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초짜 철학도의 분투기
황룡 튜터링을 하면서
자료를 조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이유는
좀 더 심도 있는
공부를 더불어 진행하고 싶었던 욕심이었다.
선진 유학부터
청대의 실학까지의 흐름을
더 나아가
중국 사상계의 흐름을
일갈할 수 있었던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지만
함께 하는 후배들에겐
다소 부담도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언젠가 이 자료들을
활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기를 바라
<중국 유학의 변천>
1. 선진시대
2. 대일통 정권
1) 진왕조와 법가의 사상문화 선택(진왕조)
2) 진시황과 분서갱유
3. 진의 멸망과 한(漢)의 대두
1) 시대 상황
2). 한 초의 도가 사상의 유행
3) 한 초의 황노의 사상의 내용
4) 한 초의 유교의 상황
5) 유교의 승리와 경학(經學)의 성립
a) 한 초의 유교의 상황
b) 유교 일존의 확립과 지식인에의 침투 : 태학(太學)
c) 오경의 성립
d) 경학의 성립
e) 금문학과 고문학
6) 한 대 사상계의 흐름
a) 회남자(淮南子): 한 초의 도가 사상을 대표한다.
b) 사기의 백이전(伯夷傳) - 도덕과 행복의 모순 문제
c) 王充(약 27?~100)의 논형(論衡) - 인생은 우연한 운명에 의해서 결정된다.
d) 왕충의 운명론, 우연론, 무신론
e) 왕충의 인생관이 초래한 것
f) 동중서 “하나의 필연적 인과관계가 세계를 지배한다.”
4. 육조 시대의 사상
1) 육조 문화의 대세
2) 사대부 지식인의 귀족화
5. 삼국위(三國魏)의 시대와 노장사상의 전성
1) 청담(淸談)의 유행과 죽림칠현(竹林七賢)
2) 하안(何晏)과 왕필(王弼)
3) 魏의 正始의 風
6. 서진(西晋)의 천하통일과 향략주의의 풍조
1) 서진(西晋)의 왕조와 元康의 風
2) 莊子의 곽상주(郭象注)의 출현
7. 동진왕조(東晋王朝)와 불교의 수용
1) 서진의 멸망과 5호 16국의 난
2) 3백 년간 동결 상태에 있었던 불교
3) 중화 의식의 후퇴와 불교의 갑작스런 융성
4) 불교의 중국풍의 이해
a) 노장사상을 통해서 본 불교 – 격의불교(格義佛敎)
b) 경이로운 생각으로 받아들인 윤회설(輪迴說)
c) 윤회설에서 구원을 찾게 된 중국인
d) 선종(禪宗)의 선구가 – 도생(道生)의 돈오설(頓悟說)
5) 도교(道敎)의 성립
a) 농민 간에 생겨난 오두미교(五斗米敎)
b) 오두미교와 신선설(神仙設)의 결합 - 葛洪의 『抱朴子』
c) 도교의 성립과 노자의 교조화(敎祖化)
8. 수당의 사상
1) 당대 문화의 성격- 육조문화의 연장 발전
2) 당의 전반기 - 安祿山의 난까지
a) 유교 정신의 쇠퇴
b) 수당왕조의 불교 보호 내지 이용
c) 宗派 불교의 발생과 성행
d) 중국불교를 대표하는 정토종(淨土宗)과 선종(禪宗)
e) 정토교의 전개 – 선도에 의한 대성
f) 선종(禪宗)의 성립 – 육조혜능(六祖慧能)에 이르기까지
9. 당의 후반기
1) 당대 문화의 성격에 나타난 변화
2) 유학 부흥의 맹아 – 한토지(韓退之)와 이고(李翶)
3) 남종선(南宗禪)에 의한 불교계의 지배
4) 정토 신앙의 보급과 타종(他宗)과의 융화
10. 송대(宋代)의 사상
1) 송대의 사회와 신유학의 탄생
a) 오대의 전란과 문벌 귀족의 몰락
b) 송학이 발생한 사회적 배경
c) 불교에서 유교에로
2) 북송에서 발생한 유학
a) 주염계(周濂溪) - 무극(無極)으로서의 태극(太極), 주정(主靜)
b) 정명도(程明道) - 天理, 萬物 - 體의 仁
c) 정이천(程伊川) - 性卽理, 理氣二元論
d) 장횡거(張橫渠) 氣一元論, 민포물여(民胞(태보 포)物與)
3) 南宋의 朱子學
a) 송학의 대성자 朱子
b) 理氣 이원론
c) 우주생성론
d) 理氣에 의한 인간관, 윤리설 - 格物窮理
e) 주자학의 사명과 운명
4) 주자학의 대립자 육상산(陸象山)
a) 육상산의 心學- 禪學에의 접근
11. 元, 明의 사상
1) 원대의 사상계
2) 원대의 사상가 – 주자학의 로고스에서 양명학의 파토스에로
3) 왕양명(王陽明)
a) 용장(龍場)의 一悟 – 모든 理는 내 心中에 있다.
b) 일원론의 관철 - 氣即理, 心卽理. 無內外, 知行合一
c) 靜座에서 사상마련(事上磨鍊)에로 – 선종에서의 이탈
d) 치양지(致良知) - 자연주의에의 지향
e) 만가성인(滿街聖人) – 양명학의 민중화
4) 양명학의 좌파
a) 양명학의 좌파와 우파
b) 왕룡계(王龍溪 1498~1583)
c) 泰州學派 - 양명학의 대중 동원
d) 태주학파의 지식인 – 자연주의에의 경사
5) 이탁오 – 양명학의 자멸
a) 李卓吾의 생애
b) 童心의 說 - 자연주의에의 철저
c) 노장적 자연주의 – 퇴폐와 자멸에의 길
12. 청조의 사상
1) 청초의 사상계
a) 청조의 문화정책
b) 청 말의 공양학자
2) 청조 중기의 사상계
a) 고증학의 전성이 가져다준 사상의 빈곤
b) 가경(嘉慶)시대에 나타난 고증학자 –대진(戴震)의 『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疏證)』
c) 청초의 건융년간에 있어서 고증학의 탄생
3) 청조 말기의 사상계
a) 공양학(公羊學)의 흥기
b) 청 말의 공양학자
참고문헌: 1.『중국 철학의 기원과 전개』 丁爲祥 지음, 예문서원
2. 『철학VS철학』 강신주 지음, 오월의 봄
3. 『중국 사상사』 森三樹三郞 지음, 온누리
1. 선진시대
선진 유학은 진나라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 원시 유학을 말한다. 공자와 맹자, 순자의 사상이 중심이 된다. 요순을 중심에 둔 이른바 선왕들의 정치사상과 그들의 사상을 계승한 공자의 가르침이 주요 내용이다. 인간의 도덕에 기초하여 덕화를 실현하는 정치적 사상이다.
공자는 『시경』과 『서경』을 중시했고, 주대의 전통문화를 따르는 종주의식(從周意識)을 드러내며 사회의 방향을 제시했다. 또 인(仁)을 핵심 가치로 강조하여 자신을 수양하여 남도 편안하게 해준다는 '수기안인(修己安人)'의 도덕적 실천을 강조하였다. 『사기』에 의하면 공자는 만년에 『주역』연구에 심취하여 「십익」을 저술하여 후대에 남기려 하였고, 후대 『십익』은 유학의 성리학적 사상체계를 구축하는 소의경전이 되었다.
맹자는 공자를 유사이래 제1인자로 찬양하면서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였다. 특히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성선론에 기초하여 사상체계를 구축하였다. 또한 『춘추』를 수용하면서 왕도정치라는 도덕 정치론을 주장하였다. 왕도정치적 도덕 명분을 잃은 군주는 일개 사나운 사내이기에 갈아치워도 된다는 역성 혁명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순자는 선진시기 백가쟁명의 다양한 학설이 갖는 한계과 장점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후 그것들을 유가적으로 재해석하면서 공자의 사상을 예론 중심으로 체계화했다.
공맹과 순자 중심의 선진유학의 정신은 시대마다 기본적 자료의 지위를 지니면서도 시의적으로 재해석되어 왔다. 후대에도 선진유학의 공맹중심사상을 본맥으로 여겼기 때문에 『논어』와 『맹자』가 가장 중요한 경전이 되었고 인물로도 공맹의 정신을 계승했다고 인정되는 학통이 정통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221년 진(秦)나라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이제 중국은 마침내 춘추 이래 수백 년 동안 제후들의 각자 정치를 하는 데서 전국 시대 상호 패권 경쟁 전란의 상황을 끝내고 새로운 통일의 시대로 진입했다.
그러나 이 통일은 은주(殷周) 시대 무왕(武王)의 혁명과 주공(周公)이 반란을 평정한 후에 이룬 통일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비록 왕조가 바뀐 성질의 사회혁명이었지만 문왕, 무왕, 주공의 정치 지도자들이 새로 시작한 “덕치(德治)와 민본(民本)”의 전통은 그 이후의 중국 역사에 매우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이른바 예악문명을 핵심으로 하는 중화문화도 이로부터 확립되었으며, 춘추시대에 이르러 공자는 곧 주공이 예악을 제정한 것을 앙모(仰慕)하고 유추하여 조술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유학의 창시자가 되었으며 이로부터 비로소 도, 묵, 법 세 학파와 제자백가의 학문이 잇따라 일어났다. 공자가 새로 시작한 유학에서 제자학(諸子學)의 굴기에 이르기까지 제후들의 패권경쟁으로 일어난 사회 전란과 이 전란을 멈출 수 있는 정책을 세울 수 있는가를 둘러싸고 이로부터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사상문화의 주장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서주의 정치 지도자들과 그 정치적 창조성이 확실히 일정 부분 그 이후의 학술사상과 문화사조를 끌어내고 또한 깊은 영향을 끼쳤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전국시대가 전개되면서 춘추시대의 정치가 끌어낸 문화적 현상으로부터 근본적 역전이 발생한다. 전국시대 정치 지도자들은 학술문화를 선도하지 않았지만 각 제후왕권은 도리어 학술문화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즉 진시황이 한비의 사상을 찬탄한 데서 진의 2세에 이르기까지 그 저작은 편리한 대로 인용되었는데 이는 새로운 정권이 도리어 제자학의 학술과 사상문화에 의해 인도되어 통일을 완성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춘추시대와 전국 시대 사이에 이처럼 크고 심지어는 상반되는 차이가 있으므로 서주의 정치 지도자들은 근본적으로 이른바 사상문화라는 문제를 생각할 수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정치는 곧 사상이며 문화였고 어떻게 정치문제를 해결할 것인가도 사상문화의 문제였지만 당시 그들의 사상적 시야는 이른바 사상문화의 문제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춘추, 전국의 “제후들의 무력 정벌”을 거쳐 통일을 완성한 정치 지도자들에 대하여 말하면 어떻게 사상문화의 문제를 대하는가도 마치 어떻게 “모사(謨士)”를 대할 것인가와 같이 중시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비록 두 차례의 통일이 모두 혁명 혹은 전쟁의 방식을 통하여 실현되었지만 이 두 차례의 통일 사이에 형성된 학술과 사상문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떻게 학술문화를 선택하고 어떻게 학술문화의 지위를 확정할 것인가, 곧 진(秦), 한(漢) 대통칠의 통치자들이 직면하지 않을 수 없는 중대한 문제가 되었다.
2. 대일통 정권의 사상문화 선택(진왕조)
1) 진왕조와 법가
진왕조는 부국강변의 변법을 통하여 강성해졌으며 경전(耕戰) 즉 농경과 전쟁을 겸하는 국가정책을 통하여 제후의 패권 전쟁에 참여하였고 마지막으로 겸병전쟁으로 통일을 완성하였다. 따라서 진왕조의 통치자들에 대해 말하면 강산(江山)은 완전히 자신의 무력에 의지한 “쟁탈(打칠타)”로 만들어졌으나 천하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진왕조는 시종 법가를 그 지도 사상으로 삼았다. 이처럼 통일을 완성한 후에도 진왕조는 반드시 계속 법가의 사상으로 정권을 구성하였다. 예를 들면 철저하게 서주(西周)이래의 분봉제(分封制)를 폐지하고 군현제(郡縣制)를 확립하여 수직적인 행정지도 관계를 확립하였다. 즉 효율성이 높은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고 동시에 반드시 “수레바퀴 폭의 통일”. “문자의 통일”, 이른바 “직선도로의 수축(修築) 등 도량형(度量衡)을 통일하였다. 종합하면 진왕조가 법가의 경전(耕戰) 방식을 통하여 통일을 완성했다면 당연히 계속해서 법가사상을 계승하여 그 정치권력의 절대적 농단(壟斷)과 절대화의 조성을 실현해야 하며 이에 따라서 국가 정권의 구조를 완성해야 했다. 진왕조의 정권 건립 조치에 관하여 당시 통치 집단을 포함한 그 시대 사람들은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2) 진시황과 분서갱유
언급한 것처럼 유가(儒家)는 기본적으로 주나라를 중심으로 한 과거의 질서 체계를 옹호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예(禮)로써 존중받으며 통치자에게 충고를 보태는 봉건제적 신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반면 진시황이 선택한 통치 이념인 법가(法家)는 신료로 임명받는 인물은 철저히 법에 의거한 실무 수행만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법을 거스르는 신료의 자율성과 세습이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혈연 관계 혹은 혈연 관계로 의제되는 인물을 각 지방의 제후로 임명하여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자는 종법제도적인 질서가 왕과 제후 사이의 혈연의 거리가 멀어진 서주 시대 후반부터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고 하극상이 벌어진 것을 목격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이를 대체할 새로운 통치 구조가 바로 군현제로, 세습되지 않고 철저히 군주에 의해 임명되는 행정 관료인 태수와 현령을 제후 대신 배치하여 예를 통한 막연한 통제 대신 법을 통한 철저한 통제로 이들을 제어하자는 이론이었다.
진(秦)나라는 4세기 상앙(진(秦)나라의 재상이자 법가 정치가 기원전 390년? ~ 기원전 338년)의 변법 이래 법가의 군현제 질서에 완전히 익숙해진 국가였으나 10여년 만에 급속한 통일을 이루면서 영토가 몇 배나 커졌고 당연히 각지의 기득권 세력이 표면상으로는 사라졌으나 언제 들고 일어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전국을 36군으로 편성하여 군현제의 틀을 씌워는 놓았으나, 이전까지의 중국은 애초에 각지의 문화 자체가 철저히 달랐고 정치적인 의견도 완전히 달랐다
이로 인한 분열을 막기 위해 진시황은 문자 통일, 도량형의 통일, 도로 규격의 통일 등을 추진하였다. 흔히 통일 중국의 첫 다리를 놓았다고 평가되는 이러한 업적들과 같은 맥락에서 사상적 통일을 꾀하는 과정에서 분서갱유가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통일 중국의 기초를 닦은 진시황과 사상을 탄압한 폭군 진시황의 두 얼굴을 동시에 만나게 된다.
진시황 시대 분서갱유, 즉 전국적인 사상 탄압의 단초가 되었다고 평가받는 사건은 기원전 213년 함양 연회에서 일어났다. 이때 전국에서 부로(父老) 70여 명을 초대해 연회를 벌이다가 참가자 중 한 명인 주청신이 황제의 공덕과 군현제의 실행을 찬양하자, 다른 참가자인 순우월이 옛 것을 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때 당시 자리에 있던 이사(기원전 ? ~ 기원전 208년 법가 사상가)가 옛 사상과 제도에 매달려 있다면 통치에 해로울 것, 의약 · 점술 · 농업 등의 책을 제외한 제자백가의 책들과
시경, 서경, 진을 제외한 국가들의 역사서를 불태울 것을 주장하여 이를 실행에 옮기게 된다. 이것이 분서(焚書) 사건이다.
1년 뒤 후생(侯生)과 노생(虜生) 등이 실패로 끝난 진시황의 불로초 탐색을 놓고 "불로초 따위에 정신이 팔리다니, 이건 책 다 불태워서 고전 공부를 안 했기 때문임."이라는 식으로 진시황을 비난했다.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전국의 불온 사상가 460여 명이 함양에 매장되었고, 이것이 후대에 갱유(坑儒)로 불리게 된다. 갱유에 대해서는 사실이 분명하지 않고 이설(異說)이 많아 후세 유학자가 꾸며낸 것, 그게 아니어도 실상이 상당히 과장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3. 진의 멸망과 한(漢)의 대두
1) 시대 상황
그러나 이러한 법가의 왕조도 겨우 15년 만에 붕괴해 버리는 운명이 되었다. 그것은 법가정책의 엄혹함에 민중이 견디어 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나라가 곧 멸망하고 각지에 군웅이 일어나게 된다. 이 진나라의 비극은 후세에 커다란 교훈을 남겼다. 법가가 전란과 분열의 시대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위대한 효과를 발휘하였지만 그 반면에 커다란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오로지 국가 권력의 강화를 겨냥했을 뿐 민중의 희생을 강요했다는 점이다. 그 무리한 요구가 민중의 불만을 일으켜 대폭발을 일으켰다. 그것은 결국 지배자로서도 불이익이었다. 지배자는 현실의 정치를 운영하기 위해서 법치 주의를 필요로 하였지만 이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법가의 단점을 깨닫게 되었다.
진나라의 뒤를 이은 한 왕조는 어느 정도 자유방임의 정책을 취하여 민심의 안정을 꾀하였다. 법가적 요소를 받아들인 도가 사상, 소위 황노사상이 유행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러나 그것도 80년 정도로 그치고 무제가 즉위해서 유교를 국가의 지도 원리로 삼게 되었고 유교 통일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 대 이후 2 천년 간에 걸친 통일왕조의 시대는 다소의 성함과 쇠함이 있었다고 하지만 유교의 지배가 계속되었다. 따라서 전국시대와 같은 제자백가의 성향이 다시 그 형태를 나타낼 수 없었다.
제자백가 시대는 중국 사상사에서 아주 특이한 것이었다. 진한 이후의 사상계에는 전국시대의 그것을 능가하는 깊이와 정밀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유교 일색이었고 제자백가 사상의 다채로운 맛은 볼 수 없었다. 만약 제자백가의 전통이 그대로 유지 발전되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사상사는 현재 보이는 것보다도 변화의 폭이 훨씬 컷을 것이다.
2). 한 초의 도가 사상의 유행
이처럼 한 왕조는 무제 때 유학을 국교의 지위로 올려 놓았는데 그러나 초대의 고조에서 무제 이전까지 약 80여년간은 도가 사상의 전성기였던 것에 주의해 둘 필요가 있다.
한나라 고조는 처음 통일을 하고 나서 진이 멸망하게 된 것은 시황제의 탄압 정책이 민중의 강한 반감을 산 때문이라고 보고 될 수 있는대로 자유방임의 정책을 취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처음 관중의 땅에 입성할 때 유명한 법삼장(法三章)을 반포하였던 것도 그 정책의 하나였다. 법삼장이란 함은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 사람을 상해한 자 및 도덕질 한 자는 각각 그에 상당한 형에 처한다는 것으로 그 이외에 법률은 폐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노자의 ”大國을 다스리는 것은 조그만 생선을 끓이는 것과 같다.“ 라는 말처럼 일일이 간섭하지 않는 쪽이 좋다는 생각에 따른 것이다.
3) 한 초의 황노의 사상의 내용
‘황노’라 함은 황제(皇帝)와 노자(老子)를 가리킨다. 황제는 전설상의 고제왕(古帝王)의 이름인데 고대존중의 생각이 강한 중국에서는 그 학설이나 기술에 권위를 부여받기 위하여 자기 학설의 기원을 가능한 한 오래된 시대의 위인에게 결부시키는 경향이 강하였다. 유교도 그 기원을 공자나 주공보다도 앞선 요순 등의 고제왕에게 두는데 도가에서도 여기에 대항하기 위해 노자보다도 오래된 황제를 끌어낸다. 한 대 이전에는 황노라는 용어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아마도 한 대에 들어와서부터 만들어진 말이라고 추측된다.
그러면 황노 사상의 내용은 무엇일까? 왕실의 일족인 유덕일(柳德一)은 황노의 술(術)을 좋아해 ”항상 노자의 知足의 계(計)를 가졌다.“라고 일컬어지고 또 급암(汲黯)이 지방관이 되어 ”黃老의 말을 좋아해, 民을 다스림에 청정을 지(旨)로 하고 대국을 셈할 뿐으로 小事에는 관계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구경(九卿)의 지위에 올라서고 나서도 무위를 섬겨 법률 조항에 구애되지 않고 사법관인 장탕(張湯)과 충돌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사례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당시에 노자풍의 무위의 정치를 이상으로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 『사기』의 저자 사마천의 부친인 사마담은 『육가요지(六家要旨)』를 저술했는데 여기서 그는 음양가, 유가, 묵가, 법가, 명가가 각각 일장일단이 있지만 도가는 이러한 5가의 장점을 겸비하였고 더욱 간략하게 중요함을 터득하여 무위로써 하지 않음이 없는 만능의 실용성을 가진 가장 우수한 것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이 사마담의 도가사상에 대한 평가는 무제 이전의 한초에 살았던 일반지식인의 사상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이 황노사상에는 두태후(竇太后)라는 극히 유력한 지지자가 있었다. 두태후는 무제의 조부에 해당하는 문제의 황후로 그 아들 경제의 대에서 손자인 무제대의 초반에 이르기까지 황태후로서 보이지 않는 큰 세력이엇다. 이 두태후는 열렬한 황노의 팬이었으므로 그 아들 경제도 『노자』를 읽고 그 도를 존중하였다. 어느 날 박사로 있던 원고생(轅固生)이 노자의 책을 “재야의 서민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자 두태후가 노하여 노역형(勞役刑)에 처하게 하고자 하였다. 경제가 간하여서 겨우 구했다고 한다. 무제가 즉위 후 유교를 중시하는 풍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두태후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것을 이룰 수 없었고 기원전 135년에 태후가 죽고 나서 겨우 실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한나라 초기 80년 간에 도가 사상이 전성을 누린 것은 그 당시에 성립한 유교 경전이 노장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던 사실에도 나타나 있다. 더 나아가 후세의 송학, 주자학이 무의식 중에 노장사상의 깊은 영향을 받는 원인이 되고 있다.
4) 유교의 승리와 경학(經學)의 성립
a) 한 초의 유교의 상황
그러면 한 초의 유교는 어떤 상태였을까? 무제에 의해서 유학이 국교적인 성격을 부여받기까지의 경과는 아래와 같다.
당시의 유자들은 공자의 출신지이기도 한 지금의 산동성 지방에 많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생활을 지탱하게 하였던 것은 주로 관혼 상제업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비록 그늘의 생활이었지만 한 고조가 천하를 통일한 때에도 외곬으로 고치지 않았다.
한 고조는 시골 지방의 촌장 출신이어서 호방한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유자와 같이 형식을 꾸미고 예의나 도덕을 시끄럽게 떠드는 자를 매우 싫어했다. 어쩌다가 유자가 알현을 요청하여 방문하면 고조는 그 특유의 유관(儒冠)을 뉘에서 앞에 두고 그 가운데서 소변을 누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호걸이었던 고조에게도 단 한가지의 고뇌가 있었다. 즉 주변의 대신이나 장군이 무뢰한이고 야인이어서 예의가 없었기 때문에 과거의 동료였던 고조를 존경하지 않고 연회석상에서 술을 마시면 예전 버릇이 나와서 칼을 뽑아 기둥을 치는 난폭함을 보였다. 이것에는 그 유명한 고조도 몹시 애를 먹었다. 이때 유자 중에서 숙손통(叔孫通)이라 하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예사 유자와는 달리 처세술이 아주 뛰어났다. 그 때문에 유자들 중에는 “자네는 곡학아세(曲學阿世) 즉 학문을 왜곡하여 세상에 아부하는 남자일세”라고 매도한 이가 있을 정도였다. 숙손통은 고조가 묵묵히 있음을 보고 그가 유자를 싫어함을 알면서도 나아가 고조에게 그 문제점을 아뢰었다. “분명히 유자라 하는 것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에는 완전히 도움이 되지 않지만 일단 완성한 것을 지키는데에는 적합합니다. 한번 저에게 조정 의식의 모범을 행하게 해 주십시오” 그 말이 고조의 마음을 움직여 백관에게 명하여 숙손통의 제자들에 의한 조하의 의식을 견학시킨 뒤 몇 번이고 연습을 반복케하였다. 드디어 장락궁(長樂宮)에서 백관조하의 의식이 행하여졌을 때 그 장엄함에 고조는 감격했다.
이것을 계기로 고조는 유교의 이용 가치를 인정하고 비로소 국가권력의 일각을 이루는 단서로 삼았다. 그러나 고조의 단계에서는 유교는 예라고 하는 형식적인 면에서만 채용되었을 뿐 그 사상의 가치가 인정되지는 못하였다. 사상계에서는 여전히 도가사상이 압도적인 우세를 차지했다.
b) 유교 일존의 확립과 지식인에의 침투 : 태학(太學)
이처럼 한 초의 약 80년간은 도가의 자유방임의 사상이 전성을 이루지만 한 왕조의 기초가 아직 충분히 굳혀지지 않았다는 것과 진나라의 탄압 정치에 대한 반동이 있었다는 배경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고조의 증손 무제가 즉위하자 왕조의 기초도 훨씬 굳혀지고 흉노 정벌을 필두로 하는 적극 정책의 방향으로 전환하는 분위기가 무르익게 되었다. 이 단계가 되자 이미 자유방임의 도가 사상은 부적격한 것으로 되고 여기에 대신할 강력한 통일정치의 원리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법가의 형벌 주의를 노골적으로 명확히 드러내면 불리하다는 것은 이미 진나라의 멸망에 의해 실험되었고 여기에서 근본으로는 법가의 입장을 채택하면서 표면적으로는 부드럽게 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현명한 원리임에 틀림없었다. 곧 도덕에 의한 정치를 주장하는 유교를 표면상의 명목으로 삼는 것이 유리한 책략이다. 물론 정치는 힘을 원리로 하는 것으로 도덕이 현실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일단 인정하지만 앞서 숙손통이 말한 것처럼 “일단 완성한 것을 지킨다.”는 것이 유교의 특기이다. 바로 이점이 유교가 한 왕조에 공인된 이유였다. 무제 아래에서 재상이 된 공손홍(公孫弘)이 “법률이나 실무에 능숙한 후에 그것을 유술로 꾸민다.”라고 한 말은 당시의 사정을 잘 말하고 있다. 알맹이의 대부분은 법가 정치 사상으로 하고 가장 자리는 유가 사상으로 꾸몄던 것이다.
그러나 유교가 국교의 지위로 올라간 것이 그처럼 자기 편리한 대로이고 소극적인 이유만으로 된 것은 아니다. 유교의 내용에도 천자 독재 정치를 소극적으로 지지하는 면이 있었다. 맹자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교는 가족주의를 국가 관리의 원리로 하는 소위 가부장제 국가를 이상으로 한다. 그리고 한집에 아버지의 전제가 있는 것처럼 한나라의 아버지인 군주는 국민에 대해서 선의의 전제 정치를 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민중은 미성년자와 같은 것이고 판단력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자의 독재력에 도덕적인 근거를 주고 이것을 합리화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 유교가 2천 년에 걸쳐서 왕조시대의 지도 원리가 된 것은 이같은 이유였다.
그런데 한 무제 즉위 5년인 건원 5년(BC136)에 무제는 오경박사의 관직을 설치했다. 다음 해 황노의 신봉자로 유학의 장해가 되었던 두태후가 죽자 무제는 황노나 법가 등을 비롯한 백가의 학문을 물리치고 유자 수백인을 불러 유자인 공손홍을 제상으로 임명했다. 그다음 해에는 효렴(孝廉)의 선거제도를 설치해 민간에서 유학을 닦고 덕행이 있는 자는 지방관의 천거에 의해서 관리로 임용하여 유학이 말단까지 침투하는 길을 열었다.
이와 동시에 태상(太常)에 오경박사 5명과 제자 50명을 두어 유학을 연구하게 하고 도한 자격시험에 급제한 자를 관리로 임명하였다. 이때는 아직 특정의 명칭이 없었던 것 같은데 곧 태학이라 불리게 되었고 그 규모도 급증해 다음의 소제 때에는 제자 백 명, 원제 때는 천 명, 성제 말에는 3천 명에 이르렀다. 말기에 가까운 환제(147~166) 때에는 태학생의 수는 3만인에 달하였다. 이 태학의 제자는 효렴 선거제도와 함께 유교의 정신을 지식인에게 침투시키는 데에 절대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경학>
경학(經學)은 경학(經學)의 ‘경(經)’은 유교의 경전을 말한다. 또한 경전은 경서(經書)라고도 일컫는다. 처음에는 ‘경’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논어≫나 ≪맹자≫에서도 보통명사를 그대로 고유명사화하여 ≪시(詩)≫ 또는 ≪서(書)≫라고만 불렀으며, 여기에 ‘경’자를 붙여 ≪시경≫이니 ≪서경≫이니 하고 부르지 않았다.
하나 하나의 경서의 호칭은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다. ≪서경≫의 경우만을 예로 들면 고대에는 ≪서≫라고만 하다가, 한나라 때부터 ≪상서(尙書)≫라 하였고, 명나라 이후로 ≪서경(書經)≫이라는 칭호가 확정되었다. 하나 하나의 경서에 ‘경’자를 붙인 것은 아니라도 경서를 ‘경’으로 통칭한 것은 ≪장자(莊子)≫의 천운(天運)편에서부터의 일이다.
유가 가운데서 ‘경’으로 부른 것은 역시 전국시대 말기에 나온 순자(荀子)가 처음으로 생각된다. 전국시대에도 도가, 법가, 묵가의 학문에 대립한 유(儒), 즉 유학만 있었지 경학이라는 명칭은 없었다.
‘경학’이라는 두 글자가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한서(漢書)≫ 유림전(儒林傳)이다. 구양생(歐陽生)으로부터 ≪상서≫, 즉 ≪서경≫의 학(學)을 받고, 또 공안국(孔安國)에게 학문을 배우기도 한 예관(倪寬)이 “무제(武帝)를 처음 만났을 때 경학을 말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경학’이라는 명칭이 문헌에 정착한 것은 전한(前漢) 무제 시대이다. 이는 경서의 개념 자체가 이 시대에 성립된 것과 관련된다.
진화(秦火 : 진시황이 전적을 불사른 사실)로 ≪악경(樂經)≫이 망실되어 전한 초에 오경(五經)의 일컬음이 있다가 후한 이후로는 ‘경’의 영역이 점차 확대되어 왔다. 흔히 진시황(秦始皇) 시대를 경학의 공백 시대로 보기 쉬우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진시황은 사상 최초의 군현제 통일국가의 효과적인 지배를 위하여 유능한 지식 관료의 필요성을 느끼고, ‘박사관(博士官)’이라고 일컫는 학술 교육 담당기관을 중앙에 설치하는 한편, 유학을 포함한 백가(百家)의 문헌을 적극적으로 수집하였다.
이렇게 확보한 막대한 장서가 뒤에 학술 상 대단히 유용하게 되었다. 비록 진나라 때에 학문은 지배층의 독점물이 되었지만, 학문 그 자체가 부정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전한 초에 금문상서(今文尙書) 29편을 전수한 복생(伏生)은 본래 진의 박사였다.
후한 반고(班固)의 ≪백호통 白虎通≫에는 ≪역(易)≫, ≪서≫, ≪시≫, ≪예 禮≫, ≪악(樂)≫을 오경이라 일컫고 있으나, 당(唐)의 서견(徐堅) 등이 찬한 ≪초학기 初學記≫에 수록된 ≪악경≫은 진화 뒤로 없어져 ≪시≫, ≪서≫, ≪역≫, ≪춘추 春秋≫, ≪예기 禮記≫의 5종을 총칭하여 오경이라 하고 있다. 이것이 지금 오경이라 부르는 것과 일치한다.
이 가운데 ≪예≫는 전한 무제 때에는 ≪의례(儀禮)≫를 지칭했던 것이 후세에 와서는 ≪예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되었으며, ≪춘추≫는 ≪공양전(公羊傳)≫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이것도 뒤에 ≪좌씨전(左氏傳)≫으로 바뀌었다.
진의 행정 지배 기구는 전한에 와서도 발전적으로 계승되었다. 건국 후 70년, 충실한 국력을 토대로 등장한 무제는 춘추학자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로 유학중심의 사상통제와 그 추진기관으로서의 ‘오경박사(五經博士)’의 설치를 단행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유교의 국교화(國敎化)이다.
이 때의 오경은 ≪역≫, ≪서≫, ≪시≫의 삼경에 ≪춘추≫(공양전)와 ≪예≫(의례)이다. 이 오경, 즉 5종의 경서를 유학 최고의 기본 문헌으로 인정하고, 그것에 ‘경’으로서의 권위를 부여하여 전문 학자를 박사로 임용하고 여기에 연구생을 배치하였다. 학문의 국가 관리 일환으로 경의 범위가 명확하게 규정됨에 따라 경학은 비로소 충분한 조건을 갖추어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한 무제 이후 선제(宣帝) 때에는 학자들에게 명하여 오경의 이동(異同)을 석거각(石渠閣)에서 강론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당시 사람들 가운데 아직도 육경을 일컫는 경우가 있었는데, 후한의 반고가 ≪백호통≫을 편술하고 나서 오경의 칭호가 보편화 되었다.
육경 또는 오경 이외에 삼경, 사경, 칠경, 구경, 십경, 십일경, 십이경, 십삼경, 십사경, 십칠경, 이십일경 등의 통칭이 있으나,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것으로는 삼경(詩, 書, 易)과 구경과 십삼경이 있다.
구경은 몇 가지 이설이 있는데, 그 중 당나라 육덕명(陸德明)의 ≪경전석문서록 經典釋文序錄≫에 따르면 ≪역≫, ≪서≫, ≪시≫, ≪주례(周禮)≫, ≪의례≫, ≪예기≫, ≪춘추≫, ≪효경 孝經≫, ≪논어≫의 아홉 가지를 의미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역≫, ≪서≫, ≪시≫에 삼례(三禮 : 주례, 의례, 예기)와 춘추삼전(春秋三傳 : 좌씨전, 공양전, 곡량전)을 합하여 구경이라 하는 것이 통설이다.
청나라의 피석서(皮錫瑞)는 ≪경학역사 經學歷史≫에서 “당 때에 삼례와 삼전을 나누고 여기에 ≪역≫, ≪서≫, ≪시≫를 합하여 구경으로 삼고, 송 때에 여기에 ≪논어≫, ≪효경≫, ≪맹자≫, ≪이아(爾雅)≫를 보태어 십삼경을 삼았다.”고 하였거니와 십삼경은 이른바 경의 총칭으로 ≪역경 易經≫, ≪상서, 서경≫, ≪모시(毛詩), 시경≫, ≪춘추좌씨전≫,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주례≫, ≪의례≫, ≪예기≫, ≪효경≫, ≪논어≫, ≪맹자≫, ≪이아≫의 13종을 말한다.
지금 우리가 경서를 읽을 때에는 이 13경에 상세한 주석을 가한 ≪13경주소 十三經注疏≫가 기본적인 참고서가 된다. 경에 대한 1차 주석으로서의 주(注 : 실제로는 傳, 箋, 集, 解, 解詁 등으로도 불렀음.)와 주석의 주석 혹은 2차 주석으로서의 소(疏 : 正義라고도 함.)를 합한 것이 주소(注疏)인데, 한·진(晉) 때는 주가, 당·송 때는 소가 성행하였다.
전한 무제가 유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오경은 서양에 있어서의 성경과 같은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경(經)이란 본래 직물(織物)의 ‘세로지른 실’이다. 뜻이 굴러 ‘사물의 줄거리’ 또는 ‘올바른 도리’를 의미한다.
오경은 곧 경으로 존숭되는 한 모든 진리의 원천이 된다. 우주론(易), 정치학(書, 禮, 詩), 윤리학(禮), 역사철학(春秋), 문학(詩) 등 천하 국가를 어떻게 다스리느냐,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의 문제에 대한 모든 해답은 오경 속에 완전히 구비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오경의 무류성(無謬性)과 자기 완결성은 오경의 작자가 성인이라는 사실로서 보증되고 있다.
후한 정현(鄭玄)의 오경 전반에 걸친 방대한 주석 작업은 이 보증의 작업이며, 그의 주석학은 곧 그의 사상 체계이고 철학 체계라고도 할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한나라 초부터 청나라 말에 이르기까지 2,000년에 걸쳐 유교는 국교의 지위를 누렸다. 그러므로 오경의 한 글자 한 구절은 지식인의 상식이 되었고, 그들의 시문에서 모든 사람의 이해를 전제로 오경이 사용되어 왔다. 이런 이유로 중국학이나 한국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싫든 좋든 오경의 소양 없이는 원문 해독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경학에는 숙명처럼 붙어 다니는 난제가 있다. 그것은 금문학(今文學)과 고문학(古文學)의 다툼이다. 행정 능률의 향상을 위해 진대에 만들어지고 한대에 개량된 간체문자(簡體文字), 즉 예서(隷書)를 금문이라 하고 그 이전의 구체문자(舊體文字)를 고문이라 한다.
경학 성립의 시기(전한 초기)에는 같은 경서에 금문(新體字)과 고문(舊體字)의 두 계통이 병존하고 있었다. 진대 박사관이나 한대 오경박사 계통의 관학이 주로 신체자 계통이고, 분서(焚書)를 면한 민간 계통이 주로 구체자의 계통이었다.
자체의 차이는 먼저 해석의 차이를 낳고 나아가 학파의 대립으로 번져서 결국에는 정치 세력까지 껴안은 항쟁으로 확대되어 경학은 내란 시대에 돌입하게까지 된다.
전한 무제가 인가한 오경박사는 물론 금문파이었는데, 그 뒤로부터 200년 가까이 걸친 고문파의 반격은 정치면에서 신(新)이라는 독자 정권의 수립을 가져올 정도로 금문파와 대등한 지위를 차지하기까지 이른다. 그리고 금문파와 고문파 사이의 화해 조건도 서서히 정비되어가고 있었다.
후한 정현의 오경 전반에 걸친 방대한 주석 작업은 확실히 오경의 무류성과 자기 완결성에 대한 보증 작업이었다. 이처럼 경학 사상 유례 없는 큰 업적을 남긴 정현은, 첫째로는 경은 말할 것도 없고 이 경에 대한 보완적 성격을 가지는 전(傳)까지를 포함한 경학의 모든 근본 문헌에 대하여 뛰어난 문자학에 근거한 종합적 해석을 확립하였다.
둘째로 그는 독특한 ‘예(禮)’의 관념을 축으로 하는 경학 전 영역의 체계화에 힘썼다. 경학이 곧 사상 체계이고 철학 체계이었듯이, 경학에 기대되는 국가에의 공헌도는 여기에서 비약적으로 상승되었다.
이것은 금문파와 고문파의 화해 조건이 서서히 성숙되어온 결과이기도 했지만, 이와 함께 정현의 학문적인 넓은 시야 속에서 금문학, 고문학의 후유증 없는 합작이 이루어진 결과이기도 하였다.
이후에 노장(老莊)과 불교 등의 유행으로 유교의 지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유교는 그때마다 시대의 호상(好尙)을 오경의 해석학 속에 도입하여 경서의 권위를 재무장함으로써 권위를 지켜 나갔다.
예를 들어 당초(唐初)의 공영달(孔穎達) 등이 지은 흠정(欽定)의 주석서 ≪오경정의 五經正義≫에는 육조시대(六朝時代)의 노불(老佛) 유행기의 영향인 듯한 해석이 보이고 있다.
또한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注)≫는 오경 중심으로부터 사서 중심으로의 획기적인 전환을 이룬 저술이기도 하지만, 그 속에는 노·불을 받아들여 지양한 새로운 철학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죽은 사자의 뱃속에 토끼가 여러 마리 들어있음이 해부 결과 드러났다고 해서 사자를 토끼라고 할 수 없듯이, 아무리 노·불의 영향이 크다 해도 이와 같은 새로운 해석으로 철학적인 재무장을 한 유교를 유교 아닌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 부를 수는 없다.
요컨대, 경서 주석의 역사는 곧 중국 철학사의 중요한 일면임을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신유학(新儒學)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철학적으로 면모를 일신한 송대 이후의 성리학 등을 거쳐 청대의 사상사학(思想史學)의 전반적 연구의 발전은 경학의 독자성의 확보라는 면에서는 여러 가지로 불리한 결과를 가져온 것만은 틀림없다.
<훈고학>
훈고학(訓詁學)이란 간단히 말해 공자의 유교에서 시작된 갈래로 진나라의 진시황 때 법가사상을 나라 통치 이념으로 통일하는 과정에서 흩어지고 소실된(분서)유교 경전을 정리하고 그 뜻을 새롭게 해석하는 학문이다. 후에 나오는 성리학 양면학의 근본이 되었으며 유교 경전인 오경(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를 중시하였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송충, 마융, 정현, 하안, 두예 들이 있었으며 이 훈고학은 한나라 때부터 시작하여 당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오랜 세월 동안 유학계의 주류 위치를 점하였다.
‘훈(訓)’이라 함은 자구나 언어가 가리키는 의의를 설명한다는 것이 되고, ‘고(誥)’는 고언(古言)이란 회의(會意) 글자로서 그것은 바로 고어(古語)를 현재의 언어 문자로 바꾸어 풀이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또한, 훈고(訓誥)를 ‘훈고(訓故)’라고도 표기한다.
훈고학은 중국 고전의 해석상 무엇보다 기본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훈고가 고대로부터 구송(口誦)으로 전승되어 온 것을 문헌으로 기록하여 하나의 학문으로 발전을 보게 된 시기는 한대(漢代)이다. 그러므로 송(宋)·명(明)의 의리(義理)에 관한 학문과 대칭하여 일반적으로 한(漢)·당(唐) 제유(諸儒)들의 경학(經學)을 가리켜 훈고학이라 부르고 있다.
진시황의 분서(焚書) 20년 후 한(漢)나라 혜제(惠帝) 4년 협서(挾書)의 금(禁)을 해제하여 천하의 유서(遺書)를 모으고, 진(秦)나라의 박사(博士)를 초치하여 고서의 정리와 경전의 훈고 주석에 종사하도록 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유교 경전의 훈고를 충실하게 담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오경 박사(五經博士)를 두고 그들에게 각각 일 경(一經) 일 박사(一博士)라고 하는 전문성을 지닐 수 있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한 사람이 두 가지 이상의 다른 경(經)을 아울러 전공하지 않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또한, 그 경 하나에 관하여서도 달리 몇 개의 유파가 나타나 전문성을 더욱 심화시키고, 엄격 분명한 사법(師法)의 전수가 이루어졌다.
≪시경≫은 신배공(申培公)·원고생(轅固生)·한영(韓嬰)·모형(毛亨), ≪서경≫은 구양생(歐陽生)·하후승(夏侯勝)·하후건(夏侯建), ≪주역≫은 시수(施讎)·맹희(孟喜)·양구하(梁丘賀)·경방(京房)·비직(費直), ≪춘추≫는 공양(公羊)·곡량(穀梁) 등이 배출되어 제각기 그 전문 주석에 힘써 많은 공적을 남겼다.
한편, 후한(後漢)의 훈고학자들은 그 대부분이 줄곧 유흠(劉歆)의 계통을 잇고 있다. ≪주례≫에 관해 유흠은 이를 두자춘(杜子春)에게 전하고 두자춘은 이를 다시 정흥(鄭興)·정중(鄭衆) 부자에게 전하였다. ≪좌전≫ 역시 유흠의 뒤를 이어 가규(賈逵)·복건(服虔) 등이 그 주석자로 가장 저명하였다.
≪공양전 公羊傳≫에 관하여는 하휴(何休)가 ≪좌전≫과 ≪곡량전≫의 두 전(傳)을 함께 물리치고 오로지 공양해고(公羊解誥)에만 힘을 기울여 권위를 세웠다. 그 밖에 ≪논어≫에는 포함(包咸)·하휴·정중의 주해서가 있고, ≪맹자≫에는 조기(趙岐)의 주해서가 있다. 그리고 허신(許愼)의 ≪설문해자 說文解字≫ 14편(篇)은 ≪이아 爾雅≫와 함께 훈고학자들에게 소중한 보전(寶典)이었다.
마융(馬融)과 정현(鄭玄)에 이르러 한 사람이 여러 가지 경과 전을 함께 다루는 움직임으로 발전하고, 이에 제가(諸家)의 훈고가 비로소 정리, 집성을 보게 되었다. 계속하여 위(魏)·진(晉) 사이에는 왕숙(王肅)·왕필(王弼)·하안(何晏)·두예(杜預)·범녕(范寧) 등의 주석가가 나왔다.
당대(唐代)의 안사고(顔師古)가 태종의 명에 의해 오경의 탈오(脫誤)를 보정(補正)하고, 공영달(孔潁達)이 제유 공저로 ≪오경정의 五經正義≫를 지어 크게 도움을 주었다. 이 모두가 거의 전통적 훈고를 중심으로 하는 학문이었다. 송대에 와서 의리를 주로 하는 경학이 일어나 훈고만을 주로 하는 경학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훈고를 전혀 무시한다는 것이 아니고, 다만 경서에 나타난 형이상학적 해석을 그 위에 가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주자(朱子)도 일찍이 학자가 경을 대함에 있어서 그 글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능히 그 의(意)에 통하는 자가 있을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오히려 훈고를 존숭하였다.
청조(淸朝)의 경학은 그 특징이 바로 송·명의 공소 이론(空疏理論)을 반대한 점에 있다. 고증학의 발달로 경전에 관한 이제까지의 전통적 해석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방법의 고대어 주석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철저한 고증에 의해 우선 경의(經義)를 밝히고 문자와 그 뜻을 분명하게 가려낼 것을 요구하는 훈고학파가 여기에 대두하였다.
그리고 문자는 언어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으므로 먼저 언어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 문자를 충분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보는 음운학파(音韻學派)가 나타났으며, ≪설문≫을 비롯하여 한대 이후의 학서(學書)가 모두 미흡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금석학파(金石學派)가 일어났다.
또한, 우리에게 현재 전해진 경서가 수없이 탈오, 착간(錯簡)되어 믿을 수 없는 점이 있다고 하여 교감파(校勘派)와 집일파(輯佚派)가 나왔다. 한편, 경전 연구 방법으로 훈고와 교감 두 가지를 크게 나누어 취할 수 있었다. 혜동일파(惠棟一派)의 한학은 훈고를 주로 하였다.
c) 오경의 성립
이처럼 유학이 국가 공인의 유일한 정통사상으로 된 결과 그것이 일종의 종교적인 권위를 가지게 된 것은 자연적인 추세였다. 본디 유교는 도덕이나 정치의 가르침이고 엄밀한 의미로는 종교는 아니다. 그러나 천지를 비롯한 신이나 조상을 제사하는 예를 중시한 점으로는 종교와 통하는 일면도 있고 또 성인의 숭배를 극단으로 까지 밀어붙이면 신에 대한 숭배와 유사할 가능성도 있다. 요컨대 유사 종교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권위를 가지는 것이 되려면 반드시 성전이 필요하게 된다. 그것이 경서 혹은 경전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본디 ‘경’이라 하면 직물의 세로로, ‘위’가 가로인 것에 대(對)한다. 그런데 세로는 직물의 처음부터 최후까지 관통하는 것이므로 경은 ‘상’인 것, 영구불변인 것이라는 의미가 생긴다. 따라서 ‘경서는 영구불변의 진리를 실은 책’이라는 해석이 성립한다. 도 경은 직물에 질서를 주는 것이므로 ‘경은 되이고 법이고 이(理)이다.’라는 뜻이 생긴다. 또 이것을 동사적으로 하면 ‘다스린다. 정리한다.’라는 의미가 된다. 경영, 경세제민, 경제라는 용례가 그것이다. 따라서 경서의 의미를 종합하면 ‘불변의 도리를 정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책’이 될 것이다.
그런데 한 무제는 오경박사의 관을 두는데 여기에서 ‘오경’의 내용이 확정된다. 일찍이 오경이나 육경이라는 명칭은 전국 말이 되고서부터인데 그 내용은 반드시 일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 이후의 오경이라 함은 시(詩), 서(書), 예(禮), 역(易), 춘추(春秋)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이것을 시경, 서경, 역경 등으로 경자를 붙혀서 부르게 된 것은 송학이 성립된 연후였다.
d) 경학의 성립
이 오경은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원리를 설명한 책이라는 점에서는 ‘경전’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며 한편으로는 성인의 가르침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종교적 권위를 갖춘 ‘성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요컨대 정전임과 동시에 성전이라고 하는 이중의 성격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다라서 한 대 이후의 오경은 사상계의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군림하게 된다. 이 때문에 한 대 이우 중국 사상계는 경서가 규정하는 범위에서 벗어나는 것이 극히 곤란하게 되고 사상의 자유로운 전개라는 점에서 보면 매우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처럼 경서의 권위가 확립됨과 동시에 잉 경서를 연구하고 해석하는 ‘경학(經學)’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성서 내지 신학에 해당하는 것으로 한 대 이후의 유학은 경학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예컨대 송나라의 주자학이나 명나라의 얌명학 등은 노장이나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유학이지만 최후의 근거가 된 것은 역시 경서여서 단지 그 해석이 종래와 다를 뿐이다. 따라서 주자학이나 양명학은 경학의 내부에서 발생한 시대적인 변천이고 경학이 아닌 다른 것에서 튀어나온 것은 아니다.
한 대 경학의 특색으로는 금문학(今文學)과 고문학(古文學)의 대립이 있었던 점과 경서 외에 참위(讖緯한대에 유행했던 미래 예언설)라는 책이 나타나 이것이 경학과 결합된 것을 들 수 있다. 둘 다 경학사(經學史)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나 사상사로서는 그다지 큰 의미를 가졌다고 볼 수 없다.
e) 금문학과 고문학
관학(官學)은 반드시 표준화를 동반하게 된다. 경학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같은 제목의 경전의 다른 내용이 하나로 통일되고 서체 또한 춘추전국시대에 쓰여진 여러가지 서체 대신 예서체로 하여 경전을 저술하게 되었다. 예서체로 지은 경전에 대한 연구도 성행하는데 이를 금문경학(금문학)이라 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갈수록 유학 경전을 해석하는 방식이 가문이나 스승마다 다양해지고, 서한 말기로 갈수록 농민반란과 같은 사회적 혼란이 심해지면서 참위설까지 더해져 금문학이 번잡스러워지자, 금문학을 대체하는 학문이 필요했다.
이로 인해 등장한 것이 고문경학(고문학)이다. 고문학은 서한 중기 이후에 민간에서 발견된 춘추전국시대에 저술된 경전인 고문경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전한 말의 유흠에 의해 주창되어 발전하였다. 고문경과 금문경은 시대와 내용이 상이하여 해석방법이 달라 고문 논쟁으로 대표되는 갈등이 금문학과 고문학 사이에 일어났으나, 학문으로서 금문학은 인기를 날이 갈수록 잃게 된다. 후한 대에 이르면 고문학은 금문학을 대체하는 주류로 자리잡게 되고, 정현이라는 대학자에 의해 고문학을 중심으로 금문학을 통일하는 작업까지 이르게 된다.
한 대 경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춘추로 대표되는 역사가 유학에 있었기 때문이며 법가, 도가, 음양가의 학설도 매력적인 면이 많았으나 유학은 역사를 담고 있어, 전통문화를 보존할 수 있어 빨리 체계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춘추에서의 대일통과 현실에서의 힘보다는 명분을 주장하는 공양학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는데 성공하여 관학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했으며, 천인삼책과 천인상감설과 같은 음양가의 사상도 통합시켜 형이상학적인 체계를 세움으로써 철학적이고 신비적인 속성을 획득하고 세상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나름의 논리를 확보하는 것 역시 한대 경학의주요한 성공 요인으로 꼽을 수 있겠다.
6) 한 대 사상계의 흐름
a) 회남자(淮南子): 한 초의 도가 사상을 대표한다.
유교의 경학이 성립한 것은 사상사에 있어 중대한 사건이었으나 경학은 유교의 권위를 무조건 신뢰하는 것에서 성립하는 신학과 같은 것이므로 사상적인 내용은 결핍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 대 4백 년간은 경학의 전성기였지만 경학 외에도 우수한 내용을 가진 사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을 들어보자
우선 제일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회남자』이다. 이것은 한사람의 저서는 아니고 한의 일족의 한 사람인 회남왕(淮南王)의 유안(劉安?~기원전 122)이 그 문하로 양성하였던 학자들의 논문을 편집한 것이다. 따라서 진시황제의 제상이었던 여불위가 편집한 『여씨춘추』와 매우 유사한 성격의 책이다. 여러 학자의 논문을 모은 것이므로 그 내용도 유가, 도가, 법가 등의 사상이 섞였고 소위 잡가로 이뤄져 있는 것은 『여씨춘추』와 똑 같다.
그러나 『회남자』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도가 사상이어서 그 분량도 압도적으로 많다. 이 책이 완성된 것은 무제 때로 아직 유교의 권위가 충분히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 초의 도가 사상이 전성을 누리고 있었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한 초의 도가가 황노라고 불리웠을 만큼 노자 정치 사상이 중심이었던 것에 반해서 『회남자』에는 장자 사상의 색채가 강해진다. 따라서 철학적이고 종교적이다.
회남자에는 곳곳에 『장자』 외편, 잡편의 용어인 ‘性命’, ‘性命의 情’이라는 말이 나타나있다. 그것은 천성인 자연의 뜻대로 살아가라고 하는 장자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킨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세속적으로 인위적인 도덕이나 예의의 속박을 받는 것이 아니고 안에 있는 마음의 진실로 산다고 하는 인생관과 결합된 것이다.
그러나 회남자의 집필자는 다수였기 때문에 똑같은 장자 철학을 계승하였으면서도 이것을 벗어나 새로운 국면을 열고자 하는 면이 보인다. 자연의 천성 안에 선이 포함되어 있고 인의가 구비되어 있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예컨대 “天性, 자연의 情에 철저하면 거기에는 仁義가 처음부터 구비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처음의 상태로 돌아가면 인간의 性은 善이다.” 등이 그것이다. 더욱 인의나 선은 어디까지나 자연의 도에서 생긴 것이고 유묵의 그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같은 생각은 실은 『장자』의 외편, 잡편에서 이미 나왔던 것이고 천도의 정의 발로는 그대로 부친의 죽음을 슬퍼하는 효의 도덕으로 되어 나타난다고 하는 주장과 결부된 것이다. 물론 천진의 정의 발로인 도덕은 의식적으로 행하는 유교도덕과는 다른 것인데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세속적 도덕을 시인하는 것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유교 도덕과의 타협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와의 타협은 또 ‘자연’의 신해석으로 나타난다. 자연은 인위의 부정, 무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종래 도가의 ‘무위자연’에서 인위를 포함하는 ‘유의자연’으로서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고 획기적인 뜻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입장은 후의 육조 시대의 중인 지둔(支遁)의 『장자』 소요유편(逍遙遊篇)의 신해석에 그대로 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b) 사기의 백이전(伯夷傳) - 도덕과 행복의 모순 문제
『회남자』와 아울러서 전한 시대의 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사마천의 『사기』였다. 『사기』는 물론 역사책이고 사학사상(史學思想)의 각도에서 논해야 할 것이지만 유교의 인생관이 가진 결함을 분명히 밝혀 중대한 문제 제기를 하였다는 의미에서 그 사상적인 역할은 크다.
사기의 열전 첫 번째는 백이전(伯夷傳)으로 시작한다. 백이는 그 아우 숙제와 함께 주무왕이 은의 주왕을 토벌해서 혁명을 단행하고자 하는 것을 반대해서 간하지만 듣지 않자 결국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정의를 행하면서 더욱 불행한 일생을 보낸 일물이엇다. 공자는 이 백이, 숙제의 생애에 대해서 어떤 의견을 가졌었을까? 어느 날 제자 한 사람이 “백이, 숙제는 자기의 운명을 원망하였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인을 찾아서 인을 얻었다. 도 무엇을 원망하겠는가?”라고 답하고 있다. 이 의미에서 백이 숙제는 인의 완성을 구해서 그 목적을 실현한 것이었으므로 원망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마천은 이 공자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대한다. 백이 숙제가 죽을 때에 남긴 시가 있는데 여기서는 올바른 군주가 세상에 없음을 한탄하여 西山에 고사리를 뜯어서 굶어 죽는 자기의 신상을 서술해 “命이 쇠하는구나.”라고 맺고 있다. 천명을 원망하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마천은 “天道는 과연 옳은가? 그른가?”라는 절망적인 한 구절은 후세에 커다란 문제를 남기는데 『서경』의 “천도는 선에 복을 주고 악에 화를 내린다.”라는 말은 세상의 도덕에 힘쓰는 자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마천은 이것이 역사적 사실에 반하는 것이라고 부정한다. 그런데 공자도 선인이 세속의 행복을 받는 것은 믿지 않지만 그 대신에 인이라는 도덕을 실현함으로써 얻는 만족감을 행복으로서 해석하는 길을 택하였다. “인을 찾아서 인을 얻었으면, 또 무엇을 원망하겠는가”라는 말은 이 입장의 표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천은 공자의 주장에 반론을 가해 이것을 부정한다. 결국 사마천은 유교가 생각한 행복론에 만족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본디 유교의 본질은 ‘이 인생을 어떻게 올바르게 살아갈 것인가?’하는 도덕론이었던 것이어서 ‘이 인생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할 것인가?’하는 행복론에 대해서는 냉담하였다. 이 때문에 유교의 행복론은 매우 허술하였고 커다란 결합이 있었다. 사마천처럼 정의감 때문에 흉노의 포로가 되었던 장군 이릉(李陵)의 변호에 앞장서서 그로 인해 무제의 격노를 사서 선비로서는 가장 치욕으로 여겨진 궁형(宮刑)을 받았던 비운의 입장에서는 행복론에의 요구가 매우 강렬하였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유교의 행복론은 이러한 극한 상황 앞에서는 완전히 무력함을 노출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이 사마천으로 대표되는 유교 행복론에의 불만은 이윽고 사람들을 불교의 행복론으로 이끄는 원인이 되었다. 거기에는 아직도 4백년의 긴 세월을 필요로 하지만 이 유교의 인생관에 대한 불만은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잠복하여 끊임없는 저류가 되어서 계속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육조 시대에 사람들의 정열적인 불교에서 경사, 특히 삼세보응(三世報應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선과 악이 그 원인과 결과에 따라 대갚음을 받음) 설 대한 깊은 찬양의 뜻을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c) 王充(약 27?~100)의 논형(論衡) - 인생은 우연한 운명에 의해서 결정된다.
한 대에 나타난 이색적인 사상가로서 후한의 왕충을 들 수 있다. 그의 저서인 『논형(論衡)』은 후한말에서 육조시대에 걸친 많은 지지자를 얻었고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왕충은 독자적인 합리주의 입장에서 당시의 유행 사상을 철저하게 비판한다. 한 대의 사상 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유교인데 그 한 대의 유교에는 특수한 색채가 칠해져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종교적 신비적인 요소이다. 앞서 든 참위설도 그렇지만 여기에 부수해서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이것은 지상에서 인간이 선하게 행동하느냐, 악하게 행동하느냐의 여부가 天 즉 자연계의 길상(吉祥)이나 재해를 불러 일으킨다고 하는 것이다. 특히 정치와 자연현상 사이에 대응의 관계가 있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이 천인상관설을 최초로 조직적으로 논한 것으로서는 전한의 대유학자로 알려진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6~104)의 『춘추번로(春秋繁露』가 있다. 이 천인상관설은 한 대를 통해서 크게 유행한 것으로 천재가 있을 때마다 천자에게 상서해서 실정을 논하는 자가 많았고 재상이 책임을 지고 사직하는 경우도 있었다. 왕충은 이같은 시대의 풍조에 대해서 격렬하게 비판하는 태도를 취했다. 본디 그가 태어나 일생의 대부부을 보낸 강남은 당시에는 여전히 후진 지대였고 더욱 지방의 관리로 일생을 마쳤으므로 유행 사상에 대해서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가능했다고 보인다. 그러나 그의 비판적인 입장을 확립시킨 것은 그 특유의 합리주의였다. 왕충에 의하면 천은 마음의 변화를 가지지 않는 자연이고 물체이다. 어떻게 해서 그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 천에는 입이나 눈등의 감각기관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각기관을 가지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로 마음의 변화를 가질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해서 멀리 떨어져 있는 천에 입이나 눈이 없음을 알 수 있는가? 그것은 근처에 있는 대지를 보면 된다. 땅은 하늘과 부부와 같이 서로 유사한 것이므로 땅의 상태로 미루어 천의 상태를 살필 수 있다. 그런데 땅에는 입이나 눈이 없다. 따라서 촌에는 눈이나 입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천은 자연의 실체이고 무의무심의 존재이므로 인간처럼 목적의식을 가지고 행동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천은 ‘무위’이다. 그것은 인간이 ‘유의’인 것과는 반대이다 그러나 무위라고 해서 운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운동해도 목적의식을 가지지 않는 경우는 이것을 무위라 한다. “분명히 천은 운동하지 않으면서 만물을 낳는다는 변화를 만들지만, 천이 만물을 낳고자 해서 낳은 것은 아니고 무심의 변화 중에서 만물이 자연히 생기는 것이다. 그 변화의 발생은 자연이고 무위이다.”
이와 같이 왕충이 천을 무위자연의 존재로 보았던 점에서 그것은 노장의 입장과 일치한다고도 할 수 있다. 사실 왕충도 이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왕충과 노자 사이에 있는 차이점도 또한 감출 수 없다. 분명히 노자도 천을 무위자연이라고 하지만 그 천의 무위자연은 동시에 인간의 생활방식에 있어서 이상이 되는 것이고 천은 인간을 품는 어머니였다. 그런데 왕충은 천을 무위, 인간을 유위라고 규졍해서 양자를 엄격히 구별하고 분리시킨다. 이 점에서는 물론 유가의 순자의 입자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무의무심의 천과 유의의 인간을 엄격히 분리함으로써 어떤 결과가 발생했을까? 그것은 한 대의 천인상관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그 논증은 여러 각도에서 행해지고 있는데 근본적으로는 천과 사람 사이에 인과 관계가 성립되는 않는다는 한 점으로 귀결된다.
d) 왕충의 운명론, 우연론, 무신론
그러나 이 천인상관설의 부정보다도 더욱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왕충이 독자적인 성명론(性命論)을 전개함으로써 인간의 운명이 우연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분명하게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본디 성명이라는 말은 『장자』의 외편, 잡편에 있는 것인데 그 후에는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성은 천성이고 인간에 내재된 천을 가리킨다. 명은 천명이고 인간의 밖에 있어서 인간을 지배하는 운명을 가리킨다. 인간은 안, 밖으로 천의 규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이라는 말은 이 ‘성명’이 전화한 것이다.
그런데 종래에는 성과 명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성에서 나타난 인간 행위의 선악이 원인이 되어 길흉의 천명이 결과로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다. 소위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의 생각이다. 그것은 앞서의 천인상관설이 인간 행위의 선악이 천의 서상(瑞祥)이나 재해를 불러일으킨다고 하는 주장과 완전히 똑같은 발상에서 생기고 있는 것이다.
천인 단절을 주장하는 왕충은 이 생각에 대해서 강한 부정의 태도를 취하는 것은 물론이다. 인간 행위의 선악은 그 성에서 나타나는 것이고 ‘성’의 계열에 속하는 사실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화복(禍福)의 운명은 천에서 나오는 것이고 ‘명’의 계열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개의 다른 계열에 속하는 사실은 각각 독립한 이질의 것이므로 양자 사이에 인과관계가 성립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인간의 성의 계열에 따라서 어느 때에는 선을, 어느 때에는 악을 행한다. 천은 명의 계열에 따라 어느 때에는 복을 어느 때에는 화를 내린다. 이 선악과 화복 두 계열의 사실은 분명히 무관계이고 평행선인 채로 전개된다. 따라서 인간이 선을 행할 때에 천이 복을 줄 때도 있고 화를 줄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이 선인선과, 악인악과를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사실의 오인에 의한 것이다. 분명히 사람이 선을 행할 때에 행운이 내릴 때도 있고 악을 행할 때 불운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세상사람들은 이 같은 사실을 포착하여 선이 복을 일으키고 악이 화를 일으킨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의 일치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필연적인 인과관계에 의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 왕충 특유의 ‘우연’의 이해가 나타나있다. 우연이라 함은 두 개의 사물이 평행하는 것이다. 분명히 인과관계가 없는 것이 때로 장소를 같이해서 나타난 경우, 기억을 우연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양자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그 동시성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과 복을 조합시키고 악과 화를 조합시킴은 우연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고 선인선과 악인악과라는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인간의 행, 불행의 운명은 모두 우연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사마천은 선인이 불행한 생해을 끝마치는 사실을 들어서 천의 섭리의 존재를 의심하여 “천도는 과연 옳은가, 그른가”하는 절망적인 의문을 품었다. 만약 왕충의 논리를 따른다면 천의 섭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고 선인으로써 불행한 생애를 끝마치는 것은 물론 세상에서 보통 존재하는 것이다. 인생은 모두 우연에 의해서 지배되고 모순으로 꽉찬 것이다.
이처럼 현실의 인생이 불합리한 것이라고 하면 사후의 세계에서 그 보상을 구할 길이 남아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에 대한 왕충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왕충은 죽은 후의 혼의 존재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왕충은 그 특유의 합리주의의 입장에서 영혼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 결과로 얻어진 것은 무엇일까? 이 모순과 불행으로 얼룩진 인생은 죽음과 함께 끝나버리고 그 생전의 불행이 보상될 길은 완전히 닫혀버린다. 그것은 완전히 구제할 수 없는 인생관이었다.
e) 왕충의 인생관이 초래한 것
그러면 왕충의 인생론은 중국 사상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그는 한 대에 유행했던 사상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비판한다. 물론 유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논형(論衡)』에는 문공편(問孔篇)이나 자맹편(刺孟篇)이 있는데 예컨대 상대가 공자나 맹자일지라도 그 입장이 철저하지 못하면 즉시 비판을 가했다. 이 책이 유교 비판의 성격이 강한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교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비판하고 부정한 것은 실은 ‘한대의 유교’였다. 한 대의 유교에는 공맹 시대에 없었던 잡동사니가 대량으로 끼어 들어갔다. 참위설을 중심하는 천인상관설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미신적인 요소를 혼함한 사상이다. 공자의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았다.”라고 말처럼 그가 사후의 세계를 믿는 형적(形蹟)이 없는 점은 물론 왕충과 가까운 입장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왕충은 한 대의 유교를 비판하고 부전하여 그 잡동사니를 제거함으로써 본래의 유교의 형태로 돌리고자 한 것이었다. 그 유교 비판은 유교의 정신을 순수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충의 역할이 그것만으로 그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유교의 정신을 순수화하는 것에 의해서 그 자신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교가 가진 한계를 분명하게 한 것이다. 유교의 인생관에 서는 한 올바른 인간이 반드시 행복을 누린다고 하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물론 도덕과 행복은 모순하는 것이 보통이고 선인이 불행한 생활을 미치는 것도 세상에 흔한 것이다. 사마천이 한탄한 것도 거기에 있었다. 더욱이 죽음은 생의 단절이고 사후의 세계는 허무이고 영원한 어둠이다. 거기에는 생전의 불행을 보상해야 할 길은 완전히 남아 있지 않다. 이처럼 구제할 수 없는 인생관이야말로 왕충의 철학의 결론이고 또 동시에 유교의 결론이었다. 왕충은 유교의 인생관 중에 숨어있었던 비극성을 밝혀 표출한 것이다.
왕충의 『논형(論衡)』이 지어지고서 약 100년간 그 존재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고 지나갔다. 변경 땅의 무명인의 저서라는 것이 주된 이유였지만 그러나 독자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마도 깊게 주의를 끌지 못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정치에 대한 관심이 강했던 한 대 사람들은 이같은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문제로 하고 있는 책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논형(論衡)』을 읽을수록 새삼스럽게 유교의 구제될 수 없는 인생관을 깨우치게 하여 여기에 대신 할 수 있는 생활의 원리가 필요함을 통감하게 한다. 육조 시대에 노장사상이 유교를 압도하고 더욱이 불교의 윤회설이 지식인의 마음을 깊이 사로잡았던 것은 바로 그 결과였다.
f) 동중서 “하나의 필연적 인과관계가 세계를 지배한다.”
동중서(董仲舒 BC 176~104)는 한나라 무제(武帝) 유철(劉徹BC 156~BC 86)에게 유학 사상을 강력한 중앙집권의 이데올로기로 제안했던 사상가이다. 동중서가 제안한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그의 주저인 『춘추번로(春秋繁露)』 안의 한 편명이기도 한 ‘왕도통삼(王道通三)이라는 구절로 요약할 수 있다. 이 구절은 “왕의 도는 셋을 소통시키는 것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셋은 하늘, 인간, 땅, 그러니까 三才를 의미한다. 왕은 하늘, 인간, 땅을 소통시키는 역할을 함께 수행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동중서는 ’王‘이란 글자가 ’셋‘을 의미하는 ‘三’이라는 글자와 ‘뚫는다’를 의미하는 ‘l’이란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표면적으로는 왕이 가진 역량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동중서는 왕이 가진 권력을 하늘, 인간, 땅 속에 가두어놓으려고 한 것이다. 이제 왕은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고 하늘, 인간, 땅의 요구를 소통시키는 역할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것은 하늘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에서 최고 통치자를 天子, 즉 하늘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동중서에게 하늘은 확고한 의지가 있는 인격적인 주재자로 간주되었다. 그는 하늘의 의직가 ‘만물에 대한 애정과 복릴로 드러난다고 자주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하늘을 아버지로 숭배해야만 하는 군주는 결국 하늘의 뜻을 반드시 따라야만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유학에서 강조하는 ’孝‘이기 때문이다. 이널 논리에 입각해서 동중서는 왕의 정치란 하늘의 의지에 따라서 유학 이념을 통치 이념으로 실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만약 하늘의 의지에 반해 정치가 이루어질 경우 하늘은 왕을 준엄하게 질책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그의 유명한 재이설(災異說)의 의미이다.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개별자에게 보통 있을 수 없는 사건이 나타나게 되면 그것을 ‘사변(異)’라고 하고 규모가 작은 경우 ‘이상현상(災)’ 이라고 한다. 둘 중 이상현상이 늘 먼저 일어나고 사변은 뒤따라서 출현한다. 이상 현상이 하늘의 질책이고 경고라면 사변은 하늘의 징벌이자 위력이다. 하늘이 경고했는데도 사람이 알아차리지 못하면 위력을 행사하여 사람을 두렵게 만든다. 이상현상과 사변의 근원은 한결같이 국가의 실책에서 생겨난다. 국가의 실책이 처음으로 가시화되려고 하면 하늘이 이상현상을 일으켜 경고하여 다가올 위험을 알려준다. 경고를 했는데도 정치인들이 고칠 줄을 모르면 사변을 일으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두렵게 만든다. 그럼에도 여전히 두려워할 줄 모르면 재앙이 일어난다. 이런 경과를 보면 우리는 하늘의 의지가 사랑에 있지 사람을 위험에 빠뜨려 그들을 다치게 하는 데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춘추번로(春秋繁露)』 <必仁且智>
동중서에게 災는 규모가 작은 기이한 자연현상을 반면 異는 그것보다 커다란 규모로 진행되는 두려운 자연현상을 가리킨다. 그에게 하늘의 의지는 기본적으로 ‘만물에 대한 애정과 복리’, 즉 ‘仁’에 있다. 그럼에도 왕이 백성을 사랑하지 않거나 그들의 복리를 증진시키지 않는다면 하늘은 왕에게 분노를 표현할 수 있다. 재와 이는 하늘의 분노를 표현하는 수단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하늘은 기본적으로 왕을 포함한 만물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분노를 점진적으로 표현한다. 우선 규모가 작은 기이한 자연 현상을 보여줌으로써 하늘은 왕이 정치를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질책하고 경고한다. 그럼에도 왕이 하늘의 뜻을 계속 무시하면, 하늘은 마침내 크게 분노하여 홍수와 같은 대재앙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재이설로 상징되는 동중서의 종교적 사유에서 철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가 기이한 자연현상을 포함한 모든 사건을 하늘의 필연적 의지의 실현이라고 보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동중서가 현상적 사건들이 하늘이 설정한 절대적인 필연성, 혹은 절대적인 목적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동중서는 인격적 주재자이기에 하늘이 재이를 내리는 것이 아니다 라고 생각했다. 하늘로 하여금 재이를 내리도록 만드는 것은 인간, 특히 군주라는 말이다. 왕이란 글자가 함축하듯이 군주는 하늘, 땅, 그리고 인간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일종의 축과 같은 존재다. 전통적으로 삼재라고 불리는 이 세 가지 요소를 더 압축해보자면 군주는 자연세계와 문명세계를 연결시키는 매기자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연세계와 문명세계가 대등하다는 것은 아니다. 문명세계는 하늘과 땅으로 상징되는 자연 세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위계는 명확한 것이다. 그래서 동중서는 문명 세계의 작동 원리마저 자연세계의 작동원리와 구조적 유사성을 가져야만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심지어 군주의 감정과 행위마저도 자연 세계의 법칙과 유사해야만 한다고 이야기하기까지 한다.
왕의 인도로 문명세계, 즉 인간세계가 仁과 義에 따라 작동한다면 자연세계를 상징하는 하늘이 어떻게 재이를 내릴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바로 동중서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재이가 발생하는 것은 마치 재판관이 죄인에게 벌을 내리는 행위와 유사해 보인다. 그렇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지나지 않는다. 하늘과 땅, 특히 하늘은 자기의 내적 필연성, 혹은 人義라는 법칙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그리고 이 법칙에 따라 인간을 포함한 만물을 낳고 기른다. 그러니 모든 개별자들이 따라야 하는 일차적 법칙은 바로 인의인 셈이다 그러나 유독 인간만이 인의를 저버릴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동중서의 문제의식이었다. 하늘, 땅, 그리고 인간만이 삼재, 즉 세 가지 재목으로 이루어진 것이 전체 세계인데, 오직 인간만이 자신이 전체 세계를 떠받치는 하나의 기둥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수 있다. 당연히 세 기둥 중 하나가 흔들흔들하니, 전체 집도 흔들흔들거릴 수밖에 없다. 바로 이것이 災異가 발생하는 내적 메커니즘이었던 것이다.
전체 세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하늘도 없어서는 안 되고 땅도 없어서도 안 되고, 인간도 없어서는 안 된다. 이처럼 동중서는 전체 세계를 세 가지 계기를 부분으로 갖는 유기체로 사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은 하늘로서 자기 기능을 유지하고 땅은 땅으로서 자기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세계를 떠받치는 기둥의 역할을 방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들은 전체 세계를 염두에 두기보다 자기만의 이익에 몰두할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이 전체 세계를 사유화하려고 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한 사람이 아무리 전체 세계를 망각하고 사리사욕에 달려든다고해도 그것만으로 하늘, 땅, 그리고 인간으로 이루어지는 거대한 우주의 유기적 구조를 동요시키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군주라면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들 전체를 동원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비유하자면 머리카락이 망가진다고 해서 우리의 몸이 크게 망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심장에 이상이 생기면 우리 전체 몸은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는 것과 같다.
동중서의 우주론은 이렇게 압도적인 스케일을 자랑한다. 그가 압도적인 우주론으로 포획하고자 했던 것은 물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군주를 통제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의 재이론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돌아보라.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는 얼마나 많은 천재지변이 발생했을지 말이다. 동중서의 우주론을 받아들인다면 군주는 계속 자신이 정치를 잘하고 있는지 반성하고 성찰할 수밖에 없다. 우박이 많이 떨어질 수도 있고 개구리떼들이 몰살할 수도 있고 혜성이 떨어질 수도 있다. 아니 매일 매시간 매초마다 기이한 자연현상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발생하니 말이다. 군주를 삼재의 매개자, 즉 왕으로 신성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동중서는 군주의 권력을 통제하고자 한 것이다. 영민했던 황제 유철이 동중서의 속내를 파악하지 못할 리 없다. 그랬기에 유철은 동중서의 말을 무겁게 듣는 척했지만 그를 자기 곁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해 유철은 동중서의 사상 중 군주를 정당화하는 왕의 논리는 받아들였지만 군주의 권력을 제약하는 재이의 논리는 무시해버린 셈이다.
4. 육조 시대의 사상
1) 육조문화의 대세
후한이 220년에 멸망한 뒤 중국은 위, 오, 촉의 세 나라로 분열한다. 이 후 수나라가 589년에 천하를 통일하기까지 약 370년간 육조라 불리우는 분열의 시대가 계속된다. 진한(秦漢)이 후 지금까지 약 2천여년에 있어서 이 시대는 예외적으로 장기의 혼란이 계속되었다. 더욱이 317년 서진이 멸망한 후에는 북방의 오랑캐부족이 중국 북부를 점령하여 왕조는 현재의 남경을 도읍으로 하여 중국의 남반을 지배하는 데에 그쳤다. 중국의 사상사는 중국 특유의 지식인, 사대부 사상의 역사이다. 이 사대부의 성격이나 생활조건의 변화는 그대로 사상계에 반영되어 새로운 변화를 나타낸다. 육조 시대의 특이한 사회 경제적 변동은 육조 특유의 사상이나 문화를 발생시켰다.
한 대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정치문화의 시대이고 유교 사상 전성의 시대였다. 여기에 대해 육조는 정치적으로는 암흑시대였지만 그 대신에 협의의 문화, 즉 철학, 종교, 문학, 예술의 분야에 있어서는 눈부신 발전을 보였다. 서도, 회화, 음악이 사대부의 교양으로서 인정되고 예술로써 의식된 것도 육조 시대에 들어와서부터이다. 또 문학도 유교의 구속을 벗어나 독자적 가치를 주장하게 되엇다. 사상의 세계에 있어서도 유교에 대신하여 노장 사상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도교라 불리우는 민중의 종교가 성립하였으며 또 후한 2백년 간을 통해서 발붙일 여지도 없었던 불교가 노도와 같은 세력으로 사회의 전반적인 분야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도 또 이무렵이었다. 도대체 어디에 그 근본원이이 있었던 것일까?
2) 사대부 지식인의 귀족화
한 대의 사대부, 즉 지식인임과 동시에 관리의 신분을 가진 자는 모두 유학과 덕행을 닦음으로써 지방관의 추천을 받고 조정으로부터 관직이 주어졌다. 관리의 신분은 원칙적으로 일대에 한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한 대의 사대부는 유교의 정신이 왕성했고 천하 국가에 대한 관심이 강했다. 그 정치적 관심이 너무나 강렬했기 Eons에 정치 이외의 문화가 위축되게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한 대의 관리 등용제도는 커다란 하나의 결함이 있었다. 그것은 인재본위를 원칙으로 하면서도 시험 실력에 의하지 않고 추천제도를 중심으로 선발했다는 점이다. 추천에는 불가피하게 정실(情實)이 뒤따른다. 정실의 주된 내용은 지방관으 추천을 받고 관리가 된 자가 그 추천자의 자제를 또 추천해서 은혜를 갚는다고 하는 것, 혹은 현재 고관의 지위에 있는 자의 자제를 추천하는 것 등이다. 이같은 정실에 의한 추천이 수백 년간 계속되면 어떠한 결과가 생길까? 그것은 관리를 낸 가문이 고정된다는 것이다. 소위 명문 명족이라 불리우는 가문은 대대로 관리를 내는 집이고 반대로 한문(寒門)으로 불리는 가문은 관리를 한번도 내지 못하든지, 혹은 낮은 지위의 관리를 배출한 가문이었다. 본래 널리 만인에게 개방되어야 할 관리의 신분이 특정 가문에 집중되어 세습화하는 경향이 강했다. 한마디로 관리의 신분이 귀족화된 것이다. 이 관리의 신분이 귀족화된 것은 정치나 문화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정치에 대해서 말하자면 육조가 분열의 시대로 되었던 것도 그 근본적인 원인은 여기에 있다. 관리인 사대부가 귀족화되면서 강력하게 됭ㅆ기 때문에 지배자인 천자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낮아져서 왕조의 통일이 극히 불안정하게 되었다, 이것이 오랑캐부족이 쳐들어와도 막지 못한 원인이었고 또한 왕조가 오래가지 못하고 여러 왕조로 바뀐 이유였다.
또 문화를 독점한 사대부가 귀족화한 것은 문화의 성격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귀족화한 육조의 사대부는 천하 국가의 정치나 유교 도덕 등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보다도 인간미가 풍부하고 폭 넓은 시야를 가진 철학, 종교, 문학, 예술의 세계에 관심을 기울였다. 한 대가 정치의 시대라고 하면 육조는 문화의 시대였다. 그러한 시대적 주류의 전환을 가져온 최대의 원인은 이 사대부의 귀족화라 할 수 있다.
5. 삼국위(三國魏)의 시대와 노장사상의 전성
1) 청담(淸談)의 유행과 죽림칠현(竹林七賢)
후한이 멸망함과 동시에 천하는 위, 오, 촉의 세 나라로 분영되었다. 이 중 조조(曹操155~220)에 의해서 창건된 위왕조는 후한의 도읍을 그대로 도읍으로 정하고 전통문화의 중심인 중원의 땅을 지배했다. 따라서 40년간 위나라 문화는 그대로 세 나라의 문화를 대표한다고 해도 좋다.
위나라의 사상계에 생긴 커다란 변화는 유교의 비중이 두드러지게 둘어든 대신에 노장 사상이 크게 유행하였고 귀족화한 사대부는 이미 유교에 구속되지 않고 노장이 가진 자연주의. 자유로운 생활의 태도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일상행동이 나타난 것이어서 노장 사상의 내용에 있어서 진전을 가져온 경우는 적었다.
이 노장 사상을 행동으로 옮긴 것으로 소위 청담의 유행을 들 수 있다. 청담은 세속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담화라는 의미인데 대부분 상식적인 유교 더덕을 넘어선 내용이었다. 그 배후에 노장의 자연사상이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가장 일찍 출현한 것은 후한 말기로 공자의 자손이 공융(孔融)이 예형(禰衡)을 향하여 “부모의 은혜라 하지만 부모는 단지 정욕에 이끌린 채로 자식을 낳았을 뿐 달리 은혜를 느낄 필요는 없다.”고 하자, 예형은 “역시 공자의 자손답게 좋은 것을 말한다.”고 감격하였다. 그러자 공융은 즉시 “그렇게 말하는 그대는 안회가 다시 내려온 것이다.” 라고 응담했다.
위의 시대에 청담을 대표하는 사람들로는 유명한 죽림칠현이 있다. 7현이라 함은 완적(阮籍), 혜강(嵇康), 산도(山濤), 향수(向秀), 유령(劉伶), 완함(阮咸), 왕융(王戎)의 7인으로 대나무 숲속에서 정담의 회합을 열었다고 한다. 다만 이것은 전설이고 역사적 사실은 아닌 것 같다. 당시는 귀족의 저택에서 청담의 회합이 열린 적인 많았고 그 풍습이 대표적인 예가 된 것이다. 이 칠현은 각각 기행과 일화를 가지고 있는데 사상가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완적과 혜강 두사람이다.
2) 하안(何晏)과 왕필(王弼)
죽림칠현과 동시대의 사람으로 이들보다도 훨씬 명성이 높고 사회적 영향력도 컸던 하안과 왕필을 들지 않을 수 없다.
하안(?~249)은 그 어머니가 조조에게 재가해서 그도 어려서부터 궁정내에서 길러져 전형적인 귀공자로 성장했다. 더욱이 당시 귀족의 조건으로서는 가계나 교양 외에 용모의 준수함이 요구되었는데 그는 여자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미남자였기 때문에 귀족사회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일찍부터 노장에 심취하여 『노자』에 주를 붙였으나 이것은 후의 욍필의 노자주에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다지 세상에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밖의 저서 『논어집해』는 후한의 정주(鄭注)에 다음가는 것으로서 널리 읽혀지고 현재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노자 신봉자가 『논어』에 주를 달았다는 것이 이상한 것 같지만 위시대의 노장가는 죽림칠현과 마찬가지로 유도절충의 경향이 강했다. 게다가 『논어』는 다른 유교의 경전에 비해서 인간미가 풍부하였기 때문에 노장사상가에게도 애독되었다. 육조시대를 통하여 논어주가 쓰여진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외에 하안의 것으로는 道德論 논문이 있는데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단지 그 요지를 소개한 『文章叙錄』에 의하면 “노자는 공자를 비웃고 예나 학문을 부정하지만, 하안의 주장에 의하면 노자와 공자의 설은 일치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도절충의 방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왕필(226~249)은 어려서부터 신동이라고 소눔이 나서 열 살이 넘으면서부터 노장학을 좋아했다. 아직 미성년일 때 당시 학자들이 모여 청담을 나눴던 하안의 집을 찾아가 담론하며 답객들을 놀라게 하니 “후생이 두렵다.”라는 평을 들었다. 겨우 24세에 병사했는데 그 사이에 명저로 일컬어지는 『易注』 『老子注』를 지었으니 가히 천재였음을 알 수 있다. 왕필의 『易注』는 한 대 이래의 역학을 크게 변화시켰다. 한 대의 역학은 소위 상수(象數)의 易으로 기호의 설명이나 수리에 의한 추론이 주를 이루었지만 왕필의 그것은 의리(義理) 즉 철학이론에 의한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번잡한 상징에 의한 설명을 일소시켜 역을 사상 내지 철학의 책으로 누구나 이해하게 되었다. 바로 이 점이 왕필의 『易注』가 단지 육조시대만이 아니고 훨씬 후대에 이르기까지 역학의 왕조를 차지했던 이유였다.
그의 『老子注』도 현존하는 노자 주석으로서는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널리 읽혀지는 것이다. 다만 이 책은 주석서에 필요한 문자의 훈고를 생략하였고 오로지 노자의 정신을 간단하고 명료하게 서술하는 것에 치중했다. 왕필의 노자가 하안의 해석보다도 우수한 것은 그 뛰어난 독창성과 참신함에 의한 것이다. 만약 왕필이 학문의 축적을 존중하는 다른 시대에 태어났으면 이같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끝났을지도 모른다.
3) 魏의 正始의 風
죽림칠현이나 하안, 왕필은 시대적의 위나라의 정시연간(正始年間)을 중심으로 활약하였으므로 후세에서는 이를 ‘正始의 風’이라고 불러 청담가의 황금시대로 이상화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아직 과도기를 벗어나지 못해서 노장 사상이 충분히 육성되지 않았으며 사회적인 영향력도 충분치 않아서 청담가들이 처세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뒤따른다.
사기적으로 위는 후한 다음을 잇는 국가로서 유학의 전성기였던 한 대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때였다. 위의 시조인 조조는 난세의 영웅이라고 일컬어지는 인물이었고 그 자신이 글재주고 있어서 학자들을 많이 포용했으나 청담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의 아들 문제(文帝)는 문사들을 사랑하였고 문예를 즐겼기 때문에 청담가들에게도 관심을 가져 이대 노장 사상은 일시 부흥하는 색채를 띄었다. 그러나 다음의 명제(明帝)는 법가정치를 이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하안 등 15명을 부화(浮華)의 무리라 하여 관직으로 물러나게 하는 탄압을 가했다. 이 명제의 아들 제왕(齊王)의 시대가 정시연간이다. 제왕은 어려서 제위에 올라 실권이 없었다. 그래서 청담가들에게도 좋은 때가 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위나라 왕실을 지키고자 하는 조석(曺奭)과 왕위찬탄을 노린 사마씨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청담가도 관리였으므로 싸움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안이나 죽림칠현의 혜강이 사형을 면할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러한 사건은 청당가가 가진 노장 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바로 유교와의 타협이다. 완적, 혜강, 하안 모두가 유, 도, 절충의 입장이었던 것은 앞에서 말했다. 왕필이 사람들로부터 “만물의 근본이 되는 無에 대해서 공자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는데 노자가 이것을 강조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공자는 無를 체득했으므로 무를 가르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따라서 항상 有에 대해서 말했다. 노장은 아직 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자기 몸에 부족했던 무에 대해서 가르킨 것이다.”라고 답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왕필의 본심이었는가 아니었는가는 별도로 하고 그 입장이 유, 도, 절충의 방향으로 향했던 것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위의 정시시대는 노장풍의 청담가에게 수난과 시련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노장 사상의 실천이라는 면에도 철저하지 못한 점이 많았다. 이것을 “正始의 風”으로서 이상화한 것은 그 다음의 서진(西晋) 때에 ‘元康의 風’이 너무나 지나쳐서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고 하는 반성에서 나온 것이다.
6. 서진(西晋)의 천하통일과 향략주의의 풍조
1) 서진(西晋)의 왕조와 元康의 風
위왕조의 외척으로서 세력을 갖고 있던 사마씨는 사마담(司馬談) 때에 결국 제위를 빼앗고 서진(265~316) 왕조를 세웠다. 바로 진의 무제이다. 무제는 귀족계급의 저지를 받아서 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일반 귀족에 대해서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 때문에 위나라 시대에는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던 청담귀족도 뜻대로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이 가능했다. 특히 280년에는 오나라를 멸하여 천하를 통일함으로써 태평한 기운이 온나라에 넘쳤다. 동시에 귀족에 대한 우대의 경향은 한층 더 조장되었다. 무제 다음에 제위에 오른 혜제(惠帝)의 元康年間(291~299)에는 귀족들이 방종한 풍조가 극에 달해 세상에서는 ‘원강의 풍’이라고 불렀다. 이 단계에 이르자 이미 유, 도 절충이라는 고육지책은 불필요하게 되었고 “유, 묵의 영향은 거부되어 보리고 도가의 말이 드디어 성하게 되었다.”라는 말처럼 노장 일변도의 세상이 되었다. 더욱이 이 때의 노장 사상이라는 것은 무지무욕(無知無欲)을 자연의 상태라고 주장하는 도가 본래의 입장이 아니고 『장자』 도척편이나 『열자』 양주편에서 보이는 것처럼 자연의 성을 본능적 욕망에서 구하는 것, 따라서 향락주의와 결합된 것이었다.
2) 莊子의 곽상주(郭象注)의 출현
위나라 정시연간의 때에는 도가라고 해도 노자가 중심이었지만 서진에 들어와서는 장자가 노자를 대신하게 되고 장자 해설서를 저술하는 자가 많아졌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곽상(郭象)의 장자주이고 현존하는 장자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전해지고 있다. 곽상이 태어난 해는 불명하고 그가 사망한 때는 영가말(永嘉末312년경)이었다. 그는 노장을 좋아하고 청담을 즐겼다. 처음에는 오로지 문장이나 논의를 즐기고 관리로 나아가지 않았지만 만년에 당시의 실려자였던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의 주부(主簿)로 발탁되어 커다란 권세를 누리고부터 과거의 명성을 잃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친구로 똑같은 노장 사상가였던 유고(劉鼓)는 “그사람은 역시 정치가로 적합하다. 지금까지 존경했던 마음도 모두 없어졌다.”라고 하였으므로 만년의 곽상은 권세욕에 빠졌으리라 짐작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사상과 실천의 모순을 언급하는 데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곽상의 장자주는 『장자』의 주석서라기보다도 장자를 빌어 자기의 사상을 전개했다고 보여진다. 이 점은 그 보다 앞의 노장 사상가였던 왕필의 노장주와 매우 비슷하다. 곽상주에 일관하여 나타난 원인는 ‘自得’이라 해야 할 것이다. 자득이라는 말은 장자의 본문에 두, 세 번 보이는데 곽상주에는 거의 전편에 걸쳐서 보인다. 자득이란 자기에 만족하는 것, 자기 충족하는 것, 따라서 ‘自足’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른 것에 만족을 얻으려 하지 않고 자기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고 자기에 주어진 天分에 만족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安分’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곽상의 이 자득안분의 사상이야말로, 장자 전편을 통털어 볼 때 그것을 대표하는 근본 사상이라고 한다.
그런 관점에서 장자의 소요유편(逍遙遊篇)에 나오는 유명한 대붕(大鵬)과 소조(小鳥)의 비유에 대해서 그는 독특한 해석을 한다. 보통의 해석으로는 구만리 상공을 나는 대붕은 장자의 심경을 표현한 것이고 나무의 가지에 머무르는 소조는 세상의 속인에 비유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곽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붕과 소조는 나는 거리에 있어서 대소의 차이는 있지만 그것은 타고 나기를 다르게 타고 났기 때문이므로 각각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면 소요(逍遙)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면에서 완전히 똑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소조는 대붕을 부러워하지 않고 작은 가지에서 노는 것을 즐거워하면 된다. 이것이 자득이다.
이같이 곽상의 자득 사상은 실은 ‘자연’에 대한 독자적 해석으로부터 나온다. 자연이란 무엇인가? 자연은 다른 것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 그 자신의 내재하는 힘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다른 힘에 의해서 존재한다면 그것은 ‘他緣’이지 자연은 아니다. 이와같이 자연의 세계에 있어서는 인과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A라고 하는 사실이 B라고 하는 원인에 의해서 생긴 것이라고 하면 A는 B라는 다른 힘을 빌리고 있는 것이 되고 그것은 타연이지 자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같은 자연 해석에서 ‘自得’을 강조하는 곽상은 또 “無에서 有가 생긴다.”라는 노자의 사상을 부정한다. 왜냐하면 만약 무에서 유가 생긴다면 유는 무라는 다른 것의 규정을 받는 것이 되고 타인으로 되어서 자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장이 종종 무를 제창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物을 낳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물은 그 자체 내부에 있는 근거에서 생긴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在宥篇注)
이 같은 자여주의의 입장에서 인과율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실은 인도에도 있어서 무인논사(無因論師)라 불리웠다. 그러나 곽상의 논리는 인도의 그 사상이 번역되어 나오기 약100년 전의 것이므로 그의 독창적인 생각임에 분명하다. 수나라의 가상대사(嘉祥大師)는 『삼론주의(三 論主義)』에서 노장의 자연외도(自然外道)라 부르고 이것을 인도의 무인외도(無因外道)와 비교하여 “그 논리가 같지 않은 것도 있지만 동일한 오류를 범한 경우도 있다.”고 비판하였지만 이것은 가상대사가 곽상의 주를 통해서 노장사상을 이해했음을 나타낸 것이다.
7. 동진왕조(東晋王朝)와 불교의 수용
1) 서진의 멸망과 5호 16국의 난
50년간 계속된 서진왕조가 멸망한 뒤, 같은 왕실의 한 사람이었던 원제(元帝)가 건강(建康남경)에 도읍을 정했다. 이것이 동진(東晋)이다. (317~420)
이 서진의 멸망과 동진의 성립이라는 왕조 교체는 단순한 한 왕조의 흥망이라는 면에서만 볼 수 없다. 그것은 중국의 북방이 오랑캐 부족의 점령하로 들어갔다는 중국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대동난으로 매듭지어졌다, 물론 나중에는 금에 의한 중국 북방의 점령, 원(元)이나 청(淸)에 의한 중국 전토의 지배가 있고 이민족에 의한 통치가 그다지 진귀하지는 않았지만 당시로서는 최초의 경험이었기 때문에 중국민족이 받은 충격은 컸다.
서진 말기에 왕실의 일족이 각지에서 내란을 일으키는 ‘八王의 亂)이 발생하여 천하는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이 때에 중국내지에 섞여살던 많은 북방 부족이 일어난 소위 ’永嘉(307~312)의 난‘이 발생하였다. 그 중 본디 몽고에 살다가 중국의 서북부로 이주해 왔던 남흉노의 군대는 서진의 도읍 낙양성을 함락하여 황제인 회제 및 황후 양씨를 포로로 해서 끌어갔다. 결국 그나라 왕 유요(劉曜)는 황제를 죽이고 황후를 처로 삼았다. 이러한 난리는 낙양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황하 이북의 광대한 지역은 모두 유목민족인 흉노, 갈, 선비, 강, 저의 소위 5호의 부족에 의해 점령되어 그들의 지배하로 들어갔다. 이 5호는 각각 국가를 건설하여 이 시대를 5호 16국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이르는 곳마다 파괴와 살해를 자행했는데 종래의 내전에서는 볼 수 없는 참혹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황하유역의 중원에 거주하던 중국인은 대거 강남의 땅으로 이동하였다. 중원 땅은 한민족의 수천년에 걸친 고향이었고 강남은 당시 아직 후진지대였으므로 단장의 애를 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이주지의 생활은 어려웠다. 서진의 원강연간에 행하여진 사치 경재이대와 이 시대를 비교하면 경쟁시대는 꿈같은 일이었다. 여기에 이르거 그 당시 방종의 풍조에 대한 반성이 생겼다. 낙양의 폐허를 바라다 본 환온(桓溫)은 “神州를 백년의 폐허로 만든 책임은 재상이 왕연(王衍)을 필두로 하는 사람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라 하였고 왕연도 죽음을 맞이하여 ”우리가 만약 부허(浮虛)를 쫓지 않았다면 일이 여기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 부허의 풍조에 대한 반성은 그들의 노장해석이 일면적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보다도 앞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실은 이 영가의 난을 계기로 해서 불교가 비로소 중국의 지식인에게 수용되게 되었다는 점이다. 불교의 전파는 극히 빠르게 퍼져서, 금새 육조를 불교의 황금시대로 만들었다. 이것은 큰 문화사적 사건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 3백 년간 동결 상태에 있었던 불교
불교가 처음 중국에 전해진 것은 아마도 전한 말부터 후한 초에 걸친 기원 전후일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 통설이다. 기원전 2세기 말에 전한의 무제가 흉노를 정벌해서 서역과의 교통로를 열고서부터 서역의 사신이나 무역상인의 왕래가 점차로 증가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불교가 중국에 유입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여기에 이상한 점이 있다. 불교와 같은 유력한 세계 종교가 전래되면서 그 후 오랫동안 중국의 지식인에게 널리 보급된 것은 영가의 난 후에 즉위한 동진의 원제(재위 317~322) 이후였다. 불교가 전래되고나서 3백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인 것이다. 장기간에 걸쳐 불교는 동결된 상태로 있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왜 이같은 현상이 생긴 것일까? 거기에는 불교의 유통을 방해하는 중대한 장해가 있었다.
불교의 전파를 막은 두 가지 원인은 바로 종교적 무관심과 중화의식이었다. 그러면 3백년간의 장간 불교 전파를 막은 첫 번째는 한 대의 지식인의 종교에 대한 무관심이었다. 두 번째로는 중국인 특유의 중화의식이 강렬했기 때문에 오랑캐의 가르침인 불교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우선 첫 번째에 대해서 서술하면 한 대 문화가 본질적으로 정치문화이고 한 대의 지식인이 강한 정치적 관심을 가진 것에 대해서는 이미 서술한대로이다. 인간의 에너지에는 한도가 있으므로 정치적 관심이 강한 인간은 종교적 관심이 줄어들 수박에 없다. 한 대에 유교가 전성을 누리자 노장 사상이 표면상 사라진 것도 그 때문이다. 후한 2백년간에 불교가 수용되지 않았던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인 것 같다. 육조 초기에 위진 시대에 들어오자 지식인의 성격은 관리에서 귀족으로 변화했다. 따라서 지식인의 정치적 관심이 쇠퇴하고 그에 대신해서 영원의 인생을 생각하는 종교적, 철학적 관심이 높아졌다. 유교의 세력이 쇠퇴하여 노장 사상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은 이것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그렇다면 불교도 노장과 마찬가지로 동시에 받아들여도 될 것인데 왜 백년의 세월을 허비하고 영가의 난을 거쳐 동진의 개막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일까? 실은 불교로서는 여전히 하나의 중대한 장애물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중화의식이었다. 중국인이 얼마나 중화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었는지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중국인에게 있어서 외국인은 오랑캐인 것이다. 오랑캐는 인간이 아니고 인간과 동물의 중간 존재이다. 외국에서 나온 것은 인간이 혹시 형체 있는 것이라면 몰라도 사상이나 종교라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기독교의 선교를 담당했던 선교사는 ”중국인이 외국인에 대해 갖는 업신여기는 태도는 포교하는데 큰 장애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하층민중조차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중국에 기원을 두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니 사실상 기독교는 중국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으리라. 육조인의 중화 사상에 어떤 변화가 생기지 않았던 한에서 불교도 역시 마찬가지 운명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3) 중화 의식의 후퇴와 불교의 갑작스런 융성
영가의 난이 가져다 준 역사적인 효과는 그것이 중화의식에 큰 타격을 주어 중국인에게 외래의 불교를 수용시키는 기회를 가져다 준 것이다. 고향을 뺏기고 강남으로 도망가지 못한 중국인은 오랑캐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전한(錢漢)‘이나 ’치한(痴漢)‘이라 불리는 굴욕을 견디어야 했다. 그것은 ”一文의 가치밖에 안 되는 중국인’ ‘개같은 중국인’의 의미이다. 漢은 중국인을 뜻하는데 이같은 용법이 관용되었기 때문에 후세에는 ‘오한(惡漢) ’폭한(暴漢)‘ ’치한(痴漢) 등처럼 한이 ‘시시한 사내’의 뜻으로 전화한다. 어쨌든 이것에 의해서 일시적으로나마 중화의식이 저하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화북을 지배한 오랑캐는 사막이나 초원으로부터 돌연히 침입한 만족(蠻오랑캐만族)이 아니다. 이미 오랜시기에 걸쳐 중국인과 섞여 살던 귀화인이었으므로 교양에 있어서도 중국인보다 우수한 자도 적지 않았다. 흉노족으로 전조국(前趙國)을 세운 유연(劉淵). 유총(劉聰) 부자는 6경이나 사서는 물론 제자백가의 학문에 정통하여 그 시문은 중국인인 명사에게서도 절찬을 받을 정도였다. 남조를 방문한 이란계 승려인 고좌도인(高座道人)은 재상을 필두로 하는 고관귀족의 환영을 받고 “위대한 천재는 中華와 이적(夷狄오랑캐적)의 차별을 넘어서 태어나는 것이다.”라는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이 중화의식의 후퇴와 함께 3백년간이나 무시되었던 불교가 갑자기 중국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불교에 열심인 신자가 된 남조의 종병(宗炳)은 “중국의 군자는 예의에 밝으면서도 인심을 아는데 어둡다. 어찌 불심을 알겠느냐?” (『明佛論』)라고 하여 외형에 무게를 두는 중국의 유교보다도 인심의 내면에 중심을 두는 인도의 불교를 우위에 두었다. 이것은 지식인의 심경 변화와 함께 불교는 폭발적인 기세로 사회 구석구석에 퍼지고 그 전성시대를 누리게 되었다.
4) 불교의 중국풍의 이해
a) 노장 사상을 통해서 본 불교 –격의불교(格義佛敎)
육조인은 불교사상 중에 어떠한 부분에 마음이 이끌린 것일까? 육조의 지식인은 유교를 벗어나 노장사상에 심취하였다. 이 노장사상은 불교의 철학과 근본에 있어서는 공통된 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불교의 근본 사상인 ‘空’인 것에 대해서는 노장의 근본사상이 ‘無’이라는 점이다. 물론 양자는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有의 부정에서 출발하였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그러므로 육조인이 친숙한 노장사상을 통해서 불교사상을 이해하고자 한 것은 극히 자연적인 결과였다. 이 때문에 육조 초기의 불교에는 노장적인 색채가 강하다. 이 노장적 불교를 格義佛敎라 부른다.
b) 경이로운 생각으로 받아들인 윤회설(輪迴說)
그러나 이같은 불교의 철학적 이해는 전문가인 승려나 여기에 가까운 수준에 도달한 지식인에 한정되었고 전체로 보면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일반 지식인이나 민중은 그것과은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불교에 접근했던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불교가 가져온 윤회설이었다. 윤회설에 의하면 인생은 이 현재의 일세만이 아니고 생전의 과거에 무한한 전세(前世)가 있는 것이고 또 사후에 미래에도 무한한 내세가 계속된다고 한다. 더욱 이 삼세(三世)는 상호 무관한 것이 아니고 전세 행위의 선악은 현세의 화복을 가져오고 현세 행위의 선악은 내세의 화복을 불러일으킨다는 인과응보 관계에 있다. 따라서 중국인은 윤회설을 ‘三世’의 설 또는 ‘三世報應’의 설이라고 불렀다. 종래의 중국인은 현세밖에는 생각하지 않았고 전세나 내세의 현재등은 꿈도 꾸지 않았으므로 이 불교가 처음 삼세보응의 설을 가져왔을 때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c) 윤회설에서 구원을 찾게 된 중국인
삼세 보응의 설은 단순히 새로운 사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유교적 인생관의 결함을 보충하는 커다란 장점을 갖춘 것이었다.
유교는 도덕의 가르침이고 정치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개인의 행복 문제에 대해서는 극히 냉담하였다. 고대의 현인이라고 하는 백이, 숙제 형제는 올바르게 살았으면서도 수양산에 굶어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도덕과 행복이 올바르게 대응되지 않는 것은 세상의 일반적인 경우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공자는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논어』에 백이, 숙제의 최후에 대해서 “仁을 찾아서 仁을 얻었으니 또 무엇을 원망하랴” 고 서술되어 있다. 인이라는 도덕을 완성하였으므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행복을 도덕 중에 흡수시켜버리는 스토아학파의 입장과 통하는 것으로 결국은 행복의 독립된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유교의 도덕만능의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중국인 대부분이 이 공자의 도덕 만능주의에 만족하였던 것은 아니다. 예를들면 전한의 사마천이 그러하다. 사마천은 그의 저서 『사기』 열전의 처음에 ‘백이전’을 두었다. 백이는 죽으며 자기의 운명을 원망하는 시를 지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공자의 “또 무엇을 원망하랴?”라는 말은 사실에 어긋나는 것이 아닐까? 도덕과 행복의 모순으로 고생한 이는 백이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공자의 문하생 중에서 제일의 제자였던 안회를 보아도 그렇다. 그는 비할데없이 학문을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애가 빈곤하여 고생했고 더욱이 30세로 단명하지 않았는가? 반대로 도척은 나쁜 짓만 했지만 만족한 삶을 누렸다. 『경서』에 “천도는 선에 복을 주고, 악에 재앙을 준다.”고 했지만 그 사실은 한쪽으로만 나타나지 않는가? “나는 천도가 있는지 없는지 매우 의심스럽다.”라고 사마천이 말한 것은 하늘의 섭리에 대해 절망적인 의문을 던진 것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유교가 도덕과 행복의 일치에 성공하지 못했던 것은 유교가 이 인생을 현세에만 그치는 것으로 한정했기 때문이다. 만약 인생이 한 번 뿐이라고 하면 죽음이 찾아옴과 동시에 모든 것은 영원한 어둠속에 소멸되어 생전의 불행을 보상받을 길은 완전히 없어져 버리고 만다. 유교적 세계관이 이러한 어려운 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다름아닌 불교의 삼세보응의 설이었다.
사마천이 열거한 안회나 도척의 예에 대해서 북주(北周)의 승려 도안(道安)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안회가 이 세상에서 선을 행하면서 불행에 빠진 것은 그가 전세에 범한 악업의 보(報)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안회는 현세에서 선을 행했으므로 그 보는 내세에서 행복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반대로 도척이 현세의 행복을 누린 것은 전세의 선업에 의한 것이나 대신에 현세에서 저지를 악행의 보는 반드시 내세의 보로 나타날 것이다.
불교가 가져온 윤회설, 삼세보응의 설은 이와같이 종래의 유교의 인생관이 가진 결함을 보충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대다수의 중국인이 삼세보응의 설이야말로 불교의 중심사상이라고 생각하였고 “불교는 삼세보응의 설하는 교이다.”라는 이해가 널리 세상에 행해지게 되었다.
d) 선종(禪宗)의 선구가 – 도생(道生)의 돈오설(頓悟說)
육조 후반기에 해당하는 남북조시대가 되면 불교의 융성과 함께 교리의 연구도 한층 진보를 보인다. 반야경(般若經)을 중심으로 하는 일체개공(一切皆空)의 사상, 열반경(涅槃經)을 중심으로 한 “일체의 중생은 모두가 불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자각하므로써 涅槃의 경지에 나타난다.”라는 사상 등이 유력하게 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중국불교에 있어서 그 후의 발전에 기초를 제공한 것으로서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당나라 말기부터 최후의 청조에 이르기까지 1천년간의 중국불교를 지배한 선과 정토의 두 사상이 이미 이 시기에 맹아하고 있었던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축도생(竺道生?~434)은 한문(寒門)인 선비의 가장에서 태어나 줄가하여 북조로 가 구마라집(鳩摩羅什)에게 배운 후 다시 남조의 도읍 건강으로 돌아왔다. 당시 출판되었던 小品 열반경(涅槃經)의 명문(明文)을 부전하여 ‘어떠한 극악인도 불성을 갖는다.’라고 강하게 주장한 바람에 당시 불교계의 배척을 받아 추방되었다. 그러나 그후 대품열반경(大品涅槃經)이 출판되고부터 그의 학설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한다. 독창성이 매우 풍부한 천재였음을 알 수 있다.
도생은 또 유명한 돈오성불설(頓悟成佛說)을 제창하였다. 돈오는 점오(漸悟)에 상대되는 말로 점오가 학문수행의 순서를 거쳐서 차차로 깨닫는 것에 비해 돈오는 한꺼번에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도생에 의하면 진리는 어디까지나 하나인 것이고 분활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를 나누어서 그 일부분씩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리는 깨닫든가 완전히 깨닫지 못하든가의 어느 한쪽이다. 즉 돈오이다.
이 도생의 돈오설은 진리의 인식 방법을 문제로 하는 인식론으로써 극히 중대한 논리인 것이다. 보통 진리의 인식은 논리의 축적에 의해서 순서적으로 진리에 가까워진다고 하는 방법을 취한다. 곧 점오이다. 그런데 도생은 이 논리에의한 진리에의 접근을 부정하는 것이었으므로 당연히 이 논리적 사고에 대신할 방법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다름아닌 체험적인 직관이다. 그것은 곧 선종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본디 중국인은 논리에 약하다. 논리에 의한 추론보다도 직관에 의한 체득을 중시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것은 ‘언어에 의한 진리의 표현’을 부정하는 것과 관련된다. 도생은 ”아직 진리를 보지 못한 때에 언어에 의한 중개 역할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궁극적인 理를 볼 때에는 이미 언어는 쓸모없다.“라고 한다. 이러한 도생의 주장은 위로는 『장자』의 사상을 계승하면서 아래로는 선종의 ‘不立文字’의 기원을 개척한 것이었다.
도생의 돈오설은 곧 사령운(謝靈運)이라는 당시 대표적인 문인 족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의 『변종론(辯宗論)』은 도생의 돈오설을 자세히 서술한 것이다. 또 송나라의 문제(재위424~453)도 역시 도생의 열렬한 지지자여서 도생의 제자를 후하게 대우했다. 이와 같이 돈오설이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킨 것은 중국인의 성향에 잘 맞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보통 선종에서는 그 시조로 육조 말기에 인도에서 건너왔다는 보리달마(菩提達磨)를 든다. 그러나 달마의 전기는 훨씬 후세에 만들어졌고 전설적인 요소가 매우 많아 사실로 인정되지 않아 신용도가 낮은 것이다. 선종은 인도에 기원을 두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체험적 직관을 중시하는 중국인의 전통에서 생겼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도생이야말로 선종의 선구라고 할 수 있다.
5) 도교(道敎)의 성립
a) 농민간에 생겨난 오두미교(五斗米敎)
육조시대의 종교적인 기운의 고조는 외래의 불교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중국 민족 고유의 종교인 도교를 성립시키게 되었다. 중국은 예부터 동부 아시아 일대에 널리 퍼졌던 샤머니즘권 안에 있었고 무축(巫祝)을 중심으로 하는 다신교적인 신앙이 행해졌다. 이 민간 신앙은 이론도 없고 체계도 없었다. 그것이 2세기 말 후한말이 되면서 신흥종교에 의한 농민의 반란을 계기로 하여 하나의 종교체계로써 성립을 보게 되었다. 육조에 들어와 그 세력은 점점 커지게 되었고 이것이 후세에 말하는 도교의 골격을 형성하였다.
b) 오두미교와 신선설(神仙設)의 결합 - 葛洪의 『抱朴子』
이처럼 후한말, 육조초기에 농민을 중심으로 한 신흥종교가 생기고 도교를 성립시키는 현실적인 기반이 생기는데 그 이론적인 기초는 극히 불충분해서 하나의 종교체계로 완성시킨 것이 신선설이었다. 불노불사의 선인(仙人)이 되는 것을 염원한 신설설은 기원전 4세기 전국말기부터 나타나 진시황제(재위 BC247~BC210)와 같은 열렬한 신자도 있었을 정도이다. 전한시대의 무제(재위 BC141~BC87)는 그보다 더 열심이었는데 그는 신선술의 전무가인 방사(方士)의 권유에 따라서 여러 신들을 제사지내고 연금술에 의해서 불사약을 얻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한 대까지의 신선설은 천자나 고급관료와 같이 여유있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유행되었지 일반 지식인이나 서민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런데 후한말부터 육조에 들어와 오두미도 등의 신흥종교가 성행하면서 신선술에 접근하여 결국은 결합했다. 그 시초에 있었던 자가 진나라 갈홍(葛洪 283~343)이다. 갈홍은 강남 토착 명족 출신이고 지식인이었는데 그의 저서인 『抱朴子』는 그 후 도교의 기초이론을 준비한 것으로서 중요하다. 『抱朴子』는 여러 신의 존재나 그 제사 방법을 설명하고 있어서 그 점에서는 민간 신앙인 오두미도에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가장 중시한 것은 단약(丹藥)을 다려서 불노불사의 선약을 만드는 것인데 이 점에서는 신선설의 색채가 농후했다. 여기에 무술(巫術)을 중심으로 한 오두미도와 전통적인 신선설 등이 결합하여 도교의 골격이 완성되었다.
c) 도교의 성립과 노자의 교조화(敎祖化)
도교라는 것은 원래 보통명사이고 ‘道의 가르침’이라는 의미, 즉 진리에 대한 가르침이란 뜻이다. 아주 옛날에는 유교를 도교라 부른 예가 많았고 또 육조시대에는 불교를 가리켜 도교라 했다. 현재처럼 신선설과 민중신앙이 결합된 종교체계만을 도교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육조의 말기 무렵부터이다.
북조의 주(周)나라 무제(재위 560~578)는 중국사상 두 번째로 배불을 단행한 것으로 유명한데 건덕(建德) 2년에 발표한 조칙에 ”유교를 先으로 하고 도교를 다음으로 하고 불교를 後로 한다.“라는 말이 보인다. 바로 이것이 ‘도교’의 현재의 의미로 사용한 최초의 예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道敎’가 전국시대 제자백가의 하나인 ‘道家’ 즉 노장사상과 똑같은가 하면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이나 근본적으로 도교는 많은 인격신앙의 존재를 믿는 종교 인 것에 반해 도가 즉 노장 사상은 신의 존재를 역설하지 않고 본질에 있어서는 무신론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 혼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두미도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민중 종교로서의 도교를 논리를 약간 고쳐서 노자를 숭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두미도의 단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그 전신인 신선설에서 시작한 것이다. 앞서 든 후한 초기 왕충의 『논형』에서도 이미 당시의 신선설이 노자의 논리를 고쳐서 만든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오두미도가 신자들에게 『노자』를 외우게 한 것도 이 신선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두미도의 신앙을 지식계급에 적합하도록 고친 것으로 보이는 갈홍의 『抱朴子』 등에서는 ”노자는 은으로 계단이 만들어진 금루옥당에 있고 신구(神龜땅이름구)를 허리에 두르고 오색구름을 옷으로 입고 있다. 그 형태를 본 자는 장수를 얻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지혜를 얻는다.“라고 쓰여 있다. 후한의 초왕영이나 환제가 궁중에서 불상과 함께 제사하였다고 하는 노자의 상도 아마 이같은 형태를 띄었을 것이다.
이처럼 신선설이나 도교는 노자를 교조로 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신격화되었다. 육조 시대에 성행하였던 도교는 유교나 불교에 대항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에 공자나 부처에 대항할 만한 교조를 가져야 했다. 바로 노자를 도교의 신으로 받들게 된 근본적인 이유였다.
도교는 주로 민중에 의해서 신봉되었고 일반 지식인은 여기에 강한 경멸의 뜻을 품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도교와 도가, 즉 노장 사상과 구분하는 것도 상식으로 되었다. 다만 도교는 중국의 오랜 전통 위에 성립된 민간신앙이나 무술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던 만큼 그 사회적 세력이 매우 장대했던 것이다. 그래서 불교의 강력한 상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게 되었고 근세 중국의 민중 사회에서 보여진 것처럼 도, 불 융합 상태까지 가게 되었던 것이다.
8 수당의 사상
1) 당대 문화의 성격- 육조문화의 연장 발전
육조의 4백 년에 가까운 분열 시대의 뒤를 이어서 수당의 3백년에 걸친 대제국의 통일시대가 들어섰다. 본디 수의 통일은 겨우 30여 년밖에 안되므로 수당의 사상사라고 해도 실제로는 당대가 전부를 차지하고 있다.
당대 3백년 간의 사상계는 한마디로 말하면 육조의 연장 발전이었다. 물론 육조가정치적으로 분열된 시대였던 것에 반해 당대는 대제국 통일이 완성되어 지속된 것이었으므로 그것이 사상적인 측면에도 반영되는 것은 당연하다. 육조문화가 섬세우미하다고 하면 당대 문화는 호화찬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대의 저류로 되어있는 시대 정신에 있어서는 동질의 것이엇다. 그것은 두 시대가 다 귀족주의 정신을 기초로 하였기 때문이다.
육조문화를 주도하였던 지식인은 한 대 이후 관리로서의 성격을 가지면서도 그 관리의 신분이 세습화된 결과 다분히 귀족적인 성격을 띄게 되었다. 이러한 지식인 관리의 귀족적 성격은 그대로 수당 시대에 들어와서도 지속되었다. 물론 지배층이었단 왕조측에서는 관리가 귀족화되는 것이 달갑지 않았기 때문에 극력 그 경향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육조 400년간의 전통을 가진 지식인 관리의 귀족적 성격을 바꾼다는 것은 아무리 당 왕조가 힘을 가졌다해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때문에 전체적인 당대 문화는 육조와 같이 귀족적 색채가 농후했다.
지식인에게 정치적 관심이 부족하다고 하는 것, 따라서 사문을 중심으로 한 문학 예술에 열심히 몰두한 것, 이상의 두 가지는 육조문화의 특징이었고 또한 당대 문화의 특징이기도 했다. 유교 정신의 쇠퇴, 불교나 노장의 융성, 그에 평행한 민간 도교의 유행 등 모든 당대 문화는 육조 문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당대 후반기, 즉 현종 때 안록산의 반란이 일어났던 그 때부터 미묘한 변화가 생격서 다음의 송대 문화의 맹아를 준비하는 경향이 보이기 시작한다.
2) 당의 전반기 - 安祿山의 난까지
a) 유교 정신의 쇠퇴
당대 3백년 간의 유교는 육조의 영향으로 인해 쇠퇴하였다. 육조 수당의 7백년 간은 중국 사상면에서 유교 정신이 가장 쇠퇴되었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원인은 육조 이래의 전통을 이어 받은 당대의 지식인 관리에게 정치적 관심이 희박하여서 치국평천하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는 유교에 흥미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풍조는 지배자에게 달갑지 않았던 것이어서 고조의 뒤를 이은 태종(재위 626~649)은 공영달(孔穎達) 등에게 명해서 『오경정의』를 작성시키고, 易, 詩, 書, 禮, 春秋 등 오경에 대한 표준해석을 하도록 하였다. 『오경정의』는 육조이래 분열되었던 경서 해석을 통일했고 표준해석에 따라서 과거시험이 행해졌다. 결국 관리 등용을 위해 표준해석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 목적이 성공하려면 관리 신분을 열망하는 지식인 사이에 유학이 침투되어야 했지만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 유학에 흥미를 가지지 않은 당대의 지식인은 유학을 시험과목으로 하는 명경과에 모이지 않고 대부분이 시문을 주로하는 진사과로 몰려 버렸다. 당의 태종조차도 유교정신의 쇠퇴라는 육조 이래의 전통을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b) 수당왕조의 불교 보호 내지 이용
수당시대는 유교 쇠퇴의 시기이면서 불교의 황금시대였다. 그것은 왕조에 의한 불교의 보호 내지 이용이란 정책 때문이다. 왕조로서는 무력화된 유교만 갖고 인심을 모으는 것이 곤란하였기 때문에 불교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육조의 양무제(梁武帝 재위 502~549)는 개인적인 신아에 의한 것이지만 불교정신으로 국가를 다스린다는 선례를 열었다. 육조의 분열을 통일한 수문제(隋文帝 재우 581~604)는 천하의 여러 주 111개소에 불사리 탑을 세우게 하여 불교의 보급을 기도하는데 여기에는 다분히 정책적인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당고종(재위649~683)은 여러 주에 국립 사원과 도관(道觀:도교의 사찰)을 하나씩 두었고 측천무후(則天武后 재위 690~705)는 장안(낙양의 兩京) 및 여러 주에 대운경사(大雲經寺)를 설립하였고 현종(재위 712~756)은 여러 주에 개원사(開元寺), 개원관(開元觀) 각 하나씩을 두었는데 이러한 것도 수문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종교를 통하여 인심을 조정으로 모으고자 하는 정치적인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이 순수한 불교신앙에서 나오지 않았음이 분명한 것은 이러한 것이 관사(官寺)와 어울러 관립도관을 반드시 건립하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c) 宗派 불교의 발생과 성행
이처럼 왕조에 의한 보호를 배경으로 해서 수당 불교는 공전절후의 융성시대를 맞이한다. 그것을 알게하는 대표적 사실로 이 시기에 중국 불교를 특징지우는 종파 불교가 다투어 일어난 것을 볼 수 있다.
이미 육조무렵부터 하나의 경전에 중심을 두는 학파가 나타났는데 수대로 들어와 『法華經』을 중심으로 하는 천태대사 지의(智顗 538~597),의 천태종, 『三論』을 주로하는 가상대사 길장(吉藏549~623)의 삼론종이 성립하였다. 또 이 때 성하게 된 종말론적 사상을 배경으로 해서 신행(信行 540~594)의 삼계교(三階敎)가 생겨난 것이 주목된다.
당대에 들어와서는 『淨土三部經』을 의거로 하는 현도대사 법장(法藏 643~712)의 화엄종, 오늘날의 선종의 본원이 되는 남종선(南宗禪)을 열은 육조혜능(六祖慧能 638~713), 인도에서 17년간 유학하고서 돌아온 삼장법사 현장(玄獎 600~664)과 그 제자 규기(窺基)에 의해서 성립된 법상종, 또 현장이 가져온 『구사론(俱舍論』을 토대로 하여 그 제자 보광(普光)등이 성립시킨 구사종(俱舍宗)등이 열거된다. 또 후반기에 들어와 인도 중부의 사람 선무외(善無畏 687~735) 및 남인도 사람 금강지(金剛智 671~741)는 장안이나 낙양에 이르러 밀교를 전한다. 금강지(金剛智)의 제자였던 북인도의 사람, 불공(不空 705~774) 은 더욱 많은 밀교경전을 가져와서 번역함과 동시에 주술이나 기도를 사용해서 당시의 권력자들 사이에 밀교(밀교는 대승불교의 한 분야로, 붓다가 깨우친 진리를 은밀하게 전하는 비밀 불교의 줄임말)를 성행하게 하였다.
d) 중국불교를 대표하는 정토종(淨土宗)과 선종(禪宗)
이처럼 당대의 전반기에는 대개의 종파불교가 출현하는데 이러한 것 중 정토종과 선종에 대해서는 특기할 필요가 있다. 이 2개의 종파 불교는 모든 중국불교 중에서도 가장 중국적인 특색을 가지며 중국인의 체질에 적합한 불교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다른 종파불교의 대부분이 당대 이후에는 거의 자취를 감춘 것에 반해서 정토종과 선종은 계속 명맥을 유지했고 송나라 이후 일천년간의 생명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정토종과 선종은 그 내용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양자가 이론을 싫어하고 오로지 염불이나 좌선과 같은 실천을 중시한 점이다. 확실히 천태, 화염, 법상 등의 여러 학설의 철학적 이론은 심원하여 전문가인 승려나 일부 지식인들의 마음을 끌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의 생활에서 벗어나 대중성이 결여되었다는 약점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론을 싫어하는 중국인은 간명하고 인심에 직접 호소하는 선과 염불을 선택했다.
e) 정토교의 전개 – 선도에 의한 대성
정토종이 발생할 수 있는 토대는 불교가 중국인에게 처음으로 수용되었던 육조의 동진 무렵에 이미 준비되었다. 불교의 윤회설에 마음이 이끌린 중국인은 현세에 적선함으로써 내세의 행복을 바라다는 방향으로 이끌어졌다. 이것은 분명히 정토종의 방향이다. 강남 불교계의 중진으로 동진의 혜원(慧遠 334~416)은 노산에서 당시의 명사 123인과 함께 결사를 맺고 소위 백련사(白蓮寺)에서 염불을 행했다. 이것은 후세의 정토종의 염불과는 격을 조금 달리하는 것이지만 중국의 정토종에서는 혜원을 그 시조로 하고 있다. 정토종이 탄생될 기운이 일찍부터 있었던 것을 언급한 실례이다. 그 후 북조의 담란(曇鸞 467~547)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널리 중생을 정토에서 맞이하는 것을 말한 『무량수경(無量壽經)』을 근거로 하여 오로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믿음으로써 정토로 왕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것은 자력에 의한 어려운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었으므로 이것을 타력이행(他力易行)의 길이라고 하였다. 정토종의 골격은 이미 담란의 때에 완성되었다고 보아도 된다.
수대에 들어와 천태종이나 삼론종 등의 학승(學僧)도 정토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일찍부터 정토종 성립의 기운이 가득했다. 이때 나타난 자가 도작(道綽 562~645)이다. 도작은 현중사에 있던 담란의 비문에서 느낀 바 있어 정토종에 입문했다고 전해지는데 도작도 말세에는 종래처럼 자력으로 학문을 닦아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성도문(成道門)으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고, 아미타불의 힘에 의해서 왕생하는 정토문에 의해서만 복락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여기에서 자기 종파를 정토문, 다른 종파를 성도문이라고 교상판석하여 정토문의 독립이 명확해졌다. 동시에 정토문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염불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여, 날마다 7만 번의 염불을 외워 작은 공으로 횟수를 계산하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소두염불(小豆念佛)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처럼 입으로 외우는 염불에 중심을 두었던 점에서 후세의 정토종의 기본을 이루었다. 그러나 도작은 동시에 관념의 염불, 즉 부처의 형상을 마음에 생각하는 염불도 필요하다고 하고 또 염불이외의 만선(萬善)을 행하여야 할 것도 역설하고 있는 점에서 여전히 성도문적(聖道門的)인 요소를 남기고 도작의 염불은 그가 거주하였던 산동성의 민중 사이에 널리 행해졌지만 여전히 한 지방의 유행에 그쳤다. 이것을 천하에 널리 전파하고 동시에 그 교위를 철저하게 해서 정토종을 대성한 자는 그 제자 선도(善導 613~681)였다. 다른 종파의 학승 중에도 정토왕생에 마음을 기울이는 자가 많아져서 정토론이 계속해서 논의되었는데 그러한 것은 학승으로서의 과시였기 어리석은 중생에게는 정토왕생을 인정하지 않았고 또 간단한 염불 암송보다는 보다 심원한 관념의 염불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여기에 대해서 선도는 정토의 문은 말법탁세(末法濁世)의 세상에 태어난 평법한 사람을 위해 열려진 것임을 강력히 주장했다. 왜냐하면 성인은 이미 경지에 도달했으므로 구원의 필요가 없지만 물에 빠진 범인이야말로 정토의 구원을 가장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토의 문은 분명히 범부를 위해서 있지, 성인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선도의 주장은 ”선인도 계속해서 왕생하는데 하물며 악인이야“라는 친란(親鸞)의 악인 정기(正機)의 설을 생각케 하는 것이다.
도 선도는 스승 도작과 마찬가지로 구송염불 외에는 수행의 필요를 인정했으나 구송염불은 정토왕생을 위한 정업(正業)이라 하고 다른 수행은 정업을 돕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조업(助業)을 인정한 점에서는 철저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지만 구송에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정토종으로서의 완성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구송은 단순히 입으로 외우는 것일 뿐 아니라 아미타블에 대한 신앙의 표현이어야 한다. 이 때문에 선도는 지성심(至誠心), 심심(深心) 회향 발워심(廻向發願心)의 소위 세 가지 마음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정토종은 무엇보다도 ”믿음(信)‘의 불교라고 표명한 것이다.
선도는 정토종 이론의 대성자이면서 또한 열렬한 전도자였다. 그는 당나라 수도인 장안으로 진출해서 민중사이에 정토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때 서방정토를 바라는 자가 백 여인에 달하고 『아미타경』을 외우는 자는 수십만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이르러 정토종이 중국 민중 사이에 확고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f) 선종(禪宗)의 성립 – 육조혜능(六祖慧能)에 이르기까지
정토종이 믿음과 염불의 불교라고 하면 선종은 행함과 체험의 직관 불교라고 할 수 있다. 본디 중국인은 이론보다도 사실을 언어에 의한 논리적 사고보다도 체험적인 직관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한데 이러한 경향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 선종이다.
선, 그것은 불교 일반에 널리 보여지는 수행법의 하나이다. 그것은 보통 정려(靜慮)라고도 번역되는 것처럼 진리를 깨닫기 위하여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실천적인 방법인데 이것을 가르침의 중심에 두었던 것이 선종이었다. 이 선종의 기초를 수립한 자는 육조 말기(6세)에 인도에서 온 보리달마(菩提達磨)였다고 하며 그는 하남성의 숭산에 있는 소림사에서 면벽 9년의 생활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후에 생긴 전설이고 그의 제자 혜가(慧可)의 전설과 함께 역사적 사실로 확인되지 않았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인정된 것은 수당시대에 들어오 四祖 道信(580~651)때부터일 것이다.
달마, 혜가, 승찬, 도신, 홍인, 신수
혜능
도신은 양자강 가까운 호북성의 황매산에 있는 동산사에 있으면서 5백 명의 승려를 거느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도신은 좌선에 의한 관심(觀心)의 수행과 아울러 작무(作務) 즉 노동을 중시하였다. 본래 인도의 불교에서는 승려의 생활노동을 금하고 그 생활은 걸식과 신자의 보시에 의해 구려나갔지만 5백 명의 집단이 산중에서 생활하게 되면 이것은 불가능해진다. 거기에 자급자족의 생활을 위해 좌선과 아울러 농사짓기를 적극적으로 수행에 포함시켜 후의 백장회해(百丈懷海)의 “하루를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먹지 않는다.”란 말의 시초가 되었다. 이것이 선종에 동적인 성격을 부여해 일상생활 자체를 불법으로 하는 사상을 낳게 하였다.
5대조 홍인(弘忍)의 밑에 신수(神秀)와 6대조 혜능(慧能) 두사람이 있었는데 각각 북종선(北宗禪)과 남종선(南宗禪)의 시조가 되어 여기에 선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신수(606~706)는 유, 불, 도의 3교에 통달해 홍인 문하에서 상좌가 된 사람인데 측천무후의 초정을 받아서 국사(國師)가 되어 장안 낙양 양경의 귀족들로부터 절대적인 존경을 받았다. 신수가 죽은 후에도 그 제자들은 수도를 중심으로 많은 신자들을 얻어 북종선은 당대 불교계의 왕좌를 점하고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기까지 약 50년간 전성기를 누렸다.
한편 남종선의 시조가 되는 혜능(638~713)은 신수가 교양인이었던 것과는 반대로 다시 오랑캐 땅이었던 남방 광동성의 농부 출신이었다. 멀리 황매산의 홍인을 찾아가 8개월 동안 쌀찡기생활을 하던 중 6대조의 인가를 받았다고 한다. 혜능은 인가를 받은 후 곧장 고향인 광동성으로 돌아가 조계에 있는 보림사에 머물면서 여기에서 남종선을 열었다.
남북 2종의 차이는 그 양인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독같이 심성의 직관을 강조하면서도 신수의 북종선이 보다 학문적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는 것에 비해서 혜능의 남종선은 “以心傳心 不立文字”의 경향이 강하다. 후에 소위 남돈북점(南頓北漸)의 말이 생긴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당의 전반기까지는 북종선이 도시를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에 압도적으로 우세하였고 남종선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 형세가 역전하는 것은 당나라 후반기에 들어와서부터였다.
9. 당의 후반기
1) 당대 문화의 성격에 나타난 변화
당 3백 년간의 전반기는 육조의 전통이 그대로 계승되어 귀족적 성격을 가진 관료 사대부가 문화를 독점하였다. 이 때문에 당의 전반기 문화는 본질적으로 귀족문화이고 유학의 쇠퇴와 불교의 융성을 가져왔다.
그런데 당대 문화의 난숙기에 해당하는 현종 때부터 미묘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귀족관료에 대신하여 무인 세력이 차차로 강화된 것이다. 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名)의 난, 소위 안사의 난(755~763)은 이 시대에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본디 의적을 막기 위해 설치되었던 절도사가 중앙의 내지까지 설치되고 그것이 다음에 군벌적인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조정의 중앙집권세력이 약화되고 난세의 양상이 깊어졌다. 더구나 그것이 사회적, 경제적 배경을 가진 것인 만큼 일시적인 현상으로써 끝날 것은 아니었다.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문벌귀족의 몰락, 한문출신 무인의 대두가 시작되었다.
이 같은 시대의 변화는 사상적인 면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의 후반기부터는 사상 면에도 미묘한 변화가 나타나 그것이 다음 송대의 새로운 사상의 탄생을 준비하였다.
2) 유학 부흥의 맹아 – 한토지(韓退之)와 이고(李翶)
당대 후반기에 들어와서도 유교 정신의 부진은 구태의연한 것이었다. 지식인 대부분이 불교 특히 선종에 관심을 가진 자가 많았고 그 인생관은 불교적 색채를 띄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극히 예외적으로 불교를 배척해서 유교 정신의 부흥을 부르짖는 자가 나타났다. 한유(韓愈 768~824), 자는 퇴지(退之)가 바로 그사람이었다.
한퇴지는 백낙천과 함께 당나라 중기를 대표하는 시문의 대가였고 고문 부흥의 제창자로서 알려져 있다. 그는 귀족적이고 형식주의적인 육조풍의 문장을 배격해서 한 대풍의 간결하고 힘있는 문장의 형태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문학에 있어서 귀족 취미의 배제는 사상에 있어서는 배불숭유의 주장으로 나타난다. 한퇴지는 ’原道‘ ’原性‘, ’原人‘ 등의 제편을 지어 유가의 도가 곧 군신부자의 인륜의 도이고 이것을 무시하는 노장이나 불교의 도와는 다른 점을 강조했다. 특히 그 당시왕 현종의 봉고(鳳翺)의 법문사에 있는 불사리(佛舍利)를 궁전에 들어왔을 때에는 이것을 매우 반대해서 ’논불골표(論佛骨表)‘ 올려 오랑캐의 부골(腐骨)은 물이나 불 속에 던져버리자고 적극 주장했다. 이것이 현종의 분노를 일으켜 한퇴지는 남방의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되었다. 한퇴지의 논리는 육조 이래 수없이 보였던 배불론에서 한 치도 벗어난 것이 아니고 그것에 비해서 조잡하기조차 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역사적 시점에서 일대 문호의 주장이었던 만큼 그 논의가 불러일으킨 사회적 영향은 컷다. 그렇다고는 해도 시대의 대세는 한 사람의 손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은 아니다. 불교의 위협이 되는 신유학의 탄생을 보기에는 여전히 2백년의 세월을 필요로 한 것이다.
훗날 송학의 선구가 되었다고 하는 의미에서 한퇴지보다도 그의 문하생인 이고(李翶)의 『復性書』 쪽이 중요하다. 이것은 단편 논문이지만 독특한 인생론을 서술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것에 의하면 인간의 성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다. 받은 성대로이면 성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성인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성을 부동의 상태로 두는 것이 필요하다. 일체의 사려를 끊고 성을 정지의 상태로 두면 정(情)의 유혹을 받을 수 없다. 이것이 ’復性‘ 즉 성의 본래의 상태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퇴지 논리의 요지이다.
그리고 이고의 이 복성의 생각은 『대학』이나 『중용』 등의 유서에 기초한 것이고 유가정통의 성명론(性命論)인데 세상 사람들이 복생의 원리를 알지 못하고 노장이나 불교에 빠지는 자가 많다고 비판한다. 불교를 배척하면서 유가의 정통을 주장한 점에서는 그의 스승 한퇴지의 뒤를 이었고 또 후의 송유(宋儒)와도 일치한다. 더구나 불교를 배척하면서도 주정(主靜)을 중심에 두는 논법은 불교 특히 선학(禪學)의 영향이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또한 후세의 송유(宋儒)와 공통된 점이다.
이고는 몇 가지 점에서 송유에 유산을 남겼다. 불교나 노장을 배척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면서도 그 사상을 무의식 중에 수용한 점, 이 점은 가장 기본적인 경향이었다. ’復性‘ 혹은 ’복초(復初)‘라는 말은 본디 노장의 말이다. 후의 송유의 정주(程朱)도 이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또 성을 정하게 한다는 이고의 주장은 선정(禪定) 혹은 좌선과 통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주렴계(朱濂溪)의 ’主靜‘으로 되어서 전해진다. 이 같은 점에서 보면, 이고는 송학의 선구자라고 부르기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3) 남종선(南宗禪)에 의한 불교계의 지배
당대 후반기의 불교계를 보면 선종, 특히 혜능계의 남종선이 주류를 이루게 되고 말기부터 다음의 오대까지는 결국 남종선이 전 불교계를 독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사의 난 이후에 남종선이 북종선을 압도하게 된다. 이 때문에 북종선은 쇠퇴하여 결국은 그 전승이 끊어지게 되었다. 그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선종은 모두 혜능계의 남종선뿐이다. 그 발단을 만든 사람은 혜능 문하에 있었던 신회(神會 668~762였다. 그는 현종 때부터 북방으로 진출하여 돈오를 역설하는 남종선이야말로 달마의 정신에 충실하다고 하고 북종선은 점오라고 해서 배격하였다. 그 후 조정이 반란군에게 점령된 낙양을 다시 찾고자 했을 때 중이 되고자 지망하는 사람들로부터 향수전(香水錢0을 받아들여 군비를 돕는데 신회는 주재자의 한사람이 되어서 다액의 향수전을 모았다. 그 공으로 인해서 신회는 入門의 영광을 받았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그 후계자들은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북방 일대로 퍼졌다. 그러나 후세의 선종은 신회의 직접후계자보다도 동문의 남악(南岳)이나 청원(靑原)계통에서 커다란 발전을 보았다.
이리하여 당대에는 임제종(臨濟宗), 위앙종(潙仰宗). 조동종(曹洞宗)이 성립하였고 오대에 들어와 운문종(雲門宗), 법안종(法眼宗)이 생겼다. 이것을 오가(五家0라 부르는데 송대에 들어와 임제종에서 양기파(楊岐派)와 황용문파(黃龍門派)가 발생했는데 전자와 합해서 5가 7종이라 부른다. 바로 선종의 전성기를 맞이한 것이다. 당의 후반기에는 지식인이든 시인이든 많은 사대부가 불교에 마음을 두었는데 그들의 불교 내용은 대부분의 경우 선종적인 색채를 띄고 있다.
4) 정토 신앙의 보급과 타종(他宗)과의 융화
당나라 초에 완성을 본 정토종은 철저와 순수를 찾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다른 종파와의 협력, 융화의 길을 선택했다. 물론 선도문류(善導門流)에 의한 정토선양이 있었고 천태, 화엄, 법상을 필두로 하여 각각의 입장에서 정토사상이나 염불을 채택하는 것이 많았다. 다른 종파뿐만 아니고 정토종 내에서도 적극적으로 다른 종파에로 접근했다. 자민(慈愍), 삼장(三藏), 혜일(慧日)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혜일(680~748)은 안사의 난 이전에 죽었는데 엄밀하게는 전반기의 최후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뜻을 세워서 인도로 들어가 18년간의 수학을 한 뒤, 현종 개원(開元) 17년(719)에 돌아왔다. 그는 그의 저서 『왕생정토집』에서 칭명염불(稱名念佛)만이 빨리 성불(成佛)할 수 있는 최상의 길임을 강조했다. 이 점에서 보면 혜일도 선도류(善導流)의 염불자임을 알 수 있다. 또 혜일은 당시의 선이라는 것을 “염불자는 서방정토에 왕생할 것을 원하지만 이것도 하나의 집착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마자 깨끗하면 이 당이 그대로 정토이다.”라고 하여 정토종을 조소한 풍조에 대해서 반론을 가하고 있다. 단 그 반론은 정토종이 순수화 되지 않고 도리어 선과 협조하는 역효과를 초래했다. 혜일은 선종처럼 심성의 직관만으로 성불할 수 있다고 하여 다른 수행의 필요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여러 선은 모두 성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종파에서 말하는 수행에 편중해서 다른 여러 수행을 배척해서는 안된다. 정토종에 있어서도 염불 외에 여러 가지 수행을 닦고 이것에 의해서 왕생을 기원하는 거이 성불의 길이라고 하여 소위 제행왕생(諸行往生)의 설을 제창한 것이다. 이것은 여러 종파가 융합하는 풍조를 배경으로 해서 생긴 사상이고 후의 송나라 초기 선가(禪家)에 속한 영명연수(永明延壽)의 선정쌍수설(禪淨雙手設)의 선구를 이루는 것이다.
이처럼 전문가인 승려의 사상과는 달리 정토왕생의 사상은 널리 민중들 사이에 침투하였다. 이미 당의 초기부터 정토나 지옥의 형상을 그린 변상도(變相圖)가 민간에 유포되어 인과응보를 두려워하고 염불을 보급한 승려도 많았고 소강(少康 ?~805)처럼 남방의 절강땅에다 정토도장(淨土道場)을 차려 후선도(後善導)의 이름을 얻은 자도 있었다. 이처럼 정토종은 불교계에서는 하나의 종파로서 독립하지 못했지만 지하에서 민중들 사이에 파고 들어 확고한 세력을 넓혔다. 이와 같이 해서 당나라 말기 이후의 중국 불교는 선과 정토 두 파가 주류를 이루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였다.
5) 당대의 도교
후한말의 오두미도에서 시작한 도교는 육조시대에 들어와 그 세력을 증대시켰다. 도교는 주로 민중을 대상으로 했는데 어느 정도까지는 지식인 사이에도 수용되었다. 서성(書聖)으로 유명한 왕희지(王羲之 약307~365) 일가는 대대로 열렬한 도교 신자였다. 불교 천자로 유명한 양무제도 어느 시기까지는 불교와 함께 도교를 신봉하였다. 특히 중국 역사상 최초로 불교 배척 정책을 단행했던 북위의 태무제(太武帝)의 경우는 자신의 도교에 대한 신앙 때문에 불교를 배척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육조 시대의 도교 세력은 불교 세력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당대에 들어와 도교는 왕실이라는 강대한 세력과 결합하였다. 본디 당의 왕실은 농서(隴西) 이씨(李氏) 출신이었다고 자칭하고 있다. 농서의 이씨라면 일단 명문이라고 하지만 실은 북방 부족계 출신인 듯하다. 육조 이래 문벌존중의 풍조가 강하게 남았던 당대에는 이것은 커다란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사실임에 틀림없었다. 거기에 누군가를 이씨 성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도교 시조인 노자의 본명은 이이(李耳)로 당의 왕실과는 동성이었다. 중국에서는 동성은 피로 연결된다고 하는 의식이 강했으므로 이 노자를 당 왕실의 조상으로 해도 된다. 따라서 당왕실의 권위가 비약적으로 상승할 것이라는 동기에서 초대의 고조(재위 618~626)의 때에 노자를 당 왕실의 시조로 하여 노자묘(老子廟)를 세웠다. 다음의 태종(재위 626~649)도 왕실에 종교 서열상 도교를 앞에 두고 불교를 뒤에 두도록 하였다. 이 도선불후(道先佛後)의 서열도 조상인 노자를 우선으로 한다는 정도의 의미였을 것이다. 그런데 현종(재위712~756) 때에 갑자기 도교의 신앙이 본격화 되었다. 천태산의 도사 사마승정(司馬承楨)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도교의 면허장인 법록(法籙)을 준 것을 필두로 하여 모든 집마다 『노자 도덕경』 한 권을 갖추게 하였고 또 스스로 『도덕경』 에 주를 달았다. 더욱 노자에게 현원황제(玄元皇帝)의 존호를 주어 장안, 낙양의 여러 주에 각각 현원황제묘를 설치하여 매년 1회의 관제를 행했다. 동시에 숭현학(崇玄學)이라 하는 학교를 설치해 박사, 조교를 각 한사람 학생 100명의 정원을 두어 학생에게 『도덕경』 『장자』 『열자』 등 도가의 전적(田籍)을 배우게 하였다. 학업을 마친 자에게는 과거의 명경과에 준하는 국가 시험을 행하여 합격자는 관리로 임명했다. 이것을 도거(道擧)라 한다. 이처럼 왕실의 보호를 받았으니 당대의 도교가 융성했던 것은 당연한 것이다. 도교의 전문가 즉 도사의 사상에 대해서 살펴보면 대체로 도사중에는 무학한 사람이 많아서 볼 것이 없는 편이나 그중에 사마승정(司馬承禎)이나 오균(吳筠)등의 사상이 조금 볼 만하다.
10. 송대(宋代)의 사상
1) 송대의 사회와 신유학의 탄생
a) 오대의 전란과 문벌 귀족의 몰락
당왕조 후반기 안사의 난 이후 절도사 즉 지방 군단 사령관의 세력은 점점 증대하여 약 3백년 간에 계속되었던 당 왕조도 907년에 멸망하였고 그 후 약 70년간 5대의 난세가 출현하였다. 이 시대를 오대라 부른 것은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해서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의 5국이 서로 번갈아 흥망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항하유역 이외에도 남당이나 오월 등의 나라들이 있었으므로 오대삼국이라고도 불리운다. 바로 분열의 시대였고 전국시대였다,
이 오대 칠십 년간의 시기는 역사상 커다란 전환을 준비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육조 수당 7백 년의 문화는 문벌 귀족화한 사대부의 문화였고 본질적으로 귀족문화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그 귀족의 세력은 중당 이후 조금씩 변모를 보이게 되는데 이 오대의 전란에 의해서 완전히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오대의 군주는 모두 절도사, 즉 군인 출신이엇고 그 국내의 정치체제에 있어서도 군인지배의 색채가 압도적으로 강했다. 실력본위의 전국시대에 있어서 문벌은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하고 문관 귀족은 몰락했다. 문벌 귀족의 경제적 기반이엇던 장원은 전란 중에 대부분이 소멸되었다. 이 때문에 7백 년의 전통을 가진 귀족은 그 형태를 완전히 갖추게 되었다. 그에 따라 문화나 사상의 세계에도 커다란 전환을 가져오게 되었다.
b) 송학이 발생한 사회적 배경
오대의 뒤를 이어받은 송은 남북을 합쳐서 3백 년의 통일을 이룩하였는데 그 정치와 문화를 담당한 사대부는 이미 문벌귀족의 성격을 가지지 못하고 관리가 되어도 자식에게 세습하지 못했으며 원칙적으로 일반 서민 사이에서 등용되었다. 수당 시대부터 문벌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서 설치한 과거 제도는 송대에 들어와서부터 그 실효를 발휘하게 되었다. 일대에 한하여 관리가 되면 사대부(士大夫)도 국가를 위해 봉사한다고 하는 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정치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거기에 송대 3백 년간은 지식인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조건이 있었다. 북송은 천하를 통일하고 북동으로는 요(遼), 북서로는 서하(西夏)라는 이적(夷狄)의 2대 강국을 두고 때로는 굴욕외교를 강요받기도 하였다. 당연한 결과로 군비를 강화할 필요에 의하여 행정이나 재정의 합리화를 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명한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신법도 그러한 것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왕안석의 신법은 너무나 이상주의적이고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동시대의 사람인 사마광(司馬光)을 수령으로 하는 구법당(舊法黨)과의 대립을 초래했다. 그리하여 신법당에서 재상이 나와 정권을 잡으면 구법당의 인물을 중앙이나 지방의 관계에서 내쫓고 역으로 구법당이 천하를 잡으면 신법당을 일소하는 정변이 반복되었다. 이처럼 북송시대에는 정당의 다툼이 계속되는 상태였는데 이것이 관리인 사대부의 정치 의식을 높이고 치국평천하의 학문인 유학을 진흥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송학이라는 신유학이 생긴 것도 이 같은 사회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엇다.
더욱이 남송에 들어와 새로운 상황이 발생했다. 동북 땅에 있던 만주족의 요국에 대신해서 같은 종족 금국(金國)이 유력하게 되면서 결국 1127년 북송이 멸망했다. 이 때문에 송 왕실은 그 수도를 변경(汴京 하남성 개봉의 옛지명)에서 강남의 임안(臨安 절강성 항주의 옛지명)으로 천도하였다. 오랜 전통을 가진 중원 땅은 북경에 수도를 둔 금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가 버렸다. 더욱이 금나라의 세력은 강대하여 남송에 끊임없는 위협을 주었으므로 남송에는 현실주의파인 강화론자와 이상주의파인 주전론자와의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생겼다. 이것도 지식인의 정치적 관심을 높이는 원인이 되었다. 송학의 대성자인 주자(朱子 1130~1200)가 태어난 것도 이 시대였다.
c) 불교에서 유교에로
육조 수당의 7백 년 간이 중국불교의 황금시대였던 것은 그 시대의 주역이 정치와 문화의 당담자인 사대부와 문벌 귀족이었던 사실이었던 것에 영향이 크다. 그들은 관리이면서도 정치에 대한 관심이 적고 반대로 문학 예술이나 철학 종교와 같은 보다 개인주의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다. 바로 이점이 불교의 전성을 가져다준 근본적인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송대의 사대부는 귀족적 성격을 청산해서 그 자신의 대에 한하여 관리가 되었다. 더욱이 국가 안팍 모두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재하였고 또한 그것이 국가의 흥망에 연결되는 성질의 것이었기 때문에 사대부의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영원의 문제보다도 현실적인 문제 해결의 쪽이 한층 중요했다. 이같은 문제 의식이 송대의 사대부를 종교적인 인간에서 정치적 인간으로 전환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본디 불교는 개인 영혼의 구원을 목표로 하는 것이고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대승불교는 개인의 구제만이 아니고 중생의 제도를 목적으로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국가 이념도 어느 정도 거부하는 것이므로 현실의 정치적 관심과 거리가 먼 것이었다. 육조 이래 배불론자는 불교가 개인적 이기주의를 조장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주장했는데 그것은 불교가 개인과 인간적 종교 차원의 구원만을 원하고 천하국가의 정치, 경제적 일에 무관심한 점을 지적한 것이다. 위기의 시대에 직면한 송대의 사대부들은 바야흐로 불교에서 벗어나 치국평천하를 주장하는 유교로 복귀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송학은 불교에 대한 유교의 반격으로 생긴 결과였다.
2) 북송에서 발생한 유학
a) 주염계(周濂溪) - 무극(無極)으로서의 태극(太極), 주정(主靜)
송대의 신유학, 소위 송학은 이미 북송의 초기에서 그 태동을 보이는데 남송의 주자학에 깊은 영향을 준 사람들을 보자면 주장이정(周張二程)의 네 사람을 들어야 한다.
주염계(1017~1073)는 이름이 돈이(惇頤), 자는 무숙(茂淑0, 염계(濂溪)는 그의 고향 집 서재의 이름이다. 그는 지방의 하급 관리를 역임했는데 후에 여산의 산기슭에 은거하여 생애를 마친다. 소위 도학의 시조로 된 것은 후에 주자가 추존하여 높인 것에서 기인한다. 그의 논저로는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통서(通書)』의 단편을 들 수 있다. 그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은 옛날 도사들 사이에서 전해졌다고 하는 태극도(太極圖)에 설명을 가한 것인데 이것에 의해서 그는 천지생성의 우주론 골격을 살피고 있다. 우선 우주 만물의 근원이 되는 것으로서 ’無極‘으로서의 태극(太極)’을 들 수 있다. 무극은 극한이 없는 것, 무한한 것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노장 사상에서 보이는 용어이다. 태극은 우주의 극한에 있는 것, 그 근원이 되는 존재란 뜻이고 이것은 오경의 하나인 『역경』에서 보이는 말이다. 거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만약 우주의 근원이 되는 존재를 말하는 것이라면 태극으로 충분한 것인데 그 위에 또 무극을 부가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 자신은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아서 그 진의는 불분명하지만 주자의 해석에 의하면 태극만이라고 하면 태극이 하나의 물(物)로 되어 버려 만물의 근원이 되는 원리가 없어지게 될 위험이 있다, 따라서 태극이 무형무색의 원리인 것을 나타내기 위해 그 위에 무극의 두 글자를 씌운 것이라고 한다. 유교적인 有의 입장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의식하여 노장적인 무의 사상으로 보강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태극도설(太極圖說)』에 의하면 태극이 움직여 양기가 발생한다. 동(動)이 극에 이르면 정(靜)의 상태가 생기고 그 정에서 음기가 생긴다. 이 음양이기가 교차함에 따라 수화금목토(水火金木土) 오행(五行)의 氣가 생기고 거기에서 만물이 생성한다. 이것을 그려서 표현하면 태극(太極) - 동정(動靜) - 음양(陰陽) - 오행(五行) - 만물(萬物)이라 하는 순서로 된다. 이처럼 만물은 모두 태극에서 파생하고 있는 것이므로 만물은 각각의 안에 태극을 가지고 있는 것이 된다. 그 이전에 우주 생성설은 전통적인 음양오행설을 근간으로 하여 여기에 『역』의 태극이나 『예기』 악기편(樂記篇)의 동정의 설을 조합시킨 것으로 그다지 독창적인 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주염계의 특색은 이 우주 생성설에서 ‘주정무욕(主靜無欲)’의 윤리설을 도출한 것에 있다.
인간도 만물의 하나이고 만물과 똑같은 근원에서 태어나 만물과 똑같은 구조를 갖는다. 이것은 중국 전통적인 생각이고 주염계도 또 여기에 따른다. 따라서 인간도 만물과 똑같이 그 안에 태극을 가지고 있다. 단지 인간의 내에 있는 태극은 『예기』 중용편(中庸篇)에 따라 이것을 ‘성(誠)’이라고 해도 된다. 요컨대 인간의 마음의 순수한 상태가 ‘성(誠)’이고 태극(太極)인 것이다. 태극에는 아직 ‘동(動)이 없는 것이므로 ’정(靜)‘이고 ’무위(無爲)‘이다. 그러나 그 정인 마음의 태극이 외물과 접할 때 여기에 동이 생긴다. 이 정에서 동으로 옮기는 미묘한 때가 기(幾)로 이때에 비로서 악과 선이 분리된다. 따라서 ’기(幾)‘의 때에 힘써 ’중정(中正)‘을 지킬 필요가 있다. ’중정‘으로 되기 위해서는 ’정‘을 주로 하고 ’무욕(無欲)‘이어야 한다.
이처럼 주염계는 태극을 근원으로 하는 우주생성설을 주장하여 그 태극으로 돌아가는 길로서 ’주정무욕(主靜無欲)‘을 설하였다. 그 용어나 발상에 있어서는 극히 노장적이고 또 정을 강조하는 점에 있어서는 당시의 풍조인 좌선(坐禪)의 유행을 생각하게 한다. 다만 노장이나 선이 ’정‘에 의해서 선악을 초월하고자 한 것에 대해서 어디까지나 선을 지키고 악을 제거하는 것에 안목을 둔 점은 유가의 영역을 지켰다고 할 수 있다.
b) 정명도(程明道) - 天理, 萬物 - 體의 仁
정명도(程明道 1032~1055)는 이름이 호(顥), 자는 백순(伯淳), 명도(明道)는 그 호이다. 아우 이천(伊川)과 함께 이정자(二程子)라고 불리며 주자의 철학에 끼친 영향이 극히 컸다. 단 형제의 성격이 상반되는 점이 있어서 형인 명도는 운후관화(溫厚寬和)하고 아우 이천은 엄격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철학은 공통된 점이 적지 않은데 그 성격 차이가 자연히 두 사람간의 철학의 차이로 나타난다.
명도는 주염계가 태극을 천지의 근원으로 한 것에 대해서, ’천리로써 이것에 대신하였다. 명도는 “나의 학문은 선인에게서 받은 것이지만, 다만 천리의 두 글자만큼은 스스로 체득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송학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理’의 개념에 여기에 비로소 그 형태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명도의 이는 정이천이나 주자의 그것과 성격을 달리한다. 정이천이나 주자의 이는 氣에 대립하는 차겁고 엄격한 성격의 것이지만 정명도의 이는 기도 표용하는 넓고 따듯함을 갖춘 것이다.
천리는 천지가 가진 법칙이며 도리인데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은 『역경』의 “천지는 커다란 덕을 낳는다.”고 하는 말이다. 하늘의 이치는 만물을 생육해서 끊임없이 생생한 작용 속에서 드러내는 자연 현상에 내재하여 생생한 작용은 인간 개인 내부에서 충족된 자기 확인 안에서 규정될 수 있는 것이므로 이것을 ‘仁’이라고 할 수 있다. 천지의 대덕인 생생한 인은 인간을 필두로 하는 만물 속에 흐르고 있다. 사람으로서의 道는 자기 속에 있는 만물일체의 仁을 지각하여 이것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처럼 만물일체가 천리라고 하면 천리의 속에는 모든 만물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된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악도 천리 속에 있는 것이다. ‘사(事)에 선악이 있는 것은 모두 천리이다. 천리속의 물에는 미와 악이 있는데 부동(不同)이 있는 것이 물의 實性이고 당연이다.“라고 한다. 정명도의 생각으로는 악은 선에 대립하는 독자성을 가진 것이 아니다. ”천하의 선악은 모두 천지의 이치이다. 악이라 하는 것은 그것이 본래적으로 악인 것이 아니고 정도나 양을 달리하는 것을 말한다. 소위 악은 ’불완전한 선‘인 것이다.
이 생각은 그대로 인간의 본성론에도 적용된다. 性은 인간이 태어나 지니고 것이고 天에서 받은 氣이다. 인간이 받은 기에는 본디 선과 악이 있다. 선인 것은 물론 성이지만 악인 것이라도 성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성의 선악은 물의 청탁과 같은 것이고 악한 성도 깨끗하게 하면 곧 선한 성으로 돌아간다. 선악은 대립하는 두가지가 아니고 단순한 청탁의 상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같은 입장에 선 정명도는 수양법에 있어서도 극히 온화한 방법을 취한다. 만물일체의 仁은 이미 내몸에 갖추고 있는 것이므로 이것을 자각하고 실행한다고 해도 궁색, 사도로부터 몸을 속박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단지 서서히 자기 안에 있는 인을 기르는 것 만으로 충분하다. 이것이 인의 자득이다.
또 안에 있는 성품을 외부 사물의 유혹에서 지킨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특유의 견해를 언급하고 있다. 성인의 커다란 마음은 어떠한 외적 사물이 온다고 해도 이것을 거부하지 않고 이것을 받아들인다. 다만 일정한 사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사사로운 정념을 가지지 않을 뿐이다. 헛되이 내외의 구별을 해서 외부 사물의 유혹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본디 외부 사물에 대해서 희노애락의 정념을 가진 것은 인간 성품의 자연이다. 단지 노할 것은 노하고 기뻐할 것은 기뻐할 뿐이다. 성인은 천지의 마음을 자신의 내면적 뿌리로 하는 것이다. 천지는 사심을 가지고 선악의 차별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일체를 그대로 포용한다. 만약 선한 자만을 친하고 불선하자를 멀리한다고 하면 천지의 바끙로 벗어나는 것이 많게 될 것이다.
이상에서 서술한 것처럼 만물일체의 인이라 하는 사상을 근본으로 하여 천지 이치를 설명하면서도 이것을 인간 욕심에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고 선악이나 내외의 차별을 벗어나는 것으로 해석하여 그 수양법에 있어서도 미덕을 서서히 기르는 것에 중점을 두는 정명도의 온화한 태도는 아우인 정이천이나 주자와 매우 뜻을 달리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도리어 주자와 동시대의 육상산이나 명나라 왕양명의 철학에 통하는 점이 적지 않다.
朱子의 철학은 2程子의 사상을 상당히 많이 포함하고 있으며 이정자를 매우 존경하고 있는데 사상적으로는 伊川의 계보를 보다 많이 계승하고 있다. 明道에 대해서는 “그 학문은 모든 것을 포함한 원만함을 가지는데 그 입장이 너무나 높아서 초학자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제자인 사상채(謝上蔡), 유안부(遊安夫), 양귀산(楊龜山) 등은 모두 禪學에 들어가 버렸다.”고 서술하고 있다. 明道는 당시의 사대부가 그러했던 것처럼 어려서부터 선학과의 교유가 있었다. 일찍이 禪寺에 가서 그 식사의 의례의 장중함을 보고 “三代의 위의(威儀)가 모두 여기에 있다.”고 찬탄하였다고 한다. 물론 宋學의 사람이었고 선학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지만 무의식 중에 그 영향을 받은 것은 피할 수 없었다. 明道의 학문이 陸象山이나 王陽明의 학문으로 결부된 것은 주관주의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心學‘의 경향이 강하다는 특색, 이것이 명도가 陸, 王과 결부된 점이다.
c) 정이천(程伊川) - 性卽理, 理氣二元論
정이천(1033~1107)은 이름이 이(頤), 자는 정숙(正叔), 이천은 그의 호이다. 정명도의 한 살 아래 동생인데 형이 45세에 죽었는데 비하여 75세까지 살았고 또 형은 낮은 관직에서 시종한 데에 비해 정이천은 천자의 시강(侍講)이라는 고관에 이르러 그 문인의 수도 많고 학문의 영역도 넓었다, 정치적인 입장은 소위 구법당에 속하는데 구법당내에서도 정이천을 수령으로 하는 낙당(洛黨)과 문장가 소식을 수령으로 하는 촉당(蜀黨)과의 파벌항쟁이 일어나 파란 속에 생을 마쳤다. 그 성격도 형인 정명도와는 달리 추상과 같이 엄하였다고 한다. 이 성격의 차이가 자연히 학문의 내용 차이로 나타났다. 정이천 철학의 근보은 ’성즉리(性卽理)‘이다. 형인 정명도도 인간의 본성을 천지 이치의 현시라 하였으므로 그런 의미에서 성즉리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의 경우에는 이와 기로 엄격히 양분된다. 여기에 정이천 철학의 특색이 있으며 이것이 나중에 주자학의 근간으로 된다.
정이천에 의하면 기는 『역경』에서 말하는 ’형이하‘인 것, 즉 형태가 있는 것, 물질적인 것이다. 만물은 이 기를 소재로 해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만물은 기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기의 근거인 이가 존재한다. 이는 ’형이상‘의 것이고 형태가 없는데 유형의 기의 안에서 기의 근거로 되고 그 본체로 되어 있는 것이다.
기에는 음약의 두 종류가 있고 『역경』에도 ’일음일양‘ 이것을 도라 한다고 하는데 정이천에 의하면 음양은 기이고, 그대로는 도, 즉 이는 아니다. 음양의 근거가 도이고 이이다. 기는 존재하는 것이지만 이는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다. 이같은 이와 기화의 구별은 곧 이기이원론에도 발전하는 것을 예상케 하는 것으로 주자학은 바로 그러한 철학적 사색을 가지게 된다.
이 이는 일사일물(一事一物)의 내에 내재하는 것인데 특히 인간 속에 있는 이를 ’성‘이라고 부른다. ’사물에 있어서는 이라 하고 사람에 있어서는 성이라 한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고 여기에 ’성즉리‘의 주장이 나타난다.
인간의 본성은 이치이고 이성(理性)이다. 그러나 이는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기에 부수되는 것이므로 현실 인간의 마음은 이와 기를 겸비하고 있다. 이 경우 기는 신체적 요소를 의미한다. 기는 이와는 다르고 음양이나 청탁 등의 속성을 갖추고 있다. 이 경우 마음이 정지의 상태에 있을 때에는 성이고 이이고, 선이지만 일단 사려의 작용을 하게 되면 거기에 기의 요소가 나타나고 희노애락의 정념을 낳고 선악의 차가 생긴다. 기가 청정하면 선으로 되지만 기가 탁하면 악으로 된다. 이에따라 어떻게 하면 인간의 성인 이를 순수하게 하고 완전하게 하는 것이 가능한가가 문제도 된다. 앞에서 주염계는 ’주정(主靜)‘을 윤리학의 근본으로 한다. 그것은 마음의 본성인 태극이 動으로 옮기고자 할 때 선악이 나뉘어진다고 했기 때문이다. 정이천은 이를 보다 유교적인 말인 ’경(敬)‘을 사용한다. 경은 신(愼)하다 경(警)하다 등의 뜻을 가진 말이다. 정명도 자신의 말에 의하면 ’사(邪)를 막는 도‘이고 또 이것을 ’주일무적(主一無適)‘ 이라고도 하였다. 주일은 일사에 전념하는 것이고 무적은 타사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이 말도 다음에 주자가 애용하는 것이 되었다.
그런데 인격을 완전한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경(敬) 내지 주일무적이라 하는 주관적인 방법으로만 충분한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분명히 이는 천지 만물을 통해서 하나이며 내 마음의 안에 있는 이를 깨달으면 동시에 만물의 이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마음의 이성이 완전하고 순수한 경우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현실의 인간은 신체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기의 영향을 받고 선악을 낳는다. 말하자면 인간의 이성은 불완전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 주관이 가진 불완전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외부 세계의 이를 알 필요가 있다. 거기에 경이라 하는 주관적인 방법 외에 객관적인 사물의 이를 궁구히 할 방법이 필요하게 된다. 정이천에 의하면 『대학』의 ’격물치지‘라 하는 말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여기에 정이천의 철학은 단순한 주관의 내적 반성에 한정되지 않고 밖에 있는 객관적인 사물의 이를 궁구히 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주자학이 노장이나 신학과 본질적으로 다른 유교 철학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이 정이천의 ’격물치지(格物致知 모든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어 앎에 이름‘의 설을 계승하였기 때문이다. 그 근본적인 동기는 인간주관의 불완전함을 자각한 것에 있다.
그러나 사물의 이를 궁구히 한다고 해도 사물은 무한한 것이므로 이것을 추구하고 있는 사이에 가장 중요한 자기의 본성을 잃어버리고마는 두려움이 있다. 이 의문은 정이천의 당시에도 있었고 또 주자학의 반성자 속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 우려는 쓸데없는 기우이다. 정이천에 의하면 사물의 지식이 어느 정도까지 쌓이게 되면 ’갑자기 자신으로부터 관통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경지를 경험하게 된다.
남종선처럼 처음부터 돈오를 구할 수는 없지만 어느 단계에 도달하면 거기에 가까울 수도 있다. 이 점도 주자에 의해 계승되어서 ’일단 넓게 되어 관통한다.‘ 라는 말로 표현된다.
만약 사물의 이의 탐구가 자연계까지 미친다고 하면 혹은 자연 과학의 맹아를 준비했을런 지도 모른다. 정이천에 의하면 책을 읽고 의리를 규명하여 정당한 판단이나 대처를 하는 것 등이 이의 탐구에 해당한다. 그리고 도덕에 관계없는 사물에 탐닉하는 것은 완물상지(玩物喪志) 즉 사물을 아낌으로써 뜻을 잃는다고 하여 피하였다. 객관적인 세계에 발을 밟고 들어선다 해도 그것은 도학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정이천이 格物窮理를 제창하여 객관의 세계에 관심을 향했던 것은 심학적인 경향이 강하였던 宋學을 역사의 세계, 정치의 세계와 결부시킨다고 하는 매우 획기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써 높이 평가되는 것이다. 이것에 의해 유학은 논리학임과 동시에 정치학이라고 하는 영역으로 돌아와 노장이나 불교에서 독립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다만 伊川은 그 통로를 여는데에 그치고 그 발전은 남송의 주자를 기다려야 했다. 『』
d) 장횡거(張橫渠) 氣一元論, 민포물여(民胞(태보 포)物與)
장횡거(1020~1077), 이름은 재(載), 자는 자후(子厚), 횡거는 출생지에 의한 호이다. 처음에는 노장이나 불교에 출입했지만 곧 유학에 전념했다. 그 친척인 두 정씨 형제를 만나 크게 그 학문에 심복한 적이 있었다. 후에 진사과의 시험에 급제해서 관리가 되었는데 왕안석과 의견이 맞지 않자 은퇴해서 향리로 돌아가 독서와 문민의 교육에 전념하면서 생애를 마쳤다. 저서로는 『정몽(正蒙』과 그 철학관을 축소한 『서명(西銘』의 단편등이 있다. 정이천은 『서명(西銘』을 맹자 이후 처음 보는 책이라고 칭찬하고 주자도 이것과 『정몽』의 일부에 주해를 하고 있다.
우주의 근원이 되는 것을 주염계는 태극, 정명도는 천리라 했지만 그에 있어서는 ’태허(太虛)‘였다. 태허는 또 ’허(虛)‘ 와 ’허공(虛空)‘으로도 불렸다. 그것은 전우주의 공간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 태허는 단순한 공간, 즉 무는 아니다. 왜냐하면 허는 마땅히 기로 충만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태허가 기에 의해서 충만되어 있다고 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횡거에 의하면 태허 그대로 기인 것이다. 기는 무형무색이고 그 집합이 허이다. 기가 존재하지 않는 공간, 즉 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자가 ’유는 무에서 생긴다.‘ 라고 하였던 것은 잘못이다.
이 태허를 구성하고 있는 기는 집합에 의해서 만물을 형성한다. 그 만쿨은 또 흩어져서 원래의 태허로 돌아간다. 이것은 필연의 법칙이고 어느 무엇도 좌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강하게 유형의 것에 집착하는 것은 잘못임과 동시에 모두가 적멸로 돌아간다고 하는 불교는 이러한 순환의 법칙을 알지 못하는 것으므로 이 또한 잘못이다. 기가 모인 것이 내 신체이라고 하면, 흩어진 기도 또 내 신체이라고 해야 한다. 죽음을 멸망이라고 볼 필요는 없다. 여기에 횡거의 사생관이 나타나있는데 장자가 생사를 한 기운의 집합과 분산으로 설명한 것과 매우 유사하다. 아마도 그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런데 태허는 천, 또는 천지라고도 불리운다. 양자는 무한한 기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는 것이므로 동일한 것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이 천지의 사이에 채워져 있는 기에 의해서 구성된 것이 자기 신체이다. 이 천지의 기를 통수하는 사명을 가진 것이 자기 성이다. 이처럼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특수한 지위를 부여받고 있지만 그러나 똑같은 천지의 기를 받고 있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거기에 “민은 동포이고 물은 함께 한다.”라 하는 대담한 발연이 나타난다. 이것은 신분의 차별을 초월한 동포애, 평등애를 가리키는 것으로 되어 ’민포물여(民胞物與)’의 말로 보통 쓰이게 되었다. 도 그 호소하는 길이 끊겨버린 내 형제들이다.”라고 하여 구체의 이유를 형제애에서 구하고 있는 것이 이색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우고, 백성을 위해 命을 세운다. 성인의 학문을 이으며 후세를 위해 태평을 연다.’라고 하는 유명한 말이 있는데 이것이 그의 구세제민의 뜻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횡거의 학문은 이처럼 오로지 기의 위에 세워져있다. 그러나 두 정자와의 친교가 있었던 횡거가 이에 대해서 완전히 무관심하였던 것은 아니고 사실 또 이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언급한 것이 있다. 예컨대 ‘만물은 모두 이이다. 만약 궁구히 하는 것을 알지 못하면, 꿈속에서 일생을 보내는 것 같다. 선종은 이를 궁구히 함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고 또 ‘인의예지는 사랑의 이이다.“라고 하는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그 책에는 이를 체계적으로 서술한 경우는 없고 단지 우발적으로 나타나 있음에 불과하다. 아마도 그는 이를 ’기가 지닌 법칙‘정도의 의미로 풀고 기에 대립하는 독자의 원리로써 중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의 철학이 기를 중심으로 하였던 점은 의심할 바 없고 과장해서 말하자면 기일원론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3) 南宋의 朱子學
a) 송학의 대성자 朱子
북송 중엽부터 주염계, 장횡거, 정명도, 정이천의 소위 주장이정의 제자를 대표로 하는 신유학이 발생하여 이것을 후세에 송학이라고 불렀다. 이 송학을 집대성하여 이것을 장대한 규모를 가진 사상체계로써 완성시닌 것은 남송의 주자였다. 소위 주자학의 내용을 개개의 요소로 분해해서 보면, 이미 주장이정이 그 선구를 이룬 것이 많고 주자의 독창으로 이룬 것은 의외로 적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영역은 송학을 조직화하고 체계화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자가 독창적인 사상가였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선구가 된 주장이정의 학문은 어느 것이나 단편적인 어록의 형태로 전해졌을 뿐이었으며 이것을 조직해서 체계화한다고하는 것은 보통이 아닌 독창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주자학은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학, 역사학, 경학 등의 모든 분야에 걸치고 더욱 이러한 것들을 유기적으로 연속시키는 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이것에 의해서 유학은 비로소 완전한 체계를 갖춘 학문이 되었고 종래의 지식인을 지배하였던 불교를 대신하여 개인의 안심입명의 근거를 제공하과 동시에 천하국가의 지도원리를 확립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역사적인 의미는 절대적인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자(朱子 1130~1200)는 이름이 희(喜), 자는 원회(元會), 호는 자양(紫陽), 회암(晦庵), 회옹(晦翁), 고정(考亭) 등을 사용했다. 본적지는 강서성의 동북부에 해당하는 무원현(婺源縣)(옛 이름은 신안)인데 출생지는 아버지인 주송이 지방관으로 부임하였던 복건성의 우계현(尤溪縣)이다. 아버지인 주송은 신유학인 송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바로 이점이 아들인 주자의 학문방향을 결정하게 되었다. 주자는 19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로 되고 각지의 지방관으로 되었으며 마지막에서는 영종황제의 시강(侍講)의 요직에 오르지만 권신인 한탁주(韓侂冑)의 그릇됨을 상주하였기 때문에 겨우 40일 만에 시강의 직에서 쫓겨난다. 하야한 뒤에도 한 번의 박해로 그치지 않고 광원 2년(1196), 주자를 수령으로 하는 학문에 ’위학(僞學)‘의 판정이 내려지고 위학 역당의 이름으로 죄를 받은 자가 59인에 이르렀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경원위학(慶元僞學)의 금(禁)‘이라고 부른다. 주자학 수난의 시기이다. 4년 후 광원 6년(1200)에 주자는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후에 주자학은 국가의 정통학문으로써 공인을 받게 되지만 그것은 생전의 주자가 꿈조차 꾸지 못했던 일인 것이다.
그러나 주자가 미관말직으로 청빈한 생활을 보냈던 때부터 그 명성을 사모해서 그의 가르침을 구하려는 자가 많았고 만년에 주자학은 당세의 유행으로 되었다. 경원연간에 위학의 금지가 내려지게 되자 그 난에 연좌될 것을 두려워하여 급히 스승을 바꾸고 혹은 의복을 바꾸어 시중으로 떠돌아 다니며 스스로 도학의 무리가 아닌 것을 증명하고 자하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수 년 후 주자의 명예회복이 실현되고 주자학도 융성을 맞이했다. 그러나 주자학이 과거 시험의 표준 해석으로 쓰여지고 국가의 가르침으로 채용되게 된 것은 원나라 때의 인종(仁宗)연간이며 주자 사후 백여년 경이다.
그 후 명청 6백년간 주자학은 국교로서의 지위를 점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이나 일본으로 건너가서 관학으로도 채용되었다. 한국에서는 중국의 당말부터 송원에 이르는 시기동안 계속된 고려시대에 이미 유교가 과거 과목으로 채용되었지만 불교의 융성에 눌려서 부진의 상태였는데 중국의 명왕조와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조선와조는 주자학을 국교로서 정하여 불교의 탄압을 가하였기 때문에 유불의 세력은 완전히 역전하게 되었다. 주자학이 조선의 문화에 남긴 영향은 깊고 컷다. 일본의 애도막부도 주자학을 관학으로 채용하여 그 결과 지식계급의 대부분이 불교를 벗어나 유학에 쏠리게 되었다.
b) 理氣 이원론
주자 철학의 근본은 한마디로 말하면 理이다. 이 때문에 주자학을 일명 이학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주자학은 현실의 세계를 모두 이의 일원론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고 이에 대립하는 기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주자학은 이기이원론의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인은 기일원론 세계관의 입장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천지 만물이 모두 한기운 또는 음양이기에 의해서 구성된다고 하는 세계관의 기원은 오래되었고 음양오행설도 그 발전으로서 나타난 사상이었다. 북송 장횡거의 기 철학도 또 그 연장 선 상에 놓을 수 있다. 주자는 이 장횡거의 철학에 깊은 공감을 가졌다. 그러나 주자의 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장횡거의 기일원론이 아니고 두 정자 특히 아우인 정이천의 이기이원론이었다. 그러면 이라 하는 개념은 어떠한 경과를 거쳐 주자학의 중심으로 된 것이었을까? 송학에서 처음으로 이의 개념을 도입한 정명도는 ’天理의 두 글자는 나 스스로 체득해 왔다.‘고 했던 것처럼 송학 이전의 유학에서 이라 하는 말 내지 개념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천리의 두자는 『장자』에서 비로소 보여졌고 그 후에도 주로 도가류의 책에서 사용되었다. 아래로 내려와 당나라 때의 불교에 이르러 화엄종이나 법상종드에 있어서 ’사(事)‘에 대한 ’이‘에 중요한 의미가 부여되어 事와 理의 관계가 왕성하게 논의 되었다. 본디 송학은 노장사상이나 불교의 영향을 깊게 받은 것이므로 두 정자의 이기설이 화엄종의 理사상에서 힌트를 얻었던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이기이원의 사상에 대해서는 이미 정이천편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주자의 생각도 이것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천지만물은 모두 기라 불리는 미립자상태의 물질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다. 여기가지는 전통적인 중국인의 세계관이다. 그러나 정이천은 만물은 기만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보통 만물은 기를 소재로해서 구성되어 있지만 그 기는 반드시 그 근저에 이를 갖추고 있다. 이는 기를 기답게 하는 근거이다. 기가 근본적인 현상이라고 하면 이는 그 현상의 배후에 있는 무형의 본체이다. 정이천의 이기이원의 생각은 그대로 주자에게 받아들여진다.
정이천의 이기이원론는 기초 위에 주자는 독자적인 우주론 인간론, 실천론을 구축해 간 것이다.
c) 우주생성론
주자의 우주생성론은 주염계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다. 주염계는 만물의 근원인 태극에서 음양의 기를 낳고 그 두 기가 만물을 구성한다고 설명햇다. 주자는 이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거기에 중대한 수정을 가한다. 즉 태극을 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주자에 의하면 태극은 이가 극치에 이름의 의미하는 것이고 요컨대 이 그것을 가르킨다. 따라서 주염계가 ’태극은 음양을 낳는다.”라 했던 것은 이가 기를 낳는 것을 말한 것이다.
거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주 생성의 과정에 있어서 이기 어느 쪽이 시간적으로 선행하는가 하는 점이다. 전체로서 주자의 이기설에서 보면 ‘이가 있으면 기가 있다.’고 하는 것처럼 이는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고 항상 기와 함께 있는 것이다. 역으로 ‘기가 있는 곳에 반드시 이가 있다.’고 하는 것같이 항상 동시동소에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염계가 태극설을 설명함에 있어서 ‘이가 기를 낳는다’라 했고 또 다른 곳에서 ‘아직 천지가 없었을 때, 먼저 이 ’이‘가 있었다라 하여 이의 선행을 말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주자의 생각으로 이는 기의 존재의 근거가 되는 것이고 논리적 내지 존재론적으로 선행하는 것을 강조했던 것인데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간적인 선행을 설명한 것이다. 주자 본래의 입장으로 말하자면 이와 기는 각각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따라서 시간적인 선행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의 극치인 태극에서 생긴 음양의 두 기는 만물을 구성하는데 음양 두 기에는 이가 불가분하게 포함되어 있는 것이므로 만물은 모두 기와 이의 양자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만물은 각각 이, 즉 태극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또 문제가 되는 것은 이는 만물을 통해서 하나인 것인데 이것이 만물이라고 부리는 것처럼 변화와 차별이 생기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정이천은 이것을 ’이일만수(理一萬殊)‘라 하였다. 요컨대 이는 하나이지만 그로부터 만가지 다른 것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인 ’이‘를 갖춘 ’물‘ 이 왜 만가지로 다른 것일가? 그것은 이와 불가분으로 결합되어 있는 기의 성질에 의한다. 만물은 이에 있어서 동일하지만 기에 의해서 만가지 변화를 가진 것으로 된다. 즉 기에는 음양정조(陰陽精粗)에 차별이 있어서 바로 이것이 만물이 가진 여러 가지 개성으로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이와같이 해서 우주의 만물은 이기이원의 결합에서 생겨 육성되는 것이다.
d) 理氣에 의한 인간관, 윤리설 - 格物窮理
주자의 인간관 및 그로부터 생긴 윤리설은 정이천의 방향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이천에 의하면 만물 속에는 理가 내재하는데 특히 인간 대에 있는 이를 ’성‘이라부른다 그 성은 이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인간은 신체를 가진 존재이므로 그 성은 이와 함께 기의 요소도 포함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정이천은 현실 인간의 성을 이로서의 성, 즉 ’본연의 성‘과 기의 요소를 가진 ’기질의 성‘으로 구분하였다. 본연의 성은 순수한 천리이지만 기는 음양이나 정조청탁(精粗淸濁)을 가진 것이므로 기질의 성도 자연적으로 차이를 낳지 않을 수 없다.
그것만이 아니고 본연의 성은 정지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외물과 접촉할 수 없지만 기질의 성은 움직여서 외물과 교섭을 가지는 것이므로 그로부터 불가피하게 정(情) 내지 인욕(人欲)이 생기게 된다. 이것을 그대로 방임하면 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과의 차이는 크게 되고 인간은 그 본래의 형태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거기에서 기질의 성을 어떻게해서 본연의 성에 접근시킬 것인가 하는 실천적인 방법이 문제로 된다. 이 방법에는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과의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주관적인 방법은 내적 생활에 의한 것이다. 기질의 성은 외물에 접촉하는 것에 의해서 정이나 욕심을 낳는 것이므로 이것을 가능한 한 본연의 성, 즉 이의 정지상태에서 가깝게 할 필요가 있다. 이 대문에 주염계는 주정(主靜)을 역설하고 있는데 정이천은 그것이 노장사상이나 선학의 ’허적(虛寂)에 빠질 위험성이 있을까 두려워서 보다 유교적인 ‘경(敬)’의 말을 사용한다. 또 이것을 ‘주일무적(主一無適)’이라고도 하였다. 모두 그대로 주자에 의해서 답습되고 있다.
또 하나의 객관적인 방법으로는 ‘격물치지’ 또는 ‘격물궁리’라 불리는 것이 있다. 이것은 『대학』의 ‘치지격물(致知格物)’이라 하는 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인간의 안에 있는 이 본연의 성은 그대로 완전한 것이고 천리 그대로야야 하지만 그러나 현실 인간의 성은 동시에 기질의 성을 포함하여 불완전한 상태에 놓여진다. 이 불완전한 성을 완전한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내성적이고 주관적인 방법에 의한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일단 나의 밖으로 빠져나와 밖에 있는 이를 궁구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내안에 있는 이를 정확히 아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나의 이도 외물의 이도, 이인 것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나의 이는 인간욕심의 私에 빠져있기 때문에 알기 어렵다. 물론 밖의 세계에 있는 일사일물(一私一物)의 이를 확실히하는 쪽이 용이하고 확실하다. 외부 사물의 이를 아는 것은 곧 그대로 내 안에 있는 이를 아는 것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오로지 안에 틀어 박히고자 하는 노장 철학이나 선학의 주관주의 벽을 깨부수고 외부 인륜의 세계, 정치의 세계에의 통로를 여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것은 또 본래의 유학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이상은 모두 정이천의 사상이고 주자는 이것을 충실히 계승하여 단지 이것을 정밀상세하게 하는데에 그쳤다. 다만 주자가 정이천과 다른 가장 큰 차이는 정이천이 격물궁리를 제창하면서도 그 실천적 모습을 거의 남기지 않은 것에 반해서 주자는 이것을 최대의 규모로 실현한 점이다. 정이천은 문인이 기록한 어록을 제외하고서 저서로 전해지는 것은 『이천역전(伊川易傳』 중 일부일 뿐이지만 주자는 『사서오경』의 거의 전반에 걸쳐 주해를 하여 유교 경전에 철학적인 체계를 부여하는 대사업을 수행했다. 주자학이 신유학으로서 확립되어 왕조지배의 이데올로기로써의 지위를 점하게 된 것은 여기에 최대의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 주자학의 사명과 운명
육조 수당의 지식인은 개인으로서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근거는 노장이나 불교에서 구하고 세간의 도덕이나 정치의 원리는 전통적인 유교에 의한다고 하는 일종의 불연속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더욱이 그들은 정치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유교보다도 불교에 마음이 이끌리는 경향이 강했다. 바로 이점이 육조수당의 유학이 부진한 근본적인 원인이ᅟᅥᆻ다. 이 불연속의 상태를 일거에 해소하여 개인에 있어서의 안심입명의 종교적 요구와 인의충효라 하는 사회적 도덕과를 동일 원리 위에 두는 것에 성공한 것이 주자학이다.
주자학은 이기이원론인데 이에 압도적인 우세를 둔 것이었으므로 이지상주의 였다고 할 수 있다. 주자학을 理學이라고 부른 것도 그 때문이다. 이는 천지우주의 본질인 전리임과 동시에 인간의 내면에 내재해서 성으로 된다. 인간에 내재하는 이는 인의예지라하는 형으로 발현해 국가나 사회로 향해서 넓혀간다. 천리는 개인 생명의 근원임과 동시에 그대로 사회적인 도덕으로 되고 천하국가를 다스리는 원리로 된다. 거기에는 약간의 단절이나 불연속도 없다. 참으로 완전한 종합적인 철학 체계였다.
그러나 이 주자학의 내에도 약점과 결함이 숨겨 있었다. 그것은 주자가 생존하던 당시에는 그렇게 눈에 띄지 않았지만 시대적 상황이 변화됨에 따라 점점 커져갔고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첫 번째는 주자학이 너무나 완결성을 갖춘 쳘학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원, 명, 청의 7 백년을 통해서 주자학에는 본질적인 발전이 없었고 주자학의 신봉자는 모두 그 아류에 지나지 않는 참담한 상태가 돼버렸다. 도리어 독창적인 사상은 오로지 주자학의 비판자 중에서 생기는 것이 실상이었다.
두 번째로 주자학은 본질적으로 구질서의 보수체계 유지에의 지향성을 가진 점이다. 이것은 단지 주자학에 한정되지 않고 일반적으로 유학이 가진 체질이지만 이라 하는 강력한 원리를 갖춘 주자학에 있어서는 그것이 한층 심하게 될 우려가 있었다. 유교의 보수주의는 예에의해서 대표된다. 예는 사회적인 ‘관습’인 것이고 그 중심적인 기능은 군신부자의 신분질서를 유지한 것에 있다. 주자학에 있어서 예는 그대로 이이고 체제의 유지는 이가 명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점이 주자학이 조선이나 일본에서 관학으로 채용된 최대의 이유이다. 그것은 주자학에 영광을 가져다 주었지만 곧 시세의 변화와 함께 사라져 버릴 운명을 약속하는 길도 되었다.
세 번째로 모든 지상주의가 그러한 것처럼 주자학도 또 엄격주의의 경향을 가지는 것을 면할 수 없었다. 천리와 인간 욕구와의 대립이 그 단적인 예이다. 인간 욕구는 기이고 어디까지나 이의 지배하에 두어야 한다. 주자학의 정신이 침투한 에도시대의 “의리와 인정”의 대립은 소위 천리와 인간 욕구의 일본판인데 일본에서는 인정이 여전히 의리에 저항 할만큼의 힘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주자가 존경해 마지않는 정이천은 “굶어 죽게 된 과부의 재혼이 허락될 수 없다. 굶어죽는 일은 극히 사소하고 절조를 잃는 일은 극히 크다”라고 답하고 있다. 이 때문에 명나라 이후에는 貞夫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풍습이 일반화하였다고 한다. 주자학을 엄하게 비판한 청조의 대진(戴震)은 “사람이 법에 위반해서 죽는 경우에는 슬퍼하는 자가 있지만 理를 위반해서 죽는 경우에는 슬퍼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라고 하였다. 이는 법보다도 냉혹 무자비하다. 만약 인정의 자연을 존중하는 것이 근대정신의 표현이라고 한다면 근대의 시작과 함께 그 형태가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이 주자학의 운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4) 주자학의 대립자 육상산(陸象山)
a) 육상산의 心學- 禪學에의 접근
주자와 동시대로 일찍이 주자와 대립하는 유력한 사상가가 나타났다. 육상산이 바로 그 사람이다. 육상산(1139~1192)의 이름은 구연(九淵), 자는 자정(子靜), 象山은 호이다. 강서성 금계현의 사람으로 그의 두 형도 학자로 유명하고 상산과 함께 세육이라고 칭해졌다. 상산은 과거에 급제해서 각지의 지방관을 역임했는데 일찍이 귀향해서 강단을 설치해서 강학을 시작하였을 때는 모인 사람들이 천여명에 달했다. 학문상의 입장은 주자와 다르고 일찍이 아호사(鵝湖寺)에서 주자와의 토론회를 개최한 적이 있는데 양자가 의견 일치는 결국 보지 못했다. 이것은 ‘아호(鵝湖)의 會’로 세상에 유명하다. 그 학문은 강서성을 중심으로 일시 성했지만 주자학의 성황에는 미치지 못하고 주자학에 압도되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육상산의 학문이 다시 각광을 받은 것은 3백년 후의 왕양명(王陽明)에 의해였다.
육상산과 주자의 대립을 낳은 근본 원인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견해의 차이에 있었다. 주자는 현실의 마음을 불완전한 것으로 보았다. 보통 인간의 마음은 이를 가지고 있지만 신체적인 요소인 기의 제약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마음을 본연의 성(이)과 기질의 성(기)으로 양분하는데 혹은 성(이)과 정(기)으로 분별한다. 이것을 단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마음을 천리와 인간 욕구로 양분한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 욕구를 없애고 천리를 보존하는 것에 의해 마음을 순수한 이의 상태로 돌이키는 것이 그 이상이었다.
그런데 육상산은 인간의 마음을 그대로 완전한 것이라고 하고 마음은 그대로 이라고 하였다. 소위 心卽理의 설이었다. ‘하늘이 나에게 부여해 준 것이 즉 이 마음이다. 사람은 모두 마음을 가지지만 그 마음은 모두 이를 갖추고 있다. 마음은 그대로 이이다.’ 따라서 상산은 마음을 이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만약 마음을 도심(道心이로써의 마음)과 인심(人心이기를 섞은 마음)으로 이분하게 되면 마음이 두 개인 것이 된다.
마음이 그대로 이라고 하면 그 이는 천리의 이에 통한다. 내 마음의 이를 아는 것은 그대로 천지의 이를 아는 것이다. 따라서 천지의 이를 알기 위해서 외부 세계의 지식을 구할 필요는 없고 내 마음 안에 있는 이를 파악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같은 입장에서 보면 주자학의 격물궁리(格物窮理) 즉 외계의 일사일물(一事一物)의 이를 궁구하는 것은 완전히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무의미 할뿐만 아니라 잡다한 사물의 세계에 미혹되어 가장 중요한 마음의 이를 구하는 것을 잃어 버리게 된다.
이처럼 밖의 세계에 있는 이의 궁리를 부정하는 육상산은 유교의 경전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가? 내 마음의 불완전함을 의식했던 주자는 독서에 의해서 외부 세계의 이를 널리 구해 이것에 의해서 내 마음의 이를 완전한 것으로 하고자 했다. 독서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유교의 경전을 읽는 것이다. 이 때문에 주자는 사서오경의 세밀앟ㄴ 주석을 썼다. 이에 반해서 육상산은 경서의 주를 전혀 쓰지 않았다. 요컨대 경서는 내마음의 주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육상산도 유가의 사람이었으므로 선종처럼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제창하지는 않았고 경서를 읽는 것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성인의 책으로 된 것이어서 내 마음을 본으로해서 이해하여 여기에 취사선택을 가해 그 진위를 파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예컨대 『예기』의 악기편에 천리와 인간 욕구를 들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이 악기편의 말은 노자의 사상을 근본으로 한 것이다.”고 하고 순수한 유가의 경전에는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육상산의 탁견이며 오늘날에는 상식으로 되어있다.
이처럼 마음은 그대로 이고 완전한 것이므로 외부로부터 아무 것도 부가할 필요는 없다. 학문은 내 마음을 배우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심학이다. 명나라 때의 왕양명은 『상산전집(象山全集)』의 서문에 “성인의 학문은 심학이다.”라고 서술했는데 육상산의 학문은 바로 심학이었다. 그것은 주자학이 理學인 것에 대응하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을 입각점으로 하는 육상산의 순수 주관주의 입장은 똑같이 심에 불설을 구한 佛心宗의 선학에 더한층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주자는 격물궁리를 제창하는 것에 의해 외계에의 통로를 열고 송학에 객관주의의 요소를 가해 이것에 의해서 선학의 영향에서 탈출하는 것에 성공한다. 상산은 이 주자의 애쓴 노력을 무시하고 유학은 재차 선학으로 되돌린 것이다. 송대의 유자들 사이에 얼마나 깊이 선학의 기풍이 침투하였던 가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육상산의 학이 선학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불교인 선종이 개인의 깨달음 내지 구제를 궁극의 목적으로 하는 것에 대해서 유학인 육상산의 학이 일상 도덕이나 천하 국가의 정치에 지향하는 점에 있다. 이 때문에 육상산은 ‘儒는 公과 義를 중시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佛은 私의 理를 중시하여 출세하는 것을 찾는다.’라고 하여 선학을 매우 배척하고 있다. 주자학이 궁리의 번잡함을 싫어하고 확실하고 간명한 심학의 방향을 선택한 것도 그것이 사회적 실천의 장에 나서는 것을 용이하게 한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의미에서 육상산의 학도 역시 유학의 본질을 잃었던 것은 아니다.
11. 元, 明의 사상
1) 원대의 사상계
몽고 초원의 유목민이었던 몽고인은 남하해서 중국의 북부로 들어가 결국 화북을 지배하였던 금나라를 멸하고 나아가서는 남송을 병합하는 것에 성공해서 천하의 통일을 실현했다. 국호를 원이라 하고 수도를 북경에 두었다. 원나라는 후의 만주족의 청조와는 달리 쉽게 중국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위력으로써 중국인을 제압하는 정책을 취했다. 관리를 임명하는 경우에도 높은 지위는 몽고인에게 한정되었고 중국인은 하급관리의 신분을 감수했다. 이 때문에 전통적인 고등 문과 시험인 과거도 중단된 채로 중국인의 사대부는 불우한 처지로 전락하였다. 원대의 사상계가 부진으로 끝난 것은 이와같은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상화에서도 남송 이래의 주자학은 명목으로나마 사대부 사이에 행하여졌고 원나라 중엽 인종(仁宗)의 연우(延祐) 원년(1314)에 이르러 과거의 제도가 부활됨과 동시에 주자의 주에 의한 『사서』와 『오경』이 출제의 원전으로 되었다. 이것은 주자학이 원나라의 관학으로서 채용되었던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자학의 역사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렇다하더라도 원대 백년간에는 특별히 취급을 논 할만한 사상가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2) 원대의 사상가 – 주자학의 로고스에서 양명학의 파토스에로
원나라를 쓰러뜨린 명왕조는 백년 만에 중국인의 중국을 회복하였다. 특히 황하를 중심으로 하는 화북땅에 대해서 보면 실로 250년 만에 동북 오랑캐의 지배에서 해방된 것이 된다. 더욱이 명나라 3백 년간의 말기를 제외하고 북방 민족의 위협을 바은 적이 적었기 때문에 그 태평함은 문화의 전성기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물론 문화적 성숙이 지나쳐 퇴폐에 바진 점이 명조의 파멸과 재차 북방 민족의 청조 지배를 초래한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문화의 난숙은 사상의 세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대충 말하자면 주지주의 학문이 쇠퇴하고 정의를 주로 하는 학문이 환영받게 된 점을 들 수있다. 로고스에서 파토스에로의 이행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격물궁리의 주자학에 대신해서 지행합일의 양명학이 나타나고 더욱이 그 양명학이 해체해서 양명학 좌파와 자연주의를 낳아 퇴폐와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 명나라는 원나라의 뒤를 이어서 주자학을 그대로 관학으로 하여 과거 시험에도 주자학을 채용했다. 특히 삼대의 천자인 성조 영락제는 과거의 표준해석을 가르치는 『성리대전』 『사고대전』 『오경대전』을 지었다. 이것은 주자의 주해를 더욱 상세하게 해석한 것으로 이것까지 읽으면 다른 책을 볼 필요가 없게 된다. 이 대전이 나오고 나서는 ‘자유연구의 여지가 없게 되거나, 주자학의 발전이 막히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이 종래 일반의 견해였다. 그런데 명, 청사 연구의 전문가 중에 ‘그것은 시대를 알지 못하는 단편적인 주장이다’라고 하여 그 시대의 학문적 경향이 유교의 경전을 연구하는 학문에서 벗어났던 것을 지적하는 의견이 있다. 이 설에 따라 명대의 풍조를 개관하면
명나라의 국도는 처음 남경에 설치되었다가 곧 북방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명대문화의 중심지는 수도 북경이 아니고 소주(蘇州)를 중심으로 하는 강남지방이었다. 이것은 원조 지배를 싫어한 지식인이 수도 북경을 버리고서 강남에 거주하던 전통이 있었던 점과 당시 이미 강남이 산업의 선진지대로 되었던 것 등에 기인한다. 강남에는 산업에 의해 부를 획득한 부상이 많았고 서민의 신분이면서도 문학이나 예술을 애호해 스스로 작가가 되었던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들 부상은 사대부 지식이느이 좋은 후원자도 되어 현란한 강남문화를 꽃피우게 하였다. 더욱이 태평무사가 계속되자 이윽고 강남의 풍조는 북방의 수도까지 미쳐 천자조차 그 속에 빠져버리게 되었다.
이 같은 풍조는 아직 창업의 정신이 남아 있었던 명조의 초기에도 일찌기 나타나고 있다. 5대 선종(宣宗)때 주자학의 서적 『대학연의』를 읽고서 수향해야 할 것을 상주한 신하가 있었는데 황제는 노해서 이를 엄벌에 처했다고 한다. 무미건조하고 융통성이 없는 도학에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인간미가 풍부한 정감을 사랑한 명대인의 성격이 이미 여기에도 보인다. 독같은 시기에 최고학부의 장관인 국자감 제주였던 이자면(李自勉)의 상서에 “요즈음 『전등신화』라 일컬어지는 괴담의 책이 나타나 시정의 경박한 무리들이 다투어 이것을 암송할 뿐만 아니라 유사까지 정학을 버리고 날마다 여기에 열중해서 담론의 소재로 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명대에는 『수호전』 『삼국지연의』 『서유기』 『금병매』 등의 소설류가 차차 나타나는데 이들 모두 이 같은 풍조 속에 생긴 것이다. 송대 중기 사람인 왕양명이 청년 시대에 이몽양(李夢陽)을 필두로 하는 칠인의 고문사학 문장에 열중하거나 신비색 짙은 도교나 불교에 빠졌다는 것은 왕양명 개인의 성격에 의한다기보다는 그것이 사회 일반의 풍조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파멸형의 양명학자 이탁오(李卓吾)가 세상에 나온 것은 가정(嘉靖)에서 만력(萬曆)까지 명대 문화의 난숙기, 퇴폐기 때였고 『금병매』를 필두로 하는 음서가 속출한 시대였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면 그들이 가진 개성은 그대로 시대의 풍조를 대표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리하여 시대의 풍조는 주지주의, 이성주의의 주자학을 벗어나 정의를 동력으로 하는 양명학에로 향하는 기운이었다.
3) 왕양명(王陽明)
a) 용장(龍場)의 一悟 – 모든 理는 내 心中에 있다.
주자학의 격물궁리의 주지주의를 부정하고 간단 명료한 심학을 제창한 것은 멀리 남송의 육상산에서 비롯하고 명대에 들어와서는 진백사(陳白沙)(이름은 헌장(獻章), 누일재(婁一齋) 이름은 양(諒) 등이 있고 주자학에서 벗어나 육상산의 학문에 경도하였다. 이들이 양명학의 선구가 되었다.
왕양명(1472~1528)은 이름이 수인(守仁), 양명은 그 호이다. 명나라 중기에 절강성 소흥부(紹興府)의 동쪽에 해당하는 여요현(余姚縣)에서 태어났다. 그 아버지 華는 수석으로 진사과에 급제하여 남경이부상서의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이었다. 왕양명은 18세때 누일재를 스승으로 해서 주자학을 배우지만 도교나 불교에도 마음을 기울인 적도 있었다. 28세에 진사과에 급제하여 병부주사의 관직에 올랐다. 인종의 정덕원년(1506) 환관인 유근이 조정에서 전횡을 하자 이를 탄핵해서 죄를 얻게된 정의의 선비를 변호하는 상주를 하였기 때문에 화를 입어서 멀리 귀주성(貴州省)의 용장역의 역장(驛場)으로 좌천되었다.
당시 이 땅은 남국 서남의 모퉁이에 해당하고 오랑캐가 거주하는 문화의 불모지대였다. 생활의 고통은 물론 읽어야 할 책조차도 없었다. 만약 주자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격물궁리를 위해 독서가 인간 형성에 있어서 불가결의 조건이라고 한다면 여기에서는 인간으로 될 길조차 닫혀져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왕양명은 여러 가지 고민 끝에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은 현재 내가 가진 마음만으로 충부하다고 하는 것이다. 모든 이치는 내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고 마음의 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내 마음의 이를 다하는 것이야 말로 그대로 만물의 이치를 아는 것이다. 이 심즉리를 깨달은 것이 소위 ‘용장 일오’라고 불리는 것이고 그 후 양명학 전개의 근본이 된 것이었다. 이때가 왕양명이 38세 되던 때였다. 환관인 유근이 실각하자 재차 조정으로 돌아와 중앙이나 지방의 관을 역임하여 행정과 군사에 걸친 유능한 능력을 발휘했다. 이 때에는 각지에 농민의 봉기가 빈번히 일어나는데 양명은 이르는 곳마다 이를 진정시켰다. “산중의 적을 깨부수기는 쉬워도 마음안의 적을 깨부수기는 어렵다.”라 함은 왕양명의 말이지만 이것은 문자 그대로 실천 속에서 얻어진 것이다. 어릴 때부터 폐질환을 가진 왕양명이 동분서주 격동의 생활에 견뎌 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 기력과 의지에 의한 것 같다. 후에 육군대신에 상당하는 남경병부상서의 영예로운 직위에 임명되지만 곧 고향으로 돌아와 강학의 생활을 즐겼다. 그러나 광서성에 심각한 반란이 일어나 재차 조정에서 진정의 명을 받고 사명을 수행했는데 도중에 병이 악화되어 도중에 사망했다.
b) 일원론의 관철 - 氣即理, 心卽理. 無內外, 知行合一
용장일오(龍場一悟)에 의해서 깨닫게된 왕양명의 철학의 근본은 ‘심즉리’라 하는 것에 있다. 이것은 주자학의 ‘심’에 대한 견해와는 어떠한 점에서 다른 것일까?
주자는 인간의 마음이 이와 기의 양분된 것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하엿다. 이는 순정으로 선인 것이지만, 기는 정조청탁의 성질을 가진 것이므로 이의 본래 상태를 잃을 가능성을 갖는다. 이 때문에 주자는 마음을 이분해서 본연의 성(이)과 기질의 성(기, 정, 욕)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기질의 성을 본연의 성에 가깝게 하기 위한 공부로써 주관적으로 경을 주로하고 객관적으로 외물의 이를 궁구하는 것에 의해 내외 양면에서 마음의 불완전함을 보충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왕양명은 이 같은 주자의 이원적인 사고법을 완전히 거부한다. 첫째로 이는 기에 구비된 조리(條理)이고 기의 밖에 따로 이가 있지는 않다. 따라서 이와 기는 일체이고 한 사물의 양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좀 더 명백히 말하자면 이즉기이다.
두 번째로 이와 기가 동일한 것이라고 하면 주자처럼 마음을 이와 기로 양분하여 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으로 나누는 것은 잘못이다. 마음은 어디까지나 하나인 것이고 현실의 인간의 마음은 그대로이다. 세 번째로 주자처럼 마음의 이치, 외물의 이의 구별을 세워 이를 내외로 양분하는 것도 잘못이다. 이는 하나인 것이고 안과 밖을 구별할 수 없다. 내 마음의 이는 그대로 외부 사물의 이치이기도 하다. 마음 밖의 이를 구할 필요는 없고 모두 내 마음의 이에 의해서 다한다. 따라서 『대학』의 격물치지는 주자가 말하는 것처럼 외계의 사물의 이를 검토하는 것에 의해서 지를 완성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사물의 형태를 바로잡고 부정한 것을 바르게 하는 것에 의해서 마음의 앎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한다고 하는 의미이다. 주자처럼 마음 밖의 이치를 구해서 독서할 필요는 없다. 내 마음의 이마저 분명하게 되면 육상산이 말하는 것처럼 “육경이 모두 내 마음의 주석이다.” 라고 하는 것으로 된다.
네 번째로 주자학에서는 우선 이를 알고, 그 후에 비로소 이것을 실행에 옮긴다고 하는 순서를 지켜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소위 선지후행의 설이다. 여기에 대해서 왕양명은 지와 행을 양분하는 것에 반대한다. 단순히 들은 지식은 참된 지식이 아니다. 앎은 행위로 되는 것에 의해서 비로소 참된 지식으로 된다. 이것이 소위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설이다.
이처럼 왕양명의 철학은 일원에 의해서 관철되고 있다. 그 일원의 근본이 되는 것은 마음이었으므로 그것은 남송 육상산의 계보로 연결되는 ‘심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왕양명의 학문과 육상산의 학문을 합쳐서, ‘육왕학’이라 불리울 정도였다.
그러면 마음의 일원론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간단 명료하게 말하는 것이고 실천에 결합하기 쉬어야 하는 것이다. 주자학이 마음과 사물의 이원론이었기 때문에 실천으로 옮기기 전에 객관적인 사물의 이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주자학이 주지주의라 하면 양명학은 행동주의이고 감정과 의지를 주로 하는 것이었다.
주자는 50년의 관직을 가졌다 해도 실무를 수반한 관직에 있었던 것은 10년도 되지 않는다. 이것과는 반대로 양명은 행정과 군사의 격무 사이에 생애를 마쳤다. 주자가 보다 학구적이고 양명이 간단 명료한 행동의 학을 부르짖은 것은 무엇보다 개인적인 환경의 차이에 의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왕양명의 반주지주의가 무엇보다도 情과 意를 중시하는 입장은 명대 사회의 풍조에 기초한 것임은 이미 전술한 대로이다.
c) 靜座에서 사상마련(事上磨鍊)에로 – 선종에서의 이탈
이와같이 양명학은 마음이 명하는대로 실천에 옮기면 좋다고 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왕양명도 역시 현실 인간의 마음을 그대로 절대 선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악한 일을 행하는 인간이 많다고 하는 현실은 왕양명이라 할지라도 무시할 수 없었다. 왜 이여야 할 마음에 부조리가 생기었는가? 양명은 그것이 ‘사욕(私欲)’에 의한 것이라 하였다. 본래의 인간의 마음은 ‘이’이고 선이지만, 거기에 사욕이 생기는 것에 의해서 본심이 어두워지고 비뚤어져서 악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욕은 어디에서 생긴 것일까? 왕양명은 침묵하고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사욕의 발생원을 철저하게 추구하면 주자처럼 마음을 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으로 이분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어 왕양명이 가장 싫어하는 이원론을 불러 일으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출처는 불명확하지만 어쨌든 왕양명은 사욕의 존재를 인정한다. 사욕이 존재하는 이상 이것을 제거하는 공부가 필요하다. 처음 왕양명은 문인들에게 ‘정좌(靜座)’를 시켰다. 정좌는 북송이래 송나라 유학자들의 대부분이 실행한 것인데 물론 이것은 좌선에서 본보기를 취한 것이었다. 따라서 정좌를 행하는 문인들 중에는 정을 즐겨 행동에서 멀어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거기에 왕양명은 새로이 ‘사상마련(事上磨鍊)’을 역설하였다. 사상마련은 사실상에 있어서 마음을 연마하는 것이다. 현실의 생활상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곤란에 직면할 때 이것을 극복하는 과정에 있어서 마음을 연마한다고 하는 것이다.
본디 심학이 불심종(佛心宗)인 선종에 가까운 것임은 전에도 서술한대로이지만 수양법으로서 정좌를 사용하면 점점 선종에 접근하는 것을 면할 수 없다. 왕양명은 정좌를 버리고 사상마련을 역설하였다. 이것은 양명학이 선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의 표현가운데 하나이다. ‘우리 유학은 마음을 닦는 경우에도 사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과 반대로 불교는 허무와 적막에 빠져 세간과 교섭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불교가 천하를 다스릴 수 없는 이유이다’라 하는 양명의 말은 그 간의 사정을 잘 말하고 있다.
d) 치양지(致良知) - 자연주의에의 지향
양명은 후기가 되어서 ‘양지(良知)’ ‘치양지(致良知)’를 강조하게 되었다. 양지양능이라 하는 것은 『맹자』의 말을 그대로 사용하여 인간성의 자연에 뿌리를 둔 양지를 길러서 이것을 완전히 발휘하는 것, 즉 ‘양지에 이른다.’는 것을 도덕심의 중심에 두고자 한 것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양지를 역설하면서부터 왕양명은 자유로히 대범해지게 되었다. 양명 스스로가 ‘내가 44세 45세가 되기까지는 조금 근후(謹厚)에 힘씀을 싫어하였다. 그러나 양지의 존재를 알게 되고서부터 자신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마음대로 행하여 조금도 숨기는 것이 없었다. 소위 미친자의 심경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어느 더운 여름 날, 문인들이 스스 앞에서 부채를 사용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고 있는 것을 본 왕양명은 ‘부채를 사용해도 좋다.’라고 명하였다.d 문인이 사양하자 양명은 ‘성인의 도라 하는 것은 그 같이 고루하게 사람을 속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도학자 풍의 태도는 쓸데없는 것이다. 논어에도 공자가 제자들에게 가르치려고 할 때, 증점(曾点)은 태연하게 거문고를 울렸다. 바로 비친자의 태도이다. 만약 정이천 등이 이것을 보았으면 매우 노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증점에게 노하기는커녕 도리어 증점에게 칭찬을 하였다. 얼마나 커다란 기상이었는가? 성인의 교육은 사람을 속박해서 일정한 평균형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고 미친자에게도 미친자 나를대로의 장점을 인정해서 이것을 성취시키고자 한 것이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왜 양지설이 왕양명의 기상을 크게 한 것일까? 그것은 양지가 인간의 자연에 갗추어져 있는 것이고 다른 특별한 수단을 가하지 않아도 이미 완성하고 있는 것, ‘현성(現成)’인 것이기때문이었다. 거기에는 수양이나 공부의 필요는 전혀 없게 된다. 다만 경우에 따라서 사욕이 이 양지를 은폐할 가능성이 남아 있으므로 ‘양지에 이른다’ 요컨대 양지를 바르게 육성하는 공부가 필요하다. 그러나 양지는 자연히 발현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기르는 것도 역시 자연의 도에 의해야 한다. 송대의 도학자들에게서 보이는 것 같은 인위적이고 엄격한 수양법은 도리어 양지를 질식시키게 할 것이다. 왕양명의 말 속에 양지와 함께 자연이라 하는 말이 많이 쓰이는 것은 후반기 왕양명의 철학이 점차로 자연주의에로 경사하여 간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왕양명의 자연주의는 곧 양명좌파에 의해서 계승되고 철저화되었다.
이 자연주의에의 경사와 아울러 인간적인 감정이 양지의 작용으로써 긍정되고 있는 사실을 들지 않으면 않된다. ‘희노애욕 등의 칠정은 인심이 당연히 갖추고 있는 것이다. 칠정이 그 자연의 발로대로 다른다면 이것은 모두 양지의 작용이므로 양지를 선, 칠정을 악이라 하는 것은 잘못이다. 다만 칠정이 일정한 것에 집착하면 그것은 욕심으로 되고 양지를 은폐하는 것으로 된다.’라 한다. 또 문인이 ‘부친의 사망 등 대사를 만나서, 곡을 하는 것은 마음의 본체인 즐거움을 손상하는 것은 아닙니까?’ 라고 질문했을 때 왕양명은 ‘그때에는 대성통곡을 한 번한 뒤 또 본래의 즐거움의 경지로 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하다.’라고 답하고 있다. 왕양명의 인간 감정에 대한 태도가 주지주의인 송의 도학자들과 다른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도 情과 意志를 기조로 하는 명대의 풍조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e) 만가성인(滿街聖人) – 양명학의 민중화
또 이 양지설은 북송 정명도의 ‘만물일체의 인’으로 결함되는 것에 의해서 종래 그 인격을 무시하였던 민중의 인격을 존중하여 양명학이라 하는 유학을 민중들 사이에 포교하였다고 하는 전대 미문의 유행의 기틀을 짠 것이다.
정명도의 만물일체의 인은 인이 널리 만물을 포함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었으므로 물론 민중과 고락을 함께하는 것과 연결된 것이다. 민의 고통은 그대로 나의 고통이고 만민을 구제하는 것이 하늘의 사명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민중존중의 사상이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그친다면 맹자이래의 전통적인 유가사상이고 특별히 혁명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것이 양지설과 결합하면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양지는 만인이 태어나면서 선천적으로 갖추고 있는 것이고 어떠한 학문도 없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예외는 아니다. ‘양지양능을 가진 점에서는 범인과 성인이 모두 완전히 같다. 다만 성인은 양지에 이른데 대해서 범인은 그렇지 못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범인과 똑같은 것을 同德이라 하고 범용한 인간들과 다른 것을 이단고 한다.’등의 말은 모두 이 근거에서 나오고 있다. 종래의 유가는 민중의 고통만을 대상으로 하였을 뿐으로 이것을 동일수준에 놓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왕양명으로서는 치양지(致良知)를 완성한 성인을 별격으로 해서 양지를 가진 점에서는 사대부와 서민의 차별은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어느 날 문인 왕심재가 외출하고서 돌아왔다. 왕양명이 ‘외출하고서 무엇을 보았는가?’라고 묻자 심재는 ‘거리에 가득찬 사람이 모두 성인인 것을 보고 왔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이 만가성인의 설은 양명학 좌파사람들에 의해서 문자 그대로 실천되었다. 본디 왕심재는 상인이었으며 염전의 노동자에서 출세한 인물이었다.
물론 왕양명 문인의 대부분은 사대부의 신분을 가진 자였지만 왕양명의 직계 제자들에 의해 다시 전파될 때에는 상인, 농부, 직인이 적지 않게 포함되었고 더욱 포함되었고 더욱 그 중에는 각지의 농촌에 양명학의 포교를 위해 순회하는 자가 나타났다. 이처럼 유학으로서 전혀 뜻밖의 현상은 양명학의 독자성에서 생긴 것이라고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은 명나라 시대의 강남 지방의 경제적 번영이고 서민 계급의 생활수준의 향상이었다.
양명학이 가진 장 단점은 좌파, 특히 이탁오를 보면 자연히 명백하게 될 것이다.
4) 양명학의 좌파
a) 양명학의 좌파와 우파
왕양명 사후 그의 제자는 온건파와 급진파로 이분되는 경향이 점차 강해졌다. 만약 온건파를 우파, 급진파를 좌파라 부른다면 양명학의 특징은 매우 극단적으로 좌파에서 잘 나타난다. 우파는 세간의 비판을 심하게 받음에 따라서 점점 보수 온건의 경향을 강화해 그중에서 주자학에 타협하는 자 조차 있었다.
b) 왕룡계(王龍溪 1498~1583)
왕룡계의 이름은 기(畿), 자는 여중(汝中), 용계는 그 호이다. 출생지는 절강성 음현(陰顯)으로 왕양명의 향리에 가깝다. 진사과에 낙제한 뒤, 양명의 문하로 배워 으뜸가는 수제자가 되었다. 왕양명의 사후 재차 진사과를 보아 급제하여 관직에 오르지만 위학의 비난을 받고서 관직을 사퇴했다. 그 후 40년간은 강남의 각지에서 강학하여 사대부를 비롯해 농, 공, 상을 업으로 하는 자를 많이 모았다. 그가 죽은 것은 86세로 생애의 태반은 가정, 안력의 명대문화의 난숙기 퇴폐기에 해당한다.
왕룡계는 스승의 양지설을 따라 이것을 철저화시키는 것에 주력하였다. 만약 양지가 인간이 태어나면서 자연히 갖추어져 있는 것이라면 모든 사람들은 현재 이미 완성된 형태로 이것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현성양지(現成良知)’여야 한다. 현재 이미 완성해 있다고 하면 여기에 손을 가할 필요는 전혀 없을 것이다. 안에 양지가 있는 것을 자각하면 그 인간은 곧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 어떠한 수양도 공부도 필요없다. 단지 한 가지 필요한 것은 내 마음 속에 양지가 있는 것을 믿는 마음, 신심이다. 여기에 이르러 그의 주장은 양지교라고도 불러야 할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후에 유종주(劉宗周)가 비평한 것처럼, 왕룡계의 양지는 선종의 ‘佛性’ 그대로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그는 선종에 상당한 관심과 동감을 가졌다. 그는 똑같은 양명학이면서도 수양 공부의 필요를 인정하는 것을 북종선의 점오설에 비유하고 스스로의 입장을 남종선을 개척한 6대조 혜능의 돈오설에 비유하고 있다. 용계는 『삼교당기(三敎堂記)』의 한 글월을 남기고 있고 그 중에 ‘세상의 유자들은 노장이나 불교를 이단으로 배척하는 자가 많은데 이것은 잘못이다. 양지는 만물을 포용하는 것이고 유불도의 세교를 통하는 것이다. 오로지 자타의 다름과 같음을 세우는 자야 말로 유자의 이단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스승 왕양명의 철학에 잠재하였던 선종적 경향이 여기에 선명히 그 형태를 나타낸 것이다.
이 왕룔계의 양지설에서 보이는 간명함, 어떠한 수양공부도 필요하지 않고 양지인 채로 행동하면 좋다고 하는 간이함이 대중을 얻은 이유였다. 그는 태주의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의 사상은 태주학파(泰州學派)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c) 泰州學派 - 양명학의 대중 동원
양명학좌파의 중심이 된 것은 태주학파이다. 태주는 강소성 양주의 동쪽에 있고 염업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가 번영한 땅이었다. 왕심재(王心齋 1483~1540)의 이름은 간(艮), 심재는 그 호로 태주에서 태어나 이 학파의 시조가 되었다. 염전의 노동자에서 입신해서 상인으로 되고 왕양명의 문하로 들어갔다. 아마도 중국에 있어서 상인 학자 제1호일 것이다. 스승 왕양명에게 ‘만가성인’을 설한 것도 그였다. 그도 왕룡계와 마찬가지로 현성양지의 입장을 취한 자이고 ‘양지’는 자연의 이치이고 인력을 가해서 조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다만 그는 독서나 경험에 의한 학문의 필요를 긍정하여 ’양지를 근본으로 하고 전언왕행(前言往行)을 많이 알아서 덕을 기른다‘는 것을 역설했던 것에서 양명학으로서는 온건파의 경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출신관계도 있어서 그는 실천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고 나아가서 대중들 사이에 도를 전도했다. 그의 문전에서 ’道는 노유귀천(老幼貴賤)에 관계없이 배우고자 하면 전한다.‘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그가 태주학파의 시조로 되었던 이유였다. 이 때문에 그 아래에 모인 농공상인의 사람들은 천여인에 이르렀다. 특히 벼 수확을 마친 농한기에는 농촌의 사람들을 모아서 학문을 담론하여 하나의 촌을 끝마치면 다음 촌으로 이동하였는데 촌민들은 대열을 이루어 전방에서 노래를 부르면 뒤에서 따라 불러 그 가락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고 한다. 불교의 법회라면 몰라도 유교로서는 미증유의 대중동원이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대중동원이 바로 위정자들이 양명하게 대한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게 된 원인이 되었다. 중국 농민 반란의 대부분은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고 백련교의 난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양명학의 유행이 마치 백련교와 같은 사교위학의 횡행으로 본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d) 태주학파의 지식인 – 자연주의에의 경사
같은 태주학파의 계보에 속하는 사대부 중에는 특색이 잇는 사상가가 속출하였다. 왕심재의 학문을 전한 자로 서파석(徐波石)이 있고 서파석의 문하에서 안산농(이름은 釸)이 나왔다. 이 사람의 사상의 근본은 ’인간의 성은 밝은 진주와 같은 것이고 조금도 이그러지지 않은 완전한 것이다. 따라서 이 성 그대로 행하려면 오로지 자연에 맡기면 된다. 바로 이것이 도이다. 선유가 제창한 도리나 격식은 도의 장애가 될 뿐이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경서도 잘 읽지 못하였다고 하므로 어쩌면 서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안산농에게서 배운 사람으로 하심은(何心隱)과 나근계(羅近溪)가 있고 전자는 생원의 경력을 가지며 후자는 진사에서 참정의 관직에 이르렀다. 하심은(1517~1579)은 스승 안산농이 그러했던 것처럼 북송의 장횡거가 제창한 ’민포물여‘의 설에 공감하고 사람의 곤경을 보면 살신해서 이를 구해야 한다고 의기를 높였다. 그는 상하 군신의 도와붕우의 도와는 동등한 가치를 가졌다고 주장하여 실제로 이를 행동으로 옮겼다. 이 때문에 ’그의 학문은 공자를 배워도 그의 행위는 협(挾)에 유사하다.‘라고 일컬어진 것처럼 협객의 정신으로 충만했다. 그러나 이와 달리 그 학설에는 자연적 욕망의 긍정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북송의 주염계가 ’무욕‘을 설한 것에 반대해 ’仁‘을 욕구하는 것도 또한 욕구가 아닌가?’ ‘재화를 욕심내고 색을 욕심내는 것을 제외하고 무엇을 욕심내고자 하는가/“ 일족의 화합을 욕심내지 않고 무엇을 욕심내고자 하는가?”라고 하여 욕망이 인간 생활에 불가결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욕망은 필요한 것이지만 다만 그 욕망은 개인적인 것이어서는 안되고 공적인 것이어야 한다. 여기에 욕망긍정의 설과 협객의 정신이 모순되지 않고 결합하는 근거이다.
나근계(羅近溪 1515~1588)는 이름이 여방(汝芳), 강서 성 낭성 현 사람이다. 스승 안산농이 투옥되었을 때는 그 구출에 노력했다. 그는 스승 왕심재의 ’양지는 자연의 법칙이다.‘라고 하는 주장에 따르고 더욱 이것을 갓난아기의 마음’에 결부시킨다. 갓난 아기의 마음에는 자연히 친애의 정이 갖춰져 있는데 이 친애의 정은 즉 인이고 이 인을 양육하면 자연히 의예지신(義禮知信)의 도덕으로 되어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 ‘갓난 아이의 마음’은 이탁오의 ‘동심(童心)’ 설을 준비한 것이라고 보이는데 거기에 일관해서 흐르고 있는 것은 자연주의의 기조였다. 이 양명학좌파의 자연주의를 궁극에까지 철저화 시킨 것이 즉 이탁오였다.
5) 이탁오 – 양명학의 자멸
a) 李卓吾의 생애
이탁오(1527~1602)는 이름이 지(贄), 탁오는 그의 호이다. 이탁오의 생애가 가정(嘉靖), 만력(萬曆)의 명왕조문화의 난숙기에서 퇴폐기에 해당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출생지는 개항장으로서 무역이 버영하엿던 천주부(泉州府)였다. 조상은 무역상으로 부유하였지만 탁오의 아버지는 가숙(家塾)을 연 독서인으로 이슬람교도였다고 한다. 탁오는 26세 때 향시에 합격하여 30세기경부터 미관 말직을 역임하는 데 54세 때 운남성 요안부(姚安府)의 지부(知府)를 끝으로 해서 관직 생활을 끝냈다. 그 후 잠시 호북성의 마성현(麻城縣)에 해당하는 지불원(芝佛院)이라 하는 절에 십수년간 거주해 거사의 생활을 보냈다. 이 사이에 『분서(焚書)』를 저술하는데 이것이 당시의 정치권력을 배경으로 하는 도학가의 박해를 초래하여 지불원을 나와 각지를 전전하면서 도망의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 최후에 북경 가까이의 통주에 기거하였을 때 체포되어서 북경의 옥에 들어가 만력 3년 옥중에서 자살하였다. 이때가 76세였다. 그가 양명학에 접한 것은 46세 때로 친구로부터 왕룡계의 말을 듣고 왕양명의 책을 본 것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후 왕심재의 아들 동애를 스승으로 삼아서 배웠다. 그는 왕룡계나 하심은에게 깊게 심복하였으므로 그 학문이 왕양명 좌파 특히 태주학파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은 의심할 바 없다.
b) 童心의 說 - 자연주의에의 철저
왕양명의 양지설이 자연주의에의 경향을 가진 것은 전술하였다. 양지는 인간이 태어나자 마자 자연히 갖추어지는 도덕심이다. 왕양면의 경우 양지는 양육해서 완성시킬 것, 즉 ‘치양지(致良知)’를 필요로한다. 그런데 좌파의 왕룡계는 ‘현성양지(現成良知)’ 요컨대 양지는 현재 이미 완성된 형태로 사람들의 마음에 갖추어져 있음을 주장했다. 따라서 양지에는 수양이나 공부 등의 인위를 가할 필요는 없고 그대로 자연에 맡기면 된다는 것이다. 양명학좌파에 자연주의의 흐름이 일관해서 존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좌파의 자연주의를 철저화한 것이 이탁오의 입장이다. 그에게는 ‘동심’의 설이 있는데 그 근본적인 입장을 잘 말해주고 있다. “동심이라 함은 眞心이다. 그것은 일체의 빌어쓰는 물건을 가지지 않는 순진한 것이고 최초 일념의 본심이다. 이 진심을 갖추는 것이 진인이다. 인간의 처음 마음은 모두 동심이지만 이 동심은 사라지기 쉬운 것이다. 이목에서 견문의 지식이 들어가 더욱 독서를 통해서 도리를 알면 이들 외부로부터의 빌어쓴 물건이 동심을 잃게 한다.” “육경이나 논어, 맹자의 책 등은 반드시 성인의 말을 그대로 충실히 전한 것에 한정되어 있지는 않다. 예컨대 그렇다 할지라도 일시의 교화의 필요에서 나온 것이고 곧 만세의 지론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서는 도학자의 구실로 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진인으로 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도피장소를 제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동심의 말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
더욱 나아가 문학에 대해서 그는 말한다. “만약 그것이 동심의 발로라면 어떠한 시대의 문장이라고 해도 각각 높은 가치를 가져야 한다. 따라서 시는 반드시 시경이나 문선에 한정할 필요는 없고 문장은 반드시 선진(先秦)시대의 것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육조의 문장 보다 내려와서 전기소설, 언본(院本), 잡극(芝居), 서상기, 수호전 등 어느 것이나 우수한 문학이고 시대의 선후로 그 우열을 판정할 수는 없다.” 이중 『서상기』나 『수호전』은 명대에 나타난 소설이고 지식인이 남모르게 애독한 것인데 이탁오는 이것을 공공연히 경서의 『시경』에 견주었다. 관능 소설인 『금병매』는 그의 사후에 나타난 것인데 만약 그가 알았다면 틀림없이 이것을 높이 평가하였을 것이다. 이같은 자연주의의 입장에서 그는 좌파의 하심은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욕망 사욕을 긍정한다. “사사로운 욕구는 인간의 마음에 뿌리를 둔 것이다. 만약 사욕이 없으면 인간의 마음도 없을 것이다. 밭을 가는 것은 수확에의 사욕이 있기 때문이고 학문을 하는 것은 입신출세를 바라기 때문이고 관리가 관직에 힘쓰는 것은 봉록의 사욕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이고 가공의 설은 아니다. 사됨이 없음의 도덕론과 같은 것은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는다.”
c) 노장적 자연주의 – 퇴폐와 자멸에의 길
자연주의의 철저함은 유학을 훨씬 벗어나서 전통적인 노장의 자연주의로 복귀했다는 감을 들게한다. 본디 ‘동심’의 존중은 노자에서 나타나는 것이고 요순 등의 성인의 가르침을 부자연한 것으로 강하게 부정하는 것은 노장 사상에 일관해서 보여지는 것이다. ‘진심진인(眞心眞人)’의 강조는 장자, 특히 그 좌파라고 할만한 『장자』외, 잡편의 주장이었다. 인간 욕구의 긍정에 이르러서는 『장자』 도척편이나 『열자』 양주편에 나타나 있고, 자연주의가 최후에 행해진 것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이탁오는 강한 자기주장, 자아의식이 있는데 이것은 또 『장자』 외, 잡편의 사상이었다. ‘자적(自適)’의 사상이다. 이탁오는 “선비는 자기를 위해 자적에 힘쓴다. 자적하지 않고서 타인의 적(適)에 적하면 백이, 숙제라 해도 마찬가지로 음벽(淫僻)하게 된다.”라고 하는 것이 모두 『장자』에서 언급되어 있는 바다, 모든 권위를 부정해 안에 있는 마음의 만족을 구하고자 하는 것은 장자의 사상이고 그리고 그대로 이탁오의 입장이기도 했다.
물론 이탁오를 이같은 노장적 자연주의로 이끈 것이 노장사상의 영향이라고 할 수는 없고 명대에 넘쳤던 향락주의적인 풍조와 퇴폐의 현실이었다. 명말의 사회, 그것이 이탁오라하는 일개의 사상가를 빌려서 자기를 표현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퇴폐는 그 극점에서 파멸로 끝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탁오의 자살은 그대로 명대 사회의 자멸을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또 양명학의 종언을 의미한다.
청이 명을 멸하였을 때 명의 유신으로서 절조를 지켰던 사람들 중에 고염무나 황종희라 하는 인물이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명의 문화를 찬미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망국을 당연히 여기는 많은 이유를 들고 있다. 특히 양면학 좌파에 대한 비판은 엄하였다. 황종희는 양명학의 흐름을 저술한 사람이고 스스로 『명유학안(明儒學案)』을 쓰지만 이탁오를 묵살하여 그 전중에도 넣지 않았다. 명 왕조의 망국을 체험한 사람들이 얼마나 명말의 퇴폐를 증오하였는가를 알 수 있는 사례이다.
12. 청조의 사상
1) 청초의 사상계
a) 청조의 문화정책
명왕조는 그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구의 총수 이자성에 의해서 멸망되는데 이자성은 남하였던 만주족의 청군에 의해서 괴멸되고 1662년 청의 성조는 북경을 도읍으로 정하여 연호를 강희로 고쳤다. 이후부터 약 250년간, 중국은 만주족인 청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청은 몽고족의 원과는 달리 힘써 중국문화에 동화하여 중국의 사대부를 회유하는 정책을 취했다. 물론 모든 것을 자유로이 방임하였던 것은 아니고 중국인을 만주풍의 변발로 고쳐 청조에 해로운 문자나 문장이 있는 책을 파괴하며 그 저자를 벌하는 ‘문자의 옥’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같은 탄압정책보다도 회유정책에 중점을 두어싸. 무엇보다도 명나라의 유신으로 이적의 지배를 싫어한 사대부를 심복시키기 위해 중국의 전통적인 문화를 진흥하기 위해 대사업을 행하였다. 청조 초대의 천자인 강희제는 매우 드문 호학가로서 서양의 선교사에게서 천문학이나 수학을 배우기도 하지만 중국의 고전에 대해서도 강한 관심을 가졌다. 우선 최초로 착수한 것은 『명사(明史)』의 편집으로 많은 명나라 유신을 모아서 이 사업에 착수하였다. 이 책은 60년의 세월을 거쳐서 완성하는데 명나라 유신의 회유에 커다란 효과가 있었다.『강희자전(康熙字典)』 『패문운부(珮文韻府)』등의 서적도 이 시기의 산물이었다.
3대의 건융제도 강희제에 뒤지지 않는 호학 천자이었다. 유명한 『서고전서(四庫全書』 7100여권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1만권이 이 시기에 편집되었다. 이 같은 조정의 문화서업의 추진은 과거제도의 정비와 아울러 중국인의 청조에 대한 반감을 차제에 소멸시킴과 동시에 학술에의 관심을 높이는데 역할을 하였다. 청조의 학문을 대표하는 고증학이 건융에서 가경에 걸치어서 극성기에 달하여 세상에서 건가의 학이라고 일컬었던 것도 이같은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b) 청초의 건융년간에 있어서 고증학의 탄생
청초의 학자는 전대의 명의 여세를 받아서 대부분은 주자학 또는 양명학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청조고증학의 시조가 되는 고염무는 주자학의 계통에 속하고 황종희는 명말의 양명학자로서 알려진 유종주(劉宗周)의 문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인 모두 명말으이 주자학이나 양명학에 대해서 격한 비난 공격을 가하고 있다. 명대에는 주자학의 말류는 그 본래의 생기를 잃고 주자가 제창한 격물궁리를 실행하지 못하고 단지 이기심성을 공리공론하는 폐단에 빠졌다. 양명학도 또 똑같은 폐단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말기의 양명학좌파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퇴폐와 파멸의 길을 걸었다. 양명학을 비난하는 자 중에는 “명나라는 난적에 의해서 멸망된 것이 아니고 양명학에 의해서 멸망되었다.”라고 극론하는 자조차 있었다. 이같은 반성이 양인을 송명의 공리공론에서 벗어나 실학에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고염무(顧炎武1613~1682), 자는 영인(寧人), 호는 정림(亭林), 강소성의 소주 동쪽에 해당하는 곤산(崑山) 사람이다. 명나라 군사가 침공했을 때는 저항을 시도하지만 이루지 못하자 결국 재야에 묻혀서 생활하였다. 그는 송, 명의 학문을 하는 자가 오로지 심성을 공담해서 경서를 읽지 않았으며 그 결과 경서에 나타난 치국평천하의 길을 알지 못하고 사실을 벗어나 공리를 찾는 폐단이 있는 것을 통렬히 공격했다. 따라서 그가 이상으로 하는 학문은 『한서』에서 나타나는 ‘실사구시’ 즉 사실에 따라서 올바름을 구한다고 하는 것, 말하자면 실증주의에 선 ‘실학’이었다.
고염무는 천하를 주유해서 독서와 견문의 체험을 통해서 『일지록』을 서술하였다. 이것은 수필체의 책인데 엄밀한 연구의 정수를 보여준 것으로 경학은 물론 지리, 역사, 제도, 풍속 등의 넓은 범위에 걸친 고증과 비판으로 채워져 있다. 그 의미에서 이 책은 후의 청조의 고증학의 축도를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 저서에 『음학오서(音學五書)』는 음문을, 『금석문자기』는 비문이나 청동기에 보여지는 문자를 연구한 것이고, 어느 것도 경서의 연구의 기본이 되는 소학, 언어학의 선구를 이룬 것이다. 또 『천하군국이병서(天下郡國利病書)』는 청조지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황종희(黃鍾羲 1610~1695)는 자가 태충(太冲), 이주(梨洲) 또는 남뢰(南雷)라고 불렸다. 왕양명의 출생지인 절강성 여요현(餘姚縣)의 사람이다. 동림당사람으로 양명학자인 유종주에게 배웠다. 청나라 군사가 침입하자 노왕을 따라 항전하여 일본에 원군을 요구하기위해 나가사끼에 도래했다고도 한다. 명나라가 멸망한 후에는 절개를 지켜서 평생 관직에 오르지 않았다. “무릇 학문을 닦는데도 반시드 우선 경학을 익혀야 한다. 경학은 세상을 경하는 학문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학을 닦을 필요가 있다. 역사를 밝히는 것이야말로 현실에 동떨어진 유자라고 하는 비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사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의 저서 『명유학안』은 명대 사상이라고도 부를만한 것으로 현재에도 그 사료적 가치가 높다. 그의 문하에는 만사동(萬斯同), 전조망(全祖望), 장학성(章學誠) 등의 사학자가 배출되었다. 청조고증학의 사학에 관한 방면에서 황종희가 시조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경제사상을 서술한 것으로서는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이 있고 맹자풍의 민본주의를 철저화시키고 있는 것이 보인다. 고, 황의 양가에 비견할 만한 자로 왕선산(王船山이름은 부지)이 있다. 호남성 형양현(衡陽縣)의 사람으로 기개가 높아 청조의 세상으로 됨과 동시에 세상에 은거하여 만년에는 형양현의 석선산(石船山)에 거주하여 사십년간을 오로지 학문 저술 속에 보냈다. 변두리에서 은거한점, 집이 빈한해서 원고를 출판할 수 없었으므로 그 이름을 아는 자도 없었다. 이 때문에 청조 고증학에 미친 영향은 훨신 고, 황의 양가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약 170년 후에 동향의 사람, 증국전(曾國筌)에 의해서 출판된 후 증국번을 필두로 하는 호남지방의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이적을 배격하는 민족주의가 청말기 혁명가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또 그의 기의 철학이 유물론이라고 해서 최근 중국에서 높게 평가를 받고 있다.
고, 황, 왕의 소위 청조의 삼대가로부터 훨씬 뒤에 염약거(閻若璩1636~1704)가 나왔다. 그의 본적은 북방의 태원이지만 오대조때부터 남방의 회남으로 옮겼다. 사상적으로는 주자학에 속한다. 학문에 해박함은 청의 세가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 대신 전문적이고 정밀하다고 하는 고증학의 특징을 발휘하였다. 그 대표작은 『성서고문소증(尙書古文疏證)』으로 고금상서가 후인의 위작인 것을 정밀하게 고증하였다. 이 책이 청조의 고증학에 준 영향은 크고 종래의 무조건적으로 신봉 되었던 경전에 원전비판을 가해 진위선후를 결정하여 문자의 잘못을 바로 잡으려고 하는 의식이 일반적으로 행해지게 되었다.
이 염악거보다 훨씬 후에 호위(胡渭 1633~1714)호위(胡渭)가 나왔다 그는 절강성 덕청현(德淸縣) 사람으로 남인이었다. 그의 주저는 『우공추추(禹貢錐推)』와 『역도명변(易圖明辨)』이다. 전자는 『서경』 우공편의 지리를 고증한 것이고 후자는 북송의 주염계가 태극설의 근거로 삼은 『태극도』가 실은 도사인 진부로부터 전해진 것이고 본래의 도교 사상에 기초한 것을 밝혔다. 이 설은 이미 황종희의 아우 황종염이 제창한 것인데 호위는 이것을 더욱 자세하게 고증하였다. 이 설은 송학, 주자학의 기초의 하나를 동요시키는 것으로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2) 청조 중기의 사상계
a) 고증학의 전성이 가져다준 사상의 빈곤
청조의 학문을 대표하는 실증주의의 고증학은 건륭연간의 중엽 이후 가경(嘉慶) 연간에 걸쳐서 전성기에 들어가 세상에서 ‘건가의 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증학은 경학, 사학, 지리학, 천문역학 등의 분야에 광범위하게 걸쳐 있는데 그 중에서도 경서의 연구가 중심이었다. 이 고증학의 전성이 초래한 결과의 하나로 사상의 비곤이라하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본디 고증학은 문헌이나 사물의 전문적이고 정밀한 연구이고 청조 고증학의 성과가 후세의 중국 연구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반면에 고증학은 사상이 없는 학문인 것을 면할 수 없엇다. 명말 청조의 학자인 고염무나 황종희 등은 고증학의 시조가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주자학이나 양명학의 여운을 남기고 있고 또 명의 멸망을 체험하고서부터 그 학문은 경세제민의 뜻으로 지탱되었다. 그런데 건륭시대 중기부터 가경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점차 청조의 회유책이 성공하여 사대부도 청조지배로 관철되었고 정치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렸다. 그 결과 학문이 현신에서 벗어나 학문을 위해 학문을 한다는 의식이 강하게 되었다. 건륭가경 연간에 유일한 예외의 대진(戴震)의 『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疏證)』을 제외하고 철학적인 내용을 가진 사상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 이 대문이었다.
b) 가경(嘉慶)시대에 나타난 고증학자 –대진(戴震)의 『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疏證)』
건륭, 가경의 시대에 고증학이 가장 번창한 곳은 경제의 선진지대인 강남이었다. 그 강남지방 중에서도 소주를 중심으로 하는 강소성과 그 서쪽에 해당하는 안휘성에 학풍상 뛰어난 특색을 가진 학파가 생겨 각각 오파, 환파라고 불렀다.
오파(吳派)의 중심으로 되었던 것은 북조이래의 삼대의 고증학의 명가를 과시한 혜동(惠棟1679~1758)이고 그 영향을 받은 자로 강성(江聲), 왕명성(王鳴盛), 전대흔(錢大昕1722~1797) 등이 있다. 왕, 전 양씨는 경학 외에 사학에도 우수한 업적을 남겼다.
환(皖안휘성)파의 시조가 된 자는 강수(江水)인데 그에게는 여전히 주자학의 명성이 남아있고 이 파의 사실상의 중심은 그 문인 대진(戴震 1723~1779)으로 자은 동원(東原)이었다. 그는 뚜어난 고증학자임과 동시에 청조 중기에 드문 사상가였다. 그의 문하에는 『설문해자주』를 저술한 단옥재(段玉裁1735~1815), 왕염손(王念孫), 왕인지(王引之) 부자 등의 훈고음운학, 소위 소학의 대가들이 나타났다. 이들과는 별도로 강소성의 의정현 사림인 완원(芸臺 1764~1849)이 나오는데 그는 고증학자 중에서도 가장 고관에 이른 사람이고 각지의 총독을 거쳐 체인각대학사(體仁閣大學士)에 이르렀다. 스스로 널리 고증학을 연구함과 동시에 그 지위와 부를 빌려서 많은 학자를 모아 좋은 후원자로 되었다. 『십삼경주소교감기(十三經注疏校勘記)』나 『황청경해(黃淸經解)』 등의 편저는 그 문하 학자들의 공동 작업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또 자신의 저술로는 『성명고훈(性命古訓』등 송학을 비판한 주장이 있고 대진의 『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疏證)』의 영향을 생각케하는 점이 있다.
3) 청조 말기의 사상계
a) 공양학(公羊學)의 흥기
청조의 멸망까지 백년을 남긴 정도의 시대인 도광(道光) 연간에 들어와 아편전쟁이 일어나서 서양제국의 침략이 시작되고 국내에서는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 점차 천하가 시끄러워졌다. 이것은 학문의 세계에도 자연히 영향을 끼쳤다. 건가(乾嘉)의 고증학자는 오로지 경학, 사학의 연구자로서 서재에 갇히어 그 학문도 현실생활과 완전히 무관한 것이 되었다. 도광연간에 들어와 이 같은 학문에 대한 비판이 생기게 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공양학파의 흥기였다.
공양학은 오경중에 『춘추』의 세 전(三傳), 즉 좌씨전, 공양전, 곡량전 중의 공양전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본디 공자가 저술했다고는 하는 『춘추』의 경문은 춘추시대의 연대기인데 그 기술은 단편적으로 간략한 것이었으므로 공자의 저술의 의도가 무엇이었는가 분명하지 않았다. 이것을 해명하기 위해 쓰여진 주석서가 춘추삼전이었다. 세전 중에 『좌씨전』은 『춘추』를 주로한 역사로 해석해야 하지만 『공양전』은 정치이론을 서술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견해에 의하면 『공양전』은 정치이론을 서술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일견 간단해 보이는 『춘추』의 일언일귀 속에 공자의 만세에 통하는 정치이론이 감추어져있는 것이다 이 같은 입장에서 『춘추』의 ‘미언대의(微言大義)’, 즉 언어의 표면에 나타나 있지 않은 언어 밖의 위대한 의미를 보고자 한 것이 공양학이었다. 거기에는 해석자에 의한 자유로운 의논을 낳을 여지가 있었다.
『공양전』의 경문, 거기에는 그렇게 기괴한 설은 보이지 않지만 후한의 하휴(何休 129~182)가 쓴 주해에는 매우 독특한 설이 나타난다. 그것에 의하면 공자는 춘추시대를 삼기로 나눠 제1기는 쇠란시대, 제2기는 승평시대, 제3기는 태평시대로 하였다. 요컨대 역사는 시대와 함께 진보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2기까지는 중국과 오랑캐와 차별하지만 제3기는 태평시대에 들어가면 그 차별은 없어지고 인류는 서로 화합해서 한 집안처럼 된다고 주장한다. 이같은 기괴한 내용을 가진 공양학은 명백히 후한이래 전승이 끊어져버렸던 것인데 청조의 말기에 이르러서 또 부활하게 되었다. 엄밀한 사실을 존중하는 고증학의 입장에서 보면 자유로운 공상을 즐기는 공양학은 이단의 설일 것이다. 이 공양학파가 고증학파를 압도하였다는 것은 바로 고증학의 명맥이 다한 것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b) 청 말의 공양학자
청말의 공양학은 우선 강소성 무진현에서 시작되었다. 이 땅의 사람인 장존호(莊存號 1716~1788)는 건융연간의 사람인데 『공양전』의 경문을 근본으로 한 온건한 공양학을 닦았다. 그는 그 학문을 아들 장술조(莊述祖)에게 전하고 장술조는 그 외손자 유봉록(劉逢祿 1776~1829)에게 전했다. 유봉록은 경문보다는 부회의 설이 많은 하휴의 주해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여기에 공양학은 본래의 면모를 발휘하게 되었다.
이 유봉록에게 배은 자로 위원(魏源)과 공자진(龔自珍)이 있다. 위원(1794~1856)은 『예기』 예운편에 ‘소강(小康)’의 때에는 천자 제후의 신분을 세습해 군신의 차별을 중시하지만 ‘대동(大同)’의 때에는 군주는 모든 덕을 갖춘자 중에서 뽑히고 재산은 개인이 소유하지 않는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여 이 대동의 때이야말로 공자가 이상으로 하는 것이었다고 해서 이것을 『공양전』의 태평의 때에 해당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후의 강유위의 『대동서』의 사상의 모태가 되었다. 위원은 또 『성무기(聖武記)』, 『해국도지(海國圖志)』의 저서가 있는데 국방을 위해서 군비나 전술을 구체적으로 서술했다. 이러한 것은 아편전쟁이나 태평천국의 자극에 의해서 저술된 것이다.
공자진(龔自珍 1792~1841)은 정암(定庵)이라 부르며 절강성 항주사람이었다. 역시 유봉록에게서 공양학을 배웠다. 그는 『평균편(平均篇)』, 『농종일(農宗日)』등의 저술에 의해서 사회경제적 평등을 제창하고 특히 농촌에 있어서 토지균분택에 대해서의 구체적인 제안을 하고 있다. 또 그는 서북지방의 지리에 밝아 지리학자로서도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걸출한 문장가로서 그 문장에 나타난 강렬한 경세의 뜻은 후의 혁명가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최후로 공양학파에서 나온 혁명 사상가의 대표로써 강유위(康有爲 1858~1927)는 광동성 사람으로 양명학에서 공양학으로 전환하여 혁명사상가로 되었다. 다만 그는 이상은 이상, 현실은 현실이라고 하는 생각으로 당면한 공화제의 실현을 재촉하기보다는 청조를 중심으로 하는 생각으로 입헌군주제를 펴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판단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수차 광서제에게 상주하여 법제를 변경하여 국력을 강화하는 ‘변법자강’ 책을 권고하였다. 각 나라의 임입에 괴로워했던 광서제는 결국 여기에 마음을 움직여 1898년 그를 중심으로 하는 무술의 신정을 단행했다. 그러나 실권을 가진 서태후의 지지를 얻는 반대파 때문에 이 신정은 겨우 100일간으로 붕괴되고 강유위는 해외로 망명하게 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등이 있는데 이것은 모두 공양전의 사상을 근본으로 하고 공자가 종교적 권위를 가졌던 제도개혁자였음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강유위의 이상을 철저한 형태로 나타낸 것으로서는 역시 『대동서』를 들을 수 있다. 이것은 이상이라 하기보다는 공상에 가까운 것인데 현실주의자라고 일컬어지는 중국인에게도 이 같은 면이 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흥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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