히 승진시킬지어다.
10조
국가를 가진 자는 항상 무사한 때를 경계할 것이며, 널리 경사(經史)를 섭렵해 과거의 예를 거울로 삼아 현실을 경계하라. 주공(周公)과 같은 대성(大聖)도 「무일(無逸)」 1편을 지어 성왕(成王)에게 바쳤으니, 이를 써서 붙이고 출입할 때마다 보고 살피라.
평가
훈요십조는 태조의 사상과 정책을 살피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훈요십조는 태조가 그의 자손에게만 몰래 전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인데, 이것이 사서에 실린 뒤로는 식자간(識者間)에 널리 알려져 뒷날에는 흔히 임금을 간하는 신하들의 전거(典據)가 되었다.
제 1조와 2조는 사찰의 무분별한 양적 확대를 경계한 조항이다. 특히 제 2조는 지적한 폐단에 대해 대응책을 보여준다.
제 3조는 왕위 계승에 대한 내용으로, 대체로 후대에도 준수되었다.
제 4조는 태조의 대 외국관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조항이다.
제 5조는 태조의 도참사상과 함께, 서경(평양)의 중요시를 알게 해준다.
제 6조는 연등회와 팔관회를 경건히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제 7조는 중국의 고전철학을 인용한 말이다.
제 8조는 왕실의 비밀훈계로서 일반 백성에게 공개할 것은 아니었다. “차령 이남의 지방은 산세가 거꾸로 달려 역모의 기상을 품고있으니 결코 그 지역 사람을 중히 쓰지 말라.”라는 내용이 있어 지역 차별의 근거로 언급하는 경우도 많은데, 실제로는 후백제의 잔존 세력이나 청주 일대의 세력을 견제하라는 의미가 큰 것으로 해석되며, 현대의 지역 차별과는 전혀 관계 없는 내용이다. 한편, 車峴以南 公州江外을 해석하면 車峴은 충북 북쪽에 있고 公州城은 공주강 아래에 있으므로, 차현고개 남쪽(車峴以南)으로 내려오다 만나는 공주강바깥(公州江外)지역까지이다. 즉 車峴以南지역과 公州江外지역이 서로 겹치는 교집합 지역을 말한다.
제 9조는 녹봉과 임관에 관한 내용과 국방과 안보에 관한 훈계이다.
제 10조는 유교주의적 정치철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훈요십조」의 각 조항에는 말미에 ‘중심장지(中心藏之)’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훈요십조」는 하루 아침에 지은 것이 아니라 태조가 평소에 틈틈이 기록해 두었던 것을 세상을 떠나기 전에 다시 정리한 것으로 여겨진다.
2) 태조 왕건은 재위 26년 만에 사망
태조의 혼인 책은 태조 사망 후 왕위 계승 쟁탈전을 유발 시켜 ‘왕규의 난’ 발생
왕위를 놓고 왕실과 호죽들 사이 혹은 왕실과 왕실 배후 세력 간의 혈전이 일어남.
3) 광종 대 정치 개혁(왕권 강화와 호족 세력 견제)
초반: 즉위 초반의 정치는 온건적 개혁으로 국초 유공자를 선정해 서열화했고 주, 현에 세공 액(歲貢額) 책정, 유공자 포상과 세공액 책정의 주체를 호족으로 이는 지방을 국가 조 직 내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시도였다.
중반: (7~10년) 개혁의 본격화 시기
- 노비 안건법 실시(광종 7년 956년): 호족의 경제적, 무력적 기반 와해
- 과거제 실시(광종 9년 958년) 유교적 경전을 통해 충효 논리를 중시하는 객관적 선발 제도를 도입하여 무력에 토대를 둔 호족의 정치세력 약화를 시도함
후반: (~26년)
- 공복제 실시(광종 11년)
- 군제 개편(광종 11년): 관복제(관료들을 등급 매겨 의복 색깔을 달리함), 순군부를 군 부로 바꿔 직접 관리함으로써 군사에 대한 중앙의 장악력을 강화 시도.
기타 조치
왕실 위상 강화 조치: 태조 왕건의 원찰(願刹) 봉은사(奉恩寺) 창건, 동상 조성 (통천관)
독자 연호 책정(광덕) - 연호 개정 (준풍) 시험문제 아님
사상적: - 불교 사상을 통합의 원리로 사용하여 왕권 강화 도모- 균여의 성상융회(性相融會 본질과 형상을 함께 묶는다) 사상
- 불교의 후원 조치 증가: 사찰 설치 – 왕즉불 사상 추구(왕이 곧 부처다), 호족에 대한 유화책을 써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이용
- 왕실 근친혼 추구(왕실 몫을 호족들과 나누기 싫어서)
광종 대 개혁 정책의 성격:
- 호족층을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견제하며 왕권 강화를 추구했는데 이때부터 탈 신라가 본 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할 수 있고 이후 고려적 통치체제 정비의 중요한 기반을 마련한다.
광종 대에 시도된 호족 견제책과 왕권 강화책, 근친혼 실시 등으로 신권에 대한 견제가 추구되고 고려의 정치 사회적 체질 개선에 일정한 성과를 보였지만 이후 점차 족외혼의 문이 열리면서 문벌 귀족층 부상하고 건국 후 100여 년이 지나면서 몇몇 문벌 가문들에 의한 정치적, 사회적 독점 체제 구축되어 보수화 경향을 띠며 고려 문벌 귀족 사회로 진입.
< 고려 무신 정권기의 정치>
1) 고려 문벌 귀족의 등장과 성장
- 고려의 대표적 지배 세력은 문벌 귀족, 광종 대 과거제 실시되면서 지배층에게 유교적 소양 이 강조되고 성종 때 유교 이념에 기초한 지배 체제를 정비하면서 고래 지배층은 유교 이념 에 기반한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지향하며 건국 초 고려 정계를 주도하던 많은 호족세력은 지방 세력화한다.
중앙 문벌 귀족은 지방에서 상경하여 중앙 관료화한 일부 호족 계열, 신라 6두품 출신 유자자 층으로서 고위직을 오른 자들로 구성(고려의 이원적 사상 체계는 사회 종교적으로는 불교, 정치적으로는 유교를 띰)
2) 귀족 사회의 동요(자신들의 문벌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서로 폐쇄적 결혼을 함)
고려 황실의 족외혼(族外婚)이 점차 확대되면서 몇몇 특정 가문이 왕실과의 혼인 독점을 통 해 외척으로서 강력한 지배 세력으로 부상하자 귀족 사회가 동요한다.
예) 인종 4년 (1126년) 이자겸의 난, 인종 13년(1135년) 묘청의 난 발발. 그로부터 30여 년 이 지난 뒤인 1170년 무인 정변 발생하여 무인 정권 수립해 약 100년간 유지된다.
3) 음서제도: 과거 시험을 보지 않고 5품 이상의 관료가 장인, 아버지에게서 물려받는다
4) 무신 정권의 성립; 고려 의종 24년(1170) 8월, 친위대 견룡군 행수 이의방, 이고 및 대장군 정중부가 일으킨 정변으로 수립, 이후 원종 11년(1270)까지 100년간 무 신 정권이 지속된다.
5) 무신 정변 발발 원인
표면적 발발 동기
: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멸시, 차별적 인식 속에서 벌어진 돌발적인 하극산이 도화선이 되 어 의종 24년 왕이 개경 근처 보현원(普賢院) 행차 도조으 수박희 개초, 종3품 무신 이소 응(대장군)이 패해해 도망가다가 종 5품 문신 한뢰에게 붙들려 뺨을 맞는 사태 발생, 전 형적인 하극상, 무신의 분노 폭발
- 실질적인 정변 원인(구조적 모순)
: 문치주의가 확대되는 가운데 무신 차대(승진 상한 – 정3품 상장군)/북진 포기/세력 교체 실패하지 기득권이 강화됨
문빈 중심의 독점적 권력이 재편되고 보수화되어 문치주의 병폐 심화됨에 따라 왕권이 약화되어 무신 정변 초래
6) 무신 정권의 전개
최씨 정권 이전: 정변 발발이래 최씨 정권 등장 전까지 26년간 6차례의 권력 변동 발생
이의방의 이고 제거, 이의방 실권장악, 이의방 정중부 정권, 정중부가 이 의방 제거, 경대승이 정중부 제거, 이의민은 경대승 제거
특징으로는 무신들 사이의 상호 견제로 독주 세력 부재하고 하극상 풍조도 만연
최씨 정권 이후: 명종 26년 최충헌 집정 이래 4대 62년간 최씨 정권 유지
집비둘기 탈취사건
최충헌(23년)- 최우(30년) - 최항(8년) - 최의(1년):1196~1258
김준 – 임연 – 임유무(1258~1270)
특징: 독재 기틀이 마련되면서 권력 투쟁 종식, 장기 집권 가능
최씨 정권의 권력 유지 방식:
: 정권 도전 세력 제거(무반 견제, 문신 등용 확대)의 효과로 문치주의 어필, 행정기구의 원 활한 운영 도모되었다.
: 독자적 권력 기반 구축: 군사적으로는 도방(사병 집단)과 별초, 독자적 정치기구인 중방이 설치되어 교정도감(고정별감)이 되었고 정방(인사권)/ 서방(書房) 문신 자문기구 탄생
국왕 중심의 공적 통치 체제를 유지하면서 최씨 집안 중심의 사적 체제가 동시에 운영되었다가
무인 정권은 항몽기를 거쳐(고종 18~) 고종 45년에 최의가 자신의 가노출신 별장 김인준 등에 의해 제거되고 개경 환도가 이루어지면서 몰락한다.
무신정권 어떻게 볼 것인가?
1. 발발 원인에 대해
무신 정변은 보현원 행차 시 일어난 무신에 대한 모욕적인 하극상 사건을 계기로 촉발되었 지만, 큰 관점에서는 누적되어 온 문벌 귀족 사회의 여러 모순이 해소되지 못한 채 충돌하 며 일어난 사건이었다.
2. 변화
무신 집정기 이래 등용된 신진 문신은 향후 사대부 계층 형성의 토대가 되었다고 평가되기 도 한다. 이러한 신진 문신들은 (원 간섭기 이후) 성리학적 이념으로 무장한 새로운 대안 세력으로 성장하여 갔다.
3. 결과
1) 긍정적 측면
항몽과 팔만대장경 조성 - 강화도의 항몽에 대해서는 엇갈린 평가가 있지만 어쨌든 결과적 으로는 항몽의 기치를 이끌어 냈고, 팔만대장경판을 조성하여 고려인들의 호국 의지를 분명 히 하였다. ---> 고려인들의 시대 정신, 종교심을 담을 문화유산 창출
2) 부정적 측면
① 공적 조직의 무력화, 사유화 - 교정도감 정방 등을 통한 정치는 기존 정치 시스템을 무력화, 유명무실하게 하였다. 나아가 공권력을 사권화하기까지 하였다. 사병 양성을 통해 공병력의 근간을 흔들었고, 특히 인사권 행사와 관련한 기구 정방을 최우 집에 설치한 것을 통해 단적으로 알 수 있다.
② 대민정책 부재 / 토지의 불법적 점탈 자행 → 쿠데타를 암묵적으로 지지했던 백성들은 그들의 통치에 실망, 민란으로 대응
③ 강화천도와 강화도에서의 사치 생활 - 가장 부정적 평가를 받는 부분.
국가보다는 자신들의 권력 안위를 더 염려해 천도. 백성들은 몽고 군의 침략에 그대로 방치.
<조선>
고려를 넘어 조선으로- 조선 건국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 고려말, 조선 건국 세력의 권력 장악:1388년(우왕14) 위화도 회군 이후
조선 건국의 태동: 고려말 공민왕 대. 고려 멸망은 공민왕대 개혁 정치가 좌절되면서 비롯
건국의 배경 – 고려말 정치 상황
공민왕대 개혁정치
5년 개혁(1356) - 고려의 자주권 회복에 집중
친원파 제거(기철 노책)
원나라 연호 사용 폐지
친원 부서 정동행성이문소 폐지,
쌍성총관부 회복
- 원나라에 대한 종속 구조 어느 정도 청산/정방혁파 – 고려적 정치제도 회복 시도
홍건적 침입(1359, 1361)으로 안동까지 피신, 측근세력(김용)의 반란 – 암살 시도, 폐위돌 위기에 봉착 (원나라 1만 대군과 덕흥군 입국 시도)
14년 개혁(1365) - 정치 세력 불신 –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고 제 3세력 신돈을 통해 개 혁 추진
- 성과: 전민변정(田民辨正)의 성과/성균관 중영 – 신진사대부 대거 등용
- 한계: 무장세력, 권문세족의 반발, 승려 출신 신돈과 사대부들의 체질상 차이
신돈 중심으로 새로운 권력 집단 형성 – 공민왕 20년, 신돈 제거 – 공민 23년 (1374), 공민왕 시해 – 개혁 중단
우왕대 정치
대내적 – 신돈 제거 후, 이인임 일파(임견미, 염흥방)의 권력 독점, 신흥 유신들과 대립, 유 배 조치, 부패 자행(수정목 공문)
대외적 – 신흥하는 명나라 적대, 쇠락하는 원나라 교섭 – 우왕 14년 1월 최영, 이성계 공 조로 제거
2. 이성계 일파의 정권 장악
1) 이성계의 관직 진출 – 공민왕 5년 부친 이자춘(쌍성총관부 천호(의 투항으로 22세에 출사
2) 이성계의 무장 활동 공민 10년
– 강계만호 박의 반란 진압/ 홍건적 수도 함락시 수도 탈 환 작전에 참가
공민 12년 – 덕흥군 입국시 최영을 도와 격퇴/동북면에 침입한 여진족 삼선, 삼개 격퇴
공민 18, 19년 – 동녕부 입수(공민 20 년, 지문하사, 서서히 중앙 진출 모색)
우왕 6년 – 전라도 황산대첩에서 왜구에 대승(직임 – 양광, 전라, 경상도도순찰사)
우왕 9년 호발도 침입(동북면)
3) 중앙 정계 진출
우왕 14년 1월 최영과 연합, 임견미 일파 축출을 계기로 최영, 시중/이성계 – 수시중)
4) 최영 – 이성계 갈등 그리고 위화도 회군
정치적 토대, 개혁에 대한 입장차, 외교 노선에 대한 차이로 갈등, 중원에서 패권을 장악한 명나라는 고려의 이중적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고 고려에 더욱 강압적 자세 고수
1388년 철령 이북을 차지하겠다고 선언, 요동정벌과 외교적 해결론을 둘러싸고 대립
대명 외교- 공민 23년 :공민왕 살해/친원파가 이중 외교. 명나라 사신 채빈의 살해 – 대 명 외교 악화
- 우왕 10년: 정몽주 활약으로 완화, 공마(貢馬)를 트집잡고 심양군민 4만호를 돌려 보내라 강압
- 우왕 13, 14년: 고려 사절 입경 거절
- 우왕 14년 2월: 공마 불량을 이유로 통교 거절, 철령 이북 환속 주장
- 우왕 14년 3월 – 철령위 설치 통고
- 우왕 14년 4월 – 고려 정부 요동 출사 결정
회군 후 – 73세의 최영 유배 후 참수/우왕 강화 유배 – 창왕(당9세) 등극
이성계가 권력 장악/신흥 사대부가 정치 중심 세력화 – 세력 교체 성공, 본격적 개혁 시도
3. 회군을 전후한 왕조 개창 과정
1단계: 1388년 정월, 이성계, 최영의 제휴 – 수구 세력 축출 – 이성계 정치적 급부상/ 다 수 신흥 사대부 정계 진출.
2단계: 1388년 5월 회군 단행 – 최영 제거, 우왕 폐위 – 이성계 정계 장악/신흥 유신으로 정치 세력 교체
3단계: 창왕 폐위, 경제 개혁 도모, 온건 개혁파 제거 – 급진 개혁파의 정치적 실권 장앙
4단계: 공양왕 3년(1391), 토지개혁 단행 – 과전법 성립 – 고려 정권 토대 붕괴/경제권 장악
5단계: 중도파 정몽주 제거(공양왕 4년 4월)
6단계: 공양왕 4년(7/17), 이성게 수창궁 즉위(당58세) - 고려 멸망(고려조 34대 475년
1392년 조선 개국, 부국 강병
4. 왕조 개창을 어떻게 볼 것인가?
혁명으로 보는 편이 낫다.
<조선시대 국왕의 리더쉽> - 세종을 중심으로, 세종 정권의 성공과 한계
세종: 이름은 이도(李祹), 자는 원정(元正), 태종 3남. 1397년(태조 6) ~1450(세종 32), 재 위 32년
세자 책봉과 즉위: 1418년 6월, 양녕대군 폐세자, 택현설(擇賢說)에 근거해 세자 책봉
같은 해 8월, 태종의 선위(양위)에 의해 즉위
양녕대군: 태조 3년(1394년) 출생, 조선 최초 장자 출신 왕세자. 1402년(태종 2) 9세 원자 책봉, 1404년(태종 4) 11세 세자 책봉, 1407년(태종 7) 14세 혼인
부정적 평가(폐세자 요건) : 예의범절 부족/학업 태만/성미 조급/ 방종, 음행(경기 도 광주로 추방
양녕 관련 사건: 기생 봉지련, 초궁장, 곽선의 첩 어리 사건, 태종 17년 수서(手書) 사건
정치적 희생양/외척의 문제: 태종 6년, 9년 선위 파동(7년 민무구, 민무질 사건/구신(舊臣) 제거에 활용.
태종 17년 5월 30일 수서 상서:
양녕 VS 충녕(태종 16년 일화)
3, 태종의 정치적 역할
태종대 정치: 조선적 통치시스템 기초 마련, 왕권 강화
군사적으로는 사병 혁파
정치적으로는 의정부 6조 체제 마련으로 국왕의 국정 장악력 강화
종친은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종친불임이사(宗親不任以事)’ 원칙 강조
세종 초반 양상 통치기 정치적 역할
정치 세력 견제 및 제거 – 희안대군(2차 왕자의 난) 처리, 심온 제거
군정 및 국방(대마도 정벌)
외교 활동: 세종의 통치 명분 공고화, 안정적 권력 이양, 스스로의 정치 인생 마무리
4. 세종의 통치와 리더쉽
1) 두 임금 통치기의 정치
‘기해년(즉위 1년)부터 임인년(4년)까지 내가 비록 임금 자리에 있기는 했으나 그 동안의 國政은 모두 태종에게 말한 뒤 시행하였고 내가 내 마음대로 한 일은 없다.(세종실록)
양상 통치기의 특징:
- 양상 통치기 초반의 토역 정국의 무단적 정치 운영 – 태종대의 정치 운영 방식이 이어지는 과도기적 특징
태종과 세종, 모두 정치적 실권 보유한 분정(分政) 체제: 세종은 상화 태종과의 긴밀한 유대 유지, 대부분의 사안을 태종에게 재결
세종 경연의 정례화 – 다양한 신료군을 만나 정치
식권 강화, 지방 행정 실무에 최선,
집현전에서 공부나 학술 세미나에 집중, 대민행정, 예제 정비등에 주력 – 전문적인 국정 운영 능력 확대됨.
양상 통치 시(상왕 생존시기)
세종의 국정 활동의 의미:
통치 실무를 습득한 유예 기간(非 장자 계승의 약점을 극복하고 통치 능력과 명분 강화 유예 기간, 대민행정에 집중, 조선의 ’대민 지향적 통치‘의 기초 마련
2) 親政 이후 정치
신구 세력 조율 통한 정치 운영/ 점진적 세력 교체
공신 책봉없이 토역 사건을 통한 정치적 숙청을 지양하며 왕권 강화
세종 8년 김도련 회뢰 사건 – 의정부에서 공신 세력 임명 관행을 없애고 황희, 맹사성 등 非 공신계 등용
국왕의 실무 능력을 바탕으로 六曹 기능 강화: 육조직계제 – 의정부서사제
체제와 관련된 법 정비를 통해 관료의 행정적 전문 능력 향상 도모
법전의 정비 구체화 – 성종 대 경국대전
관리 등용 문제, 고과 제도 정비 – 모든 입사법이 시험제도로 일원화, 근무 일수를 따져 승 진 결정, 수령 7사 – 지방 통치과제 구체화 – 대민행정력 강화
중견 관료, 지방 관료 자질 강화: 윤대법 등 친견 관료층의 확대, 지방관 근무 의무화
구임법 실시 – 관료의 행정 숙달, 전문성 강화(수령 30개월에서 60개월로)
정책 결정에 참여폭 확대(의정부, 육조, 승정원, 대간, 집현전) - 정책 대결을 통해 관료들의 전문성, 경쟁력 강화 유도/ 세력간의 균형 도모 – 토론에 의한 정책 결정 풍도 마련- 토론(公論) 정치 문화의 포문을 염
집현전 세력 양성: 경연 담담/문물, 예제 정비/정책 연구 개발을 위한 자문 기능/언론 기능/후진 양성 – 성균관 등 교관 겸임- 탁월한 집현전 세력을 동원, 관료들 간의 정책 대결 유도, 견제 – 왕권 강화에 기여- 세종조 문화 황금기의 산실로서의 기능,
군사력의 국방력화: 4군 6진 개척, 군사력을 정치 투쟁 도구에서 국방 본연의 기능으로 환원
세종대 정치의 평가와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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