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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역사와 문화 과제: 옥구 향교 내의 자천대와 문창서원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4. 5. 25.

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초짜 철학도의 분투기

 

 

과목: 역사와 문화

위 과목에
'역사적 인물과 문화'라는 과제가
있답니다.

역사적 인물 및
그와 관련된 문화적 흔적을
아울러 조사하여,
그 역사적 스토리를 보고서로
직성하는 것인데

저는 마침
내 고향 옥구읍 상평에 있던
어린 시절
나의 놀이터였던
옥구향교 내
자천대를 중심으로
과제를 수행했답니다.

나름 의의있었고
재미있었던 경험이었죠.

 

 

 

 

 

 

 

 

 

 

 

 

나의 주제: 최치원과 관련이 있는 <문창 서원>과 <자천대>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 광월길 33-50

 

문창 서원은 옥구향교 구내에 위치해 있고 자천대와 마주 보는 곳에 담장으로 둘러싸인 정면 3칸 규모의 건물로 당나라에서 돌아왔을 때 세상의 인심이 어지럽고 어수선하자, 자천대에 올라 책을 읽으며 근심과 걱정을 달랬다고 하는 최치원 선생을 모신 사당인데 시호인 문창후를 서원명으로 쓴 것으로 현재 걸려있는 문창 서원이라는 편액은 신해년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고 한다. 문창 서원은 숙종 때 건립되었다가 1868년 훼철되었다가 근래에 재건립한 서원으로, 서원 건축물 자체의 건축적 가치는 높지 않지만 최치원의 시호인 문창후를 서원명으로 사용하여 군산 지역에서 최치원과 관련된 여러 유적 중 하나로서의 의의를 가지고 있다.

 

특히 어린 시절 나의 놀이터였던 자천대가 도 지정 문화재였다니! 나는 중, 고 여름 방학엔 소설책을 들고 이곳에서 읽다 잠들곤 했었는데 당시에는 이곳이 최치원 선생과 관련된 역사적 사적지였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니 지금에야 죄송할 따름이고 마음으로나마 술이나 한 잔 드리고 싶은 것은 나의 무지에 대한 변(辯)이겠다.

 

나의 고향 옥구읍 상평리에 있는 자천대는 근대기에 다시 건립된 누정으로 최치원과 관련된 일화가 남아 있는 군산 지역의 대표적인 누정 건축물이다. 자천대는 현재 옥구 향교 경내의 남동쪽 가장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사실 옥구 향교는 조선 태종 3년(1403) 이곡리에 처음 지어졌고, 인조 24년(1646)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는데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옥구향교의 특색은 단군에게 제사 지내는 단군묘와 최치원의 영정을 모신 문창 서원, 세종대왕 숭모비(崇慕碑)와 비각이 있다는 점이며 대성전과 단군 성묘, 문창 서원 영역이 연속되어 있고, 그 남쪽으로 명륜당, 전사재, 양사재와 자천대가 함께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자천대는 옥구군 선연리의 동산에 있었으나, 1934년 군용 비행장 안으로 편입되자 당시 유림들과 최학수 옥구 군수가 이를 옥구 향교로 옮기고 경현재(景賢齋)라 하였다가 1967년에 다시 건립하였고 1984년 4월 1일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16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자천대는 근대기에 다시 지어진 누정 건축물로서, 오랜 역사적 건축물은 아니지만, 목조 부재가 곧고 반듯하며 구조 형식이 견실하여 전체적으로 간결하면서 균형 잡힌 모습이고 이 지역의 대표적인 누정 건축으로서의 건축적 가치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서 최치원과 관련된 여러 유적 중 하나로서의 의의 또한 간과할 수 없겠다.

 

전설에 따르면 자천대는 현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태어나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에서 사망한 통일신라 시대의 6두품 출신 문인으로 역사적 인물인 최치원(崔致遠 857년~908년 이후 (향년 51세 이상))이 당나라에서 공부를 마치고 신라에 돌아왔을 때 세상의 인심이 어지럽고 어수선 하자, 이곳에 올라 책을 읽으며 근심과 걱정을 달랬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당시를 되돌아보면 아마도 최치원은 당에서 배를 타고 왔을 것이고 선유도에 도착해 며칠 정도 이곳에 묵었을 확률도 있었을 것이라 짐작하지만 전설은 전설일 뿐, 물적, 역사적 실마리를 찾아보아도 크게 눈에 띄지 않는 건 사실이다.

 

자천대에 관련된 역사적 인물인 최치원 선생에 대해 조사하다가 크게 놀란 것 중의 하나는 선생이 한국 도교사에서 비조로 꼽힌다는 사실이었다.

 

최치원은 문성왕 19년(857년) 통일신라의 사량부(沙梁部)에서 최견일(崔肩逸)의 아들로 태어났고 아버지 최견일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원성왕의 원찰 숭복사(崇福寺) 창건에 참여했다는 행적이 전해진다. 최치원의 친형 현준(賢俊)이 있었으나 출가해 해인사로 갔기 때문에 집안의 사실상의 장남인 최치원은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다 12살 때인 868년 당나라 유학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벼슬길에 오르기도 했는데 가까이 지내던 고병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라는 비교적 높은 벼슬을 얻었고 24세 나이인 880년, 당시 당나라를 어지럽히던 황소의 난 토벌을 고병이 맡게 되자 최치원도 함께 참전하여 4년간 종군했으며, 881년 최치원의 명성을 천하에 떨치게 한 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썼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 최치원을 도왔던 고병이란 인물이 도교에 깊이 빠졌는데 최치원 또한 도교를 공부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병이 실각하자 최치원은 만 28세인 885년 당희종이 신라왕에게 내리는 국서를 가지고 통일신라로 귀환했으며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지은 책 20권을 헌강왕에게 바치고, 헌강왕과 정강왕, 진성여왕 시대까지 서라벌 중앙에서 시독(侍讀) 겸 한림학사(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郎), 지서서감사(知瑞書監事) 등의 벼슬을 지냈다고 전해진다.

 

자천대에 관련된 최치원 선생의 이야기와는 달리 선생은 신라로 귀국해 아주 홀대받진 않은 듯하다. 당시 신라의 임금이었던 헌강왕은 당나라 유학생 출신들을 중용하였고, 최치원이 맡은 벼슬 중 시독은 한자 그대로 국왕의 곁에서 경연을 담당했던 관직이었고 차후 한림학사로 임명되어 외교문서 작성을 담당하는, 국왕의 최측근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며 헌강왕의 신임이 두터웠지만 헌강왕은 최치원이 귀국한 지 1년 4개월 만인 886년 7월 승하했고, 이후 최치원은 자청하여 외직으로 나가게 되었고 한때 현재의 서산지역인 웅주의 태산군과 부성군 태수를 지냈는데 이 지역들은 해안 지방의 곡창 지역으로 중요도가 높은 지역이었고 천령군 태수시절에는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바치고 6두품의 한계인 아찬(阿飡)까지 임명되는 등 최치원에 대한 신라 왕실의 신임은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전해진다.

 

최치원은 귀국 후 어느 때인가 사신으로서 당나라에 다시 한 번 갔다온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록이 애매해 정확히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893년에는 사신으로 발탁되어 당나라로 떠날 예정이었는데 사실상 후삼국시대의 실질적인 시작으로 보는 892년 이후에는 전국에서 도적 떼가 늘어난 상황이라 서해로 이르는 길이 막혀서 이때는 가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당시의 신라는 말기 진성 여왕의 시대로 지방 호족들이 궐기해서 이를 사전에 미리 막아야 할 신라의 중앙정부는 제 역할을 완전히 상실했던 때였고 이미 양길, 기훤, 궁예, 견훤처럼 굵직굵직한 인물들이 궐기해서 신라 땅을 점령하던 때였고 특히 궁예와 견훤이라는 두 개의 큰 세력이 형성되어 후삼국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되는데 이러한 사실에 절망한 최치원은 조선 말, 학자 안정복(安鼎福)이 저술한 강목체(綱目體) · 편년체(編年體) 역사서로 편찬된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의하면 898년 무렵에 면직되었고 최치원이 스스로 신라 정계에서 은퇴한 게 아니라 지방 반란군인 왕건을 지지했다가 파직당해서 가야산 해인사로 갔다고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은 신빙성에 문제가 있어 확실하지는 않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김부식(金富軾) 등이 1145년(인종 23년) 완성한 삼국시대 사(史)인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최치원은 은퇴한 이후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지리산 등지를 돌아다니다 언제 사망했는지 알 수 없다고 했으며, 고려 이인로의 『파한집』에 의하면 그가 머물던 집에 신발 등이 그대로 남아있는 채 그의 흔적만 사라졌다고도 한다. 이를 근거로 후대에는 최치원이 가야산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광범위하게 생겨났는데 은퇴 후 전국을 유람해서 남산(경주), 합천의 빙산과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부산 해운대, 창원의 월영대 등에 그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최치원은 은퇴 후 남부 지방을 전전하다 사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사실 이 과제를 수행하며 나의 고향에 자천대와 문창 서원이라는 전설이든, 혹은 역사적 사실이든 간에 이런 건물들이 현존해 있어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후대에 어떤 이야기들로 전해질까, 실로 궁금해지기 시작했던 좋은 기회였음에 감사드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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