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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 On Heaven's Door, 1998) 감상 후 에세이 쓰기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4. 6. 1.

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초짜 철학도의 분투기


 
 
 
 
영화와 철학 과목에서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
(Knockin' On Heaven's Door, 1998) 감상했다.

과제로 에세이 쓰기를 완수한 시간,

바로 이 순간이
나의 천국이다.

창문 밖으로
살랑거리는 6월의 바람이
높다란 메타세쿼이아 초록빛 잎들에
입맞춤하고

그것에 응답할세라
햇살받은 초록잎들은
춤춘다.

펼쳐진 풍경 속
고요가
내 안으로 스며들며

천국은 늘
우리 곁에 있음을
가만 노래하고 싶어지는
시간,

고맙다고요. 고마워요.
모두에게
왜 이 말이 하고 싶어질까?
 
 
주제: 천국의 문을 열기 위한 그들의 분투기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의 두 주인공, 마틴과 루디)
 
“나는 천국을 향한 문을 열었네”
한 장의 풍경 사진과 함께 카톡이 왔다. 사진은 자주 그렇듯, 서해의 짠물이 물러난 자리로 갯벌이 드러난, 얼마쯤 해무에 휩싸인 금강 하구언의 아침 풍경이다.
“내가 맞이한 천국!”
낮은 음이 반복되는 유튜브 음악과 함께 실린 사진을 보며 나는 잠시 그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어쩌면 그 순간 나의 천국이 열릴 차례일 지도 모른다.
그는 임대아파트에 사는, 일반적으로 부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며 특별한 재능도 특별한 외모도 그렇다고 자랑할 만한 자식도 없지만, 늘 그는 그의 천국을 나에게 보여주려 애를 쓴다. 나는 종종 그의 천국을 가만 들여다보며 때론 투덜거린다.
“그대의 천국은 왜 이리 시시하냐?”
딱히 그의 대답을 듣고 싶은 것도, 물론 그의 천국을 비하하고 싶은 마음도 아니다. 그저 너무 자주 천국에 산다는 그의 말이 믿기지 않는, 그 믿기지 않는 나의 마음을 애써 부정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내 천국은 말이야.”
또 말이 길어지려 한다.
“그만, 내 천국론이나 먼저 들어봐라. 쫌.”
나는 그의 말문을 막는다.
“내 천국은 절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질 수는 없어. 물론 관계 같은, 그래 우정, 혹은 사랑과 같은 관계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천국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건 그저 찰나일 뿐이야. 왜냐면 인간은 늘 변하니까, 그 마음도 변하고, 그래서 어쩔 도리없이 관계도 변하고. 어느 순간 천국이 지옥이 되기도 하거든.”
나는 뜬금없이 천국이라 일컬어지는 사진을 앞에 두고, 쓸쓸한 나의 인간 관계의 법칙을 얄궂게 끌어들인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그가 얼마 전 봄에 찍었다던 남해 어딘가의 해변 사진을 다시 한번 투척한다. 나의 엘리시온(Elysium)란 문구와 함께. 그래서 찾아보았다.
 
엘리시온이란 푸른 초원과 화려한 꽃들, 맑고 깨끗한 강과 시냇물로 이어지는 가없는 바닷가로 봄꽃들이 화려하게 펼쳐져 있는, 이곳에 도달한 영혼들은 고통과 슬픔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평화와 기쁨을 누리며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운 활동을 하면서 무한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종종 언급되는 이상적인 낙원, 위대한 영웅들, 덕망 높은 사람들, 위대한 시인들, 철학자들 등 신들의 은총을 받은 이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신성한 존재들에 의해 보호받아 그들의 영혼들은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이란다. 또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엘리시온을 영혼이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는 이상적 장소로 해석하며 인간의 영혼이 몸을 탈출해 윤회를 거듭하며 불멸적 상태로 머물 수 있는 철학적 이상향으로 묘사하는데 얼마쯤 동양 철학가인 노자의 작은 나라를 기초로 도연명이 언급한 무릉도원과 비슷한 곳일 것도 같다.
 
과연 그런 곳이 천국일까? 그런 곳이 천국이라 해도 그리 끌리지 않는 ‘나란 존재’는 또 왜일까?
천국이란 정의는 종교적, 철학적,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도 있겠다. 특히 기독교에서의 천국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장소로, 신앙을 통해 구원을 받은 영혼이 죽음 이후에 들어가는 곳으로 여겨져 영광과 평화, 행복이 가득한 장소가 되며, 이슬람교에서는 신앙심 깊은 무슬림이 죽은 후 보상받는 낙원으로 물리적 쾌락과 영적 평안,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곳으로 묘사되는 천국(잔나)가 있으며 불교 또한 윤회의 사이클에서 벗어나기 전의 고차원적 영역인 천계로 연결된다.
 
그런데 내가 본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에서 '천국'은 위에 언급한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 자질구레하고 비열하며, 때론 얼토당토않은 설정을 배경으로 두 주인공은 천국의 문을 두드리기 위해 별일을 다 벌인다. 이들에게 천국이란 장소라기 보다는 은유와 상징적 의미가 되겠지만 여하튼 그들이 노크하는 천국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영화 초반 두 주인공 마틴과 루디는 병원에서 만나 자신들이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각자의 방식으로 천국을 상상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천국에선 바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해“
라는 그들의 대화에서 천국에 대한 상징적인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는데 두 주인공에게 바다는 자유와 평화, 그리고 영원한 아름다움의 상징임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다.
마틴은 바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루디에게 바다를 보는 것이 천국 같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그들은 함께 병원을 탈출해 얼마 남지 않은 그들의 남은 시간을 최대한 자유롭게 보내고자 삶의 규칙과 의무에서 벗어나 차를 훔치고 은행에서 돈을 강탈하며 바다를 향한다.
두 주인공은 얼마 남지 않은 그들의 시간, 그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작은 행복들, 일상 속 작은 기쁨들이 가득한 곳에서 함께 웃고 춤추고 술을 마시며 인생의 마지막 순간들을 마치 천국은 이 같은 경험들을 할 수 있는 곳이라고 알려주는 듯한 영화의 장면들이 계속된다. 즉 순간순간, 찰나의 감각적 경험들을 날 것으로 할 수 있는 곳이 그들에겐 천국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마틴과 루디의 여정을 통해 서로에 대한 우정과 의지로 가득하며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발견되는 깊은 유대감과 이해, 그리고 동료애를 표현한다. 둘은 어떤 도덕적 잣대를 드러내지 않고 그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하며 천국이 단순히 장소가 아니라, 함께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임을 드러내는데, 결국, 영화 속 두 주인공에게 천국은 단순히 사후 세계나, 우주 어느 곳엔가 존재할지도 모르는 어느 장소가 아니라, 바다와 같은 자연의 아름다움, 자유와 해방, 순간의 행복, 그리고 진정한 친구와의 동행에서 느낄 수 있는 삶의 순간들이었고 그들은 이러한 요소들을 통해 자신들만의 천국을 경험하고자 하며, 이를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두 주인공은 함께 하는 여행을 통해 자신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마지막 순간을 평화롭게 맞이하기 위한, 내면의 평화와 죽음의 수용을 통해 천국에 이미 도달했음을, 삶의 마지막 순간을 바다를 응시하며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장면 앞에 나는 그들의 천국을 보았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천국, 개인적 소망과 꿈, 자유와 해방, 우정과 인간적 연결, 내면의 평화와 수용, 그리고 순간의 아름다움 등, 우리의 삶과 경험 속에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영화는 장면, 장면을 통해 말해주는 듯했다.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를 관람한 후 나는 왜 내가 위에서 언급한 엘리시온(Elysium)이나 무릉도원, 혹은 종교적 색채를 띤 천국 같은 장소적 의미의 끌리지 않았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리고 관계 속에서 천국을 꿈꾸지 않겠다는 나의 얄궂은 선언을 얼마쯤은 보류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나는 내 친구에게 이런 카톡을 보냈다.
”그대의 천국에 초대해 주어서 늘 고마워. 어쩌면 그대와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나에겐 지금, 바로 이 순간이 천국인지도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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