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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동물권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4. 5. 26.

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초짜 철학도의 분투기

 

 

 

 

 

월요일

군산대 독서 토론 모임은

셸리 케이컨의

“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란

책이 선정되었고

 

이주 전부터 읽기시작했는데

나머지 100페이지에서

읽기를 멈췄다.

 

5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이

지루할 만큼

반복되는 주장과

그 주장들을 뒷받침하는 이야기들이

나처럼 단순한 사람에게

몹시 복잡해

읽다 보면

무슨 말인지

뒤섞여 혼란에 빠지곤 했다.

 

아마도

내 머리가 뒤따르지 못하는 것이겠다.

 

대신 몇 시간을

“동물권”에 대한

위키를 비롯한

자료들을 정리해보며

알지 못했던

여러 사실들을

알게 되는 기쁨도 있었다.

 

 

1. 동물(動物)이란 무엇일까?

2. 동물권(動物)이란 무엇일까?

1) 동물권의 개념

3. 동물권의 역사

1) 고대 세계의 동물의 도덕적 지위

2) 17세기 ~ 19세기

a) 르네 데카르트(1596년~ 1650년): 기계로서의 동물

b) 존 로크: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로서 동물에 대한 대우

c) 이마누엘 칸트(1724년~1804년)

3) 20세기 동물권 운동

a) 갈색개 사건

b) 비거니즘의 발전

c) 『동물 해방(Animal Liberation)』의 출간

4) 동물해방전선의 형성

5) 동물권행동 단체 카라

4. 동물권에 대한 반응

5. 동물권 논란에 대한 현주소

6. 동물권에 대한 다양한 비판

1) R. G. Frey

2) b) Carl Cohen

3) Richard Posner

4) Roger Scruton

7. 『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에서 셸리 케이컨의 주장

 

 

 

<동물권>

 

1. 동물(動物)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의 동물이란 엽록소를 갖지 않고 세포벽을 갖지 않으며 몸속에 여러 기관이 있는 생물 중 다세포인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운동 능력과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진핵생물(眞核細胞는 세포 내에 핵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세포소기관을 가진 세포들을 통칭)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동물’이라고 하는 말은 특히 일상어의 수준에서는 인간동물을 포함하지 않는 ‘비인간동물(짐승)’의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동물’이라고 하는 단어의 좁은 의미의 뜻일 뿐이며, 인간도 생물학적으로 동물이다.

아리스트텔레스는 생물을 동물과 식물로 구분하였으며, 이것이 칼 폰 린네(스웨덴 출신의 식물학자로 생물 분류학의 기초를 놓는데 기여한 식물학의 시조:1707~1778)의 첫 계급 분류로까지 이어졌다. 그 뒤로 생물학자들이 진화 관계를 강조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군들은 어느 정도 제한을 받아왔다. 이를테면 미시적인 원생생물은 이들이 움직이기 때문에 동물로 여겼으나 지금은 별도로 취급한다.

린네의 원래 분류에서 동물은 세 개의 계 가운데 하나였으며, 이것이 연충류, 곤충류,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로 나뉘었다. 그 뒤로 마지막 다섯 가지가 모두 하나의 문인 척삭동물로 합쳐졌으며 다양한 다른 형태들은 별도로 떨어져 나갔다.

 

2. 동물권(動物)이란 무엇일까?

 동물권이란 비인간동물 역시 인간과 같이 인권에 비견되는 생명권을 지니며 고통을 피하고 학대 당하지 않을 권리 등을 지니고 있다는 개념이다. 동물권은 크게 계층주의 동물권과 단일주의 동물권으로 나뉘며, 단일주의 동물권은 동물이 하나의 돈의 가치로서, 음식으로서, 옷의 재료로서, 실험 도구로서, 오락을 위한 수단으로서 쓰여서는 안 되며, 동시에 인간처럼 지구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개체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 광범위하면서 공통적인 견해이다. 반면 계층주의 동물권에서는 도축의 문제는 허용된다. 동물권 옹호론은 동물 자체의 권익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동물 보호, 자연 보호와는 다른 개념으로 보기도 한다. 단일주의 동물권 옹호론자들은 채식주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a) 동물권의 개념

동물권(animal right)은 크게 일정한 수준의 기준만 통과하면 동일한 도덕직 지위를 부여하는 단일주의적 동물권과, 일정한 기준을 통과해도 동물마다 다른 수준의 도덕적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계층주의적 동물권으로 나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피터 싱어(1946년~ 오스트레일리아 철학자로서 『동물해방』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존재의 이익 관심은 동등한 고려 가치가 있으며, 이들을 종에 근거하여 하찮은 미물로 취급하는 것은 인간을 피부색에 따라 차별하는 것보다 더 낫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지성이 아니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 때문에 동물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톰 리건 등 대부분의 동물권 철학자들은 단일주의 동물권을 주장하고 계층주의적 동물권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는 셸리 케이건이다. 피터 싱어는 동물권의 아버지라는 별칭도 있지만, 그는 공리주의 학자이기 때문에 동물권이라는 개념은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주장한 동물해방은 동물권 주장과 맥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동물권 학자로 분류된다. 통상적으로 동물권을 주장한다고 말하면 대부분 단일주의 동물권을 의미한다.

동물을 잔인하게 다뤄서는 안 된다는 동물의 도덕적 지위에 대한 논의는 과거에도 윤리의 관점에서 다루어졌던 개념이다. 거의 대부분의 문화에선 동물이라 할지라도 잔혹하게 다루는 것을 비윤리적인 행위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관용을 강조하는 것이지 동물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데카르트는 동물이 진정한 쾌락이나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생물학적 로봇이라고 보았고, 칸트는 동물도 고통을 느낄 수 있지만 도덕적 사유능력이 없으므로 인격에게만 부여되는 권리가 없다고 보았다.

 

단일주의 동물권 개념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미국의 철학자 톰 리건(Tom Regan 목적론적 공리주의를 바탕으로 제기한 싱어의 동물해방론에 대해, 톰 리건은 1983년 『동물권 옹호』를 통해 의무론적 입장에 기댄 논의로 동물권 논쟁의 지형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리건은 공리주의적 해법에 맞서 “삶의 주체는 모두 동등한 내재적 가치를 지닌다”는 ‘내재적 가치’(inherent value)를 앞세우고 이를 권리와 연결시켰다. 이에 따른다면 인간이건 동물이건 주관적으로 삶을 경험할 수 있는 존재라면 누구나 내재적 가치를 지니며, 이에 따라 차별 없이 동등한 권리를 가질 수 있게 된다. 동물실험이나 공장식 축산 등을 멈춰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도 나아갈 수 있다.)은 인간과 동물이 근원적으로 평등하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과 동물이 모두 자신이 삶의 주체임을 경험하는 존재들이 가지는 특별한 권리인 '내재적 가치'를 가졌기 때문에 인간은 동물의 가치를 존중하는 윤리적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동물권 옹호 단체는 동물들 역시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의 일부로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동물권의 옹호는 결과적으로 인권의 향상에도 도움을 준다고 본다.

 

캐나다의 정치 철학자 윌 킴리카((Will Kymlicka)는 그 동안의 동물권 논의가 도덕적 책무에 머물러 큰 진전을 이루고 있지 못하다고 보고, 보다 적극적인 책무와 관계적 의무를 부여하기 위해서 동물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하자는 주장을 펼친다. 한국의 철학자 목광수는 킴리카의 주장과 같은 성급한 정치화는 오히려 동물권의 확산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3. 동물권의 역사

근대 이전의 철학 사상은 동물과 인간의 차이에 강조점을 두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을 동물과 다른 인간의 고유 본성으로 보았고, 이를 근거로 인간의 우위를 주장하였다. 유교와 같은 동아시아의 사상 역시 도덕을 인간의 본성으로 보아 금수(禽獸)에 대한 인간의 우선권을 당연히 여겼다.

동서를 막론하고 동물을 사용한 투견, 투우, 투계와 같은 피를 보는 스포츠가 널리 행해졌다.

최초의 근대적인 동물학대 방지 법은 1822년 영국 하원에서 재정된 마틴 법을 들 수 있다. 이 법에서는 말이나 소에 대한 학대를 금지했다.

 

윤리학자 피터 싱어는 1975년 발표한 『동물해방』에서 즐거움과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의식이 있는 존재인 동물을 인간이 마음대로 사용하고 학대하는 것은 성차별이나 인종 차별과 같은 인종차별주의라고 주장했다. 피터 싱어는 동물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이 '동물 애호'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짚었다. 권리의 문제는 호불호의 영역이 아닌 당위의 영역이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1) 고대 세계의 동물의 도덕적 지위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은 이성을 결여하였다고 주장하였고, 인간을 자연계의 가장 상위에 올려놓았으나, 고대 그리스에서 동물은 매우 존중받았다. 돌고래와 같은 동물은 신성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동물에 대한 21세기 논쟁은 고대 세계와 신성한 위계에 대한 개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아담은 바다의 물고기, 하늘의 새, 가축, 모든 땅, 땅 위를 기어다니는 것에 대한 지배를 부여받았다. 지배는 재산권을 수반할 필요는 없으나 소유권을 나타내기 위해 수세기 동안 제한을 받았다.

 

현대 철학자 버나드 롤린은 ‘지배’는 부모가 아이를 돌보는 것 정도의 훈육을 넘어 학대를 수반하거나 허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롤린은 나아가 십계명에서 공표된 안식일은 동물도 인간과 함께 하루의 휴식을 줄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성경은 황소와 나귀가 함께 쟁기를 끄는 것을 금지한다. 랍비 전통에 따르면 이러한 금지는 훨씬 힘이 센 수소와 함께 있으면서 나귀가 겪게 될 고초에서 유래하였다. 황소가 곡식의 밟아 알갱이를 낼 때 입마개를 씌우는 것에 대한 금지(신명기25:4–5)나 심지어 도시를 포위할 때 나무를 파괴하는 것을 금지하는 환경과 관련된 금지도 발견되었다. (신명기 20:19–20) 이러한 고대의 규제는 동물의 상황에 대한 인식을 나타낸다.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피타고라스는 인간과 비인간의 영혼은 인간에서 동물이나 다른 것으로 윤회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동물에 대한 존중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철학자 플라톤의 학생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아닌 동물은 호기심이 없기 때문에 존재의 대사슬(great chain in being)에서 인간의 아래에 위치시켰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 분류학을 창시하였으며, 인간과 다른 종의 몇 가지 비슷한 점을 발견하였으나 동물은 이성(로고스), 추론(로기스모스), 지정(디아노이아, 누스)와 믿음(독사)를 결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2) 17세기 ~ 19세기

a) 르네 데카르트(1596년~ 1650년): 기계로서의 동물

인간이 아닌 동물은 환원적으로 자동기계로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르네 데카르트는 17세기에 동물에 대한 태도에 영향을 주었으며, 『성찰』에서 그의 동물에 대한 견해를 설명하였다. 과학 혁명 시대 동안 저술을 하면서 우주에 대한 기계론을 소개하였으며, 이 이론의 목적은 세계가 주관적 경험의 언급 없이 설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접근은 동물의 인식에 대한 문제로 확대되었다. 데카르트에게 정신은 인간을 신의 정신에 이어주는 물리적 세계로부터 분리된 것이었다. 비인간은 데카르트에게 영혼과 정신, 이성이 없는 복잡한 기계일 뿐이었다.

 

b) 존 로크: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로서 동물에 대한 대우

데카르트와 달리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1632년~1704년)는 『미래를 위한 자녀교육(Some Thoughts Concerning Education)』에서 동물은 느낌을 가지고 있으며 불필요한 잔인함은 윤리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주장하였으나, 다치지 않을 권리 또한 동물의 주인이나 잔혹함으로 인하여 상해를 입은 인간에게 부과되었다. 로크는 아이들이 동물을 괴롭히는 것을 금지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논하면서 "짐승을 괴롭히고 죽이는 관습은 인간에 대한 마음 또한 비정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c) 이마누엘 칸트(1724년~1804년)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인간이 비인간에 대한 직접적인 의무가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였다. 칸트에게 동물에 대한 잔혹함은 오로지 인간에게 나쁘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었다. 1785년에 칸트는 "동물에 대한 잔혹함은 인간의 그 자신에 대한 의무와는 반대쪽에 있다. 그것은 고통에 대한 공감을 약하게 하므로, 다른 인간과 관련하여 윤리학에 매우 유용한 자연적 경항이 약화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였다

 

3) 20세기 동물권 운동

a) 갈색개 사건

갈색 개 사건은 생체 실험 찬반을 놓고 1903년에서 1910년 사이 영국에서 벌어진 정치적 논란이다. 1903년 스웨덴 여성주의활동가들이 런던 대학교 의학대학 생체 실험 강의실에 난입한 사건으로 촉발되었고, 이후 1906년 생체 실험 반대론자들이 동상을 건립하자 의대생들은 동상 파괴를 위해 경찰과 충돌하였다. 논쟁은 명예훼손 소송으로 번졌고, 영국 정부가 동물 생체 실험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한 심의회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영국 전역을 찬반으로 갈라놓는 “코즈 샐레브르”(프랑스어  cause célèbre, 유명한 쟁점)이었다.

 

1903년 2월 런던 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윌리엄 베일리스는 60명의 학생들 앞에서 갈색 테리어에 대한 생체 실험을 하고 있었다. 스웨덴 출신 여성주의 활동가들은 이 생체 실험이 불법이라고 여겨 강의실에 난입하였다. 베일리스와 조수들은 개가 충분히 마취되어 있었다고 했지만, 활동가들은 개가 분명한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저항하였다고 말했다. 전국반생체실험협회는 이 생체 실험이 잔혹하고 적법하지 않은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개를 이용한 생체 실험으로 몸 전체에서 물의 항상성을 조절하는 호르몬으로, , 이자, 간에서 분비가 조절되어 샘창자의 환경에 영향을 미친 세크레틴(secretin)을 발명한 발견한 저명한 생리학자이었던 베일리스는 큰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는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였다. 1906년 반생체실험협회는 배터시(런던 남동부)에 갈색 개를 추모하는 동상을 세웠지만, 의대생들은 그 동상에 표시된 선동적 문구에 격분하였다. 동상에는 "영국의 남녀들이여, 얼마나 이런 일을 계속하게 두려는가?"라는 문구가 달려 있었다. 의대생들은 계속하여 동상을 파괴하고자 하였고, 결국엔 경찰이 "반견주의자"로 불린 이들의 습격에 대비해 24시간 내내 동상을 경호해야 하였다. 1907년 12월 10일 1천여명의 의대생들이 지팡이마다 갈색 개 모형을 매달고 런던 한 가운데를 지나 4백 명의 경찰과 여성참정권론자,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지키고 있는 동상 앞에서 충돌하였다. 이 일은 "갈색 개 폭동"이라 불린 여러 충돌 가운데 하나였다.

 

1910년 3월 배터시 의회는 동상을 철거하기로 의결하였다. 4 명의 노동자가 경찰 120명의 호위를 받으며 동상을 철거하였고, 2만 건이 넘는 청원에도 불구하고 의회는 동상을 대장간에 보내어 녹였다. 70년이 지난 1985년 생체 실험 반대론자들은 새 동상을 배터시 공원에 설립하였다. 1997년 피터 메이슨은 옛 동상에서 녹인 청동이 보행자 안전 펜스로 쓰였는데 펜스 위에는 "개 금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썼다.

 

b) 갈색개 사건의 배경과 전개

* 1876년 동물학대 방지법

1837년에서 1901년 사이인 빅토리아 여왕 재임기의 영국 의회는 상하 양원 모두 생체 실험에 대한 반대 입장이 분명했다. 여왕부터 생체 실험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생체 실험은 의대생으로 하여금 살아있는 동물을 해부하게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때로 동물에 대한 마취 없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1875년 당시 영국의 동물을 이용한 실험은 연간 약 300회 정도였으며, 횟수는 해가 갈수록 늘어 갈색 개 사건이 있던 1903년에는 연간 19,084회에 달했다. 2012년 현재의 영국 내 동물 실험 횟수는 411만 건으로 이 가운데 개를 이용한 것은 4,643회이다.

 

19세기 당시 생리학자들의 연구는 종종 비난을 받았는데, 널리 알려진 클로드 베르나르(Claude Bernard, 1813~1878, 프랑스 생리학자이며 근대 실험 의학의 시조) 역시 비난을 피할 수는 없었다. 베르나르는 아내에게 "생명 과학이라는 가장 반짝이는 방에 들어서려면 길고 섬뜩한 부엌을 지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등, 이러한 비난에 불쾌감을 드러내곤 하였다. 아일랜드 페미니스트 프랜시스 파워 코브(Frances Power Cobbe1822년~1904년, 영국계 아일랜드 작가, 철학자, 종교 사상가, 사회 개혁가, 생체해부 반대 운동가, 선도적인 여성 참정권 운동가)는 1875년 런던에서 전국반생체실험협회를 창립하였고, 1898년에는 영국 생체 실험 퇴출 조합을 설립하였다. 전자는 생체 실험에 대한 규제를 목적으로, 후자는 퇴출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1875년 7월 영국 정부는 반대 여론에 이끌려 “과학적 검증을 위해 살아있는 동물을 객체로 하는 실험의 시행”에 대한 왕립 심의회를 개설하였다. 청문 결과 연구자들이 마취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심의회는 개·고양이·말·당나귀·노새 등을 포함하는 동물의 생체 실험을 금지하는 규제안을, 종합의료협의회와 《영국 의학회지》는 금지 대신 보호 조치의 강화를 제시하였으며, 그 결과 1876년 동물학대방지법이 제정되었다. 전국반생체실험협회는 이 법이 실효성은 없이 이름만 그럴싸하다고 비판하였다.

 

법의 핵심은 마취 없이 생체 실험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동물 한 마리에 대해서 단 한 차례의 실험만이 허용되었으나, 동일한 실험의 일부로 인정될 때에는 몇 차례까지도 연장하여 실험할 수 있었다. 실험이 끝난 뒤엔 실험이 실패하였다 할지라도 사용된 동물을 죽이도록 하였다. 법률 위반에 대한 고발은 오직 내무성 장관에게 할 수 있었으나, 갈색 개 사건 당시 내무성 장관인 애러터스 애이커스-더글라스는 생체 실험 반대론자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 어니스트 스털링(1866~1927)과 윌리엄 베일리스 (1860–1924)

20세기 초 런던 대학교 생리학 교수 어니스트 스털링과 그의 매형이기도 하였던 윌리엄 베일리스는 개를 이용한 생체 실험을 통하여 신경계가 이자의 분비물을 조절한다는 이반 파블로프의 가설을 검증하였다.  스털링의 전기를 쓴 존 헨더슨은 스털링과 베일리스가 매우 자주 실험을 하였으며 스털링의 연구소는 런던에서 가장 바삐 돌아가는 곳이었다고 썼다.베일리스는 1890년 생체실험 자격을 획득했고 1900년부터 생리학 강의를 했다.

둘은 췌장에서 만들어지는 소화액이 미즙(糜汁, Chyme)형태로 십이지장과 공장으로 들어가 산성도를 높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마취된 개의 십이지장과 공장 신경을 절단하고 혈관은 그대로 두어 산성도의 증가가 신경의 조절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며 매개체가 혈관을 통해 이동함으로써 진행됨을 확인하였다. 새롭게 발견된 매개체는 순환계에서 소화기관으로 배출되는 물질이란 의미에서 세크레틴(secretin)이라고 명명되었다.

1905년 스털링은 그리스어 호르모(고대 그리스어로 촉진(또는 흥분)시키다)를 어근으로 삼아 호르몬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호르몬은 세크레틴과 같이 아주 작은 양으로도 생체 기관의 작용을 촉진시키는 물질을 말한다. 스털링과 베일리스는 1899년에 마취된 개를 이용한 실험으로 창자의 연동 운동을 발견하기도 하는 등 생체 실험을 통해 많은 생리학 가설을 검증하였다.

 

* 리찌 린드 아프 하게비(1878–1963)

1903년 4월 여성주의 활동가이자 생체실험 반대론자였던 리찌 린드 아프 하게비(Lizzy Lind af Hageby)와 라이자 카터리네 샤르타우(Leisa Katherine Schartau)는 스털링과 베일리스의 강의실로 뛰쳐 들어갔다. 두 여성은 어린 시절부터 아는 사이였다. 린드 아프 하게비의 아버지는 스웨덴 대법원장을 역임하였고, 할아버지는 스웨덴 국왕의 시종이면서 영국 첼튼햄 여자대학의 교직원이기도 하였다. 샤르타우의 아버지는 스웨덴군의 대위였다.

1900년 두 여성은 당시 동물실험의 중심지였던 파리의 파스퇴르 연구소를 방문하였다. 둘은 방 하나를 가득 매운 우리마다 상처받고 병든 동물이 놓여 있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었고, 스웨덴으로 돌아간 뒤 스웨덴 반생체실험협회를 창립하였다. 1902년 둘은 런던 여자 의예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당시의 다른 대학과 달리 생체실험을 하지 않았다. 린드 아프 하게비와 샤르타우는 생체실험 반대를 위해 자신들이 의사가 되고자 하였다.

 

사건 당시 킹스 칼리지와 유니버시티 칼리지에는 100개의 강의가 개설되어 있었는데, 50 회의 생체 실험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가운데 20 회는 "전체적 생체실험"이었다. 이들은 당시의 일을 담은 《목격담》을 일기로 기록하였고, 훗날 《과학의 도살장: 두 생리학도의 일기에서 발췌》로 출간하였다. 두 여성은 갈색 개의 생체 실험 동안 강의실에서는 웃음 소리가 났다고 기록하면서 해당 장의 제목을 〈재미〉라고 지었다. 이 제목은 명예훼손 재판에서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 갈색 개에 대한 생체 실험

갈색 개는 6 Kg가량 나가는 짧은 털의 테리어 혼종이으로 1902년 12월 이미 개복되어 췌장관을 결찰하고 관찰하는 생체실험 대상이 된 바 있었다. 그 뒤 우리에 넣어져 1903년 2월에도 또 다시 생체실험을 당했고, 두 스웨덴 여성이 뛰쳐 들어온 당일에도 생체실험을 위해 강의실에 놓였다.

스털링은 법정에서 학생들이 강의실에 도착하기 전에 이전의 실험 결과를 확인하고자 개복하였으며 시간은 45분쯤 걸렸다고 증언하였다. 개복이 완료된 후 베일리스의 강의를 위해 겸자로 개복부를 닫아두었다.

베일리스는 개의 목을 새롭게 절개하고 침샘과 연결되는 혀의 신경을 드러내 전극을 연결하였다. 그의 의도는 신경에 전기 자극을 가해 침샘의 작용이 혈관 작용과는 독립적으로 이루어짐을 보이는 것이었다. 이후 개는 강의실로 옮겨져 실험대 위에 놓여 다리가 묶이고 머리가 고정된 채 입에 재갈이 채워졌다.

베일리스는 그날 개에게 모르핀을 주사하였으며 6가지 약물을 혼합한 A.C.E 혼합제를 기관지를 통해 투여하여 마취하였으며 마취를 유지하기 위한 관을 실험대 아래쪽으로 연결하여 두었다고 주장하였다. 두 스웨덴 여성은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였다. 그들은 개가 충분히 마취되지 않아 의식이 있었고 실험대 위에서 일어서려고 하였으며, 심지어 실험실에는 마취제 냄새조차 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다른 학생들은 개가 약하게 몸을 비틀긴 했지만 저항하는 움직임을 없었다고 주장했다.

 

60명의 학생을 앞에 두고 베일리스는 반 시간가량 신경에 전기 자극을 주면서 강의하였다.그 뒤로 당시 베일리스의 학생이었던 헨리 핼릿 데일(훗날 노벨상을 받게 된다)이 넘겨받아 이자를 제거하는 실험을 하고 심장에 칼을 찔러넣어 죽였다. 이 부분은 나중에 명예훼손 재판에서 논란이 되었는데 베일리스의 연구실 조수였던 찰스 스커틀이 클로로포름과 A.C.E 혼합제를 사용해 개를 안락사시켰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스커틀은 칼을 사용해서 죽였다고 진술을 바꾸었다.

 

* 일기

1903년 4월 14일 린드 아프 하게비와 샤르타우는 그들이 아직 공표하지 않은 200 페이지에 달하는 일기장을 반생체실험협회의 서기이자 변호사였던 스테펀 콜리지에게 보여주었다. 콜리지는 영국 최고 법원의 대법원장을 역임한 존 콜리지의 아들이었고, 그의 증조 할아버지는 시인으로 유명한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이었다. 콜리지는 스털링과 베일리스가 1896년 동물학대방지법에서 금지된 여러 차례에 걸친 동물실험을 하였다는 데 주목하였다. 두 여성은 일기에 갈색 개의 실험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오늘의 강의에서 지난 번 실패한 시연이 반복될 것이다. 조교들과 연구실 조수들이 상처난 등을 실험판에 올린 큰 개 한 마리를 강의실로 들고 왔다. 다리는 판에 묶였고 머리 역시 관례에 따라 단단히 고정되었으며 입에는 재갈이 채워졌다. 목줄기에 커다란 절개가 있고 침샘이 드러나 있다. 동물은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모든 신호를 보인다. 저항하며 자꾸 자꾸 일어서려 한다. 온 힘을 다해 자유를 얻고자 시도한다.

 

위 기록은 반복되는 실험이나 불충분한 마취를 금지하는 동물학대 방지법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을 자명하게 보여준다. 일기는 또한 자격을 획득하지 못한 학생인 헨리 데일이 개를 죽였고, 그 과정에서 학생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농담을 주고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 스테펀 콜리지의 연설

메이슨에 따르면 콜리지는 법률이 허용하는 예외 때문에 기소할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대신하여 그는 1903년 5월 1일 전국반생체실험협회의 연례 모임에서 분노에 찬 연설을 하였다. 그는 피카딜리의 세인트 제임스 교회에 모인 2 – 3천 명의 청중을 향해 이 사건을 과학자들이 행한 고문이라고 비난하면서 "이것이 고문이 아니라면, 베일리스 씨와 그의 친구들은 .... 우리에게 무엇이 고문인지를 신의 이름을 걸고 얘기해 주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 날 《더 데일리 뉴스》에 연설 전문이 실렸다. 《더 데일리 뉴스》는 1846년 찰스 디킨스가 창립한 급진적 논조의 언론이었고 하원 의원 페더릭 밴뷰리를 통해 공개적인 생체실험을 금지할 것을 청원중이었다. 베일리스는 공개적인 사과를 요구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5월 12일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였다.

어니스트 스털링은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지만, 주간 의학 잡지로 콜리지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던 《더 랜센트》는 "법률 위반으로 판명될 경우 ... 스털링 교수에게도 여파가 있을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콜리지는 두 여성에게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는 일기를 공표하지 말라고 권했지만, 그들은 1903년 7월 코번트 가든의 어니스트 벨을 통해 일기를 출판하였다.

 

* 베일리스 대 콜리지의 재판

재판은 1903년 11월 11일 왕립재판소에서 열렸다. 대법원장 리처드 웹스터이 재판을 진행하여 4일 후인 11월 18일 마무리되었다.  《영국 의학 저널》은 이 재판을 "최대 중력의 실험 사례"라고 불렀다. 베일리스 측의 변호인 루퍼스 아이작스는 스털링을 첫 번째 증인으로 신청하였다. 스털링은 법률을 위반하고 두 차례에 걸쳐 실험하였다고 인정했지만, 두 마리의 개를 희생시키는 것을 피하기 위한 일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베일리스는 당일 아침 일찍 개에게 1.5 그레인의 모르핀을 주사하였고, 6 온스의 알콜, 클로로포름, 에테르 혼합 마취제를 개의 기도와 연결한 삽관을 통해 투여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베일리스는 삽입한 관이 깨지기 쉬워 개의 머리를 고정하였다고 말했다.

 

수의사 앨프레드 서웰은 베일리스의 방식이 적합하지 않다고 증언하였지만 왕립 수의대학교의 프레드릭 홉데이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베일리스의 마취가 과도하여 개가 전기자극에 방응하지 않는 바람에 실험이 실패한 일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베일리스는 개가 무도병을 앓고 있어 무작위적으로 움직인 것이며, 두 여성은 이를 알지 못하였기에 잘못 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베일리스 측의 증인으로 나선 네 명의 학생(남성 셋과 여성 한명이었다)은 개가 의식이 없었다고 진술하였다.

 

콜리지의 변호사 존 로우슨 월튼은 린드 아프 하게비와 샤르타우를 증인으로 세웠다. 그들은 자신들이 본 것을 다시 증언하면서 개가 강의실에 도착한 뒤 두어 분동안 홀로 놓여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이전의 생체실험으로 인한 상처를 관찰하였으며 목줄기는 새롭개 절개되어 두 개의 튜브가 삽입되어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들은 마취제 냄새를 맞지 못했고 마취를 위한 어떠한 조치도 보지 못하였다고 말했다. 둘은 개가 묶인 다리를 풀려고 몸부림 치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하였다. 실험이 시작되는 동안에도 개는 줄곧 움직였고 이들은 이를 매우 폭력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베일리스의 변호인은 콜리지가 두 여성의 주장에 대한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 않은 채 대중 앞에서 공표하여 베일리스에게 피해를 입혔다고 주장하였고, 콜리지는 두 여성의 증언이 생생하고 사실적이어서 진실이라 확신하였기에 공표한 것으로써 어떠한 위법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항변하였다. 《더 타임즈》는 피고인이 증인석에 앉아 방어에 실패하고 스스로의 사건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고 보도하였다.

 

* 판결

재판장인 앨버스톤 경 리처드 웹스터는 배심원들에게 이 사건이 국가적 이해관계에 중요한 것들 중 하나라고 말했다. 그는 "과학의 도살장"이나 "신경질적"과 같은 표현을 언급했지만, 배심원들에게 생체실험의 타당성에 대한 논쟁에 흔들리지 말것을 권유했다. 1903년 11월 25일 25분간의 심의 끝에 배심원은 익명으로 명예훼손에 의한 베일리스의 피해를 인정하였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생리학자들에게 박수 갈채가 쏟아졌다. 베일리스는 피해 보상금 2,000 파운드와 법정비용 3,000 파운드를 받게 되었고, 콜리지는 재판 다음날 이를 지불하였다.

 

재판 후 《데일리 뉴스》는 4개월에 걸쳐 콜리지의 비용에 대한 모금 운동을 벌여 5,700 파운드를 모금하였다. 베일리스는 자신의 피해 배상금을 유니버시티 컬리지 런던의 연구 자금으로 기부하였다. 《데일리 슈스》가 베일리스에게 그 돈을 “스테펀 콜리지 생체실험 기금”에 기부할 것을 권유하였지만, 베일리스는 이를 무시하였다. 2004년 발간된 그래쳐의 책에 따르면 베일리스의 기부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동물을 구입하는데 쓰이고 있다고 한다.

 

《더 타임즈》는 만족스러운 판결이었다고 평하면서도 의대생들이 보인 훌리건 행위를 비난하였다. 《썬》, 《스타》, 《데일리 뉴스》 등은 콜리지를 지지하며 부당한 판결이라고 평했다. 《과학의 도살장》을 출간한 출판인 어니스트 벨은 11월 25일 베일리스에게 사과하며 일기의 판매를 중단하였고, 남은 책들은 베일리스의 법무 대리인에게 넘겼다.

 

1903년 린드 아프 하게비는 동물 보호와 반생체주의 협회를 창립하고 책을 복간하였다. 《과학의 도살장》은 이후 1913년의 제5판까지 출간되었다. 논란이 되었던 장 〈재미〉는 〈갈색 개의 생체실험〉으로 제목을 바꾸어 생체실험과 재판 과정을 서술하였다. 소설가 토머스 하디는 이 책 한권을 책상 위에 올려 놓고 방문객들이 보도록 하였다. 역사가 힐다 킨에 따르면 1908년 연구 보호 협회가 창립되어 반생체실험 캠패인에 맞서 로비를 벌였다고 한다.

1903년 12월 마크 트웨인은 생체실험에 반대하는 단편 《개 이야기》를 발표하였다. 마크 트웨인은 생체실험 끝에 죽임을 당하는 개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었다. 소설은 명예훼손 재판에서 강한 영향을 받아 쓰였으며, 책이 출간되자 콜리지는 3천 권을 주문하였다.

 

* 생체실험에 대한 2차 왕립 심의회

1906년 9월 정부는 생체 실험에 대한 2차 심의회를 개최하였다. 심의회는 청문을 통해 과학자들과 생체실험 반대론자의 의견을 들었고, 1906년 12월에는 사흘 동안 어니스트 스털링을 불러 청문하였다.

심의 보고서의 공표는 매우 늦게 이루어져 1912년 3월에야 이루어졌는데 그 사이 심의 위원 열 명 가운데 둘은 몇 차례의 병환 끝에 사망한 뒤였다. 애초 두 명이었던 상임 조사관은 네 명으로 늘어났고 보고서의 분량은 139쪽이었다. 보고서는 생체 실험 동안 동물을 마비시키기 위해 쓰이는 독성 물질인 쿠라레의 사용 규제, 실험 실패를 의미한다고 할 지라도 고통 받은 동물에 대한 안락사 의무화, 그리고 척수 절개술에 대한 확고한 정의 등을 규정하였다. 보고서는 또한 동물학대방지법의 개선을 위한 세부 사항들을 장관에게 조언하였는데, 이는 1986년 동물에 대한 과학적 실험에 관한 법률에 의한 동물과학실험위원회 설치의 근간이 되었다.

 

* 갈색 개 기념비

<갈색개 기념비의 명판>

“갈색 테리어를 기념하며 1903년 2월 유니버시티 칼리지 연구실에서 개는 죽음을 맞았다. 이미 한 차례 생체실험을 겪은 지 두 달 뒤 죽음이 그를 찾을 때까지 또 다시 생체실험대에 올려졌구나. 또한 같은 자리에서 1902년 한 해 동안 232 마리의 개가 생체실험을 당했다. 영국의 남녀들이여 언제까지 이런 일을 계속하게 두려는가?”

 

재판이 끝난 뒤 세계생체실험반대연맹의 창립자 애너 루이사 우드워드(Anna Louisa Woodward)는 120 파운드의 기금을 모아 공공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 위에는 청동으로 갈색 개를 조형하였는데, 조각가 조지프 화이트해드가 제작하였다. 기념비는 2.29 미터 크기의 돌로 만들어져 사람과 개, 말 모두에게 식수를 제공하는 샘물가에 세워졌다. 기념비에 새겨진 명판은 또다른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1910년 《뉴욕 타임즈》는 이 문구에 대해 "생체실험 반대론자들의 신경질적이고 상투적인 언어"이며 "모든 의료 종사자들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평하였다.

 

랜스버리는 자신의 책에 기념비가 세워진 배터시 규역을 프롤레타리아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은 급진주의자들의 집합소로 묘사하면서 늘 자욱한 연기가 뒤덮혀 있는 빈민가라고 하였다. 이들은 생체실험 반대 운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전국반생체실험협회가 1896년 개원한 배터시 종합병원은 앨버트 브리지 길과 웨일스공 로가 교차하는 모퉁이에 있었는데 1972년까지 운영되었다. 이 병원은 1935년까지 생체실험을 거부하였으며 이와 관계된 의사는 고용하지 않았다. 이때문에 배터시 지역에서 이 병원은 "안티비브"(antiviv, 반생체실험(anti-vivisection)의 줄임말)나 "올드 안티"(old anti)로 불렸다. 1860년 창립하여 1871년 배터시로 이전한 뒤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동물보호단체 배터시 도그즈 앤 캣츠 홈(Battersea Dogs & Cats Home)의 1907년 당시 의장이었던 윌리엄 캐번디시-벤틴크는 버려진 개들을 구입하겠다는 생체실험 연구실의 제안을 "끔찍할 뿐만아니라 황당한 일"이라며 거부하였다.

배터시 의회는 래츠메어 놀이 공원을 기념비 설치 장소로 제공하고 매 주당 6-7 펜스의 임대료를 받았다. 1906년 9월 15일 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기념비의 제막식이 열렸고, 조지 버나드 쇼와 아일랜드 여성주의 활동가 샤롯 데스파르(Charlotte Despard)가 연설하였다.

 

* 폭동

런던 의대 병원의 의대생들은 기념비의 명판에 적힌 문구에 격분하였다. 동상이 세워진 첫 해에는 합법적인 시위만을 하였지만, 이듬해인 1907년 11월 동상을 파괴하려는 시도가 시작되었다. 11월 20일 학부생이던 윌리엄 하워드 리스터가 한 무리의 의대생을 이끌고 템즈에서 배터시로 행진하여 쇠지랫대와 해머를 가지고 동상을 부수려 하였다. 이들 가운데 열 명이 경찰관에게 체포되었다. 메이슨은 자신의 책에서 지역 의사의 증언을 담았다. 그는 젊은 의사들이 배터시의 사우스 웨스턴 스타에서 있었던 일을 "심각한 타락"의 신호로 보았다. "나는 그날 학생 하나를 잡으려고 경찰 열 명이 달라붙던 일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앵글로-색슨 종족은 쇠락했어요.“

 

몇몇의 학생들이 배터시에 있는 런던 남서부 경찰서에서 즉결 심판을 받았고 치안 판사 폴 테일러는 이들에게 벌금 5 파운드를 부여하였다. 이 사건은 방아쇠 역할을 하여, 이후 두 달 동안 천여 명의 의대생들이 시위에 나서게 되었다. 런던의 여러 의대에서 쏟아져 나온 이들은 지팡이에 작은 갈색 개 모형을 매달고 거리를 행진하며 실물 크기의 개 모형을 끌고 다녔다. 의대생들은 "폴 테일러를 신 사과 나무에 매달러 / 우리는 행진한다네"라고 소리쳤다. 《더 타임즈》는 이들이 개 모형을 불태우려 했지만 실패하자 템지 강에 던져버렸다고 보도하였다.

여성 참정권론자 모두가 생체실험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란 점을 알면서도, 의대생들은 여성 참정권 모임을 공격하였다. 1907년 12월 5일에 밀리센트 포우셋이 주최한 여성 참정권 모임은 책상과 의자가 날아다니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데일리 익스프레스》는 이날의 사건에 대해 "의대생들이 여성을 상대로 용감히 싸우다"라고 보도하며 비꼬았다.

 

* 1907년 12월 10일

의대생과 여성 참정권자가 충돌한 후 5일이 지난 1907년 12월 10일 목요일, 백여명의 의대생들은 갈색 개 동상을 끌어 내리려고 시도했다. 이들은 옥스퍼드 대학교와 캠브리지 대학교가 해마다 벌이는 럭비 시합 당일에 맞추어 일을 벌였는데, 거기에 모인 군중을 선동하여 동상을 템즈강에 버리려고 하였다. 이들은 드라팔가 광장에서 선동하여 2-3천 명의 군중을 모았다.

 

“우리는 어둠을 뒤로 하고 걸어가듯이 우리 발걸음을 레츠메어 공원으로 돌려 거기서 보리라, 우리의 습격을. 작은 갈색 개야 서라 누워라 하, 하, 하! 히, 히, 히! 작은 갈색 개, 이 싫은 것” — 시위대가 당시 유행하던 "작은 갈색 병" 노래의 가사를 바꾸어 부른 노래

 

오후가 되어 시위대는 곧 바로 배터시의 동상으로 향했지만 도로가 봉쇄되어 갈 수 없었다. 의대생들은 그 대신 생체실험을 반대하는 배터시 종합병원을 습격하려 하였지만 그 마저도 가로막혔다. 이 와중에 학생 한 명이 전차 위에 올랐다 떨어지자 노동자들은 "갈색 개의 복수다"라고 외치며 그를 병원으로 옮기는 것을 거부하였다. 《영국 의학 저널》은 아무리 생체실험 반대 병원이라도 군중들은 인도적인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고 비판하였다.

두 번째 학생 그룹은 백파이프를 연주하고 갈색 개 모형을 흔들며 런던 중심가로 행진했다. 경찰은 시위대를 보호하였다. 천여명의 시위대가 트라팔가 광장에 도착하여 400 여명의 경찰관과 15명의 기마 경찰과 대치하였다. 시위대는 넬슨 기념탑을 둘러싸고 자리잡아 연설을 하였다.

 

학생들과 경찰이 대치하는 가운데 기마 경찰이 뛰어들어 시위대를 분산시켰고 작게 나뉜 군중들은 체포되었다. 체포된 학생들 가운데에는 캠브리지 학부생 알랙산더 보우레이도 있었는데, 그의 죄목은 "개처럼 짖었다"는 것이었다. 한 시간가량의 충돌 끝에 경찰은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다음날 열린 보우 스트리트 즉심 법정에서 열명의 학생들이 판결을 받았는데, 일반 가담자에게는 40 실링씩, 경관 폭행자에 대해서는 4 파운드씩의 벌금에 처해졌다.

 

* 이상한 연대

한 달이 넘게 여기 저기서 폭동이 일어나는 사이 의대생들과 수의생들이 연대하였다. 1906년 12월 11일 리찌 린드 아프 하게비가 주최한 생체실험 반대 집회는 백여명의 학생들이 난입하여 의자를 집어 던지는 통에 무산되었다. 《데일리 클로니클》은 "분노에 찬 린드 아프 하게비 양이 남겨진 뒤로 집회장엔 아름다운 ‘달걀’들이 가득했다. 한 학생은 ‘양말이나 갈아 신어!’하고 외쳤다."라고 보도하였다. 집회장의 가구는 부서졌고, 참가자들의 옷은 찢겼다.

뉴잉글랜드 대학교의 수전 맥휴가 동상을 지키기 위해 달려갔을 때, 거기엔 다양한 정치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동상 앞에서 방어진을 갖추고 있었다. 노동조합 활동가, 사회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자유주의자, 그리고 여성 참정권 주의자들이 배터시에서 의대생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여성 참정권자들은 남성 노동자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서 어떤 환대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수전 맥휴는 그들 앞에 "갈색 테리어 개가 죽음을 맞이하게 만든" 남성 과학도들이 있었고 이 하나만으로 그들 모두가 단결하는 데 충분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리찌 린드 아프 하게비와 샤롯 데스파르는 이 사건을 여성주의와 마초의 대결로 바라보았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학자 코럴 랜스버리(Coral Lansbury)는 이 사건을 계기로 여성 참정권 운동이 생체실험 반대운동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고 분석하였다. 전국반생체실험협회의 부위원장 가운데 4분의 3이 여성이었다. 랜스버리는 갈색 개 사건이 여성의 생체실험 반대 운동 참여를 가져온 상징적 사건이라고 보았다. 생체실험을 위해 실험대 위에 묶여 있는 개의 이미지는 브릭스턴 교도소에 수감된 여성 참정권 운동가의 이미지와 겹쳐졌다. 혹은 여성 히스테리를 치료한다는 명분으로 자행되었던 난소나 자궁 척출과도 겹쳐졌다.

 

사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영국의 역사학자 힐다 킨은 스웨덴 여성주의 활동가들이 젊은 여성이었고 반체제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을 보였으며 과학자들에 대해 구체제의 유물이라는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고 평했고, 수전 해밀턴은 그들이 고등 교육을 받았기에 사회적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으며 이러한 점은 "새로운 형태의 증언"이었다고 평가하였다. 이에 반해 랜스버리는 의대생들이 자신들 스스로와 그들의 선생들을 "새로운 사제"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여성과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미신과 감성주의를 대변한다고 여겼다고 쓰고 있다.

 

* 갈색개 사건의 종결

동상의 경호 비용이 연간 700 파운드에 달하게 되자 영국 하원은 경찰 당국에 비용의 타당성을 질의하였다. 런던 경찰 당국은 배터시 의회에 이를 전달하였고, 훗날 배터시의 시장이 되는 당시 시의회 의장 존 아처는 《데일리 메일》과의 인터뷰에서 배터시는 이미 22,000 파운드의 비용을 들여 경찰을 지원하고 있다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영국의 개보호협회는 배터시가 연구소들을 허가하고 있는 한 연구소에게 이 비용을 청구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의원들 가운데에는 철제 팬스로 동상을 보호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제안자는 《더 타임즈》에 기고한 글에서 보호가 용이하지 않으면 반생체실험 병원의 부지로 옮기자고 주장했다. 《영국 의학 저널》은 이에 대해 "배터시의 집 잃은 개가 갈 곳이 없다면 해머를 들고 명판에 쓰인 그대로 죽임을 당하도록 해야 할 것"이며 "그들이 너무 감상적이라면 의심할 바 없이 마취한 상태에서 이를 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배터시 의회는 계속되는 논쟁에 지쳤다. 1909년 11월 선거 이후 새롭게 구성된 의회는 동상의 철거를 결정하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500여 명의 동상 지킴이가 출범하였고, 2만 명 이상의 시민이 시의회에 탄원서를 내었으며, 1910년 2월에는 런던 중심가에서 1,500명이 모여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 시위에는 린드 아프 하게비, 샤롯 데스파르, 그리고 자유주의자 조지 그린우드 등이 하이드 파크에서 연설하였으며 이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개 가면을 쓰고 집회에 참석하였다.

 

열열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상은 1910년 3월 10일 철거되었다. 시 의회는 120명의 경찰관의 호위 속에 4명의 노동자를 보내 동상을 철거하게 하였다. 3천 명의 생체실험 반대론자들이 트라팔가 광장에 모여 동상의 복구를 주장하였지만, 시의회는 이를 거부하고 사건을 종결하였다. 동상은 처음엔 자치구 감정인의 집 자전거 창고에 숨겨져 있었다고 한다. 1956년 그의 딸이 《영국 의학 저널》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어느날 갑자기 동상이 공장으로 옮겨졌다고 한다.그 뒤 동상은 대장간에서 녹여졌다. 생체실험 반대론자들은 고등법원에 동상 반환을 청구하였지만 1911년 1월 기각되었다.

 

* 새로 세운 동상

1910년 3월 《뉴욕 타임즈》는 "동상이 다시 공공장소에 세워질 가능성은 없을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1985년 12월 12일 조각가 니콜라스 힉스가 제작한 새 갈색 개 동상이 배터시 공원의 펌프하우스 뒤에 세워졌다. 가림막을 걷어 내는 일은 배우 제럴딘 제임스가 하였다. 1.5 m 크기의 새 동상은 조각가 자신이 기르던 테리어를 모델로 삼았고, 기단은 포틀랜드 석회암으로 만들었다.

1992년 베터시 공원은 역사적인 이전의 동상을 기념하여 새 동상을 공원의 공식적 일부로 인정하였고, 이와 더불어 생체실험 반대 캠페인 역시 새로운 활기를 띄게 되었다. 1994년 공원은 동상의 위치를 보다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공원 내의 우드랜드 워크로 이전하였다.

2003년 힐다 킨은 자신이 보았던 옛 동상은 지금의 것과 같이 자비를 구걸하는 비굴함을 보이지 않았다고 비판하였다.

 

b) 비거니즘의 발전

비거니즘(veganism)은 다양한 이유로 동물 착취에 반대하는 철학으로 비건(vegan) 식습관에 그치지 않고 가죽제품, 양모, 오리털, 동물 화학 실험을 하는 제품 등 동물성 제품 사용 등도 피하는, 보다 적극적인 개념을 뜻할 수도 있다. 동물을 착취해서 만든 모든 것들의 소비를 지양하는 사람을 비건(vegan)이라고도 한다.

 

c) 『동물 해방(Animal Liberation)』의 출간

『동물 해방(Animal Liberation)』은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철학자 피터 싱어(Peter Singer)의 대표적인 저서로, 1975년에 발표했다. 동물 해방 운동가 사이에서는 이 책이 그 사상의 기반이 되는 철학적 선언으로 널리 읽힌다. 싱어 자신은 인간과 인간 여타의 다른 동물에게 있어서 권리라는 이론적인 틀을 사용하길 거부한다. 그는 동물 역시 고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동물들의 이익관심(interests) 역시 고려되어야 하며, 이 때 권리라는 개념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는 책에서 “종 차별(speciesism)”이란 용어를 도입하고 대중화하는데, 리처드 라이더(Richard D. Ryder)가 처음 만들어낸 이 말은 동물을 착취하듯 대우하는 인간 우월 주의를 나타낸다.

 

평소 윤리적인 대우를 인간 외의 여타의 다른 생물체에게도 동등하게 적용하길 주장해왔던 싱어 교수의 사상이 잘 드러나 있는 책이다. 초판 발행 이후에 몇 번의 재판이 발행되었다. 동물권보호 단체인 PETA(People for the Ethical Treatment of Animals)는 이 책이 출간된 이래로 큰 후원과 지지를 해왔다. 이 책의 주요 논점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만이 선(善)이나 도덕적 행동의 측정수단이라는 공리주의의 확대 적용이다. 피터는 이를 다른 동물에게도 적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비록 싱어는 이익 관심에 따른 공리주의와는 따로 떨어진 도덕적 이상으로서의 권리를 거부하지만, 공리주의 원칙에서, 개중 특히 최소 고통의 원칙에서 이끌어낸 개념으로서의 권리는 받아들인다. 또 싱어는 책에서 "명백히 동물과 인간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고, 이 차이점이 각자의 가지는 권리에도 틀림없이 차이를 낳는다"고 써 과연 동물권이 인권과 똑같진 않음을 인정한다. 한편 토마스 테일러는 여권신장론자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를 비판하면서 만약 여성도 권리가 있다는 그녀의 주장이 옳다면 "짐승"도 권리가 있어야겠느냐고 말한 바 있는데, 싱어는 바로 그 말을 언급하면서 이 책의 첫단추를 꿴다. 테일러야 귀류법으로 그녀의 관점을 반박한 것이겠지만, 싱어는 그 말을 중요한 논리적 암시로 보았다.

 

『동물 해방』에서 싱어는 그가 종 차별(특정 종에 소속됨을 근거로 한 차별과 착취)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항해 논리를 펼친다. 그는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존재의 이익관심은 동등한 고려 가치가 있으며, 이들을 종에 근거하여 하찮은 미물로 취급하는 것은 인간을 피부색에 따라 차별하는 것보다 더 낫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지성이 아니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 때문에 동물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1970년 채식주의자인 동료 학우 리처드 케션(Richard Keshen)과 점심을 먹으며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철학자 피터 싱어는 동물을 먹음으로써 다른 종에 대한 억압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케션은 싱어에게 더 고들로비치스(The Godlovitches)를 소개시켜 주었고 1973년 싱어는 《더 뉴욕 리뷰 오브 북스》에서 그들의 책을 평론하였다.

 

싱어는 리뷰에서 "동물 해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싱어의 평론에 힘입어, 《더 뉴욕 리뷰 오브 북스》는 동물 해방에 대한 책을 저술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1975년 동물권 운동의 규범적 텍스트인 『동물 해방』이 출판되었다. 싱어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이어지는 행동이 옳다는 공리주의의 원칙에 기반하여 그의 주장을 폈다. 인간의 기본적인 이익, 예를 들면 고통받지 않는 것에 대한 이익의 파괴가 비인간의 기본적 이익의 파괴와 다르다고 가정할 근거가 없다는 입장을 주장하였다.

 

4) 동물해방전선의 형성

1971년 법학도인 로니 리는 헌트 새버터스 어소시에이션(Hunt Saboteurs Association)의 지부를 결성하고, 19세기 RSPCA 학생 그룹의 명칭을 따서 밴드 오브 머시(Band of Mercy)라고 명명하였다. 이 단체는 타이어에 구멍을 내거나 창을 깨뜨려 사냥꾼들의 자동차를 공격하였고, 이러한 행위를 "행동하는 연민(active compassion)"이라고 불렀다. 1973년 "인간의 손에서 저질러지는 모든 형태의 잔혹함과 학대로부터의 동물 해방에 투신하는 비폭력적 게릴라 단체"로서의 책임을 주장하며, 회흐스트 제약(Hoechst Pharmaceuticals) 연구소에 불을 질러 첫 번째 방화를 일으켰다. 활동가들은 1974년에 징역 3년을 선고받았고 12개월 후에 가석방되었다. 1976년 리는 남아 있는 밴드 오브 머시 활동가와 새로운 참가자를 모아 리더가 없는 저항 운동을 시작하고, 그들의 활동을 동물 해방 전선(Animal Liberation Front, ALF)으로 명명하였다. ALF 활동가들은 그들 스스로를 동물들을 동장이나 연구소에서 동정적인 수의사나 안전한 피난처로 피신시키는 현대의 지하 철도로 생각한다. 일부 활동가들은 주류에서 공감을 상실한 위협, 방화 등에 참여하기도 한다.

 

5) 동물권행동 단체 카라

동물이 인간의 일방적인 착취와 이용에서 벗어나 존엄한 생명으로서 그들 본연의 삶을 영위하고, 모든 생명이 균형과 조화 속에 공존하는 세상을 지향하는 비전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2002년 4월 아름품 창립, WITHANIMAL.NET 오픈으로 시작하여 지금의 카라로 활동하고 있다.

 

6) 동물권 동맹

동물 보호주의(動物保護主義)은 비인간 동물의 이익의 추구의 증가를 지지하는 동물권리 보호설 내에 위치한다. 이것은 폐지론과 대조되며, 그 동물이 어떻게 대해지던간에, 인간은 동물을 이용할만한 윤리상의 권리나 법적 권리가 없다는 입장이다. 동물 권리 보호론자들은, '"동물의 고통이 통제된다는 전제하에 음식, 의류, 오락, 그리고 실험에서 사용될 수 있다"는 동물 권리 보호 기준이 윤리적, 정치적으로 불합격이며, 이러한 철학은 조정될 수 있다'고 말하는 폐지론자들과 동의한다.

 

4. 동물권에 대한 반응

2000년 발표된 해럴드 헤르조그(Harold Herzog)와 로나 도르(Lorna Dorr)의 논문에서는 전체를 대표하기에는 작은 그룹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동물권에 대한 반응을 조사하였다. 그러나 성별, 나이, 직업, 종교, 교육 정도 등에 따라 매우 다양한 개인차를 보여 일반화 할 수는 없었다. 다만, 애완 동물을 기른 경험의 유무는 동물권 옹호 여부와 유의미한 상관 관계를 보였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동물권에 대해 보다 정서적인 친근감을 보인다. 1996년 린다 파이퍼(Linda Pifer)의 연구는 이를 여성주의와 연결하면서 여성의 "양육 또는 공감" 능력을 그 원인으로 꼽았다.

 

5. 동물권 논란에 대한 현주소

* 반복되는 구제역에 따른 가축 살처분에 대해 인간의 이기심에 의한 생명 경시라는 주장이 있다.

* 대한민국의 개고기 식용에 대해서는 수십 년째 논란이 계속되고 있으며, 다양한 의견이 존 재한다.

* 2007년 3월 미국의 뉴멕시코주는 닭싸움을 법으로 금지하였다. 이로서 미국 내에서 오랜 논란 거리였던 피를 보는 스포츠가 합법인 주는 루이지애나주만 남게 되었다

* 의약품과 화장품 등의 개발 단계에서 행해지는 동물 실험은 여전히 논쟁 중이지만, 대체 가능한 다른 실험이 도입되는 추세이다.

*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각 후보들은 동물 보호 또는 동물권을 위한 각종 공약 을 제시하였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는 “헌법 개정 시 동물에 대한 생명 가치를 인정하 고 동물복지권을 명시하겠다.”고 밝혔으며,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헌법에 동물권을 명시하 고 동물을 물건으로 취급하는 민법을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6. 동물권에 대한 다양한


입장

동물권주의자인 피터 싱어는 동물권을 부정하고 인권만 인정하는 것은 인간중심주의라 주장하지만 생명의 무차별성을 주장한다면 왜 권리의 대상을 식물이 아닌 동물로 한정하여야 하는가라며 인간의 동물 사용이 필요악이라는 주장이 있다. 또한 음식으로써, 재료로써 써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생태계의 법칙 중 하나인 먹이사슬을 근본부터 부정하는 처사이다. 심지어 이를 부정하려고 인간에게는 지성이 있으므로 동물을 배려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 인간을 다른 동물과는 다르다고 특별취급을 하고 있으며 무엇이 동물을 위한 것인지, 동물이 그것을 정말로 싫어하는지를 동물의 입장에서 정확히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인간의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단일주의 동물권에 대한 반론이며 계층주의 동물권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1) R. G. Frey

Frey는 초기 작품인 Interests and Rights(1980년)에서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Animal Liberation(1975년)』 속 동물이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비인간적인 동물들의 이해관계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쓴 싱어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프레이는 관심사는 욕망에 의존하며, 그에 상응하는 믿음이 없으면 욕망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더 나아가 동물이 믿음의 개념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즉, 그들은 2차적인 믿음: 믿음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아무런 믿음이 없다고 주장했는데, 그는 "예를 들어, '고양이가 문이 잠겨 있다고 믿는다.' 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보는 바와 같이, 그 사람은 잡고 있는 것이다. 그 고양이는 '문이 잠겨 있다.'라는 선언문을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나는 고양이나 인간의 유아들을 포함한 언어가 부족한 다른 생물을 재미있는 선언 문장으로 믿을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다. 그는 동물은 아무런 흥미도 없다고 결론짓는다.


2) Carl Cohen

철학 교수 Carl Cohen은 권리 소유자들이 자신의 이익과 옳은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권리의 소유자들은 그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는 의무 규칙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그러한 규칙을 적용함에 있어서, 그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과 정의로운 것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충돌을 인식해야 한다. 도덕적 판단을 스스로 제한할 수 있는 존재의 공동체 안에서만이 권리의 개념이 올바르게 발동될 수 있다." 코헨은 뇌에 손상을 입은 인간이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도덕적 판단을 누가 권리를 부여받는지 결정하는 뚜렷한 특징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싱어의 주장을 거부한다. 코헨은 도덕적 판단을 위한 테스트는 "인간들에게 하나씩 시행되는 테스트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종족 구성원들의 능력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쓰고 있다.

 

3) Richard Posner

"사실들이 평등을 견인할 것이다." 미국 제7회 순회재판소의 리처드 포스너 판사는 피터 싱어와 2001년 동물권 문제를 논의하였다. 포스너는 자신의 도덕적 직관이 "인간은 자신의 것을 선호한다."고 말해준다고 주장한다. 개가 인간의 유아를 위협한다면, 개가 그 유아를 멈추게 하기 위해 더 많은 고통을 주더라도, 우리는 그 유아를 선호한다. 개를 살려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 될 것이다.


4) Roger Scruton

영국의 철학자 Roger Scruton은 권리는 의무를 내포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모든 법적 특권, 즉 "당신의 권리가 내 의무일 수도 있다."는 특권을 갖지 않은 사람에게 부담을 지우고 있다. 따라서 스크루톤은 동물권리운동의 출현을 "자유주의적 세계관 내에서 가장 이상한 문화적 변화"로 간주하는데, 권리와 책임에 대한 생각은 인간의 조건에 특유하며, 그것을 우리 종족 이상으로 확산시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7. 우리가 읽은 『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에서 셸리 케이컨의 주장

이 책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읽힌다. 하나는 사람과 동물이 함께 잘사는 ‘윤리적 공존’을 모색하는 작업이며, 다른 하나는 지구상에 가장 월등한 존재로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삶의 참된 가치’를 되새기는 기회다. 오늘날 동물윤리 분야의 지배적 견해에 강력한 반론을 제기하는 동시에, 사람과 동물의 도덕적 차이를 철학적으로 살핌으로써 ‘무엇이 인간을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드는지’를 사유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 케이컨은 동물이 도덕적 지위를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보다 도덕적 지위가 낮다는 동물 윤리에 대한 계층적 접근 방식을 주장한다. 계층적 접근 방식이란 그것의 가장 중요한 경쟁자(사람과 동물이 매우 동일한 도덕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와 대조하고, 계층 구조에 대한 한 가지 핵심 주장 뒤에 숨어 있는 주요 아이디어를 개략적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케이컨의 도덕적 지위에 대한 위계적 이론을 소개하기 전에 그의 도덕적 지위와 도덕적 지위 사이의 구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도덕적 지위를 갖는다는 것은 존재가 그 자체로 도덕적으로 간주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우리는 그 존재에게 도덕적 의무를 지거나 그 자체로 도덕적으로 잘못될 수 있다. 반면에 도덕적 지위는 한 존재가 우리의 도덕적 계산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어떤 요구 사항이 그에 대한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지에 대한 세부 사항과 관련이 있다. 이익 평등 고려의 원칙을 해석하는 전통적인 방식은 동일한 양의 이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일하게 취급되는 것은 케이건이 동물 윤리에서 널리 퍼진 것으로 간주하고 그가 반대하는 견해인 단일주의를 비판한다. 유니테리언주의(기독교의 한 파인 유니테리언의 교리)에 따르면 하나의 도덕적 지위가 있다. 유사한 관심사는 유사하게 취급되어야 하므로 이익의 평등 고려 원칙에 대한 케이건의 위계적 재해석은 우리가 그의 견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데 올바르게 이해하면, 이익 균등 고려의 원칙은 도덕적으로 관련된 특성 측면에서 유사한 이익을 유사하게 대우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관련된 고려 사항은 이익이 누구에게 또는 무엇에 속해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양적으로 유사한 고통이 한편으로는 사람에게 속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이 아닌 비인간 동물에게 속한다면, 그렇다면 이 고통은 전자의 경우에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실제 세계에서 잠재적으로든 양식적으로든 심리적으로 더 풍부한 능력을 가진 존재는 더 중요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과 일치한다. 가치 이론이나 선의 이론에 관해서는 차등적 도덕적 지위가 중요하다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예를 들어, 분배 원칙은 더 높은 존재의 이익에 더 큰 비중을 둘 것이기에 인간이 아닌 동물은 도덕적 지위가 낮기 때문에 이러한 원칙을 충족하는 데 있어 그들의 이익은 덜 중요하다는 것이다.

 

웰빙의 가치의 경우, 낮은 지위보다는 높은 지위에 있는 존재의 경우 비슷한 양의 웰빙이 더 가치 있을 것이고 이러한 온건한 의무론의 경우, 인간이 아닌 동물과 한계 사례는 자율성(또는 대리인 또는 그러한 권리의 근거가 되는 기타 모든 것)에 관한 것이지만, 이러한 권리는 동물은 자율성이 낮기 때문에 약하다는 것이다. 의무론적 권리를 근거로 삼는 심리적 능력은 덜 풍부하기 때문에 그 권리는 그만큼 강력하지 않는다는 것과 상통한다.

 

이러한 케이컨의 주장은 사람과 동물 사이에 도덕적 격차를 유발하는 능력들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를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사람은 추상적이고 복잡한 사고와 감정을 위한 상당히 발달된 능력을 가졌으므로 자기 성찰에서부터 외부 세계에 대한 이해까지 사람이라는 존재의 거의 모든 측면에서 나타난다.

사람은 보다 발달된 창의력과 상상력을 가졌다.

사람은 먼 과거와 먼 미래까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사람은 장기적이고 복잡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사람은 보다 높은 자기 인식과 자기지각 능력을 가졌다.

사람은 규범적 성찰과 동기부여 능력을 가졌다.

사람은 자주적이고 자기 통제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사람은 특이하고 개별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즉 케이컨은 사람이 동물보다 이런 능력들을 보다 정교한 형태로 갖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그의 사람이 동물보다 도덕적 지위가 더 높다는 주장을 하며 그의 도덕적 계층주의를 설명한다. 동시에 사람이 동물보다 더 높은 도덕적 지위를 가졌다는 것을 근거로 사람은 도덕성과 그에 따르는 의무에 고민하고 실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에 따른 계층적 도덕 의무론을 설명하기도 한다.

 

또한 그는 사람의 복지뿐 아니라 동물들의 복지 문제까지 함께 다룰 수 있는 ‘분배 원칙’의 중요성을 나열한다. 동물의 분배 요구는 이와 관련된 사람의 요구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어떤 동물이 분배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강도는 해당 개체의 ‘도덕적 지위’에 따라 달라지므로 지위가 낮은 동물들은 이에 비례해 약한 요구 권리를 갖는 것으로 설명한다.


여기에 부합하는 가장 적절한 접근 방식은 비합리적이고 불공정한 분배 형태와 관련해 우리가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동물 역시 분배를 요구할 권리를 가졌음을 인정하면서, 기존 분배 형태의 비합리적이고 불공정한 입장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요도덕적 지위에 적절한 형태의 계층적 관점을 도입함으로써 분배 원칙의 중요성을 깨닫고, 동물도 이런 이론의 범주에 포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동시에, 설득력을 상실한 단일주의를 배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여하튼 그의 동물의 복지에 대한 주장은

“동물은 비록 사람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가 지금껏 가져온 생각보다는 훨씬 더 많은 헤아림을 받아야 한다. 여러분이 나와 함께 꽤 긴 논의를 진행해 오는 동안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들을 점검해 볼 수 있었다면 나는 만족한다. 내가 제안한 여러 견해에 여러분이 동의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온전한 ‘사람’인 여러분이 사람의 삶을 살면서 경험했거나 경험하게 될 다양한 윤리적 문제들을 동물의 삶에 투영하는 것이 유의미한 작업임을 깨닫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사람으로서의 가치’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든 것을 가졌다. 이제 동물의 몫을 생각할 때다. 무엇을 줄 수 있느냐가 사람의 가치를 결정한다.


동물을 학대해온 인류의 기나긴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그 같은 행위가 불명예스럽고 치욕스럽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인식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 그 날은 오지 않았다. 우리가 오게 하지 않으면 오지 않을 날이다. ”(480쪽)

 

으로 결론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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